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기획자는 ‘그림자’다. 저자와 책이 빛을 보게한 ‘산파’이지만 뒤를 살펴야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존재다. 지난 25일 저녁 3명의 출판기획자들이 서울 서교동 홍익대 앞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우리시대’문고시리즈로 출판시장의 새 가능성을 연 김광식(43·책세상)주간, 소규모 출판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정은숙(39·마음산책)주간, ‘소설향’시리즈로 문학출판의 기반을 다져가는 김미숙(37·작가정신)주간 등 이른바 출판기획의 ‘뉴리더’로 불리는 면면들. 이들에게 ‘한국출판기획의 미래’를 주제로 좌담회를 갖겠다고 했는데, 첫 술잔이 돌자마자 “다 그만두고 ‘그림자들의 세상타령’으로 하자”고 우겼다. 좌담은 기획자의 꿈, 회한, 절규, 분노가 어우러진 ‘연극무대’가 돼버렸다.
난상토론에서 첫 ‘화살’을 맞은 사람은 김광식주간. 서로 휴가계획을 묻다가 김미숙 주간이 “직원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훈련시킨다면서요”라고 쐈다. 의외로 김광식주간이 순순히 자백한다. “못견뎌서 많이 떠나는 걸 보면 그런 모양입니다. 신입사원 뽑을 때는 늘 ‘당신이 알코올중독자였으면 좋겠다’고 하죠. 허허.” “술과 편집자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냐”고 되물었더니 모두 “그럼요”하는데 술에 약한 김미숙주간만 “제 스타일 나름”이라며 샐쭉해졌다.
출판계로 화제를 돌리자 예상대로 독자와의 ‘거리조정’이 난제였다. 정은숙 주간은 “출판행위가 독자들을 향해 ‘반보’(半步)앞서면 성공이라고 본다. 기획자의 당기려는 의도와 독자의 나가려는 의욕이 딱 맞아떨어져야지, 완전히 한 발을 앞서면 낭패를 본다”고 균형감각을 꼽았다. 여기에 김광식주간은 “긴장감까지 넣어야 한다”고 가세했다. 출판기획자가 계몽주의자여선 안되며, “철저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독자와의 거리가 가늠된다”는 것. 성에 차지 않았던지 “나는 독자들과 싸움을 걸고 싶다”는 말로 의미를 더했다. 김주간은 내친김에 “메이저 출판사들이 겉으론 ‘독자들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이것저것 모아 다원출판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 매출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있는 것일 뿐”이라고 성토한다.
올바른 의미의 출판 다양화는 기획자들의 활로를 찾는 토대다. 차별화된 소수 독자층을 겨냥한 특성화된 출판이 시장성을 가져야 출판인프라가 다져질 것이란 것. 김광식 주간은 “시장이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움직일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메이저들이 몸집을 불려가도 그들만으로 출판시장이 굴러가진 않는다”고 했다. 시장의 트렌드에서도 그런 가능성을 타진했다. “21세기 화두가 지식인과 대중의 화해, 종교의 화해, 환경과 문명의 화해라고 하는데 출판에도 그 부분이 중요한 시장이 될 것이고, 그것들은 종합출판사라고 해도 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것이 정주간의 전망. 김미숙 주간은 “도구는 컴퓨터이지만 최종 생산물은 아날로그 책”이라며 “브랜드 이미지를 차별화해 열성독자층을 확보한 작은 시장을 갖는 게 기획자들의 꿈”이라고 거들었다.
문학시장의 침체를 놓고선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김광식 주간이 뜸을 들이다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요. 그나마 남아있는 독자층을 잡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도 한국문학에 뛰어들기로 했어요”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때묻지 않은 평론가 그룹이 원고를 검토해서 안될 것 같으면 인세만 주고 출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가들의 작품성 검증을 철저히 할 것”이라고 복안까지 꺼냈다. 이에 정주간은 “문학시장이 죽은 게 평론가들의 문제, 또 출판사가 책을 너무 쉽게 출판해서가 아니라 ‘문학과잉’에서 정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일 수도 있다”면서 “작은 독자일지언정 그들을 유지시킬 작품의 질이 관건”이라고 반박했다.
김미숙 주간도 “인맥으로 얽혀있는 평단과 작가들의 현실을 깰 수 있느냐”고 고개를 저었지만, 김주간은 “평단과 작가가 긴장관계를 형성해야 상생의 길이 있다”고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규모가 작은 한국 실정에서 밀리언셀러가 나오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던 정주간이 “97년 외환위기때는 ‘이 시기만 지나면 100%가 괜찮겠지’했는데, 지금은 ‘10%만 살고 90%는 죽겠구나’ 싶다. 그래서 더 최악”이라는 말을 꺼내자 일순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도서정가제, 사재기, 온라인 서점, 그들 앞에 놓인 출판계 현안들이 도마에 올랐다가 차례로 호된 ‘매’를 맞았다.
타령이 3시간째에 접어들었다. 모두가 취기가 오른 표정, 이때다 싶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출판기획자는 누굽니까.” “이 기획자 시리즈 기사를 쭉 보니 모두가 성공신화에 매달려 있더군요. 출판기획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 돈입니까.” 김광식주간의 비판에 울분이 섞였다. “기획자란 총체적인 문화비평가여야 합니다. 반성적 사회로 가는 길잡이가 돼야 해요. 그 잣대로 기획자를 봐야 합니다”는 그의 말에 정주간이 “기획자는 책을 통해 세상을 편집하고 자기세계를 실천합니다.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기획력이 아닌 것이죠”라고 비판을 이어갔다.
위기를 피하는 방법 중 하나는 ‘차수변경’. 한바탕 설전을 정리하고 술자리를 옮겼다. 이들간에 동지감이 형성돼가는 듯도 했다. 그게 흥미로워 “출판기획자가 정당하게 대우받고 먹고 살만하냐”고 찔러봤다. 김미숙 주간은 “편차가 심하다. 노동력에 비해 대가가 합당한가도 늘 고민거리”라고 했다. 김광식주간은 “연봉 1억원의 기획자가 나올때쯤 한국출판에서 기획자시대가 열렸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불쑥 “그렇다면 출판기획자들의 ‘적’은 무엇이냐”고 던져봤다.
“내부적으론 기획자들의 맨파워가 약하다는게 문제겠죠.”(김광식), “출판관행과 몰이해 같아요.”(정은숙) 등이 나오다, 김미숙 주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술이 더 돌고나서야 그는 “사실 편집자들의 대우, 기획방향의 문제로 곧 그만두게 될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기획자들의 ‘적’중에 오너도 포함될 수 있음이다. 김주간은 “어쩌면 이게 독립의 길이고, 그림자들의 꿈을 빨리 실현하는 길일 수도 있다. 오히려 축하하자”며 분위기를 추슬렀다. 그들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현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들은 다시 어두운 거리로 몰려나갔다.
/오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