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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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이거, 저기서 따왔군! 595

나는 철학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한다. 철학은 너무나 여러 가지 형태를 가졌고, 말해 놓은 것도 너무 많아서, 우리의 몽상이나 잠꼬대 따위도 모두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망상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그 속에 없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다.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 졸렬하고 어리석은 말은 찾아볼 수 없다."(키케로)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생각을 더 자유롭게 사람 앞에 내놓는다. 이런 것은 어디서 본뜬 것이 아니고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옛 사람들의 심정과 닿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렇다고 누가 "이거, 저기서 따왔군!" 하고 말해서는 안 될 일
이다.


공정치 못한 불균형 599


영혼의 힘과 효과들은 여기서, 다른 데서가 아니라 이 곳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혼의 완벽성 전부가 헛되고 무용한 일이 된다. 영혼의 영생불멸은 현상태를 위해서 보상되고 인정되어야 하며, 오로지 인간 생명을 위해서 영혼은 책임져야 한다. 영혼에게서 수단과 힘을 박탈해 놓고, 그것이 사로잡히고 갇혀서 허약하고 병약해 있는 동안, 또 이 세상에서 강제받고 억압되어 있는 동안, 이 영혼을 무장 해제시켜 두고, 아마도 한두 시간밖에 못되는 시간, 기껏해야 한 세기밖에 못 되고, 무한에 비하면 한 순간밖에 안 되는 너무나 짦은 시간에 구애되어, 저 무한하고 영원한 지속 위의 판결과 처단을 내리고, 이 간극의 순간을 가지고 그의 온 존재를 결정적으로 조정하고 처리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날 것이다. 이렇게도 짧은 인생을 살았다는 결과로, 영원의 보상을 치르거나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공정치 못한 불균형이 될 것이다.


미친 생각 602


사실 반드시 멸할 자를 영원자에게 결합시키고
둘 사이에 공통의 마음과 상호 반영이 있다고 상상함은 미친 생각이다.
당연히 멸할 자를 영원의 불멸자에게 협동하여
폭풍우의 사나운 위세를 감동하도록 결합시키는 시도보다
서로간에 더 반발적이고 이질적이고 더 충돌할 일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루크레티우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같이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은 나이의 무게 밑에 합해 쓰러진다.     (루크레티우스)


영혼의 영생불멸에 대한 반대사상 602-603


키케로가 최초로 소개한 영혼의 영생불멸에 대한 반대 사상은, 적어도 서적에 밝혀진 바로는 툴루스 왕의 시대에 페레키데스 시루스에 의해서 시작된다고 하는데(어떤 사람은 탈레스의 착상이라고 하고, 어느 사람은 다른 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의문을 남겨 두고 취급된 인간 지식의 일부이다. 확고한 독단론자들은 이 점에 관해서는 아카데미아(플라톤 학파)의 그늘에 의지해서 숨어 있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증명하기보다 차라리 약속하고 있는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사물로', 흔들리는 신념을 가지고 다루는 옛 사람들 대부분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키케로를 가리킴)는 가장 난삽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뜻의 구름 속에 숨어서, 이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판단에 관해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토론거리를 남겨 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 견해가 두 가지로 그럴듯하게 보였다. 하나는 영혼의 영생불멸 없이는 세상 사람들이 놀라울 만큼 신용하며 존중하고 있는 영광에 관한 공허한 희망을 세워 볼 기초가 없어지는 것이며, 또 하나는 플라톤이 말하듯 인간 정의의 불확실하고 침침한 시야에서 악덕이 죄를 벗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언제까지나 하늘의 정의가 추구하는 목표로 남아서, 즉 죄인들이 죽은 뒤까지 그들의 책임이 추궁된다는 생각이 대단히 유익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욕망하는 자의 몽상 604


정신의 영생불멸에 관한 정당하고 명백한 확신에 가장 완고한 자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힘으로 이것을 증명하기에 얼마나 모자라고 무력한 처지에 있는가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것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욕망하는 자의 몽상이다"(케케로)라고 옛 사람은 말했다. 인간이 이 사실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발견하는 진리는 운명과 우연의 덕택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를 손에 잡았을 때에도 이를 파악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고, 그의 이성은 이것을 이용할 힘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생산된 사물들은 진실하건 거짓이건 모두 불확실성과 힐난을 면치 못할 것들이다.


논쟁과 불화를 의미하는 것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604

하느님이 인간 사회라는 작품을 혼란시키는 수단으로 쓰신 저 방언들과 언어의 잡다성은 인간 지식의 헛된 구조를 수반하며, 그것을 혼란시키는 사상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논쟁과 불화를 의미하는 것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이 인간 지식의 구조를 뒤섞어 놓으시는 것은 유익힌 일이다. 만일 우리가 지식의 한 낱말이라도 갖게 된다면 누가 우리를 제어할 것인가? "우리에게 유익한 사물의 지식을 감추는 암흑은 겸양을 위한 훈련이며, 오만에 대한 제어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성자의 말씀은 대단히 내 마음에 든다. 우리의 맹목성과 우둔성은 어느 정도의 오만하고 분수 넘치는 수작이라고 우리를 밀어 내지 않을 것인가?


솔직하게 고백하자 604∼605

내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영원한 복지의 향락을 이루는 영생불멸이라는 과실을 오로지 하느님의 두터운 덕에서 받는 것인 이상, 우리가 오로지 하느님께, 그리고 그의 은혜와 그렇게도 고귀한 신앙적 진리의 혜택에 매여 지내게 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만이, 그리고 신앙만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자. 왜냐하면 이것은 본성의 , 그리고 우리 이성의 가르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특권 없이 인간의 존재와 그의 힘을 안으로 밖으로 다시 시험해 보는 자, 또 아첨하지 않고 인간을 똑바로 쳐다보는 자는 거기에서 죽음과 흙냄새밖에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아무런 효율도 소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오는 식 607

인간 오성이 모든 사물들을 궁극까지 탐구하여 지배하려고 하다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인생의 오랜 생애의 힘들고 어려움에 지쳐서 지내다가 마침내 다시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오는 식이다.


이런 연장들 617


우리가 오성에 무엇을 받아들였건 우리는 거기에 그릇된 일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또 잘 모순되고, 그르치는 바로 이 연장들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연장들은 아주 가벼운 사정 때문에 잘 기울고 틀어지기 쉬운 만큼, 그것이 온당치 않게 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의 이해력과 판단력 및 심령의 소질들은 대개 신체의 움직임과 변화에 따라 영향받는 것이며, 이런 변화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보다 건강할 때에 정신이 더 개운하고, 기억력이 빠르며 사고력이 더 새로운 것이 아닌가? 기쁘고 유쾌할 때에는 슬프고 우울할 때보다 더 우리 심령에 나타나는 사물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카툴루스나 사포의 시가 인색하고 빽빽한 늙은이에게나 기운차고 정열에 찬 청년에게나 마찬가지로 즐겁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가?


기분파 619


내가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허영과 양심은 감히 말할 용기도 안 난다. 내가 디딘 발은 너무 불안정하고 자리잡히지 못하여, 걸핏하면 쓰러질 듯 금세 근뎅거리고, 내 시각은 너무 혼란해서 배고플 때에는 배부를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내 몸이 건강하고 청명한 날씨가 웃음을 띠어 주면, 나는 정말 사귈 만한 친구이다. 발가락에 티눈이 박히면 나는 기분 나쁘고 불쾌하고 사귀지 못할 인간이 된다. 말이 똑같은 보조로 걸어가도 어느 때는 거칠게, 어느 때는 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똑같은 길이 이 시간에는 더 가깝게, 다른 때에는 더 멀게 보이며, 똑같은 형태가 이때는 더 낫게, 저때는 더 못하게 느껴진다. 이제 무슨 일이라도 하려다가 금세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진다. 이 시간에는 내게 유쾌한 것이 어느 때에는 내게 괴로워질 것이다.

내 속에는 조심스럽지 못한 이 우발적인 충동이 수없이 일어난다. 떄로는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때로는 화를 잘 낸다. 이 시간에는 고민이 내 속에 우세하다가도, 저 시간에는 쾌활성이 우세하다.


형편없는 뭉치 620


내가 책을 들여다보면 어떤 문장에서는 탁월한 우아미를 발견하며 마음조차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런데 다른 때에 다시 그것을 읽어 보면 아무리 뒤적거리고 다시 돌아와 보아도, 아무리 접어 보고 만져 보아도, 그것은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형편없는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쓴 글에서도 처음 내 생각의 모습은 늘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더 나았던 첫번 생각을 놓치고는 일부 이것을 고쳐 쓰며 새 뜻을 넣어 주려고 애를 쓴다.


왔다리 갔다리 620

나는 왔다갔다하기밖에는 하지 않는다. 내 판단력은 늘 진척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허공에 떠서 헤매며-

광막한 대해에 광풍에 쉽쓸린 조각배와 같다.      (카툴루스)

나는 여러 번(내가 즐겨 하는 일이지만) 재미로 내 견해와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해 보고 나면, 정신을 이편으로 전념하여 돌아서다가 너무 거기에 집착해서, 내가 첫 번째 의견을 가졌던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며 그 견해를 버리게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내가 기울어지는 곳으로 거기 끌려간다. 그리고 내 무게에 실려 간다.


거의 같은 말을 할 것 620


누구나 다 나처럼 자기를 살펴본다면, 자기에 관해서 거의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설교가들은 말하거나 느끼는 감각에서 자기들의 신앙심이 더 열렬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지각이 더 냉철하고 침착할 때 하는 것보다도 화가 치밀어오를 때에 우리 의견을 옹호하려고 더 열중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마음에 감명을 주고 한층 맹렬하게 찬성하며, 그 사상을 품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가 단순히 어떤 소송 사건을 변호사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의심스러운 듯 자신 없이 응대한다. 그는 이 편을 들건, 저편을 들건 무관하다고 그대는 느낀다. 그대가 돈을 듬뿍 쥐어 주어서 그가 바싹 대들며 사건에 분개하게 해 놓았는가? 그가 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가? 그가 이 사건에 의지를 열중시켰는가? 그의 이성과 지식은 동시에 거기에 열중한다. 여기 명백하고 의심 없는 진실이 그의 오성 앞에 나타난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며 그것을 진짜로 믿고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주색에 빠진 흥분 없이는 621


욕심은 데미스토클레스를 흥분시켰고, 데모스테네스를 흥분시켰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부추겨서 애쓰고 철야하며 편력하게 하였다. 이 욕심들이 우리를 명예와 학문과 건강 등, 유익한 목표로 인도한다. 그리고 저 번민과 불안을 참아 내는 비굴성은 고행과 후회의 심정을 양심 속에 가꾸어 주고 하느님이 내리는 재앙과 국가가 징계하는 형벌을 우리가 당하는 징벌로 느끼게 하는 데에 소용된다. 동정심은 후덕한 마음에 박차(拍車)가 되고 우리 자신을 보존하고 지배하려는 조심성은 공포심에서 깨어난다. 사람들은 대망을 가졌던 까닭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행동을 행하였던가? 그리고 오만은 얼마나 큰 일을 하였던가? 어떠한 탁월하고 장쾌한 덕성도 결국 주색에 빠진 흥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생각)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오만과 허영의 긍정적 역할'을 떠올리게 한다.


예언자와 점쟁이 622

광분이 죽음의 심상 때문에 우리의 이성을 뿌리 뽑으면, 우리는 예언자와 점쟁이가 된다. 이보다 더 내가 철학을 믿게 할 일은 없다. 거룩한 진리가 철학 정신에 부어넣은 저 순결한 열성이 철학에게 그 제언과는 반대로, 우리 심령의 평온 상태, 안정 상태, 철학이 심령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상태가 심령의 최선의 상태가 아님을 고백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잠 깨어 있는 때가 잠든 때보다 더 잠들어 있다. 우리의 예지는 광증보다 더 예지롭지 못하다. 우리의 꿈은 사색보다 더 가치가 있다.


옛 사람들의 문장 624


옛 사람들의 문장은(그 중에 충만하고 견실한 좋은 문장들 말이지만) 거의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유혹하고 감동시키며, 내가 읽고 있는 작가가 가장 견고하게 보인다. 그들이 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더라도, 내게는 그 나름대로 다 옳게 보인다. 재능있는 두뇌들이 무엇이든지 진실하게 보이고 싶은 것은 힘 안들이고 그렇게 보여 주며, 나같이 단순한 머리를 속이려고 아무리 해괴망측한 일이라도 그럴듯하게 분장해서 보여 주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증명이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 나온다 625


이리하여 세월의 회전은 사물들의 운명을 변경시킨다.
전에 진귀하게 간주되던 것은 영광을 상실하고
마침내 다른 사물이 그것을 계승하여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나온다.
매일 평가는 높아지며, 이 발견의 찬사가 꽃처럼 만발하며
그것은 인간들에게 경이로운 신용을 누린다.      (루크레티우스)


미다스 왕 이야기 632


미다스 왕은 자기가 만지는 것이 모두 황금이 되게 하여 달라고 신에게 요구하였다. 그의 소원은 성취되어서 포도주가 황금이 되고, 그의 빵과 이불의 털도 황금, 그의 셔츠와 옷도 황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소원이 성취된 것을 누리기에 지쳤고, 감내하지 못할 보물을 선물받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축원을 풀어 달라고 기도해야만 하였다.

부유하고 동시에 궁색한 이런 새로운 불행에 놀라서
그는 재물을 멀리하며,
전에 갈망하던 것을 지금은 혐오한다.      (오비디우스)

(나의 생가)

'부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다만 우아미와 연령과 미모를 고려할 일 640

아르케실라오스는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는 어느 방면에서 하건, 어느 장소에서 하건 상관 없는 문제라고 하였다.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것은 본성이 요구하면 혈통과 문벌과 지위는 고려할 것이 못 되며, 다만 우아미와 연령과 미모를 고려할 일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한다."(키케로)


사람을 심고 있소 642

한 철학자가 그짓을 하다가 들켰다. 그게 무슨 짓이냐고 사람들이 물어 보자, "나는 사람을 심고 있소" 하고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짓을 하다가 들키고도 그가 마늘을 심고 있는 것을 남이 본 것처럼 얼굴빛도 붉히지 않았다.


길 한복판에서 배가 고프니까 642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 수음을 하며, 구경꾼들을 향해서 배도 이처럼 문질러서 부르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가 그에게 하필이면 한길에서 식사하느냐고, 왜 더 편리한 장소를 찾아가지 않고 큰길 복판에서 식사하느냐고 물어보자, "길 한복판에서 배가 고프니까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미인을 장식하는 꽃 652∼653


나로서는 호라티우스와 카툴루스의 시구를, 한 예쁘고 젊은 인물의 입으로 그 풍부한 음성을 가지고 노래하는 것을 침착하게 듣고만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이 충분히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논이 목소리는 미인을 장식하는 꽃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 프랑스 인이면 모두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자기가 지은 시를 낭독해 보이고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는데, 그 시는 종이에 쓴 것을 음조로 들은 것과는 같지 않으며, 내 눈으로 읽어 보면 귀로 들은 바와는 반대로 판단했으리라고 내게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발음은 그 재간에 맡겨진 작품에 가치와 풍류를 즐긴다는 신용을 얻고 있다. 이 점에서, 필로크세노스가 누가 자기 작품을 나쁜 어조로 읽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소유인 기왓장을 발로 짓밟아 부수며, "네가 내 것을 망치고 있으니, 나도 네 것을 부순다"고 하였다고 해서 그를, 화를 잘 내는 자로 볼 것도 아니다.


먼 곳의 일처럼 느끼짐 656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면으로 추악하고 못난 여자들이
가장 큰 영광으로 숭배받고 총애받는 것을 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우리가 싫어하는 자는 더 못나 보인다. 괴로운 처지에 고민하는 자에게는 대낮의 빛도 흐리고 컴컴한 것같이 보인다. 우리의 감각은 심령의 정열 때문에 변질될 뿐 아니라 완전히 마비되는 수가 많다.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대가 똑똑히 보는 사물에 관해서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에 따라서 마치 시간적으로 먼 일인 듯, 또는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짐을 그대는 관찰할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656

우리 인생을 꿈에 견주어 본 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옳게 본 것이리라. 우리가 꿈을 꿀 때의 심령은 잠이 깨어 있을 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살며 행동하며 모든 소질들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좀 무르고 흐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가 분명히 밤과 환한 대낮 사이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밤에서 그늘까지의 차이는 있다. 저 편에서는 심령은 잠자고 있다. 이 편에서는 다소간 졸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암흑이다. 킴메리아 인의 암흑이다.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나는 잠을 자면서 똑똑히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잠이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흐리지 않게 충분히 또렷하게 보이는 적이 없다. 하기는 잠이 깊이 들 때에는 꿈을 잠재우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이 깨어 있음은 결코 깨끗이 꿈을 씻어 흩을 만큼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꿈은 깬 자들의 꿈이며, 꿈보다 더 나쁜 꿈이다.

우리의 이성과 심령은 잠자는 동안에 나오는 공상과 개념을 받아들이며, 심령이 낮의 행동에 대해서 인정하는 바와 같은 권위를 꿈속의 행동에도 주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꿈꾸는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잠이 아닌가' 하고 의문에 붙이지 않는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 664∼665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출생한 일이 결코 없었고,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며, 시간이 그것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는 일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란 움직이는 사물이며, 항상 그림자같이 나타나고, 그 재료는 항상 흐르며 유동하고, 안정해서 머무른다든지 항구적인 것이 없고, 그것에 '전에', '뒤에', '있었던 것', '있을 것'이라는 말이 해당되는 것들은, 그것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것을 단번에 보여 준다. 왜냐하면 아직 존재로 있지 않은 것, 또는 이미 존재로 있기를 멈춘 것을 존재한다고 말함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고, 아주 확실한 거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그것으로 시간의 이해를 세우며 유지하는 것같이 보이는 '현재'·'순간'·'지금' 같은 말로 말하면, 이성은 그것을 발견하며, 당장에 그것을 부숴 버린다.

이성은 즉석에 그것을 쳐서 미래와 과거로 갈라 버린다. 마치 필연적으로 둘로 갈라 놓고 보려는 식이다. 자연을 측량하는 시간에서와 같이, 측량당하는 자연에게도 일은 마찬가지로 되어 간다. 자신에게도 머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 반대로 거기서 모든 사물들이 출생되었거나, 출생하고 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단 하나 존재하는 신을 가지고, 그가 전에 있었다든가 장차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지속할 수 없거나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의 변화·통과·변천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신 혼자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어느 시간의 척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겪을 수 없고 움직임이 없으며, 시간으로 측량되지 않고, 어떤 쇠퇴도 당할 수 없는 영원성에 따라서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뒤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더 새롭다는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것도 없고, 단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유일한 '지금'을 가지고 영속을 채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는 있었다'라거나, '그는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이, 그 신 하나밖에는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어야만 할 일이다.

"만일 인간이 인간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오, 인간이란 얼마나 비굴하고 더러운 사물인가!" (세네카)


부조리하다 666

* 신 없이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참 좋은 말이고 유익한 욕망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조리하다. 왜냐하면 손바닥보다 더 큰 것을 쥐려고 하고, 팔에 넘치는 것을 안으려 하며, 우리의 다리 길이보다 더 길게 발을 떼어 놓자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과 인간성을 초월한다는 것도 안 될 말이다. 그는 그의 눈으로밖에는 보지 못하고, 그의 파악으로밖에는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타인의 죽음 판단하기


지난날을 찬양하며 현재를 비난하지 않는 자를 본 일이 있는가?
667


우리가 사물들을 두고 가는 것이 서러울 정도로 사물들 또한 우리를 잃는 것이 서러우리라고 생각한다. 늙어서 자기의 곤궁과 설움을 세상과 인간들의 인심 탓으로 돌리고, 지난날을 찬양하며 현재를 비난하지 않는 자를 본 일이 있는가?


짧은 죽음 671


카이사르는 누가 그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죽는 것이 가장 좋겠느냐고 묻자, '예측되지 않은 가장 짧은 죽음'이라고 대답했다. 카이사르까지 이렇게 말한 터에,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비굴할 것은 없다.

짧은 죽음은 인생의 최고 요행이라고 플리니우스는 말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할 마음이 안 난다. 죽음을 흥정하기가 두렵고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죽을 결심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없다. 고문을 당할 때에, 인생의 종말로 달음질치며 형의 집행을 서둘러서 재촉하는 자들이 보이지만, 그들은 결단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생각할 시간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의 괴로움이 정말 싫다는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린 것은 무관하다.   (키케로)


혁혁한 일 671


내 생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생애 중에, 사형 선고를 받고 30일 동안 이 생각을 되새기며, 그 동안 아무런 흥분도, 기분이 변하는 일도 없이 긴장하거나 정도가 심해지지 않고, 오히려 가라앉고 누그러진 행위와 언동으로 이 사건을 음미해 간 태도보다 더 혁혁한 일은 없다.


15.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675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당연한 일로, 안일에서 오는 포만보다 더 우리 취미에 역하는 것은 없고,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일보다 더 우리 취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에서 쾌락은 그것을 놓쳐 버릴 위험 때문에 더 증대한다."(세네카)

갈라여, 싫다고 해라.
쾌락에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포만을 느낀다.                                           (마르티알리스)

리쿠르고스는, 사랑을 생기있게 보존하려고 라케데모니아의 부부들이 숨어서밖에 자지 못하게 하였고, 부부가 함께 자다가 들키면 다른 사람들과 자는 것만큼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날 날짜 정하기의 어려움, 들킬 위험, 다음 날의 수치,

남모를 나의 생각, 나의 침묵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호라티우스)

이것이 소스에 쏘는 맛을 준다. 사랑이라는 수작의 얌전하고도 부끄러움 많은 방식에서 얼마나 얄궂게 음탕한 장난이 나오는 것인가! 탐락은 고통으로 자극받기를 원한다. 탐락은 찌르르 쑤시는 때에 더 달콤하다. 창녀 플로라는 폼페이우스와 동침할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신이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욕의 대상을 강력히 포옹하여 신체에 고통을 주며,
이빨은 흔히 입술에 자국을 남긴다.
그 대상이 무엇이건 이 대상 자체를 상해하려는
비밀스런 행동에서 사나움의 싹이 솟아난다.                                           (루크레티우스)

모든 일은 이렇게 돌아간다. 고통이 사물들에게 가치를 준다.

저 위대한 카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것인 동안은 싫어하더니,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다음에는 그 여자를 욕심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676

나는 내 종마장에서 늙은 말 한 필을 쫓아냈다. 이놈은 암컷 냄새만으로는 붙여 볼 도리가 없었다. 제 암컷들과는 일이 쉬우니까 바로 물려 버렸다. 그러나 다른 집 암컷들은 어느 것이 목장 부근을 지나기만 해도 귀찮게 이힝힝거리며 흥분하는 꼴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우리에게 무엇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을 욕심 내게 하는 일이다.

그대가 애인을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는 머지않아 내 관심을 잃으리라.                                                   (오비디우스)

그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 둔다는 것은 경멸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다. 결핍과 풍부는 똑같이 폐단이 되고 만다.

그대는 남은 재산에 골치를 앓고
나는 가난으로 골을 싸맨다.                                                                 (테렌티우스)


힘 안 들이고 쉽게 넘어오는 것도 실은 거북하다 677


욕심과 향락은 똑같은 고통 위에 사람을 둔다. 애인이 냉혹하게 굴면 괴롭다. 그러나 힘 안 들이고 쉽게 넘어오는 것도 실은 거북하다. 불만과 분노는 자기가 욕심내는 사물을 높이 평가하는 데서 나오는 만큼, 그것이 연정을 자극해서 열이 오르게 하며, 그 반대로 포만은 염증을 일으킨다. 이것은 무디고 둔하며, 지치고 잠든 열정이다.

여자가 애인을 오래 지배하려면
그를 경멸할 일이다!                                                                           (오비디우스)

업신여기거나 모욕하라, 애인들이여,
어제 거역하던 자가 오늘은 항복하리라.                                               (프로페르티우스)


가리는 꾀 677

포파에아가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꾀를 쓴 것은 애인들에게 더 비싸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자는 각기 내보이고 싶고, 남자는 각기 보고 싶어하는데, 왜 이 미인들은 발꿈치 뒤까지 가리는 것인가? 우리의 욕망과 그녀들의 욕망이 주로 거기 있는데, 어째서 여자들은 그 부분들을 겹겹이 가리고 있는 것인가? 우리네 여자들이 그 옆구리를 무장하는 저 성과 요새는 우리의 욕심을 도발하며, 우리를 물리침으로써 더 끌어 보려는 것밖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녀는 수양버들 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앞서 쳐다보아 주기를 바랐다.                                             (베르길리우스)

때로 그녀는 내 정열에 대해 옷으로 장벽을 쌓았다.                              (프로페르티우스)


처녀들의 부끄러움 타는 기술 678


처녀들의 부끄러움 타는 기술은 어디에 필요한가? 시치미를 떼고 냉정한 체하는 맵시, 엄격한 용모, 그리고 가르치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수작, 그것이 모두 우리 욕심대로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책망하고 유린하고 싶은 생각을 더 나게 하는 것밖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상냥한 애교와 어린애다운 정숙함을 미쳐서 놀아나게 하며, 이 존대하고 거만한 엄숙함을 우리 정열에 굴복시키는 일은 쾌락일 뿐만 아니라 허영심을 만족시킨다. "엄격함과 겸손과 정숙함과 절조를 정복함은 영광이 된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이런 수작을 쓰지 말라고 권하는 자는 여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속이는 자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들의 마음은 공포로 떨리고, 우리의 말소리만 들어도 깨끗한 귀를 더럽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데, 다만 힘에 못 이겨서 우리가 귀찮게 구는 수작에 넘어간다고 믿어야 한다.


이탈리아에 가 보라 678

미모는 아무리 그 힘이 크다 해도 이런 방법의 중개가 없이는 맛들일 거리가 안 된다. 이탈리아에 가 보라. 거기에는 돈에 팔린 미인, 더욱이 매우 날씬한 미녀가 많은데, 그녀들이 자기를 예쁘게 보이려고 얼마나 색다른 방법과 기술들을 찾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나 사실 무슨 짓을 해도 공중 앞에 팔려 내놓은 몸이니, 그녀들은 언제나 약하고 기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성이 지닌 두 가지 같은 효과 중에, 우리는 적어도 더 많은 장애와 모험이 있는 편을 더 훌륭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식이다.


4백 년 이상 679


우리는 한번 결혼하면 그것을 풀어 볼 모든 방법을 없애고 있으니, 그 결속을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구속이 단단한 만큼, 의지와 애정의 결속은 더 풀어지고 느즈러져 있다. 반대로 로마에서 결혼이 그렇게 오랫동안 명예롭고 안정되게 한 것은, 아무 때건 원하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자유에 있었다. 그들은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르니, 그만큼 더 아내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아무 때나 이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그들은 사백 년 이상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고 보냈다.


허용된 일은 매력이 없다.
금지된 일은 욕심을 도발한다.         (오비디우스)

이 문제에는 "징벌은 악덕을 깨뜨리기보다도 조장한다. 이런 것은 착한 일을 하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것은 이성과 훈련의 성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나쁜 짓을 하면서 들키지 않을 마음의 의지만 가꾼다"고 한 옛 사람의 견해를 여기에 결부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근절되었다고 믿은 악은
더 멀리 확대되고 있다.       (루틸리우스)


16. 영예에 대하여



웬일인지 모르지만 683

웬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신 속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믿는 것을 믿지 않고, 우리가 질책
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한다.


세평보다 더 운에 매인 일이 어디 있는가? 686

세평보다 더 운에 매인 일이 어디 있는가? "진실로 운은 모든 사물들에 지배력을 갖는다. 실제보다도 그의 변덕에 따라서 어떤 자는 올려 주고 어떤 자는 끌어내린다."(살루스투스) 행동이 세상에 알려지고 남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다.

자기 변덕대로 우리들에게 영광을 붙여 주는 것은 운이 하는 것이다. 나는 영광이 진실한 가치에 앞서 나가며, 흔히 상당한 거리로 가치를 초과하는 것을 보았다. 영광이 그림자를 닮았다고 맨 먼저 생각해 본 자는, 자기 생각보다 더한 일을 하였다. 이런 것은 두드러지게 헛된 일들이다.

영광은 어느 때는 본체보다도 훨씬 앞서 나간다. 그리고 어느 때는 본체보다 길이로 많이 넘친다.

(나의 생각)

나도 참 많이 보아왔다. '순전히 운에 달린' 영광과 세평들을......


착한 사람 687

자기가 착한 사람임을 사람들이 알아 주고, 그것을 알고 나서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인 까닭에 착한 사람이며, 자기 도덕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조건으로 착한 일을 하려고 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가 아니다.

수치스런 실패를 겪지 않은 용덕은
이름을 더럽힘 없는 명예로 빛난다.
그리고 속인들의 인기 따라 도끼를 들었다놓았다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


속인과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 688

한 아르팡의 토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 전체에서 사람 열두엇만 뽑아 내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경향과 행동의 판단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인데, 우리는 그것을 무지와 부정과 무절제의 원천인 속인과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에 맡긴다. 한 현자의 인생을 광인들의 판단에 매이게 하다니, 그것이 될 말인가?

"군중의 의지보다 더 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티투스 리비우스)


곧은 길 689


곧은 길은 그것이 곧기에, 또 내가 좇는 것이 아니라 해도 결국 따져 보면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가장 좋고 유익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좇을 것이다. "신의 뜻은 명예로운 사물이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셨다."(퀸틸라아누스)

저 어리석은 로마가 무슨 일을 제창한다 해도
그대는 저 도량형기의 부정확한 지침은
찬성하거나 책망하지 말 일이다.
그대의 외부에서 그대 자신을 찾지 마라.      (페르시우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 691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일을 어떻게 말해 주는가 하는 것보다는 우리 말을 해 주는 것에 관심이 가며, 우리 이름이 어떻게 돌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과 존속이 남의 손에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이름 694


사람들은 그렇게 작은 일을 가지고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한 제국이나 한 왕국을 정복하는 데에 대장이 되어 보았어야 한다. 카이사르 같이 늘 상대편보다 약한 군대를 가지고 52회의 지정된 전투에 승리를 거두었어야 한다. 1만 명의 선량한 동료들과 수많은 장수들이 그에게로 종군하다 용감하게 죽어 갔다.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처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밖에는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허황되고 공상적인 생명을 3년 동안 살기 위해서 694


우리가 눈으로 보는 훌륭하게 싸우는 사람들까지도, 전쟁터에서 쓰러진지 석 달이나 3년이 지나면, 마치 그들이 세상에 있은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떠한 인물들과 사적(事)들이 서적의 기억 속에 남는가를 정당하게 고찰해 보는 자이면, 누구든지 우리 시대에 행동이나 인물로서 어떤 권한이라도 주장할 수 있는 자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우리는 용덕을 가진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그들 청춘에 정당히 얻은 명예와 영광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민하며, 그들의 명성이 없어진 뒤까지도 당자들이 생존해 있는 것을 보아 왔는가? 그리고 이 허황되고 공상적인 생명을 3년 동안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하고 본질적인 인생을 잃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 일인가? 현자들은 이렇게 중대한 기도를 위해서는 더한층 훌륭하고 정당한 목표를 세운다.

"선행에 대한 보상은 그것을 수행한 사실이다."(세네카) "어떤 봉사의 과실은 그 봉사 자체이다."(키케로) 아마도 어떤 화가나 다른 장인이나, 또는 수사학자나 문법학자라도 명성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용서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도덕의 행동은 그 자체가 너무 고상해서 그 자체의 가치밖에는 다른 대가를 바랄 수 없다. 특히 인간의 허영된 판단 속에서 그것을 찾을 일이 아니다.


저 위대한 목매달아 죽일 놈 695

그렇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행할 의무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그릇된 생각이 대중에게 필요하다면, 만일 국민들이 그 때문에 도덕에 잠 깬다면, 만일 세상 사람들이 트라야누스의 추억을 축복하고 네로의 추억을 증오하는 것을 왕공(王公)들이 보고 감격한다면, 만일 옛날에 그렇게도 가공하고 두려움 받던 더 위대한 목매달아 죽일 놈의 이름이, 어떤 학생에게라도 그 일을 배우다가 그렇게도 모욕당하고 저주받는 것을 보고 왕공들이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이라면, 평판은 과감하게 키워 갈 일이며, 사람들은 될 수 잇는 한 이 평판을 가꾸어 갈 일이다.


명예와 양심 697


모든 명예로운 인간들은 자기 양심에 실수하기보다는 차라리 명예를 잃는 편을 택한다.


17. 교만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을 애증하는 분수 없는 심정 697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남을 업신여기며 잘난 체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품는 지나친 호평의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애증하는 분수 없는 심정이며, 우리를 실제 있는 것과는 다르게 보여 주는 것이 마치 사랑의 정열 때문에 마음속의 인물이 미와 단아한 품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며, 연모하는 자들은 혼란되고 변질된 판단력을 가지고 사랑하는 대상을 실제와는 달리 더 완벽한 것으로 보게 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나는 사람이 이 면에서 실수할까 염려해서, 자기를 잘못 판단하거나 사실보다 못난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판단력은 모든 방면에 자기 권한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며, 이 문제에서도 다른 경우와 같이 진실이 보여 주는 대로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카이사르의 경우라면 그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관 698

우리는 우리의 기관을 똑바로는 감히 부르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모든 종류의 방탕한 행동에 사용하기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압박받고 있는 것을 느끼는 일 699

교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일과 남을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에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내게 불쾌하고 동시에 부당하고 더욱이 폐스러운 것이라고 내가 압박받고 있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가장 그릇된 사상을 가꾸는 주요 원인 700


대체로 옛 사람들이 품던 인간 전체에 대한 사상들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품으며 애착을 느끼는 것은, 우리를 가장 경멸하고 천시하고 무시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교만과 허영심을 공격하며, 철학 자체의 허약성과 무지와 미해결을 성심으로 인정할 때보다 더 잘 할 수는 없는 일로 보인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그릇된 사상을 가꾸는 주요 원인은 사람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과도한 기쁨 때문에 죽었던 시인 이야기 701-702


나는 무척이나 시가를 좋아한다. 남의 작품은 어지간히 알아본다. 그러나 사실 내가 시가를 써 보려면 어린아이 장난이 되어 버려, 스스로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다른 데서는 아무 데서라도 어리석은 수작을 할 수 있지만 시가에서는 못한다.

 

신들도 인간도

작품을 붙이는 기둥도

시인들의 평범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

 

우리 출판사 사옥 앞에 이 격언이 붙어 있어서, 그 많은 사이비 시인들이 작품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ㄹ까!

 

진실로 졸렬한 시인보다 더 자신을 가진 자는 없다.    (마르티알리스)

어째서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가? 선대(先代) 디오니시우스는 자기 재주 중에도 시짓는 것을 가장 자랑삼았다. 올림픽 경기 때에 그는 화려하기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한 수레들을 가지고 제왕답게 금박을 하고 수를 놓은 천막에 깃발을 날리며, 시인들과 음악가들을 시켜서 자기 시를 제출케 하였다. 그의 시가 낭독될 때에 처음에는 그 운율이 우아하고 탁월한 데서 민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 작품의 변변찬은 내용을 감식하게 되자, 그들은 처음에는 경멸하다가 점점 그 판단이 명확해지자, 금세 화를 내며 달려나가 그 깃발을 모두 쓰러뜨리고 찢어 내팽개쳤다. 수레도 역시 경기에서 아무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부하들을 실어왔던 배는 시칠리아로 귀환하지 못하고 폭풍우에 밀려서 타렌토의 해안에 가서 부서졌다. 민중들은 이것이 확실히 신들이 그들과 같이 이 못된 시에 분개한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난파에서 겨우 살아난 뱃사람까지도 이 민중들의 의견에 가담하였다.

 

그의 죽음을 예언한 신탁도 역시 어느 면에서 백성들에게 찬동하는 것 같았다. 그 신탁에는 디오니시우스가 자기보다 우수한 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 그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실려 있었다. 이것을 그는 자기보다 우세하던 카르타고 인들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이 예언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여러 번 승리할 기회를 저버리며 조절해 갔다. 그러나 그는 잘못 해석했다. 왜냐하면 신은 그가 아테네에서 자기보다 우수한 비극 시인들에 경쟁해서 《레네이아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상연시키고, 매수행위(買受行爲)와 부정으로 승리를 거두는 때를 그 시기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리 뒤에 그는 갑자기 죽었다. 얼마간은 그가 이때 느낀 과도한 기쁨 때문이었다.

 

 


평범한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701


나는 나를 평범한 부류에 속한다고 보는 그 사실 하나만을 빼놓고, 자신을 평범한 뷰류에 속한다고 본다. 가장 속되고 천한 결함을 가진 죄는 있어도 그런 것을 떳떳이 자백하지 않았거나, 변명해 본 죄는 없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다시 읽을 때에는 703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

나는 다시 읽을 때에는 얼굴을 붉힌다.
왜냐하면 많은 문장이 작가인 내가 판단하기에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 703
 


나는 늘 마음속에 한 상념과 뒤섞인 어떤 영상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와 같이 내가 써 내놓는 것보다 더 나은 형태를 보여 주는데, 나는 그것을 파악해서 전개시켜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상념 자체도 중간쯤밖에 못 된다. 내가 이것으로 추론해 보면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내 상상력과 소원의 극한을 훨씬 넘는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만족시켜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나를 놀라 넘어지게 하며 감탄으로 넋을 잃게 한다. 나는 그들의 미를 판단하며 그 미를 눈으로 본다. 전부를 이해하는 것이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그런 것을 써 보려고 갈망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정도까지는 이해한다.



내 언어 705

내 언어는 유창하고 매끈한 맛이 없다. 오히려 거칠고 오만하며 멋대로 노는 방종한 경향이 있다. 내 판단으로는 아닐지라도 내 경향으로는 이대로가 내 취미에 맞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너우 이런 식으로 흘러서 기교와 허식을 피하려고 애쓰다가 도리어 다른 면으로 거기에 빠지는 것을 느낀다.

간결하려고 노력하다가
난삽함에 빠진다.      (호라티우스)


미모는 대단한 장점 706

미모는 사람들과의 교제에 추천되는 대단한 장점이며, 사람들 사이에 화합을 이루어 주는 제일의 방편이다. 사람이 아무리 거칠고 퉁명스럽다 해도 그 아름다움에 감명받지 않는 자는 없다. 육체는 우리 인생에 큰 몫을 차지한다. 그 역할은 크다. 그 때문에 신체의 구조와 기질을 존중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우리의 이 두 가지 주요 부분을 떼어서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다. 반대로 이 둘을 짝지어 맞춰 놓아야 한다.


반쪽의 존재밖에 709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 간다.      (루크레티우스)

이제부터 내가 되어 갈 것은 반쪽의 존재밖에 없으며,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라지며, 내 자신에서 빠져나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나하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호라티우스)


이것이 단 하나 내가 노력하는 일 711


나는 우리가 자주 당하듯이 일이 여의치 않게 되어 가는 귀찮은 사건들을 감내할 만큼 마음이 강하지 못하고, 늘 긴장해서 일에 질서를 세우고 정돈하며 처리해 갈 수 없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내 일을 운에 맡기며, 모든 일이 아주 잘못되어 가는 것이라고 작정해 놓는다. 그리고 이 최악의 사태를 순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견디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단 하나 내가 노력하는 일이며, 나의 모든 사색을 그리로 돌리는 목표이다.


진흙구덩이에 박히더라도 712


길 가는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낭떠러지와 미끄러져 떨어지는 길을 피한다. 그보다는 진흙구덩이에 박히더라도 더 아래로 갈래야 갈 수 없는 단단한 길로 들어서서, 그 곳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런 만큼 나는 불행을 둘러맞추다가 생기는 불확실성 때문에 나를 단련시키지 않으며, 단번에 나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아주 순수한 불행을 당하는 편이 낫다.

(나의 생각)

'가치투자자의 기본 자세'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속는 서방보다 더 손해보기 마련 712

질투꾼은 속는 서방보다 더 손해보기 마련이다. 소송을 하기보다는 숫제 포도원을 빼앗기는 편이 흔히 불행이 덜하다. 가장 얕은 길이 가장 단단한다. 그것이 견실성이다. 거기서는 자신밖에 아무도 없다. 진실성은 여기에 기초를 두며, 전적으로 자기에게 의존한다.


출세하려면 운이 와서 내 손목을 끌고 갔어야 할 일이다 713

야심으로 말하면 교만과 이웃 간이랄까, 그보다는 딸 뻘이긴 하지만, 출세하려면이 와서 내 손목을 끌고 갔어야 할 일이다. 불확실한 희망 때문에 수고하며 인생 행로의 첫머리에 남의 신용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겪어 내는 일 따위는 나 같으면 못해 냈을 일이다.

(나의 생각)

'나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안전투자 713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잡히는 일에 집착한다. 그리고 항구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한 노는 물을 치고, 한 노는 기슭을 긁으라.      (프로페르티우스)

그뿐더라 사람은 먼저 자기 운을 걸지 않고는 이런 영달을 얻는 일은 드물다. 내 의견으로는 사람은 자기가 출생해서 성장한 운을 유지하면 족할 것을, 그 운을 더 키우려고 불확실한 일을 하다가 손에 잡은 운마저 놓치는 일은 미친 수작이라고 본다. 운을 못 타서 살아 갈 발판을 닦아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세워 보지도 못하는 자라면, 어차피 궁핍에 몰려서 운을 터 보아야 하는 이상, 가진 것을 우연의 모험에 던져 보아도 용서될 만한 일이다.

불행 속에 있을 때는 험한 길을 취해야 한다.      (세네카)

(나의 생각)

안전투자, 가치투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 718

기억은 제가 오고 싶은 시간에 오지, 내가 바라는 시간에는 오지 않는다.


자기 추천 726

내가 하는 자기 추천은 비천하고 평범한 것이다. 도대체 누가 자기에게 지각이 없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었던가?


자기의 사상 727


나는 정당하고 건전한 사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자기의 사상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나 727∼728


세상 사람들은 늘 서로 상대편을 쳐다본다. 나는 내 눈을 내 속으로 돌리며, 시선을 거기에 처박고, 그 속을 부지런히 둘러본다. 모두들 자기 앞만 쳐다본다.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밖에 일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고찰하며 검토하며, 나를 맛본다. 다른 자들은 그들이 잘 생각해 본다면,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늘 앞으로 간다.

아무도 자기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페르시우스)

나는 내 속에서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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