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세 권 갖게 되었다. '3기니'와 함께 실려 있는 두툼한 민음사판 <자기만의 방>이 첫번째, 민음사 쏜살에선 나온 얇은 판 <자기만의 방>이 두 번째, 열린책들 Noon세트에 포함된 것이 세번째.


민음사판 두 권은 번역자가 동일(이미애)하고 열린책들판은 공경희 번역이다. 읽는 건 이번이 2.5번째인데(민음사판으로 1번 완독 후 재독할 때 절반 정도 읽어서^^;) 이번에 어쩐지 더 잘 읽히는 것 같아 번역을 비교해 보니 차이가 있다. 거의 모든 문장이 미묘하게 다르고 확 다른 부분도 있다. 특히 공경희 번역이 단문을 더 많이 사용하고 좀더 구어체에 가깝게 해서 읽기가 매끄러웠던 것 같다. 


번역 비교를 위해 서론 부분을 인용해 본다.


그러나 그중 가장 흥미롭게 보이는 이 마지막 방법으로 그 주제를 고찰하기 시작하자, 거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연자의 첫 번째 의무를 완수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한 시간의 강연이 끝난 후 여러분의 공책 갈피 속에 숨겨진 채 벽난로 위 선반에 영원히 보관될, 순수한 진실의 알맹이를 전달해 주어야하는 임무를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견해로는 여성의 진정한 본성과 픽션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크나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 둘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문제의 결론에 도달해야 할 의무를 회피했고 따라서 나에게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라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방과 돈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최선을 다해 보여 주겠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사고의 궤적을 여러분 앞에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고 자유롭게 개진할 것입니다.    - 민음 쏜살판, 18쪽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마지막 관점에서 주제를 고심하기 시작하니 곧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리란 점이지요. 한 시간의 토론이 끝나면, 강연자가 알려준 순수한 진실 덩어리가 여러분의 공책 갈피에 담겨 영원히 벽난로 선반에 꽂혀야 합니다. 그게 강연자의 첫 번째 의무지만 난 그러지 못할 터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해봐야 사소한 부분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정도였습니다.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된다는 점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게 되겠지만, 그것은 여성의 본질과 소설의 본질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미제로 남깁니다. 나는 이 두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의무를 회피해 왔습니다. 내게 여성과 소설은 풀리지 않은 문제들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간 벌충하기 위해 어떻게 이 방과 돈에 대한 견해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힘껏 밝혀 보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최대한 온전하고 자유롭게 이 생각에 이른 맥락을 짚어 보겠습니다.   - 열린책들판, 8쪽



민음사판은 두 권이니 하나를 처분할까 싶었는데, 두꺼운 책은 '3기니'가 함께 실려 있으니 안 되고, 쏜살은 앞에 실린 이민경의 추천의 말이 좋아서 소장각.. 그냥 끌어안고 살아야겠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랬듯이, 모든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딛고 선 삶의 틈바구니에서 또 다른 삶을 퍼 올린다. 때로는 아직 오지 않은, 때로는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어떤 여성 혹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 자기만의 방을 가지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여성은 쉼 없이 상상했다. 각자가 피워 올린 허구에 현실이 화답하는 일이 과연 찾아올지, 만약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언제일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허구에 빚진다. 버지니아 울프 자신의 삶 역시 그랬다.   - 쏜살판, 6, 7쪽(이민경 추천의 말)


 얼마전 읽은 <올랜도>의 작품 해설에서 <올랜도>가 <자기만의 방>의 소설 버전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번에 <자기만의 방>을 재독하게 됐다. <올랜도>는 1928년, <자기만의 방>은 1929년에 출간되었다. <올랜도>를 읽게 된 것은 같은 해인 1928년에 출간된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을 읽었기 때문이다. 해설에서 이 책을 <올랜도>와 비교하길래 읽게 되었다. 이렇게 꼬리를 무는 독서는 흥미롭다.

 이번에 <자기만의 방>을 재독하니 <올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조금 감이 잡힌다. <올랜도>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 리뷰를 쓰기는 어려운 작품이라 백자평만 썼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통해 보여준 이상적인 소설가의 마음- 성별을 의식함으로써 야기되는 분노와 비탄에 휩쓸리지 않고 양성의 장점을 모두 가지는 -을 '올랜도'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로 형상화 한 것이다. <올랜도>는 주인공 올랜도가 '참나무'라는 한편의 시를 완성해 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에서 그는 성별이 바뀌기도 하고 신분이 바뀌기도 하며 300년에 걸친 시간의 흐름을 관통해 나간다. 




<올랜도>는 성별이 바뀌는 실험을 행한다는 점에서 성역할 고정성을 깨는 면이 있고 퀴어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현실의 퀴어 문제를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고독의 우물>이 FTM(트랜스남성)의 삶, 그가 겪는 실존의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나간 것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고독의 우물> 리뷰:  

https://blog.aladin.co.kr/703039174/12922963











얼마전 본가에서 챙겨 온 오래 묵은(안 읽은 채) 책들 중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책>이 눈에 띄어 목차를 보니, '여성' 항목의 두 번째에 <자기만의 방>이 자리하고 있다. 

첫번째는 메리 울스턴그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 세번째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네번째는 저메인 그리어의 <여성, 거세당하다>, 다섯번째는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다. 음 자기만의 방 외에 읽은 게 없군...


















울프 관련 책으로 읽고 싶어 찜해둔 책은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과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 

'3기니'를 읽으려면 <카탈루냐 찬가>를 먼저 읽는 게 좋다는 말에 읽고 3기니 재독하려고 사놨는데 못 읽는 중. 

오래 묵혀 둔<댈러웨이 부인>부터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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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09 13:1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3기니 이니까 <자기만의 방>을 세권 가지고 있어야죠 ^^
저는 이 책을 예전에 읽었는데 어려웠던 기억이 나네요 😅 이번에 저도 다시 읽어보려고요.

전 댈러웨이 부인하고 카탈르냐 찬가 아주 좋게 읽었어요 ^^ 이제 눈 세트 얼마 안남으셨겠어요~!!

독서괭 2021-11-09 13:34   좋아요 6 | URL
3기니이니까 세권?? 와 이런 신선한 해석이! 세 권 가지고 있음이 마땅하네요. 마음이 편안해졌어요ㅎㅎ
열린책들 공경희님 번역이 좋더라구요. 덜 어렵게 느껴졌어요.
저 눈세트는 <자기만의 방>이 처음입니다^^;; 이제 시작. 얇아서 금방금방 읽을 것 같지만 아니라는...!!ㅜㅜ

scott 2021-11-09 13: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괭님 울프 인용구문 부터 자기만의 방 출판본 번역 비교까지 읽으니 역자에 따라 느낌이 다르네요 저도 집중해서 읽는 작품들중 다양한 판본을 갖고 있습니다 울프여사의 댈러웨이 부인 강추!여성권리 옹호도 필독 ^^

독서괭 2021-11-09 13:35   좋아요 5 | URL
두분 다 댈러웨이 부인 좋았다고 하시니 빨리 읽어봐야겠어요. 여성권리 옹호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저 다섯권 모두~^^
전 다양한 판본을 갖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자기만의방을 세권이나 갖게 됐네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스콧님 서재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책이..!!

다락방 2021-11-09 13:56   좋아요 5 | URL
스콧님은 댁에 소장하고 계신 책이 몇 권이나 되나요? 일단 3천권은 넘기실 것 같은데요!

독서괭 2021-11-09 14:30   좋아요 3 | URL
스콧님 소장량 진짜 궁금해요 ㅎㅎ

다락방 2021-11-09 14:0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해전에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과 3기니 읽고 아 사람들이 왜 버지니아 울프를 그렇게나 외치는지 알겠다.. 뒤늦게 생각했어요. 저는 대학졸업하고 나서였나 여튼 이십대 중반즈음에 댈러웨이 부인 너무 책장 안넘어가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요.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그때 처음 읽었는데 그거 너무 재미없고 지루해서 그 뒤로 버지니아 울프를 아예 멀리했어요.

몇해전에 버지니아 울프 좋아한다고 하셨던 알라디너 분 활동하실 때도 아 그렇구나 하며 관심도 갖지 않았었는데, 최근에야 자기만의 방과 3기니 읽고 아아 나 바보 나 똥멍충이.. 바보바보바보바보 했었답니다. 댈러웨이 부인을 지금 읽게 되면 저도 재미있게 읽게 될까요? 올랜도 사두었는데 댈러웨이 부인은 저는 아무래도 다시 시도를 못하겠어요. 그 때 진짜 너무 지루했어서..

아 저 등대로 도 가지고 있으니 등대로나 올랜도로 다음 버지니아 울프를 만나야겠어요. 독서괭 님, 우리 울프 화이팅!!

독서괭 2021-11-09 14:35   좋아요 6 | URL
아휴 다락방님의 다정한 댓글 너무 좋네요♥
저도 이십대 중후반 쯤에 댈러웨이 부인 사서 읽으려다 몇장 못 읽고 놓은 후 여태 못 읽고 있습니다;; 그땐 왜이리 읽기 힘들어 했는데 이제는 좀 낫지 않을까..? 싶어요. 얼마전에 ‘라디오북클럽‘에서 최민석 작가가 댈러웨이 부인을 소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들으니 흥미가 생기더라구요. 이번에 <자기만의 방>을 재독하면서 아 정말 울프 글을 잘 쓰는구나,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등대로>는 단발머리님이 많이 어렵다고 쓰신 글을 본 것 같은데..!! 그래서 등대로 살까 하다가 그냥 있는 댈러웨이 부터 읽자로 된 거거든요. ㅎㅎ 다락방님은 이십대에 비해 지금은 독서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셨을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함께 울프에 도전해요~ 화이팅!! >ㅁ<

mini74 2021-11-09 14:5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방 세 칸짜라 집 마련하신겁니까 감축드리옵니다 ㅎㅎ 전 등대로 읽었고ㅠㅠ < 세월>에서 길을 잃은 ㅠㅠ 자기만의 방 읽어야 하는데 그러고 있습니다 ~ 그 와중에 독서괭님 고독의 우물 보며 군침을 ㅎㅎㅎ ~

독서괭 2021-11-09 16:12   좋아요 6 | URL
으아 <세월>은 더 어려운가 봅니다 ㅜㅜ <등대로>는 읽어내셨군요! 그렇다면 <자기만의 방>은 쉽게 읽으실 겁니다. 소설보다 에세이가 쉬운 것 같아요.
<고독의 우물> 두 권이라 분량이 상당하지만 재미있으니 꿀꺽 하세요~^^

건수하 2021-11-09 19: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3기니> 얼마전 새로 나온거 샀는데, 카탈루냐 찬가를 읽으면 도움이 되는 군요! (메모)

저는 <파도>도 넘 어려웠어요..

독서괭 2021-11-09 23:01   좋아요 2 | URL
오 찾아보니 문지에서 <3기니>가 새로 나왔군요! 저는 3기니에는 크게 감흥을 못 느꼈었는데, 어느 분이 스페인내전을 알고 보면 훨씬 흥미롭다며 <카탈루냐 찬가>를 추천해주셨어요.
<파도>도 어렵군요… 어려운 당신, 울프…

페넬로페 2021-11-09 20: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찌어찌해서 자기만의 방이 세 권이 되었어요. 열린책들 빨리 읽어야하는데 공경희 번역가의 글이 기대되네요~~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지 않았지만 저는 정희진 작가의 책보다는 자기만의 방이 훨씬 좋았던 것 같아요^^

독서괭 2021-11-09 23:03   좋아요 4 | URL
페넬로페님도 세권 가지고 계시다니 으하하 반갑습니다^^ 열린책들로 어서 만나 보세요~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전 전자책으로 보다가 하도 하이라이트를 많이 해서 에라 종이책으로 사자 하고 샀는데 못 읽고 있네요^^;;

그레이스 2021-11-09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3권 정도 있는것 같아요^^

독서괭 2021-11-09 23:45   좋아요 1 | URL
아니, 그레이스님도?!! 하이파이브 한번 하시죠(손)!

그레이스 2021-11-09 23:46   좋아요 0 | URL
🤚

공쟝쟝 2021-11-13 0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쏜살로 읽었고 그거 한권 있어요. 진짜 좋았는 데, 이민경님의 추천사 첫 페이지부터 오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아, 열린책들 번역 좋다시니 찾아볼래요. 그러나저러나 댈러웨이부인은 나만 힘든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합니다. 몇번 포기했다가 언제고 다시 읽으려고 드릉드릉 중인데, 또 댈러웨이 부인이 엄청 많잖아요? 어느 번역이 좋을까요? (여기서 물어보면 답이나온다는 듯이)

독서괭 2021-11-13 01:05   좋아요 2 | URL
이민경님의 추천사 참 좋더라구요. 열린책들 번역이 제게는 쉽게 다가왔어요! 댈러웨이부인은 어려운 책들 척척 읽어내시는 분들까지 포기하데 만드는가 봅니다.. 아 과연 읽을 수 있을 것인가..<버지니아 울프 북클럽> 샀으니 도움이 좀 되겠죠?
여기서 물어보시면 답이 나올까요? ㅋㅋㅋ 저는 열린책들로 갖고 있는데 번역이 좋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단발머리 2021-11-14 0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책> 제목이 약간 올드한데 그래도 확 관심이 생기네요 ㅎㅎ 알리스 책 읽은 것이라 한 번 더 반갑고요^^

독서괭 2021-11-14 10:21   좋아요 1 | URL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 이런 책 유행할 때 나왔던 것 같아요ㅋ 이런 책은 목록이 중요하지 내용은 별거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이 읽으신 단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