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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평점 :
한병철은 항상 자신이 쓴 과거의 작품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나아간다. 한병철의 신작을 읽을 때마다 그가 쓴 과거의 저작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한병철이야말로 실을 잣고 새로운 연결의 길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루스트는 삶 자체가 하나의 관계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삶이 사건들 사이에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 끈을 잣고” “조직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이 끈을 두 배로 늘여 우리 과거의 아주 사소한 지점과 모든 다른 지점들 사이에 기억의 풍성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연결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믿는다.
p 108.
한병철이 전작인 <에로스의 종말>에서 에로스를, 사랑을 재발명하려했다면 <아름다움의 구원>에선 미를, 아름다움을 재발명하려 한다.
현대의 아름다움에 공통된 속성이 있다면 무엇일까? 한병철에 따르면, 매끄러움이다. 제프쿤스의 조형물들, 아이폰, 브라질리언 왁싱. 매끄러운 것은 우리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 좋아요의 예술이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추한 것도 매끄럽다. 현대의 포르노그래피들. 데이터는 포르노그래피적이다. 내면성도 없고, 뒷면도 없고, 애매함도 없다.
매끄러운 것은 저항하지 않는다. ‘부정성’따윈 없다.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비동일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는 은폐된 것이고 우리를 상처입히는 것이며 재앙과도 같다. 미는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미란 형용모순이다. 아름다운 대상은 덮개에 싸여 있을 때에라야 아름답다. 벌거벗겨진 대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은유로 지어놓은 아름다운 옷은 글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를 상처입힌다. 현대의 긍정사회는 상처의 부정성을 회피한다. 심지어 사랑조차. 오로지 ‘좋아요’가 지배하는 사회.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본다는 것을 상처로 묘사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도, 나아가 지각조차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p 54.
고통없이, 상처없이 문학도 예술도 없다. 고통과 상처가 없다면 동일한 것만이 반복될 뿐이다.
바르트는 일찍이 사진 이론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에 대해 말했다. (punctum을 이 책처럼 ‘풍크툼’이라 표기하는 게 원음에 더 어울리겠지만, 단어가 내포한 의미를 고려해보자면 ‘푼크툼’이 더 적절해 보인다.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것’이기에.
스투디움은 ‘학습’이라 불린다. ‘to love’가 아니라 ‘to like’로 표현되는 것. 스투디움은 쾌감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다. 단지 피상적인 관심일 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이웃들끼리의 관계맺음이랄까.
스투디움과 달리, 푼크툼은 나를 찌르고 나를 상처 입히고 나를 전율시키는 것이다. 푼크툼은 투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푼크툼은 쇼크처럼 요란한 것도 아니다. 푼크툼은 고요히 나를 찌르는 것이다. 푼크툼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눈을 감고 나서야, 기억 속에서 사후에 드러난다.
한병철은 칸트를 인용하며 재앙(Desaster)과 별이 아닌 것 Unstern(des- astrum), 비성을 연결한다. (‘비성非星’, 참 짜증나는 역어로다) 칸트는 모든 것을 주체의 내면속에 가둔다. 심지어 창공 위의 반짝이는 별까지도. (한병철은 칸트를 까고 주로 헤겔에 기댄다. 나는 반대. 나는 ‘안티헤겔자’다.)
한병철은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대립되는 형상으로 모리스 블랑쇼의 ‘텅 빈 하늘’을 제시한다. 블랑쇼는 어린 시절, 하늘을 바라보다 어떤 돌연한 깨달음을 얻는다. “하늘의 갑작스럽고 절대적인 공허가 엄청난 매혹과 기쁨으로 아이를 급습하여, 한순간 아이는 눈물로 가득 찼다.” (왠지 이 심정이 이해가 간다.)
즉,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을 통해 우리는 주체로 회귀한다. 반면 블랑쇼의 ‘텅빈 하늘’은 우리를 주체로부터 떨어뜨린다. ‘별이 아닌 것’이다. 재앙. 재앙의 미학은 만족의 미학이 아닌 사건의 미학이다. ‘아름다움은 별들의 질서를 교란하는 재앙이다’
<두이노의 비가>에서 릴케는 이렇게 노래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끔찍한 시작일 뿐”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일뿐’이란 번역이 더 어울리겠다)
아도르노 역시 끔찍한 것의 부정성이 미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미는 또한 부서지기 쉽고 깨지기 쉬운 것이다. 좀비는 아름답지 않다. 오늘날 건강과 매끄러움을 추구하는 우리는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칸트는 도덕적 미 혹은 미의 도덕을 미의 이상으로 보았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미는 도덕과 개성을 표현할 때만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현대에 미는 섹시함에 밀려나고 있다. 개성없는 인간이 현대의 이상적인 소비자다. “사람이 개성이 없을수록, 매끄럽고 뱀장어처럼 미끄러울수록 더 많은 친구를 갖게 된다. 페이스북은 개성없음의 시장이다.”
헤겔에게는 미는 진리이자 자유다. 미는 자기목적적인 것이다. 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미는 따라서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미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미는 우리를 관조적인 머무르기로 초대한다.
이상적인 정치는 ‘미의 정치’다. 미의 정치는 또한 자유의 정치다. 시스템의 하수인인 된 정치가는 자유인이 아니라 단지 노예다.
영어에서의 페어fair는 ‘정의롭다’는 뜻과 함께 ‘아름답다’의 뜻도 지닌다. 정의는 아름다운 것이다. 미 앞에서 주체는 뒤로 물러선다. 타자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미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의 위치에 서는 것. 반면 소비자는 타자를 위해 옆으로 물러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섹시함 역시 측면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미 앞에서 우리의 의지는 후퇴한다. 미는 우리를 시간 안에 머무르게 한다. 시간 안에 머무름은 우리를 타자로 향하게 한다. ‘예술의 과제는 타자를 구원하는 데 있다. 미의 구원은 타자의 구원이다’ 니체에 따르면 최초의 예술은 축제의 예술이었다. 노동은 시간의 질을 고양시켜 주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미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재인식이다. 기억으로서의 미의 경험은 소비되지 않는다. ‘미는 이야기한다. 미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있는 사건이다.’ 미는 관계의 사건이다.
에로스는 일찍이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이라 불리웠다. 미는 사유를 추동한다. 에로스 없는 사유는 단순한 노동일뿐이다. 미는 “존재의 시적 이름”이다. 미는 존재자에게 새로운 진리를 산출하게 한다.
미 자체는 “영원히 존재하는” (aei on)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휩쓰는 세계에서 한병철은 ‘미의 이상’을 구원하려한다. 미는 구속력이 있는 것이고 기준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에로스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다.’ 바디우는 이 추구를 ‘충실함’이라 불렀다.
신이 죽으면서 절대주의는 종말을 고하고 상대주의의 세계가 열렸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소비지상주의가 판을 치며 예술은 더 이상 미의 추구가 아닌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팔리는 것이 예술인 시대다. 내가 보기에 한병철은 고전주의자에 가깝다. 나 역시.
고전주의자 입장에서 현대 예술은 죄다 쓰레기다. 제프 쿤스의 쓰레기는 오늘날 가장 비싼 값에 팔린다지. 부자들은 왜 이런 쓰레기를 비싼 가격에 주고 사는 걸까? 쓰레기기 때문이다. 값진 것에 정당한 값을 치른다면 부는 과시될 수 없다. 쓰레기를 사야만 부는 과시될 수 있다. 제프 쿤스는 조형물을 직접 만들지도 않는다. 조수들 시켜 만든다는데, 조영남도 억울할만하다. 애초에 조영남 같은 쓰레기의 쓰레기를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쓰레기일 뿐.
미는 은폐이고 상처이고 고통이고 진리이자 자유, 정의이며 선이고 기억, 또한 타자를 구원하는 것이다.
에로스를, 미를 구원하려 한 한병철의 사유는 이제 어디로 나아갈까? 미 자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아에이온”이라면 그 기준을 다시 세우려 하진 않을까. 혹은 ‘타자를 구원하는 미’를? 한병철은 데이터의 ‘무더기’에 대비하여 ‘내러티브’, ‘사건’을 강조했다. 앞으로 ‘타자를 구원하는 내러티브’를 사유하려 할까. 어찌되었건, 그가 풀어놓는 실이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하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