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독의 우물 1 ㅣ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래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소설이다. 주인공 스티븐이라는 인물이 섹스와 젠더가 불일치하는, 지금의 용어로 정의하자면 트랜스남성(FTM, 태어날 때 정해진 지정성별이 여성이지만 본인의 정체성은 남성인 사람을 말함)이라는 점에서 낯설고(해설에서는 이 작품과 같은 해에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와 비교하는데, 나는 아직 <올랜도>를 읽어보지 못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끝나지 않는 탐구와 지독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익숙하다. 이 작품의 큰 의미가 여기에 있다. (다수자의 입장에서) 낯선 존재가 나와 별로 다를 것 없는 보통 사람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 이 작품이 출간된 1928년에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이 작품이 1960년대까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금서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일단 읽어보면 전혀 외설적인 묘사가 없어 어리둥절 할 수도 있다.
여성 동성애를 사실적으로 다뤘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정서로서는 충분히 외설적이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 소설의 외설성은 급진적인 섹슈얼리티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성애로 방수 처리한 사회에 동성애라는 빗물이 스며들어 누수 현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 외설적이었다. - 작품 해설 중(404쪽)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라 평가받는다는 이 책으로 인해 법정에 서기까지 한 래드클리프 홀은 <고독의 우물>이 이성애 윤리를 표방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작품을 변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동성애라는 코드보다는 여성인 스티븐이 '감히' 남성 흉내를 내며 남성의 것인 여성의 사랑을 탐했다는 점에서 더욱 응징당한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남성이 배제되는 구조가 아니라, 남성성을 추구하고 남성사회에 편입되길 원하나 거절당하는 스티븐의 좌절과 스티븐의 그러한 남성성에 끌리는 여성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1940년대 이후의 게이, 레즈비언 세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 것이다.
스티븐과 같은 트랜스젠더에게 있어서 이런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외부 성기가 여성인 사람이 여성을 사랑하면 그는 동성애자인가, 아니면 스스로 남성으로 정체화하므로 이성애자인가? 그런데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할까?
사실 내가 LGBT+ 혹은 퀴어에 관한 주제독서를 시작하게 된 것은 성적지향(동성애/이성애)보다는 성적정체성에 대한 관심에서였고, 그 관심의 시초는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최초의 대법원 결정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때에는 그저 호기심과 소수자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연민 정도에 기초한 관심이었고, 그 후에는 "대체 왜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것이지?"하는 의문과 문제의식만 막연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에 관해 알아볼 기회가 생겼고, 2006년 이후 위 대법원 결정에 기초하여 사무처리지침이 생겼으며 그 내용이 문제되어 몇차례 개정되었고, 하급심에서 대법원 결정에서 요구한 "외부 성기 형성술" 없이도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결정이 내려지는 등의 변화가 있긴 하였으나, 지난 15년 동안 근본적인 발전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 자세한 내용은 나무위키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일단 사무처리지침이 '지침'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많은 판사들이 여전히 이를 허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해당 지침에서 규정한 내용들이 지나치게 엄격한데다가, '성전환증'이라는 병명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고[미국정신과 학회가 마련한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5판(DSM-5, 2013년)에서는 ‘성별 불쾌감(혹은 위화감, gender dysphoria)’이라는 용어로 개정되었다], 기존의 편견에 사로잡힌 일부 판사나 직원들로부터 모욕적이거나 수치스러운 질문을 받게 되는 등 문제가 많다. 특히 성별 정정 신청 과정에서 신청인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지정성별과 반대의 성별로 인식되고 있고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사회통념이 요구하는 관습적인 "여성" 혹은 "남성"의 모습을 최대한 모방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습에서 벗어난 모습을 한 트랜스젠더는 그의 정체성을 부정당한다. 만일 지정성별이 남성이지만 성적정체성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트랜스여성이, 숏컷에 보이쉬한 차림을 하고 여성파트너와 동거하고 있다면, 성별정정 허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숏컷에 보이쉬한 차림을 하고 여성을 사랑하는 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닌가?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로 보이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성별이분법에 기초하여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맨 처음 숫자로 규정되는 그 성별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중요한가? 많은 트랜스젠더, 특히 트랜스여성들은 '너무 여성적으로 꾸민다'는 이유로 "기존의 성별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꾸미지 않으면, "여성인 척 하는 남성"일 뿐이라고 거절당한다. 이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자신이 단지 자신답게 존재할 수 있는 것, 퀴어들이 바라고 주창하는 건 단지 그뿐일 수도 있는데.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면, <고독의 우물>의 주인공 스티븐은 부유한 귀족 가문의 유일무이한 자식으로 태어났다. 만일 그녀가 지정성별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녔다면, 그녀의 삶은 한없이 평화롭고 안온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사람이 단지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것. 이런 다른 조건들을 타고나지 않은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레즈비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스티븐의 친구로 등장하는 커플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주님이시여." 그녀가 숨을 헐떡였다. "우리는 믿사옵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당신께 아뢰었나이다. 우리는 당신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부활하시어 우리를 지켜주소서. 우리를 인정하소서. 오, 주여. 세상 모두 앞에서 우리를 인정해 주소서. 우리에게 존재할 권리를 부여해 주소서." -402쪽
작품 해설에서는 이 마지막 부분을 "자살을 암시하는 스티븐의 절규와도 같은 기도"(406쪽)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스티븐이 자살할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작가로서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 퀴어한 존재들을 세상에 인정받게 하리라는 그녀의 목표를, 끝내 이루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작가인 래드클리프 홀은 이 작품을 이후에는 더 이상 논란이 될 만한 작품은 쓰지 않았다고 하니, 이 작품에 관한 법적 공방 때문에 재판비용을 대기 위해 집을 처분하기도 했다는 걸 보면 이해는 되지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후대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는 걸 알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작품에 관한 여러 논란들(젠더, 섹슈얼리티 외에도 파시즘이나 인종 문제 등의 이슈가 있는 모양이다)이 있지만 모두 제껴놓자. 평생 남장을 하고 레즈비언으로 살았다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읽히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고통받는 한 인간을 보았을 뿐이다. 이 고통이 과연 정당한가?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함께 질문을 던져주기를 바란다.
※ 알라딘마을의 맞춤추천AI ㅈㅈㄴ님의 추천을 받아 내돈내산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