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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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여행하는 내내 강물 따라 흐르기를 바라는 독자는 내해內海를 다니는 자신의 작은 배가 큰 물결이 이는 바다에 이르면 바닷물이 자꾸 솟구쳐 올라와 멀미가 난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바다의 흐름은 배 쪽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으며 글이 지닌 흐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숨 쉴 때처럼 페이지마다에서 솟아오르고 드르릉 돌아가는 맷돌처럼 옳으니 그르니 따지는 생각들을 싹 씻어버리리라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물결이 자신의 앞이나 뒤에서 좀 더 높은 곳까지 솟구쳐 오르는 것이다.

홍수처럼 잔물결을 일으키고, 물방아 시내처럼 둑길 아래로 즐거이 흘러가는 글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가 마루터기에까지 닿을 때면 피타고라스, 플라톤, 얌블리코스155가 그 곁에 멈춰 선다. 그런 작가들의 길고 끈질기고 힘줄 많은 글월들은 꾸준히 흘러가며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그것은 군인이나 사업가를 위한 글처럼 읽히는데, 그 안에 신속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들과 비교할 때 엄숙한 사상가나 철학자들은 이제껏 배내옷을 벗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지난밤 선봉이 진을 친 곳에 오늘밤 후미가 다시 진을 치는 로마군대의 행진보다도 느리다. 슬기로운 얌블리코스는 물기 많은 늪지처럼 소용돌이치며 반짝인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건강하기만 한 글은 무척 보기 드문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글에 담겨진 생각에서 나오는 빛깔과 향기를 놓쳐버리기 일쑤이다. 빛깔이야 어떻든 아침이슬과 저녁이슬을 보면 기쁨을 느끼고, 색깔이야 어떻든 하늘을 보면 기쁨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가장 매력적인 글은 지혜가 가득 담긴 글이 아니라,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 진솔한 글이다.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는 듯, 탁 터놓고 잘라 말하기에, 슬기로운 글은 못 된다 해도 적어도 확실히 터득된 글이기는 하다.


월터 롤리 경161의 글은 대가 중에서도 눈에 확 뜨이므로, 글투가 뛰어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세히 살펴볼 값어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의 글투에는 사람의 발걸음과 같은 자연스러운 강약이 있고, 현대 최고의 저술가도 내놓지 못하는 글월과 글월 사이에 숨 돌릴 공간이 있다. 그의 글은 영국의 공원, 좀 더 정확히 말해 높이 자란 나무들이 잔 나무들을 억눌러 빈 공간을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유럽의 숲과 같다.

당시의 모든 뛰어난 작가들은-우리 시대를 헐뜬는 말처럼 들리더라도 용서하기 바란다-오늘날의 작가들보다 훨씬 활기 넘치는 글을 척척 써냈다. 우리가 현대 작가를 읽던 중에 그들의 글에서 끌어온 구절들을 읽게 되면 돌연 흙질이 좋고 깊은, 싱싱한 초록의 땅을 만난 것처럼 느껴진다, 겨울철이나 이른 봄날에 뜻밖에 싱싱한 풋나무를 보게 되듯, 푸른 나뭇가지 하나가 페이지에 가로놓인 것처럼 보여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런 글들을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삶의 체험에 놓인 바탕을 알게 된다. 짧은 글에 담겨진 암시를 통해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글은 사상과 경험에 뿌리를 내렸기에 상록수처럼 푸른 잎이 우거져 꽃처럼 피어나지만, 우리 시대의 꾸며낸 글들은 수액과 뿌리는 없이 꽃의 화려한 색깔만 띠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말이 지닌 꾸밈없는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마련인데도, 그들은 그렇게 현란한 글투로 남을 흉내 낸 글을 쓴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글을 화려하게 쓰고 싶어 한다.

(중략)

모든 글은 오래된 단련의 결과이다. 일반 서민들의 말이 아니면 어디에서 표준영어를 찾을 수 있겠는가? 가장 좋은 말은 말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런 말은 글쓴이가 더 잘할 수 있었을 어떤 행위와 무척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급한 사정에 의해서든, 불운에 의해서든 그것이 행위를 대신한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결국 가장 진실한 작가는 사로잡힌 기사의 몸이어야 한다. 운명의 여신은 그런 계획을 갖고서 롤리로 하여금 실제의 삶을 넉넉히 겪어보도록 한 다음 그를 죄수로 만들어, 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삼고, 자신이 했던 중요하고도 진실한 행동을 말로 옮기도록 한 것이 아닐까.

(중략)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뛰어난 표현과 관련하여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훌륭한 생각이 형편없는 의복에 싸여 있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물지만, 훌륭한 생각이라면 월로프족166의 입술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뮤즈의 아홉 여신과 미의 세 여신이 맞들어서 그에 알맞은 옷을 입혀줄 것이다. 그런 교육이 바로 교양이고, 그 속에 든 재치가 대학에 기금을 가져다준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이렇게 배겨내지 못하는 온갖 장식들을 조금씩 없애버림으로써 이룩되었다. "시빌167이 오랜 세월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능력을 받아 진지하고 꾸밈없으며, 향내 풍기지 않는 영감을 받은 입술로 말했기 때문이다."

학자는 될수록 자주 농부가 소를 부르는 소리에서 강조하는 방법과 특징을 배우려 애써야 한다. 농부의 소 부르는 소리가 글로 쓰여진다면 공들인 자신의 글보다 훨씬 나을 것임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누구의 글이 진정으로 공들인 글일까? 우리는 정치가나 문학가의 얄팍하고 나약한 미문美文에서 벗어나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들을 간단히 적어놓은 농부의 달력이나 작업일지와 같은 것들로 관심을 돌림으로써 활달한 기풍과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글이란 글쓴이가 펜 대신 쟁기를 집어든다면 끝까지 깊고 곧게 밭고랑을 낼 것이라는 느낌을 읽는 이에게 주어야 한다. 학자라도 활달하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되고 진지한 노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 굳게 펜을 잡아야만 도끼나 칼을 휘두르듯이 펜을 품위 있고 효과적으로 휘두를 수 있다.

키가 자기 종족의 표준을 훌쩍 넘어서고, 허리둘레 또한 모자라지 않은 일부 문학가들이 갈겨대는 얄팍하고 생기 없는 미문을 생각할 때, 그 근력과 힘줄의 엄청난 낭비에 깜짝 놀라게 된다. 어떤가, 이러한 대비가! 엄청난 몸집과 나약한 글투 사이의 이러한 어긋남은 왜 생기는가? 황소도 내리쳐 쓰러뜨릴 수 있는 두 손으로 숙녀의 손으로도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무른 물건이나 자르다니! 이것이 등에 뼛골이 있고, 뒤꿈치에 아킬레스건이 있는 건강한 사내가 할 짓인가? 스톤헨지168에 커다란 돌을 세운 이들은 단 한 번 힘을 썼을 뿐인데도 온힘을 다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해냈다.

그렇지만 대단히 능률적인 노동자는 하루를 일에 치여 보내는 법이 없다. 오히려 어슬렁어슬렁 일하는 그는 안락하고 한가하다. 지극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면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그는 열매를 맺힐 시간의 알맹이만 성실하게 이용한다. 암탉이 왜 하루 종일 알을 품어야 하는가? 암탉은 하루 한 번 이상은 알을 낳지 않는다. 암탉은 또다시 알을 낳기 위해 모이를 쪼아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손톱 깍는 일과 같은 하잖은 일일지라도 그에게 시간을 넉넉히 갖게 해주자. 새싹은 짧은 봄날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돋아난다.

           그러니 자신의 욕구를 돋우는 데 한 시절을 보내라.
           꿋꿋이 서 있으면 서두르지 않아도 자라난다.

어떤 시간은 일을 하기에는 도무지 알맞지 않고, 숨을 들이쉴 작정이나 하기에 알맞은 것 같다. 그럴 때는 피가 끓어 당장 달려들려고 조바심을 낼 일이 아니라, 반쁨은 벌써 이루어졌다는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문을 닫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서 이리저리 거닐어야 한다. 씨앗이 자체에 들어 있는 배젖으로 싹을 틔워 땅 밑으로 내려 보내고 나서야 햇빛을 향해 자라나듯, 우리의 결심도 그렇게 하고 나서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굳건해진다.(130∼136쪽)


주석
155. Jamblichus(245∼325): Iamblichus Chalcidensis로도 알려져 있다. 후기 신(新)플라톤 철학과 서구 이교(異敎) 사상의 방향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아시리아의 철학자.

161. Sir Walter Raleigh(1552∼1618): 영국의 귀족, 시인, 작가, 군인,조신(朝臣),탐험가. 1591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여왕 시녀와 결혼한 죄로 런던타워에 갇힌다. 풀려난 후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나, 1594년 남미의 '황금 도시' 소식을 듣고 남미로 항해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엘도라도 전설에 큰 기여를 한 책을 썼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1세에 대항하는 모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다시 런던타워에 갇히나 2차 엘도라도 탐험을 위해 풀려나지만, 이 탐험은 성공하지 못하고, 귀국 후 스페인을 달래려는 영국정부에 의해 살해된다.
166. Wolofs:세네갈과 감비아 대서양 연안에 사는 흔인 종족.
167. Sibyl: 델포이 신전이 세워지기 전 델포이 여자 예언자 시뷜레에서 온 말로, 예언자, 신탁을 전하는 사람의 뜻.
168. Stonehenge: 영국 Salisbury 평원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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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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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우리는 책을 골라 읽을 필요가 있으니, 책은 평생 사귀어야 하는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진실한 책만 읽어라. 통계, 소설, 뉴스, 보고서, 정기간행물 따위는 읽지 말고, 위대한 시만 읽어라. 그것들이 동이 났을 때는 되풀이해서 읽거나, 아니면 스스로 더 많이 쓰려고 해보라. 우리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보다는 자신의 온전한 생각을 시나 찬송으로 바쳐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삶의 길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루가 온종일 대낮일 필요는 없으나, 하루가 저절로 싹틔울 수 없는 시간이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씩은 있어야 한다. 학자들은 학식 한 더미면 장자상속권을 팔아넘기려 할 것이다. 투기꾼들이 출판하고, 생각이 모자란 이들이 탐구하고, 게으른 이들이 읽는 책, 즉 러시아인들과 중국인들의 문학, 심지어 프랑스 철학과 대다수 독일의 비평조차 과연 알 필요가 있을까. 참으로 훌륭한 책부터 읽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읽을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재물을 희생으로 바치고, 어떤 이들은 고생을 희생으로 바치고, 또 어떤 이들은 열띤 헌신을 희생으로 바친다. 마찬가지로 열정을 가라앉히고 굳은 맹세를 한 수행자들은 경전 읽기를 희생으로 바친다. ······ 재물의 희생보다는 지식의 희생이 더 낫다. 오 아르주나여, 모든 행위는 지식에서야 그 마루터기에 이른다.141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늘 보살핌이나 칭찬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피곤하다고 읽기 쉬운 소설책에 엎드리기보다는 낮잠을 자두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훌륭한 생각을 제대로 앞쪽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그 생각이 다다르는 지점에 서 있어야 한다. 굽실거리는 재미를 주는 책이 아니라, 그 속에 든 생각 하나하나가 보기 드물게 담이 큰 책, 게으름뱅이는 읽을 수 없고, 마음 약한 이는 즐기기 어려운 책, 심지어 현존 제도에서는 읽는 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책을 나는 좋은 책이라 부른다.

인쇄하고 제본했다고 해서 전부 책이 되는 것은 아니고, 책이라고 해서 다 문필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명생활에 딸려오는 다른 부속품이나 사치품과 다를 바 없는 경우가 더 흔하다. 질 낮은 물건을 속여 떠넘기는 방법은 수천 가지에 이른다. 언젠가 어느 행상인이 내게 말했듯, 물건이야 어떻든 "팔아치우려거든," 조건만 맞으면 "재빨리 넘겨버려야 한다."


너희 굽실거리는 속물들아.
햇살이 비춘 적 없는 곳에서
자기 지식을 사고파는구나.


서적업과 문필업이 번창한 덕분에 책들이 교묘히 편집되어 나와서는 학식 깨나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새로운 궁리가 열매를 맺고, 자연스럽게 산고를 거쳐 태어나기라도 한 듯, 커다란 인기와 성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표지가 떨어져 나가 어떻게 꾸미더라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지 못하기에 도무지 경經이나 서書로 보이질 않게 된다. 인류의 삶을 나아지게 한다고 주장하는 이런 종류의 발명품들이 현재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읽는 법을 배운 수많은 순진한 학자들과 천재들이 한순간 거기에 홀려 거룩하고 고요한 진리를 찾다가 말이 끄는 써레나 방적기, 나무로 만든 육두구열매, 떡갈나무잎담배, 증기다리미, 화덕을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상인들은 일어나
상품과 양심을
뒤섞어 놓는다.142


이제 종이 값이 싸졌기에 저자들은 또 다른 책을 쓰기 위해 예전에 쓴 책을 지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땅뙈기에 밀과 감자를 키우는 대신에 '학식의 공화국'에 지식뙈기를 차지하여 문학을 키운다. 사람들이 낟알 작물을 키워 증류주를 만들듯, 어떤 이들은 순전히 이름을 날리기 위해 글을 쓸지도 모른다.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대부분의 책은 하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더 큰 물건의 부품으로 쓸 요량으로 급작스레 만들어진 것이다. 자연사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점원들이 쓴 보기표, 다시 말해 하느님의 특성 목록을 알릴 속셈으로 서둘러 작성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의 거룩한 관점은 조금도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탐구하는 통속적인 견해와 방법만을 가르치면서 끈기 있는 학생들을 자신이 늘 갇혀 있는 딜레마로 서둘러 이끈다.


그는 가운을 입고 아테네로 가서
많은 교육을 받은 바보로 천천히 돌아온다.143


실제로 그들은 지식의 요소들이 아닌 무지의 요소들을 가르친다. 가장 높은 진리의 경지에서 생각해보면, 지식의 바탕을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식과 무지 사이에 놓인 틈새는 과학의 아치로는 건널 수 없는 틈새이다. 땅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한 번도 항해해본 적 없는 사람들의 항해 기술이 아니라, 배가 부서져 바다를 떠도는 뱃사람들이 얼핏 본 마른 땅과 같은 그런 순수한 발견을 책에 담아야 한다. 지은이가 꼭 밀과 감자를 거둬야 할 필요까지는 없고, 열매 자체가 지은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거둔 삶의 열매라야 한다.


배운 건 모두 나의 것,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뮤즈들로부터 귀한 진리를 깨우쳤기에.


우리는 학술 서적에서 배우기보다는 참사람이 정성을 다해 쓴 책, 다시 말해 성실하고 정직한 전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선량한 사람의 삶이라고 해서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해적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필연의 법칙은 규칙을 따르는 이에 못지않게 어기는 이에게도 뚜렷이 드러나고, 우리의 삶은 거의 엇비슷한 미덕을 값으로 치르고서야 배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썩어가는 나무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싱싱한 나무와 마찬가지로 햇빛, 바람, 비가 필요하다. 썩어가는 나무에도 수액이 배어나오고, 일부 활동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무 겉재목144만 연구해도 좋다. 옹이가 많은 그루터기도 새싹은 어린 나무의 새싹에 못지않게 부드럽다.


우리는 아무리 못해도 말이 끄는 튼튼한 써레 하나와 깨지지 않는 화덕 하나, 그리고 건강한 책 몇 권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 공공의 일에만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봄철에 잘려나가 진액을 흘리다가 죽고 마는 덩굴과는 달리, 구유로 흘러드는 수액 말고도 자체적으로 목숨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수액을 갖춘 사탕단풍나무와 같은 씩씩한 기운을 갖고 있어야 한다.

시인이란 곰이나 마멋처럼 겨울 내내 긁어대기에 충분한 지방질을 모아둔 사람이다. 그는 이 땅에서 겨울잠을 자면서 자신의 뼛골을 먹고 산다. 우리는 겨울철에 눈 덮인 들판을 걸으면서 땅속에 누운 행복한 몽상가들에 대해, 산쥐류에 대해, 다시 말해 냉기가 스며들지 못하는 두툼한 몇 겹의 털가죽에 싸여 있어 삶의 여유를 갖게 된 저 모든 종족들에 대해 즐거이 상상해보게 된다. 슬프게도 시인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주변 상황에 무감각해진 채 깊고, 고요한 생각의 겨울 숙소로 들어간 산쥐류와 같다. 그의 언어는 가장 오래되고 정제된 기억의 진술이자 아득히 먼 체험에서 이끌어낸 지식이다. 그동안 다른 이들은 매처럼 공중에 떠 있으면서 가끔씩 참새라도 낚아챌 수 있길 기대하며 기꺼이 굶주린 삶을 이어간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 땅에서 키워낸 내세울 만한 에세이와 시들이 있다. 하지만 대형 서랍 하나만 있어도 남김없이 모조리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을 숨 쉬게 해달라는 요청을 신들이 아무 값없이 들어주었다 해도, 대중은 이런 에세이와 시들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늘에 들리는 진리의 글이라면 결국 땅에서도 들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에세이와 시들은 이미 케케묵어 보이고, 벌써 타고난 자취를 얼마쯤 잃어버렸다. 그러기에 여기 "참되고 뚜렷한 삶을 위해 쉼 없이 평생의 빛을 요구하는" 이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랫둑을 뒤덮지는 못했을지라도, 초원에서 나고 자라 단 한 번도 뿌리가 뒤집혀본 적 없는 잔디처럼 솟아나는 글월 몇 개를 떠올리면서, 시인의 다음과 같은 기도에 응답해보고자 한다.


우리 공정하게 지식의 등급을 정하자.
세상이 시인의 글을 믿을 수 있도록,
모든 작품이 그 자체에 대한 아첨이라고
여전히 주장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145


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장의 항구로 가서 새로운 뉴잉글랜드 시대를 열어갈 그리스의 올림픽 대회와도 같은 평화의 라이시엄146 대회에 자주 참석한 편은 아닌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올림피아로 역사책을 들고 가 권투경기와 육상경기가 끝난 후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이시엄에서 그렇게 역사책을 외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가끔씩 그리스를 잊어도 좋을 만큼 주민들이 그렇게 많이 읽었기 때문일까? 철학 또한 그곳에 제법 나무가 우거진 길과 주랑柱廊을 갖추었기에, 그래도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간혹 찾는 편이다.

(중략)

지금 당신의 얼굴에서 아폴로가 빛나고 있다. 오, 드문 인연으로 같은 시대를 사는 이들이여, 우리 저 열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자. 지나고 지나는 덧없는 아름다움일망정 좀 더 미묘하고 거룩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져다다오. 그러면 시에도 머무르지 않고, 포도주의 본디 색깔을 오롯이 비추는 저 순수한 물에도 머무르지 않으리라. 호탕한 무역풍아, 불어라. 그래서는 이 영감의 왈츠를 멈추어다오. 인디언의 하늘에서 우리 뺨 위로 불어오는 부드러운 남서풍이라도 더 자주 느껴보도록 하자. 수많은 별똥별들을 다 잃어버린다면 하늘 깊은 곳과 우주 먼지와 흩어놓지 못하는 성운이 남은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수많은 슬기로운 신탁들을 다 잃어버리는 대신에 일구지 않은 몇 에이커의 이오니아 땅을 갖게 된들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122∼129쪽)


주석
141.『바가바드기타』제4장 28절 이하 참조.
142. Francis Quarles의 시.
143. Francis Quarles의 시.
144. 나무의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하다.
145. William Habington의 시.
146. Lyceum: 성인을 위한 독서회, 토론회. 강연회가 열리던 마을 회관을 일컫는다. 이 라이시엄 운동은 1828년 메사추세츠 밀버리에서 강좌가 열리면서 급속히 퍼져나가 1830년대 중반까지 수천 개가 생겨났다. 시골 작은 마을에까지 널리 퍼졌고, 강사는 주로 목사, 교수, 과학자, 개혁가, 작가였고 청중은 대체로 젊은 노동자나 상인이었다. 초월주의 운동의 전개는 이 라이시엄의 확산과 연관이 있고, 미국이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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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4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맑게 하는 책을 읽고
마음을 사랑스레 다스리는 글을 써야지요!
맞습니다.

oren 2013-12-04 16:53   좋아요 0 | URL
제가 책에서 옮겨 쓴 내용들에 대해 함께살기 님께서 뜨겁게(?) 공감해 주시니 그저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일정한 직업조차 없이 '자발적 빈곤'을 실천하던 소로우가 불과 서른두 살에 이토록 깊이있는 내용의 책을, 그것도 '자비'로 출판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더군다나 이 책의 주된 무대 배경인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의 여행'은 소로우가 (이 책을 출판하기 무려 10년 전인) 스물두 살에 겪었던 일이었다는 점도 제겐 참 놀랍더군요.
 


알라딘에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한지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다.

며칠전 문득 '서재 태그' 맨 밑에 달려 있는 more 버튼을 슬쩍 눌러 봤더니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그동안 글을 쓸 때마다 심심풀이로 적어 넣었던 '태그'들이 깨알같이 모조리 떠올랐던 것이다. 역시 알라딘은 가끔씩이나마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요술램프에서 피어오른 형형색색의 글씨들을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곧바로 창피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글씨들 가운데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글씨들을 클릭해 보니 온통  그 '글씨'와 관련된 (베껴쓴) 글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모조리 빠짐없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글들은 대부분 내가 그 책을 쓴 저자와 책 내용을 그냥 한번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앞으로도 두고 두고 읽어볼 요량으로 (나만 봐도 좋고, 남들이 봐도 나쁠 건 없다 싶어서) '그냥' 올려놓은 글들도 많았다. 물론 내가 그동안 베껴쓴 내용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어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결국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법인가 보다. 지금에 와서 '태그'를 일일이 찾아 없애기에는 너무 일이 벅찼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무래도 그동안 애써 엮어 놓은 태그를 지우는 일은 '스스로 죽을 꾀를 내는 일은 아닌가' 싶어서 조금 고민스러웠다. 내가 애써서 베껴쓴 글을 도대체 '태그' 하나 때문에 내가 그 글들을 모조리 지워야할 까닭이 뭔가 싶었다. 이리 저리 고민하던 끝에 정말 뜻밖에 책 한 권이 내 눈에 번쩍 띄었다.













'베껴쓰기'도 글쓰기 연습이 되는구나. 여태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책은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럼 그동안 열심히 책 내용을 베껴쓰는 일을 알라딘의 주된 과업으로 삼아온 나는 내 나름대로는 글쓰기 연습을 한 셈이로구나......

그럼 나는 과연 예전에 비해 글쓰는 게 좀 나아졌을까. 그건 좀 자신없다. 내가 쓴 글은 예전에 쓴 거나 최근에 쓴 거나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다만 맞춤법이나 조금 덜 틀리게 쓰고 내 멋대로 지어내던 비문이나마 조금 줄어들었으면 다행이겠지. 다만 그동안 훌륭한 인물들이 애써 만든 책들을 읽으며, 거기서 발견한 인상깊은 구절들을 열심히 베껴쓴 덕분에, 그들을 조금씩 흉내내려고 어줍잖게 애쓰고 있는 모습들은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늘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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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30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마음에 밥이 되어 준 말인걸요.

oren 2013-11-30 12:35   좋아요 0 | URL
저 많은 말들을 제가 '밥'처럼 먹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니 나는 정말 '잡식성의 딜레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말 괴상한 동물이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역겨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로진은 인간이 '잡식성의 딜레마'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유칼립투스 잎을 주식으로 먹기 때문에 그것이 부족해지면 위기에 처하는 코알라와는 달리, 잡식성 동물들은 광범위한 메뉴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단점은 많은 음식들이 유독하다는 것이다. 많은 종류의 물고기, 양서류, 무척추동물이 강력한 신경독을 갖고 있다. 평상시에는 무해한 고기에도 촌충 같은 기생충이 있을 수 있고, 상한 고기는 부패를 야기하는 미생물들이 청소동물들을 막고 고기를 독차지하기 위해 독을 분비하기 때문에 굉장히 치명적이다. – 스티븐 핑커

saint236 2013-11-3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해봐야겠는데요. 전 분량이 절반도 안될 것 같은데요

oren 2013-11-30 12:38   좋아요 0 | URL
태그를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따라 분량이 좌우되는 셈이니,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 싶어요.
알라딘 서재의 달인들은 아마도 '태그'가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ㅎㅎ

saint236 2013-11-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해봤는데....장난이 아니네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이 줄줄이 나오네요.

oren 2013-11-30 12:40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각자 얼마나 다른 '태그'들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다 싶어요.

transient-guest 2013-12-0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기'와 '쓰기'에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런 책을 소개받게 되니 참 좋네요.

oren 2013-12-02 09:26   좋아요 0 | URL
읽기와 쓰기는 누구나 다 고민하는 문제이지 싶어요. 우린 하루도 읽지 않거나 쓰지 않으면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상품넣기'로 소개해 드린 저 책은 저 또한 읽어 보지 못한 책이라, (감히 추천해 드릴 처지는 못 되고) '그냥' 소개만 해 드릴 뿐임을 헤아려 주세요~

페크pek0501 2013-12-0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심하게? 많은 태그입니다. 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군요.
베껴쓰기... 중요하다는 것 알고 있었어요.
신경숙 작가도 이십대에 오정희,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노트에 베껴 썼다고 해요.
저는 요즘 좋은 문장을 여러 번 읽는 걸로 대치하고 있어요. 마음으로 베끼는 것이죠. ^^

oren 2013-12-02 15:37   좋아요 0 | URL
pek 님의 댓글을 읽어 보니, 문득 학교 다닐 때 국어선생님께서 좋은 시를 많이 암송하게 했던 '숨은 이유'도 알 듯 하네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더욱 좋은 방법은 많이 외우는 것이겠죠. 앞으로는 딱딱한 문장들보다는 '아름다운 시'를 많이 외웠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어요.
 
봄에는 푸르고 가을에는 노랗게 무르익어라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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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당신의 글(소로우가 잡지에 발표한 산문)을 읽고 전에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다시금 내 기억 속에 떠올랐습니다. 지난번 콩코드에서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당신은 우리의 문명 사회를 떠나는 것에 대해 진지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당신 친구들이 속해 있는 이 사회가 그립지 않겠느냐고. 당신의 대답은 매우 단호하고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니오. 난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습니다." (13쪽)



 

"강둑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볕의 따뜻함을 느낄 때, 황금빛 모래를 헤치고 드러난 붉은색 흙을 바라볼 때, 부스럭거리는 마른 잎 소리와 개울에서 눈이 녹아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다른 어느 곳에서 인간 세상의 왕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야생의 숲에서 학생이 되고 자연의 아이가 되고 싶다."

소로우가 '향수병에 걸린 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듯' 자신만의 고독한 숲으로 들어가자, 주위 사람들은 도대체 거기에서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다. 소로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할 일은 충분하지 않겠소?" (39쪽)

 

 

 

소로우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육신은 하버드 대학 안에 있었지만 마음과 혼은 언제나 소년 시절의 풍경 속에서 살았으며, 공부하는 데 보내야 할 대부분의 시간들은 고향 마을과 숲을 찾아 헤매고 호수와 시내를 탐험하는 데 쓰여졌다고 고백한다.

한번은 하버드 동문이기도 한 에머슨이 하버드 대학은 모든 분야의 지식을 가르친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하자 소로우는 "하지만 그 근본은 가르치지 않지요."라고 일축했다. (51쪽)

 

 

 

양가죽은 양들이 갖고 있도록 내버려둡시다

소로우에게 대학의 강의와 교육은 울창하기만 한 숲이었다. 그가 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스스로 폭넓은 독서와 자기 수양을 통해 얻은 이득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소로우는 하버드를 졸업할 때 졸업장을 위한 수수료 1달러 지불을 거부하며 말했다.

"양가죽은 양들이 갖고 있도록 내버려둡시다."

졸업장은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51쪽)

(나의 생각)

이집트의 신전을 두고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고 했던 『
월든』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 * *

피라미드


여러 민족들은 그들이 다듬어서 남긴 석재의 양으로 자신들에 대한 추억을 영구화하려는 광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차라리 그만한 노력을 자신의 품행을 가다듬는 데 바쳤다면 어땠을까? 한 조각의 양식良識은 달까지 솟아오른 기념비보다 더 기릴 만한 것이 아닐까?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 테베의 장관은 천박한 장관일 뿐이다. 인생의 참다운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100개의 대문을 가진 테베의 신전보다는 어느 정직한 사람의 밭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돌담이 더 의미가 있다. 야만스럽고 이교도적인 종교와 문명은 화려한 신전들을 짓는다. 그러나 기독교, 참다운 기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한 민족이 다듬는 돌은 대부분 그들의 무덤으로 간다. 그야말로 그들은 스스로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한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차라리 그 작자를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뜯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했으리라.(『월든』 中에서)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어느 날 오후, 소로우는 수선을 맡긴 구두를 찾으러 월든 호수를 떠나 마을로 나왔다가, 세금 징수원과 마주쳤다. 그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당장 잡아 가두겠다고 협박하자, 소로우는 '지금 당장 나를 잡아 가두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징수원은 지체하지 않고 그를 콩코드 감옥에 가두었다.

소식을 들은 에머슨이 감옥이라는 새로운 은신처에 기거하고 있는 소로우를 찾아와 물었다.

"자네는 왜 이런 감옥에 있는가?"

소로우는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왜 감옥 밖에 있습니까?"

소로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의 고모가 세금을 납부해 버림으로써 그의 의미 있는 저항은 하루 만에 막을 내린 듯 보였지만, 그는 이것을 계기로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시민의 불복종>을 쓰게 된다. 이 역작으로 증명되듯 감옥에서의 하룻밤은 소로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소로우는 그 하룻밤을 회상하며 말했다.

"정부 사람들은 나의 가장 큰 소망이 감옥의 돌벽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들이 나의 명상의 문에 열심히 자물쇠를 잠그려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명상은 나의 허락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그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나의 명상이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나의 육체를 처벌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정부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일말의 존경심마저 사라지고, 오히려 그들을 동정하게 되었다." (64쪽)

(나의 생각)

'수많은 군사와 맞서 그 총사령관도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남자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子曰 三軍 可奪帥也 匹夫 不可奪志也(자왈 삼군 가탈수야, 필부 불가탈지야)

소로우도 공자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의 책에서도 논어의 이 대목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공간이란 어떤 종류의 공간인가?

월든 호숫가에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사는 소로우에게 사람들은 묻곤 했다.

"당신은 그곳에서 무척 외롭겠군. 특히 비나 눈이 내리는 날과 밤 같은 때는 이웃이 그리울 것 같은데."

소로우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거주하는 지구 자체가 우주 공간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저 별의 넓이는 인간이 만든 기계로는 측정할 수도 없는데, 저 별에 살고 있는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의 거리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내가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지구는 은하수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당신의 질문은 내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그의 동료들로부터 분리시켜 그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공간이란 어떤 종류의 공간인가? 아무리 발이 애를 쓰고 있더라도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가까이 살고 싶은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들끓는 곳은 분명 아닐 것이다." (71쪽)

 

 

 

글 속에서는 노동의 미덕이, 펜에서는 삽질에서 오는 강인함이, 연구에서는 야생의 자연이 함께하기를

한번은 에머슨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소로우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

지혜로운 자에게는 어느 곳이든 같은 곳이고, 각자 서 있는 곳이 그의 가장 좋은 자리이다. 소로우는 여행을 통해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영혼과 만났다.

<야생 사과>에서 소로우는 말하고 있다.

"야외에 적합한 사색이 있는가 하면, 집 안에 적합한 사색이 있다. 나는 나의 사색이 야생 사과와도 같이 산과 들을 돌아다니는 도보 여행자를 위한 것이기를 희망한다. 집 안에서 맛을 보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맛이기를."

글쓰기에 있어서도 소로우는 글쓰는 일과 노동, 펜과 삽, 실내에서의 연구와 바깥에서의 활동을 동시에 갖출 것을 주장했고 또 실천했다. 글 속에서는 노동의 미덕이, 펜에서는 삽질에서 오는 강인함이, 연구에서는 야생의 자연이 함께하기를 그는 바랐다.

문학 비평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소로우의 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다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완벽한 표현이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사색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또한 소로우가 그렇게 태연히 앉아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사방을 산책하면서 정열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콩코드 강과 매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서문에서 소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서재와 도서관, 심지어 시인의 다락방 냄새조차도 나지 않고 오직 들판과 숲의 냄새만 난다고 믿는다. 또 이 책은 지붕을 덮지 않은 툭 트인 하늘 아래 펼쳐 놓고 사계절 비바람을 맞도록 만든 야생의 책이어서, 어떤 서가에서도 보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28∼129쪽)

 

 

 

성경이라면, 어느 성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소로우는 자신의 저서에 동양 고전들을 자주 인용하곤 했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의 성경처럼 동양 경전들에도 '성경'이라는 명칭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양 경전의 가치와 우월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한번은 그를 찾은 한 손님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자 소로우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성경이라면, 어느 성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이제 그만 고전 작품들을 잊자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고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지성을 갖추게 될 때, 그때 가서 고전을 잊어도 늦지 않다. 베다 경전들, 조로아스터 교의 경전들이 기독교의 성경과 어우러져 바티칸 궁전 같은 곳을 채울 때, 인간은 비로소 천국에 오를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137쪽)

 

 

 

제가 언제 그 분과 싸운 적이 있었던가요?

"나는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구별하는 행위의 쓸모없고 불공정하고 철없는 편견과 무지를 개탄한다. 나는 브라흐마 신과 크리쉬나 신과 부처의 위대한 혼을 하느님만큼이나 좋아한다."

소로우의 이런 직설적 발언들은 콩코드 교회의 교적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게 만들었다.

소로우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그를 찾아온 이모가 그에게 물었다.

"이제 하느님과 화해했는가?"

그러자 소로우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한 번도 그분과 다툰 적이 없는데요." (138쪽)


(나의 생각)

마지막 문장은 소로우의 글을 다룬 다른 책에서 봤던 번역이 훨씬 더 기억에 남는다.

"제가 언제 그분과 싸운 적이 있었던가요?"

 

  

 

나에게 단순하고, 값싸고, 소박한 주제를 달라

누군가는 소로우의 글을 읽고, 그는 자연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 놓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로우 자신은 말한다. 작가는 모두 자연의 서기라고. 자신은 글쓰는 옥수수이며 잔디이며 대기라고. 소로우의 문학의 주제오아 소재는 그의 삶만큼이나 소박하고 직접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주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생활이 모든 것이다. 나에게 단순하고, 값싸고, 소박한 주제를 달라. 나는 평범한 것을 기술한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매력적이고 진정한 시의 주제이다. 나에게 무명의 생활, 빈자와 천민의 오두막집, 세상의 평범한 나날들, 메마른 들판을 달라. 좋은 시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워서 어째서 모든 사람이 다 시인이 되지 못하는가 의아할 정도다. 시란 건강한 말에 다름 아니다. 멋진 시 구절들을 대하노라면 내가 겪은 평범한 일들을 그저 이 시인이 보고 듣고 느낀 대로 토로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쓰는 문장은 오랜 경험의 결과이며 속표지에서 책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책 속에는 저자의 인품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 이것은 저자 자신도 교정할 수 없다고 소로우는 말한다.

소로우는 또 보스턴 자연사 협회의 명예회원이자 통신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단체에서 소로우에게 자연사 연구 분야에 국한시켜 보고서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소로우는 번번히 거절했다. 자신의 내적 정신과 관찰 사실을 따로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사람들이 소로우에게 새를 연구하고 싶을 때에도 정말로 새에게 총을 겨누지 않느냐고 비웃듯 묻자, 소로우는 한마디로 대답했다.

"당신들을 연구하고 싶을 때는 꼭 당신들을 쏴야만 한단 말입니까?" (143∼144쪽)

 

  

 

한 번에 한 세상

일생 동안 소로우가 일관되게 지켜온 삶의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본연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그의 삶의 원칙은 죽음이 다가와도 흔들림이 없었고,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잃지 않았다. 소로우를 방문한 한 종교인이 내세에 대해 설명하자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한 번에 한 세상"

······

소로우는 말했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작고 야트막한 돌로 된 그의 묘비에는 이름과 사망한 날짜 이외에는 어떤 글도 새겨지지 않았다.

"내가 가진 가장 뛰어난 재능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땅을 껴안을 수 있다. 그 안에 묻히더라도 역시 즐거울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그동안 한 번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217쪽,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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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11-22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에게서 너무 멀어진 저를 봅니다. 이제 월든을 다시 꺼낼 시간인 것 같아요.

oren 2013-11-22 15:29   좋아요 0 | URL
소로우는 늘 한결같이 거기에 머무르고 있으니 언제든 dreamout 님께서 마음 내킬 때 다가가시면 반갑게 맞아주리라 믿어요. 댓글로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야클 2013-11-22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덕분에 슬슬 소로우에 관심이.... ^^

oren 2013-11-22 15:32   좋아요 0 | URL
야클 님 오랜만이네요.
야클 님께서 소로우를 만나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오기를 바랄께요~
그리고 또 소로우와 함께 하는 시간은 천천히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더불어 바랄께요~

페크pek0501 2013-11-2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겨울이야말로 독서의 계절이에요 저에겐요...
오렌 님이 관심 가진 책에다가 소로우 지음, 류시화 옮김...이라... 더 관심이 가네요. ^^

oren 2013-11-27 17:06   좋아요 0 | URL
소로우가 쓴 책들은 대부분 번역하신 분들이 단단히 마음먹고 달려들어 쓴 책들이라 번역이 좋은 것 같아요.
이 책을 번역하신 류시화 님 또한 '월든' 호수를 여러번 찾았고, 소로우가 쓴 여러 책들을 두루 살펴본 이후에 이 책을 번역한 흔적이 역력하더라구요. 소로우를 친근하게 만나기 위해선 이 책도 아주 좋은 길동무가 되리라 여겨져요.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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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10. 자기 의지의 아낌에 대하여


소란스럽게 꿈틀거리지 않으면 1116

어떤 일에 흥분해서 거기 잡혀 끌려 드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그들에게 상관 있는 일이거나 없는 일이거나, 어디를 가도 그 모양이다. 그들은 일이 있는 데서나 의무를 진 데서나 무차별하게 끼어들어 간섭한다. 그리고 소란스럽게 꿈틀거리지 않으면 산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일을 위해서 일을 찾는다."(세네카)


이런 것만이 우리가 인색해야 유익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 1116

아무도 남에게 자기 돈은 나눠 주지 않으나 각자는 남에게 자기 생명과 시간을 나눠 준다. 이런 것만이 우리가 인색해야 유익하고 칭찬받을 만한 일인데, 이보다 우리가 더 낭비하고 있는 것도 없다.


초조는 시간을 늦춘다 1121


철학은 우리가 받은 모욕에 대한 징벌에서, 거기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흩뜨리기를 바란다. 그것은 복수를 덜 하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더한층 확실하고 준엄한 일격을 가하기 위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것은 지장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분노는 마음을 혼란시킬 뿐 아니라, 그 자체로써 징벌하는 자들의 힘을 피로하게 한다. 그 열기가 그들의 힘을 마비시키고 소모시켜 버린다. 초조하게 굴면 "초조는 시간을 늦춘다"(퀸투스 쿠르티우스) 조금합이 다리를 내밀며 거기 걸려서 멈추게 한다. "조급은 오히려 얽혀들게 한다."(세네카) 예를 들면, 내가 보통의 습관에서 보는 것처럼, 탐욕에는 그 자체보다 더 큰 장애가 없는 것이다. 탐욕이 더 긴장되고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소득은 더욱 적어진다. 일반적으로 탐욕은 후덕함이라는 가면을 쓸 때에 더 빠르게 재물을 얻는다.


결국 어떠한 부유가 내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1122

인간이 스스로 만족할 줄을 안다면
그는 상당히 풍부할 것이다.
사정이 그렇지 못한 바에,
결국 어떠한 부유가
내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루킬리우스)

소크라테스는 어떤 자가 많은 재물과 보패와 값비싼 가구 등으로 화려한 행렬을 차리고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물들을 나는 욕심내지 않은 것인가!" 하고 말했다. 메트로도로스는 하루에 콩 12온스로 살아갔다. 에피쿠로스는 그것도 들지 않았다. 메트로클레스는 겨울에는 양 떼들과 같이 자고, 여름에는 사원의 울 안에서 잤다. "자연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세네카) 클레안테스는 자기 손으로 살아가며, 할 수 있다면 다른 클레안테스 하나쯤은 더 살리겠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1133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그리고 그만큼 강력하다. 내 습관에 부족한 것은 내게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오래 살아온 생활 상태를 축소시키고 줄여 놓는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복이 터진들 무엇하리 1123

나는 내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키거나 길들지 않은 새로운 방식에 몸을 던져 볼 나이는 이미 지났다.

재산이 느는 것도 귀찮다.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 될 때는 지났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큰 복이 내 손에 굴러떨어진다면, 왜 내가 그것을 누릴 수 있던 때에 오지 않았던가 하고 슬퍼할 것처럼

내가 향락지 못한다면 복이 터진들 무엇하리.      (호라티우스)


울화만 터지게 하는 선물 1123


이제 떠나려는 나의 일이니, 사람들과의 교섭에 필요하다고 배우는 예지 같은 것은 아무나 오는 사람에게 쉽사리 넘겨 주었다. 그것은 식사가 끝난 뒤의 겨자 격이다. 나에게 쓸모없는 보배는 소용이 없다. 이미 머리가 없는데, 학문이 무슨 소용이랴? 제때에 오지 않고 철 늦게 와서 울화만 터지게 하는 선물은 오히려 운이 나에게 주는 모욕이고 총애를 스스로 저버리는 일이다. 나를 지도하기는 이제 그만두라. 나는 더 길이 없다. 그 많은 종류의 능력들 중에 참을성 만으로 충분하다. 폐가 썩어 가는 가수에게 탁월한 최고음의 능력을 주어 보라. 또 아라비아 사막으로 보내져 숨어 사는 사람에게 웅변술을 주어 보라.


출발점에서 멈추지 않는 자는 그 진행을 정지시킬 마음이 없는 것이다 1131

나는 아주 적은 노력으로 내 감정의 흥분을 그 시초에 막으며, 힘이 들기 시작하는 문제는 열중하기 전에 포기해 버린다. 출발점에서 멈추지 않는 자는 그 진행을 정지시킬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런 정열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문을 닫지 않는 자는 들어오고 나서 쫓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처음을 잘 처리하지 못한 자는 끝처리도 못할 것이다. 흔들리는 것을 떠받치지 못한 자는 쓰러지는 것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바시락거리는 것 1131

나는 폭풍의 시작을 알리는 잔 바람들이 내 속에 들어와서 만지작거리며 바시락거리는 것을 때맞게 느낀다. "심령은 압도되기 오래 전에 동요된다."(세네카)


일이 진행되면 1133


일을 시작할 때에는 우리는 일을 이끌어 가며 마음대로 해 나간다. 그러나 다음에 일이 진행되면, 일이 우리를 이끌며 흥분시켜서 우리가 그 뒤를 쫓아가야만 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의 경우 1137

누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당신 부친은 평화롭고 통치하기 쉬운 커다란 영토를 남겨 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 소년은 그 부친이 많은
승리를 거두고 정치를 올바르게 해 가는 것을 보고 시기하였다. 그는 유약하고 부드럽게 세계 제국을 누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 가서 알아볼 수 있는 이 영광이란 대체 무엇인가? 1138


의식해서 하는 일이 아닌 이상, 적어도 야심을 가지고 야심을 배격하자. 모든 종류의 인간들에게 굽실거리며 구걸하게 하는 그런 비속하고 거지 같은 명성과 영광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을 경멸하자. 무슨 더러운 방법이건 어떠한 천한 값으로라도, "시장에 가서 알아볼 수 있는 이 영광이란 대체 무엇인가?"(키케로) 이렇게 영광을 얻는 것은 불명예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영광을 탐하지 말자. 모든 유익하고 순진한 행동을 가지고 뽐내는 일은, 이런 일을 심상치 않고 희귀하게 보는 자들이 할 일이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힘이 든 가치로 올려놓는 것이다.


드러내 놓은 것은 반은 이미 할인된 것이다 1139


선한 행동의 명성이 높아 감에 따라 나는 그 선한 점이 선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도 명성을 얻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을 억누른다. 드러내 놓은 것은 반은 이미 할인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것을 성취한 자들의 손에서 자연스레 풍겨져 나오거나, 점잖은 사람들이 다음에 그것을 택하여 세상에 묻혀 있는 것을 드러내고 그 자체가 좋으므로 세상에 알려지고 드러날 때에, 한층 더 운치가 나는 것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고 성취된 행적이 훨씬 더 찬양할 만하다고 본다"(케케로)고 세상에서 가장 허영스런 인물은 말한다.



11. 절음발이에 대하여


자기 사상을 전해 주고 싶어하는 생각 1144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기 사상을 전해 주고 싶어하는 생각보다 더 강한 욕구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보통 수단으로 부족하면 우리는 명령과 폭력과 화형까지도 사용한다. 진리에 관한 최선의 감식이 광신자의 수가 현자의 수를 훨씬 능가하는 신도들에게 맡겨지도록 일이 되면 큰 불행이다. "판단력의 모자람이 없는 것만큼 범상한 일은 없다는 격이다."(키케로)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권위 1144


다음에는 이것이 증거와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권위와 그 증언에 세월의 관록이 붙어서 더 지각 있는 자들에게 전파되어 간다. 나로서는 나 하나가 믿지 않는 일은 믿는 자가 백이 되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사상을 햇수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나의 생각)

주식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누구누구도 샀다고 하더라. 누구누구도 좋게 본다고 하더라'는 식이다.


나 자신보다 더 확실한 괴물이나 기적은 본 일이 없다 1145


나는 이 세상에 나 자신보다 더 확실한 괴물이나 기적은 본 일이 없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 피곤한 일도 습관이 되어서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찾아보고 알아보고 하면 할수록 더욱 나의 기형적인 꼴에 놀라며, 더욱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것 같다 1146


우리는 모든 사물들을 규범을 세워서 단정적으로 말한다. 로마에서 하던 재판소의 어법으로는, 한 증인이 자기 눈으로 보았다고 진술하고 재판관이 가장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판결할 때에도, "이런 것 같다"라는 어법을 쓰기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확실하다고 단정해서 말하면, 나는 그것을 진실된 일로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아진다. 나는 우리 말투 중에 말의 의미를 부드럽게 조절하는, "혹시, 어쩌면, 어떤 사람들 말이, 내 생각에는" 식의 어법을 좋아한다.



12. 인상에 대하여



비밀스러운 광명을 발견하기에는, 소크라테스의 경우 1153∼1154


우리는 톡 쏘고 부풀어올리고 기교로 팽창된 것밖에 우아한 맛을 보지 못한다. 순박성과 단순성 밑에 흐르는 우아미는 우리와 같은 천하고 상스런 취미에는 걸려 오지 않는다. 그런 것에는 미묘한 미가 숨어있다. 이런 숨겨진 비밀스러운 광명을 발견하기에는 깨끗이 씻어진 명철한 시각이 있어야 한다. 순박이라는 것은 우리들로 보면 우둔의 사촌뻘이며 비난받을 소질이 아니던가? 소크라테스는 타고난 범상한 동작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 농사꾼도 그렇게 하며 여자라도 그렇게들 한다. 그는 마부·농담꾼·나막신장이·토역장이의 말투밖에 입에 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범속한 행동들에서 끌어 낸 귀납이며 유추이다. 아무라도 그것을 이해한다. 우리 따위, 어려운 학설로 명성을 떨치지 않은 모든 것은 평범하고 비속한 것으로 보며, 겉모양과 허식으로 꾸며 보이지 않으면 풍부성을 알아 주지 않는 우리들은 그렇게 비속한 형태로는 그의 고상하고도 찬란하고 감탄할 만한 사상들을 결코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세상은 겉치장으로만 꾸며져 있다. 사람들은 바람으로만 속을 채우고 고무풍선처럼 둥실둥실 떠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헛된 생각을 내놓지 않는다. 그의 목적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인생에 더 밀접하게 필요한 사묻들과 교훈을 찾아 주는 데 있다.

그는 또 항상 변함 없고 한결같았다. 그리고 몸을 솟구쳐 뛰어오른 것이 아니라 기질로 자기 정력의 궁극에까지 올라갔다. 더 자세히 말해 보면, 그는 아무것도 올려놓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자기를 끌어 내려서 그 근원의 본성으로 돌려 놓으며, 정력과 역경과 고난을 극복해 나갔다. 카토의 경우는 평범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긴장의 자세이며, 그의 생애와 죽음의 고매한 행적에서는 늘 위풍있게 말을 타고 있던 그의 풍모가 명백하게 느껴진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땅으로 기며 유연하고 평범한 보조로 가장 유용한 사상을 다루고, 그의 죽음에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역경에 처해서도 인간다운 삶의 길을 밟아 갔다.


멈출 줄 모른다 1155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정도에서 멈출 줄 모른다. 탐락이건 재산이건 권력이건, 그는 자기가 품어 안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의 탐욕은 절제가 불가능하다. 알고자 하는 욕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가 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스스로를 위해 끌어 내며, 지식의 유용성을 그 재료가 있는 한 확대시킨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연구에도 무절제 때문에 고생한다."(세네카)

아그리콜라의 모친이 그 아들의 맹렬한 학문 연구 의욕을 억제하였다고 타키투스가 칭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확고한 눈으로 보면, 학문은 다른 재물과 같이 인간이 타고난 고유의 약점과 허영이 많이 섞여 있는 값비싼 것이다.


학식의 사용 1155


학식의 사용은, 다른 식량이나 음료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일이다. 대체로 우리가 사들인 물건은 그릇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가며, 거기서 그 가치를 우리 마음대로 심사해 보고, 어느 시간에 얼마나 가져다 쓸까를 정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학문은 우리 심령밖에는 당장 다른 그릇에 담아 둘 수가 없다. 우리는 이 지식들을 사들일 때에 그것을 삼켜 버리며, 장터에서 나올 때에 벌써 몸이 그 해독을 입었거나 그 때문에 개선되었거나 한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심령에 장애와 부담밖에 안 되며 우리를 치유해 준다는 핑계로 해를 끼치는 것도 있다.


책은 나를 훈련은 시켜 주었을망정 가르쳐 준 것은 별로 없다 1156

내가 키케로의 《투스쿨라나에》(키케로의 대표적 작품)를 못 읽어 보았더라면 죽기가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나는 이제 진실로 죽음을 마주 대하고 보니, 말재주는 좀 늘었으나 마음에는 별로 얻은 것이 없다고 느낀다. 마음은 내 본성이 만들어 준 그대로이며, 사람들과 공통의 보조로 싸움을 위해서 무장하고 있다. 책은 나를 훈련은 시켜주었을망정 가르쳐 준 것은 별로 없다.

뭐라고? 학문이 새로운 방어책을 가지고 우리가 타고난 불운에 대항해서 새로운 방비로 무장해 주려고 시도하다가, 우리를 보호해 주는 이치와 묘책을 지닌 것 이상으로 이 인생이라는 불운이 바로 거창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인상을 우리의 사상 속에 깊이 새겨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은 학문이 우리를 쓸데없이 깨우치는 묘책이다. 속이 가장 짜이고 현명한 작가들을 두고 보아라. 그들은 옳은 논법을 둘러서 얼마나 경박한 다른 논법들을, 그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이 빈 논법들을 뿌려 놓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언어만의 헛된 말재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유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달리 쓸데없이 너저분한 이론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서적 속에도 빌려 왔거나 모방했거나 해서, 이런 식의 문장이 상당히 여러 군데에 끼여 있다. 그러므로 좀 묘한 구절을 힘차다고, 날카로운 점을 견고하다고, '마시기보다도 맛보기에 더 좋은 것'(키케로)을 가지고 잘되었다고 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재치가 아니라 심령이 문제될 때에'(세네카) 마음에 드는 것 모두가 배불려 주는 것이 아니다.


세네카 vs 풀루타르크 1157

세네카가 죽음을 준비하는 데 들인 노력을 본다면, 그가 마음을 단단히 잡고 안심하려고 진땀 흘리며, 이 외나무다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죽을 애를 써 가며 허우적거리던 꼴을 본다면, 만일 그가 죽을 때에 아주 씩씩하게 체면을 유지하지 못했던들, 나는 그에 대한 평판을 뒤집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고민이 그렇게까지 자주 일어난 것은, 그 자신이 열정적이고 괄괄한 성격이었던 것을 보여 준다. 위대한 심령은 더 고요하고 침착한 태도로 표현된다. "정신은 한 색채를 가졌고 심령은 그보다 다른 색채를 가진 것이 아니다."(세네카) 그는 그의 논법으로 설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점에서 그의 적수인 죽음에서 몰려 지낸 것을 보이고 있다.

플르타르크의 태도는 한층 더 경멸조이고 풀려 있던 만큼, 내가 보기에 그만큼 더 씩씩하고 사람을 설복시키는 힘이 있다. 나는 그의 심령이 더 침착하고 절제된 동작을 가졌다고 쉽게 생각하고 싶어진다. 전자는 한층 더 생기 있어서 우리를 자극하고 놀라 일어나게 하며 정신에 더욱 감명을 준다. 후자는 더 태연하여 꾸준하게 우리를 만들어 주고 세워 주고 힘돋워 주며, 우리의 이해력을 더욱 감동시킨다. 전자는 우리의 판단을 앗아간다. 후자는 그것을 얻게 한다.


대지 위를 내다보자 1157


우리가 이런 학문의 노력으로 자기를 무장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대지 위를 내다보자. 거기 퍼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엾은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니 카토니 모범이니 교훈 등은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본성은 그들에게서 날마나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강직한 지조와 인내의 효과를 끌어 낸다. 그들 중에 가난을 가난으로 알지 않고, 죽음을 자진해서 바라거나, 또는 죽음의 고비를 놀라지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넘기는 자들을 얼마나 예사로 보는가?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 1161


플라톤은 마찬가지로 한 국가의 병폐를 고치려고 폭력으로 평화를 문란케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고, 국민을 살육하고 피를 흘려 가며 하는 개혁을 용인하지 않았다. ······ 나는 이 방면에는 플라톤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플라톤주의자였다. ······

나는 이런 일에 참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이런 가장 못된 사태를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행위를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택하며, 아주 확실하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가장 명백한 원칙을 가지고 자기 영혼의 구제를 찾고,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정부와 관리와 법률을 둘러엎고, 어머니(조국)의 사지를 찢어서 옛날의 적에게 갉아먹게 던져 주고, 동포애를 골육상쟁의 증오심으로 채우고, 마귀와 광귀들을 원군으로 청하면서, 하나님의 법의 거룩한 평화와 정의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해력이 우둔한 수작을 본 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자주 의심을 품어 본다.


야심과 탐욕과 잔인성과 복수심은 그 자체로서 본연의 기세를 충분히 갖지 않았다. 그런 것을 정의와 신앙의 영광스런 자격으로 뜨겁게 해 주고 부채질해 주자.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신보다 더 심한 기만은 없다. 그것은 신들을 구실 삼아 범죄를 은폐한다."(티투스 리비우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상상한 고통 1170


"불행으로 겪는 고통은 상상한 고통보다 덜 느껴진다"(퀸틸리아누스)고 한 말은 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한 작가에게서 실제로 나온 말이다.


죽음과 삶에 대한 걱정 1170


우리는 죽음의 근심으로 삶을 방해하고, 삶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을 방해한다. 하나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공포를 준다.


죽어 갈 때밖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도록 1171


나는 내 이웃에 사는 농민들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본성은 그에게 죽어 갈 때밖에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더 점잖게 해치운다. 이 철학자는 죽음과 죽음에 관한 오랜 예측 때문에 두 번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의견에 따르면, 가장 예측하지 않은 죽음이 가장 행복하고 가장 가벼운 죽음이다. "필요하기 전에 고민하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고민하는 일이다."(세네카)

사상에서 생기는 이 괴로운 심정은 우리의 호기심에서 나온다. 우리는 미리 내다본다고 하며, 본성이 정해 준 일을 앞질러서 지배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우리에게 항상 장애만 끼친다. 아주 건강할 때에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식사할 때에 입맛마저 잃는 수작은 의사들이나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1172∼1175


"여러분, 내가 당신들에게 나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청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 세상의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사물들에 관한 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다른 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는 내 고발자들의 밀고에 걸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나는 죽음과 사귄 것도 아니고, 죽음을 아는 것도 아니며, 아무도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려고 자기 소질을 시험해 본 자를 본 일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죽음을 알고 있다고 미리 추측합니다. 나로서는 죽음이 무엇인지, 저승에서는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무관심한 일이고, 어찌 보면 죽음은 바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 가는 일이라면, 그렇게 많은 작고한 위인들과 같이 살러 찾아가서, 이승에서의 불공평하고 부패한 재판관들과 상관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은 훨씬 나은 일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소멸이라면, 그런 오래고 평화로운 방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또한 좋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고요한 휴식과 꿈도 갖지 못하는 깊은 잠보다 더 감미로운 일은 느껴 볼 수 없습니다."

······

죽음은 삶과 똑같이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일부이다. 죽음이 대자연에게 그의 작품들의 계승과 변천을 가꾸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 그리고 이 우주 공동체에서 죽음이 손실과 파멸보다도 출생과 증식에 더 봉사하고 있는 이상, 무엇 때문에 본성이 죽음에 대해 증오심과 공포심을 조성하게 할 필요가 있는가?

이와 같이 만물이 새롭게 된다.      (루크레티우스)

많은 생명들은 죽음에서 출생한다.      (오비디우스)

한 생명의 쇠잔은 다른 생명으로의 통과이다.


인용으로 내 책을 장식한다면 1176


어떤 자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하고도 플라톤과 호메로스를 인용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원본에서보다도 상당히 다른 곳에서 따왔다. 힘도 안 들이고 능력도 없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자리 주위에 있는 수천 권의 책들 속에서, 생각만 있다면 나의 이 인상론(人相論)을 장식하기 위해서 들추어 보지도 않은 어느 표절자들 열두엇에서 즉각에 빌려 올 것이다. 인용으로 내 책을 장식한다면 한 독일 작가의 권두사(券頭辭)를 따오기만 해도 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속이며, 욕심나는 영광을 구걸하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1177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연구의 노력을 아껴 두고 상투어로 잡탕을 만들어 내는 것은 진부한 소재 외에는 소용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지도하려는 것이 아니고 소크라테스가 아주 재미나게 에우티데모스를 질책하던 식으로, 학문의 우스운 성과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데 소용된다. 나는 작가가 여러 박학한 친구들에게 이것을 조사해 달라고 하고, 이 다른 재료로 저것을 꾸며 달라고 당부하며, 자기로서는 연구하지도 않고 들어 본 일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일을 계획하고, 이 알지 못하는 재료의 묶음을 기교있게 엮어 놓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책을 꾸며 놓는 것을 보았다. 잉크와 종이만이 자기 것일 뿐이다. 그것은 솔직히 말한다면 어떤 책을 사거나 빌려 오는 일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책을 만들 줄 안다는 것을 알림이 아니고,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는 바, 그가 책을 만들 줄 모른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

나는 그 많은 빌려 온 것으로부터 어떤 것은 태평하게 표절하며, 그것을 가장하고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 새로운 용도에 사용한다. 그 글의 본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사람들이 말할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거기에 내 손으로 다른 특수한 의미를 주어 가며, 그것을 그만큼 아주 순수하게 남에게서 따온 것이 아니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도둑질한 것을 드러내 보이며 이야기한다. 그러니 그들은 법 앞에서는 나보다 신용이 있다. 우리 따위의 본성론자(本性論者)들은 인용하는 명예보다도 창작의 명예를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게 평가한다.


60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1177∼1178


내가 학문을 가지고 말하고 싶었더라면 더 일찍이 말했을 것이다. 즉, 내가 재치도 있고 기억력도 더 좋았고 공부하던 때에 가깝던 시절에 써 보았을 것이다. 그때에 이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던들, 그때의 젊은 패기에 지금보다는 더 자신을 가졌을 것이다. 게다가 운이 이 작품을 통해서 내게 베풀어 주는 이런 우아한 혜택이, 그때에는 더 유리했을 것이다. 이 소질을 크게 가진 내 친지들 중의 두 사람은 60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40대에는 글 쓸 생각을 않고 있다가, 재질의 반은 잃었다고 나는 본다. 성숙기에는 청춘기처럼 그때의 결함이 있고, 그 결함이 더 심해진다. 그리고 노년기가 이런 일에는 다른 어느 시절보다도 나쁘다. 아무라도 자기 노쇠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 내보이며, 그가 나이의 은총을 잃은 자이고 몽상가이며 정신이 잠든 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기분으로 표현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미친 수작이다. 우리 정신은 늙어 가면서 변비증에 걸리고 오그라든다.


미모, 자연의 특권 1179

미모가 얼마나 강력하고 유쾌한 소질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아무리 자주 말해 보아도 부족하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짧은 시기의 폭군이라고 불렀고, 플라톤은 그것을 자연의 특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미모보다 더 신용을 얻는 특권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교제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미모는 앞으로 나타나며, 경이로운 인상으로 지대한 권위를 가지고 우리의 판단력을 유혹하며 독점한다. 프리네가 만일 그녀 옷깃을 슬쩍 벌리며 미모로 재판관을 유혹하지 않았던들, 탁월한 변호사에게 걸려서 소송 사전에 패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온 세상의 주인이던 키로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가 이 미모를 끝까지 중시했다고 본다. 그리고 대 스키피오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스 말로는 '좋다'와 '아름답다'에 같은 낱말이 쓰인다. 그리고 성경에는 자주 아름답다는 말을 '좋다'는 말로 표현한다. 나는 플라톤이 야비하다고 말했지만, 옛날 시인에게서 따온 노래에 따라 건강·미모·부유를 선(善)의 범주에 넣은 것에 찬성하고 싶다.

 Phryne. 그리스의 창녀로 오만과 탐욕의 전형. 프락시텔레스는 그녀를 모델로 하여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조각상을 만들었다.


소경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 1179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휘하는 권한이 미의 부류에 속한다고 하였고, 사람의 미가 신들의 모습에 접근할 때는 그는 당연히 똑같이 숭배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누가 그에게 어째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물에게 더 오래  더 자주 따르며 친하게 지내느냐고 물어 보자, 그는 "이 질문은 소경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질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그들의 미모 덕택으로 수업료를 치렀고 예지를 얻었다.


미는 선과 두 치 상관으로 아주 가깝다 1179

내가 부리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역시 미는 선과 두 치 상관으로 아주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얼굴의 특징이나 모양,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으로 어떤 내적인 기질과 장차 올 운을 점치는 얼굴의 금들은 직접적으로 미와 추함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좋은 향기와 명랑한 공기가 그것만으로 늘 건강을 약속하지 못하는 식이며, 둔하고 후덕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고치기 힘든 병이 유행할 때의 열병을 앓게 하는 나쁜 기운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용모라는 것은 증거가 박약한 보증이다 1180

용모라는 것은 증거가 박약한 보증이다. 그렇지만 용모에는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만일 내가 사람들을 매질해야 할 처지라면, 약속을 어기고 배반할 인물이라는 것이 뚜렷이 이마에 박혀 있는 악인들을 더 혹독하게 다룰 것이다. 어떤 얼굴들은 다행히 호의를 얻고, 다른 얼굴들은 운 나쁘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덕한 얼굴과 바보 얼굴, 엄격한 얼굴과 가혹한 얼굴, 심술궂은 얼굴과 고민하는 얼굴, 경멸조의 얼굴과 우울한 얼굴, 또 서로 다른 비슷한 소질의 얼굴들을 분간하는 기술이 있을 것 같다. 오만하고도 쓰디쓴 미모가 있고, 또 다른 상냥한 얼굴, 그리고 더 넘어서 멋쩍은 얼굴들도 있다. 이런 인상으로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한다는 일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겨 둔다.


우리가 우리 권한의 폭을 넓히려고 하면 1182

우리는 일을 충분히 하늘에 맡기지 않고, 우리가 할 일이 아닌 것을 우리 멋대로 하다가 실패하는 수가 많은 듯하다. 어떻든 우리의 계획은 너무나 자주 잘못된 길로 간다. 하늘은 각기 특권에 대항해서 인간의 예지가 그의 권한의 폭을 넓히는 것을 시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권한의 폭을 넓히려고 하면 더욱 좁혀 버린다.


13. 경험에 대하여


헤엄 잘 치는 선수라야 한다
1190


사람들은 그들의 타고난 정신적 병폐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의 정신은 고치 짓는 누에처럼, 뒤져보며 찾아보며 끊임없이 뺑뺑이를 돌아 꾸며 가고, 자기 일로 자기를 틀어막아서 그 속에 질식한다. '끈끈이통에 빠진 생쥐'(라틴 속담)이다. 정신은 멀리 무엇인지 모르는 공상 속의 광명과 진리 같은 것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쪽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는 길에서 많은 장애와 곤란에 부딪히며 새 길을 찾아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길도 정신도 잊어버리고 만다.

그것은 이솝의 개들과 똑같은 격이다. 이 개들은 바다 위에 무엇인지 죽은 시체가 떠 있는 것을 발견했으나 접근할 수가 없자, 이 물을 들이켜서 가는 길목을 말리려고 하다가 질식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크라테스라는 자가 헤라클레이토스의 문장을, 이 학문의 깊이와 무게 속에 빠져서 질식하지 않으려면 독자가 "헤엄 잘 치는 선수라야 한다"고 한 말과 일치한다.


진짜 작가는 드물다 1191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 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두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주석하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주석으로 웅성거린다. 진짜 작가는 드물다.

우리 세기의 주요한, 그리고 가장 평판 높은 학문은 학자들을 이해할 줄 아는 일이 아닌가? 그것이 모든 연구의 공통적이고 마지막 목표가 아닌가?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 1191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리석게도 나는 내 책 이야기를 하느라고 내 책을 늘려 간 것인가! 어리석고말고,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자들을 두고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들이 자기 작품에 그렇게도 자주 곁눈질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작품을 위한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이고, 자기 작품을 경멸하며 박대하는 것까지도 모정다운 뽐내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기를 평가하거나 경멸하는 일은 흔히 똑같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다른 점에서보다도 이 점에서 내가 더 자유로워야 하지만, 내가 나의 다른 행동들에 대해서 하는 식으로 나와 내 문장에 관해서 쓰고 있는 이상 내 제목은 그 자체로 뒤집히는 터이니, 모두가 이 변명을 받아 줄 것인지 모를 일이다.


나는 너무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1195

감옥은 밖에서 본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불쾌하다. 나는 너무나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내가 서인도의 한구석에 가는 것을 누가 금지한다는 말만 들어도 어느 점에선 살아가기가 전보다 불쾌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에서 더 개방된 땅이나 공기를 발견하는 한, 나는 숨어 지낼 곳에 웅크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형이상학이고 나의 물리학이다 1195

나는 다른 주제보다도 나 자신을 더 연구한다. 이것이 나의 형이상학이고 나의 물리학이다.


무지와 호기심 없음 1197

오오, 무지와 호기심 없음은 잘생긴 머리를 얹어 놓기에 얼마나 기분좋고 폭신하고, 그리고 몸에 유익한 베개인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통고 1198

저마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통고는 매우 중대한 효과를 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저 학문과 태양의 신(델포이 신전에 있는 아폴론)은 그가 우리에게 충고해야 할 일을 모두 포함시킨 듯, 이 말을 자기 신전의 장면에 새겨 놓게 했던 것이다. 플라톤도 역시 예지는 이 명령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의 문장에서 자세히 이것을 증명한다.


자신을 안다는 문제 1198∼1199

어느 학문에서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과 어둡고 어려운 성질은 그 학문을 닦는 사람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까지에는, 역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이 닫혀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문을 밀어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는 자는 알기 때문에 물어 볼 필요가 없고, 모르는 자는 무엇을 물어 보아야 할까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물어 볼 거리가 없다는 플라톤식의 묘한 논법이 나온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문제에서, 각자가 자기를 만나고 혼자 단정하고 만족하는 것, 각자가 자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고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의 문장에서 에우티데모스에게 가르친다.


이 자아 속에 너무나 무한한 깊이와 다양성을 발견하기 때문에 1199

나는 이 일밖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로서 이 자아 속에 너무나 무한한 깊이와 다양성을 발견하기 때문에, 이제껏 내가 배운 것에는 내가 얼마나 배울 것이 많은 것인가를 알게 된 일밖에 다른 성과가 없다. 내 판단력이 약하다는 것을 너무 자주 깨달아 온 까닭에 나는 겸양해지고, 내가 명령받은 신앙에 복종하고, 사상은 항상 냉철하게 절도를 지키는 경향을 갖게 되고, 그리고 자기 역량에 자신을 가지고 수양과 진리의 적인 방약무인하게 투쟁조로 나서는 오만한 태도에는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명령하는 것을 들어 보라. 그들이 내놓는 천치와 같은 수작은 종교와 법률을 세우는 문체에 있다. "확언과 증명을 지각과 인식에 선행시키기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키케로)


확언과 고집 1199

아리스타르코스는 옛날에는 현자가 겨우 일곱 사람 있을까 말까 했고, 그의 시대에는 무식자가 겨우 일곱이나 있을까 말까 했다고 한다. 그 말은 지금의 우리 시대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확언과 고집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표징이다.


지금까지 생존했던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했던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따라서 1200

나는 내 경험으로 인간의 무지를 강조한다. 그것은 인간의 학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식이다. 내 의견이나 자기들 의견과 같은 허망한 사례들을 가지고 이 무지의 사상을 품고 싶지 않은 자들은, 신들과 인간들의 증명으로 지금까지 생존했던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했던 소크라테스의 의견을 따라서 이 말을 인정해야 한다. 철학자 안티스테네스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 그대들이나 나나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으러 가자. 거기서는 나도 그대들과 함꼐 제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 본다 1200

내가 이렇게 오래 주의하여 나를 고찰하는 노력은, 남의 일도 어지간히 판단할 수 있게 나를 수련시켜 준다. 그리고 내가 이런 일보다 더 적절하고 용납될 수 있게 말하는 일도 드물다. 나는 내 친구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그들의 사정을 보고 식별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는 내가 하는 말의 적절함에 경탄하며 그 말로 자기 처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내 인생을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비춰 보는 수련을 쌓아서, 이 점에 몰두해 연구하는 소질을 얻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생각해 볼 때에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일들 중에 필요한 것은 용모·기질·사상 등 거의 다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나는 피해야 할 일, 좇아야 할 일 등 모든 것을 연구한다. 이렇게 해서 친구들이 밖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들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본다.


강인한 귀, 특별한 우정의 표시 1201

우리는 자기를 솔직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강인한 귀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속이 쓰리다고 느끼지 않고 남의 비판을 참고 듣는 자는 드문 까닭에, 우리에게 감히 비평을 시도하는 자는 특별한 우정의 표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좋게 해 주려고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모욕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건전하게 사랑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못된 소질이 착한 소질보다 강한 자를 비판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플라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는 자에게 지식과 호의와 과감성이라는 세 가지 소질을 가지라고 명령한다.


대단히 중요한 연구 과제 1204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건강을 대단히 중요한 연구 과제로 하라고 충고하며, 이해성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을 단련하고 음식은 가리는 데 조심하며, 무엇이 자기에게 좋고 나쁜가를 의사보다도 더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습관이 가진 전능한 힘 1205

습관은 우리의 생명에 하고 싶은 대로 형체를 만들어 준다. 습관은 전능한 힘을 갖는다.


궁핍 속에서 얻는 감미로운 맛 1208


자기의 팔 힘만으로 살아가는 내 하인들과 나와의 차이를 보라. 스키타이 족들과 서인도 사람들은 형체나 힘으로는 나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거지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부려 보았더니, 얼마 안 가서 그들은 그전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밥 잘 먹고 옷 잘 입으며 지내던 내 집에서 떠나버렸다. 그 중의 하나가 그 뒤에 돌아다니며 쓰레기더미에서 조개나 주워 먹고 끼니를 때우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아무리 달래고 위협해 보아도 그는 궁핍 속에서 얻는 감미로운 맛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거지도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위풍과 탐락이 있으며, 그들에게도 직책이나 직무와 정치적 질서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버릇의 성과이다. 버릇은 우리를 자기 멋대로의 형태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현자들은 그 때문에 부리는 습관이 즉시 우리를 좋은 형태로 만들어 주기 쉽도록 가장 좋은 형태 속에 박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변화와 변종으로 만들어 간다.


곰팡이가 끼어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1208

어떤 젊은이는 자기 정력을 일깨워서 거기에 곰팡이가 끼어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방어하기 위해서는 규칙들을 문란시켜야 한다. 세상의 명령과 훈련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만큼 어리석고 허약한 생활 태도는 없는 것이다.

점잖은 사람에게 가장 반대되는 태도는 어떤 특수한 방식에 너무 마음을 쓰며 매여 지내는 일이다. 생활 태도는 부드러운 융통성이 없으면 특수한 것이 되고 만다. 친구들이 하는 일을 기력이 없어서 못하거나, 또는 감히 할 생각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부엌이나 지키게 하라! 다른 곳에 가면 어디서도 점잖지 못하다.


규칙이 괴롭힌다 1212∼1213

한편에서는 병이 우리를 괴롭히고 다른 편에서는 규칙이 괴롭힌다. 아무리 해도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쾌락을 좇으며 저지를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힘들지 않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쉬운 것이 수상하게 보인다.

여러 사물들에 대한 나의 욕망은, 그 자체가 상당히 묘하게 조화하여 내 위장의 건강에 적응해 주었다. 소스의 신맛과 쏘는 맛은 젊었을 때에는 구미에 맞았었다. 그 후에는 내 위가 그런 것을 받지 않으니 내 입맛도 바로 변해 버렸다. 포도주는 병자에게 해롭다. 그것은 맨 먼저 내 구미에서 벗어나 억지로 권해도 싫어졌다. 내가 받아서 불쾌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 몸에 해롭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맛있게 먹는 것은 아무것도 해로운 것이 없다. 나는 기분에 맞는 행동으로 해를 입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모든 의료법이 결정한 것을 아주 대폭적으로 내 쾌락 앞에 양보시켰다. 그리고 젋었을 적에는,

사랑이 붉은 옷자락을 날리며
내 주위를 이러저리 즐겁게 돌아다닐 때,      (카툴루스)

나는 누구만큼이나 방자하게 정욕에 사로잡혀 지냈으며,

나는 싸울 때마다 상당한 영광도 거두었다.      (호라티우스)

돌격보다도 차라리 끈덕지게 오래 끌었으며,

여섯 번까지 지탱했던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오비디우스)

내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처음 애정의 압제에 부딪혔는지 고백해 보면, 실은 불운도 있고 기적도 있었다. 그것은 정말 부딪힌 일이었다. 그때는 선택이라는 지각이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너무 오랜 이야기라서 내 일이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기가 처녀였던 시절의 생각이 안난다던 카르틸라(Cuartilla, 페트로니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여자)의 기억에 비겨 볼 수 있는 일이다.

가련한 일 1213

 

희망하는 데까지 약해지며 시들어 간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다.

 

 

어조 1214

 

어조에는 가르치는 목소리가 있고, 아첨하는 목소리가 있고, 또한 꾸짖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내 목소리가 상대편에 도달할 뿐 아니라 그 상대편을 쳐서 찌르기를 원한다. "양보다 질로 듣기에 적합한 어조가 있다."(퀸틸리아누스)

 

말은 반은 말하는 자의 것이고, 반은 듣는 자의 것이다. 듣는 자는 그 말의 어조에 따라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된다. 마치 공 치는 자들 사이처럼 받는 자는 치는 자의 잡는 동작과 치는 형태에 따라서 몸을 움직이며 준비하는 식이다.


질병 1215

질병은 생길 때부터 제한된 운명과 지속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그것을 강제로 단축시키라고 하다가는 연장시키고 키워 가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병을 진정시키는 대신에 자극한다. 나는 고집세워서 병에 대항하여도 안 되고, 또 얼빠져서 약하게 병에 넘어가도 안 되며, 그 반대로 병의 상태와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양보해야 한다고 말한 크란토스의 의견을 좇는다. 병에게 지나갈 통로를 주어야 한다. 병을 제대로 두면 그것이 덜 오래 몸에 머무르는 것임을 보았다.

 

인간 조건 1216

 

어느 누구건 다 당하는 것을 자기가 당했다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대 하나아게만 부정한 법률이 부과되었거든 불형하라."(세네카) 한 늙은이가 자기의 건강을 힘차게 보존해 달라고, 즉 그를 다시 젊게 해 달라고 신에게 요구하는 꼴을 좀 보라.

 

어리석은 자야! 어째서 이런 유치한 축복기도로

헛된 소원을 올리는가?                                     (오비디우스)

 

이건 미친 수작이 아닌가? 인간 조건에는 그런 일이 담겨져 있지는 않다. 통풍 · 담석 · 소화불량 같은 것은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징조이니, 그것은 긴 항해에서 더위가 비와 바람을 만나는 격이다.

 

 

기억력 1220

나는 기억력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종이로 이 기억력을 만들어 간다.

 

 

영광을 주기 위해서 1221

 

스토아 학파가 악덕이 도덕을 거들어 그 가치를 올려 주기 위해서 세상에 들여온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듯, 우리는 그만큼 더 지당한 이치로, 자연은 쾌락과 평안과 건강에 봉사하여 영광을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빌려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군대 생활 1225

군대 생활보다 더 재미나는 것은 없다. 맡아 보고 집행하기가 고상하며(왜냐하면 도덕 중에 가장 강하고 너그럽고 숭고한 것은 용덕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고상하다. 자기 나라의 안전과 위대성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보편적으로 정당하게 유익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모두가 귀족이고 젊으며 활동적이고, 그렇게 많은 비극적인 풍경을 예사롭게 관망하며, 기교 없이 자유롭게 교제하고 격식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방식이나, 수많은 행동의 다양한 변화, 듣기에 경쾌하고 가슴에 열정이 좋게 하는 군악의 웅장한 화음, 이 직업을 실천하는 명예, 그 벅차고 힘든 일까지도 내 마음에 드는데, 플라톤은 이것을 너무 천하게 보고 그의 《국가론》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참여시키고 있다.


50세 1226

나는 지난번에 56세를 넘어섰다. 50세란, 어떤 국민들은 이 나이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인생의 아주 적당한 종점으로 정해 놓았던 나이로, 이것은 이유 없는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불확실하고 짧기는 하지만, 너무나 확실하게 이 나이를 훌쩍 넘었기 때문에, 젋었을 떄의 건강과 안일을 못 가졌다고 불평할 거리는 거의 없다. 나는 정력과 쾌활성은 말하지 않는다. 정력이 이 한계 너머까지 나를 따라올 이유는 없다.

이제부터는 애인의 집 문턱에서
궂은 날을 무릅쓰고 기다려 볼 기운조차 없다.      (호라티우스)


팔자가 좋은 소리 1228

세상에는 메추리고기를 두고도 쇠고기와 돼지고기가 없으면 괴로운 환자와 같이 구는 사람들도 있다. 팔자가 좋은 소리이다. 그것은 괴벽 중에서도 괴벽한 취미이다. 그것은 팔자가 편해서 보통 모두가 먹는 것에는 염증이 나는 취미이다. "그것으로 사치가 부유의 권태를 면하려고 한다."(세네카) 남이 즐기는 음식은 좋아하지 않고,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고,

간소한 식사로 마련한 채소 요리로 만족하지 않으면, (호라티우스)

그것은 악덕이 본질이다.


올라가게 하기 보다는 1229

어린아이들은 평민답고 자연스런 법칙으로 운에 맡겨 제대로 되어 가게 두라. 검소하고 엄격한 생활에 단련되는 습관에 맡겨 두라. 그들을 다음에 험난한 생활로 올라가게 하기보다는 내려오게 할 일이다.


레오니다스의 딸 1230


나는 스파르타 왕의 아내이며 딸인 켈로니스의 아름다운 마음을 얼마나 존경하고 싶은지. 그의 남편 클레옴브로토스가 혼란의 틈에 부친 레오니다스에게 대항해서 우세하던 동안, 그녀는 착한 딸 노릇을 하며 추방당한 부친의 어려움 속에 그의 편을 들며 승리자에게 반대했다. 그런데 운이 뒤집힌 다음 이 여자는 행운의 편을 들려고 하지 않고 용감하게 자기 남편의 편을 들며 그가 패하여 달아나는 뒤를 따라간다. 그녀는 자기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며 자기가 가련하게 보아 주는 편으로 투신하는 것밖에 선택의 길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세도가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약한 자들에게는 거만하게 굴던 피로스보다는 당연히 플라미니우스의 본을 더 좇고 싶다. 그는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빌려 주었다.


온 채로 죽는 것으로 느낀다면 1231

하느님은 사람들의 생명을 조금씩 빼앗아 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내리는 혜택이다. 이것은 노령의 단 하나의 소득이다. 마지막에 죽는 것은 그만큼 온전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며, 그만큼 고통도 덜 받을 것이다. 이런 죽음은 사람의 반이나 반의 반쪽밖에 죽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 내 이 하나가 아프지도 않고 힘도 안 들이고 빠졌다. 그것은 이 이의 상태로서 자연스런 한계였다. 그리고 내 존재의 이 부분과 다른 부분들은 이미 죽었고, 내가 정력이 왕성하던 시기에 가장 생기 있던 다른 부분들은 이미 반은 죽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무너져 가며 나로부터 빠져 나간다. 죽음으로의 뜀박질이 이렇게까지 진척되어 있는 것을, 내가 이제 온 채로 죽는 것으로 느낀다면 내 오성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 나는 오성이 그렇게 어리석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 수명의 한계는 70 1231


내 죽음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이제부터는 운명에게 혜택을 요구하거나 바란다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내 죽음에 관해서 생각하며, 여기서 위안을 느낀다. 사람들은 옛날에는 인간이 키가 컸던 만큼 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옛날 사람이던 솔론은 인간 수명의 한계를 70으로 잡고 있다. 옛날의 그 '탁월한 중용'을 그렇게도 찬양하며, 중용의 절도를 가장 완벽한 것으로 간주하던 내가, 어이없게도 내 수명은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해야 할 일인가? 자신의 흐름에 거꾸로 되어 가는 것은 모두 불쾌해야 할 일이며, 자연대로 되어 가는 것은 항상 유쾌해야 할 일이다. "자연과 합치하여 생성하는 사물과 형상은 모두 선(善)이라는 수(數) 중에서 계산되어야 한다."(키케로) 그 때문에 플라톤은 부상이나 질병이 가져오는 죽음은 횡사라고 불러도 좋으며, 노령이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해서 닥쳐오는 죽음은 모든 것 중에 가장 가볍고 어느 점에서 감미로운 죽음이라고도 하였다. "청년에게는 난폭이, 노년에게는 성숙이 생명을 빼앗아 간다."(키케로)


지난 날의 내 그림에서 얼마나 더 멀어진 것인가! 1232


죽음은 사방에 우리의 생명과 섞이며 혼동된다. 쇠퇴가 그 시간에 앞서 오며, 바로 우리가 나아가는 길 속에 섞여 든다. 나는 25세와 35세 때의 내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지금의 것과 비교해 본다. 이미 몇 갑절이나 내가 아니게 되었던가! 지금의 내 그림은 나의 죽음의 그림자보다도 지난날의 내 그림에서 얼마나 더 멀어진 것인가!


누구와 같이 먹는가를 1233


나는 에피쿠로스가 하던 식으로 무엇을 먹는가보다도 누구와 같이 먹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며, 킬론이 페리안드로스의 초청을 받고 그 향연에 참석하는 것 같이 식사할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전에는 참석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은 일을 칭찬한다. 나는 사람과의 교제에서 얻는 취미보다 더 맛좋은 조미료는 없다고 본다.


식탁에서 이야기하는 재미 1236


우리의 쾌락들 사이에도 질투와 시기가 있다. 이런 것들끼리는 서로 상극이며 서로 방해를 놓는다. 진수성찬을 잘먹기로 유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이야기하는 재미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식탁에서는 악사들도 내보냈다. 플라톤은 그 이유를, 연회석에 악사들과 가수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예지로운 인사들이 그런 자리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즐기는 좋은 말과 재미나는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평민들이나 하는 버릇이라고 하였다.


크세르크세세스의 경우
1237

나는 자연스런 쾌락을 너무 탐하는 것도, 그런 취미에 반대하는 것도 똑같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본다. 크세르크세스가 모든 인간적인 탐락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탐락을 찾아오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포고하더니, 그는 맹추같은 자였다. 그러나 본성이 자기에게 주는 탐락을 단절해 버리는 자도 그에 못지않은 천치이다. 쾌락은 추구해서도 피해서도 안 된다. 쾌락은 받아야 한다. 나는 쾌락을 좀 걸쭉하고 고맙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본성의 영향을 향해 이끌려 간다. 쾌락의 헛됨을 과장해 보아도 소용없다. 그것은 충분히 느껴지며 충분히 드러나보인다. 우리의 정신과 아울러 쾌락에 싫증이 나게 하며, 흥을 깨트리는 구실을 하는 병든 정신의 간섭을 거부하자, 정신은 그 만족할 줄 모르며 변하기 쉬우며 변덕스런 성질에 따라서, 그 자체와 그것이 받아들이는 사물들을 어느 때는 지나치게, 어느 때 늘 모자라게 다루고 있다.


일상생활은 정상적인 직무 1239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는 똑같이 자기들의 가장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는 중대한 시기에도 본성의 쾌락, 따라서 필요하고도 정당한 쾌락을 아주 충만하게 누리는 것을 보면, 나는 그것을 정신의 풀림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이런 격렬한 직무와 힘든 사색을 그들 마음의 정신으로 일상 생활의 실천에 굴복시켜서, 심령을 강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상 생활은 정상적인 직무이고, 다른 것을 비정상적인 직무라고 보았다면 그들이 현명하였다.


뭐? 당신은 살아보지 않았단 말이오? 1239


우리는 대단한 바보들이다. "저 사람은 그의 일생을 한가롭게 보냈지.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한 일이 없네"라고 우리들은 말한다. "뭐? 당신은 살아보지 않았단 말이오? 그것이 당신의 직무들 중의 기본적일 뿐 아니라, 가장 훌륭한 일이오." "사람들이 내게 중대한 일을 다루어 볼 처지에 두었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수완을 보여 주었을 것이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생각해서 조종할 줄을 알았소? 당신은 모든 일 중의 가장 위대한 일을 수행한 것이오."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 1239∼1240

본성이 자기를 나타내고 계발하기 위해서는 운수 따위는 상대할 거리도 안 된다. 본성은 모든 층계에서 똑같이, 마치 장막이 없는 것처럼 그 뒷면까지도 나타내 보인다. 계락을 꾸밀 것이 아니라, 행동 습관을 꾸미는 것이 우리가 할 업무이다. 전쟁에 승리하여 영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행실에 질서와 안정을 얻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의 영광스럽고 위대한 걸작은 우리가 적당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지배한다, 재물을 모은다, 건설한다는 따위의 모든 일들은 기껏했자 부수적이며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한 군대의 장군이 방금 공격하려고 하는 돌격구(突擊口) 아래에서, 친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마음을 터놓고 한가로이 담소하는 장면이나, 천지가 자기와 로마의 자유에 반대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때에 브루투스가 순회 근무에서 물러나와 밤의 몇 시간을 안심하고 사학자 폴리비오스를 읽으며 주(註)를 달던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하찮은 심령들이나 자기 일의 무거운 부담에 눌려 지내며, 그런 일에서 완전히 풀려나와 채워 두었다가 다시 잡아서 처리할 줄 모르는 것이다.

오오, 나와 함께 가장 독한 시련을 겪어 온 용감한 전사여,
오늘은 그대 근심을 술잔에 담그라.
내일 우리는 망망한 대해로 배 띄워 나가리라.
                                                                       (호라티우스)

농담으로건 진담으로건, 소르본 대학의 신학주(神學酒)와 향연은 속담에도 오르지만, 그들이 오전은 유익하고 근직하게 학문의 단련에 보낸 만큼, 저녁 만찬은 태평하고 더 유쾌하게 든다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본다. 다른 시간들을 잘 사용했다는 생각은 식탁에서 더 정당하고 맛있는 향미가 된다. 현자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저 두 카토가 도덕을 위해서 남이 모방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놀라는 바이지만, 그들의 그 어색할 만큼 엄격한 심정은 그들 학파의 교훈을 따라서 인간 조건의 법칙과 비너스와 바쿠스의 법칙에도 유순하게 복종하며 그 법칙들을 즐겼던 것이다. 그들 학파는 완벽한 현자에게, 인생의 다른 모든 의무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탐락의 습성에도 똑같이 기술이 있고 이해가 깊기를 요구하고 있다. "미묘한 판단력을 가졌으면, 미묘한 구미도 가져야 한다."(키케로)



한가롭고 여유로운 마음가짐 1240


한가롭고 여유로운 마음가짐과 넉넉함과 편안함은 강력하고 후덕한 심령에 경이롭게 영광을 주며, 그들에게 더 적합한 일로 보인다. 에파미논다스는 자기 도시(테베시를 말함)의 청년들의 무도회에 참가하여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이, 자기와 같은 혁혁한 군공(軍功)을 세우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풍속 개혁을 성취한 자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일로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소문을 받은 늙은 스키피오는 감탄스러운 많은 행동을 했다. 그중에, 그가 유치하게도 능청하게 라엘리우스와 바닷가를 따라 거닐며 조개껍데기를 골라 줍기에 흥겨워하며, 공기놀이 장난을 즐기고, 날씨가 나쁜 때에는 방 안에 들어앉아 가장 평민적인 비속한 행동을 묘사하여 희극을 꾸미는 일로 재미삼으며, 머리는 한니발에 관한 대책과 아프리카 원정 계획으로 가득했다. 이러한 그가 시칠리아에 가서는 로마에 있는 그의 적들이 이를 박박 갈며 시기할 정도로 여러 학교를 찾아가 철학강의를 들었던 일보다 더 그 인물에 매력을 주는 일은 없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1240∼1241

소크라테스가 아주 노령에 이르러서도 시간을 내어 댄스와 악기 연주를 배워 가며, 이것으로 시간을 유용하게 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 인물이 그리스 군대 전체 앞에서 심오한 사상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고 황홀해서 하루 종일, 그리고 하룻밤을 서서 지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알키비아데스가 적에게 압도당한 것을 보고 군대의 많은 용감한 사람들 중에서 맨 먼저 구원하러 달려가 자기 몸으로 그를 가리며, 무기를 휘둘러 적군을 흩어져 달아나게 한 일이 있었다. 또 30명의 폭군들이 괴뢰들이 테라메네스를 처형하려고 할 때에, 이 부당한 처사에 그와 함께 분노한 전 아테네 시민들 중에서 맨 먼저 그를 구원하려고 나섰다가, 테라메네스가 직접, 겨우 시종 두 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는데도 굳이 말렸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그의 대담한 기도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미소년의 구애를 받고 강요당했을 떄에도 엄격하게 욕심을 억제한 일이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완벽한 형태의 본보기 1241

그는 27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굶주림과 추위와 말 안 듣는 어린아이들의 보챔과 아내의 바가지 등쌀에 시달렸고, 마침내는 고발과 포학과 투옥과 쇠사슬과 독배형을 받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인물은 교제의 의무로 술마시기 내기에 초청되면, 군대 중에서도 역시 승자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공기놀이와 목마타기를 거절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에도 우아한 품이 있었다. 왜냐하면 철학에 말하기를, 현자에게는 모든 행동이 똑같이 적합하며, 똑같이 영광을 준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한 형태의 본보기를 이 인물의 모습에서 찾아볼 일이며, 그리고 그 모습을 귀감으로 삼기에 결코 물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인생의 충만하고 순결한 사례들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가르쳐 준답시고 좋은 점이라고는 단 한 주름 있을까 말까 하며, 우리를 도리어 뒤로 퇴보시키고, 고쳐 주기는 고사하고 타락시키는 어리석고 못나고 부족한 자들을 날마나 우리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사람 노릇을 잘 하는 것 1241

세인은 잘 속는다. 사람들은 넓게 열린 큰길을 취하기보다도, 그 끝이 도로 표시와 경계선이 되는 언저리를 따라 가기가 쉽다. 또한 본성보다도 기교를 따르기가 훨씬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상한 품이 훨씬 적고 권장할 것이 못 되는 일이다. 심령의 위대성은 높이 올라가고 앞으로 나가는 일보다는 한계를 정하여 조절할 줄 아는 데 있다. 심령은 넉넉한 것은 모두 위대하다고 보며, 탁월한 것보다는 중용이 되는 사물들을 사랑함으로써 그 높이를 보인다. 사람 노릇을 잘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정당한 일은 없으며, 이 인생을 자연스럽게 잘사는 길을 배우는 것보다 더 힘든 학문은 없다. 그리고 질병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병폐는 우리의 존재를 경멸하는 일이다.


절제를 지키게 할 일 1242

신체가 병들었을 때에, 전염되지 않게 영혼을 떼어 내고 싶은 자는 할 수만 있으면 용감하게 해 보라. 다른 데서는 그 반대로 영혼이 신체를 도와서 애호하고, 그 본연의 쾌락에 참여하여 즐기기를 거절하지 말 일이며, 영혼이 더 현명하다면 분수 없이 하다가 불쾌한 일을 섞지 않도록 절제를 지키게 할 일이다. 무절제는 탐락이 주는 고치기 힘든 병이다. 그리고 절제는 결코 탐락의 징벌은 아니다. 그것은 쾌락에 맛을 더한다. 탐락을 최고선으로 세우던 에우독소스와 탐락을 대단히 높은 가치로 올려 놓던 그의 동료들은, 그 둘 사이에 특별히 모범적으로 지켜 오던 절제의 방법으로 이 탐락을 가장 우아하고 감미로운 진수로 맛보았던 것이다.


고통과 탐락 1242

고통은 그 연약한 시초에는 무엇인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탐락은 그 과도한 끝장에서 피해야 할 무엇이 있다. 플라톤은 이 둘을 짝지으며, 고통에 대항해서 싸우는 일은 똑같이 강인함이 맡은 역할이라고 보려 한다. 이들은 두 줄기 샘물이다. 거기서 국가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 때맞춰서 길어 낼 때에 그는 행복하다. 첫번 것은 필요에 따라 약으로 써야 하며, 또 하나는 목마른 때에 마시되 취하도록 마셔서는 안 된다. 고통· 쾌락·사랑·미움 등은 어린아이가 맨 먼저 느끼는 일들이다. 만일 거기 이성이 솟아나서 그런 사물들이 이 이성에 적용되면 그것이 도덕이다.


나는 시간을 어루만지며 매달린다 1242

나는 나 혼자 쓰는 어휘를 가졌다. 나는 날씨가 나쁘고 불편할 때에는 시간을 보낸다. 날씨가 좋으면 시간을 보내고 싶지가 않다. 나는 시간을 어루만지며 매달린다. 나쁜 날씨는 달음질쳐 보내고, 좋은 날씨는 주저앉게 하고 싶다. 이 '소일(消日, passe temps)'과 '시간을 보냄(passer le temps)'이라는 평범한 말투는, 인생을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이 인생을 흘려서 놓쳐 보내고 모면해 가며, 자기들이 알 수 있는 한 이 일생을 어떤 귀찮은 경멸할 거리인 것처럼 무시하고 도피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습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을 다르게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갑절은 인생을 즐긴다 1243

"깨닫지 못하는 자의 인생은 희열이 없고 혼돈스러우며 미래의 일만을 생각한다."(세네카) 그 때문에 나는 인생을 잃어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잃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며, 그렇다고 귀찮고 괴로운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래서 살기가 재미나는 자들만이 죽는 것도 불쾌해지지 않는다고 해야만 격에 맞는 일이다. 인생을 즐기는 데는 그 법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갑절은 인생을 즐긴다. 왜냐하면 즐기는 정도는 어느 정도 노력하는 열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내 생명을 시간적으로 아주 짧게 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나는 인생의 무게로 늘려 놓고 싶다.

나는 인생이 빨리 달아나는 것을 재빨리 잡아서 멈추게 하고 싶다. 그리고 생명을 정력 있게 사용함으로써 그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보충하며, 삶의 소유가 더 짧아짐에 따라 인생을 더 심오하고 충만하게 만들어 놓아야 하겠다.


희망의 노예 1244

그들은 현재 가진 것은 제쳐 두고, 희망의 노예가 되어서 환상이 그들 앞에 그려 보이는 그림자들과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지내며,

죽은 뒤에도 춤을 춘다고 하는 유령들과도 같이,
또는 수면 속에 우리 감각을 기만하는 헛된 꿈과도 같이,      (베르길리우스)

이런 헛된 생각들은 사람이 그것을 좇아가면 그들도 발걸음을 멀리 떼어 급하게 달아난다. 알렉산드로스가 자기 사업의 목적은 오직 일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성과와 목적은,

무엇이건 할 거리가 남아 있으면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루카누스)

그저 추구하는 데 있다.


인간적인 것, 참으로 유치한 수작 1245


헐학 사상들 중에서 나는 가장 견실한 것, 다시 말하면 가장 우리의 것인 인간적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내가 생각하는 바는 내 행동 습관에 맞게 낮고 천하고 하찮은 것이다. 철학자가 우리에게 신성한 것을 속세적인 것에, 합리적인 것을 비합리적인 것에, 엄격성을 관대성에, 정직을 부정의에 결합시키는 일은 야만적인 결합이라고 하며, 탐락은 현자가 맛볼 가치가 없는 짐승들의 소질이고, 그가 젊고 예쁜 아내에게서 얻은 단 하나의 쾌락을 말을 탈 필요가 있을 때에 장화를 신는 식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는 양심적 쾌락이라고 맹렬한 기세로 설교하는 것은 참으로 유치한 수작이다. 마치 그의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이 아니면 그들 아내의 처녀성을 빼앗을 권한도 정력도 생기도 없다는 말투다!


본성은 상냥한 안내자이다 1245


본성은 상냥한 안내자이다. 그러나 상냥하기보다도 더 현명하고 올바르다. "우리는 사물들의 본성에 침투하여 그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키케로) 나는 사방으로 이 본성의 자취를 찾는다. 우리는 그것을 인공적인 기이하고 묘한 자취와 혼동하여 왔다. 그리고 아카데미(플라톤) 학파와 페리파토스(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최고선은 이 본성을 따라서 살아감을 말한다. 그 때문에 정의하여 표현하기가 힘들다. 이와 가까우며 본성에 동의함을 말하는 스토아 학파의 최고선도 역시 그렇다.


신성한 진리 vs 인간적 허영, 이 둘을 서로 봉사하도록 내어줄 일 1246

어떤 행동들이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덜 평가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신들은 항상 이 필연성과 공모한다고 옛 사람(시모니데스를 가리킴)은 말하고 있지만, 아무리 해 보아도 그들은 쾌락과 필연성의 결합이 대단히 적절한 일이라는 생각을 내 머리에서 말끔히 떨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한 형제처럼 서로 통하게 결합되어 짜여진 구조를 갈라서 분리시켜려는 것인가? 그 반대로, 이 둘을 서로 봉사하도록 매어 줄 일이다. 정신은 그 둔중한 신체를 잠 깨워서 활기를 줄 것이며, 신체는 정신의 경솔함을 붙들어서 잡아매어 둘 일이다. "누구라도 영혼의 본성을 최고선으로 앙양하고 육체의 본성을 악이라고 처단한다면, 그는 확실히 영혼을 육체적으로 총애하고 육체적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성한 진리에 의해서가 아니고 인간적 허영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선물에는 우리가 보살펴 줄 가치가 없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머리털 하나하나라도 소중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을 그 조건에 따라 인도하는 일은 형식적으로 주어진 사명이 아니다. 이 사명은 명확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중요하다. 그리고 조물주는 우리에게 이 사명을 신중하고 엄격하게 수여했다. 권위만이 오로지 오성 위에 지배력을 가지며, 그리고 외국어로 말할 때에 더욱 무게를 가진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공격하자. "인간이 행해야 할 것은 저주해 가며 비굴하게 행하고, 육체적 영혼은 각각 다른 방면으로 밀려, 자신을 이렇게도 반대되는 동작들로 분열시키는 일이 바로 천치의 수작임을 부인할 길이 있는가?"(세네카)


글쎄, 좀 보라 1246


글쎄, 좀 보라. 자기 머릿속에 처넣은 사상 때문에 맛있는 식사도 돌아다 볼 생각을 않으며, 이런 먹는 일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야 되느냐고 불평하는 자의 잡념과 허상을 마음놓고 그대에게 말하도록 해 보라. 그대는 식탁의 모든 반찬들 중에 그의 영혼이 말하는 그 훌륭한 이야기보다 더 멋쩍은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대개의 경우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지켜보기보다는 잠자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의향은 그대의 스튜 요리만한 가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르키메데스의 황홀경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존경할 만한 심령들이나 하는 연구 1247

나는 여기서 저 신앙과 종교의 열성을 가지고 항구적이며 의식적으로 거룩한 사물들을 명상하도록 길러진 자들에 대해선 언급하고 싶지 않다. 또 생기 있고 새로우며 강렬한 희망의 노력으로 썩지 않는 단 하나의 영원한 쾌락으로서 기독교적 욕망의 종국적 목표이며 궁극적 한계인 영원한 양식을 미리 맛보며, 우리의 활동적이고 애매하고 궁색한 안락에 기대하기를 경멸하며,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양식의 사용을 쉽사리 육체에게 맡겨 버리는 것은 존경할 만한 심령들이나 하는 연구이다.


시간을 아끼자 1247

나는 항상 평범한 사이에서도 가장 천상적(天上的)인 사상과 가장 현세적 행위가 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보았다. 저 위대한 인물 이솝은 그 주인이 걸어가며 오줌을 깔기는 것을 보고, "이거 어디 되겠습니까? 다음에는 달음질치며 똥을 싸야 할 일이 아니오?" 하였다. 시간을 아끼자. 우리에게는 아직도 너무 한가롭고 잘못 사용되는 시간이 많다. 우리 정신은 자기의 필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이 조그만한 공간에서 아마도 신체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고는 일하기 위한 다른 시간들을 충분히 갖지 못하는 모양이다.


치명적으로 천한 것 1247

우리의 학문에서는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이 가장 비천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생애에서, 자기를 신격화하는 생각보다 더 치명적으로 천한 것을 알지 못한다.

필로타스는 이 대답으로 그를 재미나게 풍자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신들 축에 넣어 준 주피터 신 암몬의 신탁 편지를 가지고 그와 함께 즐기며 말했다. "그대를 위해서 내 마음은 대단히 기쁘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척도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며, 그에게 복종해야 할 자들을 가련히 생각하오." "그대는 신들에게 굴함으로써 세상에 군림하는 것이다."(호라티우스) 아테네 인들이 자기들의 도시에 폼페이우스가 왕림하는 것을 환영하는 얌전한 글귀는 내 뜻에 맞는다.

그대는 자기를 인간으로 인정하니,
그만큼 그대는 신이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아미오 역)


자기의 존재를 충실하게 누릴 줄 아는 것 1248

자기의 존재를 충실하게 누릴 줄 아는 것은 절대적인 완벽이며, 신성함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용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조건들을 찾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다. 그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죽마(竹馬)를 타고 높이 올라 보아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죽마 위에서도 우리는 다리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왕좌 위에서도 역시 우리 궁둥이는 자리에 앉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 1248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내 생각으로는 터무니없는 기적 없이 보통 인간의 본보기로 질서 있게 처신하는 인생이다.


노년의 축원 1248

그런데 노령기는 좀더 부드럽게 대접받을 필요가 있다. 건강과 예지의 수호자이면서 유쾌하고 사귐성이 있는 이 신(아폴론 신을 말함)에게 노년기의 축원을 바치자.

라토나의 아들이여,
내가 받은 재산을 굳건한 건강과 아울러 내게 주도록 간청하노라.
그리고 나의 지적 소질이 온전히 머무르도록 기도하노라.
내 노년기로 하여금 추악한 꼴이 되지 말고,
아직도 칠현금을 탈 수 있게 해 다오.      (호라티우스)

(끝)


몽테뉴 수상록 제1권_① (1∼116쪽)

몽테뉴 수상록 제1권_② (114∼349쪽)

몽테뉴 수상록 제2권_① (351∼593쪽)

몽테뉴 수상록 제2권_② (595∼728쪽)

몽테뉴 수상록 제2권_③ (733∼865쪽)

몽테뉴 수상록 제3권_① (870∼994쪽)

몽테뉴 수상록 제3권_② (995∼1112쪽)

몽테뉴 수상록 제3권_③ (1116∼1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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