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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한 잔의 에스프레소가 떠올랐다. 검고, 진하고, 쓰고, 향기로운. 또한 나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렇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마시지 않을 것이다.- 경험이라는 점에서.
익히 알려져 있듯이, 토니 모리슨은 실존 인물인 '마거릿 가너'의 실화를 소재로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마거릿 가너는 농장 노예였는데, 자식들과 함께 도망쳤으나 도망노예법에 따라 주인에게 송환될 처지에 처하자 자식들을 죽이려고 했고, 한 명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재판 과정에서 "노예는 사람인가", 즉 노예가 사람이라면 가너는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노예가 단지 소유물이라면 재산을 잃어버린 것에 불과하여 무죄방면될 것이므로 법리적 논쟁을 불러 일으킨 위 질문이 많은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457쪽 해설을 참조하자). 그 때문에 오히려 가너의 변호인이 가너를 살인죄로 처벌해달라고 변론했다고 하니, 슬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현재'는 1873년부터 1874년으로, 세서는 딸 덴버와 단둘이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 124번지 집에서 살고 있다. 세서는 18년 전 농장에서 도망쳐 시어머니인 베이비 석스가 살고 있는 124번지로 왔다. 베이비 석스와 세서, 세서의 두 아들들, 막 기어다니기 시작한 딸과 막 태어난 갓난쟁이 딸(덴버)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꾼 지 불과 한달 만에 참극이 벌어진다. 그 후 아기 유령이 깃든 124번지는 집 나간 두 아들들과 세상을 떠난 베이비 석스의 추억을 간직하며 조용히 머물러 있다. 고인 물 같은 평화, 애써 막은 귀 같은 정적이 이어진다.
어느날 이 평화와 정적을 깨뜨리며 폴 디가 등장한다. 폴 디는 세서가 있던 농장, '스위트홈'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다. 그가 124번지에 나타남으로써 과거가 소환된다. 그리고 폴 디의 등장으로 쫓겨났던 아기 유령이 '빌러비드가 살아 있었다면 딱 그 정도 나이였을' 육신을 입고 돌아온다. 과거는 현재가 되고, 이제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빌러비드는 과거의 망령일 뿐이다. 독자는 '그 후로 세서와 덴버는 빌러비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론은 있을 수 없을 것임을 직감할 것이다.
노예의 삶이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새끼의 목에 톱질을 하는 어미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잘리고, 불태워지고, 새끼 치는 암퇘지와 같이 값이 매겨진 채 교미당하고, 재갈이 물려지고, 강간당하고, 구덩이에 갇히고, 채찍질당하는 삶에 자식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자식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절절한 심정 앞에, 감히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세서는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한다. "뭐가 더 나은지 나쁜지 아는 건 내 일이 아니야. 지금 어떤지를 알고, 또 내가 끔찍한 줄 아는 일로부터 그애들을 지키는 게 내 일이지. 난 그 일을 해냈어."(272쪽) 그를 비난할 수 있는 대상, 세서가 속죄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 죽임당한 자식, 바로 빌러비드다.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세서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세서에게, 그 순간 든 생각은 그저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뿐이다.
자식들은 그녀의 보배였다. 백인들이 그녀 자신은 더렵혀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보배만큼은, 마법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보배만큼은, 그녀의 순결한 분신만큼은 그렇게 되게 할 수 없었다. 머리도 발도 없이 표시만 남은 채 몸통만 나무에 매달린 시체들이 내 남편인지 폴 에이인지 고민하는, 그런 꿈으로조차 꿀 수 없는 꿈들은 더이상 안 된다. 애국자들이 흑인학교에 불을 질러 부글부글 달구어진 여학생들 가운데 내 딸이 있는지, 백인 무리가 내 딸의 은밀한 곳을 침범하고 허벅지를 더럽힌 후 마차 밖으로 내던지지는 않았는지 괴로워하는 꿈들은 더이상 꿀 수 없었다. -409쪽
소설의 현재는 노예제가 폐지된 후이므로 세서와 덴버는 더이상 도망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124번지 집에서 살며 세서가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을 꾸려나간다. 노예일 때보다는 확실히 낫다. 그러나 스위트홈이 예외적인 백인들의 자비로움 아래 유지되었듯이 124번지도 예외적인 백인들의 선의로 마련된 곳이다. 주인부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자 스위트홈이 즉시 끔찍한 곳으로 변모하였듯이, 124번지에 대한 선의도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스위트홈은 확실히 전에 있던 곳들보다 좋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한가운데, 자신이 아닌 자신이 둥지를 튼 그 황량한 마음 한가운데에 이미 설움이 자리를 잡아 버렸기에. 자식들이 어디 묻혔는지, 혹시 살아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설움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실 자신에 대해서보다는 자식들에 대해 더 잘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 지도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232쪽
오히려 노예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인간임이 입증되었음에도 여전히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그들을 뼛속까지 지치게 만든다. 흑인들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스탬프 페이드는 어느날 강에서 "아직도 머릿가죽이 고스란이 붙어 있는 젖은 곱슬머리에 묶인 빨간 리본"을 줍는다. 그는 신에게 묻는다. "대체 이 사람들은 뭐란 말입니까? 말씀해주십시오, 예수님. 그들은 어떤 인간들인가요?"(296, 297쪽) 폴 디는 스탬프에게 묻는다. "대체 검둥이는 얼마나 참아야 합니까? 말 좀 해보세요. 네?"(385쪽)
백인들은 겉으로 보이는 태도가 어떻든, 새까만 피부 밑에는 예외 없이 정글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었다. 항해할 수 없는 급류, 줄타기를 하며 끽끽대는 개코원숭이, 잠자는 뱀, 백인들의 달콤하고 하얀 피를 언제나 노리는 붉은 잇몸. 어떤 점에서는 백인들이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에게 흑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점잖고 영리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인지를 입증하려고 기를 쓰면 쓸수록, 흑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백인들에게 납득시키느라 자신을 소진하면 할수록, 흑인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더 깊고 빽빽한 정글이 자라났으니까. -327쪽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는 세서의 검은 눈동자가 독자를 빤히 바라본다. 당신이 감히 나를 심판할 수 있는가? 그 눈길은 이 책을 읽는 모든 백인들에게, 당신은 이 책임에서 자유로운지 묻는다. 빌러비드의 비석 앞에 속죄할 것을 요구한다. 세서는 이미 죄값을 치렀다. 이제 그들이 죄값을 치를 차례다.
시적인 문장들을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매끄럽게 잘 읽힌다. 오랜만에 소설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별 다섯개가 모자라다.
"사랑니인가보네. 아프지 않아?" 덴버가 물었다. "아파." "그런데 왜 안 울어?" "뭐라고?" "아프다면서 왜 울지 않느냐고." 그래서 그녀는 울었다. 식탁에 앉아 있던 그대로, 조그맣고 하얀 이를 매끈하기 짝이 없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피처럼 붉은 새가 나뭇잎 사이로 사라지고, 그러자마자 거북이들이 연이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이렇게 울고 싶었다. 세서가 계단 아래 물통 속에 서 있던 그에게 가버렸을 때 이렇게 울고 싶었다. - P222
"뭐가 더 나은지 나쁜지 아는 건 내 일이 아니야. 지금 어떤지를 알고, 또 내가 끔찍한 줄 아는 일로부터 그애들을 지키는 게 내 일이지. 난 그 일을 해냈어." "당신은 잘못했어, 세서." "거기로 돌아가야 했다는 거야? 내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로 돌아가야 했다고?" "방법이 있었겠지. 뭔가 다른 방법이." "무슨 방법?" "세서, 당신은 두 발 달린 인간이야.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숲이 생겨났다. 길도 없이 고요하기만 한 숲이. - P272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동전처럼 동그란 두 눈은 대담하지만 불신으로 가득차 있었고, 곡선이 뚜렷한 검은 입술이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커다랗고 튼튼한 이가 드러나 보였다. 상처받기 쉬운 성품이 콧대를 가로질러 뺨 위에 엿보였다. 그리고 그 피부. 잡티 하나 없는 얇은 피부가 경제적으로 뼈를 가릴 만큼만 덮여 있었다. 이제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쯤 되었으리라, 레이디 존스는 열두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짙은 눈썹, 갓난아이처럼 빽빽한 속눈썹, 그리고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발산하는 사랑에 대한 분명한 요구.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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