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다음과 같이 수학적 예술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제대로 검증된 수학은 냉엄한 아름다움과 엄격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불분명한 자연에 의지하지도 않고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적 도구도 없이 오로지 최고의 예술가만이 나타낼 수 있는 장엄한  순수함과  빈틈 없는 완벽함으로 만들어진 작품과도  같은 것이다." - P20

많은 사람들은 예술과 수학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여긴다. 수학에서 나타나는 차갑고 딱딱한 법칙과 논리적 엄격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열정과 같은 감정, 그리고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인 표현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 사이의 벽은 보기보다 그렇게 완고하거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지는 않다. 사람들이 수학과 예술 모두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강제성과 자유가 적당히 조화된 훈련과 안목이 둘 다 필요하다. - P29

"바흐를 듣기 위해서 마음을 여는 순간 아름답고도 자연스러운 규칙이내 마음속에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내 작품들은 마치 음악의 대위법처럼커다란 규칙에  맞추어 공간  안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체 논리의 상호작용, 환경과 절차를 만들어가는 혼합물이었다."고 페리는 말한다. - P183

구는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똑같이 보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대칭축이 있지만 사면체는 그 반대로 순수 조형물중에선 가장 적은 대칭축을 가지고 있다. 사면체에는 양면성도 있는데 스스로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은 사면체에 있는 네 개의 삼각형 면의 중심이  또 다른 사면체의 꼭지점이 된다는 의미다. 대조적으로, 육면체에 있는 각 면의 중심은 팔면체의 꼭지점이  되고 그 역도 성립한다. 따라서 육면체는 팔면체와, 그리고 팔면체는 육면체의 양면을 이룬다. 비슷한 관계가 20면체와 12면체에도 해당된다.
- P2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6
노먼 요피 외 지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시는 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군사적 보호의 핵심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원이 있는 곳이었다. 국가는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 체계였고, 그에 따른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의례, 행사, 물질문화가 도시의 진화와 함께 만들어졌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도시, 통치자, 노예, 불평등은 당연하며 영원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25


 케임브리지 세계사 6 <고대의 도시들 2 : 권력과 제국주의 Cambridge World History Vol. III>는 세계 여러 곳에서 생겨난 도시라는 공간에 표현된 권력(power)과 권력 집중화의 정점 제국(帝國 Empire)을 다룬다. '도시'라는 특정되고 한정된 공간에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한정된 공간적, 물질조건으로 인해 이들은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연결되었다. 고대의 도시는 이렇게 태어났다.


 그렇지만, 이들 도시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는 왕의 세력이 강했던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보다 하부의 엘리트 층의 권한이 더 강했다. 어느 도시는 보다 더 크게 더 오래 번성했지만, 다른 도시는 얼마 되지 않아 역사 속으로 소멸되어갔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고대의 도시들 2>에서는 일차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결정하는 요소로 '자연(nature)'과 자연이 만들어낸 기후를 말한다. 농경 중심의 도시국가에서 자연조건은 결정적이었으며, 여기에 따라 권력 관계가 설정되었고, 권력관계는 도시의 형태를 규정했다. 


 지도자, 권력,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은 우루크의 아이콘이나 텍스트에서 상당히 두드러진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인더스 지역에서는 그런 면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p52)... 아마도 이들 지역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겠지만, 인더스 지역의 다양한 공동체에서 엘리트 계층의 권력 및 권위가 훨씬 폭넓게 분배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같은) 단일한 "왕권" 중심의 행정 체계가 인더스 지역에서는 끝내 형성되지 않았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53 


 인더스와 갠지스의 물리적 및 문화적 풍경은 전혀 달랐다. 하나는 인더스 지역에서 넓게 펼쳐진 시공 경관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갠지스-야무나 평원의 도시가 밀집된 경관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소수의 몇몇 도시와 훨씬 더 많은 수의 소규모 정착지로 구성된 인더스의 시대는 700년에 불과했고,  그 뒤 인더스 전통은 쇠락하여 사라져버렸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66


 자연환경은 도시의 입지와 권력관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도시의 형태와 성격을 결정할 때에는 '전통'과 '건축'이 새로운 요소로 등장한다. 도시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라고 하는 이들 요소들은 의례(儀禮)를 만들어 내고, 의례는 정기적으로, 비정기적으로 공간속에서 재현되며 세대 내에서는 집단의 기억을 유지강화시키고 세대 간에는 전승되며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며 도시의 생명력을 이어갔다.


 카호키아의 몰락은 아마도 상당 부분 기억 작용(memory work)의 물질성(matceriality)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 작용의 물질성이란 물리적으로 표현된 문화의 근간을 말한다. 즉 모든 인류 문화는 (정치 제도, 정체성, 도시 구조 등등)는 기억 작용(사회적 기억을 드러내기 위한 물건의 생산, 공연, 의례, 혹은 기억의 제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뿌리를 기억 작용의 물질성이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질성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혹은 마을에서 전해지는 전통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256 


 공간의 목적은 도시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것은 도시 공간과 기념비적 건축물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분명 도시 공간의 감각적 차원도 존재했다. 도시의 물건, 도시의 물질적 특성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험은 사람들마다 달랐다. 그들이 누구인지, 도시에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이해와 경험의 성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도시 공간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도시에 알맞게 훈련되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세속적 감각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기념비적 기억으로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도시는 수많은 지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도시에서 익숙하게 길들여진 육체는 그것을 제2의 본성으로 받아들였다. 체화된 관념과 통치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정치적 권위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267


 도시가 내부적으로, 시간적으로 이같이 발달되었다면, 외부적으로 공간적으로의 확장은 제국(帝國)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만, 도시국가에서 도시가 왕국의 중심이었다면, 제국의 중심으로의 도약은 또다른 문제였다. 새로 병합된 지역의 중심으로도 자리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로서 아슈르, 니네베, 로마 등 제국의 수도는 새로운 신전(神殿) 건설로 끊임없이 건축되어야 했다.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공간적 확장을, 제국의 이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재건설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은 제국의 수도들은 끊임없이 바뀌었음을 <고대의 도시들 2>는 보여준다.


 도시국가(아슈르 Assur)에서 아시리아(Assyria)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주민의 생활에는 뚜렷한 변화가 생겨났고, 도시에는 왕국의 수도라는 성격이 부가되었다. 예전의 전통적인 수도 아슈르는 더 이상 왕국의 정부 소재지가 아니게 되었고, 몇몇 왕들이 아시리아 핵심 지대에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인구 압력이 높아졌고, 경제가 성장했으며, 안전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리고 왕국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적 수요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못지않은 아시리아 왕들의 욕망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라이벌이었던 바빌론(BAbylon) 왕국을 규모나 화려함, 그리고 종교적 명성에서 능가하고자 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318


 제국의 도시들은 거대한 도시 계획으로 다른 도시들과 달리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광장, 시장, 도로, 정원, 놀이 공원, 성문, 아치 등은 기능적 역할뿐만 아니라 상징과 홍보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거대 규모의 인원이 종교 및 정치 행사에서, 상거래에서, 축제 혹은 여흥을 즐기는 과정에서 이러한 시설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상업과 사회적 교류도 수도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활동을 위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도시의 우수성은 이미 기념비적 건축물과 세련된 예술 작품으로 충분히 과시되고 있었지만, 여기에 덧붙여 굉장히 넓고 인상적이며 잘 정비된 대중적 공간을 통해 도시의 위용은 더욱 빛났다. 기념비적 건축물과 잘 정돈된 도시 구획을 나누는 도로는 여느 도시보다 더 넓고 튼튼하게 건설되었다. 도로들은 궁전, 사원, 피라미드, 성문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대규모 행진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01


 제국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구성원을 함께 묶어내는 일이 아마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정복 당시에는 강제와 위협이 결정적 수단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는 그 무, 즉 전형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성과 없이 오래 살아남을 제국은 없었다. 권력 중심부에서는 제국의 모든 구성원에게 신앙을 합법화 및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407


 <고대의 도시들 2>에서는 이처럼 도시의 탄생과 지속 유지, 발전과 쇠퇴에는 자연과 인간문화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합이 적절한 시대의 변화에 맞았을 때 도시는 번성했고, 그렇지 못했을 때는 쇠퇴하고 사라졌다.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 1889~1975)는 '도전과 응전 challenge and response'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지만, 응답에 대한 정답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기 다른 환경에 적절한 대응이 문명의 존망을 결정한 역사 속에서 플라톤(Platon, BCE 428 ? ~ 348 ?)

이 <국가 Politeia>에서 제기한 '최선의 정체(政體)'에 관한 논의를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상적인 정체가 있을까. 그런 이데아(Idea)가 아닌 오직 민의(民意)만이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이와 함께 우리가 공식적으로 알고 있는 '중앙집권화'가 과연 정체의 발전형태인지에 대한 물음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정치요소들이 당시에는 일시적인 약속 또는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권(自然權, natural rights)으로 인정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한 답은 이후 역사를 통해 보다 상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기존 고고학에서 말하는 도시의 기준은(그리스 도시들만 예외로 하고) 다음과 같았다. (1) 화려한 궁전에 거주하고 제한된 세습 엘리트에 속한 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2) 중앙 통치 기구 혹은 강력한 종교 기관(국가 종교)이 존재해야 한다. (3) 엄격한 위계질서에 입각한 행정 체제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 고대 문명과 관련한 여러 가지 선입관이 형성된 첫 번째 이유는, 동양은 전제 군주의 횡포 아래 놓여 있었다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오랜 유산 때문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동양(East)은 강력하고 폭압적인 전제 군주나 성직자에 의해 통치된 "타자(other)"였던 것이다(p144)...  두 번째 이유는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투입된 고고학의 역사 때문이었다. _ 노먼 요피, <고대의 도시들 2> , p146

제니-제노에서는 국가와 유사한 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시가 형성되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명하복과 엘리트 주도의 정치 행위가 도시를 지배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왕, 사원, 궁궐 등을 볼 수 없었으며, 엘리트 계층조차 분명히 확인되지 않았다. 니제르강 중류 지역에서 기원전 제1천년기 말엽 및 그 이후 시기 도시의 정치/경제 조직은 수평 연결(heterarchical) 구조였다. 즉 집단별 정체성은 구분되었지만, 때로 서로 중첩되기도 했지만, 권위의 영역은 전적으로 상호 작용의 과정에 놓여 있었고, 왕과 백성의 수직적 위계질서나 일방적 정보의 유통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 P123

권력의 중심이 동시에 다원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의 대규모 협력과 조정이 필요한 활동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더스 지역에서 도시를 형성한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거대한 공공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노동력을 조율해야 했다. 그래서 방대한 규모의 도량형 표준 제체를 발달시켰다. 이를 통해 인더스 지역의 정착지들 사이에 경제적 교류가 가능해졌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상품이 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도시 공간은 성공적이었고, 도시의 주민은 조직 구조와 화해 조정 시스템을 만들어서 수백 년 동안 도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의 성공과 회복력은 오히려 경직된 조직과 관계의 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다. - P154

도시라면 어디서나 상상력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전설과 전통과 제도를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계획할지는 상상력에 달려 있다. 상상력은 유형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무형의 과정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능력 범위 내에서 계획을 세우고, 경험을 하고, 상상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명백한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다.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도시의 지속성은 도시 설계에 영향을 받는다. - P281

주기적으로 조공 물품이 수도로 흘러들고, 그에 따라 의례와 정치적 과정을 통해 소비가 되면서 메소아메리카 전체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조공품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테노치티틀란 반경 400킬로미터 이내에서 움직이며 멕시코 평원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 때문에 아스테카의 배후지는 주식 작물과 부가 고갈되어 자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조공 체계를 따라 물품이 흘러드는 반대편 끝에서는 엄청난 수량의 다양한 물건이 멕시코 평원의 인구를 풍요롭게 했다. 이데올로기적 의례 과정을 통해 잉여 물품이 흡수되었고, 특히 사치스러운 의례와 축제의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물품이 소비되었다. - P340

초기 도시의 성장과 규모, 왕궁의 출현과 고도로 계층화된 작업 구역 및 묘지 구역, 거대 구역을 둘러싼 성벽 등을 근거로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왕과 (국가 수도로서의) 도시의 거대한 권력을 설명하게 된다. 그러한 설명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왕의 권력이 경쟁 상대 없이 절대적이었다거나 그 권력을 통해 정부와 도시가 안정화되었다고 곧장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게다가 수명이 길지 않았던 도시들, 그리고 상나라 말기의 왕들이 배후지를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복전에 나서야 했던 일을 고려할 때 기원전 제2천년기 중국 도시의 정치 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 P4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체제의 위기는 세계체제 전반의 기회이며, 어쩌면 특히 아프리카 경우에 그러하다. 현 세계체제의 진행 과정자체가 위기를 악화시키며 해소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론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한,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어떤 혼란, 다시 말해 25~30년에 걸친 세계적 대혼란을 수반하며그로부터 어떤 새로운 종류의 질서가 나올 것이다. - P124

"무엇보다도 공에서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될 것이다.
재화와 서비스, 권력의 좀더 공평한 분배는 우리가 새로운세계체제(들)을 창조하는 데 토대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시간 지평은 자연적·인적 자원의 이용이라는 관점에서의 시간 지평보다 더 길어야만 한다. 이러한 종류의 재구성에서 아프리카는 주도적 역할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아프리카는 우리의 근대 세계체제에서 하나의 배제 지역이었으며, 향후 25~50년에 걸쳐 계속 진행하는 세계체제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메커니즘들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을 한층 더 배제하는 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만일 아프리카인들이 현재 정의된  대로의  세계체제 안으로 편입하겠다는 요구의  수렁에 빠진 채로 머문다면, 그들은 풍차를 상대로 싸우는 꼴이 될 것이다. 만일 아프리카인들이 단기적인 지역적 개선을 중기적인 가치 및 구조의 변형과 결합하는 길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아프리카를 도울 뿐만 아니라  그밖의 우리 모두를 돕게 될 것이다. 나에게나 다른 비아프리카인들에게나 구체적인 어젠다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지 말라.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공은 바로 아프리카의 구장에 있다. -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60년대는 실로 현대 유럽에는 엄청나게 중대한 10년이었으나, 당시 중요하게 보였던 모든 것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의복이나 생각에서 자족적인 인습 타파의 충동은 매우 일찍 시작했다. 역으로, 1960년대 말에 정치와 공무에서 시작된 진정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몇 년 더 걸린다.

유럽의 공립 중학교, 리세, 김나지움은 지배 엘리트 양성소였다. 한때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차단되었던 고등 교과과정이 이제 증가 일로에 있는 모든 사회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개방되었다.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중등학교에 진학하여 과정을 마쳤고, 그 결과로 그들의 세계와 부모들이 아는 세계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60년대 주류 음악 문화가 대체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면, 적어도 마약과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이 또한 대체로 스타일의 문제였다. 전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전보다 더 이른 나이에 부모를 떠나 살았다. 그리고 피임약은 과거보다 더 안전하고 편리해졌으며 합법적이었다. 영화와 문학에서 육체를 공공연히 노출하고 무절제한 성적 방종을 표현하는 일은 적어도 북서유럽에서 더욱 흔해졌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옛 세대는 성적 구속이 철저하게 무너졌다고 확신했고, 자녀들은 기꺼이 그 악몽을 키웠다. 사실 60년대의 〈성 혁명〉은 남녀노소를 떠나 압도적인 다수에게 일종의 신기루였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도를 받은 문화인류학자들은 언어학 분야의 초기 이론을 차용하여 여러 사회에 걸친 변이와 차이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새롭게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관행이나 문화적 징표가 아니라 내적 본질, 다시 말해 인간사의 깊은 구조였다. 사람들이 〈구조주의〉라고 부른 이 같은 경향은 강한 매력을 지녔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의 〈아날〉학파와 계통의 유사성을 지녔다.

제3세계 폭동의 폭력은 해방의 폭력이었다. 장폴 사르트르는 1961년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에 쓴 그 유명한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식민주의 혁명의 폭력은 〈자기 자신을 재창조한다. ……유럽인을 쏴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이며 압제자와 압제당하는 자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것이다. 죽은 자와 자유로운 인간이 남게 되며,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밑에서 국민의 땅을 느낀다.〉

권력과 권위의 편에서 보면, 학생들은 지식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세력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신좌파의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한 집단의 사회적 기원이 아니라 권위의 제도와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강의실은 그러한 일을 시작하기에 기계 공작소만큼이나 좋은 장소였다.

60년대 동유럽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 논쟁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다. 일부 당 지도자들은 과거의 기술적 오류를 인정할 만큼 충분히 실용적이었다(또는 그 정도로 크게 걱정했다).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 체코 지도부조차 재앙에 가까운 제3차 5개년 계획이 절반쯤 진행된 1961년에 이르면 더는 중공업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계획이나 집단적 소유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인 은의 세계사 - 1500~1800년, 아메리카의 은은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장문석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레알은 약 3.4그램이었으므로 8레알 은화는 27~27.5그램이었는데, 이는 굴디너보다는 가볍고 초창기 탈러와는 동등한 무게였다. 순도는 천분율로 930.555퍼밀이었으므로 순은 함유량은 약 25.5그램에 달했을 것이다. 두께는 약3밀리미터였고 지름은 40밀리미터였다. 그러므로 이 은화는 대형 은화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몇몇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 형편없이 주조되어 쉽게 부러지는 나쁜 주화였다. 그럼에도 이 은화는 엄청난 양으로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96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스페인 은의 세계사 Conquistadores, pirati, mercatanti: La saga dell'argento spagnuolo>는 페소(peso)라 불리는 16~17세기 기축 통화였던 8레알 은화를 다룬다. 그렇지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을 실증이라도 하듯, 세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8레알 은화는 양질의 화폐가 아니었다. 조악한 품질에도 불구하고 레알화가 표준이 되었던 것은 거대 은(銀)의 생산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지속적인 공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8레알 은화의 힘이 본질적으로 물량 공세에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에 국제 무역의 거대한 발전은 레알 은화가 세계 각지로 대량으로 확산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 국제 무역이 도달한 수준이 유지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대량의 레알로 대표되는 유동성이 시장에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만일 레알이 거부되어 유통량이 감소한다면, 국제 무역은 급격한 쇠퇴를 감수해야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9


  아메리카 대륙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식민 영토를 가졌던 스페인이었기에 수입된 은은 곧바로 제국 전역으로 흩어져 공급되었는데 제국에 공급된 은은 오늘날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에 견줄 정도로 빠르게 회전되었기에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스페인 왕실은 검소한 검은 색의 의상을 선호했다지만,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그다지 절약하는 편은 아닌듯하다.


 왜 스페인은 식민지들이 공급해 준, 또 계속해서 공급하게 될 이 막대한 양의 은을 잃어버렸을까? 아메리카에서 스페인에 도착한 보물 중 약 75~80퍼센트가 사적 거래로 획득된 것이었고, 나머지 20~25퍼센트만이 왕실 수입, 즉 신민들의 광산 활동과 물품의 수출입 관세, 기타 다양한 증여에 대해 징수한 세금 수입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알마덴 광산의 수은 판매 수입과 왕실이 도처에서 푸거 가문과 싸우며 확립한 독점체제를 통해 발생한 판매 수입이 덧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스페인 왕실은 줄기차게 빚을 지곤 하는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왕실 소속의 보물은 통상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비되고 말았다. 왕실의 채무가 무엇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군대를 유지하느라 발생했으므로 왕실이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지불한 보물들은 스페인에서 빠져나와 교전 구역에서 재등장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4


 마치 오늘날의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미 FRB(Federal Reserve Board, 연방준비제도)처럼 막대한 은을 보유한 스페인은 세계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16세기 기축통화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몰락 또한 예정된 것이다, 책의 본문에서 치폴라는 피셔의 교환방정식(Quantity theory of Money)을 통해 이를 뒷받침한다.


 은(銀)은 국제 시장에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부여한 재화이자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가지려고 한 재화였다. 바로 이 때문에 스페인은 아메리카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건네받아 인적 자원으로나 물적 자원으로나 보잘적없던 나라(카스티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신학자 토마스 데 메르카도는 1569년에 올바르게도 "세비야와 대서양 연안 스페인은 예전에는 세상의 끝이었으나 이제 중심이 되었다."라고 쓸 수 있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83


 교환방정식 MV=PY 에서 M : 통화량, V : 화폐유통속도, P : 물가수준, Y: 실질소득을 의미한다고 했을 때, 은의 공급과 세계 각지로의 활발한 공급은 각각 통화량 M과 화폐유통속도 V를 증가시킨다. 이에 대응해서 실질소득이 충분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결국 물가 상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메리카로부터 은을 수입해 구입한 물품을 다시 아메리카로 보내야 하는 스페인으로서는 교역조건이 불리해지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결국 더 많은 은을 식민지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스페인의 식민지 수탈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었고, 생산량이 한계점에 이르는 순간 스페인 제국은 급격하게 붕괴되고 만다. 스페인 제국은 아르마다(Armada)가 칼레에서 불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포토시(Potosi) 은 광산의 산출량이 감소하면서 몰락한 것이다.


 지금 경제 균형 상태에 있는 A국, B국, C국 세 나라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특정 시점에 A국에서 통화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균형 상태가 깨졌다고 가정하자. 만일 문제의 나라가 그들의 생산 체제로는 유통 화폐량이 증가한 만큼 총생산량을 증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면, 경제 이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는 A국은 가격 상승과 B국, C국으로의 귀금속 유출을 겪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B국, C국으로부터 A국으로 재화와 용역의 수출이 증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막대한 은을 소유한 스페인에서 일어난 일은 이러한 이론 모델을 완전히 증명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06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이처럼 중상주의(重商主義) 제국주의 국가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처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긴밀하게 엮이지 않은 과거 16세기 기축통화국은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우리는 스페인 제국과 8레알 은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을 확인 한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스페인 이후 헤게모니(Hegemony)를 잡은 네덜란드와 영국은 식민지를 보다 현명하게 수탈한다. 플랜테이션(Plantation)으로 화폐가 아닌 생산물을 식민지로부터 들여옴으로써, 화폐수량방정식의 대변을 증가시키고, 차변의 금융부분은 중앙은행의 통제 하에 두면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활용하며 제국주의 통치수단을 한 단계 발전시켜 나갔다.


 16세기와 17세기의 국제 무역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은화로건 은괴로건 멕시코와 페루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한 대량의 은이 다시 스페인에서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유럽 각지로부터 많은 양의 은이 다시 동양으로 향했고, 궁극적으로 인도와 중국에 기착했다. 거꾸로, 대량의 아시아 생산물이 유럽으로 향했고, 대량의 유럽 생산물은 다시 아메리카로 갔다. 주로 8레알 은화로 대표되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은 이와 같은 무역체제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러한 체제는 적절한 유동성이 결핍되어 있던 중세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21


 이처럼 <스페인 은의 세계사>를 통해 16세기 세계 경제의 단면과 함께 중상주의 제국주의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의 자원, 아프리카의 인력 유출이 이 대륙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오늘날 세계 체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스페인 은의 세계사>는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1492년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의 항해가 만들어낸 문명간의 만남은 <1492: Conquest of Paradise>의 OST처럼 장중하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체제의 서막이라는 점은 오늘날 세계화(gloabalization)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알려준다...


 점점 더 많은 8레알 은화가 시장에 쇄도함에 따라, 점점 더 이 화폐는 환대받고 선호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유럽인들이 은을 지불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산품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 비유럽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레알 은화를 소지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구매력을 소유했다. 그 반면, 레알이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레알 은화는 유럽 민족들에게 동양과의 무역을 현저하게 팽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111


 정복자들의 용기와 근면함, 과감함과 희생정신은 그들의 원주민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잔혹함, 비인간성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적어놓은 항해일지의 명시적인 기록들에 따르면, 그가 자신들의 숙원이었던 운명적인 항해를 완수했을 때 그의 궁극적인 항해 동기는 명백히 금으로 가득 찬 땅의 발견과 정복에 있었다. 이 제노바 제독의 기록들에는 "금"이라는 표현이 강박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도돌이표처럼 등장한다. _ 카를로 M.치폴라, <스페인 은의 세계사> , p41




우리는 스페인에 유입된 모든 은 - 은괴, 식민지에서 주조된 은화, 스페인에서 주조된 은화 - 중에서 매우 적은 양만이 스페인에 남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양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밖으로 바져나갔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중상주의 신조가 우세했던 시대에 일어난 이렇듯 지속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은 유출은 각별한 관심 속에서 평가되었다. - P103

중국에서는 그들이 귀금속으로 직접 주조한 화폐가 없었으나, 은은 은괴나 외국에서 수입한 주화의 형태로 풍부하게 유통되었다. 중국인들은 은으로 지불할 필요가 있을 때면, 가위로 은괴나 8레알 은화 등의 주화를 편리한 무게만큼 조각들로 잘라냈다. 각 조각은 무게에 상응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해, 중국에서 은은 화폐라기보다는 물품으로, 즉 무게 단위로 다루어졌다 - P118

식민지 정착과 인적 이동에 대한 통제 조치는 매뉴팩처와 일부 농업 생산물의 식민지 이식에 대한 통제 조치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즉 스페인 정부가 정복 초기부터 행했던 엄격한 일체의 통제 조치들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로 오가는 일체의 물품 교역과 인적 이동을 모국 스페인의 항구 한곳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로 통하는 유일한 항구로는 1503년 이래 통상원 건물이 있던 세비야가 선택되었다. - P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