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21. 상상력에 대하여


영생 불멸의 작품들의 작가 114


자연은 이 기관에게 죽어 갈 인생들의 유일한 영생 불멸의 작품들의 작가로서 어떤 독특한 특권을 부여할 때, 그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는 생식이 거룩한 행동이며, 사랑은 영생의 욕망이고, 그 자체가 영생의 정령인 것이다.


22. 한 사람에게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롭다



우리 마음의 소원 119


장사는 청년들의 낭비가 없으면 되지 않는다. 농군은 곡식이 비싸야 하며, 건축가는 집이 무너져야 하고, 재판소 관리는 사람들이 소송과 싸움질을 해야 되며, 성직자들의 영광과 직무까지도 우리의 죽음과 악덕이 있어야만 된다. 의사는 자기 친구가 건강한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군인은 자기 도시의 평화도 좋게 보지 않는다고 옛날 그리스 희극 작가는 말한다. 다른 일도 다 마찬가지이다. 더 언짢은 일로, 우리 각자가 자기 속을 뒤져 보면, 우리 마음의 소원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해가 생겨나 커지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찰해 본 나는, 대자연이 이 점에서 그의 전반적인 행정을 게을리 하는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연법학자들은 개개의 사물의 출생과 양육과 성장은 다른 사물의 변질과 부패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23. 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



습관은 최강의 상전 119∼120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꾸며 낸 사람은 습관의 힘을 아주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한 시골 여인이 송아지 한 마리를 낳았을 때부터 두 팔에 안고 쓰다듬어 주는 버릇이 생겨 이 일을 계속했더니, 그것이 습관이 되어 큰 황소가 된 뒤에도 거뜬히 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습관이란 것은 사실 배신적인 맹위를 떨치는 훈장인 까닭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은밀히 그 권위의 발판을 닦는다. 그러나 시작은 순하고 잔잔하게 하다가 시간의 도움을 받아 발판을 닦아 자리잡고 난 뒤, 얼마 안 가 맹렬한 폭군의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는 거기 대항해서 눈을 쳐들 힘도 없어진다. 우리는 습관이 자연 법칙의 모든 방면에 침범하는 것을 본다.

습관은 모든 사물들 가운데 최강의 상전이다.     (플리니우스)


옆 사람의 코 121


내 옷깃에 뿌린 향수는 코에 상쾌하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해서 입고 다니면 그것은 옆 사람의 코에만 소용이 있을 뿐이다.


습관은 대단찮은 일이 아니다 121∼122

플라톤은 한 아이가 도토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그 아이가 "대단찮은 일로 책망하시네요"라고 대꾸하자 "습관은 대단찮은 일이 아니다"라고 플라톤이 대꾸하였다. 우리의 가장 큰 악덕은 연약한 소년 시절에 주름잡히는 것이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훈육은 유모의 손에 달렸다고 본다. 어린애가 암탉의 목을 비틀고 개나 고양이에게 상처를 주며 날뛰는 꼴을 보는 것이 어머니들의 소일거리가 되고, 어떤 아버지는 바보처럼 아들이 자기 몸을 방어할 줄 모르는 농민이나 하인을 정당하지 못하게 때리고 있는 것을 보고 기사 정신을 가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배신과 속임수로 자기 동무를 농락하는 것을 보면 재롱을 피운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잔인과 폐악과 배반의 씨앗이며 뿌리이다. 그런 것이 싹이 트고 떳떳이 커가서 습관의 손에서 힘차게 득세한다.


이러한 비열한 경향을 아이의 나이가 어리고 경솔한 탓으로 돌리며 변명해 주는 일은 매우 위험한 교육 방법이다. 첫째 이것은 천성이 하는 말이니, 이때 그 천성은 더 약한 만큼 그 소리는 더 순수하고 강력하다. 둘째로 속임수의 더러움은 금화와 푼돈과의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에 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푼돈을 다룰 때에만 그렇지, 금화를 다룰 때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식보다는, '푼돈으로 속일 바에야 어째서 금화로는 못 속여?'라고 결론짓는 편이 더 옳다고 본다. 어린애들에게는 조심해서 그 꾸밈 자체를 미워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이다. 또 그들이 단지 행동에서뿐 아니라, 특히 마음에서 이 악덕을 피하도록 본래의 나쁜 점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악덕이 어떤 가난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런 생각마저 징그럽게 보여 주어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크고 평탄한 길을 걷도록 지도받았고, 또 어린애 장난에라도 속임수나 야바위 따위를 섞을 때에는 분노를 느껴왔기 때문에(진실로 어린애들 장난은 장난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가장 신중한 행동이라고 간주해야 하는 만큼), 아무리 가벼운 심심풀이라도 속이는 일에는 마음속에서부터 극도의 혐오를 느꼈다.


버릇이 되면 123


기적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자연의 본질은 아니다. 버릇이 되면 우리들의 판단력은 마비된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그들 눈에 비친 것보다 그들이 우리 눈에 더 괴상하게 보일 것도 없으며, 더 그러할 이유도 없다.


습관은 우주의 여제 127

습관은 키오 섬에서 7백 년 동안 아내들이나 처녀들이 잘못을 범한 기억 없이 지냈다는 기적을 실현하지 않았던가? 결국 내 생각으로는 습관이 하지 않는 일이나 하지 못할 일은 없다. 그리고 핀다로스가 습관을 우주의 여제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127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

 


습관의 힘 128

습관의 힘이 가진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조상들에게 씨를 받아서, 우리 마음에 주입되어 있는 공통의 사상은 그것이 보편적이며 자연스런 사상인 것같이 보인다.


24. 같은 결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결과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 141

나는 의술뿐 아니라 더 확실성 있는 여러 기술도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고 본다. 시상이 떠올라 작가가 황홀한 무아경에 실려가며 시를 읊는 경우에는 왜 운을 탔다고 하지 못할까? 이러한 영감은 자기 능력과 힘에 넘치는 일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 밖에서 오는 힘인 것을 작가 자신도 인정한다. 웅변가들도 비상한 동작과 흥분에서 자기가 의도하던 것보다 넘치는 말을 할 때에 그것이 자기 능력이 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미술도 그와 같으며, 때로는 화가의 필법을 벗어나서 그의 구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작품이 나오면 화가 자신도 감탄과 경악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운은 이런 모든 작품들에 그가 차지하고 있는 몫을 작가의 의도뿐 아니라 지식 없이 이루어지는 그 작품의 우아성과 아름다움 속에 더 명백하게 보여 준다. 능력 있는 독자는 흔히 다른 사람의 문장 속에 작가 자신이 그런 점을 알아보며 거기 넣은 것과는 다른 완벽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더 풍부한 의미와 양상을 찾아 준다. 군사적인 작전으로 말하면, 운이 거기에 얼마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는 각자가 보는 일이다.

우리의 충고와 고찰에도 그 속에 운과 요행이 섞여 있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못되며, 예지는 예민하고 생동할수록 그 자체에 더욱 허약성을 발견하며, 그 자체를 경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음모를 당할 위험을 느끼는 자 142

음모를 당할 위험을 느끼는 자는 실력으로도, 경계 조치로도 안전을 기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적이 나를 가장 잘 보살펴 주는 친구의 가면을 쓰고 올 때에 적에 대해서 내 안전을 도모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을 보좌하는 자들의 의지와 마음을 알아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 144

너무 상냥하고 잘 살펴보는 예지는 고매한 사업에는 치명적인 적이다. 스키피오는 시팍스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군대를 남겨 두고, 새로 정복해서 치안이 아직 의심스런 스페인을 떠나서 아프리카 땅으로 건너가던 때에, 단지 배 두 척을 가지고 적의 땅이며 야만인 왕의 세력권이고 신의도 믿을 길 없는 곳에, 아무 보증도 없이 인질도 잡아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의 위대한 용기와 자기 행운과 높은 희망이 약속하는 바를 믿고 뛰어들었다. "우리가 보여 주는 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티투스 리비우스)


25. 학식이 있음을 자랑함에 대하여


이책, 저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151

우리는 기억력을 채울 생각만 하고, 이해력과 양심은 빈 채로 둔다. 마치 새들이 모이를 찾으러 나가서 그 모이를 새끼에게 먹이려고 맛보지 않고 입에 물어 오는 것과 똑같이, 우리 학자님들은 여러 책에서 학문을 쪼아다가 입술 끝에만 얹어 주고, 뱉어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은 수작이 얼마나 내 경우에 들어맞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내가 여기 글을 쓰는 것도 똑같은 수작이 아닐까? 나는 이책 저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그것을 담아 둘 곳도 없어서, 내게 저장해 두지 못하고 여기다 옮겨놓는 것이다. 사실 이 문장들은 전에 있던 자리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지식으로만 배우는 것이고, 과거의 것은 미래의 것과 똑같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 152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뭐라고 말하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152∼15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 되고 우리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학식이 많아서 경험이 없이도 그렇게 위대한 장수가 되었던 루쿨루스는 우리들의 방식으로 지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너무 심하게 남의 팔에 매달려 다니다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마저 없애고 만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대비할 생각을 가지면? 나는 겨우 세네카의 사상에서 꺼내올 뿐이다. 내가 자신이나 또는 남을 위해서 위안의 말을 찾아보고 싶으면? 나는 그 말을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사람들이 나를 그 지식으로 단련시켜 주었던들,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찾아 가졌을 것이다.


26.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드 귀르송 백작 부인 디아느 드 포아에게



나팔의 좁은 홈 161

역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읽을 거리고, 시 역시 특별히 즐겨서 읽습니다. 왜냐하면 클레안테스가 말하듯, 마치 소리가 나팔의 좁은 홈으로 몰려서 빠져나갈 때에 더 날카롭고 힘차게 나오는 것처럼, 문장은 시의 형식과 음률의 수에 억제되어 더 박차게 솟아나오며, 내게 더 강하게 감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161

내게는 아직도 저 너머의 나라가 보이는데, 그 시야가 혼탁하고 몽롱해서 아무것도 풀어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공상에 떠오르는 것을 아무것이나 무척대고 말하려고 하며, 여기 내 고유의 타고난 방법만 쓰기로 하고,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좋은 작품들 중에 내가 취급하려는 것과 같은 제재를 우연히 만나 볼 때에는(내가 방금 플루타르크에서 그의 상상력의 힘에 관한 설화에 부딪친 것처럼) 이런 사람들에 비하여 내가 얼마나 약하고, 허술하고, 둔하고, 잠들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못나 보이게 됩니다.


이런 문장 162

어느 날, 나는 이런 문장에 부딪혔습니다. 나는 프랑스어의 핏기 없고, 살이 붙지 않고, 속 비고, 의미 없는 글을 흥미 없이 읽어 가자니, 그것은 확실히 프랑스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권태를 느끼며 읽어 가다가 갑자기 고매하고 풍부하며 기개가 하늘에 솟는 한 문장에 부딪쳤습니다. 만일 그 내리막이 순하고 오르막이 좀 길게 보였다면, 그것은 변명될 수 있었을 겁니다. 여기 와서는 절벽이 낭떠러지로 깎아지른 듯 첫번 여섯 글귀로 나는 내 몸이 다른 세상으로 날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거기서 나는 전에 읽은 것이 너무나 얕고 깊은 구렁텅이임을 깨닫고, 다시는 그리고 내려갈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가 이런 풍부한 약탈품을 가지고 내 글 한 장만 장식했다면, 다른 장들이 얼마나 졸렬한 것인지 너무 잘 밝혀졌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더 많이 말하기 위해서밖에는 163∼164

나는 나 자신을 그만큼 더 많이 말하기 위해서밖에는 남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는 식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 내놓습니다. 나는 여기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일을 배워서 내가 변해 간다면, 나 자신은 아마도 내일쯤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임받을 권한도 없고, 그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에는 나 자신의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니까요.


타고난 성향 164

타고난 성향을 고치기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 길을 잘 잡지 못한 탓으로 사람들은 늘 헛수고를 하며, 오랜 세월을 낭비하여 어린애들이 기반을 닦을 수 없는 일에 쓸데없이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어려움에 대해서 제 견해로는, 어린애들을 항상 가장 좋고 유익한 일로 지도하며, 우리가 어릴 적의 아이들 동작을 보고 경솔하게 짐작하고 예측하는 바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173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작품 속에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한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습니다. 플루타르크는 이 작품 속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고,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던 것 이상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수한 문법상의 공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 우리들 천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들이 침투되어 있는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174

세상 사람들을 많이 알아 두면 판단력에 경탄할 만한 빛을 얻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 속에 뭉쳐 죄어서 자기 코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아테네에서'라고 대답하지 않고 '세상에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남달리 상상력이 충만하고 드넓던 그가 세상을 자기 도시와 같이 생각하고, 인류 전체에게 자기 지식과 교유와 애정을 베푼 것은 우리가 발 아래밖에 못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박을 맞고 있는 자 175

머리 위에 우박을 맞고 있는 자는 지구 반쪽이 전부 폭풍우에 휩쓸리는 줄 압니다.


강을 건너려고
 177

감히 현명하여라.

시작하라, 잘 살아 볼 시간을 미루는 일은

강을 건너려고 물이 다 흘러가 버리기를 기다리는 촌사람 격이니라.

그 동안 강물은 흐르며,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                              (호라티우스)


책을 짊어진 당나귀 198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린애의 교육에는 욕망과 애정을 돋우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책을 짊어진 당나귀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매질해서 그 주머니에 학문을 잔뜩 넣어 줍니다만, 이 학문을 잘 하려면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27. 우리들의 능력으로 진위를 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수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 199

나는 이성으로 어떤 사물을 이렇게 결단적으로 그릇되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우리 어머니인 대자연의 힘에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우월한 처지에 두는 수작이며, 그리고 이런 일을 우리의 능력과 역량의 척도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일은 세상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나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 손에 잡히는 대부분의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장님이 손으로 더듬듯 얼마나 컴컴한 구름 속을 거쳐서 잡게 되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참으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습관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도 보아 싫증이 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빛나는 창공을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런 사물들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이 사물이 처음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마치 그것이 갑자기 그들 눈앞에 놓여졌다고 상상하라.
이보다 더 기적에 비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것을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루크레티우스)

강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자가 처음으로 강 앞에 나왔을 때에, 그는 그것이 대양인 줄 알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사물들은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극한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큰 강이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을 못 본 자에게는 크게 보인다.
한 나무와 한 인간을 두고도 그러하니, 모든 종류에게
각자가 본 가장 큰 것은 거대하게 보인다.      (루크레티우스)


아무 것도 지나치지 않게 200

우리는 사물의 크기보다 그 새로움에서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대자연의 무한한 힘은 더한층 존경심을 가지고, 또 우리가 무식하고 허약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믿을 만한 사람이 증명한 것으로서, 진실일 듯싶지 않은 사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적어도 판단을 유예해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불가능하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당돌한 자부심이며, 가능성의 한계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이다. 불가능과 범상치 않음 사이의 차이, 그리고 자연의 흐름이라는 질서에 반대되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또 경솔하게 믿지 않고 쉽사리 믿지 않지도 않는다면, 사람들은 킬론이 권장하는 '아무것도 지나치지 않게'라는 규칙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만과 호기심 203

오만과 호기심은 우리 마음에 대한 두 가지 천벌이다. 호기심은 우리들이 무슨 일이건 참견하려 하게 하고, 오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채 두지 못하게 한다.


28. 우정에 대하여


정의보다 우정 204

본성이 우리를 사교성보다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수한 입법자들은 정의보다도 우정을 더 가꾸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정의 마지막 완성점은 이러하다. 왜냐하면 대개 탐락이나 이익, 공적으로나 사적인 필요성으로 가꾸는 모든 우정은 그 때문에 우정 자체보다도 다른 원인이나 목적과 보상을 우정에 혼합하기 때문에, 그만큼 아름답지도 너그럽지도 않으며, 그만큼 우정답지도 못하다.


우정이란 206

여기 여자에 대한 우정을 비교해 보면, 우리의 선택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우정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사랑의 근심에 쓰디 쓴 감미를 섞는 여신도
나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카툴루스)

더 활발하고 태우는 듯 더욱 격렬하다. 그러나 이것은 절도가 없고 경박하고 동요하는 잡다한 불꽃이며, 작열하다가 수그러지기 쉽고, 우리의 한구석밖에 잡지 못하는 열병의 불꽃이다. 우정은 전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그러면서도 절제 있고 고른 열이고, 견고하고도 침착한 열이며, 거기에는 거칠고 찌르는 것이 없이 아주 보드랍고 매끈한 심정이다. 더욱이 사랑의 열은 우리에게 빠져 달아나는 것을 잡으려고 뒤쫓는 강제된 정욕이 있을 뿐이다.


포획한 산토끼 206

수렵자는 추위와 더위에도
산으로 계곡으로 산토끼를 쫓아간다.
그는 포획한 것은 이미 거들떠볼 생각이 없고
달아나는 짐승에게만 욕망이 생긴다.                (아리오스토)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
209

대체로 보통 친우 또는 우정이라 부르는 것은 어느 기회에 편의상 맺어져서 우리 마음이 서로 사귀는 친교와 친밀성에 불과하다. 내가 말하는 우정에서는 마음이 아주 보편적인 혼합으로 뒤섞여 융합되기 때문에, 그들을 맺는 매듭이 지어져서 알아볼 수 없이 된다. 누가 내게 왜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본다면, 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음을 느낀다.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대답할 길이 없다.


그는 나다 213

유일하며 주체되는 우정은 다른 모든 의무를 면제해 준다.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겠다고 네가 맹세한 비밀, 나와 다른 자가 아닌 그자에게는 맹세를 어김 없이 알려줄 수가 있다. 그는 나다. 자기가 이중으로 된다는 것은 하나의 큰 기적이다.


좋은 친구
214

내가 양식(良識)을 가진 한
좋은 친구와 비교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라티우스)


친구를 잃은 슬픔 216

오! 불행할꺼나, 형제여, 그대를 잃다니
그대의 달콤한 우정이, 인생에 가다듬던 우리 희열은 모두
그대와 더불어 단번에 사라진다.
그대 죽음으로써 내 온 행복은 부서진다.
형제여! 그대와 더불어 우리 심령은 무덤으로 내려가고
그대 죽은 이후
나는 공부와 내 심령의 모든 열락을 내 마음에서 쫓아 냈다.
그대에게 다시는 말도 못할 것인가?
그대 목소리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인가?
생명보다도 더 소중하던 형제여!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를 사랑하리라.               (카툴루스)


30. 절도에 대하여


배운 꾀가 탈이 되어서, 극도의 철학
 219

과녁 너머로 활을 쏘는 자는 화살이 과녁에 못 미치는 자와 똑같이 실패한다. 눈은 캄캄한 속으로 내려가는 때나 너무 밝은 빛 속에 나가는 때나 똑같이 혼란을 느낀다. 플라톤에 나오는 칼리클레스는 극도의 철학은 해롭다고 하며, 이익이 있는 정도를 넘어서 거기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철학을 절도 있게 대하면 유쾌하고 유익하지만, 마침내는 사람을 황당하고 악덕스럽게 만들고, 일반의 종교와 법률을 경멸하고, 사람들과의 교섭을 회피하며, 인간적인 해학을 적대시하고, 모든 정치적 사건의 처리나 남을 도와주는 일이나, 자기를 지키는 일도 불가능하게 되며, 빰을 얻어맞아도 대항 못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철학이 과도하고 지나치게 풍부하면 우리의 타고난 자유를 속박하며, 배운 꾀가 탈이 되어서 오히려 자연이 우리에게 그어 준 좋고 탄탄한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31. 식인종에 대하여


운명에 패한 것 234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여기 그의 진실한 영광이 있다. 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고, 마음과 심령의 견고성이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나 무기의 가치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자기 용기에 고집하여 쓰러지며, '쓰러져도 무릎으로 서서 전투하는'(세네카) 자, 아무리 죽음의 위험이 임박해도 태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 자, 숨을 넘기면서도 경멸하는 확고한 눈초리로 적을 쏘아보는 자는 패하여도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명에 패한 것이다. 그는 살해당한 것이지 패한 것은 아니다.


가장 용감한 자 234

가장 용감한 자는 때로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 그러므로 개선 못지않은 패배도 있는 것이다. 태양이 그의 눈으로 보아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 살라미스·플라타에아·미칼라·시칠리아 등 4대 승리의 영광 전부를 뭉쳐 보아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의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들이 전멸당한 영광에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36. 옷 입는 습관에 대하여

이집트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에서, 헤로도투스는 자기도 다른 사람과 같이 보았다며, 거기 죽어 쓰러진 자들을 보니, 이집트 인의 머리가 페르시아 인의 것보다 비교가 안되게 더 단단한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 사람은 머리에 늘 모자를, 다음에는 터번으로 감고 있으며, 이집트 사람은 어릴 적부터 머리를 깎고 맨머리로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37. 작은 카토에 대하여


비록 진창 속에 굴러도 251

내가 허약하다고 해도 그것은 평가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힘과 정력에 관해서 내가 가져야 할 의견을 변경하게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모방할 수 있는 것밖에 칭찬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키케로) 비록 진창 속에 굴러도, 나는 하늘 꼭대기에 이르듯 도저히 모방할 수 없게 고매한 몇몇 영웅적 심령들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 252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39. 고독함에 대하여


군중 260

군중 속의 전파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람은 악인들을 모방하든지 미워하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다 위험하다. 그들의 수가 많으니 많아질까 두렵고, 우리와는 너무 다르니 너무 많이 미워할 일이 두렵다.


귀찮기가 덜할 것은 없다 260

그런데 고독함의 목적은 모두 더 한가로이 편안하게 살자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그 길을 잘 찾는다. 사람들은 제반사를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일거리를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 하나를 보살피는 것과 국가를 다스리는 것 사이에는 고초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 어디에 마음이 매여 있건, 사람은 거기에 전부 매인다. 그리고 가정일이 덜 중요하다고 해도 귀찮기가 덜할 것은 없다. 그뿐더러 궁전이나 장사일에서 풀려 나왔다 해도, 우리는 인생의 고초에서 풀려 나온 것은 아니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261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아무개가 여행을 다녀왔지만 조금도 나아진 것이없더라고 말하자 "그는 자기를 짊어지고 갔다 온 것이지" 하며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모든 연결을 물리치고 262

그러므로 마음을 끌어 내어 제 자신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외롭고 쓸쓸함이다. 이것은 도시의 한복판이나 왕들의 궁전에서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따로 떨어져서 더 잘 자기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살며 사람들과 교섭 없이 지내려고 하는 만큼, 우리에게 만족이 매여 있게 하자. 우리를 타인에게 얽매이게 하는 모든 연결을 물리치고, 정말 홀로 살며 편안하게 살아갈 능력을 얻기로 하자.


뒷방을 가지고 263

할 수만 있다면 아내·아이·재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행복이 거기에 매여 있게까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아주 자기 고유의 것인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 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의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일이다.

아내도 어린애도, 재산도, 다른 사람도, 하인도 없는 듯 그곳에서 혼자 생각하며 웃고 지내며, 그런 것들을 잃는 경우에 부딪혀도 그런 것들 없이 살더라도 아무런 별다름이 없게 할 일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들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자기를 동무삼을 수 있다. 마음은 공격할 거리, 방어할 거리, 줄 거리와 받을 거리를 가졌다. 이러한 고독함 속에서 할 일 없이 괴롭다고 오그라들까 두려워 말자.


가장 쓸모없고 헛된 물건인 명성이나 영광 264

우리 용도에 가장 쓸모없고 헛된 물건인 명성이나 영광을 위해서, 건강과 안락과 생명을 즐겨 바꾸지 않을 자 누구인가? 우리는 죽음만으로 두려움이 부족한가? 우리의 아내·아이·가족들의 죽음까지 짊어지자. 우리의 일만으로 수고가 부족한가? 우리 이웃사람이나 친구들의 일까지 맡아서 속을 썩이고 골치를 앓자.

웬 말인가, 한 인간이 무슨 사물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생각을 머리에 두다니!      (테렌티우스)


남을 위해 실컷 살아 보았으니 264

고독함은 탈레스의 본을 따서 자기 활동기의 화려한 세월을 세상에 바친 자들에게 더 적합하고 온당한 것같이 보인다.

남을 위해서 실컷 살아 보았으니, 적으나마 인생의 말기에는 자기를 위해 살아 보자. 우리의 사상과 의향을 자신의 안락을 위해 돌아 보자. 확실하게 은퇴할 자리를 잡는 것은 가벼운 시도가 아니다. 은퇴해 보면 다른 일에 참견 안 해도 할 일이 상당히 많이 생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사해 갈(죽을) 채비를 할 여유를 주시는 이상, 그 채비를 하자. 짐짝을 꾸리자. 일찍 사람들과 작별하자. 우리를 다른 데 매이게 하고 자신에게서 물러나게 하는 가혹한 속박에서 벗어나자. 이러한 강력한 속박에서 풀려 나와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즐겨 보며, 무엇보다도 자신 외에는 위하지 말 일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물들이 우리 것이 되게 하자. 그러나 그것이 너무 우리의 피부에 달라붙어 살점이 떨어지거나 자신의 한쪽이 무너져 내리지 않고는 떼어 버리지지 못하게 되지는 말게 하자.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

이제는 사회에 보태 줄 거리도 없으니 우리가 사회에서 물러날 때가 왔다. 그리고 남에게 빌려 줄 거리가 없는 자는 남의 것을 빌려 오려고 생각지 말자. 힘은 빠져가고 있다. 힘을 뽑아다 우리 자신에게 담아두자. 우정의 봉사와 동료의 봉사를 자신에게 쏟아넣고, 뒤섞을 수 있는 자는 그렇게 할 일이다.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없고 걷어채이는 존재가 되게 하는 이 보잘것없음에서, 자기 자신에게도 걷어채이며 둔중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말게 하라. 자기를 추어올리며 애무해 주라. 자기 이상과 양심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들 앞에 잘못하면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다스리라. "사실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퀸틸리아누스)

스크라테스는 말하되, 젊은이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성인은 일을 잘 해야 하고, 노인은 모든 시민적, 군사적 직무에서 물러나서 어떤 정해진 일에 얽매임 없이 마음대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하였다.


268∼269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책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우리에게 최선의 부분인 쾌활성과 건강을 잃고 만다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저버리자. 나는 책을 읽는 결과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척박하고 가시돋친 것 269

학문 중에는 척박하고 가시돋친 것이 있으며, 대부분은 민중을 위해서 꾸며 낸 것이다. 그런 것은 세상 일에 봉사하는 자들에게 맡겨 둘 일이다. 나로서는 재미나고 쉽고 내 기분을 돋워 주거나 내 죽음을 조절하도록 위안을 주며 충고하는 서적들밖에 좋아하지 않는다.


둥둥 떠 살아왔다 270∼271

"그대는 이제까지 헤엄치며 둥둥 떠 살아왔다. 항구로 죽으러 돌아오라. 그대는 다른 생명을 모두 빛에게 주었다. 남은 생명은 어둠에게 주라. 생명의 열매를 버리지 않는다면 직무를 버리기는 불가능하다. 이 목적으로 명예와 영광을 위한 모든 근심을 버려라. 그대 과거 행동의 빛은 너무 과하게 그대를 밝혀 주며 그대의 은둔처까지 따라올 위험이 있다. 다른 탐락들과 아울러 남들의 칭찬에서 오는 쾌락을 버려라. 그대의 학문과 능력으로 말하면, 걱정하지 마라. 그 성과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그대 자신에 더 값어치가 생긴다. 사람들이 켤코 알아 줄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느냐고 누가 물어 보자 "아는 자, 얼마 없어도 족하다. 하나라도 족하다. 하나도 없어도 족하다"고 대답한 자의 일을 상기하라."

그는 진실을 말하였다. 그대와 동무 하나만 있으면, 그대들 둘이 충분히 인생의 무대가 된다. 또 그대와 그대 자신만으로 족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에게는 하나이며, 그대 하나가 그대에게 민중 전체가 되게 하라, 한가하게 집에 있거나 은둔에서 영광을 끌어 내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야심이다. 자기 굴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발자국을 지우는 산짐승의 본을 떠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말을 해 주기를 찾는 것이 그대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대가 어떻게 그대 자신에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찾으라. 자신에게 은퇴하라. 그러나 먼저 그 곳에 그대를 받아들일 차비를 하라. 그대가 그대를 지배할 줄 모른다면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미친 수작이다. 외로움 속에서도 사람들과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수가 있다. 그대가 그 앞에 감히 실수하지 못하는 자가 되기까지,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존경을 느낄 때까지 "그대 마음에 선한 이상을 수호하라." (키케로) 그대 마음에 늘 카토와 포키온과 아리스티데스를 그려 보라. 그들 앞에서는 미친 자들까지도 자기 잘못을 감추더라. 그들을 그대의 모든 의향의 조정자로 삼으라. 만일 이 의향들에 헛길이 들어가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길을 잡아 주리라. 그들은 그대가 자신으로 만족하는 길을 지키게 하며, 자신에서밖에 아무것도 빌려 오지 않게 하며, 그대 마음을 확실하고 한정된 사색에 멈춰 다져지게 하며,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하면서 더욱 즐기는 진실한 보배를 이해하고 나서, "생명이나 명성을 연장시킬 욕망 없이, 그것만으로 만족하게 하는 올바른 길에 그대를 잡아 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41. 자신의 영광을 양보하지 말 것


가장 억세고 고집스런 습성
278

명성은 그 달콤한 소리로 오만한 인간들을 매혹하며
그다지도 예쁘게 보이지만, 그것은 한 메아리
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살랑 스치는 바람에도
불려 사라지는, 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토르콰토 타소)

그리고 인간들의 가장 주책 없는 기분들 중에서, 철학자들까지도 다른 무엇보다 여기서 풀려나는 일이 가장 느리며 마음이 괴로운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가장 억세고 고집스런 습성이다. "왜냐하면 명성은 도덕의 길로 상당히 진척한 자들까지도 유혹하기를 그치지 않는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이것만큼 명백하게 이성이 그 허영됨을 비난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야심은 우리 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것을 깨끗이 벗어 던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대는 이런 생각은 없다고 단단히 말하고 굳게 믿고 나서도, 명예욕은 그대의 이성에 거슬러 내장에까지 사무치는 경향을 나타내는 까닭에 여기에 어떻게 당해 낼지 방도가 어렵게 된다.

키케로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사상을 배격하는 자들까지도 그런 말을 써내는 그들의 책 겉장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 그들이 영광을 경멸했다는 것으로 영광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2. 우리들 사이에 있는 불평등에 대하여


평가의 잣대 280∼281

사람들의 정신과 정신 사이에는 땅에서 하늘까지만큼 헤아릴 수 없는 층계가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평가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들 말고는 어느 사물이건 그 자체의 소질만으로밖에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말 한 필을 두고, 그 힘차고 숙달된 것을 칭찬하는 것이며, 그 안장을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사냥개는 그의 속력을 보고 칭찬하는 것이지 목띠를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한 인간을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것을 보아서 평가하지 않는가? 그는 따르는 사람이 많고 훌륭한 궁전을 가졌고 신용이 있고 연수입이 많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주위에 있다.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루 속에 넣은 고양이를 자루만 보고 사지 않는다. 말을 흥정할 때는 그 장비를 벗기고 맨몸을 드러내서 보며, 또는 옛날에 왕공들에게 팔려고 내놓을 때에 하듯 말을 덮어씌워 놓은 때에는 좀 필요성이 적은 부분을 덮으며, 털이 곱다든가 엉덩이가 크다든가에 현혹되지 않고, 주로 가장 유용한 부분인 다리와 눈과 발을 유의해 본다.

어째서 사람을 평가할 때에 그대는 싸잡아 묶어 놓고 평가하는가? 그는 자기 것이 아닌 부분밖에는 내보이지 않으며, 그를 진실로 평가하며 판단할 자료가 되는 부분은 감춰 두고 있다. 칼의 가치를 보아야 할 일이지 칼집은 볼 것이 못 된다. 그것을 벗기고 보면 아마도 한 푼이라도 주기가 아까워질 것이다. 그 자체로 평가해야지 그 장식을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옛 사람이 아주 재미나게 말하듯 "당신은 그의 키가 어째서 커 보이는지 아시오? 당신은 그 신발의 높이를 계산에 넣으시오"라는 식이다.

받침돌은 조각이 아니다. 말놀이용 대막대는 제쳐놓고 재어 보라. 부귀와 명예는 제쳐놓고 셔츠 바람으로 나오게 하라. 그가 경쾌하고 건강하여 직무에 적합한 신체를 가졌는가? 그의 마음은 어떤가? 마음이 건전하며 그 모든 부분이 유능하고 잘 하게 보이는가? 그 마음이 자기 것으로 풍부한가? 또는 남의 것으로 풍부한가? 요행으로 얻은 것은 없는가? 뽑아든 칼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 있는가? 입으로건 목으로건 어디로 생명이 달아나도 꼼짝도 않는지, 마음이 침착하고 공평하고 만족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며, 이런 것으로 우리들 사이에 있는 극도로 많은 차이를 판단해야 한다.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 282∼283

천성은 우리들에게 고통 없는 신체와
걱정이나 공포 없는 행복의 심정을 누릴 수 있는
마음밖에 요구하는 바가 없음을 보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군중이 어리석고 천하고 비굴하고 지조 없이 잡다한 정열의 폭풍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끊임없이 떠돌고 있는 꼴과, 이 현자의 자태를 비교해 보라.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맹목적이 되어서 이러한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농군과 왕, 귀족과 상민, 관리와 개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관찰해 보면, 갑자기 극도의 불평등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입은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이다.


사물들은 소유자의 심성에 따라 가치가 생긴다 285

마음이 나쁘고 어리석은 인간이니 그런 것을 다 무엇하나? 탐락도 행복도 정력과 정신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사물들은 소유자의 심성에 따라 가치가 생긴다.
사용할 줄 아는 자에게는 그것이 좋다.
잘 사용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나쁘다.    (테렌티우스)

운으로 얻은 재산은 있는 그대로를 맛보려면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소유함이 아니고, 누릴 줄 알아야만 행복하게 된다.

가옥이나 토지, 청동이나 황금 더미가
소유자의 걱정이나 신체의 열을 치유함이 아니다.
그 소유자가 건전해야만 획득한 재물을 잘 누린다.
그가 욕심이나 공포로 고민한다그의 재산은 눈병 환자에게 그림 격이고
통풍 환자에게 향유 격이다.      (호라티우스)

그는 바보요, 그의 취미는 둔중하고 멍청하다. 그는 코감기에 걸린 자가 그리스 포도주 맛을 모르듯, 장식한 말 안장을 말이 누리지 못하듯,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며, 플라톤이 말하듯 건강· 미모·힘·부유·기타 재물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정당한 자에게 행운이 되듯, 부당한 자에게는 화가 된다. 그리고 재화는 거꾸로 된다.

그리고 신체와 정신이 나쁜 상태에 있다면 이런 외부적 편익이 무슨 소용이 될 것인가? 바위에 조금 찔리거나 마음이 정열에 사로잡히면, 세상의 쾌락이 다 뭉쳐 와도 소용없다. 통풍을 앓기 시작만 하면 재상이니 대왕이니 다 소용없다.


물 마시는 쾌감 287

우리는 합창대 아이들이 음악을 대단히 즐긴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많은 음악들로 그들은 오히려 물리고 있다. 향연·춤·가면 무도·무술 시합 등은 그런 것을 자주 본 일이 없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러나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아는 자에게는 멋쩍고 재미없다. 여자도 실컷 즐긴 자에게는 유쾌할 것이 없다. 목마를 틈이 없는 자는 물 마시는 쾌감도 알지 못할 것이다. 


거북하고 싫증나는 일 287

풍부함보다 더 거북하고 싫증나는 일은 없다. 아무리 욕망이 큰들, 터키 태수가 후궁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3백 명의 여자가 자기 마음대로 된다면 싫증이 나지 않을 자 있겠는가? 조상들 중에 7천 명의 매 사냥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들로 나가지 않던 자는 무슨 취미로 사냥을 했을까?


피로스와 키네아스 290∼291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로 원정하러 가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의 현명한 고문관 키네아스는 그의 야심이 얼마나 허영된 것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글쎄, 전하" 하고 물어 보았다. "전하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계획을 세우십니까?" "이탈리아의 영주가 되련다"고 그는 갑자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다음에는요" 하며 키네아스는 말을 이었다. "골과 스페인으로 가겠다"하고 왕은 말했다. "그 다음엔요?" "나는 아프리카를 정복하러 가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을 정복하여 내 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나는 만족하고 편안하게 살겠다." 키네아스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런 소원이시면 어째서 전하께서는 지금 그렇게 편히 살지 않으시려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런 생활을 지금 이 시간에 하고, 이 두 나라 사이에 그만한 수고와 위험을 면제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성격과 운 291

"각자의 성격이 각자의 운을 만드는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46. 이름에 대하여


동성 동명 301

수많은 혈족들에 동성 동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잡다한 민족·시대·국가에도 또 얼마만큼 많은가? 역사상에는 소크라테스가 셋, 플라톤이 다섯, 이리스토텔레스가 여덟, 크세노폰이 일곱, 데메트리오스가 스물, 그리고 테오도르가 스물 있었다.



47. 판단력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308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결과는, 특히 전쟁에서는 대부분 운에 달려 있고, 그 운은 우리 생각이나 조심성에 따라서 도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다음 시도 그것을 말한다.

흔히 소홀한 조치가 성공하고, 조심하다가 실수한다.
운은 반드시 행운을 받을 가치 있는 자에게
승인과 원조를 주는 일 없이, 피차를 가리지 않고 돌아간다.
그것은 우리들 위에 군림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특별한 힘이 있어
모든 인생의 사물들을 그의 법 아래에 두기 때문이다.      (마닐리우스)


50.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하여



53.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



영원히 계속될 이 굉장한 논쟁 331


우리 마음이 아무것에도 만족해 안정되지 못하고, 욕망과 공상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택할 힘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게 생겼다는 특이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 철학자들이 인간의 최고선을 찾기 위해 항상 싸웠으나 해결도 합의도 없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영원히 계속될 이 굉장한 논쟁이 이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331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이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그것은 다른 일보다 중대하게 보이며
그것을 향유하게 되면, 다른 갈망이 솟아나와서
우리는 똑같은 갈증에 사로잡힌다.    (루크레티우스)


무엇이건 만족을 주지 못함 331


우리의 인식과 향락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건 만족을 주지 못함을 우리는 느낀다. 그리고 현재가 우리를 포만시키지 않는 만큼, 우리는 장차 오게될 알지 못하는 사물들을 우두커니 바라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사물들이 우리를 만족시킬 거리가 못 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병적이고 혼란된 상태로 사물들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54. 헛된 묘기에 대하여



운명의 화살이 쏟아져 와도 333


현자들은 사건들의 성질을 잘 저울질해 보고 고찰하고 나서 건강한 용기의 힘으로 그 위를 뛰어넘는다. 그들은 강력하고 견고한 심령을 가졌기 때문에 인생의 재앙들을 경멸하며, 발밑에 짓밟는다. 그들에게는 운명의 화살이 쏟아져 와도 도로 튀어서 끝만 뭉툭해지고, 그 신체에 아무런 자국도 남겨 주지 않는다.


56. 기도에 대하여



참 언짢은 병폐 341


자기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질 수 없다고 확신할 만큼 자기를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언짢은 병폐이다. 내세의 일에 희망과 공포를 품는 사상을 물리치고 인간에게는 현세에서의 어찌 될지 모르는 불균형한 운명밖에 없다는 식의 사상에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더욱 언짢은 일이다.


57. 나이에 대하여



20세가 되면 349


나로서는 우리 심령은 20세가 되면, 그것이 장차 될 싹수는 다 풀려져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약속해 준다고 본다. 이 나이에 자기 능력의 명백한 징조를 보여 주지 않은 심령으로서, 그 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증거를 보여 준 일은 없었다. 자연의 소질과 덕성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심령이 가진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시를 보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보여 주지 않는다.


30세 이후보다 349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 행동들 중에서, 그것이 무슨 종류이건, 옛 시대나 오늘날에나 대부분은 30세 이후보다 그 전에 이루어진 것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 인간의 생애를 두고 보아도 그렇다. 한니발의 생애와 그의 위대한 적수인 스키피오의 생애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생애의 아름다운 반생을 그들은 젊었을 때에 얻은 영광으로 살아 보았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비교해 보니 위대하였다.

(제1권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제 1 권

2. 슬픔에 대하여


눈물과 통곡 22


비참한 일을 참는 것은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 전체를 뒤집어엎고, 그 행동의 자유를 잃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에, 몸이 얽매여 얼어붙듯 하며 모든 동작이 오그라져 붙었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 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얽매였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는 식이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준다.    (베르길리우스)


3. 우리들의 감정은 세상 너머에까지 이른다.


저 너머
24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 않고 늘 저 너머에 있다. 공포나 욕망, 희망 등이 우리들을 늘 미래로 비약시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현실에 관한 고찰과 마음을 가리고, 장차 올 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장차 세상을 떠날 날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한다.


존재의 밖에 있게 되면 26

모든 일을 뒤적거려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도 자기가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 솔론의 말을 음미하며, "어느 자가 순리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그의 평판이 나빠지고 그의 후손이 비참하게 되어도,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동안 자기에게 좋을 대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한번 존재의 밖에 있게 되면, 현재의 것과는 아무런 연락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그가 존재하지 않게 된 이후에만 행복할 수 있을 바에야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솔론에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7. 생각이 우리들의 행동을 판단한다



우리 힘에 달린 것은 진실로 우리들의 의지뿐
39


우리는 자기 역량과 수단 밖의 일에 매달릴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결과와 집행은 결코 우리 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힘에 달린 것은 진실로 우리들의 의지뿐이니, 인간의 의무에 관한 모든 법칙은 필연적으로 이 의지에 기초를 두고 수립된다.


8. 나태에 대하여


정신의 일거리
40


빈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다면 수만 가지 쓸데없는 잡초만 무성해진다. 이 땅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이것을 개간해서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


마음의 목표 41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9. 거짓말쟁이들에 대하여



말문 43


기억력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이야기를 너무 멀리 끌고 가며 헛된 소재를 잔뜩 덧붙여 놓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들은 그 좋은 점을 질식시켜 버린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가 아닌 때에는 그들이 기억력으로 복받은 것을 저주하지 않으면 판단력에 복이 없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말문이 열린 후, 그것을 막고 이야기를 풀어 버리고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마리 준마의 힘 43


한 마리 준마의 힘은 그 말이 적당한 때에 딱 정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밖에는 더 잘 알아볼 것이 없다. 분수 있는 사람들 중에도 줄기차게 말하다가 그만 끊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야기를 끝낼 계기를 찾고 있는 동안, 그들은 마치 허약한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꼴마냥 횡설수설하며 이야기에 질질 끌려간다.


백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
43

특히 늙은이들에겐 지난날의 기억이 남아 있고 그 말을 되풀이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위험이 더 많다. 나는 한 귀족이 원래는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내가 듣기에 진력이 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에 백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들어앉아서 인식과 지식이 되어 박혀 있는 까닭으로 45


가장해서 변질시킨 말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다가, 일순간 말문이 막히지 않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실대로의 이야기가 먼저 기억 속에 들어앉아서 인식과 지식이 되어 박혀 있는 까닭으로, 그것이 공상에 떠돌아서 갑자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확고한 발판도 없고 아주 박히지도 않은 거짓말을 몰아내며 첫번에 받은 인상이 가짜로, 또는 변질시켜서 말한 부분이 기억을 잊어버리게 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거짓말쟁이
44


그들은 지각 없게도 제 올가미에 자신이 걸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왜냐하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그렇게도 여러 가지로 말해 놓은 것을 무슨 기억력으로 모두 둘러맞출 재간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에 이런 훌륭한 기술을 가졌다는 평판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것은 명성이 뭔지 모르거나 성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거짓말과 옹고집 45

거짓말만이, 그리고 그보다 좀 덜하지만 옹고집은 모든 기회에 억눌러서 나오지도 크지도 못하게 막아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그들과 함께 커 간다. 그리고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 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놀라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진실과 거짓말 45

만일 진실과 같이 거짓말에도 얼굴이 하나밖에 없다면 우리의 사정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면 거짓말쟁이가 말하는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반대는 수없는 얼굴과 무한한 벌판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과 개 45


정말 나는 엄숙하게 뻔뻔스런 거짓말을 하고 난 다음, 확실하게 닥쳐올 극도의 위험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옛날 교부(敎父-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우리는 무슨 말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사람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와 같이 있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10. 빠른 말법과 느린 말법


좁은 홈통 48


웅변이 자유롭고 유쾌하게 굴러가지 않으면 쓸모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 어떤 작품들은 애써서 지은 품이 박혀 있어 어딘가 투박하고 무뚝뚝한 맛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등불과 기름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잘 지어 보려고 애를 쓰며 자기 일에 너무 긴장하고 억눌린 마음 때문에 자연스러운 웅변을 억누르고 꺽어 빽빽하게 만들고,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


14. 선악의 취미는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달려 있다


불행이라는 것
57


사람들은 (그리스의 옛 속담에 말하되) 사물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속을 태운다고 한다. 이 전제를 모든 점에서 진실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이는 우리들의 비참한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데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불행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들어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경멸하거나 또는 좋은 일로 돌려놓기는 우리의 힘에 달렸기 때문이다.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 58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고 아무것도 우리들을 강제하지 않는다면, 병이나 궁색, 경멸 같은 것에도 좋은 맛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이고 형체를 지어 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괴로운 편으로 자기를 연결시키며, 그런 것에 쓰고 나쁜 맛을 준다는 것은 괴상하게도 어리석은 수작이다.


사상
60


모든 사상은 생명을 걸어가며 품어 보기에 족할 만큼 강하다.


피론의 돼지 62


오늘날에도 어린애들까지 수월찮은 고통을 받을까 무서워서 죽음을 택하는 예를 흔히 본다. 이 점에서 비겁한 자들까지도 도피의 방법으로 택하는 죽음 따위를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세상에 두렵지 않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한 고인은 말한다. 남자건 여자건 보다 더 행복한 시대에 살며, 여러 종파의 사람들로서 꿋꿋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 자진해서 받아들인 자, 또는 이 인생의 고난을 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살기에 지쳐서 저승으로 도피한 자, 그리고 다른 곳에 더 나은 생의 조건을 기대해서 죽음을 택한 자들의 목록을 벌여놓을 양이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수효는 너무나 많아서, 사실 죽음을 두려워한 자를 헤아리는 편이 쉬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런 예이다. 철학자 피론은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다가 대단한 위험에 빠졌는데, 그때 자기 주위의 공포에 싸인 자들에게 예로서 거기 있던 돼지 한 마리를 보여 주었다. 그 돼지는 그 폭풍우에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우리가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 이성, 그것으로 해서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며 제왕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 이성의 장점이 겨우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던가? 사물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안식과 평정을 잃는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를 피론의 돼지만도 못한 조건에 놓아 두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장 소중한 보배로 받들고 있는 지성을 가지고 우리는 대자연의 의도, 즉 각자는 자기 편익을 위해서 연장이나 방법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사물들의 이 보편적 질서와 싸우며, 우리를 파면시키는 일에 이 지성을 사용해서야 될 말인가?


죽음 63

죽음은 한순간의 이동인 만큼, 생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65


그렇지 않다면 우리 중에 도덕·용기·힘·큰 마음·결심 같은 것을 명예로 삼을 자, 그 누구일까? 고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무슨 역할을 맡을 것인가? "용덕은 위험을 탐한다."(세네카) 거친 방석 위에서 자고, 모든 무장을 갖추어 입고, 대낮의 더위를 참아 내며, 말과 당나귀 고기를 먹고, 자기 살을 째고 뼛속에서 탄알을 뽑아 내는 것을 눈으로 보며, 살의 꿰매고 태우고 하는 수술을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보통사람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똑같이 착한 행동들 중에서도 더 힘든 것이 할 만한 것이라고 현자들이 말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을 피하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경솔의 동류인
희열, 쾌락이나 담소, 유희 속에 있을 때가 아니고,
비애 속에서 견고성과 지조를 지킬 때이다.      (키케로)


더 큰 희열 65


덕은 치르는 희생이 클수록 더 큰 희열을 준다.      (루카누스)


전능한 원동력 65


고통이 그렇게도 참을 수 없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만족을 정신에서 얻는 습관을 갖지 않고, 우리들의 조건과 행위의 유일한 상전인 우리 심령의 힘에 기대하지 않는 탓이다. 육체는 다소간의 차이를 제하고는 한 자세밖에 갖지 않는다. 마음은 모든 종류의 형태로 변할 수 있고, 육체의 느낌이나 다른 모든 사건을 무엇이든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의 상태에 맞추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연구하고 탐색하며, 그 속에 있는 전능한 원동력을 일깨워야 한다.


마음 역시 그렇다 66∼67


우리가 도망치면 적이 더 악을 쓰며 추격해 오는 것과 같이, 고통도 우리가 그 밑에 떨고 있으면 더욱 거만해진다. 고통은 잘 버티는 자에게 더 순해질 것이다. 고통에 대항해서 마음을 긴장시켜야 한다. 물러나거나 뒤로 빼면,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는 파멸을 불러온다. 육체가 굳어질수록 짐을 지기에 더 든든하듯, 마음 역시 그렇다.


고통에 내어주는 자리만큼밖에 67


우리는 마치 보석들이 그것을 놓아 두는 자리의 빛깔에 따라 생생하거나 흐릿한 빛깔로 보이듯 고통도 변모해 가며, 우리가 그 고통에 내어주는 자리만큼밖에 우리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은 고통에 몸을 맡길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필요한 기관 71


시각은 감각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나, 가장 유쾌한 감각이다. 그러나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필요한 기관은 아이를 낳는 데 쓰이는 연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것이 너무 맛을 주기 때문에 아주 싫어하고, 그것의 값어치 때문에 그 사용을 포기했다.


가치 71

우리는 사물들의 품질이나 그 유용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차지하기에 얼마만큼의 값을 치렀나를 보고는, 마치 그것이 사물의 실체 그 어느 부분같이 생각한다. 또 사물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것을 가치라고 하지 않고, 그 사물을 위해서 우리가 갖다 주는 것을 가치라고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단한 절약가라고 본다. 돈을 치른 무게에 따라 그만큼 그 사물을 본다. 우리들의 생각은 결코 돈 쓴 값어치를 헛된 비용으로는 하지 않는다. 산 값이 금강석을 귀하게 만들고, 덕은 그 닦기의 어려움, 신앙은 그 괴로움, 약은 그 쓴맛이 그 값어치를 만든다.


부유하다는 것 71


에피쿠로스는 말하되, '부유하다는 것은 살기 쉬움이 아니라 일거리가 달라지는 일'이라고 하였다.


인색해 지는 것 71


사실 사람이 인색해지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많아서 그렇게 된다.


가장 무서운 빈곤 73


부자로서 불안하고 궁색하고 분주한 자는 그저 가난한 자보다 더 가련하게 보인다. "부유한 자가 품고 있는 가난은 가장 무서운 빈곤이다." (세네카)


돈더미 74


돈더미에 마음이 쏠리는 버릇이 생기면, 그때부터 돈은 그대의 소용이 되지 못한다. 그 가장자리도 떼어 보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다시피, 건드리면 모두가 무너져 버릴 건축물이다. 운명에 목덜미를 잡히듯 꼼짝달싹도 못할 경우에나 건드려 볼 것이다.

그런데 위험한 일은 이 욕망에 확실한 한계를 세워서(좋다고 생각하는 일에 한계를 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저축을 알맞게 그만두기는 쉽지가 않다는 일이다. 이 돈뭉치를 줄곧 키워 가며, 작은 숫자를 더 큰 숫자로 불려 나가서, 결국엔 비천하게도 자기 재산을 즐겨 볼 생각은 못하고, 모두 간직해 조금도 쓰지 않는 수작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순서 74


플라톤은 육체적 또는 인간적으로 보배로운 재물을 건강, 미모, 체력, 부유의 순서로 늘어놓는다. 


여행의 재미 75


나는 저축하는 버릇을 버렸다. 큰 돈을 쓰며 하는 여행의 재미가 이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었다. 여기서 나는 세 번째의 생활로 들어갔다.(나는 느끼는 대로 말한다.) 실로 더 재미나고 절도 있는 생활로 끌려갔다. 그것은 소비가 수입과 맞아 가게 하는 방식이다. 때로는 한편이 더하고 어느 때는 다른 한편이 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이가 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획득의 욕심이 없음과 사들이는 탐욕이 없음 75


내가 돈을 모을 때는 머지않아 쓸 데가 있다는 생각으로 저축한다. 더 가져도 소용없는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사려는 것이다. "획득의 욕심이 없음은 재산이다. 사들이는 탐욕이 없음은 수입이다."(키케로) 나는 재산을 불릴 욕심이 전혀 없다. "부유의 과실은 풍부이며, 풍부의 규범은 만족이다."(키케로) 나는 당연히 인색해질 나이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인색은 늙어서 모두 잘 걸리는 병으로,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수작 중에서 가장 꼴같잖은 일이기 때문이다.


넉넉함과 가난 76


그러니 넉넉함과 가난은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영광이나 건강도 마찬가지로, 부유를 소유하는 자가 생각하는 정도로밖에는 좋은 것도 유쾌한 것도 못 된다. 각자는 자기 생각대로 잘 살기도 하고 못 살기도 한다. 어느 누가 그렇다고 믿어 주는 사람이 만족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만족한다. 이 점에서만, 신념은 그 자체에 본질과 진리를 보여준다.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 76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 76


실로 못난이의 공부하기와 주정꾼의 술끊기가 고통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생활이 방탕아에게는 고문이 되며, 연약하고 한가로운 자에게 훈련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서는 해로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약하고 비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위대하고 고매한 일들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위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것인 악덕을 그런 일에 전가시킨다. 꼿꼿한 삿대는 물 속에서 굽어 보인다. 사물을 본다는 것보다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다.


자제할 줄 아는 것 77


"경박하고 연약한 편견은, 고통 속에서나 쾌락 속에서나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의 마음은 그 때문에 약해진다. 말하자면 흔들린다. 우리는 벌에 한 번만 쏘여도 고함지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모든 일은 자제할 줄 아는 것에 귀결된다."(키케로) 여기 말해 두지만, 사람은 사는 고통이 심하고 인간은 약하다는 점을 과도하게 주장해 보아도, 철학은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논리는 "궁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면 적어도 궁하게까지 살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대꾸를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77


누구나 오래 불행하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다. 죽음도 삶도 참아낼 용기를 갖지 못하는 자를, 저항하기도 달아나기도 원치 않는 자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둔한 소와 망아지 81


둔한 소는 안장을 욕심내고, 망아지는 밭갈기를 갈망한다.   (호라티우스)


18. 공포심에 대하여



공포심
85


전장에서 실컷 얻어맞은 자들이 아직 피투성이 그대로일지라도 다음날 다시 싸움터에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적에 대해서 극심한 공포를 품은 자들에겐 그저 적군을 면대시켜 보지도 못할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당하고 굴복당한다는 천박한 공포에 눌려 있는 자들은 마시지도 먹지도 잠자지도 못하며,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 간다. 그 반대로 가난한 자들, 추방된 자들, 농노들은 다른 자들과 똑같이 유쾌하게 살아간다. 공포의 충격을 참아 내지 못해서 목매달아 죽고, 빠져 죽고, 뛰어내려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포는 죽음보다도 더 참아 낼 수 없이 괴로운 일임을 알 수 있다.


19. 사람의 운은 죽은 뒤가 아니면 판단하지 못한다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 날을 기다려 보아야 아느니
죽어서 장례 지낸 뒤가 아니면
어떤 이라도 행복한 이라고 큰 소리치지 못한다.     (오비디우스)


솔론의 말 86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린애들도 크로이수스 왕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키로스 대왕에게 사로잡혀 사형선고를 받자 그 집행하는 마당에서 "오! 솔론이여! 솔론이여!" 하고 소리쳤다. 이 말이 키로스에게 보고되어,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심문했다. 크로이수스가 대답하기를, "옛날 솔론이 자기에게 한 말에, 사람은 운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기 전에는 그를 행복한 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 불확실하고 변화무궁하여 아주 가벼운 동기로 어떤 형세에서 전혀 판이한 다른 형세로 변해 가기 때문이라고 하더니, 이제 자기의 불행이 이 예고에 적중되었다"는 것이다.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 87

 

운은 어떤 때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을 정확히 노리고,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건설해 준 것을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을 보여준다. 라베리우스(기원전 2세기의 로마의 풍자극 작가) 말처럼 "정히 나는 살아야 할 일보다 쓸모없이 하루를 더 살았다"(마크로비우스)라고 소리치게 하는 것 같다.


최종 막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상연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88


그래서 우리는 솔론의 그 훌륭한 충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로서, 운의 좋고 나쁜 것이 행이나 불행의 자리를 잡지 못하며, 위대성이나 권세라는 것은 흥미 없는 성질의 사건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그가 한층 더 멀리 내다보며, 우리 인생의 행복은 천성을 잘 타고난 정신의 안정과 만족, 그리고 조절된 심령의 결단성과 확신에 달려 있는 만큼, 최종 막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상연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 듯싶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가령 철학자의 아름다운 논법은 우리에게 체면을 꾸미는 일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 사건들은 우리 생명 자체에까지 시련을 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우리에게 늘 평정한 용모를 유지할 여유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의 죽음과 우리 사이의 역할에는 아무것도 꾸며 댈 건더기가 없다. 똑똑히 프랑스어로 해야 한다.

항아리 속에 있는 좋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종말이 좋을 것 88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판하는 경우, 나는 항상 그 끝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본다. 나 자신의 인생에 관한 주요한 관심은 이 종말이 좋을 것, 즉 묵묵히 고요하게 죽어가는 일이다.


20.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 89

키케로는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음을 대비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더욱이 연구와 명상은 우리 마음을 바깥으로 끌어 내어, 신체 이외의 일에 분망하게 하는 것이며, 또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에 닮아가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예지와 사유가 결국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 한 점에 귀결된다.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 89


세상의 모든 의견들은 (여기 여러 방법이 있다고 하여도) 쾌락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점에 일치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것을 배척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과 불안을 자기 목표로 하는 자의 말을 누가 들을 것인가?

이에 관해 철학의 여러 학파들의 의견 불일치는 말투의 불일치에 그친다. "그렇게 교묘하고 어리석은 이론은 모르는 체하자."(세네카) 사람은 어떠한 역할을 맡든 간에 항상 그 중에서 자기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들이 무어라고 말해도, 도덕으로 보아도,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정신이 빠질 정도로 즐기는 데 있다.


매한가지로 잡아 가는 이상 94


모두들 가고, 오고, 아장거리고, 춤추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소식도 없다. 이런 것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나 역시 그들에게, 또는 그들의 아내나 아이, 친구들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에 갑자기 죽음이 닥쳐 오면, 어찌 그렇게도 고민하고 고함지르며 발광하고 절망에 빠져서 허덕거리는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도 천해지고, 변하고, 심신이 전도되는 꼴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일찍부터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우둔한 무관심이 지각있는 사람의 머리에 들어앉아야 한다 해도 (나는 그런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그 대가가 너무 비싼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있는 적이라면 비겁함을 무기로 빌려 와도 좋다고 권하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상, 그대가 도망을 치건 비겁하건 점잖은 인물이건 매한가지로 잡아 가는 이상

실로 죽음은 연로한 어른이 도망쳐도 뒤따라오고
용기 없는 젊은이의 겁 많은 등도
오금도 용서치 않는다.      (호라티우스)

아무리 강하게 쳐낸 강철의 갑옷이라도 막아 내지 못하며
아무리 조심스레 쇠와 구리의 갑주 밑에 숨어도
죽음은 그 숨은 머리를 찾아내고 만다.   (프로페르티우스)

항상 제자리에 단단히 서서 이 적에 대항해 버티며, 그와 싸우기를 배워 볼 일이다.


죽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99


나는 이미 인생의 쓸모와 쾌락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했으며, 인생의 재미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죽음을 대하는 데도 공포를 훨씬 덜 느낀다. 이것은 내가 인생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이 두 교환을 더 쉽게 해치울 것이라고 기대하게 한다.


불행한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99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변화와 쇠퇴 속에 자연이 우리에게 이 손실과 악화에 관한 맛을 제거해 주는 모습을 보자. 한 노인에게는 그의 청춘 시절의 힘과 지나간 인생의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아! 늙은이에게 어느 만큼의 생명이 남아 있는가?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의 호위대 병사 하나가 기진맥진한 채 쇠약한 몸으로 거리에서 그만 죽으러 가겠다고 퇴직을 요구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 쇠잔한 모습을 보고, "너는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며 놀리는 조로 말했다. 갑자기 그런 상태에 떨어진다면 이 변화를 견뎌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손에 이끌리어 가벼운 경사를 부지불식 중에 한 계단 한 계단 끌려 내려가면, 자연은 우리를 이 비참한 상태로 굴려가며 거기에 길들여 준다. 그리하여 청춘이 우리에게서 죽어 갈 때는 생명의 온전한 죽음이나 노년의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지만 우리는 아무 충격도 받지 않는다. 감미롭고도 꽃 피어나는 생명에서 힘들고 괴로운 생명으로 변해 갈 때와 같이, 불행한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육신은 굽어지고 휘어져서 무거운 짐을 지탱하는 힘이 줄어든다. 우리의 마음도 역시 그렇다. 이 영혼을 이 적수의 공격에 대항해서 단련시키고 강화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 적수를 두려워하는 동안 안정을 얻기는 불가능하니, 이것은 인간 조건의 힘에 넘치는 일이지만 우리가 확고하게 이 죽음에 대할 수 있다면, 불안·고민·공포, 그리고 가장 사소한 불쾌감까지도 마음에 깃들기는 불가능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이다.


통과점 101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통과점에 관해 속을 썩이다니 어리석은 수작이지!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 102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되,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고 하였다. 아침 8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5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행이나 불행이라 하며 고찰하는 것을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 인생을 영겁에 비교해 보면, 그보다도 산·강물·별·나무, 또는 어떤 동물에 비교해 보면,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는 똑같이 가소로운 일이다.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 102


어떻든 대자연은 우리에게 강제한다.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여기서 나가라고 하며 말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올 때에 거쳐 온 길을 무슨 심정이건, 공포심도 가질 것 없이 생명에서 죽음에로 다시 거쳐 가거라. 그대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 생명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지어가는 것 102


그대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생명에서 훔쳐 온 것이다. 생명은, 생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그대의 생명이 끊임없이 하는 일은 죽음을 지어가는 것이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102∼103


그대가 인생에서 소득을 보았다면, 그대는 거기에 포만했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어째서 마음껏 먹은 손님처럼 인생을 뜨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인생을 이용할 줄 몰랐다면, 인생이 쓸데없었다면
그까짓 것 잃었다고 서러울 것 있나? 무엇 때문에 삶을 또 바라나?


삶과 죽음의 단맛과 쓴맛 106


키론은 시간과 지속의 신인 그의 부친 사투르누스에게서 영생의 조건을 듣고 그것을 거절했다. 영원한 생명을 상상해 보라. 인간에게는 내가 그에게 준 생명보다 더 참을 수 없고 괴로우니라. 그대에게 죽음이 없었다면 그대는 내가 죽음을 주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나를 저주했을 것이다. 나는 이 죽음의 효용이 편리함을 고려해서, 그대가 너무 탐하여 천방지축으로 죽음을 찾으려고 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거기다가 조금 쓴맛을 섞었다. 그대가 생명을 피하지도 말고 다시 죽음을 피하지도 말라고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절도를 그대가 지키게 하기 위해서, 나는 삶과 죽음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조절하여 놓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알라딘님의 "알라딘 중고매장 일산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

 

무려 5만원의 적립금을 주시다니요...
감사드리며 알라딘 중고서점 일산점의 무궁한 발전을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aint236 2013-11-1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oren 2013-11-16 21:0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11-1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너무 부럽습니다, 저도 도전해볼걸, 하는 후회와
아니야, 오렌님 페이퍼가 멋졌어 하는 긍정 두가지를 함께 느끼네요. ^^

oren 2013-11-16 21:02   좋아요 0 | URL
마고님께서도 도전해 보셨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드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몽테뉴에 대한 추억......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든 나는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말하기로 작정했다. 공표할 수 없는 생각이 있다는 것까지도 불쾌하다. 내 행동이나 상태들 중의 가장 나쁜 것도, 그것을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 추하고 비굴한 일이라고 보는 정도로, 그렇게 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고백하는 데는 조심스럽다. 행동에 있어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당돌하게 실수하는 일은 그것을 당돌하게 고백하는 일로 어느 면에서 보상되고 억제된다. 모두 말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자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의무를 질 것이다. 내 지나친 방자함이 우리의 결함에서 생겨난 저 겉모양만 꾸미는 비겁한 도덕을 벗어 나서 사람들을 자유 속으로 끌어내고, 내 무절제한 행위의 부담으로 그들을 사리에 맞는 점까지 끌어 온다면,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
 - 몽테뉴

 * * *


(몽테뉴도 읽었던 책들 ① :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몽테뉴 수상록의 기본 텍스트에 가깝다)



(몽테뉴도 읽었던 책들 ② : 몽테뉴는 키케로와 세네카의 문장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몽테뉴도 읽었던 책들 ③ : 몽테뉴가 읽었던 책들을 읽고 나서 다시 몽테뉴를 만나는 느낌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 * *

나는 요즈음 한동안 몽테뉴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이런 일을 가끔씩 겪는다.) 몽테뉴의 책은 수상록 말고는 더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다. 그는 단 한 권의 책만 썼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로서 이 사람만큼 자기 자신을 잘 고찰한 인물을 알지 못한다. 몽테뉴가 보르도 시장을 지내고 법관으로서도 오래도록 공직을 수행한 인물이지만,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의 내전에 가까운 신구교도간의 종교 갈등 때문에 프랑스 궁정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부터 중책을 제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헌신짝 같은 사회적 명예를 그에 걸맞게 여기고 일찍 은퇴하여 독서와 사색으로 소일하면서 이런 책을 남길 수 있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의 책을 읽으면 몽테뉴의 안내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흥미진진한 행적들 뿐 아니라 그런 인물들에 대한 생애를 찬찬히 되새김질해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는 온 세상의 전쟁과 동란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온갖 시시콜콜한 일상들에 대해서도 강력하고 흥미로운 고찰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좀처럼 중복되거나 지루한 법이 없다.

그는 부친의 배려 덕분으로 어려서부터 라틴어만 쓰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이 쓴 고전들을 두루 빼놓지 않고 읽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고대의 역사에 관한 책들과 시문학을 특히 사랑했다. 그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여러 고전들을 섭렵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함량미달인 책이거나 따분한 책들은 금새 알아볼 수 있었고, 그만큼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한테 자신이 스스로 끌어올린 수준에 걸맞는 생각들을 전달하려 애썼을 뿐만 아니라,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도록 특별히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그의 책은 매우 두툼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끌어나가는 대로 호흡을 맞춰 따라가다 보면 자꾸만 그의 얘기에 더욱 이끌려 끝까지 읽어나가는 데 별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가 에세이의 형식으로 쓴 이 책은 수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역사와 철학과 문학과 심리학과 시를 두루 섞어 놓은 좀 기묘한 책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는 온 우주와 세계의 근원과 진로를 다루다가도 갑자기 친구와의 우정, 애인과의 연애, 음식과 여행으로 건너 뛰고, 종교와 영혼 문제를 다루다가도 코끼리와 고양이와 개와 토끼와 원숭이를 다루는 식으로 종횡무진 거침이 없다. 그의 얘기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의 얘기를 읽는 독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의 책이 주는 핵심적인 매력이 거기에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자주 그가 우리를 묘사하고 비판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문장은 훗날 셰익스피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표현이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고 막힘이 없어 보이고, 진실하고 강직하고 용감하다가도 느닷없이 광대처럼 까불고 뒤로 자빠지고 어르고 달래고,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어느덧 마음씨 착한 노신사처럼 유순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가 얼마나 시문학에 정통했는가는 그의 책에 인용된 다양한 작가들의 무수히 많은 기묘하고도 적절한 싯구절만 봐도 충분하다. 그가 주로 인용한 시들은 호머, 베르길리우스, 루크레티우스가 쓴 작품들에서 뽑아 낸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표현이 조금씩 딸린다 싶은 대목에서는 '말솜씨로는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키케로의 입을 빌려서 말하거나 조금 더 무게를 더하고 싶을 때에는 세네카의 입을 빌릴 때도 많다.

그는 자신의 작품의 주제를 '나'로 삼았다. 자기 자신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 더 탐구할 게 많은 연구 대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온갖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탐구하다가 '인간의 본성'을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하게 고찰한 인물이 되었다.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그의 인간 내면에 대한 탐색은 집요하면서도 탁월하다.

몽테뉴(1533∼1592)가 살았던 세상은 코페르니쿠스가「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동설을 주장했던 시기와 겹친다. 그러나 그 당시 유럽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엄연히 지배하고 있던 봉건적 세계에 가까웠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서 '인간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데' 충실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몽테뉴가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지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현세에서 더 올바르게, 더 생산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는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그가 평생의 모토로 삼았던 화두는 '끄세쥬(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였다. 그토록 호기심이 많고 모든 사물에 의문을 가졌던 그가 (그가 보기엔 몹시도 엉성해 보였던) 낡은 교조적 교리에 얽매인 기독교 신앙을 아무런 의심없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음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여러 에세이 가운데 '레이몽 스봉의 변호'라는 유난히 독특하고도 기나긴 에세이를 통해 스봉의 자연신학을 변호한다는 구실을 빌미삼아 정작 자기 자신의 '철학 사상'을 전개한다. 그 내용들은 결국 종교 당국의 '사상적 검열'을 받았으나 '정통 카톨릭 신자'로 공인받은 그가 혹여라도 종교재판에 넘겨질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그만큼 그의 글은 교묘하게 쓰여졌다. 겉으로는 '카톨릭 신자'라는 든든한 외피를 두른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는 '교회의 담장'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 그곳을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제발 '교회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교회밖 풍경'으로 눈길을 돌려 보라고 '숨겨서' 호소한다.) 결국 몽테뉴의 《에세이》는 그가 죽고도 한참 뒤인 1676년에 가서야 마침내 영광스럽게도 금서 목록에 올랐고, 18세기에 들어서는 '기독교에 대한 배신적 공격'으로까지 격상(?)되는 행운까지 누렸다.

그의 작품은 결국 그가 의도했던 바대로 훗날 많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상가들, 즉 무신론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인류의 관심을 허공에 붕 떠있던 '내세의 구원' 이야기로부터 땅바닥에서 일어나는 '세속 세계'로 끌어내림으로써, 이른바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시대를 이끌어낸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살았던 옛사람들이 쓴 책들을 탐독한 몽상가였지만, 너무나 자유로운 생각과 예리한 판단력과 실증적인 생각들과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찬 열정 덕분에 결국 수많은 후대의 사상들이 거기서부터 싹터 나올 수 있도록 씨뿌려진 묘상(苗床)과도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가 이 책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내세우는 사람은 단연 소크라테스였다. 그만이 '현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유일한 인물이고, 그보다 더 인류의 표본이 되는 사람은 없다고 보았다. 그건 왜일까? 그가 평생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파고 들었던 연구 주제가 '자기 자신'이었고, 또 그가 1576년에 한 메달에 접시 저울과 함께 새겨겨 넣었던 말이 '끄세쥬'(나는 무엇을 아는가?)였음을 떠올려 보면,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너 자신을 알라'와 묘하게 엮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거기에 그 해답이 있지는 않을까? 몽테뉴 자신이 일생 동안 찰싹 들러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던 바로 그 질문-나는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이 역사상 가장 현명한 인물이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명령에 응답하는 또다른 질문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몽테뉴에게 소크라테스는 단지 훌륭한 철학적 과제 하나만 던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살았고 가장 훌륭하게 죽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여러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살핀다. 그리고 결국 그 이야기들을 빌어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현대의 유형으로 출현한 이후 대략 600억 명이 살았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못지 않게 그들 각자의 삶 또한 얼마나 다양했을지를 상상해 보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어느 유쾌하고도 매력적인 몽상가가 평생 동안 수많은 책들을 뒤져 읽으며 찾아낸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고찰과,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 애썼던 흥미로운 이야기는 결국 죽을 때까지 '나 자신'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기 힘든 우리 모두의 주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인물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그가 평생 동안 읽은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수백 혹은 수천 가지 사물들을 읽어낸 경우가 있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 만약 그와 같은 사람의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몽테뉴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그런 도움을 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토록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애썼던 몽테뉴는 과연 자신을 온전히 아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성공한 것일까? 그 대답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분명 그는 그 일을 '성의(誠意)'를 다해 열심히 진척시켜 나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몽테뉴가 참 고맙고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몽테뉴의 소원을 좀 거들어 주고도 싶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적 성찰에 있어서는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 때문에 생각하고 탐구하고 한 자만이 뒤에 가서 타인의 이익도 된다'고 말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탐구하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인 성의(誠意)라는 성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고, 또 자기 자신에게 씨없는 호도(胡桃)를 주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문장들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쯤에서 그쳐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18) 먼댓글(1)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글뭉치들이 담긴 자루를 꺼내며 드는 생각
    from Value Investing 2014-01-25 15:21 
    고전을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을 자주 경험한다. 마치 옛 사람들이 빤히 알고나 있었다는듯이 천연덕스럽게 '지금' 막 우리들 눈 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헉. 과연 이 사람이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다는 그 사람이 맞아?'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정말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떨 땐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건들에 부닥쳐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고전을 쓴 저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페크pek0501 2013-11-1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얘기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의 얘기를 읽는 독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의 책이 주는 핵심적인 매력이 거기에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자주 그가 우리를 묘사하고 비판한다고 말하고 싶다.'"
- 몽테뉴의 생각을 읽지만 또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이 되겠죠.
오렌 님 덕분에 <도덕감정론>에 이어서 이젠 <몽테뉴 수상록>에 빠져 지내야겠군요. ^^

oren 2013-11-16 10:19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수상록도 [세상을 바꾼 100권의 책]에 늘 빠지지 않는 걸작이니만큼 pek님처럼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두고두고 빠져서 읽을 만한 책이라 여겨져요. 좋은 책에 대한 권유가 되길 바랄께요~

숲노래 2013-11-1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도 oren 님 이야기를 써 보셔요.
아름다운 사진을 찍으시듯
oren 님 삶과 생각 이야기를 써 보시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국말 말밑(어원)에서
'아름답다'는 '나답다'에서 비롯했어요.
사람들 누구나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다'고 해요.
한국말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해요.

'나'를 찾는 길이란
아름다움을 찾는 길이 되겠지요.

oren 2013-11-16 10:25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술술 써내시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러워요.
저 또한 제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고, 오랫동안(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군대,직장생활 초기 몇년까지) 써왔던 일기를 다시 써 볼까 싶은 생각도 여러번 가져봤지만, 정작 요즘엔 남들의 일기를 읽는 게 더 재미있으니 이게 웬 말입니까. 암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그 굴뚝같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마는 그게 늘 시(詩)처럼 도무지 어렵게만 느껴지니 그게 늘 문제이지요. 암튼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셔 늘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13-11-1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깊은 독서를 하셨다는 생각입니다. 한 저자의 책에서 밝힌 사상과 문장의 근원이 되는 책들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그 전과 다르겠지요. 언젠가 한 사람을 정해서 따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oren 2013-11-16 10:30   좋아요 0 | URL
저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대입시험이 끝난 직후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때 처음 읽었었는데 그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즐겁게 읽었던 듯해요. 그러다가 군대 있을 때 다시 한번 읽고 독후감도 써 놓았더랬는데, 이번에 수상록을 두 번씩이나 거듭 읽으면서 이 책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고 30 년쯤 전에 읽었던 몽테뉴가 지금껏 나한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구나 싶은 생각을 지금에서야 조금쯤 알 수도 있게 되었고요. 몽테뉴의 생각이 후대의 여러 작가와 사상가들한테 끼진 영향을 발견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던 것 같아요.

yamoo 2013-11-1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이 페이퍼는 정말 오렌님 서재에서 본 페이퍼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글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저두 구차달님 의견에 동감 만빵~ 이달의 최고 페이퍼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읽어 온 책이 별로 없습니다. 한 권 있다면 프롬의 <사랑의 기술>정도. 이 책은 7번 정도 읽은 기억이 있지만 정리를 끝내고 다시 읽은 적이 없네요.

몽테뉴 수상록은 베이컨 수상록과 같이 읽어 봤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두고 두 철학자가 확현이 다른 사고를 하더군요. 그렇지만 한 번 휘리릭 읽은 책이라 음미하면서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오렌님께서 발행해 주신 이 페어퍼로 인해 몽테뉴 수상록을 재독하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봐야 겠습니다. 책에 대한 가치를 환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몽테뉴에 대한 이런 글을 만나보는 건 쉽지 않은데, 귀한글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oren 2013-11-18 09:22   좋아요 0 | URL
몽테뉴 수상록에 대한 리뷰는 쓰다 말다 덮어두곤 했던 글인데 묵혀 두기도 그렇고 발행(출판?)하기도 그렇고 해서 계속 꾸물대다가 간신히 '몽테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글을 올린 것인데 yamoo님께서도 좋게 봐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네요.

yamoo 님께서는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무려 일곱 번씩이나 읽어 보셨다니 그 책에 대한 감동이 얼마만큼 컸을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 듯합니다. 나중에라도 한번 더 읽으시면 그땐 꼭 yamoo님의 남다르고도 멋진 리뷰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할께요.

M의서재 2013-11-2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페이퍼 정말 좋네요. 대단하십니다.
이 글이 아니었다면, 읽어볼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을 몽테뉴 수상록을 장바구니에 넣어요~
좋은 책을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oren 2013-11-25 11:33   좋아요 0 | URL
몽테뉴 수상록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책이라 믿어요.
불량주부 님께서도 언젠가는 몽테뉴를 만나서 그와 즐거운 시간들을 함께 하실 수 있었을텐데, 제 글이 그런 시간을 조금쯤 앞당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된다면 저로서도 그저 기쁠 따름이에요. 날씨가 또 추워질 모양이에요. 따뜻한 시간들 많이 가지시길 바랄께요~

수나 2013-12-1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을 읽고 '몽테뉴의 수상록'이 읽고 싶어졌어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나오길래 ....나에 대해 오롯이 알 수 있을까? 호기심을 일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3-12-13 10:10   좋아요 0 | URL
수나 님 반가워요~

몽테뉴 수상록은 정말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해요.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말대로, '지난 4세기 동안 고전으로 읽혀 온 역사가 증명하듯이, 독자는 곧 몽테뉴의 매력, 지혜, 유머, 스타일, 정신적 경향에 호응하게 된다.'는 말을 믿고, 수나 님께서도 즐겁게 몽테뉴를 만나 보시기를 기대할께요~

재와률 2013-12-29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권위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는 것은 그 책을 두 번 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나서 리뷰를 써 보고 싶은 맘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oren 2013-12-30 10:18   좋아요 0 | URL
재와률 님 반갑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독자로서 저자와 나눴던 교감을 글로 써보는 일도 책읽기 못지 않게 흥미로운 일인 듯합니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그 '느낌'을 글로 온전히 옮기는 일이 여간 어렵지가 않으니 끝내 자신의 생각을 겨우 조금 옮기느라 애쓰다가 주저앉고 마는 듯해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들도 결국은 리뷰로 옮기기도 전에 금세 어디론가 다 떠내려가고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스며들고 만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starover 2014-01-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몽테뉴 수상록',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와 몽테뉴의 깊은 연관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거침없는 표현과 자유분방한 이야기는 결국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요약되는, 몽테뉴의 놀라운 기법이 눈에 띄네요.
"나는 무엇을 아는가, 그리고 난 어떻게 살 것인가?' 덕분에 이 질문과 하루 종일 씨름해야겠네요~^^

oren 2014-01-09 13:25   좋아요 0 | URL
몽테뉴 자신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평생을 고민했던 사람이니만큼, 그가 미리 살펴본 수많은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소득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몽테뉴와 만나는 시간이 즐겁고 유익한 시간들이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9-1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몽테뉴 수상록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두껍고 어려울것 같아 고민중이였는데, 이 포스팅 덕분에 바로 구매했답니다.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4-09-18 10:37   좋아요 0 | URL
제가 남긴 리뷰 덕분에 님께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바로 구매하셨다니 저로서도 여간 기쁘지 않네요.
모쪼록 '말할 수 없이 재치가 넘치고 매력 덩어리인 프랑스 사람' 몽테뉴와의 만남이 내내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이 되기를 빌께요. 감사합니다.
 


(이 글은 1856년 12월 6일,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해리슨 블레이크에게 쓴 편지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제 또 다시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

어떤 것이든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양하게 분출해 내십시오. 나는 앞으로 천 년 동안 넘쳐흘러 밑바닥까지 모두 분출해 낼 준비가 돼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요! 나의 수족은 새카맣게 타버렸고 정신도 역시 타버려서, 이제 당분간은 벌레 먹거나 썩을 염려는 없습니다. 내가 들이쉬는 숨이 내게는 감미롭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은 무한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자꾸만 미소가 지어집니다. 내 은행 잔고는 아무리 꺼내 써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재산은 소유가 아닌 향유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요즘의 나날들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나요? 이제 또 다시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지난겨울과 같은가요? 가난한 자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을까요? 겨울에 쓸 장작들은 들여놓았나요? 그리고 또 겨울을 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요? 무엇으로 벽난로에 커다란 불을 지필 것이며, 또 무엇으로 당신의 가슴에 작지만 강렬한 불을 지필 건가요? 당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 지난여름 뜨거운 태양의 대가와 그 비싼 수업료를 지불할 확실한 준비가 되어 있나요?

시간은 천리마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지 않던가요? (148∼14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