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남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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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7-21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달리다 읽어보고 싶네용

시이소오 2016-07-21 21:36   좋아요 1 | URL
마태우스님 추천책이라 골랐는데 재밌네요ㅋ

북깨비 2016-07-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공부할 권리가 겹쳐요! 😁 책 도착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올 때마다 유심히 보는데 제가 산 책이랑 겹치는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한권씩 눈에 띌 때마다 이리도 반갑답니다. 😌

시이소오 2016-07-22 15:20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북깨비님과 같은 책을 읽었다니, 저도 왠지 기분이 좋군요^^

북깨비 2016-07-22 15:28   좋아요 0 | URL
아.. 아니요 저는 사기만 사 놓고 아직 안 읽었... ㅠㅠ 😣😩😫

시이소오 2016-07-22 15:32   좋아요 0 | URL
ㅋ 솔직하셔라 ㅎ ㅎ

오거서 2016-07-24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에 저렇게 많은 책을 읽어내는 능력자시군요. 도서관에서 한번에 많이 빌리는 신공에도 감탄합니다. ^^

시이소오 2016-07-24 21:01   좋아요 1 | URL
돌려읽는 취향이어서요.
책이 많이 필요합니다 ㅋ^^
 
나쁜 뉴스의 나라 -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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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호? ‘조본좌라고? 하여간 과대광고는..... 책을 읽으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 조본좌 맞다, 맞다제목 <나쁜 뉴스의 나라>보다 <기레기의 나라>는 어땠을까? 기자가 쓴 글이어서인지 어떤 방식으로 기레기들이 기레기가 되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 국민이 읽었으면 좋겠다. 조중동을 보수언론이라고? 조중동은 언론이 아니다. 그저 권력의 개새끼일 뿐.

 

뉴스란 무엇인가? 우선 특이해야 뉴스로서 가치를 지닌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멀의 창업주 노스클리프는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라고 말했다. 문제는 사람이 개를 무는 일이 자주 벌어지지 않는 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인지 기자의 첫 번째 독자인 데스크에선 잘 써봐가 아니라 잘 만들어 봐라고 말한다. 즉 별거 아닌 내용을 뭔가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 언론계에서는 이런 행동을 초를 친다고 말한단다. 뉴스가치는 대부분 조작된다. 심지어 사건 자체를 조작하기도 한다.

 

2015923일 자 청주 연합뉴스에는 “10년 도피 A급 기소 중지자, ‘병아리여경 재치에 붙잡혀라는 기사가 실렸다. 검거 사실 말고는 죄다 경찰의 조작이었다. 경찰 홍보 차원의 조작 기사였던 것.

 

조윤호 기자는 뉴스를 분석적으로 읽으라고 말한다. 똑같은 사실을 전달하더라도 의제설정과 프레임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달관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일본 사토리 세대를 모방한 것. 중앙일보는 천안함 사건 1년 이후 북한의 실체를 인식한 청년들이 늘어났다며 애국심의 앞 글자를 딴 ‘P세대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별 진짜.......

 

박근혜와 새누리당, 기득권 정권은 틈만나면 지역갈등, 세대갈등을 부추기려 발악이다. 기성세대들은 독재협력세력이 집권하면 사회가 왜 안정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반공논리로 수 백만명의 국민들이 죽어야 했거늘. 김광일 좃선일보 논설위원은 2015922일자에 임금피크제에 대한 칼럼을 게재했다. ‘늙는다는 건 벌이 아니다라는 제목만 봐서는 임금피크제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착각할 만하다. 그런데 본문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청년을 욕하는 내용이었다.

 

징징대지 마라. 죽을 만큼 아프다면서 밥만 잘 먹더라.”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2010104일 칼럼 새로 드러난 10,26의 비밀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김재규가 발기부전 때문에 박 대통령을 쐈다는 것. 아놔, 진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0159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강경노조 때문에 건실한 회사가 문을 닫는 사례가 많다며, 콜트악기, 콜텍, 발레오공조코리아 등을 예로 들었다.

 

콜트악기는 인건비 절감을 위해 위장 폐업을 의심받던 회사였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동아일보, 한국경제의 기사만 보고 김무성 대표가 헛소리 한 것.

 

20151114,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개혁’, ‘쌀시장 개방등 박근혜 정책에 반대하는 민중총궐기집회가 예정됐다. 이 날 대학입시 논술고사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대입 논술, 면접고사를 치르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알아서 교통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아니, 논술고사는 오전이고 집회는 오후건만 교통과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중앙일보는 다음날 사설에 지각 사태는 없었지만 학부모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만추의 추억을 담으려 부슬비 속 나들이에 나섰던 이들도 기분을 망쳤다고 실었단다. 만추의 추억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언론에는 명시적권력과 묵시적권력이 있다. 묵시적 권력이란 아예 보도를 안 하는 것이다. 국정원 해킹 의혹에 대해 KBS, MBC, SBS 등 지상파 3사 메인 뉴스는 5일 동안 단 한건도 방송하지 않았다.

 

언론은 세월호 청문회 내용에 대해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2013년 한 해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정말 엄청난 사건 아닌가? 그런데 조용했다. 그 당시에도 도무지 이해를 못 했는데,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정부 여당과 보수 언론은 대선 불복프레임을 짰다. 국정원 선거 개입에 대한 야당과 시민사회의 비판이 거세지자 그럼 당신들은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냐고 몰아붙인 것이다. 2013715일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은 기자들과 만나 더 이상 국가정보원 사건을 박그네 대통령과 연관시켜 국기를 흔드는 일을 멈춰주기를 바란다. 민주당은 대선 무효 협박을 멈추고 불복이라면 불복이라고 분명하게 대선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민주당은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지. 아휴, 저 모지리들.

 

언론의 물타기 수법

 

물타기 수법 1 “ 문제를 제기한 놈이 나쁜 놈이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

 

고대 학생 주현우 씨가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조선일보는 처음 써 붙인 학생은 진보 정당원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는 방법.

 

20151114일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농민 백남기 씨가 쓰러졌다. 조선일보는 백남기 씨를 운동권 출신으로 소개했고, 네이버 기사 밑에는 백 씨를 빨갱이로 욕하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조윤호 기자의 말처럼 운동권 출신은 물대포 맞고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

 

물타기 수법2 ; “돈 받아 내려고 수작 부리는 거지?”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철도 노조는 철도 민영화 반대를 내걸었지만 몇 몇 언론은 연봉 6,000~ 7,000만원 받는 귀족 노조의 파업으로 묘사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된다. 가만히 있으면 돈 많은 버는 사람들이 왜 파업해서 직위 해제를 당해야 하는 걸까?

 

물타기 수법3 “다 똑같은 놈들!”

 

내가 보기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당하는 물타기 수법이다. 진보적 성향의 사람도 이 물타기에 가장 많이 당한다. 장발장처럼 빵 하나를 훔친 사람과 강호순 같은 연쇄살인범이 같은가? 혹은 나를 살해하려는 연쇄살인마를 제지하면 나도 연쇄살인마인가? 선거 때 보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며 심지어 차선이 아니라 최악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타기 수법4 “지들끼리도 싸우는 걸 보니 뭔가 있구먼

 

언론이 즐겨 애용하는 수법으로 이른바 갈라치기라고 부른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은 진상규명을 요구한 단원고 유가족과 배, 보상에 동의한 일반인 유가족의 의견 차이를 부각했다.

 

갈라치기로 방어할 때도 있다. 땅콩회항 사건 당시 다른 보수 언론은 반 재벌 정서 우려된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프레임을 들이댄 반면 조선일보는 조현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갈라치기를 했다. 조선일보는 역시 물타기의 대마왕.

 

사실을 말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다르다. 사실로 보이는 텍스트들은 저런 나쁜 놈이 옳은 말을 할 리가 없다거나 여야 국회의원들의 싸움은 꼴도 보기 싫다’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갈리는 걸 보니 무슨 문제가 있나?’ 등의 편견에 갇히고 말았다. 사안의 본질을 알려야 할 미디어가 대중에게 퍼져 있는 편견에 기대어 오히려 편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흙탕물 속을 허우적거리는 일은 결국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P192

 

만고불변의 물타기. 너 빨갱이지?

 

201510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청소년들의 반대가 거세게 일었다. 한 여고생이 사회구조와 모순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뿐이라고 말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단다. 보수 인터넷 매체 데일리안은 115일 여고생 배후엔 전교조가 있다는 기사를 썼다. 사실 노조는 빨갱이가 아니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 노조 가입률은 최하 수준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및 유럽 나라들이 빨갱이인가?

 

2008년 촛불 집회때도 조선일보는 그랬다지. 시위하는 청소년들 뒤에 꼬드기는 세력이 있다고.

 

방사능이 위험하다고 말하면 한국에선 또 빨갱이다.

 

자식을 잃어도 단식하면 또 빨갱이다. 세월호 유가족 중 한명인 유민 아빠김영오 씨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벌였다. 언론은 김영오씨가 노조 조합인 걸 물고 늘어졌다. 금속 노조 조합원은 딸이 죽어도 진상 규명을 주장할 수 없단 말인가?

 

빨갱이 프레임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법: 반문하라.

 

2010년 천안함 사건. 새누리당은 전쟁불사론을 부르짖었다. 이 때 야당이 들고 나온 프레임이 전쟁이냐 평화냐프레임이다.

 

질문은 정부 여당이 먼저 시작했다. “북한이 우리 장병들을 저렇게 희생시켰는데 가만 놔둬야 하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야당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럼 지금 전쟁을 하자는 거냐?” 며 또 다른 질문으로 맞섰다.

 

아래는 2010년 지방선거 날 누군가 투표장에서 할머니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면 SNS에 올린 내용이다.

 

할머니1 : 투표해야 되는데, 누굴 뽑아야 하는거여?

할머니2 : 1번만 찍어. 2번 찍으면 큰일 나. 전쟁 나.

할머니1 : 2번은 안 되는 겨?

할머니2 : 2번은 전부 빨갱이여.

할머니3: 그럼 2번 뽑아야 겠네

할머니1, 2 : ?

할머니3: 빨갱이만 뽑으면 빨갱이들끼리 전쟁은 안 할 거 아녀.

 

난 이 이야기를 첨 들었는데, 왜 이리 웃긴지. 사드 배치로 전쟁이 코앞이다.

할머니, 할아버님들. 이제 1번 찍으면 큰일 나, 전쟁 나요. 핵 있어. 다 죽는 겨.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였을 때, 장인이 좌익 빨치산 활동을 했던 경력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은 그랬다지. “그럼 아내를 버려야 하나?”

 

 

뉴스를 비판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언론사의 소유 구조를 파악해 둘 필요도 있다. MBC 대주주가 정수장학회인줄은 미처 몰랐다. 중앙일보는 삼성 이병철이 창간했고 처남인 홍석현 회장이 인수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중앙일보는 여전히 이건희 소유란다. 국민일보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장로인 조용기 목사 소유다. 세계일보는 통일교 문선명 소유다. 문화일보는 현대 정주영 회장이 만든 신문이다. 현재는 현대중공업이 설립한 동양문화재단과 문우언론재단이 각각 30.63%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기사가 사라졌다는 게 착각이 아니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래도 되는 걸까? 삼성관련 기사들은 다 지우는 구나. 심지어 흔한 일도 아니란다. 조윤호 기자는 미디어 오늘에 몸담고 있다. 미디어오늘과 같은 매체비평지들은 이렇게 사라진 기사들을 찾아내는 게 일이라고. 아무리 찾아내고 또 찾아내도 기사는 끊임없이 사라진다지.

 

 

박정희는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낮에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밤에는 임자가 대통령이구먼!”이라고. 조선일보 기자는 말했다. “이제 밤의 대통령은 조선일보가 아니라 네이버라고. 그런데 이제 저널리즘의 미래는 고양이라고?? 그래서 고양이랑 개 사진으로 도배된 블로그들이 있었던 거였나.

 

이제는 허핑턴포스트, 인사이트, 위키트리, 피키캐스트 등 SNS를 기반으로 한 뉴스 큐레이팅 매체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페이스북이라는 유통 경로를 뚫은 큐레이팅 업체 인사이트, 위키트리, 허포코는 이제 페이지 팬수에서 공중파,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을 제치고 나란히 1,2,3위를 차지했다고. 페이스북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포스트 내용은 주로 고양이 동영상 같은 동물 뉴스, 연예인 가쉽거리 등이라고.

고양이 사진은 진리라고? 나는 도무지...... 살 수가 없다. 고양이 동영상? 이런 미친.

 

피키? 곰언니? 독후감을 쓰다 피키에 접속해 봤다. 나는 도무지.....살 수가 없다. 오늘자 베스트 1위는 헤어컬러 기사다. 절망적이다.

 

 밑줄 친 문장 

 

p39. 건국대 손석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미디어오늘 칼럼에서 조중동과 한경(한겨레, 경향)을 동일 선에 놓고 정파주의 언론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중립적 양비론은 너무나 안일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손 교수는 20155월 열린 미디어오늘 콘퍼런스에서 한국언론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로 볼 일이 아닌 것 같다조중동의 성완종 리스트 물타기 보도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축소, 은폐 보도 등을 보수 언론, 보수적인 보도라고 봐야 할지 의문스럽다. 이런 보도 태도를 보수라고 하면 조중동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보수 언론은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화됐고, 진보 언론은 상대적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진정한 보수- 진보로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P118. SBS가 보도하지 못한 문창극 후보자의 친일 미화 발언을 KBS는 보도할 수 있었을까. 당시 언론계 안팎에서는 KBS의 상황에서 이유를 찾는 분석이 제기됐다. 20145,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빗댄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발언에 분노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로 찾아가 시위를 한 일이 있었다.

 

결국 김 보도국장은 사퇴 의사를 밝히며 길환영 사장이 보도 개입을 했다고 폭로했고, 길 사장은 보직 간부들까지 참여한 파업과 여론에 밀려 해임됐다. 그리고 이 사건 직후 문창극 후보자 발언에 대한 단독 보도가 나왔다. 정부와 대통령 눈치를 보는 윗선의 데스크들이 존재했다면 총리 후보자에 대한 보도가 KBS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P128. 반면에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은 2015921일 열린 중앙 50년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아젠다 키핑을 강조했다.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는 많은 정보 중 중요한 것을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P131.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아프면 환자지, xx!”로 패러디 될 만큼 공허한 말이 됐다. 이러한 현상은 88만원 세대에서 더 나아간 삼포(연애,결혼,출산)세대오포(삼포+ 내 집 마련, 인간관계)세대등을 필두로 한 ’N포 세대, 인터넷에서 흙수저‘ ’금수저로 대표되는 수저 계급론의 유행과 맞물렸다.

 

조선일보는 20152달관세대라는 신조어를 또 만들어 냈다. ....현실의 행복을 추구하며 안분지족한다는 뜻을 지닌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한국화한 신조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달관세대론은 곧바로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P212. 공영 방송 MBC 사옥에는 음수사원飮水思原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언론 종사자는 언론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야 한다는뜻이다. ....음수사원이라는 휘호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MBC의 대 주주인 정수장학회의 전신 5.16 장학회에 남긴 휘호와 같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부일장학회를 강탈해 만든 5.16 장학회에 왜 이런 글을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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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1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thika 2016-07-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나라의 뉴스 ㅎㅎ

시이소오 2016-07-21 14:23   좋아요 1 | URL
기레기의 나라죠 ㅎ ㅎ

ethika 2016-07-21 14:30   좋아요 0 | URL
과연 기자만 욕할수있을까요?

시이소오 2016-07-21 14:37   좋아요 0 | URL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어떻게보면 조기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구요

cyrus 2016-07-2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창 페이스북 접속 횟수가 많았을 때 위키트리와 허핑턴포스트 기사 내용을 많이 접했습니다. 정말 읽기가 편했어요. 그런데 SNS을 기반으로 하는 뉴스들도 ‘좋아요’ 수나 조회 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요. 헤드라인을 자극적으로 뽑는 기사들이 종종 보곤 했습니다. 특히 허핑턴포스트는 성 관련 주제로 하는 기사를 유독 많이 공개하더라고요. 그래서 ‘섹핑턴’이라고 놀리는 댓글도 본 적 있습니다. 외국의 오보 기사 내용을 확인 없이 보도하는 바람에 욕먹었던 상황도 봤습니다.

시이소오 2016-07-21 14:28   좋아요 0 | URL
언론의 선정성도 나날이 심해지는것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1 14:29   좋아요 0 | URL
허핑턴은 언론이라기보다는 썬데이서울 잡지 같다고니 할까요. 제가 썬데이서울 류의 글을 재미있게 읽어서인지 나름 재미는 있는데 신뢰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

cyrus 2016-07-21 14:30   좋아요 0 | URL
솔직히 공정하고 보도 수준이 높은 언론이나 언론인 찾는 일이 제일 힘든 것 같습니다. ^^;;

시이소오 2016-07-21 14:47   좋아요 0 | URL
그래서 jtbc가 인기 아닐카요.

/ 곰발님, 사회자체가 급속도로 포르노화되는것 같아요. 선데이서울, 한때 대다수 남성네들이 즐겨보던 ㅋ

기억의집 2016-07-2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마 인터넷의 소통구가 있어서 다행이이에요. 안 그랬으면 우리 정말 언론이 아니고 기레기에 놀아났을 겁니다.

할머니들의 대화, 저 할머니3는 뭘 알고 저랬을까요? 아니면 본인의 논리대로 저런 말을 한 것일까요? 저 대목 읽고 한참 웃었어요~

댓글 보니, 허핑턴이 그렇군요. 저는 몰랐어요. 제가 상당히 좁게 살아서 그나마 알라딘은 꾸준히 들어오고 다른 매체를 잘 저바지 않다보지. 끽해야 프레시안이나 다음정도인 것 같아요. 한때 페북 했는데 넥서스가 잘 안 되는 바람에 그마저도 잘 안 들어가게 되더라구요.

시이소오 2016-07-21 15:02   좋아요 0 | URL
저도 한참웃었습니다. ㅋ
뉴스 큐레이팅사이트 뉴스는 굳이 안보셔도 될것같아요. 뉴스라기보단 거의 가십 수준이랄까요. ^^;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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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항상 자신이 쓴 과거의 작품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나아간다. 한병철의 신작을 읽을 때마다 그가 쓴 과거의 저작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한병철이야말로 실을 잣고 새로운 연결의 길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루스트는 삶 자체가 하나의 관계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이 사건들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 끈을 잣고” “조직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이 끈을 두 배로 늘여 우리 과거의 아주 사소한 지점과 모든 다른 지점들 사이에 기억의 풍성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연결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믿는다.

 

p 108.

 

한병철이 전작인 <에로스의 종말>에서 에로스를, 사랑을 재발명하려했다면 <아름다움의 구원>에선 미를, 아름다움을 재발명하려 한다.

 

현대의 아름다움에 공통된 속성이 있다면 무엇일까? 한병철에 따르면, 매끄러움이다. 제프쿤스의 조형물들, 아이폰, 브라질리언 왁싱. 매끄러운 것은 우리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 좋아요의 예술이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추한 것도 매끄럽다. 현대의 포르노그래피들. 데이터는 포르노그래피적이다. 내면성도 없고, 뒷면도 없고, 애매함도 없다.

 

매끄러운 것은 저항하지 않는다. ‘부정성따윈 없다.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비동일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는 은폐된 것이고 우리를 상처입히는 것이며 재앙과도 같다. 미는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미란 형용모순이다. 아름다운 대상은 덮개에 싸여 있을 때에라야 아름답다. 벌거벗겨진 대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은유로 지어놓은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상처입힌다. 현대의 긍정사회는 상처의 부정성을 회피한다. 심지어 사랑조차. 오로지 좋아요가 지배하는 사회.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본다는 것을 상처로 묘사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도, 나아가 지각조차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p 54.

 

고통없이, 상처없이 문학도 예술도 없다.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동일한 것만이 반복될 뿐이다.

 

바르트는 일찍이 사진 이론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에 대해 말했다. (punctum을 이 책처럼 풍크툼이라 표기하는 게 원음에 더 어울리겠지만, 단어가 내포한 의미를 고려해보자면 푼크툼이 더 적절해 보인다.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것이기에.

 

스투디움은 학습이라 불린다. ‘to love’가 아니라 ‘to like’로 표현되는 것. 스투디움은 쾌감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다. 단지 피상적인 관심일 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이웃들끼리의 관계맺음이랄까.

 

스투디움과 달리, 푼크툼은 나를 찌르고 나를 상처 입히고 나를 전율시키는 것이다. 푼크툼은 투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푼크툼은 쇼크처럼 요란한 것도 아니다. 푼크툼은 고요히 나를 찌르는 것이다. 푼크툼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눈을 감고 나서야, 기억 속에서 사후에 드러난다.

 

한병철은 칸트를 인용하며 재앙(Desaster)과 별이 아닌 것 Unstern(des- astrum), 비성을 연결한다. (‘비성非星’, 참 짜증나는 역어로다) 칸트는 모든 것을 주체의 내면속에 가둔다. 심지어 창공 위의 반짝이는 별까지도. (한병철은 칸트를 까고 주로 헤겔에 기댄다. 나는 반대. 나는 안티헤겔자.)

 

한병철은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대립되는 형상으로 모리스 블랑쇼의 텅 빈 하늘을 제시한다. 블랑쇼는 어린 시절, 하늘을 바라보다 어떤 돌연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늘의 갑작스럽고 절대적인 공허가 엄청난 매혹과 기쁨으로 아이를 급습하여, 한순간 아이는 눈물로 가득 찼다.” (왠지 이 심정이 이해가 간다.)

 

,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을 통해 우리는 주체로 회귀한다. 반면 블랑쇼의 텅빈 하늘은 우리를 주체로부터 떨어뜨린다. ‘별이 아닌 것이다. 재앙. 재앙의 미학은 만족의 미학이 아닌 사건의 미학이다. ‘아름다움은 별들의 질서를 교란하는 재앙이다

 

<두이노의 비가>에서 릴케는 이렇게 노래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끔찍한 시작일 뿐”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일뿐이란 번역이 더 어울리겠다)

 

아도르노 역시 끔찍한 것의 부정성이 미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미는 또한 부서지기 쉽고 깨지기 쉬운 것이다. 좀비는 아름답지 않다. 오늘날 건강과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우리는 좀비로 변한다.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칸트는 도덕적 미 혹은 미의 도덕을 미의 이상으로 보았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미는 도덕과 개성을 표현할 때만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현대에 미는 섹시함에 밀려나고 있다. 개성없는 인간이 현대의 이상적인 소비자다. “사람이 개성이 없을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없음의 시장이다.”

 

헤겔에게는 미는 진리이자 자유다. 미는 자기목적적인 것이다. 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미는 따라서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미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미는 우리를 관조적인 머무르기로 초대한다.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 미의 정치는 또한 자유의 정치다. 시스템의 하수인인 된 정치가는 자유인이 아니라 단지 노예다.

 

영어에서의 페어fair정의롭다는 뜻과 함께 아름답다의 뜻도 지닌다.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다. 미 앞에서 주체는 뒤로 물러선다.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미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의 위치에 서는 것. 반면 소비자는 타자를 위해 옆으로 물러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섹시함 역시 측면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 앞에서 우리의 의지는 후퇴한다. 미는 우리를 시간 안에 머무르게 한다. 시간 안에 머무름은 우리를 타자로 향하게 한다.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데 있다.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니체에 따르면 최초의 예술은 축제의 예술이었다. 노동은 시간의 질을 고양시켜 주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미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재인식이다. 기억으로서의 미의 경험은 소비되지 않는다. ‘미는 이야기한다.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이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에로스는 일찍이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이라 불리웠다. 미는 사유를 추동한다. 에로스 없는 사유는 단순한 노동일뿐이다. 미는 존재의 시적 이름이다. 미는 존재자에게 새로운 진리를 산출하게 한다.

 

미 자체는 영원히 존재하는” (aei on)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휩쓰는 세계에서 한병철은 미의 이상을 구원하려한다. 미는 구속력이 있는 것이고 기준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에로스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다.’ 바디우는 이 추구를 충실함이라 불렀다.

 

신이 죽으면서 절대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상대주의의 세계가 열렸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소비지상주의가 판을 치며 예술은 더 이상 미의 추구가 아닌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팔리는 것이 예술인 시대다. 내가 보기에 한병철은 고전주의자에 가깝다. 나 역시.

 

고전주의자 입장에서 현대 예술은 죄다 쓰레기다. 제프 쿤스의 쓰레기는 오늘날 가장 비싼 값에 팔린다지. 부자들은 왜 이런 쓰레기를 비싼 가격에 주고 사는 걸까? 쓰레기기 때문이다. 값진 것에 정당한 값을 치른다면 부는 과시될 수 없다. 쓰레기를 사야만 부는 과시될 수 있다. 제프 쿤스는 조형물을 직접 만들지도 않는다. 조수들 시켜 만든다는데, 조영남도 억울할만하다. 애초에 조영남 같은 쓰레기의 쓰레기를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쓰레기일 뿐. 

 

미는 은폐이고 상처이고 고통이고 진리이자 자유, 정의이며 선이고 기억, 또한 타자를 구원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미를 구원하려 한 한병철의 사유는 이제 어디로 나아갈까? 미 자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아에이온이라면 그 기준을 다시 세우려 하진 않을까. 혹은 타자를 구원하는 미? 한병철은 데이터의 무더기에 대비하여 내러티브’, ‘사건을 강조했다. 앞으로 타자를 구원하는 내러티브를 사유하려 할까. 어찌되었건, 그가 풀어놓는 실이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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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톤도 다음과 같이 말했죠. 공포는 아름다움의 첫 번째 현존이다.

시이소오 2016-07-20 13:50   좋아요 0 | URL
릴케가 살짝 비튼거네요 ㅋ

마립간 2016-07-20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시오소오 님.
시이소오 님의 글을 잘 읽고 있습니다.

인용 글을 찾다가 읽지도 않은 책 ≪아름다움의 구원≫ 구절을 제 감상문에 인용하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7-20 16:35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반갑습니다 ^^
제가 쓴것두아닌데 얼마든지요. 어느 대목을 인용하실지 궁금하네요 ^^
 

p14. 롤랑 바르트는 촉각이 가장 마술적인 감각인 시각과는 반대로 여러 감각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탈신비화하는 감각이라고 말했다. 시각은 거리를 유지하는 반면, 촉각은 거리를 제거한다. 거리 없이는 신비도 있을 수 없다. 탈신비화는 모든 것을 즐기고 소비할 수 있게 해준다. 촉각은 완전히 다른 타자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자신이 만지는 것 마다 세속화한다.

 

제프 쿤스의 예술은 구원론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예술은 구원을 약속한다. 매끄러움의 세계는 미식의 세계, 순수한 긍정성의 세계이며, 그 안에는 어떤 고통도, 상처도, 책임도 없다.

 

가다머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부정성은 예술의 상처다. 이런 부정성은 매끄러움의 긍정성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음뿐만 아니라 추도 매끄러워진다. 추 또한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혹은 끔찍한 것의 부정성을 잃어버리고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추는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것을 돌로 변화시키는 메두사의 시선을 완전히 상실했다.

 

p22. 위생적인 이성의 조명하에서는 모든 애매성, 모든 비림이 더러운 것으로 지각된다. 순수한 것은 투명성이다. 정보와 데이터의 매끄러운 흐름에 순응할 때, 사물은 투명해진다. 데이터에는 무언가 포르노그래피적이고 외설스러운 점이 있다. 데이터에는 내면성이, 뒷면이, 애매함이 없다.

 

매끄러움은 그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일 뿐이다. 그것에는 저항이라는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더 이상 내게 맞서는 대상이 아니다.

 

p24. “클로즈업된 얼굴은 가까이에서 관찰한 성기와 똑같이 외설적이다. 그것은 성기이다. 모든 상, 모든 형태, 가까이에서 관찰한 모든 신체 부위는 성기다.” - 보드리야르

발터 벤야민은 클로즈업을 여전히 언어적이고 해석학적인 실천으로 간주했다.

 

p25. 클로즈업의 미학은 스스로 클로즈업 사회가 되어버린 하나의 사회를 반영한다. 얼굴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자신만을 지시한다. 이런 얼굴은 더 이상 세상을 함유하고 있지 않다. 더 이상 표현하는 바가 없다. (영화에 대한 무지, 클로즈 업 역시 세계를 함유하곤 한다.)

 

p26. 자신에 대한 근심이 셀카 중독을, 전혀 끝날줄 모르는 자아의 공회전을 낳는다.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

 

얼굴은 클로즈업되면 매끄러운 페이스가 된다. 페이스에는 깊음도 얕음도 없다. 그것은 그저 매끄럽다. 페이스는 파사드fassade를 의미한다. (레비나스의 visage와 대립시키기 위해서는 불어 파사쥬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p28. 자동운전 자동차는 남근pallus이 아니다. 내가 그저 연결되어 있기만 한 남근이란 모순이다. 카셰어링도 자동차에서 마술성과 성스러움을 제거한다. 나아가 몸도 탈마술화한다. 남근에는 함께 쓰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남근은 점유와 소유와 권력의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p29.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이,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위 롱기누스는 아직 미와 숭고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압할 수 없는 것의 부정성이 미에 속한다고 보았다. 미는 만족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예컨대 위 롱키누스에 따르면 아름다운 여성은 눈의 고통이다. 다시 말해 그런 여성은 고통스럽게 아름답다.

 

p31. 에드먼드 버크는 무엇보다도 매끄러운 것이 아름답다고 보았다. 촉각에 즐거움을 제공하려면 물체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매끄러운 것은 부정성이 없는, 최적화된 표면이다. 그것은 어떠한 고통도, 저항도 섞이지 않은 느낌을 낳는다.

 

버크는 미를 모든 부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미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이에 반해 숭고에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아름다운 것은 작고 어여쁘고, 밝고 연하다. 매끄러움과 고름이 미의 특징이다. 반면 숭고는 크고 육중하고 어둡고 거칠고, 매끄럽지 않다. 숭고는 고통과 공포를 야기한다. ...버크는 숭고에 직면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고통과 공포의 부정성을 다시 긍정성으로 바꿔 놓는다.

 

p36. 아도르노는 자신의 미학 이론에서 칸트 미학의 바로 이러한 자기애적인 특징을 부각시킨다. “자신의 타자에 대한 고려 없이 주체의 합법칙성에만 복종하는 형식적인 것은 타자에 의해 동요되지 않은 채 만족을 주는 성질을 유지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지배력을 향유한다. ”

 

숭고에 직면하여 주체는 자신이 자연을 넘어선 숭고한 존재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실제로 숭고한 것은 이성 안에 있는 무한성의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 숭고함이 대상에, 이 경우에는 자연에 잘못 투사된다. 칸트는 이 혼동을 사취Subreption”“라고 부른다. 미와 마찬가지로 숭고도 대상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주체 자신에 대한 감정이다. 가지애적인 주체 감정인 것이다.

 

미도 숭고도 주체의 타자가 아니다. 거꾸로 그것들은 주체의 내면성에 흡수된다. 자기애적인 주체성 바깥의 공간이 허용될 때만 다른 미가, 나아가 타자의 미가 다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미와 숭고는 근원이 같다. 그러므로 숭고를 미에 대립시키는 대신 해야 할 일은 내면화 할 수 없는, 탈주체적인 숭고를 다시 미에 반환하고, 미와 숭고의 분리를 철회하는 것이다.

 

p40 칸트의 주체는 영구히 자기 안에 머무른다......아도르노는 이와 아주 다른 정신을 염두에 둔다. 이 정신은 자연의 숭고에 직면하여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인지한다. 자연의 숭고는 자기 안에 갇힌 주체를 바깥으로 끌어낸다. “자연 앞에서 정신은 칸트가 바라던 대로 자신의 우월성을 인지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자연성을 인지하게 된다. 이 순간 주체는 숭고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주체가 자기 주위에 걸어놓은 마법을 깨뜨린다. 주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아도르노에게 고유한 미적 경험이란 주체가 자신을 확인하는 만족이 아니라, 전율과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에 있다. “일반적인 체험 개념에 날카롭게 대립하는 전율은 자아의 단편적인 만족이 아니며, 쾌감과도 비슷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자아가 청산되는 순간이며, 이때 전율에 휩싸인 자아는 자신의 제한성과 유한성을 깨닫게 된다.”

 

자연미는 언제나 어떤 자기애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단순한 만족을 주지 않는다. 오로지 고통만이 자연민에 접근 할 수 있다. 고통은 주체를 자기애적인 내면성으로부터 떼어낸다. 고통은 완전히 다른 타자가 그것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균열이다.

 

디지털 미는 자연미에 대립한다. 디지털 미에서는 타자의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전적으로 매끄럽다. 그것에는 어떠한 균열도 있어서는 안 뇌다. 부정성 없는 만족,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든다라는 것이 디지털 미의 징표다. 디지털 미는 어떠한 낯섦도, 어떠한 비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 동일한 것의 매끄러운 공간을 형성한다.

 

자연미에는 먼 것이 내재한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순간 속에 자신을 은폐한다.” 자연미는 아우라 속의 멂을 표시하기 때문에 전혀 소비될 수 없다. “규정에 맞서는, 규정되지 않는 것, 그런 것으로서 자연미는 규정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음악과 비슷하다. ....음악에서처럼 자연미에서도 아름다움은 한순간 번득일 뿐, 그것을 붙잡으려는 시도 앞에서 즉시 사라져버린다. 자연미는 예술미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자연미 자체, ”자연의 언어의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방한다. 그럼으로써 자연미를 구원하다. 예술미는 자연이 말하는 오직 한 가지 길, 즉 침묵을 모방한 형상이다. (아도르노, 미학이론)

 

미는 은신처다. 미에는 은폐가 본질적이다. 투명성은 미와 화합하지 못한다. 투명한 미란 형용모순이다. 미는 필연적으로 가상이다. 미에는 불투명함이 내재한다. 불투명하다함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는 본질적으로 폭로되지 않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적인 사진은 오로지 단 하나의 사물을 노출시키는 데만 집중한다. 바로 성기가 그것이다. 반쯤 은폐하고, 지연하고, 방향을 전환시키는, 도 하나의 방해하는 모티프는 일체 없다.“ (롤랑 바르트) 은폐, 지연, 방향전환은 미의 시공간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반쯤 숨겨지도록하는 계산은 유혹적인 광휘를 산출한다. 방향전환은 미를 직접적인 접촉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이런 방향 전환은 에로틱한 것에 본질적이다.


메이클소프는 성기를 클로즈업하여 촬영할 때 팬티의 소재를 근접 촬영함으로써 사진이 포르노그래피적인 것으로부터 에로틱한 것으로 넘어가도록 한다. 나의 관심이 소재의 구조로 향하게 되면서 사진은 더 이상 단조롭지 않게 된다.” 사진작가는 의도적으로 시선의 방향을 대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다. 그는 부수적인 대상을 중심 대상으로 바꾸거나, 중심 대상을 부수적인 대상에 종속시킨다. 미 또하 중심 대상 옆에서, 부수적인 대상 속에서 발생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괴테의 문학은 베일로 덮인 빛 속의 내부 공간을 향한다. 그리고 이 빛은 가지각색의 조각들 속에서 굴절된다.”

 

옷은 신적이다. 숨김은 미에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미는 옷을 벗지도, 폭로되지도 않는다. 벗길 수 없음이 미의 본질이다.

 

은폐는 텍스트도 에로틱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은유를 통해, “비유의 외투를 통해 성서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성서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은유로 지어놓는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바르트는 은폐가 에토릭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다. “옷의 틈이 벌어진 곳에서” “두 가지 옷(바지와 블라우스)사이로, 혹은 옷이 양쪽으로 갈라진 틈(반쯤 벌어진 셔츠나 장갑 혹은 소매)을 통해피부가 빛나는 지점이 몸의 에로틱한 지점이다. “드러냄과 숨김의 동시적 연출이 에로틱하다. 벌어진 틈, 균열, 사이가 에로틱한 것을 만들어낸다.

 

텍스트의 에로틱한 즐거움은 계속 진전되는 노출에서 비롯되는, “스트립쇼를 하는 몸을 보는 즐거움과 다르다. 최종적인 폭로, 마지막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읽기 쉬운 소설도 포르노그래피적이다. “모든 흥분은 성기를 볼 수 있다는 (모든 고등학생들의 꿈), 혹은 이야기의 끝을 알게 되리라는(소설이 주는 만족) 희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에로틱한 것은 진리 없이도 성립된다. 그것은 가상이며, 베일의 현상이다.

 

유혹은 그 자체로서 타자에게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을 것, 내가 결코 알지 못할 것, 그럼에도 비밀로 봉인된 채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대한 예감을 가지고 유희한다. 유혹에는 거리 두기의 파토스나아가 은폐의 파토스가 내재한다.

 

상처의 미학

 

p53. 롤랑 바르트는 상처의 에로틱에 대해 생각한다. “내게는 피부가 없다(애무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 <파이드로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를 패러디하여 깃털 달린 존재가 아니라 피부가 없는 존재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도, 나아가 지각조차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보기를 배우는 것은 전혀 적극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과정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버려두기 혹은 어떤 사건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말한다.

 

경험은 반드시 전율과 엄습의 부정성을, 다시 말해 상처의 부정성을 수반한다. “그는, 고슴도치는 자신의 시력을 버린다. ...고속도로를 건너는 중에 위험을 감지하면, 그는 사고에 자신을 내맡긴다.....사고가 없는 시, 상처처럼 벌어지지 않는 시, 그리고 또한 상처를 입히지 않는 시란 없다.” 상처 없는 문학도 예술도 없다. 사유도 상처의 부정성에 의해 촉발된다.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동일한 것, 친숙한 것, 익숙한 것이 계속된다. “경험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그 고통속에서 현존하는 것의 실체적인 타자성이, 익숙한 것에 자신을 드러낸다.”

 

바르트는 사진 이론도 상처의 미학을 전개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두 요소를 구별한다. 첫 번째 요소는 그가 스투디움즉 학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학습해야 하는 정보들의 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근심없는 소망들, 목적 없는 관심, 두서없는 성향의 영역이다. 나는 좋아한다/나는 싫어한다, 라고 말할 때의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to love”가 아니라 “to like”, 만족하다의 장르에 속한다. “to like”에는 어떤 격렬함도, 어떤 전율도 없다.

 

사진의 두 번째 요소는 푼크툼이다. 이것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푼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푼크툼은 시각의 빈틈을, “눈먼 영역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푼크툼을 지닌 사진은 은신처다. 이런 사진이 에로틱하고 매력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프로노그래피적 사진에는 나는 푼크툼을 발견하지 못하며, 기껏해야 재미를 느낄 뿐이다.” 에로틱한 사진은 교란된, 갈라진사진이다. 반면 포르노그래피적 사진에는 굴절도, 균열도 없다. 그것은 매끄럽다.

 

푼크툼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근본적인 불투명성이다. 그것에는 어떤 이름도, 기호도 갖다 붙일 수 없다. 그것을 정보나 지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나를 정말로 매혹할 수 없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내면의 불안에 대한 확실한 표현이다.” 푼크툼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나의 지점을 찾아온다. 그래서 그것은 섬뜩하다.

 

작용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기호도, 이름도 없다. 그것은 나를 꿰뚫지만, 나는 그것이 상륙한 내 자아의 지점을 특정할 수가 없다.”

 

“....이런 사진은 고함을 지를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쇼크와는 달리 푼크툼은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침묵을 사랑하며, 비밀을 보호한다. 그 정적에도 불구하고 푼크툼은 상처로 나타난다. 모든 의미, 의도, 의견, 평가, 판단, 연출, 포즈, 몸짓, 코드, 정보가 사라지면 푼크툼이 고요한, 노래하는 잔여로 드러나 우리를 당혹시킨다.

 

푼크툼은 재현 뒤에 남아 있는 완강한 잔여이며, 의미와 의미 부여를 통한 매개를 거부하는 직접적인 것이며,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정념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이며, 나아가 상징적인 것에 대립하는 실재적인 것이다.

 

어떤 사물의 사진을 찍는 것은 그것을 의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한 행위다. 내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감기다.” (카프카) 푼크툼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눈을 감았을 때 펼쳐지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서서히 성숙한다. 그 속에서 사물들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진행된다. 푼크툼의 언어는 상상에 의한 꿈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푼크툼이 그 모든 명료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사후에야 비로소, 사진이 더 이상 눈앞에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 사진을 다시 떠올릴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로 눈앞에 보고 있는 사진보다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사진을 내가 더 잘 아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푼크툼이 아무리 직접적이고 강렬하다고 해도 우리는 일정한 잠재기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찾아낼수 있다는 사실을 결국 나는 알게 되었다.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에 사진들처럼)

 

 

 

바르트의 개념쌍인 스투디움/푼크툼에 아펙툼affetum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영상과 눈의 직접적 접촉은 오로지 아펙툼만 허용한다. 아펙툼은 스투디움에 필요한 참을성도 모르고, 푼크툼을 알아볼 감수성도 모른다. 아펙툼에는 푼크툼에 핵심적인 능변의 정적, 언어로 충만한 침묵이 없다. 아펙툼은 고함을 지르고, 격앙시킨다. 그것은 직접적인 만족을 주는, 언어 없는 흥분과 자극만 불러일으킨다.

 

재앙Desaster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별이 아닌 것Unstern(라틴어의 des-astrum) 즉 비성이다. 칸트가 말하는 별이 빛나는 하늘에는 비성이 뜨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체의 내면 속에 가두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사유가 내세운 정언명령이다.

 

이상적인 예술작품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이며 환하고 영혼이 깃든 공간이다. “혹은 플라톤이 과꽃에 바친 저 유명한 2행시를 보자. ‘나의 별이여, 그대가 별들을 쳐다보고, 내가 하늘이라면/ 천 개의 눈으로 너를 내려다볼텐데! 이와 반대로 예술은 자신의 모든 조형물을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로 만들어 내면의 영혼과 정신성이 모든 지점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한다. 정신 자체가 만물에 빈틈없이 빛을 비추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다.

 

헤겔의 정신과 칸트의 이성은 모두 재앙에 대해, 바깥과 전적인 타자에 대해 맞서는 주문들이다.

 

재앙이 감시한다고 말할 때, 나는 감시에 주체를 부여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감시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앙은 별들의 보호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아이는 텅빈 하늘의 무한성에 마음을 빼앗긴다. 자신의 내면성으로부터 떼어내진 아이는 아토피아적인 바깥을 향해 탈경계화되고 비워진다. 재앙이 행복의 공식임이 드러난다. 재앙의 미학은 주체가 자신을 향유하는 만족의 미학에 대립한다. 재앙의 미학은 사건의 미학이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는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을 흩뿌리는 별들(des astres)과 재앙(désastrse)이라는 두 말로 운을 맞춘다. 아름다움은 별들의 질서를 교란하는 재앙이다. 아름다움은 나방이 그것에 다가갔다가 타버리는 횃불(flambeau)이다. 횃불이라는 단어에 운을 맞추는 단어는 무덤(tombeau)이다. flambeau에도, tombeau에도 beau, 즉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기입되어 있다. 재앙의 치명적인 것의 부정성은 아름다움의 한 계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시작하는 첫 시에서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끔찍한 시작일 뿐이다. 끔찍한 것의 부정성은 미의 모체이자 심층이다. 미는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견딜 수 없는 것, 혹은 견딜 수 있게 만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끔찍한 것으로부터 보호해준다. 그러나 끔찍한 것이 미를 통과하여 비친다. 그래서 미는 양면적이다. 미는 형상이 아니라 막이다.

 

미는 재앙과 우울, 끔찍한 것과 좀비, 타자의 습격과 동일자로의 응고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아도르노의 자연미 관념은 바로 이렇게 형식이 동일성으로 응고되는 것에 맞선다.

 

아도르노는역설적인 문구들로 미적 형식을 서술한다. 미적 형식의 일치성의 핵심은 일치하지 않음에 있다. 미적 형식은 분기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의 통일성은 부서져 있다.

 

부정성은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또한 미의 정수이기도 하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 없다.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미의 이상

 

미의 이상에 대한 판단은 순수한 미적 차원을, 단순한 취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취미가 이성과, 다시 말해 미가 선과 일치함에 기초하는 지성화된 취미판단이다. 누구나 이런 미를 묘사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교양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인륜적 이념들을 시각화할 수 있는 구상력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칸트는 미의 이상을 논함으로써 도덕적 미 혹은 미의 도덕을 구상한 것이었다.

 

소비와 섹시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적인 매력을 근거로 하는 자아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식시킨다. 미의 이상은 소비되지 않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는 어떠한 고정된 표시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을 개성없는 요소라고 불렀다. “바다에는 ....어떠한 선도 견고하게 새길 수 없다......바다는 근원적 의미에서의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개성은 심다, 새기다, 인각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diarassein에서 유래되었다.”

 

슈미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이 개성이 없고 형상이 없을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 없음의 시장이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씨족과 부족과 이웃관계를 해체한다. 공유 경제는 소유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를 가입으로 대체한다. 디지털 매체는 어떠한 고정된 선도, 표시도 새겨 넣을 수 없는 개성 없는 바다와 같다. ....견고한 개성은 네트워크화하기 힘들다. 그것은 연결능력, 소통능력이 없다. 디지털 질서는 새로운 이상을 예찬한다. 그 이상이란 바로 개성 없는 인간, 개성 없는 매끄러움이다.

 

진리로서의 미

 

헤겔의 미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개념이다. 이것은 미를 이상화하고 미에 진리의 광휘를 부여해준다. ...헤겔이 말하는 개념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부여하는 형식으로서, 이 형식은 현실을 관통하여 불잡음으로써 현실을 구석구석까지 형성한다.

개념은 현실의 부분들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적인 전체성으로 통일시킨다. 개념을 통해 형성된 전체성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움켜쥔다. 개념에는 모든 것이 총괄되어 있다. 이 모음, 이 하나로의 조합은 아름답다. 이 조합은 흩어져 있는 수천의 개별성들을 소환하여 하나의 표현으로, 하나의 형상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 개념은 조합하고, 매개하고, 화해시킨다. 그러므로 개념은 무더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전체성은 지배의 형성물이, 부분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총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로소 부분들에게 운동과 행동의 공간을 열어주고, 그럼으로써 자유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해준다.

 

개념은 조화로운 전체성을 산출한다. 미는 부분들이 강제 없이 일치하여 하나의 전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름다운 대상에는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수한 측면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개념에 의해 정립된 필연성이 그 하나이며, 이 특수한 측면들이 통일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생겨난 부분들로서 지니는 자유의 외관이 나머지 하나이다.”

 

대상에 대한 미적 관계 속에서야 비로소 주체는 자유롭게 된다. 미적 관계는 대상 또한 해방시켜 각자의 특수성을 갖게 한다. 자유와 강제 없음은 예술 대상의 특징이다. 미적관계는 어떤 측면에서도 대상을 압박하지 않으며, 대상에게 어떤 외적인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술은 자유와 화해의 실천이다.

 

완전히 실현된 개념과 목적으로서의 미 앞에서 주체는 스스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린다. 주체의 욕망은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대상을 자신을 위해 도구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체는 대상 앞에서 자신의 목적을 버리고, 대상을 자신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거승로, 자기목적으로 간주한다.” 그럴 때 미에 대한 주체의 태도는 내버려두기, 나아가 초연함일 것이다. 미가 비로소 관심 없이 머무르기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미의 관찰은 자유주의적인 성질을 띤다. 대상을 자기 안에서 자유롭고 무한한 자로서 내버려두며, 대상을 유한한 욕구와 의도에 유용한 것으로서 소유하려 하거나 이용하려 하지 않는다.


 

미의 정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유로운 남자란 삶의 욕구와 강제에 속박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물들을 향유하는 데 집중하는 삶과 폴리스에서 아름다운 행위들을 산출하는 삶,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연구하면서 영구적인 미의 영역에 머무르는 철학자의 관조적 삶이 여기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의 윤리학은 미의 윤리학이다. 정의 또한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추구된다. 플라톤은 정의가 가장 아름다운 것들(to kalliston)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행복의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즉 아름다운 선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도입한다. 여기서 선은 미에 종속된다. 혹은 미보다 하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선은 미의 광휘 속에서 완성된다.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다.

 

시스템의 하수인이 된 정치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스캐리는 주체를 탈나르시시즘화하고 탈내면화하는 미의 경험에 대해 지적한다. 미 앞에서 주체는 뒤로 물러난다. 주체는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준다. 이렇게 타자를 위해 자신을 근본적으로 철수시키는 것은 윤리적 행동이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미는 우리에게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세계의 중심에 서 있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대상들에게 자발적으로 우리의 땅을 맡긴다. 미 앞에서 주체는 측면의 lateral 위치를 차지한다. 주체는 앞으로 밀고 나가는 대신 옆으로 물러난다. 주체는 측며의 형상이 된다. 타자를 위해 자신을 후퇴시킨다.

 

주체의 후퇴는 정의에 본질적이다. 정의는 공존의 아름다운 상태다. “모든 면에서의 대칭을 요구하는 윤리적 공정성이 미적 공정성에 의해 크게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적 공정성은 모든 참여자들이 스스로 측면에 자리 잡은 채 기쁨의 상태를 느끼도록 한다.”

 

에로틱한 작가는 장면의 거리를 사랑한다. 그는 대상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암시로 만족한다. 에로틱한 것은 암시적이며, 격졍적이지 않다. 포르노그래피의 시간 양태는 즉시이다. 이에 반해 지체, 지연, 우회가 에로틱한 것의 시간적 양태들이다. 지시적인 것, 사물을 곧장 가리키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우회로를 피한다. 그것은 곧장 대상을 향한다. 이에 반해 에로틱한 기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순환한다. 폭로극은 포느로그래피적이다. 원칙적으로 폭로될 수 없는 비밀들이 에로틱하다.

 

감정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이와 달리 감흥Emotion은 일시적이다.....감정만이 대화적인 것에, 타자에 다가갈 수 있다.

 

무명의 인물(nemo)에게는 폭로할 영혼이 없다. 슈트라우스는 포르노그래피적인 영혼의 나체주의와 정신병적인 것에 맞서 무명주의적인 자기초월성을 요구한다. 이 초월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넘어서서 타자에게 다가가고, 스스로를 타자에 의해 유혹받도록 한다. 에로틱한 연극은 유혹이, 타자를 위한 환상이 가능한 장소다.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미의 이러한 관조적인 측면은 쇼펜하우어의 예술관에서도 핵심적이다. 그의 예술관에 따르면 미에 대해 느끼는 미적 기쁨의 주요한 측면은 그 기쁨의 대부분에 걸쳐 우리가 순수한 관조 상태로 접어들면서 한순간 모든 의지, 다시 말해 모든 소망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말하자면

우리 자신을 탈피한다는 데 있다.”

 

시간을 극복하는 머무르기에서 현재의 영원함은 타자를 향한다. “그것은 타자의 현존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머무르기에서 영원성이 타자 위로 번지는 빛으로 나타난다. 철학의 전통 속에서 언젠가 이것이 사유된 적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스피노자의 다음 문장에서 그랬을 것이다. ‘사물을 영원성의 측면에서 파악할 때, 정신은 영원하다.’” 이에 따르면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데 있다.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이에 따르면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데 있다.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예술은 타자를 그 현전성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한다.

 

축제도 잔치도 종교적인 기원을 갖고 있다. 라틴어 단어 페리아에feriae’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위해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 ‘파눔Fanum’은 신에게 바쳐진 성스러운 장소를 말한다. 축제는 세속적인 일상의 시간이 멈추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축제는 축성을 전제로 한다. 성스러운 것을 세속적인 것과 갈라놓는 저 문턱, 통로, 축성이 사라지면 오로지 일상적이고 흘러 지나가는 시간만이 남게 되며, 이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착취된다.

 

가다머는 <미의 현재성>에서 예술을 축제와 연결시킨다. 그는 우선 독일어에서 축제를 행하는 것을 축제를 걷는다begeht”라고 표현하는 언어적 특수성에 대해 지적한다. 걷는다는 것은 축제의 특별한 시간성을 보여준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걷는 자가 향하는 목표의 표상을 확실하게 제거한다. 어떤 것을 걷는다는 말은 어디에 도착하기 위해 우선 걸어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축제를 걸음으로써 축제는 언제나, 줄곧 거기에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을 걷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장기적으로도 서로 교체되는 순간들로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축제의 시간성이다.

 

축제를 걷는 것은 흘러 지나감을 제거한다. 축제에는, 이 성대한 고양된 시간에는 어떤 불멸성이 내재한다. 예술과 축제는 유사하다. “예술이 제공하는 시간 경험의 본질을 우리가 머무르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데 있다. 아마도 이것이 영원이라고 불리는 것의, 우리에게 허용된 한에서의 모습일 것이다. ”

 

회상으로서의 미

 

발터 벤야민은 기억을 인간 실존의 정수로 높이 세운다. “내면화된 현존의 모든 힘이 기억으로부터 생겨난다. 기억은 또한 미의 정수다. 아무리 만개하더랄도 기억이 없다면 미는 허황한 것이 되어버린다.

 

아름다운 형상에 직면하여 우리는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플라톤은 미의 경험이 있었던 것의 반복, 다시 말해 재인식이라고 보았다.

 

아주 작은 한방울의 차기억의 거대한 건조물로 확장된다. 프루스트는 순수한 시간의 작은 양을 체험했다. 시간은 향기 나는 시간의 결정으로, “향기로 충만한 병으로 농축되고, 이 병은 그를 시간의 덧없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이전에는 몰랐던 행복감이, 온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복감이 나를 관통해 흘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삶의 우여곡절들이, 삶의 파국들이 사소한 불은으로 변했고, 삶의 짧음도 우리 감각의 단순한 속임수로 변했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서는 원래 사랑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가 근사한 물질로 채워진다고 느꼈다. 혹은 이 물질이 내 안에 있다기보다는 내가 그 물질 자체였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고, 우연에 지배되고,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고 느꼈다. ”

 

프루스트는 삶 자체가 하나의 관계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이 사건들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 끈을 잣고” “조직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이 끈을 두 배로 늘여 우리 과거의 아주 사소한 지점과 모든 다른 지점들 사이에 기억의 풍성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연결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라고 믿는다. 미는 사물들이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서로 관계를 맺는 곳에서 발생한다. 미는 이야기한다.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이다.

 

은유는 내러티브가 있는 관계들이다. 은유는 사물과 사건들이 서로 대화하게 한다.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 다시 말해 시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다. 작가들의 시적인 시선은 사물들 사이의 숨은 연결을 발견해낸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미는 망설이는 자이며 늦둥이다. 미는 순간적인 광휘가 아니라 나중에야 나타나는 고요한 빛이다. ...사물들은 우회로를 거쳐 사후에야 비로소 그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그 향기로운 정수를 드러낸다. 미는 오랫동안, 천천히 걷는다. “미의 느릿느릿한 화살. - 우리를 갑자기 열광시키지 않고, 맹렬하게 도취시키는 공격을 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이 가장 고상한 종류의 미다.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도 못한 채 가지고 다니다가 언젠가 꿈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아름다움 말이다.”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미를 볼 때 에로스는 영혼속에서 산출력을 일깨운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tokos en kalo) 이라고 불린다.

 

아름다운 법률은 에로스의 작품이다. 철학자나 시인 뿐 아니라 정치가도 에로틱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에로스의 인도를 받는 정치는 미의 정치다.

 

신의로서의 에로스는 사유를 축성해준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에 의해 축성을 받고 에로스의 신비로 들어간다. 에로스의 신비는 인식에서도, 담론에서도 벗어난다. 하이데게도 에로틱한 것을 추구한다. 에로스는 사유에 날개를 달아주고 사유를 인도한다.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른다.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에로스는 신들 가운데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신이다. 내가 사유 속에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곳으로 용기 내어 나아갈 때마다 이 신의 날갯짓이 나를 스친다.” 에로스가 없으면 사유는 단순한 노동으로 전락한다.

 

하이데거는 아름다운 것을 미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으로 분류한다. 그는 플라톤주의자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미는 존재의 시적 이름이다. 에로스는 존재와 관계 된 것이다.

 

분명하게 하이데거는 미를 미적 만족 바깥에 있는 진리의 현상으로 파악한다. “진리는 존재의 진리다. 미는 이 진리 곁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으로 옮길 때 미가 나타난다. 이 나타남이 작품 속의, 그리고 작품으로서의 이 진리의 존재로서 미다. 그러므로 미는 진리의 일어남에 속한다.

 

존재의 진리로서의 진리는 존재자에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사건이며 생기다. 그래서 새로운 진리는 존재자에게 아주 다른 빛을 비추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꿔놓는다. 새로운 진리는 모든 것이 다르게 나타나도록 한다. 진리의 생기는 무엇이 실제로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것은 다른 있음을 산출한다.

 

에로스는 미에, 지니르이 현상에 애정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에로스는 만족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족이, 좋아요가 지배하는 시대는 에로스가 없는, 미가 없는 시대라고.

 

진리의 생기로서의 미는 생산적이고, 산출적이며, 나아가 창작적이다. 그것은 볼 것을 준다.

 

미는 구속력이 있다. 미는 지속성을 만들어낸다. 플라톤이 미 자체영원히 존재하는” (aei on)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로스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다. 바디우는 이 추구를 충실함이라고 부를 것이다.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연이었던 것으로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지속성을, 완강함을, 의무를, 충실함을 만들 것이다. 여기서 나는 충실함이라는 말을 그 일상적인 맥락에서 떼어내어 나의 철학적 용어로 사용한다. 여기서 충실함이라는 말은 어떤 우연적인 조우로부터 하나의 구성으로 넘어가는 이행을 가리킨다. 너무나 견고하여 거의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구성으로 말이다. ”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한다. 구속성은 충실함을 요구한다. 충실함은 구속성을 전제로 한다. 충실함은 무조건적이다. 여기에 충실함의 형이상학이, 나아가 초월성이 있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휘발성을 지니게 되었다. 불변하고 지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원적인 우연성에 직면하여 우리는 일상성을 넘어선 구속성을 향한 갈망을 느끼게 된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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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거 요약 발췌한 글 읽으니 왠지 이 책 다 읽은 느낌이 듭니다.
클로즈업된 얼굴이 포르노적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남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이소오 2016-07-20 13:43   좋아요 0 | URL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을 떠올리니, 너무 과하지 않은가 생각했는데,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떠올리니 한병철이 왜 클로즈업된 얼굴을 포르노라 부르는지

이해가 되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20 13:48   좋아요 0 | URL
왜 사람에게는 개인적 거리가 있고 사회적 거리가 있잖습니까.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강간이나 이런 것은 결국 거리를 파괴하는 행위죠.
거리를 침범하는 거니깐 말이죠. 클로우즈업은 개인적 거리 안으로
침투할 때 목격하게 되는 상입니다. 한평철이 클로우즈업된 얼굴이 포르노스럽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아닌가 싶네요..

시이소오 2016-07-20 13:53   좋아요 0 | URL
결국 클로즈업은 페니스네요.^^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 6.25 전쟁에서 4.19 전야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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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 폭탄을 투하했다는 주장이 소련, 중국, 북한에 의해 제기되었다. 6월 미국의 세균전 감행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국제과학조사단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구성되었다. 조사에 참가했던 영국 학자 죠셉 니담은 미국이 세균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97%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심지어 전범으로 판명받은 일본인 세균 전문가를 재고용하기 했다. 200072일에 방영된 MBC TV<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일급비밀! 미국의 세균전>은 미국 세균전에 대한 새로운 증언과 증거들을 제시했다.

 

51년 한국의 내정을 취재하고 간 외국 기자들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고 혹평을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사건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지만 부산 정치 파동에 대한 평가로 또 다시 인구에 회자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511130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52128일 표결에 들어갔는데 재석의원 163명 부결이 143표였다. 이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써 소환한다는 협박 성명을 냈다. 521월 말부터 부산에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각종 우익단체들이 살인 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지방선거에서 자유당은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526일로 예정돼 있는 내각제 개헌안 표결을 앞두고 이상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 부산 금정산에 무장공비가 출현, 미군 2, 한국군 3명을 사살하고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헌병사령관 원용덕이 발표한다. 사회분위기는 살벌해지고 얼어붙었다. 나중에 조작된 사건으로 밝혀진다.

 

이승만은 525일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526일 국회의원들이 등원하기 위해 탄 출근 버스가 크레인으로 헌병대에 끌려간다. 다음 날 12명은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투옥된다.



 

이즈음 이승만은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욕을 얻어먹고 있었다. 마닐라에서는 이승만을 베테랑 파시스트라 불렀고 미국 <워싱턴 스타>는 이승만을 파시스트라 비난했다.

 

625이승만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다. 의열단원 출신인 유시대 (당시 62)가 이승만 뒤에서 권총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조작의 냄새가 징후한 사건으로, 이후 이승만을 지지하는 관제 시위에 불을 지핀 격이었다.

 

71일부터 국회 임시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의원들의 강제 연행이 집행된다. 경찰과 계엄군은 국회의원을 잡아 임시의사당에 연금시킨다. 발췌개헌한 기립 표결에 들어가 출석의원 166명 가운데 163명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미군은 거제도에 대규모 포로 수용소를 설치, 176천 명을 수용했다.


미군은 친공, 반공 포로를 마구 뒤섞인 채로 수용했는데, 이게 비극의 씨앗이었다. 거제 포로 수용소는 비인간적인 처우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미군의 갈등보다는 해방동맹이라는 친공 포로조직과 대한반공청년단이라는 반공 포로조직 사이의 유혈극이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7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의 가장 큰 난제는 포로송환 문제였다. 제네바 협정 118조에 따르면,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 송환되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미군측은 이를 무시하고 자유송환원칙을 고집한다. 미국은 왜 이리 자유송환에 목을 맸던 것일까.

 

미국에게 포로 문제는 단순히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전쟁 포로 얼마를 교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념성을 다투는 이념전쟁 자체였고 그것에서의 승리야말로 미국에게는 위신과 명분, 그리고 이데올로기 싸움에서의 승리로 보였던 것이다.”


623일 미군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해 압록강에 위치한 수풍댐과 10개의 수력발전소를 폭파한다. 7~8압력펌프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미군 폭격은 더욱 강화된다. 8월에는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829일 평양 폭격에서만 6천 명이 사망한다.

 

지상전의 경우, 가장 치열한 혈투는 백마고지 전투였다. 106일부터 열흘간 1만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10일 동아 2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85일 치러진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함태영이 당선된다.

부정선거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함태영이라는 사람에 대해 몰랐다. 이범석이 181만 표를 얻은 반면, 함태영은 294만표를 획득했다.


816일 이승만은 제 2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모윤숙은 낙랑클럽을 연다. 고문은 김활란이 맡았다. 고급 콜걸이었다고 해야할까. 외국인을 상대로 한 접대 행위를 서슴지 않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전쟁 중에는 밀수가 극성을 부렸다. 고철을 팔아 1년 만에 17배로 성장한 회사는 이병철의 삼성물산이었다. 구인회의 럭키 화학도 전쟁 통에 큰 성장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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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9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7-19 15:56   좋아요 2 | URL
전쟁통에 돈 번것들, 죄다 이승 만한테 사바사바한 덕분이죠. 이런것들이 오늘날 대기업이라고 떵떵거리며 사축 만드는거잖아요.

하여간 이승만이 저지른 패악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네요.

기억의집 2016-07-1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중인데도 국회에서 표결하기도 하고 그랬군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 이승만 앞장이들이 떠들어대는 대로 믿었을 것 같아요. 모윤숙과 김활란...이미지 세척 제대로 한 신여성들이죠.

시이소오 2016-07-19 19:46   좋아요 1 | URL
서중석 쌤 책 보면 전쟁통 부정선거가 기가 찰 정도네요. 선거장에 군인 총들고 있고 누구 찍었는지 다 보이고, 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더 많아서 퍼센트 다시 맞춘다고 난리 .
아, 저런 ㅂㆍ러지를 국부라니 ㅋ

모윤숙은 친일로 시작해 이승만 박정희 때도 빌어먹었으니
, 참 대단하신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