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경로로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되는가. 

비슷한 악조건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이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반면 어떤 이는 그대로 주저앉아 다시 비슷한 악조건을 만들어낸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지만 자신이 당한 부당함을 반면교사 삼아 더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발생할까? 그 선택을 만들어내는 건 뭘까? 


...유전자인가..?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인 유전자> 5장 '공격성'에서 '매와 비둘기' 비유를 들어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를 설명한다. ESS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으로, '개체군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개체들이 채택했을 경우 다른 전략보다 나은 어떤 전략'이라고 정의된다(112쪽). 


매와 비둘기의 예를 나의 의문에 적용해 보았다.

자신이 당한 대로 더 약한 개체를 괴롭히는 유형을 '매'(매야 미안..), 자신이 당해도 되갚지 않는 유형을 '비둘기'라고 하자.(도킨스가 든 예랑은 조금 다르다)

만약 모든 개체가 '매'로 구성된다면 끊임없는 괴롭힘이 연속될 것이다. 그중 확실하게 약한 개체가 있다면 그 개체는 당하기만 하다가 결국 빠르게 죽음에 이를 것이고 그 다음으로 약한 개체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생존율에는 별로 좋은 전략이 아니다. 

만약 모든 개체가 '비둘기'로 구성된다면 좋겠지만, "구성원들이 모두 비둘기가 되기로 합의하는 경우의 난점은, 그것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모두에게 이익이기는 하지만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 불행히도 비둘기로만 구성된 집단에서의 하나의 매는 엄청나게 유리하기 때문에, 누구도 매의 번창을 막지 못한다. 따라서, 이 합의는 내부의 반역자에 의해 깨지게 된다."(116쪽) 즉, 비둘기로 구성된 집단에서 한 개체가 매의 전략을 선택할 경우 그는 누구에게도 괴롭힘을 당할 염려 없이 모두를 괴롭히면서 약탈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매의 유전자가 확산될 것이다. 

결국 "매와 비둘기의 안정된 구성 비율"(115쪽)이 어느 지점에선가 생길 것이다. "ESS는 거기에 관계한 개체들에게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부의 반역 행위에 대한 면역성이 있기 때문에 안정된 것이다."(116쪽) 


대단히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결국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매와 비둘기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비둘기 쪽으로 선택하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비둘기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다. 인간은 단순화한 이론과 다르게, 비둘기끼리 연합하여 매의 공격을 막을 수도 있다. 


내가 받은 대로 행하는 사람은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내가 경험한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상상, 내가 보아온 삶의 방식 외에 다른 길이 있다는 상상, 내가 나의 부모보다 친구보다 이웃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상상. 



언제나 글을 썼다. 10대에는 종잇조각들, 상자, 맥주 받침 뒤에다 끄적거리곤 했다. 공책, 책 앞뒤에 붙은 백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급하게 찢어 낱낱이 흐트러진 종이 쪽지들로 가방이 꽉 차곤 했다. 영수증은 모두 펼쳐서, 납작하게 눌러 뒷면에 반 정도만 알아볼 만한 낙서로 뒤덮었다. (<페이드포>, 355쪽)


글의 힘. 상상의 힘. 그게 레이첼 모랜을 '성매매'라는 라이프스타일에서 끌어내 주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내면의 힘이 나온다. 설령 당장의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다른 세상으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얼마 전 아침에 첫째 아이가 짜증을 내며 울고불고 하다가, "빨리 준비해서 학교 가야 하는데..!"라며 더 울고불고 하길래, "진정을 해야 밥 먹고 준비하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괜찮아." 라고 하니 "책을 읽으면 진정 돼"라며 읽던 책을 붙잡았다. 그리고 금세 진정되었다.

여러분, 책의 효능이 이렇습니다. 

여기에서 얻은 엄마의 교훈

- 책 읽는 아이에게 뭘 시키지 말자. 짜증낸다. (X)

- 책 읽고 있을 때 뭘 시키자. 뒷얘기가 궁금해서 빨리 진정한다. (O) 

농담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읽고 쓰기 말고도 꼭 필요한 것이 있으니, '믿어주는 한 사람'이다. 레이첼 모랜에게 뒤늦게 나타난 이모와 고모라는 두 조언자는 그녀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회복의 여정은 길고 험난하다. 그래서 홀로 감당하기에는 무척 버겁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의 가장 존경받는 권위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말처럼 돌봐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길은 덜 외롭고 덜 고단할 수 있으며 인고의 시간도 줄어든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 211쪽)


아이들이 점점 커 가니 여러 가지 걱정이 든다. 학폭, 성추행 등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사건들은 끊임없이 터지는데, 언제까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인생에 어떤 일이 닥쳐올지 누가 알까. 시련이 닥쳤을 때 아이가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믿어주는' 한 사람으로서 곁에 있어줘야지.


어른인 우리의 역할은 아이가 할 일을 대신해 주거나 닥쳐오지도 않은 미래의 위험성을 예견하고 미리 겁주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환경을 구축하는 것, 그리하여 아이가 마음 놓고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호에 실패해 아이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거든 아이를 망가진 존재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내면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지혜로운 치유의 힘을 믿고 그것이 효율적으로 발현될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 270-271쪽)



참고로, 첫째 아이를 진정시켜 준 마법의(?) 책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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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14 15: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빵집> 저도 사서 짜증나고 초조할 때마다 읽어볼까 싶어지네요.

괭님 페이퍼에서 은오한테 보내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내면의 힘이 나온다. 설령 당장의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다른 세상으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하.. 이눔 내가 밀어줄 수는 없어도 믿어주는 사람은 되줄 수 있는데 안 써요. 안 써...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나 철들려나...?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괭님 육아 이야기에 왜 공감하며 읽었지...??;;

단발머리 2024-03-14 16:04   좋아요 5 | URL
그건 다 알겠는데요 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의 이 진지하고 우아한 페이퍼와 그 문장들에서 은오님을 떠올리는 건 뭐랄까..... 그 거시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관심을 넘어서는 그 무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3-14 16:09   좋아요 5 | URL
은오님은 잠자냥님과 연애를 시작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키워지고 있었다… 작가 꿈나무로… ㅋㅋㅋ

잠자냥 2024-03-14 16:11   좋아요 4 | URL
단발 님/ 원래 모든 읽기는 자기 경험과 관심사 기반으로 읽기 아닌가효? ㅋㅋㅋ 단발 님이 모든 책을 육아서로 읽듯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3-14 16:20   좋아요 3 | URL
잠자냥 관심사 : 은오
단발머리 관심사 : 육아
독서괭 관심사 : ESS

독서괭 2024-03-14 16:38   좋아요 3 | URL
엄머 저의 관심사 ESS 라니 갑자기 과잘알 된 듯한 착각이..ㅋㅋㅋ

단발머리 2024-03-14 16: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결국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매와 비둘기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비둘기 쪽으로 선택하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비둘기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다. 인간은 단순화한 이론과 다르게, 비둘기끼리 연합하여 매의 공격을 막을 수도 있다.˝

이 질문에 저도 공감합니다. 본성 vs 양육 논쟁은 워낙 오래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전 최근에는 결국 ‘부모가 중요하다˝ 이런 쪽으로 생각이 모이더라구요. 제가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찜해둔 책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의 저자가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운이 8할이다‘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이 분은 부모라는 환경에 더해 태어난 국가, 민족, 성별 그런 부분을 종합적으로 살피기는 하던데, 전 그것 못지 않게 사회 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밀고 나가면 결국은 ‘정치 체제‘가 중요하다 이런 결론으로 가더라구요. 독서괭님의 제안, ‘비둘기끼리 연합해 매의 공격을 막는 일‘을 저는 투표 참여, 공적인 영역의 시민 참여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묻히지 말라 했는데요, 친구가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기적 유전자>와 <호랑이 빵집> 둘 다 안 읽은 사람으로서, <호랑이 빵집>을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와 안정의 책 ㅋㅋㅋㅋ

독서괭 2024-03-14 16:42   좋아요 2 | URL
단발님, 공감해요.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만들어 줄 수 있는 환경에는 한계가 있죠. 결국 품을 떠나가야 하는데.. 이미 학교생활에서부터 사회생활이 시작되잖아요. 정치- 맨날 기사에 나오는 정치싸움만이 아니라,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나가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체제 중요합니다!!

여러분, 꼭 <호랑이 빵집>이어서 첫째가 진정한 건 아닙니다..ㅋㅋㅋㅋㅋ 하지만 좋은 책 같긴 해요. 표지부터 마음이 평화로워지지 않나요? ㅋㅋ (대충 설정만 알고 있는 사람)

다락방 2024-03-14 18: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빵집 찜합니다. 아이들 책 많은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이에게 미리 겁주거나 걱정하기보다 안전한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란 구절에 동의합니다. 단발머리 님 말씀처럼 그런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저의 투표가 중요하겠지만, 그렇지만.. 제 투표가 정말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독서괭 님과 단발머리 님이 정치에 입문하시면 좋겠습니다. 제 표를 받아주세요.

독서괭 2024-03-14 20:46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이세요. 사교계의 여왕님이 정치에 입문해서 다 쓸어버리셔야죠!! ㅋㅋ
그리고 호랑이 빵집은 아가조카에게는 이릅니다~ 초1 이상 수준이니 나중에 사셔요^^

새파랑 2024-03-14 2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아이는 독서괭님을 닮아서 책을 좋아하는군요. 진정한 이기적 유전자 입니다~!!

독서괭 2024-03-14 20:47   좋아요 2 | URL
책 좋아하는 유전자는 생존에 도움이 될까요? 🙄 ㅋㅋㅋ 저 닮아 책을 좋아하는 건 맞는 듯요^^

햇살과함께 2024-03-14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마법에 걸리고 싶은!
괭님 이기적 유전자 벌써 116페이지!

독서괭 2024-03-14 20:47   좋아요 1 | URL
노노 햇살님 벌써 155페이지입니다!!

햇살과함께 2024-03-14 22:03   좋아요 0 | URL
헉! 분발해야겠네요~!

건수하 2024-03-15 06:19   좋아요 3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엄청 많이 읽으셨…. 우리 3-4월 아니었어요?

미미 2024-03-15 21:21   좋아요 2 | URL
3-4월 두달간 인가요? 기뻐라!! ㅜㅜ

독서괭 2024-03-15 22:27   좋아요 3 | URL
네 두달 입니다! 그러나 함달달도 읽어야하고 4월 여성주의도서도 읽을 예정이라.. 바쁘네요 바빠!!

공쟝쟝 2024-03-15 01: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믿고, 지켜봐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나부터 되도록하겠습니다! 😤

독서괭 2024-03-15 22:27   좋아요 2 | URL
아이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서로 믿고 지켜봐주어요!

2024-03-15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5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