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6. 역마차에 대하여



위험을 면하려는 열망
997

이것은 날마다 경험하는 바이지만, 우리가 위험을 면하려는 열망보다 더 위험한 경지에 빠지게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 위대한 장수의 증언이다. "대개 공포심이 덜할수록 위험을 덜 당한다."(티투스 리비우스)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 1001


주책없이 후하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호의를 사는 데는 서투른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호의를 얻을 자의 수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산다. "후하게 내려줌은 이미 더 많이 실시하였을수록 다음에는 그만큼 더 못하게 된다. 기분좋게 하는 일을 오래 두고 할 능력을 상실케 하는 일보다 더 어리석은 처사가 어디 있는가?"(키케로)


받아버린 것 1002 


받아버린 것은 이미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은 앞으로 후대받을 것밖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왕은 남에게 주다가 줄 것이 없어질수록 그만큼 심복을 잃는다.

채워 줄수록 커 가는 욕심을 어떻게 만족시킨단 말인가? 가질 생각을 가진 자는 이미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탐욕은 배은망덕하기에 꼭 알맞은 소질이다.


무(無)만도 못한 일 1006

아가멤논 이전에도 영웅은 많았건만
오랜 어둠의 망각 속에 묻혀졌다.      (호라티우스)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의 멸망 전에도
많은 다른 시인들이 다른 사물들을 노래하였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집트의 제관(祭官)들이 그들 국가의 오랜 운명과 외국의 역사를 알아서 보존하는 방법에 관해서 말한 바를 듣고 솔론이 한 이야기에, "우리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 속에 사방으로 뛰어들어 뿜어져 나가며, 두루 돌아다녀 보아도 자기의 진행을 저지하는 어떤 한계도 발견되지 않는 이 시간과 공간의 한도 없는 무한대를 관찰할 수 있다면, 이 무한 속에 우리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무수한 사물의 형체들을 발견할 것이다"(키케로)라고 전하는 것은, 이 고찰에 대한 반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대해서 우리에게 전해 온 모든 것이 진실이고 그것을 어느 누가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비하면 무(無)만도 못한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흘러가는 모든 사물들의 모습을 두고 말해도, 우리 중의 가장 호기심 많은 자가 알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짧은 소견의 일들뿐인가!


그곳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세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007∼1012

(맥시코, 페루가 스페인 군대에게 잔인하게 정복된 역사의 묘사)


진주와 후추 무역 1009

우리는 그들의 무지와 무경험을 이용해서 우리의 풍습 사례와 배신과 음탕과 탐욕과 모든 종류의 비인간적인 잔인성의 방향으로 그들을 보다 손쉽게 휘어 갔다. 누가 도대체 상업과 교역의 업무에 이렇게도 가치를 주었던 것인가? 그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쓰러져 아주 없어지고, 그 많은 국가들이 멸망되고 수백만의 국민들이 칼끝에 꿰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부분이 진주와 후추 무역을 위해서 뒤집히다니! 기계적인 승리이다. 이다지도 야심이, 이다지도 적의가 인간들 서로의 무서운 적개심과 비참한 재난을 이루어 놓은 일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무장한 외국인들의 정직성과 설교를 좋게 보지 않는 풍습이 있다 1010


이것이 그들의 정의감이나 종교에 대한 열성의 증거란 말인가? 1012


7. 고귀한 신분의 불편함에 대하여

모험과 곤란에 참여하지 않는 자 1018

모험과 곤란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위험한 행동 뒤에 따라오는 명예와 쾌감의 혜택을 요구할 수 없다. 모든 일이 자기 앞에 양보할 만큼 대단한 권세를 갖는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다.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 1019

우리가 명예에 관한 모든 장점을 그들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결함과 악덕까지도 옳은 일이라고 인정할 뿐 아니라, 모방까지 해가며 그런 일하는 권한을 그들에게 주고 옹호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종들은 모두가 그를 본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아첨꾼들은 그와 같이 근시안인 체하느라고, 그의 앞에서 잘 부딪치고 발끝에 걸리는 것을 차고 둘러엎곤 했다. 탈장(脫腸)까지도 때로는 으스대며 자랑할 거리가 되었다. 나는 귀먹은 것도 뽐낼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플루타르크는 왕이 왕비를 미워하자, 궁신들도 덩달아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것은 음탕한 버릇이 모든 버릇과 아울러 유행하고, 불충·모독·잔인성도 그렇고, 사교가 그렇고, 미신·무신앙·태만이 그렇다. 더 나쁜 일로, 도대체 더 나쁜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아첨꾼들은 그들의 왕이 명의(名醫)라는 영광을 얻고 싶어하자 자기들 몸을 째고 지지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본보기로 다른 자들은 몸의 가장 미묘하고 고귀한 부분인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입을 다물겠소 1019

내가 시작한 이야기로 끝맺자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어떤 문자의 해석을 가지고 철학자 파브리누스와 토론하던 때에, 파브리누스는 바로 승리를 황제에게 양보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비난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그런 말 마시오. 그래 30군단을 지휘하는 그가 나보다 박학하지 못하단 말이오?"라고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아시니우스 폴리오를 공격하는 시를 썼다. 그러자 폴리오는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겠소. 나를 추방할 수 있는 자에게 대항해서 글쓴다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오." 그의 말이 옳았다. 왜냐하면 디오니시우스는 시로는 필로크세노스를, 산문으로는 플라톤을 당해 내지 못하자, 하나는 채석광으로 중노동형을, 하나는 노예로 팔아 아이기나 섬으로 쫓아냈다.


8. 논변의 기술에 대하여


토론의 훈련 1021

우리 정신의 가장 자연스럽고도 효과 있는 훈련법은, 내 생각으로는 사람과 논변(論辯)하는 일이다. 나는 이 방법이 인생의 어느 다른 행동보다도 더 감미로운 일이라고 본다. 이런 이유에서 만일 내가 이제부터 무언가를 택해야만 한다면, 듣기와 말하기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보기를 버리는 편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테네 인들은, 더욱이 로마 인들은 이 토론의 훈련을 숭상했다.


병적인 저속한 정신들과 교섭하는 일 1022

우리의 정신은 힘차고 조절된 정신과의 의사 소통에서 강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병적인 저속한 정신들과 끊임없이 교섭하고 자주 상종함으로써 얼마나 타락하며 손해를 보는 것인지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보다 더 잘 전염하여 퍼지는 것은 없다. 나는 경험으로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알고 있다. 나는 토론과 변론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과 하며, 나 자신을 위해서 한다. 왜냐하면 세도가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며, 서로 다투어 자기 재치와 말주변을 펼쳐 보이는 일은 점잖은 사람으로서는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팔을 내밀기는 커녕 1023

어떤 반대에 부닥치면 사람들은 그것이 정당한가를 보지 않고, 옳건 그르건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것인가만을 생각한다. 우리는 팔을 내밀기는커녕 발톱을 내민다.


너무 명령조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1024

나는 진리가 어느 누구의 손에서 발견되었다 해도 기꺼이 환영하며, 그것이 아무리 멀리서 오는 것일지라도 마음 편하게 항복하고 무기를 그 앞에 내놓는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식으로 너무 명령조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내 문장에 대해서 하는 비평에 한 팔 빈다. 글을 고쳐야 할 필요에서가 아니라 예절상의 필요에서 고쳐 본 일도 흔히 있다. 쉽사리 양보해서 남에게 좋은 일도 해 주어, 아무라도 내게 알려 주고 싶은 일을 자유로이 알려 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정히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끌어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생각을 고쳐 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남을 고쳐 줄 용기도 갖지 못하고 서로 늘 숨겨 가며 말한다. 나는 남의 판단을 받아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두 형태 중의 어느 편에 있어도 무방하다. 내 생각 자체가 나의 생각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남이 반대하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하기는 나는 그의 책망에 대해서 내가 주고 싶은 권위밖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 의견을 좇아 주지 않으면 모욕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믿어 주지 않으면 자기가 일을 공연히 알려 주었다고 후회하는 자들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너무 고압적으로 나오는 자와는 인연을 끊는다.


자기의 우월감과 상대편에 대한 경멸감보다 더 우리를 민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1024

소크라테스가 자기 논거에 대한 반대를 항상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는 것은, 그의 역량이 대단히 컸으며 확실히 장점이 자기 편에 있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반대를 새로운 영광의 재료로 맞이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기의 우월감과 상대편에 대한 경멸감보다 더 우리를 민감하게 만드는 것은 없고, 이치로 보아서 약한 편이 도리어 고마운 마음으로 자기를 바로 세워 주는 반대 의견들을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고 본다. 사실 나는 나를 두려워하는 자들보다도 나를 거칠게 다루는 자들과 더 자주 사귀려고 한다. 우리를 숭배하고, 우리들 앞에 자리를 물려주는 자들과 상종하는 쾌락은 멋쩍고 해롭다. 안티스테네스는 어린아이들에게 자기를 추어주는 자들을 결코 고맙게 여기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나는 열을 올리며 토론하다가 상대편이 약해서 승리할 때의 쾌감보다도 상대편의 올바른 이론 앞에 내가 굴복할 때의 나 자신에 대해서 얻는 승리감에 훨씬 더 큰 자존심을 갖는다.

 

참을성 없음 1029

그런데 웬말인가? 내가 사물들을 사실보다 다르게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는 참을성 없음을 한탄한다. 무엇보다도 이 참을성 없음은 옳은 자에게서건 그릇된 자에게서건 매한가지로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형태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은 속 좁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 항상 있는 어리석은 수작을 가지고 짜증내며 분개하는 것보다 더 심하고 고질적이며 괴퍅한 일도 없다. 이런 심정은 주로 우리 자신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옛날 철학자(헤라클레이토스를 말함)는 자기를 고찰하는 동안 눈물을 흘릴 기회가 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7현(七賢)의 하나인 뮈손은 티몬이나 데모크리토스에 지지 않는 기분으로 있었는데, 누가 왜 혼자서 웃고 있느냐고 묻자, "내가 혼자 웃고 있는 것이 우스워서"라고 대답하였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1029-1030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수작을 나는 날마다 말하고 대답하는 것인가! 그러니 남의 생각을 따라서는 얼마나 더 자주 할까! 내가 그 때문에 꿍꿍 앓고 있다면 다른 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개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그리고 뻔뻔스럽고 부끄럼이 없는 그들의 일에 놀란다.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1030∼1031

나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누구건 비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아무도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말은 우리의 판단력이 당장 문제에 오른 자를 공격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내적 비판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속의 악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악덕에는 그 근본이 덜 모질고 덜 악질이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자비로운 봉사이다.

그런데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그도 역시 그 결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격에 맞는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하여튼 알려 준 일은 진실하고 유익하다. 우리 코가 멀쩡하다면 우리 은 그것이 우리 것인 만큼 더 구려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와 자기 아들과 다른 한 사람이 어떤 폭력이나 부정 행위로 죄를 지었을 경우, 자기가 맨 먼저 재판소에 가서 형 집행인의 손으로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둘째는 자기 아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에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 교훈은 그 어조가 매우 고매한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 양심이 하는 처벌에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경험 1032

경험의 수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그것들이 지니는 이유과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런 것을 달아 보고 비교해 보며 소화하고 증류시켜야만 한다.


결과로서 의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1034


"결과로써 의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 격언은 용인되어 왔다. 카르타고 인들은 지휘관들이 그릇된 의견을 냈을 경우, 요행히 일이 잘 수습되었을 때라도 그들을 처벌했다. 그리고 로마 국민들은 지휘관의 행위가 그의 행운과 부합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위대한 승전에서도 개선 행진을 거절하는 수가 흔히 있었다. 대개 세상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 운이 모든 일에 대해 그 지배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우리의 오만함을 꺾어 버리는 데 재미를 들이고, 서투른 자들을 현명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하니, 도덕에 대항해서 그런 자들에게 행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순전히 운으로 꾸며지는 일에 참여해서 옹호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중에 가장 단순한 머리를 가진 자들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매우 큰 사업을 해치우는 예를 날마다 본다. 마치 페르시아 인 시람네스가 그의 계획은 대단히 현명한데 일의 성사는 늘 실패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일의 계획은 자기 뜻대로 꾸미지만 일의 진행은 운이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들은 마찬가지로 말을 거꾸로 돌려서 대답할 수 있다.

이 세상사의 대부분은 제대로 되어 간다.

운명은 그들의 길을 헤쳐 나간다.      (베르길리우스)


우리는 거의 판에 박힌 습관으로 참여하는 것에 불과 1035

결과는 흔히 극히 서투른 행위에도 권위를 준다. 우리는 거의 판에 박힌 습관으로 참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개는 머리를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남이 한 일을 본받아서 한다. 그 성취한 사업이 위대한 데 놀라서, 나는 전에 그런 일을 끝까지 성취했던 자들을 통해서 그들의 동기와 방법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나는 평범한 의견밖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가장 속되고 늘 쓰이는 의견이 본때는 나지 않지만 실천에는 가장 확실하고 유리한 것이다.


행운과 불운 1035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원인과 결과를 파악해 보며, 자기 손으로 자기 사업의 진전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의 기도는 허황된 일이다. 특히 전략의 고찰에 있어서 허황되다. 우리들 사이에 가끔 보이는 군사상의 예보다도 더 용의주도한 신중성은 없었다. 그것은 이 대도박의 마지막 결판에 대비해서 중도에 패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인가?

더 나아가, 우리의 예지와 사고력 자체가 대부분은 우연에 매여 있다. 내 의지와 사유는 이때는 이렇게, 저때는 저렇게 움직이며, 그 중에도 많은 움직임은 나 없이도 되어 간다. 내 이성에는 매일 돌발적인 충동과 동요가 있다.

심령의 모양은 변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속은 이때는 이 생각,
한 가닥 회오리바람이 구름을 밀고 가면,
그때는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베르길리우스)

(나의 생각)

베르그손과 프루스트가 끊임없이 탐구하던 대상인 '자아', 그리고 프로이트가 마침내 과학적으로 찾아낸 '무의식'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하다니! 참으로 인간 내면을 너무나 잘 들여다 본 정말 놀라운 인물이다.


가장 약지 못한 자들 1036

도시에서 가장 권세 있고 사업이 융성해 가는 자들을 보라. 대개는 그들이 가장 약지 못한 자들이다. 여자나 어린아이나 미친 사람들도 능력있는 제왕들과 맞설 정도로 큰 나라들을 다스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꾀 있는 자들보다 우둔한 자들이 대개 더 성공한다고 투키디데스는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행운의 결과를 총명의 탓으로 돌린다.

사람이 성공함은 단지 행운의 덕택이다.
그런데 그의 득세를 보고서
우리는 그 수완을 칭찬한다.      (플라우투스)

그 때문에 어떻게 보건 사건의 결과는 우리의 가치와 능력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는 내 말은 옳은 것이다.

(나의 생각)

내가 종사하는 '업계'에서도 '성공한 사람들의 득세'를 보고 '그의 수완'을 칭찬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인가? 1036∼1037

그런데 나는 마침 권세 있는 자리에 올라앉았을 때에만 보아야 한다는 점에 생각이 이르렀다. 사흘 전에는 그를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 다음에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우리의 생각 속으로 위대성과 능력의 모습이 흘러들며, 그의 지위와 권위가 증대했으니 그의 인품도 훌륭해 졌다고 믿게 된다. 우리는 그를 그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숫자판을 보고 하는 식으로, 그의 직위의 특권에 따라서 인물을 판단한다. 다음에 운이 틀려서 그가 보잘것없이 되어 다시 일반 사람들 속에 섞여들었다고 하자. 저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높이 추어올렸던 것인가 그 원인을 따지며 놀라서 물어 본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인가? 그는 거기 있을 때 다른 능력은 없었는가? 제왕들은 그런 애매한 능력에 만족했었나? 우리는 정말 잘난 사람에게 걸렸군! 하며 사람들은 말한다.

(나의 생각)

내 주변에도 '그게 바로 그 사람인가?' 싶은 사람들이 참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렇게 똑 같을 수 있는지 그게 참 궁금하다. "내 이성은 그들 앞에 굽혀 숙이게 되어 있지 않다. 굽어지는 것은 나의 무릎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말과 다르게 말하는 자는 1038


파격적인 운을 타고난 인물이 자기 식탁에서 경솔한 말들이 주책없이 오가는 자리에 한 몫 거들어 간섭하며, 바로 "이 말과 다르게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 아니면 무식꾼이지만······" 하고 말을 시작했다. 손에 단도를 들고 하는 이 철학적인 날카로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위험한 수법,
기초가 박약한 자들, 자기 무식을 탄로시키는 것 1039

그들이 어구에 윤곽을 지어서 의미를 수습하며 "어찌어찌해서 이렇다. 이러니까 그렇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그렇게도 평범한 일로 보는 이런 보편적인 판단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들은 온 국민들을 뭉쳐서 전체로서 보고 인사하는 자들이다. 이 국민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사람을 따로따로 지적하며 이름을 불러서 인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수법이다. 그런 데서 나는 날마다 더 자주 지식의 기초가 박약한 자들이 똑똑한 체하며, 어떤 작품을 읽고 그 아름다운 점을 지적하려다가 당치 않은 곳에 탄복하는 꼴로 그 작가의 탁월한 점을 알려 주기는커녕 자기 무식을 탄로시키는 것을 보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시 한 쪽 전체를 듣고 나서, "그것 참 좋군!" 하며 탄성을 올리면 그것은 확실하다. 약은 자들은 이렇게 해서 면한다. 그러나 시 한 구절씩을 따라가며, 명확하게 추려 낸 판단으로 한 훌륭한 작가가 어떤 난점을 극복하고 어떤 점에 가치를 높이는가를 지적하려고 하며, 낱말과 어구와 착상을 하나하나 저울질해 보는 일에서는 어서 물러나라! "각자의 어법을 검토할 뿐 아니라 그의 사상과 그 사상의 근거를 파고들어 알아보아야 한다."


음악가 1040

어리석음과 지각의 혼란은 잠깐 가르쳐 주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것을 교정하는 문제에는, 막 전투하려는 마당에 군대의 사기를 북돋워 달라고 재촉하던 자에게, "사람들은 훌륭한 연설 한마디로 당장에 용감해지거나 잘 싸우게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좋은 노래를 듣고, 바로 음악가가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키로스가 대답한 말이 바로 적용된다. 그것은 미리 오래 두고 꾸준한 훈련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풋내기들의 상대 1040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는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지식을 열심으로 교정하며 깨우쳐 가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나 지나가는 자를 붙들고 설교하며, 그의 서투르고 무식한 점을 교정하려는 버릇을 나는 매우 언짢게 본다. 나는 말을 주고받는 상대가 그러해도 교정해 주는 일은 거의 없다. 무슨 선생이나 된 것처럼 초보부터 깨우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두 버려 둔다. 내 기분은 글 쓰는 데나 말하는 데나 풋내기들의 상대로는 맞지 않는다. 어느 모임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일을 가지고는 그릇되고 어리석은 말이라고 판단해도, 나는 말로건 몸짓으로건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그뿐더러 어리석은 자가 어떠한 이치에 만족하기보다도 자기 어리석음에 더 만족하고 있는 것을 보는 일보다 울화가 터지게 하는 일은 없다.


당나귀보다 더한 것이 또 무엇이 있는가? 1040∼1041

완고하거나 주책없는 논법이 그 주인들의 마음을 안심과 유쾌한 기분으로 채우는 자리에서, 자기는 총명하기 때문에 만족이나 자신을 갖지 못하며, 늘 불만을 품고 자리를 떠야 하는 경우는 불행한 일이다. 이런 때에는 가장 서투른 자들이 남을 경멸하고 어깨 너머로 넘겨다 보며, 토론에서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거두고 돌아간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오만한 말투와 유쾌한 얼굴이 좌중에서 우위를 차지하는데, 이 좌중이란 대개 이해력이 약하고 판단력이 없으며, 진실한 장점을 식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다. 자기 사상을 열렬하게 고집 세우는 것은 어리석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래, 확고하고 결단적이며, 경멸조이고 명상적이며, 장중하고 근직한 것으로 당나귀보다 더한 것이 또 무엇이 있는가?


격에 맞지 않는 분노 1041


사람들은 대개 힘이 부족하면 얼굴빛과 목소리가 달라진다. 그리고 격에 맞지 않는 분노는 앙갚음보다 자기 약점과 참을성 없음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우리는 가끔 침착한 기분으로 모욕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도, 이 흔쾌한 잡담에서 상대편의 불완전하고 숨겨진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래서 피차 유익하게 우리의 결함을 서로 알려 준다.


자기 작품에는 1042


나는 사람들이 남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작품도 판단할 눈이 없는 것을 본다. 자기 작품에는 애정이 섞일 뿐 아니라, 그것을 깨닫고 식별해 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그 자체의 힘과 운의 힘으로써 직공(작가)의 착상과 지식 이외에 그를 도와주며 직공의 역량을 넘는 수가 있다. 나로서는 남의 작품 가치를 내 것보다 더 흐리멍덩하게 판단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이 《에세이》도 때로는 얕게, 때로는 높게 아주 줏대 없이 평가한다.


축소판 1042


한 양서를 요약해서 만든 축소판은 모두 어리석은 축소판이다.


선행과 보답 1042


"선행은 그 부채를 보답할 수 있는 한도에서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이 한계를 너무 초과하면 감사 대신에 우리는 증오로 이것을 갚는다."(타키투스) 그리고 세네카는 힘차게 말한다. "보답할 수 없음을 수치로 여기는 자는 보답해 줄 자가 없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더 비굴하게 둘러서 말한다. "그대에게 부채를 다 갚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대의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타키투스에 대한 서평 1043∼1046

나는 요즈음 타키투스를 단숨에 읽었다.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20년 전부터는 한 시간을 계속해서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용덕이 높을 뿐더러 그 능력과 착한 마음으로 지조가 견고하며, 그 형제들 역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 전부가 그의 인격을 지극히 존경하는 한 귀인의 권고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작가로서 이 작가만큼 공적 사건의 기록에 개인적 행동 습관과 경향에 관한 고찰을 섞어 넣는 예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행적들 뿐 아니라, 특히 신하들에 대한 잔인한 처사까지, 그 모든 종류의 형태가 극단적으로 잡다하던 제왕들의 생애를 좇아 보게 되었다. 그는 온 세상의 전쟁과 동란에 관한 것보다도 이런 면을 고찰하고 진술하기에 더 강력하고 흥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저 아름다운 죽음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지루해질까 염려하는 듯 대강 넘겨 버렸기 때문에, 나는 늘 그를 거칠다고 보고 있다.

이런 형태의 역사는 한층 더 유익한 것이다. 공사(公事)의 움직임은 운의 지도에 더 매여 있고, 개인적인 일은 우리들의 지도에 달려 있다. 이것은 역사의 서술이라기보다도 차라리 하나의 판결이다. 여기는 이야기보다 교훈이 더 많다. 이것은 읽을 책이 아니라 연구하고 배워 갈 책이다. 옳은 일에 관한 교훈으로 가득하다. 이 작품은 세계를 다루는 지위를 잡은 인물들의 준비와 장식을 위한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고찰의 기초이다. 그는 자기 시대의 수식적인 문체를 좇아서 예리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견고하고 강력한 이치로 변론한다. 당대의 사람들은 너무 과장된 표현을 즐기며, 일 자체에 첨단적이고 기묘한 것을 찾아보지 못하면 언어에서 그런 표현을 빌려 오는 것이었다. 그의 문장은 적잖이 세네카와 닮아 있다. 그의 글은 더 풍요하고, 세네카의 문장은 더 날카로운 것 같다. 그의 저작은 현재의 우리 상태와 같은 혼란되고 병든 국가를 섬기기에 더 적합하다. 우리는 자주 그가 우리를 묘사하고 비판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문장이 자기 사정에 관해서 진술한 것을 보면, 그는 진실하고 강작하고 용감하며, 미신적인 도덕이 아니라 철학적인 너그러운 도덕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증언하는 데 과감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한 병사가 나뭇짐을 지고 가다가 추위로 손이 그 짐에 얼어붙었는데, 어찌나 심했던지 손이 들러붙어 팔이 떨어져 죽어 있더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이런 일에는 이만큼 위대한 증인의 권위에 굴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다.



9. 허영에 대하여



도끼가 빠지면
1049


나로 말하면, 덧신 하나를 비뚤게 신으면 셔츠도 망토도 거꾸로 입는 식의 못된 버릇을 가졌다. 나는 반만 바로 갖기를 경멸한다. 나쁜 상태에 있을 때에는 나쁜 편으로 가려고 악을 쓴다. 절망으로 자포자기하며, 타락의 방향으로 멀어지게 두고, 사람들 말처럼 도끼가 빠지면 자루까지 내던진다.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 1050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⑵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그대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꾸며 보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⑵ 플루타르크의 이야기, 한 로마 인이 예쁜 아이까지 낳아 준 미모의 아내를 내쫓았다고 친구들이 책망하자 "이 구두는 새롭고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발이 벗겨진 것을 그대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수입의 계산에서가 아니고 각자의 생활 방식과 교양으로 1051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거든, 빈곤에 앞장서 비용을 삭감하기 위해 줄곧 달음질쳐 보라. 이것이, 그리고 빈궁에 쪼들리기 전에 내 행실을 고치는 일이 그것에 대비하는 방책이다. 게다가 나는 가진 것보다도 적은 것으로 지낼 수 있는 상태를 여러 한계로 마음속에 세워 보았다. 만족하고 지내는 상태 말이다. "수입의 계산에서가 아니고 각자의 생활 방식과 교양으로 그대의 부는 측정되어야 한다."(키케로)


  

여행은 그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 1051

여행은 그 비용 때문에만 힘이 든다. 그것은 힘겨울 만큼 무거운 부담이다. 수행원을 데리고 가는 습관은 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체면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그만큼 기한을 짧게, 그리고 횟수를 뜨게 해야 하며, 저축해 놓은 여윳돈만을 사용하는 까닭에, 여유가 생기기까지 연기하며 때를 기다린다. 나는 돌아다니는 쾌락 때문에 휴식의 쾌락을 제쳐놓고 싶지는 않다. 그 반대로 이 두 가지가 서로 거들고 가꾸어 주도록 하고 싶다.



잔글씨, 가시들 1052

가장 자잘하고 드러나지 않는 피해가 가장 괴롭다. 잔글씨가 눈을 아프게 하고 피로시키는 것처럼, 자디잔 일이 마음을 상하게 한다. 아무리 크고 맹렬한 불행보다도 수많은 자잘한 불행들의 뭉치가 더 사람을 해친다. 가정 생활의 이런 가시들은 엉겁결에 닥쳐오며 가늘고 빽빽하게 돋아나면서 위협도 없이 우리를 더 날카롭게 물어뜯는다.


한 방울의 물 1053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루크레티우스)


남의 집 것 1053


디오게네스는 내 생각과 같이, 어떤 종류의 포도주가 가장 맛 좋더냐고 누가 물어 보자, "남의 집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집 짓는 재미 1054


사람들이 대단한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 집짓는 재미도, 사냥도, 정원가꾸기도, 은퇴 생활의 다른 취미들도 내게 그렇게 큰 흥미를 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내게 불편한 다른 생각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일이다. 나는 이런 생각들이 안이하고 내 인생에 적합하기만 바라고, 그것을 강력하고 박식한 것으로 가지려고 마음 쓰지 않는다.


자루에 쑤셔 넣으면 1059


어떻든 나는 우리의 예로, 인간 사회는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서로 매이고 얽혀서 살아가는 것을 본다. 마치 잘 결합되지 않은 물체들을 질서 없이 자루에 쑤셔 넣으면 그들끼리 서로 자기들 속에 얽매이는 방식을 찾아가며, 때로는 기술적으로 정리해 넣은 것보다 더 잘 자리잡는 식으로 사람들은 어느 장소에 갖다 놓아도 움직이며 서로 덮치다가 서로 쌓이며 정돈되어 간다.


불행의 더미 1064


자기보다 못한 예를 보면 마음이 좋고 자기보다 나은 자들을 보면 마음이 언짢아지는 것은 우리들 악덕의 소치이다. "만일 여기 세상의 모든 불행을 한데 뭉쳐 쌓아놓고 이 불행의 더미를 똑같이 나누어 가지라면, 그보다는 차라리 자기가 가졌던 불행을 택하지 않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솔론은 말하고 있다.


되풀이해서 하는 말 1066


되풀이해서 하는 말은 호메로스에 나오더라도 지루해진다. 일시적이며 피상적이고 외관뿐인 것은 더욱이 질색이다.

세네카의 문장에서와 같은 유익한 사상이라도 교훈조로 된 것은 내게는 정말 비위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스토아 학파의 버릇으로, 모든 제목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칙과 먼저 내세우는 것들을 이모저모로 글을 쓸데없이 길게 되풀이하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이치와 논법을 늘 다시 인용하는 수작이 비위에 거슬린다.


과중한 기대 1067

"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기에게 과중한 기대를 걸게 하기보다 더 불리한 일은 없다."(키케로)


확실히 둘 1069


지금의 나와 조금 전의 나는 확실히 둘이다.

(나의 생각)

철학자 베르그손의 생각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나 자신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 1071

그런데 사람은 권한으로 살아야 하지, 어떤 보답이나 혜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의협적인 인물들이 은혜를 입고 살기보다는 죽기를 원했던 것인가!) 나는 무슨 종류이건 부채를 지는 일은 피한다. 그 중에서 특히 명예에 대한 부채는 싫어한다. 나는 사람에게서 무엇이건 받고 그 때문에 내 의지가 감사라는 자격에 저당잡혀지는 것보다 더 값비싼 것을 알지 못한다. 그보다는 돈을 받고 해 주는 봉사를 받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다. 진정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자들에게 돈밖에는 내놓지 않는데, 다른 자들에게는 나 자신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굴복의 신세 1074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야심적이고 특권적인 신분인 만큼 남의 것을 받는다는 일은 굴복의 신세이다.


신세지는 일 1075


늘 친숙하게 보는 것처럼, 아무나 무턱대고 일을 시키고 그 신세를 지는 자들은 이 신세지는 일이 얼마나 부담이 되는가를 어느 현자가 한 만큼 조심스레 헤아려 본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신세는 때로는 갚아 주는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신세진 일이 결코 풀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 팔꿈치를 사방으로 휘두를 자유를 찾는 자에게는 그 얼마나 구속인가!

 

여행을 즐기는 이유 1078

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를 물어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버리고 떠나는 것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나, 이제부터 찾아보려는 것은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대답한다.



파리를 찬양함 1078∼1079 

 

파리는 어릴 적부터 내 마음을 차지해 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는 훌륭한 일들도 더러 있었고, 아름다운 도시들을 많이 보아 갈수록 이 도시의 아룸다움에 정이 들게 되었다. 나는 이 도시 자체를 사랑한다. 외국의 화려한 장식을 뒤집어쓰는 것보다도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 나는 이 도시의 흠이나 오점까지도 마음에 들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한다. 나는 이 위대한 도시에 의해서만 프랑스 사람이다. 인구도 위대하고 그 자리잡은 품위도 위대하며, 특히 가지 각색의 물품이 풍부한 것이 비길 수 없이 위대하다. 프랑스의 영광이며 이 세상의 가장 고상한 장식들 중의 하나이다.

 

여행은 유익한 수양 1080

이런 이유들 외에도 내게는 여행이 유익한 수양으로 보인다. 심령은 여행을 하는 동안 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물들을 주목하느라고 계속적으로 훈련 받는다. 그리고 내가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색다른 생활과 사상과 습관 등을 제시해 주며, 우리들의 천성인 끊임없이 변해 가는 형태를 음미시키는 것보다 인생을 형성하는 데 더 효과적인 학문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고 하는 말 1081


여러분들은 내가 처자가 있는 늙은 몸으로 이런 수고를 즐겨 계속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자기 없이도 집안일이 잘 되어 가고, 그 전의 형태가 뒤집히는 일이 없게 살림에 질서를 세워 놓았을 때에는, 가정을 버려 두고 떠나기에 알맞는 때이다. 자기 집에 충실치 못한 집지기를 남겨 두고 궁핍에 대비해 놓을 생각도 없이 떠나는 것은 철부지보다 더한 일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집을 비우면 문제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되는 부부 간의 애정적 의무로 말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너무 오래 한데 붙어 있으면, 너무 끈적해서 도리어 애정이 손상되고 냉각될 우려가 있다. 남의 여자는 모두가 점잖은 여자로 보인다. 그리고 계속해서 늘 쳐다보고 있으면 서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에 느끼는 쾌감을 알아볼 수 없는 것도 누구나 다 경험해 보는 일이다. 이런 이별은 내 식구들에 대한 새로운 사랑으로 나를 채워 주며, 내 집 살림에 더 정다운 맛을 다시 돌려 준다. 생활을 이렇게 바꾸어 주면 내 욕망을 한때는 이 편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다른 편으로 일깨워 준다.


이집트에 있는 친구의 배가 불러진다 1082


나는 우정이라는 것의 손이 무척 길어서, 이 세상의 한 구석에서 다른 구석까지라도 뻗쳐 서로 잡을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특히 서로 염려해 주는 편지를 꾸준히 주고받으며, 우정의 의무와 추억을 잠 깨워 주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스토아 학파들이 말하듯 현자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 친밀해서, 하나가 프랑스에서 식사하면 이집트에 있는 친구의 배가 불러진다고 하며, 아무 데서라도 하나가 손가락을 뻗치기만 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 위의 모든 현자들이 도움을 받는다고 한 말은 옳다.


상상력 1082


소유와 향락은 주로 상상력의 소관이다. 상상력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우리가 손에 잡은 것보다도 더 열렬하고 계속적으로 품어 갖는다. 그대의 나날의 명상을 검토해 보라. 친구와 같이 있을 때가 친구와 가장 같이 있지 않을 때임을 알 것이다. 그가 자리에 있으면 그대의 주의력이 해이해져서 어느 시각에나 기회에, 그대 생각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자유를 갖게 한다.


먼가? 가까운가? 1083


만일 우리가 손에 잡히는 것밖에 누리지 못한다면, 돈도 금고 속에 있으면 내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사냥 나갔으면 내 아이들이 아니겠지? 우리는 이런 것을 더 가까이하기를 원한다. 들에 있으면 먼 것인가? 반나절쯤의 거리라면? 뭐? 40km 떨어져 있으면 먼가? 가까운가? 그것이 가깝다면 44km는? 48km는? 52km는?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가 보자. 아내가 남편에게 "몇 걸음에서 가까움이 끝나고, 몇몇 걸음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고 결정해 준다면, 내 의견으로는 그녀가 남편을 그 중간쯤에서 잡아 둘 일이다.

돌아감이 늦으면,
당신의 아내는 애인이 있다든가,
다른 여자의 사랑을 받는다든가,
음주나 방탕으로 좋은 일을 당신 혼자만 보고
나쁜 일은 자기의 차지라고 생각한다.      (테렌티우스)

(나의 생각)

몽테뉴의 이 책에서 테렌티우스가 너무 자주 나온다. 스티븐 핑커의 책에서도 '테렌티우스'를 만났다. 그의 대표작은 《안드로스에서 온 아가씨》인 듯한데, 몽테뉴 때문에『테렌티우스 희곡선』(범우문고판)까지 사 봤으나 《안드로스에서 온 아가씨》라는 작품은 없었다.


진실한 우정 1084


진실한 우정에서는, 나는 이 부문의 전문가이지만, 친구를 내게로 끌어오기보다 나 자신을 친구에게 내준다. 나는 그가 내게 해 주는 것보다도 내가 그에게 더 잘해 주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그가 나보다도 자기에게 더 많이 해 주기를 바란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가장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며, 떨어져 있는 것이 그에게 유리하고 필요하다면 여기 있는 것보다도 나에게 더욱 마땅하다. 그리고 서로 소식을 통할 방법이 있는 동안은 진실한 부재(不在)가 아니다.


40이나 50세 전에 1085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길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아니오?" 무슨 상관이 있나? 나는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여행을 완수하려고 떠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동안은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바람을 쏘이기 위해서 나는 바람을 쐰다. 이득이나 토끼를 보고 달려가는 자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오, 친구 하나! 1089


오, 친구 하나! 이 말의 사용은 물과 불 같은 요소들보다도 더 감미롭다고 한 옛말은 얼마나 진실한가!


같이 갈 친구가 없으면 1096


어떠한 쾌락도 남에게 통해 주지 않으면 내게는 멋이 없다. 마음속에 아무리 좋은 생각이 난다고 해도, 그것을 나 혼자 지어냈고 아무에게도 말해 줄 사람이 없다면 화가 난다. "예지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가진다는 조건으로 하기라면, 나는 그것을 거절하겠다."(세네카) 또 한 사람은 그것을 더 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만일 한 현자가 모든 필요한 사건들을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그가 알아 둘 가치 있는 사항을 자유로이 관찰하며 한가롭고 여유있게 연구하는 생활을 가졌다면, 그리고도 외롭고 쓸쓸함이 어느 인간도 결코 만나 볼 수 없을 정도라면 그는 인생에서 물러날 일이다."(키케로) 아르키타스의 말에,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저 광대하고 거룩한 천체들 속을 산택한다고 해도 같이 갈 친구가 없으면 불쾌할 것이라고 한 말은 내 성미에 맞는다. 그러나 어색하고 서투른 동행과 여행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혼자서 하는 편이 낫다.

(나의 생각)

미국에서 홀로 골프를 치다가 이글을 하고 "야호!"하고 소리쳤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어서 그 자리에서 '골프채를 부러뜨리고 말았다'는 어느 선배의 얘기가 떠오른다. 함께 기뻐해 주는 친구가 없다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철학 강의 1099

철학 강의를 들어 보라. 착상과 웅변과 지당한 말은 당장에 그대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그대를 감동시킨다. 그대의 양심을 건드리거나 자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양심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아닌가? 그래서 이리스톤은 "목욕이나 공부는 몸을 닦아서 때를 씻어 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껍데기에 구애되는 것은 좋지마는, 그것은 속의 골수를 뽑아 낸 다음이라야 한다. 마치 아름다운 잔에 가득한 좋은 술을 마시고 나서, 판에 새겨진 그림을 감상하는 격으로 말이다.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잘못인가? 1101

우리는 하느님 뜻대로의 착한 사람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리 식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예지는 스스로에게 정해준 의무를 결코 완수해 본 일이 없다. 그것을 수행하였다 해도, 인간 예지는 더한층 어려운 의무를 정해 놓고 그것을 갈망하고 주장할 것이리라. 그만큼 우리 심정은 자기 지조를 지키지 못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잘못을 범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한다. 자기와는 다른 존재의 이치를 가지고 자기 의무를 결정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으로 기대되는 일을 누구에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인가?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잘못인가?


'로마'라는 장소 1108

나는 나 자신을 이 세기에는 쓸모 없는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세기로 뛰어들며, 그들에게 완전히 반해서 옛날의 그 자유롭고 정의롭고 융성하던 로마에(나는 로마의 시초나 노쇠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흥미를 느끼며 열중한다. 그 때문에 나는 그들 거리와 옛 집터와 세상의 양극까지 이르는 그들의 깊은 폐허를 그렇게 자주 찾아 보아도 흥미를 느끼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것을 기억해 두는 일, 권장되는 인물들이 자주 찾아다니고 살고 하던 곳인 줄을 알아 방문할 때에, 그들의 발자취 이야기를 듣거나 작품을 읽는 것보다도 어느 점에서 더 깊은 감명을 받는 것은 우리들의 본성이 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 공상의 속임수에 의한 것인가?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우리는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키케로) 나는 그들의 용모와 자세와 의복을 고찰해 보기가 재미난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내 입에 올려 보며, 그것을 내 귀에 울려 오게 한다. 나는 그들을 숭배하면 이런 위대한 이름들 앞에 일어선다."(세네카) 그 어떤 부분들도 위대하고 감탄할 만한 이런 사물들 중에, 나는 바로 그 평범한 부분들에 감탄한다. 나는 그들이 잡담하며 산책하며 식사하는 것을 보았으면 한다. 그들의 살아가고 죽고 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그들을 좇을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시범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그 많은 훌륭하고 용감한 인물들의 유적과 모습들을 경멸한다는 것은 배은망덕이 될 일이다.

우리가 보는 저 로마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많은 자격으로 우리나라의 왕실과도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사랑받을 만하다. 그것은 인류 공동의 보편적인 유일한 도시이다. 그 곳에서 모든 기독교 국가들의 수도이며 스페인 사람이건 프랑스 사람이건 그 곳에서는 자기 나라에 있는 기분이 든다. 이 나라의 제왕이 되려면 어느 나라이건 기독교 국가의 국민이면 충분하다. 이 아래 세상에 이 도시만큼 하늘이 많은 은총을 내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주는 고장은 없다. 그 폐허까지도 영광스럽고 당당하다.


나 자신을 해체하지 않고는 1112

나는 어느 시의 백성도 못 되는데,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이후까지라도 가장 고귀한 도시의 시민이 된 일에 대단히 만족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식으로 주의해서 자기를 관찰한다면, 나와 함께 허황함과 부질없음으로 충만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내가 그런 부질없는 것을 벗어던지기는 나 자신을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 편이나 다른 편이나 모두가 다 거기 절여져 있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는 자들은 좀 나은 축일는지, 그 역시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제 3 권

1. 유용성과 정직성에 대하여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
870


나라가 동란에 빠지고 국민이 분열되어 있는 마당에 박쥐같이 휘뚝거리며 마음이 어느 편으로 움직이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훌륭하다거나 명예롭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중도를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길도 취함이 아니다. 그것은 운의 편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사건을 기다려 보는 태도이다."(티투스 리비우스)


배신이라는 사명 876

이러한 사명에는 우리에게 수치와 처벌을 주는 명백한 표징이 있다. 이런 사명을 그대에게 주는 자는 그대를 비난하는 것이며, 그대가 잘 이해한다면 그는 그것을 부담과 형벌로서 그대에게 주는 것이다. 공공의 사무가 그대의 공로로 덕을 보는 만큼 일은 나빠지는 것이다. 그대가 거기서 잘하는 만큼 손해가 된다. 그리고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긴 자가 그것으로 그대를 벌 준다는 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며, 아마도 어떤 정의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배신은 어느 경우에는 용서될 수 있다. 다만 배신을 배반해서 처벌하는 데에 사용될 뿐이다.

배신 행위들 중 상당수는 그 행위의 혜택을 받을 자들에 의해서 거절당했을 뿐 아니라 처벌당한 일이 있다. 피로스의 의사에 대한 파브리키우스의 고발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배신 행위를 시켜 이용하고 난 뒤, 비열하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여 노예같이 복종해 준 자를 무시하고, 열렬히 바라던 권한과 세력은 거절하며 엄격하게 그 배신 행위를 벌준 경우도 있다.


제일차적인 신의 877


자기 주인 술피키우스를 배반하고 그 숨은 곳을 가르쳐 준 노예는 필라와의 약속에 따라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공적인 이유의 약속에 따라서 자유인이 된 그를 실라는 타르페이아의 바위 위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그들은 약속한 상금이 든 지갑을 이런 자들의 목에 달아 주고는 교살해 버린다. 이것으로 제이차적인 개인에 대한 신의를 지켜 준 다음, 제일차적인 일반적 신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명예롭지 못한 정도로 그만큼 유용한 직책 877∼878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를 어떤 악덕스런 행동에 이용하고 나서, 그 다음엔 마치 양심적인 보상과 장난을 행하듯, 아주 얌전하게 선심과 정의의 행위를 거기에 결부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뿐더러 그들은 이런 끔찍한 범죄를 맡아 행하는 자들을, 자기들을 향해 문책하는 자로 보고 있다. 그들을 죽임으로써 이러한 일처리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고, 그 증거까지 인멸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그대가 타기해야 할 극한의 방법으로 공공의 이익을 도모해 준 공로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대에게 상을 준다 해도, 그렇게 해 주는 자는 그 자신이 그런 인물이 아니라면 그대를 타기해야 할 저주받은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며, 그는 그대에게서 배신을 당한 당사자보다도 더 그대를 배신자로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인도 반박도 할 수 없는 그대가 실천한 행위에서 그대의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를 잡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마치 누가 '높은 정의의 집행자'로서 사회의 한 쓰레기 같은 인간을 이용하듯, 명예롭지 못한 정도로 그만큼 유용한 직책에 ㄱ대를 부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명은 비굴할 뿐 아니라 양심의 타락이다.


2. 후회에 대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성질도 더 느린 흔들림일 뿐이다
884


내가 묘사하는 글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해 간다 해도 그릇되게 그리지는 않는다. 세상은 영원한 움직임에 불과하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끊임없이 흔들린다. 땅이나 코카서스의 바윗돌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모두가 다 같이 흔들리며 하나하나 흔들린다. 항상 변하지 않는 성질도 더 느린 흔들림일 뿐이다.

(나의 생각)

'돌'조차 일 초에도 몇 조 번을 진동하고 있음을 지적한 앙리 베르그손의 책『창조적 진화』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 재료를 다루어 본 자는 없었다 885

작가들은 자기를 특수하고 외부적인 표징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나는 맨 먼저 미셸 드 몽테뉴로서의 내 보편적 존재인 나를 전해 주는 것이지, 문법학자나 시인이나 법률가로서의 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내가 너무 내 말을 많이 한다고 꾸짖는다면, 나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은 것을 불평하겠다. 그러나 행동 습관이 이렇게 다른데도 나를 널리 알려 준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 세상에서는 모양을 내고 기교를 부리는 일이 신용을 얻고 권위를 가지는 터에, 나 같은 생소하고 단순한 본성, 그것도 아직 극히 허약한 내 본성의 소산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학문도 기교도 없이 책을 짓는다는 것은 돌 없이 담을 쌓거나, 그와 비슷한 수작을 하는 길이 아닐까? 음악가의 환상은 예술에 의해서 지도된다. 내 망상은 운으로 지도된다. 적어도 나는 내가 원하여 행하는 일에 관해서는, 세상에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 재료를 다루어 본 자는 없었으며, 이 제재에 관해서 나는 어느 누구도 못 당할 만한 학자이며, 둘째로 어느 누구도 나만큼 자기 재료에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 보지 못했고, 더 특수한 그런 부분들도 없다는 것이 내 나름으로 얻은 바이다.

이 목적을 완수하려고 나는 충실성밖에 가져 볼 거리가 없다. 충실성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성실하고 순수한 것으로 있다. 나는 진실을 말한다. 그것은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지는 못하지만, 감히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말한다. 그리고 늙어 가며 좀더 과감해진다. 나는 작가와 그의 작품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를 자주 보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악의 886


악의는 그 자체의 독을 대부분 들이마시고 제 독에 중독된다. 악덕은 몸의 종기와 같이 영혼에 후회를 남긴다. 이 후회는 항상 제 상처를 긁어서 피를 흘린다.


지난날의 악덕 887

남이 칭찬해 주는 것이 도덕적 행동의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근거가 불확실하고 어지럽다. 특히 지금처럼 부패하고 무지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좋게 보아 주는 것이 도리어 모욕이 된다. 누구의 말을 믿고 칭찬할 만한 일을 볼 줄 안다고 할 것인가? 내가 날마다 보는 것처럼, 각자가 이것이 명예스런 일이라고 자기를 추어올려서 말하는 식의 착한 사람이 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날의 악덕은 오늘날에는 풍습이 되었다."(세네카)

 

우리 따위 887∼888

우리의 개인 생활을 자신에게밖에 보여 줄 데가 없이 살고 있는 우리 따위는, 주로 우리들의 행동을 검열하기 위해서 우리들 속에 모범을 세우고, 그것으로 행동을 심사하며, 거기에 따라서 우리를 칭찬하기도 하고 정제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 888

나는 나를 판결하기 위해서 내 법률과 재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데보다도 거기에 호소한다. 나는 남의 의견을 잘 따라서 내 행동을 억제한다. 그러나 내 의견에 의해서밖에는 행동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믿음직하고 착실한지 신앙이 깊은지, 아는 것은 그대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결에 매이지 마라. 그대 자신의 판결에 매여라. "그대가 자신에게 하는 판단을 그대는 사용해야 한다."(키케로) - "양심이 자신에게 해 주는 악덕과 도덕의 증명은 한층 더 막중하다. 이것을 제거한다면 전부가 와해된다."(키케로)

 


후회 888

후회는 우리 의지를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를 아무 데로나 되는 대로 끌고 돌아다니는 미친 생각에 대한 반대 심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자에게 지난 날의 도덕과 순결성을 부정하게 한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888∼889

자기의 개인 생활에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훌륭한 인생에서 보는 일이다.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줄리우스 드루수스가 장인(匠人)들에게 한 말은 점잖은 말이었다. 장인들이 그에게 3천 에퀴만 내면 그의 집을 전과 같이 이웃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6천 에퀴를 주겠으니, 누그든 어느 기둥이나 주춧돌을 들여다보아도 좋게 만들어 놓으라."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알렉산드로스 VS 소크라테스 890


개인은 관직에 있는 자들보다도 더 힘들고 고매한 도덕을 섬긴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리는 양심보다도 명예욕으로 영예로운 자리에 채비하고 나선다. 영광에 도달하는 가장 가까운 길은 우리가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을 양심으로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활동 무대에서 보여 준 덕성은, 소크라테스가 그 변변찮고 희미한 행동에서 보여 준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드는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소크라테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자리에 있었다면 훌륭히 해 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소크라테스가 한 일을 해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전자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 보면, 그는 '세상을 정복하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후자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면, 그는 '타고난 조건에 맞게 인생을 살아가기'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보다 더 일반적이며, 더 중하고 정당한 지식이다. 심령의 가치는 높이 올라가는 데에 있지 않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데에 있다.


사람의 마음은 결코 변경되고 극복되지 않는다 891

타고난 경향은 교육의 도움을 받아서 강화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결코 변경되고 극복되지 않는다.

야수들은 숲 속의 습관을 잃고 포로 생활에 젖어
위협하는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지배가 습관화되어도
만일 한 방울의 붉은 피가 그들의 타오르는 입술에 닿기만 하면,
광분과 용맹성이 되살아나와 피의 단맛에
코끝이 벌려져 살기가 끓어오른다.
이런 광분은 무서워 떠는 주인을 발기발기 찢지 않고는
참기 어려운 일이다.                                           (루카누스)


고유한 형체 892


우리의 경험에 본성이 어떻게 비치는가를 좀 보라. 자기 말을 들어 보고, 자기가 받은 교육에 대항해서, 마음에 반대되는 격정의 폭풍에 대항해서 싸우는 고유한 형체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 나로 말하면, 무슨 충격으로 마음이 뒤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다. 나는 몸이 무겁고 묵직한 사람들이 하듯, 거의 늘 내 자리에 있다. 자리에 있지 않는다 해도, 나는 늘 가까이에 있다. 나는 방자하게 놀아도 심하게 탈선하지는 않는다. 아주 극단적인 것이나 괴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적으나마 나는 건전하고 힘찬 회복력을 갖는다.


비로소 잠 깨어 생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조건들 895

인간의 본성에는 드러나지 않게 잠겨 있고, 때로는 그 사람 자신도 모르며, 어느 사정에 부닥쳐서 비로소 잠 깨어 생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조건들이 있다. 내 예지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예측하지 못했다고 해서 불평하지는 않는다. 이 예지의 책임은 그 능력의 한도 안에 있다. 사건이 나를 억누른다. 사건이 내가 거절한 편을 든다고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내 탓이 아닌 운을 비난한다. 그것은 후회라고 부를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일은 우주의 큰 흐름 속에 있다 896

모든 일이 지나간 다음에는 그것이 어떻게 되었건 나는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일이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고 생각하면서 번민할 것을 면한다. 즉, 일은 우주의 큰 흐름 속에 있으며, 스토아 학파가 말하는 원인들의 연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대의 사상은 과거나 미래를 통틀어, 모든 사물들의 질서가 뒤집혀지지 않고는, 소원으로나 사상으로나 그 속의 점 하나라도 움직여 놓을 수 없다.


나이 탓 897

나는 나이 탓으로 일어나는 우발적인 후회감을 혐오한다. 옛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나이 탓으로 탐락에 끌릴 필요도 없어졌다고 고마워하던 사고방식은 내 의견과는 다르다. 나는 결코 나이 때문에 좋은 일을 누릴 수 없음을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약점까지도 최선의 사물들의 열(列)에 배치되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의 뜻은 그 피조물에 적대적이 아니다."(퀸틸리아누스) 우리의 정욕도 노년기에는 희박해진다. 끝난 다음에는 심한 포만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그 점에서 양심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침울과 허약은 우리에게 류머티즘에 걸린 비굴한 덕성밖에는 남겨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판단력을 변질시킬 정도로 자연적인 변화(늙음)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지금 힘주어서 이성을 조심스레 진작시키고 있는 나는, 이제 늙어 가며 약화하여 못 쓰게 된 것이 아니라면, 내 이성은 더 방자하던 시절과 같은 상태로 있다고 본다. 신체의 건강에 해로울까를 고려해서 이성이 나를 이 탐락의 도가니 속에 집어넣기를 거절하는 것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정신 건강을 위해도 그런 짓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성이 전투력을 잃었다고 해서 더 용감해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의 유혹받은 마음은, 너무 시달리고 부서졌기 때문에 이성으로 대항할 거리가 못 된다. 나는 오히려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이런 유혹을 간청할 뿐이다. 누가 그 옛날의 색욕을 내 이성 앞에 내어 준다면, 나는 이 이성이 옛날에 가졌던 만큼 거기 저항할 힘을 갖지 못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나는 이성이 그때 판단하던 것을 벗어나서 달리 판단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그것이 어떤 새로운 광명을 얻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 때문에 거기에 무슨 회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나빠지게 된 회복이다.

(나의 생각)

'옛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은 아마도 소포클레스의 대답을 두고 한 말이지 싶다.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키케로, 『노년에 대하여』 中에서




나는 내 계절의 풀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898

내 육체 상태의 경과가 모든 일을 그 계절에 맞추어 이끌어갔다는 것은, 내가 운명에게 고맙게 여기는 중요한 사항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내 계절의 풀과 꽃과 열매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말라가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어 온 노릇이니 다행한 일이다. 나의 질병들은 모두 제철에 왔으며, 그들은 지난 날의 오랜 행복을 더 쉽게 회상시키는 만큼, 이 불행들을 더 수월하게 참아 넘긴다.


노년의 주름살 899

우리의 심령은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더 번거로운 폐단, 불완전과 질병에 매이기 쉬운 것 같다. 어리석고 노쇠한 자존심과 진력이 나는 잔소리, 사귈 수 없는 가시 돋친 성미, 미신, 그리고 사용할 기회도 없는데 재간에 관한 꼴같잖은 걱정 따위 말고도 더 많은 시기심과 부정과 악의를 발견한다. 노년은 우리의 이마보다도 정신에 더 주름살을 붙여 준다. 그리고 늙어 가며 시어지고 곰팡내 나지 않는 심령이란 없으며, 있다 해도 매우 드물다. 사람은 그 전체가 성장과 쇠퇴로 향해 간다.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 899

나는 노년기가 수많은 내 친지들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를 보았던가! 노년이란 자연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흘러드는 강력한 질병이다. 노년이 우리에게 짋어지우는 결함을 피하려면, 적어도 그 진전을 막으려면, 대단히 많은 연구와 조심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아무리 몸을 아껴도 이 노년이 한걸음 한걸음 나를 이겨감을 느낀다. 나는 힘 닿는 대로 버티어 볼 뿐이다.


3. 세가지 사귐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 vs 사는 것 900


우리는 자기 성격과 기질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주요 능력은 여러 가지 일을 판단할 줄 아는 일이다. 필요에 몰려서 한 가지 길에 매여 지내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은 아니다. 가장 훌륭한 심령들은 가장 변화가 많고 적응력이 있는 심령들이다.

내 식으로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 내게 달린 일이라고 한다면, 내가 한 조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있게 거기에 매여 지내기를 원할 정도로 좋은 방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인생은 고르지 못하고 불규칙하고, 여러 가지 형태인 움직임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좇으며, 너무 자기 경향에만 매여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비틀어 보지도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친구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주인 노릇은 더 못 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자신의 노예가 되는 일이다.


독서는 판단력을 일하게 하는 데 쓰인다 901

심령의 됨새에 따라서 자기 사상을 다루는 일보다 더 약한 일도 더 강한 일도 없다. 위대한 인물들은 이것을 천직으로 삼는다. "그들의 삶은 사색함이다."(키케로) 그런 만큼 자연은 심령에게 우리가 이보다 더 오래 할 수 있는 것도, 이보다 더 심상하고 손쉽게 몰두할 수 있는 행동도 없도록 하는 특권을 베풀어 주었다. "이것은 신들의 직무이며, 거기서 동시에 신들의 복지와 아울러 우리의 복지가 나온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였다. 독서는 특히 여러 가지 소재로 내 사색을 잠 깨우며, 기억력이 아니라 판단력을 일하게 하는 데 쓰인다.

그러므로 김 빠지고 노력이 없는 대화는 내 주의를 멈추는 일이 드물다.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중후함과 심오함만큼, 또는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채우며 사로잡는 게 진실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교제에서 내 마음은 잠들며, 거기에 내 주의력의 껍데기밖에 빌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힘빠진 비굴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는 어린아이가 하기에도 유치한 꼴사나운 군말이나 천치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든가, 또는 더 서투르고 무례한 수작으로 고집하며 곧잘 침묵을 지킨다.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902

가장 좋은 직무는 강제가 가장 적은 직무이다. 예지가 자기 힘에 맞춰서 욕망을 조절해 주는 자들에게는 그 예지가 얼마나 좋은 일을 해 주는 것일까! 그보다 더 유용한 지식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늘 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우리 욕망을 가장 쉽고 가까운 것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멈추게 해야 한다.


사랑받는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902

나는 유약한 행동 습관에서 오는 거칠고 쓴 일은 상대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내게서 적의나 시기심 같은 것은 쉽사리 벗어 던진다. 사랑받는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미움 받지 않기로는 나만큼 기회를 얻은 자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사람과의 교제에 냉담하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잃었고, 그 사람들이 나의 이러한 태도를 나쁜 의미로 해석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힘과 꾀는 따로 간직해 두라 904


그대와 함께 있는 자들의 수준으로 몸을 좀 낮춰서 때로는 무식한 체도 해야 한다. 힘과 꾀는 따로 간직해 두라. 보통의 만남에는 거기에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들이 좋아하거든 그 동안 땅을 기어라.

학자들은 흔히 이 돌에 잘 채인다. 그들은 항상 학자 투를 뽐내며 책에서 얻은 지식을 사방에다 뿌리고 다닌다. 요즈음 그들은 이런 것을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방과 귀에 너무 심하게 쏟아 넣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그 실질은 파악하지 못했을망정 적으나마 그런 인상을 풍긴다. 모든 종류의 제목과 재료에, 그녀들은 아무리 변변찮고 평범한 일이라도 새롭고 박식한 말투와 문장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말투로 그녀들은 무서움과
분노, 기쁨, 걱정, 마음의 비밀 모두를 쏟아 놓는다.
이 밖에 또 무엇을?
그녀들은 사랑의 고백까지도 박식하게 한다.                                                                           (주베날리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증언해 줄 사물들을 가지고, 구태여 플라톤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인용해서 말한다. 그녀들의 심령 속에 들어가지 못한 학설은 그녀들의 혀끝에 머물러 있다.


점잖은 여인들이 내 말을 믿는다면 904∼905


점잖은 여인들이 내 말을 믿는다면, 그녀들은 그 고유의 자연스런 보배들을 빛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은 밖에서 들여온 미(美)로 자기들의 미를 덮어 감춘다. 빌려 온 광채로 빛나기 위해서 자기의 광채를 없애는 일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그녀들은 기교 속에 덮여서 묻혀 있다.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얼굴이다."(세네카) 그것은 그녀들이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녀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녀들이 기술에 영광을 주며, 백분으로 분칠해 주는 것이다. 그녀들은 사랑받고 숭배받고 살아가는 것 외에 무엇이 또 필요할까? 그녀들은 그런 것을 너무 많이 가졌고,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녀들에게 있는 소질들을 잠 깨워 일으켜 주는 것밖에 다른 필요가 없다. 그녀들이 수사학이나 법학이나 논리학이나 이와 비슷한, 그녀들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 헛된 처방전에 매여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것을 충고하고 있는 남자들이 이런 핑계로 여자들을 지배할 권한을 가지려고 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진다. 과연 거기에 다른 변명이 있을 것인가? 그녀들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우아한 눈을 유쾌하고 엄격하게 또는 상냥하게 굴리며, 거절할 때도 쌀쌀하고 은근하게, 그리고 호의를 지닌 눈초리를 곁들여 줄 줄 알면 충분하고, 그녀들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말에 통역을 붙여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지식만 가지면, 그녀들은 회초리를 손에 든 것이고, 선생들과 학교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남자에게 무엇이건 양보하기가 싫고 호기심으로 서적 등과 사귀고 싶어진다면, 시는 그 필요에 맞는 취미이다. 그것은 여자와 같이 촐랑이고 미묘하고 장식적인 말재간이며, 재미 있고 화려한 예술이다. 역사에서도 역시 여러 가지 편익을 얻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인생에 소용되는 면에서, 남자들의 심경과 조건을 판단하고 남자들의 배반에서 몸을 지키며, 자신의 벅찬 정욕을 조절하고, 그녀들의 자유를 아끼고, 인생의 쾌락을 누리며, 하인의 하는 일이 믿음성이 없다든다, 남편이 혹독하게 대한다든가, 나이 들어 주름살이 잡히는 걱정 등등, 이와 같은 일들을 인간적으로 참아 내게 하는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자들에게 학문에 관해서 지정해 주고 싶은 부문들이다.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 905∼906

사람들 중에는 은둔적이고 내향적인 특수한 성질도 있다. 나의 본질적인 형태는 나를 표현하고 사람과 교제하는 데 적합하다. 나는 천성이 사교와 우정을 즐기며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보여 준다. 나는 외롭고 쓸쓸함을 즐기고 권유하지만, 그것은 주로 내 심정과 사상을 자신에게 끌어오는 데 그치며, 내 생활이 아니라 욕망과 근심을 제한하여 압축하기 위함이며, 외부의 일이 되어 가는 형세로 외로워지는 것도 단념하고, 굴종과 부담을 극도로 피하기 때문이며, 사람이 많은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내 사는 자리가 외롭고 쓸쓸한 것은, 진실을 말하면 오히려 나를 뻗쳐서 밖으로 키워 준다. 나는 혼자 있을 때에 더 즐겨서 국가와 우주의 일에 열중한다.


내가 친분을 가지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들 906

내가 친분을 가지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들은 점잖고 재능이 있다고 알려진 위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다른 자들은 싫증이 난다.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은 우리 중의 가장 희귀한 전형이며, 주로 본성에서 받아 온 전형이다. 이 교제의 목적은 단지 친분과 우의와 이야기 친구를 갖는 것이다. 즉, 심령의 단련일 뿐이고, 다른 성과는 없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무슨 제목이든지 똑같다. 무게나 깊이가 없어도 상관없다. 거기에는 늘 아담한 풍치와 온당성이 있다. 모든 것이 거기서는 성숙한 지조 있는 판단으로 물들어 있고, 호의와 솔직성, 쾌활미와 우정이 섞여 있다.



여자들과 교제하는 것 907∼908

예쁘고 우아한 여자들과 교제하는 것도 내게는 포근한 재미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그 점에 박식한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키케로) 그렇다. 심령은 이 점에는 먼젓것만큼 누릴 거리를 갖지 못한다 해도, 이 편에 더 많이 참여하는 육체적 감각은, 내 생각으로는 그 비중이 서로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여자와의 교제는 전자에 가까운 정도의 무게를 준다. 하나 이 방면의 교제에는 미리 경계하며 다가서야 한다. 특히 나와 같이 육체 생활의 비중이 큰 자에게는 그렇다. 나는 젊었을 적에 시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의 절도없이 무비판적으로 끌려가는 자들이 당한다는 식으로, 이런 일에 뜨거운 거동을 보고, 모든 광분의 고통을 겪었다. 이 호된 매를 맞은 것이 다음에 내게 교훈이 된 것은 사실이다.

아르고의 함선을 타고
카팔레아의 암초를 피해 온 자는 누구든지,
항상 에우보이아의 수로(水路)에서 이물을 돌린다.                                                    (오비디우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거기에 매어 두고 무분별하고 맹렬한 정열로 덤벼드는 것은 철부지 같은 짓이다.


연극배우처럼 908


그러나 한편에는 사랑도 책임감도 없이, 연극배우처럼 풍습과 나이가 모두 하는 버릇이라고 거기에 달려들며, 말로만 하고 마음을 주지 않는 일은 사실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지마는, 그 비굴한 꼴은 마치 위험이 무서워서 명예도 이익도 쾌락도 버리는 식이다. 이러한 교제를 실천하는 자는 아름다운 심령을 감동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아무런 성과도 바랄 수 없다. 진심으로 누려 보았으면 하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야만 한다. 운이 부당하게 그들 가면의 사랑을 유리하게 꾸며 준 때에도 말이다. 이런 일은 여자들이 아무리 팔자를 잘못 타고 났다고 해도, 자기가 아주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자기 나이로나 그 웃는 모습으로나 그 동작으로,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여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주 일어나는 일이니 하는 말이다. 전반적으로 예쁜 여자가 없듯이 전체가 못생긴 여자도 없다. 그래서 브라만 교도의 처녀들은 다른 장점이 없으면 장터로 나가서 이런 취지로 소리질러 광고해서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에 여자의 부분을 들춰 보이는데,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남편을 얻을 값어지차 있나 없나를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믿음직하고 착실하게 섬기겠다고 하는 첫번 맹세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 여자는 없다. 그런데 오늘날 남자들이 여자를 예사로 배반하는 결과에서, 여자들은 남자를 피하려고 서로 단결해서 스스로 뒤로 물러서거나 자기들끼리 놀게 되었다. 또는 어느 때는 우리가 보여 주는 본을 떠서 그녀들도 연극을 꾸미면서 정열도 생각도 사랑도 없이 교제해 온다. "자기에게서 오건, 타인에게서 오건, 정열에 무감각하며"(타키투스), 플라톤에 나오는 리시아스가 설복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여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을수록 그만큼 그녀들은 우리에게 유리하고 편리하게 몸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연극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연극 배우들만큼의, 또는 더 많은 재미를 볼 것이다.

나로 말하면 어린애 없는 모성애를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큐피드 없는 비너스를 생각해 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본질을 서로 빌려 주고 서로 부채를 지고 하는 사물들이다. 그러므로 이 속임수는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다시 되돌아온다. 그에게 부담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대신 그는 쓸모 있는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한다. 비너스를 여신으로 만든 자들은 그녀의 미(美)를 비육체적이며 정신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이 찾는 여자는 인간적인 것도 아닐 뿐더라 짐승과 같은 욕정을 지닌 것도 아니다. 짐승들도 그렇게 둔중하고 속된 것은 원치 않는다. 짐승들은 무리 속에서 이성(異性) 간에 그들의 애정에 쓸 것을 쓰고 버릴 것은 버리며, 그들 사이에 오랜 호의의 교분 있는 것을 본다.

늙어서 체력이 다한 놈들도 아직도 몸을 치떨며 사랑으로 이히잉거리며 울부짖고 전율한다. 우리는 이 짐승들이 일에 앞서 희망과 열성으로 충만함을 본다. 그리고 육체가 할 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 추억의 달콤한 맛에 취하며, 거기서부터 의기양양해서 뽐내며, 피로하고 포만하면서도 경축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 대는 것을 본다. 신체를 생리적 욕구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밖에 없는 자는 그렇게 복잡한 마음씨를 준비하여 남에게 바쁘게 굴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무례하고 수준 낮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음식은 아니다.


책과의 교제는 훨씬 더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차지이다 910

 

······ 이 두 가지(우정과 사랑) 교제는 우연적이며 다른 자에 매여 있다. 하나는 얻기가 드문 것이 흠이고, 또 하나는 나이와 더불어 시들어 버린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내 인생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지 못하였다. 세 번째 것으로서 책과의 교제는 훨씬 더 확실하며 더 한층 우리의 차지이다. 이것은 다른 장점에서는 먼저 것들만 못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 몫으로 언제나 꾸준하며, 그 봉사를 얻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것은 언제나 내가 가는 곳에 있으며 어디서나 나를 도와 준다. 그것은 노년기에, 그리고 외롭고 쓸쓸함 속에서 나를 위로해 준다. 그것은 내가 한가로울 때 권태의 무게를 덜어 준다. 그리고 어느 시간에라도 내게서 귀찮은 동무들을 떼어 준다. 또 내 번민이 극도로 심하지 않을 때에는 고통을 덜어 준다. 불쾌한 생각을 덜어 보려면 책의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된다. 책은 쉽사리 그런 생각을 흩어 주며 빼앗아 간다. 그렇지만 서적들은 그보다 더 실제적이고 생생한 자연의 쾌락인 이런 다른 편익을 얻지 못하는 때에만 그들을 찾는 것을 보고도 불평을 하지 않고 늘 같은 얼굴로 나를 맞이해 준다.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910∼911

 

병자는 그 치유 방법을 손에 쥐고 있는 경우, 가련하게 생각해 줄 필요가 없다. 내가 서적들에서 끌어내는 모든 성과는 이런 어구의 실천과 적용으로 되어 있다. 사실 나는 책을 모르는 자들만큼이나 책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구두쇠들이 보물을 가지고 즐기듯, 책을 가지고 즐긴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그것을 즐길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이것을 소유하는 권리에 포만하도록 만족을 느낀다. 




내가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  911

 

나는 평화시나 전시나 책 없이는 여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며칠이건 몇 달이건 책을 들추어 보지 않고 보내는 수도 있다. "조금 있다가 하거나 내일 하거나 아무 때라도 생각날 때에 하지" 하고 나는 말한다. 세월은 달음질쳐 흘러간다. 그렇다고 그 동안에 마음이 상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책이 내 옆에 있으며, 내가 읽고 싶은 시간에 언제든지 쾌락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내 마음이 안심하여 가벼워지며, 얼마나 이 책들이 내게 도움을 주는가를 이루 다 인정하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인생 행로에 갖추고 있는 최상의 장비이다. 그리고 이해력 있는 사람으로 이런 준비가 없는 자들을 지극히 가련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것만은 내게 결핍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오락은 아무리 변변찮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911∼912


집에 있을 때에는 나는 좀더 자주 서재에 들며, 거기서 집안일도 손쉽게 보살펴 간다. 나는 입구에 자리잡고, 내 아레에 정원과 양계장, 안마당 그리고 내 집안의 대부분을 내려다본다. 거기서 나는 이때에는 이 책, 저때에는 저 책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들춰 보며, 때로는 몽상도 하고 때로는 이리저리 거닐면서, 여기에 보듯이 내 생각하는 바를 불러 주며 적어 가게도 한다.


서재는 탑의 4층에 있다. 2층은 나의 예배실이고, 3층은 거처하는 방과 그 부속실이며, 혼자 있고 싶은 때에는 거기서 자는 일이 많다. 위에는 커다란 의장실이 있다. 그것은 지난날 내 집에서는 가장 쓸모없는 곳이었다. 나는 이 서재에서 내 생애의 대부분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밤에는 결코 거기에 있는 일이 없다.
 
······ 이 탑은 삼면으로 풍부하고 끝없는 조망이 내다보이며 실내에는 직경 16보의 공간이 있다.

겨울에는 나는 줄곧 거기 있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이름이 말하듯 언덕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여기보다 더 바람 타는 곳도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떨어진 곳이라 찾아오기도 힘들어서 사람들의 소란도 물리쳐 주고 글을 읽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여기가 내 자리이다. 나는 이 장소를 내 지배하에 두고, 이 구석 하나만은 아내이건 자식이건 일반 사람들이건 공동 생활에서 구애받지 않고 간직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나는 모두 본질상으로 확실치 못한 명목상의 권위밖에 갖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며 자기대로 있을 곳도, 자기만의 궁전을 차릴 곳도, 몸을 감출 곳도 없는 자들은 내 생각으로는 아주 가련한 신세들인 것 같다!

 


큰 재산 912

"큰 재산이란 큰 노예 생활이다."(세네카) 그들은 물러나 들어앉을 편안한 자리 하나 없다.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912∼913


나는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그리고 좀 말하기가 거북하지만 나를 위해서만 살아간다. 내 의도는 거기서 그친다. 나는 젊어서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다음에는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였다. 지금 이 시간에는 재미로 한다. 결코 소득을 위해서 한 일은 없다. 이런 종류의 가구(책을 말함)를 가지고 내 필요에 충당할 뿐 아니라, 서너 걸음 더 나가서 나를 덮어 치장하려던 낭비적인 헛된 심정은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책은 그것을 택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많은 유쾌한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좋은 일로 수고가 들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것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순수한 쾌락은 아니다. 거기에도 상당히 힘든 그 자체의 불편이 있다. 심령은 거기서 훈련받는다. 그러나(그것도 나는 보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신체는 그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머무르며 힘빠지고 우울해진다. 나는 이렇게 노쇠해 가는 나이에 이것을 과도하게 하는 것보다 더 내게 해롭고 피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내가 총애하는 내 개인의 세 가지 직무이다. 나는 국민의 의무로 세상에 대해서 부담하는 직무를 말하지 않는다.




4. 기분 전환에 대하여


여자들의 비탄 914

여자들의 비탄은 그 반대로, 거들어 주고 권장해 주며 그것이 어느 점에서 지당한 일이라고 증명해 주고 변명해 주어야 한다.


자주 장소를 옮겨서 요양시켜야 한다 916

의사들은 카타르(염증)를 씻어 낼 수 없을 때에는 그 방향을 전환시켜서, 위험이 적은 다른 부분으로 돌려 놓는다. 나는 이것이 심령의 질병에도 무난한 치료법이라고 본다. "때로는 정신을 다른 취미·생각으로 전환시킬 필요도 있다. 결국 정신은 기력을 차리지 못하는 병자와도 같이 자주 장소를 옮겨서 요양시켜야 한다."(키케로) 정신의 고통에는 직접 충격을 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 상처는 부추기거나 꺽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기율여서 세력이 빗나가게 한다.


가장 심한 고난에 대한 위안이며 진정제 918

크세노폰은 화관을 쓰고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아들 그릴로스가 만티네아의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이 소식을 들은 첫 충격으로 화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대단히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화관을 다시 집어서 머리에 썼다.

에피쿠로스도 역시 그의 종말에는 자기 문장의 영원성과 유용성에 위안을 느꼈다. "영예와 명성이 수반하는 모든 노고는 견디기가 수월하다."(키케로) 똑같은 상처이며 똑같이 처지가 어렵고 힘들더라도, 군대의 장수는 병사만큼 그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크세노폰은 말하였다. 에파미논다스는 승리가 자기 편으로 넘어 왔다는 소식을 받고,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어 갔다. "이것이 진실로 가장 심한 고난에 대한 위안이며 진정제이다."(키케로) 그리고 이러한 사정들 때문에 사물 자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빗나가며 헷갈려진다.


우리 정열의 고민을 고쳐 주는 가장 좋은 치료법 920

어떤 괴로운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는 그것을 억제하기보다는 바꾸는 편이 간단하다고 본다. 그 반대의 일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다른 것을 거기에 바꿔 넣는다. 언제든지 변화는 덜어 주고 풀어 주고 흩어 준다. 싸워서 그것을 이길 수 없으면, 나는 빠져 나가며 그것을 피하려고 비켜 선다. 나는 계략을 쓴다. 장소와 일과 친구를 바꾸고 다른 직무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달아난다. 그러면 그 속에 휩쓸려서, 나는 그만 내 자취를 잃는다.

본성은 이렇게 절개와 지조 없이 혜택을 입으며 진척한다. 본성은 우리 정열의 고민을 고쳐 주는 가장 좋은 치료법으로 우리에게 세월을 주었다. 세월은 주로 우리가 생각할 거리로 다른 일을 연달아 대어 주어서, 처음 우리를 사로잡은 심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것을 풀어서 흩어 버리며 삭여 버린다.


가짜 애인 때문에 921

나는 여자들이 사람들의 평판과 추측을 전환시키고 쑥덕공론을 빗나가게 할 목적으로, 가짜 연애를 꾸며서 진짜를 숨기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떤 여자가 이렇게 꾸며 보다가 정통으로 걸려서 가짜 애인 때문에 진짜 애인을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자기가 진짜라고 안심하며 이런 가짜 수작을 묵인하는 것은 바보짓임을 이 여자로 인해 알았다. 사람들 앞에 터놓고 응수하며 이야기하는 역할이 이 꾸며 댄 심부름꾼에게 맡겨졌을 때에, 결국 그 자가 그대 자리를 빼앗고 그대를 자기 자리로 밀어내지 못한다면, 그는 약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그것은 마치 남에게 신어 달라고 구두를 재단하고 꿰매는 수작이다.


얼마나 더할 수 없이 적은 일이 922

나의 담석증은 특히 남근에 완고하게 붙어, 어느 때는 사나흘 동안이나 소변을 못 보게 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처지이니, 이런 상태에서 오는 고통이 아주 잔학하다고 그것을 피하기를 바라거나 요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수작이다. 오, 저 착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죄인들의 남근을 잡아매게 하여 소변을 못 보게 하여 죽게 했으니, 그 얼마나 잔인한 사형 집행이던가! 내 사정이 그렇게 되고 보니, 나는 얼마나 미미한 원인과 목적으로 상상력이 인생에 대한 애석감을 가꾸어 주는 것이며, 얼마나 더할 수 없이 적은 일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무겁고 힘드는 길로 만들어 주는 것이며, 이렇게도 중대한 사건에서 얼마나 변변찮은 생각에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개 한 마리, 말 한 필, 책 한 권, 유리잔 하나, 또 다른 무엇들이 내 죽음에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로 어리석게 그들의 야심에 찬 희망이나 금전·학문·지식 따위로 속을 썩이고 있다.


얼굴이 창백해진 것 923

퀸틸리아누스는 어떤 배우들이 초상당한 자의 역할에 너무 열중해서 자기 집에 가서도 울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자기도 남이 받은 마음의 충격이 자신의 것으로 느껴져서 눈물을 흘렸을 뿐 아니라, 진짜로 비탄에 잠긴 사람의 태도로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들켰던 적이 있다고 말한다.


뭐? 이유? 우리 마음을 흔드는 데는 이유가 필요없다. 924

뭐? 이유? 우리 마음을 흔드는 데는 이유가 필요없다. 형체도 명목도 없는 공상이 지배하며 뒤흔든다.

내가 공중누각을 쌓아 보면, 공상은 거기에 온갖 호화판을 꾸며 내 마음은 그것을 흡족히 느끼며 즐거워진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이런 그림자 때문에 정신이 비애와 분노로 혼미해지며, 광상적인 격정에 쏠려서 심신이 변질되는 것인가! 이런 몽상은 얼마나 우리 얼굴의 상을 비틀며, 웃음 같은 혼돈된 표정을 일게 하는 것인가! 얼마나 우리의 팔다리와 목소리를 뒤흔들며 격발시키는 것인가! 이 자는 혼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내심의 악마에게 박해당하는 헛된 환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이 변화를 일으키는 대상이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라. 도대체 대자연 속에는 무(無)로 양육되며 무의 지배를 받는 것이 우리들밖에 또 무엇이 있는가?

캄비세스 왕은 자기 동생이 페르시아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자기가 믿어 왔고 사랑하던 그를 죽여 버렸다. 메세니아의 왕 아리스토데모스는 자기 개가 짖는 소리를 나쁜 징조로 잘못 생각하고 자살하였다. 그리고 미다스 왕은 그가 꾼 불쾌한 꿈을 가지고 속을 썩이다가 똑같은 짓을 하였다. 꿈 때문에 생명을 버리다니, 그것은 생명을 바로 그 가치대로 평가한 증거다.


5.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


노령기의 상태
925∼926

노령기의 상태는 너무나 내 정신을 경계하여 타이르고 나를 사리 분별을 할 능력이 있게 만들고, 내게 설교한다. 과도한 쾌활성을 가졌던 나는 이제 반갑지 않게 지나친 근엄성에 빠져 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일부러 좀 방자하게 생각을 바꿔 본다. 그리고 때로는 경박한 젊은 생각에 마음을 쓰며, 마음만은 거기에 머문다. 나는 이제 너무 침착하고 둔중하고 노숙해졌다. 나이는 날마나 내게 냉철과 절제를 가지고 훈계한다. 이 몸은 무절제한 생활을 피하며 두려워한다. 이번에는 육체가 정신을 개선하도록 지도할 차례이다. 신체는 제 차례로 더한층 혹독하게 강압적으로 지배한다. 신체는 자나깨나 죽음과 인내와 금욕을 가르치기에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는 옛날에 탐락에 대해 하던 식으로 지금은 절제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절제는 얼떨떨해질 정도로 나를 뒤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나는 어떤 의미로서나 내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에지에도 지나침이 있어서 어리석음 못지않게 절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에서 이탈한다 927

나는 빨리 늙는 것보다는 노년이 짧은 편이 낫다.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장 조그만 쾌락의 기회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여러 가지 신중하고 강력하고 영광스런 쾌락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문 때문에 여간해서 나는 그런 욕심을 내지 못한다. 나는 이런 쾌락이 광대하고 장엄하고 호화롭기보다는, 달콤하고도 바로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것이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연에서 이탈한다. 우리는 어느 점으로도 좋은 지도자가 못 되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세네카)


전에는 긁힌 자국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 928

나는 가장 가벼운 상처도 피한다. 전에는 긁힌 자국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 지금은 나를 꿰뚫는다. 그런데도 내 버릇은 이제 어떠한 불행과도 기꺼이 사귀기 시작하다니! "허약한 신체는 가장 가벼운 부상도 견디지 못한다."(키케로)


금이 간 물건 928

금이 간 물건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깨진다.      (오비디우스)
 


재미있게 사는 것 928∼929 

나는 재미있게 사는 것밖에 다른 목적이 없으므로 쾌활하고 고요한 생활을 1년 동안 얻을 수 있다면, 세상의 저 끝까지라도 달려가 보겠다. 우울하고 우둔한 안정은 내게도 넉넉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혼미하고 완고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만족할 수 없다.

전원에나 도시에나, 프랑스이건 다른 곳이건, 가만히 있는 성미이거나 싸다니는 성미이거나, 어느 인물이나 어느 패가 있어 내 기분이 그들에게 맞고 그들 기분이 내게 맞는다면, 손바닥으로 휘파람만 불어다오. 난 그들에게 가서 살과 뼈로 내 《에세이》를 제공하련다.


건강에도 한몫을 주지 않는 것은 잘못 929

우리 스승들이 정신의 경탄할 만한 비약에 관해서 그 원인을 찾아볼 적에, 이것을 거룩한 황홀감이나 사랑이나 전투에서 맹렬히 분개함이나 시의 영감이나 술의 탓으로 돌리는 이외에 건강에도 한몫을 주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옛날에 젊음과 안정된 생활이 그 융성한 발육으로 내게 공급하던 것과 같은, 부글부글 긇고 힘차고 충만하고 한가롭던 그 건강 말이다. 이 쾌활성의 불길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타고난 역량에 넘치며, 정신을 잃은 정도는 아니나마 유쾌한 열성 속에, 맑고도 생기 있는 정신의 섬광을 일으킨다.

그러니 내 정신이 이와 반대되는 상태에 억눌리고 못박혀 지내며, 그와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거슬린다 930

자기 생각이 방자한 데에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자들은 내 문장의 방자함을 불쾌하게 느끼지 않을 것임을 나는 잘 안다. 내 글은 그들의 심정에는 잘 맞지만, 그들의 눈에는 거슬린다.


불행에만 집착하는 마음씨를 혐오한다 930

나는 음침하고 울적해서 자기 인생의 쾌락은 넘겨치우고 불행에만 집착하는 마음씨를 혐오한다. 그것은 마치 파리 떼와 같이 반반하고 매끈매끈한 물체에는 붙어 있지 못하고 더럽고 거친 곳에만 앉는 식이며, 마치 거머리가 나쁜 피만 찾아 빨아먹는 격이다.


몽테뉴의 소원 931

어떻든 나는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말하기로 작정했다. 공표할 수 없는 생각이 있다는 것까지도 불쾌하다. 내 행동이나 상태들 중의 가장 나쁜 것도, 그것을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 추하고 비굴한 일이라고 보는 정도로, 그렇게 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고백하는 데는 조심스럽다. 행동에 있어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당돌하게 실수하는 일은 그것을 당돌하게 고백하는 일로 어느 면에서 보상되고 억제된다. 모두 말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자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의무를 질 것이다. 내 지나친 방자함이 우리의 결함에서 생겨난 저 겉모양만 꾸미는 비겁한 도덕을 벗어 나서 사람들을 자유 속으로 끌어내고, 내 무절제한 행위의 부담으로 그들을 사리에 맞는 점까지 끌어 온다면,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려면 931

"어떤 악한도 자기의 악덕을 고백하지 않는 것은 웬일인가? 그것은 그가 아직도 악덕의 노예인 까닭이다.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려면, 잠에서 깨어야 한다."(세네카)


오입과 거짓말 931∼932

나는 거짓을 꾸미기에 몹시 힘이 든다.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남의 비밀을 맡아 두기를 피한다. 침묵을 지킬 수는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을 부인하기는 괴롭고 속이 상한다. 정말 비밀이 되려면 그 본성으로 그래야 되지, 의무로 그래서는 안 된다. 왕을 섬기려면, 덮쳐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고는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가 오입한 일을 엄숙하게 부인해야 할 것이냐고 밀레토스의 탈레스에게 문의했던 자가 내게도 물어 보았더라면, 나는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오입보다 더 나쁘기 때문이다. 탈레스는 아주 다르게 충고하며, 작은 잘못으로 큰 잘못을 막기 위해서 맹세하며 부인하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충고는 악덕을 골라 내는 일이 아니고 늘려 가는 것이다.


곱사등이를 보고 933

모든 일을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하는 자가, 자기의 진실한 존재는 사람들에게 감춰 두고 가면을 씌워서 보여 준다면,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곱사등이를 보고 체격이 잘생겼다고 추어올려 주어 보라. 그는 그것을 욕으로 들을 것이다. 그대가 겁보인데 사람들이 용감한 사람이라고 숭배한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일까? 그대를 딴 사람으로 본 것이다. 누가 수행원 중의 가장 변변찮은 한 병사를 장수로 잘못 알고 올리는 인사를 그가 만족하게 받는다면, 나는 그 꼴을 똑같이 귀엽게 보아 줄 것이다.

(나의 생각)
장렬하게 전사한 어느 '호위무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사람아, 그는 내게 물을 끼얹은 것이 아니야 933

마케도니아 왕 아르케실라오스가 거리를 지나는데, 누가 그에게 물을 끼얹었다. 그의 부관이 그 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이 사람아, 그는 내게 물을 끼얹은 것이 아니고, 나를 다른 누구로 오인하고 그 사람에게 끼얹은 것일세" 하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누가 그에게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자, "그 자가 말하는 것은 내게 관한 일이 아니고" 하고 말했다.


성적(性的) 행동 933∼934

성적(性的) 행동은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렇게도 자연스럽고 필요하고 정당한 일을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지 않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며, 신중하고 점잖은 어법에서 제외하는 것일까? 우리는 "죽인다, 훔친다, 배반한다"라는 말은 과감하게 입 밖에 낸다. 그런데 그 일은 입 속에서만 우물거릴 뿐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단 말인가? 우리가 그것을 말로 적게 내뱉을수록 그만큼 우리는 그 생각을 키워 갈 권리가 생긴다는 말인가?

과연 가장 덜 사용되고, 덜 적히고, 가장 잘 침묵이 지켜진 말이 가장 잘 알려지고 보편적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어느 나이에도, 어느 풍습에서도 빵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다. 이 말들은 표현도 되지 않고 소리도 없고 형태가 없어도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침묵의 권한 아래에 둔 행동이며, 그것을 비난하기 위해서라도 침묵에서 끌어내면 범죄가 된다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다.


새장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 939

우리는 결혼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혼을 천하게 다루며 살아간다. 그래서 새장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 밖에 있는 새들은 그 속에 못 들어가서 발버둥치고, 속에 갇힌 것들은 어떡해서든 밖으로 나가려고 똑같은 수작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내를 얻는 편이 좋으냐, 얻지 않는 편이 좋으냐고 누가 묻자 "둘 중에 어느 편을 취하건 사람은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인간에게 서로 신(神)이 아니면 승냥이나 이리지"(베르길리우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이 관계에 들어맞는 말이다.


이손 저손 전해져 온 아름다운 규칙 940

한번 걸려든 뒤에는 발버퉁쳐 보아도 때가 늦었다. 자기 자유는 조심스레 아껴야 한다.

그러나 한번 의무에 복종한 다음에는 공동의 책임과 법칙을 지켜야 하며, 적어도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다음에 증오와 경멸을 품고 살아갈 생각으로 이 흥정을 체결하는 자는, 부당하고 난처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마치 신성한 신탁(神託)처럼 여자들 사이에 이손 저손 전해져 온 아름다운 규칙-

상전처럼 네 남편을 섬겨라.
그리고 배신자같이 그를 경계하라.      (원전 미상의 옛 시)

이 말은 "강제되고 적대하며, 경계하는 존경심으로 그를 대하라"는 뜻이니, 전투와 도전의 외침 같아서 똑같이 부당하고 곤란한 일이다. 그러한 가시 돋친 심정을 품기에는 나는 너무 연약하다. 진실을 말하면, 내 정신은 사리와 정의롭지 못함을 혼동하고, 내 욕망에 맞지 않는 질서와 규칙을 우스개로 넘길 정도로 교묘한 민첩함과 세련된 재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사랑의 기초 942

사랑은 오로지 쾌락에만 기초를 둔다. 그리고 더 도발적이고 강렬하며 더 흥분시키는 쾌락이다. 얻기가 힘드니 더 불길이 일어나는 쾌락이다. 찌르고 지지는 맛이 필요하다. 살이 없고 불길이 없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부인들은 너무 너그러워서 결혼 생활을 후하게 해 주기 때문에, 애정과 정욕의 자극을 둔하게 만든다. 이 폐단을 피하려고 리쿠르고스와 플라톤이 법을 만들 때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보라.


하루에 여섯 번, 한 달에 세 번 942∼943

카탈로냐에서 한 여자가 자기 남편이 너무도 끈덕지게 요구한다고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서도, 내 생각으로는 그 여인이 불편을 느낀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그 여인은 결혼 생활의 기초적 행동인 이 점에서 이것을 구실로 남편들의 아내에 대한 권한을 삭감하여 억제하고, 남편의 심술궂게 행패하는 성질이 결혼의 잠자리를 넘어서 비너스의 상냥한 우아미까지도 짓밟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이 남편을 고발한 것이다.

이 소송 사건에서 그 남편은 참으로 변태적이고 짐승 같은 남자로, 그는 단식일까지도 열 번을 않고는 못 배긴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서 아라공 여왕은 회의를 열고 충분히 토의한 끝에, 정당한 결혼 생활에 요구되는 절도와 겸양의 본이 될 규칙을 모든 시대에 내어 주기 위해서 합법적이며 필요한 한도로 하루에 여섯 번을 명령하였다. 여왕은 이것으로 자기 쪽 정욕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서 완화시켜 주며, 실행하기 쉽고 따라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규칙을 세워 주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박사들은 "우리의 정욕에 관해 이렇게까지 서로 다른 판단, 그리고 법률학파의 시조 솔론이 결혼 생활에서의 동침에 실수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한 달에 세 번밖에 의무를 지우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여자들의 이성과 지혜와 도덕이 이런 비율로 제정되는 이상, 그 정욕과 음란은 얼마만한 것인가?" 하고 개탄했다. 이런 말을 믿고, 설교하고 나서 우리는 여자들에게 최후의 극형까지 과해 가며, 특별히 정조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전생은 난봉꾼 남자였다고 하는 플라톤의 말 945

여자들이 격식을 집어치우고 아무 말이나 마음대로 하게 두어 보라. 우리는 여자들에 비해서 이 학문에는 아직 어린아이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쫓아다니며 수작하는 것을 여자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들어 보라. 가르쳐 준 일이 없지만, 여자들은 모두 알고 있으며,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여자들의 전생은 난봉꾼 남자였다고 하는 플라톤의 말은 이런 뜻일까? 어느 날 내 귀는 우연히 여자들끼리 한 자리에서 거침 없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엿들었다. 왜 이런 말은 못할 것인가? "성모님, 맙소사!" 라고 나는 말했다. 자, 지금 바로 아마디스의 문장과 보카치오와 아레티노의 이야기 책을 공부해서, 좀 약아져 보자. 우리는 참 시간을 잘 이용해 오는군! 말이건, 본보기이건, 일처리이건 여자들이 우리 책보다 더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여자들의 핏줄 속에서 훈련되어 나온다.

비너스가 직접 여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베르길리우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다 이 음양의 결합으로 귀결된다 946

세상의 눈을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여자들의 본성이 이 맹렬한 본능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치스러운 꼴을 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다 이 음양의 결합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모든 곳에 배어든 동기이며, 모든 사물들이 향하는 중심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현명했던 로마에서 행한 사랑의 봉사를 위한 가르침과 소크라테스가 창녀들을 깨우쳤던 교훈을 알고 있다.

스토아 학파의 소책자들도 비단이불 위에 굴러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호라티우스)


포악한 기관 948

신들은 우리에게 말을 안 듣는 포악한 기관을 제공하였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그것은 맹수와도 같이 그 맹렬한 정욕으로 모든 것을 굴복시키려고 기도한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는 극성맞게도 탐욕스런 한 짐승이 있는데, 이 짐승은 때맞추어 먹이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늦게 주는 데 조바심이 나서, 제자리를 박차고 나와 여자들의 몸에 광증(狂症)을 불어넣고, 목구멍을 틀어막아 숨을 못 쉬게 하고, 결국 갈증나게 한 목적물을 들이마셔서 자궁 속에다 풍성하게 물을 주어 씨를 뿌려 주기까지는 가지 각색의 병폐를 일으킨다.


동정과 처녀 951

나는 동정을 지키키보다는 한평생 갑옷을 입고 있는 편이 더 쉽다고 본다. 그리고 처녀를 지키는 서약은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서약보다 더 고상하다고 본다. "마귀의 힘이 신(腎)에 있다"고 성 히에로니무스는 말한다.


승리의 대가는 겪은 고난으로 계산된다. 여자가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것 952

승리의 대가는 겪은 고난으로 계산된다. 그대의 봉사와 그대의 공로가 여자의 마음에 어떠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여자의 몸가짐에 비춰서 재어 보라. 그렇게 많이 주지 않았는데 많이 준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도 있다. 받은 혜택에 대한 의리는 전적으로 그것을 허락하여 주는 자의 의사에 관련된다. 소득이 될 다른 사정들은 말할 거리가 못 되고, 생명이 없고 우연적이다. 여자의 남자 친구가 그가 가진 경우를 여자에게 주는 것보다 여자가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것을 그에게 주기가 더 힘들다. 어떤 일의 희귀함이 가치가 된다면, 그것은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작은 일인가를 보지 말고 얻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를 보라. 돈의 가치는 그 주형과 장소의 표지에 따라서 다르다.


사랑의 증오만큼 억누를 수 없는 일은 없다 955

질투심이 이 허약하고 저항력 없는 가엾은 심령들을 사로잡을 때에, 그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이 가혹하게 끌리며 찢기는 모양은 보기에도 가련하다. 질투는 애정의 가면을 쓰고 스며든다. 그러나 이 격정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애정의 기초가 된 이유가 원수간의 증오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질환이며, 많은 사물들이 그것을 북돋아 주는 반면에 진정시켜 주는 일은 드물다. 남편의 도덕과 건강과 인격과 명성은 여자들의 증오와 광분의 불쏘시개가 된다. 


사랑의 증오만큼 억누를 수 없는 일은 없다.
      (프로페르티우스)

이 열병은 여자들이 다른 면에서 가진 아름답고 좋은 점을 모두 경직시키고 부패시킨다. 그리고 질투가 심한 여자는 아무리 정숙하고 살림을 잘해도, 그 행동 모두가 불쾌하고 어색하게 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질투는 광분한 격동 상태이며, 행동을 그 목적의 전혀 반대 방향으로 몰아넣는다. 로마의 옥타비우스는 재미있는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폰티아포스투미아와 자고 난 다음, 그 쾌감에 애정이 더욱 솟구쳐서 결혼하자고 끈덕지게 졸라대다가 끝내 여자를 설복할 수가 없자, 이 극도의 사랑은 그를 가장 잔학하고 치명적인 적의로 몰아넣었다. 그는 이 여자를 죽인 것이다.


상대할 여자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956

여자들은 여성인 이상, 음욕과 정욕을 억제하기란 정숙한 여자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여자들의 의지만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어찌될 것인가? 만일 한 남자가 날개가 돋아서 새처럼 날아다니며, 눈이 없어 보지 않고, 혀가 없어 말을 않으며, 그를 맞아 줄 여자 하나하나의 품에 들어갈 특권을 가진다면, 상대할 여자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여자들의 공상을 억누를 수 없다면, 달리 무엇을 구속할 수 있을 것인가? 행동을? 사람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행위를 얼마든지 하고 있으니, 그런 것으로 순진성은 얼마든지 타락될 수 있다.

여자는 곧잘 증인 없는 일을 한다.    (마르티알리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아마도 가장 위험한 인물일 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없는 죄악이 가장 악질적이다.


이놈아. 내가 마에케나스를 위해서만 잠들고 있는 것을 못 보느냐? 959

그러나 이런 곳에서 밝혀도 좋을 더 속된 예로는, 오로지 자기 남편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시키는 명령과 중매로 자기 몸을 빌려 주는 여자들을 우리는 날마다 보지 않는가? 옛날에 아르고스 사람 파울리오스는 야심을 품고 자기 아내를 필리포스 왕에게 제공하였고, 마찬가지로 갈바는 마에케나스를 식사에 초대했을 때에, 자기 아내와 그가 곁눈질하며 수작하는 것을 보고 잠이 와서 못 견디는 체하고 방석 위에 쓰러져 그들이 일을 수월하게 치를 수 있도록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을 기분좋게 고백하고 있다. 마침 이때에 하인이 들어와서 당돌하게도 탁자 위의 음식에 손을 대는 것을 보고, 그는 "이놈아. 내가 마에케나스를 위해서만 잠들고 있는 것을 못 보느냐?" 하며 소리쳤다.


여자란 지혜롭다 960

자기 재간으로 여자들을 묶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단 말인가?

자물쇠로 잠가 두라, 감금하라, 문지기를 두어 보라.
그러나 문지기는 누가 감시하지?
여자란 지혜롭다.
여자들은 문지기부터 손을 댄다.     (주베날리스)


호기심은 어디서나 악덕스럽다 960

호기심은 어디서나 악덕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는 해독을 끼친다. 처방전을 써 보아도 더 악화시키고 더 키워가기밖에는 못할 질병의 속을 밝혀 보려고 하는 것은 미친 수작이다. 그 불행의 수치는 주로 질투 때문에 더욱 불어가며 세상에 알려진다. 여기에 대해서 복수해 보아도 우리 마음을 덜어 주기보다는 우리 자녀들에게 해를 끼친다. 그대는 속을 알 수 없는 일을 밝히려다가 바싹 말라 죽어 갈 것이다.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 960∼961

사실을 밝혀 주는 자가 동시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방법과 도움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알려 주는 일이 큰 해독이며, 사실을 밝힌 공로보다도 더 마땅히 칼을 맞을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자와 마찬가지로 애써 가며 사실에 대비하는 자를 비웃는다. 마누라를 새치기당한 수치는 지워질 수 없다. 한번 걸리면 영원히 걸린 것이다. 그것에 징벌을 주면 잘못한 일 자체보다도 더 사실을 드러내 놓게 되는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의문을 풀어서 우리들의 개인적인 불행을 드러내고 비극의 무대 위에 나발을 불어 대면 보기 좋은 꼴이다. 그것은 알려짐으로써 더 꼬집히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착한 아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은, 그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괴롭고도 쓸모없는 지식은 피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여행에서 돌아올 때에는 먼저 집에 사람을 보내서 아내에게 자기의 도착을 알려 주며 엉겁결에 들이닥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961

"그러나 세상은 떠든다." 나는 점잖게 그리 꼴 흉할 것 없이 아내에게 속고 있는 사람 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활달한 대장부는 그 때문에 동정을 받아도 경멸은 받지 않는다. 그대의 인격이 불행을 틀어막게 하라. 점잖은 사람이라면 그런 사정을 저주하게 하라. 그대를 모독한 자는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게 하라. 그리고 천한 자, 귀한 자 할 것 없이 이런 의미에서 소문나지 않은 자인가?

수많은 군대를 지휘한 장군까지도 ······
모든 점에서 너보다 나은 자들도 그렇다, 이 못난아.    (루크레티우스)

그대 앞에 하고많은 점잖은 인물들이 어런 책망에 걸려 드는 것을 보는가? 다른 데서는 그대 일도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라. "아마 부인들까지도 그대 일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여자들은 금실 좋고 평화로운 결혼 생활 말고, 다른 무엇을 조롱하기를 더 즐기는가? 그대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마누라를 건드렸다. 그런데 본성은 모두가 마찬가지로 인과응보로 변화무상하다. 이런 사건이 잦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민거리가 덜 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도 습관이 되어 버린다. 못난 격정이지만, 그것은 또 남에게 상의할 수 없는 일이니 딱하다.

운명은 우리에게 불평을 들어 줄
귀마저 내주기를 거절한다.    (카툴루스)


바가지 962∼963

마르세유의 원로원이 자기 아내의 바가지를 면하기 위해서 자살하겠다는 자의 소청을 들어 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몸뚱이를 없애지 않으면 없앨 방법이 없는 재앙이며, 그 일은 양편이 모두 매우 어렵지만 피하든가 당하는 일밖에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잠든 귀머거리를 건드렸다가는 크게 코를 다친다 963∼964

메살리나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 올리는 것이다 965


그들의 언어는 지조 있는 자연스러운 힘으로 충만하며 벅차다. 그들은 꼬리뿐만 아니라 머리와 배와 다리 전부가 풍자시이다. 거기에는 억지가 없고 길게 잡아 늘린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같은 태세로 진행된다. "그들의 사상은 남성적 미의 상징이다. 그들은 단지 말을 꾸며서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세네카)

그것은 가시 없는 무른 웅변이 아니고, 힘줄이 박히고 담담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보다는 채워서 황홀하게 하며 가장 강력한 정신들을 감복시킨다. 이러한 훌륭한 문체가 그렇게 생기있고 심각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것을 말이 잘됐다고 하지 않고 생각이 잘됐다고 말한다.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올리는 것이다. "웅변을 만드는 것은 흉금이다."(뮌틸리아누스) 우리네는 속이 찬 개념들을 판단력이니 언어니 아름다운 문장이니 하고 부른다.

이러한 묘사는 숙련된 문장력으로써 되는 일이 아니고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더 생생하게 마음속에 받았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갈루스는 단순하게 말한다. 그것은 그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호라티우스는 피상적인 표현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가 마음먹은 것을 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물을 더 명확하게 더 멀리 내다본다. 그의 정신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과 모양의 곳간 전체를 뒤져서 옭아내 온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것이 예사로움을 벗어나므로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언어가 필요하다. 그는 사물들을 통해서 라틴 말을 본 것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재간 있는 작가들 966

재간 있는 작가들이 조종해서 사용하는 방법은 언어를 개혁한다기보다는 더 힘차고 다양한 수단으로 채우며, 그것을 늘이고 휘고 해서 언어에 가치를 주는 것이다. 그들은 새 낱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낱말을 풍부하게 갖추며 언어의 의미와 용법에 무게와 깊이를 주고, 보통 쓰이지 않는 표현법을 쓴다. 그러나 조심스럽고 묘하게 언어를 표현해 준 작가들 중에 그런 재치를 가진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는, 이 세기의 많은 프랑스 작가들을 두고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보통의 표현법은 경멸하며 쓰지 않을 정도로 매우 과감하다. 그러나 그들은 착상과 사리분별이 결핍되어서 실패한다. 거기에는 괴이한 문투로 가련하게 뽐내는 표현법과 멋쩍고 어리석은 거짓꾸밈밖에 없기 때문에, 재료의 품위를 높이기는커녕 도리어 못쓰게 만들어 놓는다. 새 멋으로 자기 속을 채우기만 하면 문장의 효과는 어찌되건 상관없다. 새로운 낱말 하나 잡기 위해서 흔히 그보다 더 힘줄이 박히고 강력한 보통의 표현법을 버린다.


좋은 작가들 967

내가 글을 쓸 때에는 책을 동무삼거나 읽은 것들을 회상하는 일은 없다. 실로 좋은 작가들은 너무 나를 억눌러서 용기를 꺾어 버리기 때문이다.

 

플루타르크의 저서 967∼968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내 글의 주요 목표와 완성은 968

내 글의 주요 목표와 완성은 남의 것이 아닌 정확한 내 글이 되는 데에 있다. 나는 서투르게 써 나가기 때문에 문장에 오류가 가득 차 있는데, 우연히 저지르는 오류는 고쳐 가겠다. 그러나 내 글에 흔한 일이고 버릇으로 된 불완전한 점을 제거한다는 것은, 내 글에 대한 배반이 될 것이다.


원숭이처럼 모방하는 버릇 968

나는 원숭이처럼 모방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시를 써 본다는 수작을 했을 때엔(라틴어로 밖에는 써 보지 않았다), 그 시는 당시 최근에 읽은 시인의 티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내 최초의 시도 중의 어떤 것은 외국풍의 냄새를 풍겼다. 나는 파리에서는 어딘가 몽테뉴에서와는 다른 말을 쓴다. 누구이건 내가 주목해서 관찰해 본 다음에는 무엇인지 그의 티가 내게 박힌다. 바보 같은 모습이건, 불쾌하게 웃는 꼴이건, 우스꽝스런 말투이건, 내가 유심히 본 것을 나는 몰래 빼앗아 온다. 그것이 악덕이면 더하다. 그것은 나를 찌르기 때문에 더 잘 내게 걸린다. 그리고 뒤흔들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나의 기질 때문이 아니라 남을 본떠서 욕질하는 것을 본다.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의 어느 곳에서 본 끔찍하게 키가 크고 힘이 세고 무서운 원숭이의 수작만큼이나 몸을 잡치는 모방이다. 이 원숭이들은 달리면 잡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남이 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본뜨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들을 잡는 방법을 빌려 주고 있는 셈이다. 사냥꾼들은 그것들이 보는 데서 끈이 많이 달린 구두를 꼭꼭 묶어 신고, 머리에 올가미가 달린 두건을 뒤집어 쓰고, 눈에 끈끈이로 바르는 체한다. 이렇게 하면 이 가련한 짐승들은 멋모르고 흉내를 낸다는 것이 제 눈에 끈끈이 칠을 하고 끈으로 몸을 묶어 얽어 놓는 것이다.


'폐하'나 '전하' 소리를 사흘 동안 계속하고 나면 969

나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런 피상적인 인상을 쉽사리 받아 들이기 때문에, '폐하'나 '전하' 소리를 사흘 동안 계속하고 나면 여드레 뒤에는 이런 입버릇이 '대감'이나 '영감'이라고 할 자리에서도 튀어 나온다.

(나의 생각)
여러 친척분들을 앞에 모셔 놓고 간단한 인사말을 한다는 것이, 느닷없이 "고객님~"이 불쑥 튀어나오는 걸 미리 막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술에도 많이 취했고 밤이 매우 늦은 시각이고 '술 마시고 노래하는 자리'였다고는 하나 '내심'으로는 많이 놀라기도 했고 황당하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970


그러니 어떻든 책은 치워 두고 더 단순하게 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한 욕망의 대상에 대한 향락의 갈증밖에 다른 것이 아니며, 비너스라는 것은 자기 기관에 찬 것을 비우는 쾌감에 불과한데, 이것이 절제가 없거나 근신하지 않을 때에는 악덕이 된다고 본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사랑은 미(美)의 중개에 의한 생식의 욕망이다. 그리고 이 쾌감의 꼴같잖은 근질거림, 그것으로 제논과 크라티포스의 마음도 뒤흔들던, 어리석게도 정신 없고 열빠진 동작과 조심성 없는 광증과 사랑의 달콤한 성미에 광분과 잔인성으로 불타는 얼굴, 그리고 아주 미치광이 같은 행동에 있는 장중하고 엄숙하고 황홀한 점잖은 표정, 우리의 탐락과 오물을 한데 뒤섞어 놓았다는 것, 이 지극한 탐락이 고통과 같이 기절하며 신음하는 면을 가진 것 등을 여러 번 고찰해 보면, 플라톤이 말하는 바 인간은 신들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이 무슨 잔인한 희롱인가!      (클라우디아누스)

자연은 인간을 우롱하느라고 우리에게 가장 혼란되고도 평범한 행동을 주어서 우리를 모두 동등하게 만들었고, 미치광이와 현자들을, 그리고 우리와 짐승들을 대등하게 만들었다는 말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들을 만들어 내는 동작 971

우리는 짐승과 같이 잘 먹고 마신다. 그러나 행동이 우리 심령의 작용을 막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행동에 관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행동(성욕)은 모든 다른 상념에 굴레를 씌우며, 강제적인 권위를 가지고 플라톤에 나오는 신학과 철학을 학대하며 우둔하게 만든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데서는 그대는 어느 정도 점잖은 태도를 지킬 수 있다. 다른 모든 행동에는 점잖음의 규칙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행동은 악덕과 꼴사나움밖에는 상상할 수가 없다. 좀 보게, 거기 현명하고 조심스러운 방법을 찾아보게.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주로 이 행동과 수면에서 자기를 없애는 존재임을 인식한다고 말했다. 수면은  우리 영혼의 소질을 질식기켜서 말살해 버린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영혼의 소질을 흡수해서 흩어 버린다. 진실로 이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부피의 표지일 뿐 아니라, 우리가 무력한 불구자라는 표지이기도 하다.

한편 본성은 이 욕망에 그의 동작 중의 가장 고귀하고 유용하고 재미있는 작용을 결부시켜서 우리를 밀어넣는다. 다른 면에서는 본성은 이 동작을 무례하고 점잖지 못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피하며,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하고, 금욕 생활을 권한다.

우리들을 만들어 내는 동작을 금수와 같다고 하는 우리가, 정말 금수와 같은 것은 아닐까?


인간이란 얼마나 괴상한 동물인가? 972

사람은 제각기 출생을 보는 것은 피하며, 죽는 것은 서로 찾아가서 본다.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대낮에 광막한 벌판(전쟁터)을 찾아가며, 생명을 만들기 위해서는 좁고 컴컴한 구석에서 흥겨워한다. 아기를 만드는 데는 부끄러워서 숨는 것이 의무이고, 파괴할(죽일) 줄 아는 것은 영광이며, 거기서 여러 가지 도덕도 나온다. 하나는 욕되며, 하나는 혜택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어느 누구에게 좋은 일을 하기란 그를 죽이는 일이라고 한 것이 그 나라의 어떤 말에 있다고 하였다.

아테네 인들은 이 두 가지 행동이 상서롭지 못함을 대등하게 보고, 델로스 섬을 정화하고 아폴론 신에게 자기들의 결백을 변명하게 되었을 때에, 이 섬의 경내에서 사람을 낳거나 묻는 일을 금지했다.

어느 나라에서는 밥을 먹을 때에 몸을 가린다. 내가 아는 분으로 대단한 가문의 한 귀부인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씹을 때의 용모를 불쾌하게 여기며, 그것이 우아로운 미모를 몹시 천하게 만든다고 여기고, 남의 앞에서 밥먹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분은 남이 밥먹는 것도, 자기가 밥먹는 장면을 남이 보는 것도 참아 내지 못하며, 배 속을 채울 때나 비워 낼 때나 똑같이 사람을 피한다.

터키 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해지기 위해서 밥먹을 때에 남이 보지 못하게 하는 자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밖에 밥을 먹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자기 얼굴과 사지를 찢고 째는 자도 있고, 아무한테나 전혀 말을 않는 자도 있으며, 자기 본성을 못쓰게 만들면서 본성에 영광을 준다고 행각하고, 자기들을 경멸함으로써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신체를 악화시킴으로써 자기 신체를 보완하고 있다는 광신적 인간들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징그럽게 여기고, 쾌락을 고통으로 느끼며, 불행에 의지해서 지내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괴상한 동물인가! 세상에는 자기 인생을 감추는 자들도 있다.

주거와 따사로운 가정도 버리고 도피의 길로 떠나다니!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자기 몸을 숨겨 두는 자도 있고, 건강과 쾌활한 상태를 인간성에 적대되는 해로운 소질이라고 구태여 피하는 자들도 있다.

여러 종파들뿐 아니라 여러 국민들은 자기 출생을 저주하며 죽음을 축복하고 있다. 태양을 파기하고 암흑을 숭배하는 국민도 있다.

우리는 우리를 학대하는 일 외에는 재간이 없다. 그것은 실로 우리 정신력의 노리갯감이다. 정신력이란 인생을 혼란시키는 위험한 연장이 아닌가!

불행한 자여! 자기의 쾌락을 죄로 삼다니.   (프세우스 가르스)

이보게! 가련한 인간이여, 그대는 일부러 꾸며내서 늘리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앙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불행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그대는 인간 조건 자체로 너무나 불행하다. 그대는 공상으로 그런 것을 꾸며내지 않아도 본질적으로 추악한 것을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그대는 편안한 것이 불쾌하게 되어 주지 않으면 편안이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가? 그대는 자연이 그대에게 맡겨 주는 모든 필요한 직무를 완수하였고, 그대가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서 갖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할 일이 없고 한가롭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의심해선 안 될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을 모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파당적이며 광신적인 그대의 법에 집착한다. 그 법이 특수한 것이고 불확실하고 더 모순됨으로 그만큼 그대는 더 애를 쓴다. 그대가 꾸민 실천적인 규칙에 잡혀서 매여 지내며, 그때 교구(敎區)의 규칙, 즉 법칙과 우주의 법칙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고찰을 입증하는 실례를 좀 섭렵해 보라. 그런 것으로 그대의 온 인생이 이루어져 있다.


반사한 때 974

태양 광선이나 바람을 쏘이는 것은 직접 닿는 것보다 한번 부딪쳐서 반사한 때에 더 세차다고 한다.


더듬더듬 974


마르티알리스는 아무리 비너스의 치마폭을 들추어 보아도, 그를 통째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모두 털어서 말하는 자는 바로 물려서 싫증이 나게 한다. 더듬더듬 잘 말해 주지 않는 자는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생각하게 한다. 이런 종류의 겸손에는, 특히 이런 작가들처럼 반쯤 열어 보이며 우리들 공상의 큰 길을 터놓은 겸손에는 배신이 있다. 그리고 그 내용과 묘사는 동시에 좀도둑질하는 수법의 냄새를 풍겨야 한다.


층계와 계단 975


층계와 계단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지막 자리는 더 높고 명예롭다.


갑자기 & 이미 975

여자들이 갑자기 우리들 것이 되면, 우리는 이미 그녀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변덕스런 정욕을 충족하고 나면 바로
약속이건 맹세이건 모두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한다.      (카툴루스)

그래서 그리스 청년 트라소니데스는 자기의 사랑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애인의 마음을 얻고 난 다음에는 그가 영광으로 품고 키우던 그 불안스런 정열이 향락 때문에 없어지고 넘쳐나서 해이해 지지 않게 하려고 사랑을 즐기기를 거절하였다. 



그런 여자들은 단지 한쪽 궁둥이만을 가지고 있다 977


나는 상대편의 동의와 욕망 없이 한 육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영혼이나 감정이 없는 몸뚱이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모든 향락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윤리적이며 기운 빠진 향락도 있다. 호의 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유로 우리는 부인들의 이 선물을 얻을 수가 있다. 그것은 애정의 충분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다른 일에서와 같이 배신도 거기 굴러들 수가 있다. 그런 여자들은 단지 한쪽 궁둥이만을 가지고 있다.

냉랭하기가 마치 신에게 분향과 제삿술을 준비하듯
여자는 그곳에 없거나 대리석으로 된 것 같으니라.      (마르티알리스)

나는 자기의 마차보다도 그것을 더 쉽게 빌려 주고, 그것으로만 교제하는 예를 알고 있다. 그대가 같이 있어 주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다른 목적으로 마음에 드는지, 또는 마구간의 뚱뚱보 하인처럼 단지 그 일만으로 상대하는지, 어떤 지위나 가치로 그대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녀가 그대에게만 허용하는 것인지
또는 흰 분필로 이 날짜를 표해 두는 것인지.      (카툴루스)

뭐라고? 그녀가 그대의 빵을 더 기분좋은 공상의 소스에 적셔서 만든다면?

그녀는 그대를 껴안고 있으면서
지금은 없는 다른 애인을 위해 한숨 짓는다.      (티불루스)


그녀들의 역할
979

나는 여자의 총애를 얻으려면 오랜 시일과 단계를 두라고 권한다. 플라톤은 모든 종류의 사랑에서, 용이성과 신속성은 당사자들에게 금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여준다. 주책없이 소란스럽게 통째로 넘어가는 일은 색을 탐하는 특징이 되는 것이니, 여자들은 모든 꾀를 부려서 그것을 감추어야 한다. 여자들은 몸가짐에 절도를 지키고 질서 있게 처신하면, 우리의 정욕을 더 잘 속여 넘기고 자기의 정욕도 또한 감출 수 있다. 여자들은 항상 우리들 앞을 피해야 한다. 붙잡히기를 바라는 여자들이라도 그래야 한다. 그녀들은 스키타이 족들처럼 달아날 때 우리에게 더 큰 타격을 준다. 진실로 그녀들이 본성으로 타고난 법칙에 따라서 여자들이 나서서 남자를 욕심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그녀들의 역할은 당하고, 복종하고, 동의하는 일이다. 그 때문에 그녀들은 계속적인 능력을 본성으로 타고난 것이다. 그 능력은 우선 남자들에게는 드물고도 불확실한 것이다. 여자들은 언제나 우리들의 시간에 대비해서 수동적인 역할을 타고났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연은 우리의 욕망을 뛰어나게 드러내어서 선언하게 하는 반면에, 여자들의 것은 은밀하게 안으로 들어가며 내보이기에는 부적당하며 방어 태세를 가지게 해 주었다.


사랑의 본성,
영원한 포만이나 그 종식(終息)을 명령할 수도 없다 980

사랑은 어떻든 맹렬하지 않으면 사랑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고, 사랑이 지조를 지킨다면 그 맹렬하다는 본성에 반하는 일이다. 그리고 놀라서 떠들어대며 그것이 믿을 수 없이 타락한 일이라고, 그 병폐의 원인이 여자 속에 있다고 보는 자들은 어째서 그들이 이 병폐를 자신들 속에 가지며 그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놀라지도 않는 것인가! 아마도 사랑에 지조를 발견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인 정열이 아니다. 탐욕과 야심에도 그 끝이 없다면 음욕에도 끝은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 음욕은 포만시킨 다음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영원한 포만이나 그 종식(終息)을 명령할 수도 없다. 이 음욕은 항상 그 소유한 것의 밖으로 나간다.


오십 고개를 넘은 자,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982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자연은 이 나이를 꼴사납게 만들 것 없이, 가련하게 만든 것만으로 만족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일주일에 세 번쯤 허약한 힘으로 일어나며, 뱃속에 당연히 해낼 어떤 위대한 힘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꼴이 보기도 싫다.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그리고 지금 둔중하게 얼어붙어서 볼이 꺼진 이 나이에 이렇게도 생기 있게 팔딱거리는 자극이 놀랍다. 이런 욕망은 청춘의 꽃다운 시절에나 가질 일이다. 이런 충동을 믿고, 그대에게 있는, 이 피로할 줄 모르게 꾸준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열기를 한번 거들어 보라. 좋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만큼의 미련이 있는 동안에는 985


나는 여자들에게 느끼고 있는 실질적인 애정 이상을 보여 주지는 않았고, 애정의 쇠퇴·왕성함·시작·발작·정체 등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그 일은 늘 고르게 하지는 못한다. 나는 약속해 주는 일에는 인색했고, 내가 의무를 진 것이나 약속한 것보다는 더 지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변절에 대해서까지 내가 진실하게 처신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터놓은 변절 행위를 때로는 몇 번이고 거듭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대편에게 실오라기 하나 만큼의 미련이 있는 동안에는 결코 관계를 끊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들이 아무리 절교하여 마땅할 구실을 만들어도 경멸이나 증오를 받을 정도로 그녀들과의 사이를 끊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비밀 관계가 가장 수치스러운 조건으로 기회를 얻은 것이라 해도, 나는 그 여자들에게 어떤 호의를 가져야 할 의무를 느낀다.


예상 외의 힘든 방법 986

나는 할 수 있는 한 여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밀회의 위험을 나 혼자만의 책임으로 맡았다. 그리고 의심을 덜 받으려고 예상 외의 힘든 방법을 쓰며, 뿐만 아니라 내 의견을 따라서 더 성공하기 쉬운 길로 사랑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응당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소는 가장 들키기 쉬운 곳이다. 사람들이 덜 두려워하는 일은 발각의 위험이 더 많고 더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그대가 감히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일을 그대는 더 쉽게 감행할 수가 있다. 그 일은 어렵기 때문에 더 쉬워진다.


사랑은 미치는 자들에게밖에는 해롭지 않다 987


나는 거칠고 일에 힘들게 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가롭게 오그라져 잠드는 생활도 혐오한다. 하나는 나를 꼬집어뜯는다. 하나는 나를 졸게 한다. 나는 뼈가 부러지는 부상만큼의 파열상도, 멍들게 하는 타격만큼 터뜨리는 타격도 좋아한다. 나는 이 흥정에서 제법 그런 일을 할 만하던 무렵에는 이 두 극단 사이의 중간을 택했다. 사랑은 개운하고 생기 있고 유쾌한 격동이다. 나는 번민도 고통도 받지 않았다. 그보다도 열이 올라서 갈증을 느꼈다. 거기서 멈춰야 한다. 사랑은 미치는 자들에게밖에는 해롭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988

한 청년이 철학자 파나이티오스에게, 현자도 사랑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 보자, "현자는 치워 두라. 그러나 자네와 나는 현자가 아니니까, 우리를 타인의 노예로 만들고, 자신을 경멸하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마음 뒤집히는 강렬한 일에는 걸려들지 말자"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의 충격을 지탱할 수 없는 심령에게는, 그 자체로 격정을 일으키는 일에 몸을 맡길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진실이며, 예지와 연애는 병행할 수 없다고 한 아게실라오스의 말을 압도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헛되고 부적절하고 수치스럽고 옳지 못한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둔중한 육체와 정신을 잠 깨워 주기에 적당하고 건전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내가 의사라면, 나와 같은 기질과 조건을 가진 인물에게는 나이가 지긋하기까지 생기를 돋우고 정력을 일으키며 늙음에 잡히는 일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다른 어느 처방보다도 이 처방전을 적어 줄 것이다. 우리가 아닌 그 주변에 머무르는 동안, 맥박이 아직 뛰는 동안,

처음으로 흰 머리칼 겨우 생기며
노령(老齡)은 아직 강건하고 몸을 가눌 수 있는 동안
운명의 여신 라케시스에게 뽑을 실이 남아 있는 동안
아직도 내가 다리를 쓰며 지팡이를 쓰지 않아도 좋을 동안,       (주베날리스)

우리는 이런 따위의 몸이 찌르르 울리는 정열로 초대받고 애무받을 필요가 있다. 사랑은 저 현명한 아나크레온에게 젊음과 정력과 쾌활성을 얼마나 돌려 준 것인가를 보라.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나보다도 훨씬 더 늙어서 사랑의 대상을 두고 말했다. "내 어깨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내 머리를 그의 머리에 가까이 하며, 우리가 같이 책을 들여다보노라니, 거짓말 아니라, 내 어깨는 무슨 짐승이 무는 듯 찌르르하더니, 그 뒤 닷새 동안을 두고 근질거리며, 나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저린 느낌을 받았다." 우연히 어깨를 접촉한 것만으로도, 나이 탓에 식어 쇠약해져 가는 심령을 덥게 하다니! 그리고 인간 심령 중의 제1의 심령을 개혁해 주다니, 그럼 왜 못할까?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무것도 되려거나 닮으려고 하지 않았다.


두 가지로 쪼개 놓는 것 989

우리가 이 지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은 순전히 육체적인 것도 순전히 정신적인 것도 없으며, 살아 있는 사람을 이 두 가지로 쪼개 놓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노년의 사랑 990


나는 숨가쁘게 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어떠한 다른 정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면 나처럼 일정한 직업이 없을 경우, 탐욕·야심·싸움·소송 사건 같은 일에 마음이 잘 매여 지내지만, 나로서는 사랑에 매여 지내는 편이 더 기분 좋은 일이다. 사랑은 다시금 내게 주의력과 소박성과 우아미와, 내 인품에 대한 생각을 가꾸게 하고, 이 늙음의 얼굴 찌푸림이, 이 측은할 만큼 비뚤어진 찌푸림이 나의 용모를 타락시키지 않게 보장해 주고, 나에게 다시 건전하고 현명한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그래서 내 정신이 자신과 자신의 쓸모에 관해서 절망하는 심정을 없애고, 자신에게 다시 정이 붙게 하여 더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게 해 줄 것이고, 할 일은 없고 건강 상태는 나빠지기 쉬운 이런 나이의 수천 가지 불쾌한 생각과 우울한 번뇌를 흝어 준다. 또 적어도 공상으로라도 대자연에 버림받기 시작하는 이 피에 다시 따스함을 넣어 주며, 이제 마지막 파멸을 향해 줄달음치는 가련한 인간에게 턱을 괴어 주고, 근육과 심령의 정력과 쾌활성을 조금은 연장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여간해서는 회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몸은 허약해지고, 오랜 경험으로 우리 취미는 한층 더 연약하고 꾀까다로워져서, 내놓는 것도 별로 없이 요구만 많아지며, 용납될 만한 가치가 아주 없는 터에 가장 좋은 상대만 고르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젊었을 적만큼 과감하지도 못하며, 사람을 더 믿어 주지도 못한다. 우리 조건과 여자들의 조건을 알고 있는 만큼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받을 자신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저 피끓는 새파란 청춘들 사이에 끼여 있기가 부끄럽다.


사랑은 같은 종류의 돈으로밖에는 치르지를 못한다 991


사랑은 같은 종류의 돈으로밖에는 치르지를 못한다. 진실로 이렇게 기뻐하여 즐김에서는 내가 주는 쾌감은 받는 것보다 내 공상을 더 달콤하게 애무해 준다. 그런데 자기가 쾌락을 주지 못하며 남의 쾌락을 받는 자는 조금도 떳떳한 것이 못 된다. 모든 일에 남의 덕만 보려고 하며, 상대편에게 부담이 되게 교제하고, 남의 신세만 지기를 좋아하는 자는 마음이 비굴한 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이건 아담한 취미이건 친밀성이건, 활달한 대장부가 이런 대가를 치르고 바라야 할 만큼 정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자들이 겨우 측은한 마음으로밖에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해줄 수 없는 것이라면, 남이 시주한 재물로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살지 않는 편이 훨씬 낫겠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하는 식으로 "당신을 위해서 내가 좋은 일을 하였다"고 라든가, 키로스가 자기 군대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고 하던 식으로 여자들에게 사랑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싶다.

"그대와 같은 조건의 여자들과 맺으라. 팔자가 같은 자와 함께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오, 그 얼마나 멋쩍고 어리석은 타협인가!

나는 죽은 사자의 수염을 뽑고 싶지는 않다.      (마르티알리스)


억지로 손질하여 꾸민 미모 992

나는 제1급의 추악으로서 억지로 손질하여 꾸민 미모를 든다. 키오 섬의 소년 에모네즈가 타고나지 못한 미모를 장식품으로 꾸미고, 철학자 아르게실라오스에게 가서 현자도 사랑을 할 줄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철학자는 대답했다. "하고말고, 다만 너처럼 가짜로 꾸며서 만든 미모가 아니면 말이다." 나는 칠하고 닦아 놓은 것보다는 드러내 놓은 못난이나 늙은 모습이 덜 추하다고 생각한다.


장년기와 노년기 993

나는 장년기에는 미모가 이미 자리를 떴다고 본다. 더욱이 노년기이면 말할 거리도 없다. 993


서른 살 993

나바르의 여장 마르그리트는 여자이니 여자의 장점을 한껏 연장시키며, 서른 살에 이르면 그 칭호를 '예쁜'에서 '착한'으로 바꾸라고 명령한다.


풋내기들이 스승이다 993


우리 인생의 지배력을 사랑에게 짧게 줄수록 우리는 그 만큼 더 가치가 생긴다. 사랑의 자태를 보라. 그것은 젖내나는 모습이다. 사랑의 학파에서는 모든 처사가 질서에 역행하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공부나 훈련이나, 행동 습관이 무능력으로 향하는 방도로 된다. 거기서는 풋내기들이 스승이다.


비틀거리며 촐랑대며 가는 사랑 993


사랑이 얼마나 비틀거리며 부딪치고 촐랑대며 가는가를 보라. 그것은 현명하게 기술적으로 지도한다는 것은 칼을 씌우는 일이다. 사랑을 더부룩하고 덕적덕적한 손에 맡긴다는 것은 그의 신성한 자유를 속박하는 일이다.


육체와 정신의 고귀한 교환 993


나는 우리가 여자들의 육체적 미를 고려해서 늘 여자들의 정신적 허약성을 용서해 주는 것은 보았으나, 여자들의 정신이 아무리 현명하고 성숙했다고 해도 그 정신의 미를 위해서 다소나마 쇠잔해 가는 육체를 여자들이 변호해 주려고 하는 것은 아직 본 일이 없다. 여자들 중의 어느 누구라도 저 소크라테스식의 육체와 정신의 고귀한 교환으로 자기 엉덩이의 가치를 가장 비싸게 올릴 수 있도록 그 엉덩이의 대가로 철학적이며 정신적인 지성과 생산을 사들일 생각은 어째서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같은 틀 994


나는 수컷이나 암컷이나 같은 틀에 부어 냈다고 말한다. 교육과 풍습을 제외하고는 그 사이에 그리 큰 차이는 없는 편이다.


부지깽이가 냄비 바닥의 껌정을 비웃는다고 하는 말 994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공부나 경기나 부담이나 전쟁 직무나 평화 직무나 모든 모임에, 양편을 다 무차별하게 불러들인다. 그리고 철학자 안티스테네스는 여자들의 도덕과 우리의 도덕 사이의 모든 구별을 철폐해 버렸다. 한편의 성(性)을 비난하기는 다른 편의 성을 변명하기보다도 훨씬 더 쉽다. 부지깽이가 냄비 바닥의 껌정을 비웃는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18. 반증에 대하여


자랑으로 보여준다는 의심의 여지는 없다 734


이것은 서재의 한구석에 꽂아 두고, 이웃이나 친척이나 친구로 이 영상 속에 나와 사귀고, 나를 알아보고 싶은 이에게 심심풀이로 주기 위한 것이다. 남들은 당당하고 풍부한 재료를 자기들 속에서 찾기 때문에 자기의 말을 할 생각이 났다. 나는 반대로 내 재료가 너무 가늘고 얇으며 빈약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니, 여기에 자랑으로 보여 준다는 의심의 여지는 없다.


이 책으로 일반 사람들과 가질 수 있는 교제
734

내가 이 책으로 일반 사람들과 가질 수 있는 교제는 기껏해야 그들의 인쇄 기계를 빌린다는 일뿐이다. 그것이 더 신속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책의 낱장은 아마도 장터에서 버터 한 귀퉁이가 녹아 떨어지지 않게 막아줄 것이다.

다랑어나 올리브를 마음껏 싸는 포장지가 되어 주자.                                                   (마르티알리스)

그리고 나는 자주 고등어에게 편하게 들어 있을 옷을 제공하련다.                                 (카툴루스)


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735

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내가 그 많은 한가한 시간을 그렇게도 유용하고 즐거운 사색으로 보낸 것이 시간의 낭비였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내 자신의 틀에 이런 그림을 판박아 내며, 나를 뽑아 내기 위해서 그렇게도 여러 번 손질하고 꾸며 보아야 했기 때문에, 나라는 원형이 어느 점에서 굳어지고 만들어져 갔다. 남을 위해서 나를 그려 가다가, 나는 첫 빛깔보다도 더 뚜렷한 색채로 내 속에 나를 색칠해 간 것이다. 내가 내 작품을 만들었는지 내 작품이 나를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이 작품은 작가와 동체이며 작가 자신만이 취급되고, 내 생명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다른 서적들처럼 제3의 외부적인 목적으로 취급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도 끊임없이, 그렇게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보고해 온 것은 단지 시간 낭비뿐이었을까? 오로지 공상으로, 그리고 말로만 몇 시간 동안 자기를 더듬어 보는 자들은, 그것으로 자기 연구와 자기 작품, 그리고 자기 직업을 삼으며 성심껏 전력을 다해서 꾸준히 기록해 가는 일에 전념하는 자만큼 본심으로 자기를 살피지도 자기 속에 침투하지도 못한다.

가장 감미로운 쾌락은 그것이 내부적으로 소화되면 그 흔적을 남기기를 피하고,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남의 눈에 띄는 것을 꺼린다.

얼마나 여러 번 이 일이 내게서 울적한 상념을 흩어지게 해 줬는가! 모든 부질없는 상념들은 울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외따로 반성하는 소질을 풍부하게 선사하였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사회의 신세를 지고 있지만, 그 최대 부분은 우리 자신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스스로 반성해 보도록 자주 권고한다. 내 공상에도 어떤 질서와 계획을 세워서 몽상해 가도록 정리하여 그것이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이 공상에 떠오르는 하고많은 자디잔 생각들에 형체를 주어서 기록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몽상들을 기록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이 몽상들을 주의해서 듣는다. 내가 얼마나 여러 번 어떤 행동에 관해서 예법과 이성이 드러내 놓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데 마음속에 화가 북받쳤는가,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 주려는 의도도 없지 않아서 여기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참으로---

저 잡놈의 눈깔 위에 탁!
배때기에 탁! 등때기에 탁!                                                                                              (마로)

이 시의 채찍은 몸뚱이에 때릴 때보다 종잇장 위에 매질할 때에 자국이 더 잘 박힌다. 뭐? 내가 다른 책들에서 무엇이건 도둑질해 작품을 장식하거나, 보강할 수 있을까 하고 엿보아 온 것에, 좀더 책들의 말에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면 어떠냐고? 나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고,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얼마쯤 공부하였다. 적어도 이때는 이 작가, 저때는 저 작가의 머리나 다리를 스쳐 보고 꼬집어 보는 것이 공부라면 말이다. 결코 내 사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형태가 잡힌 사상들을 보충하고 거들어 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거짓말 737


거짓말이라는 것은 천한 악덕이다. 그리고 옛 사람(플루타르트를 말함)은 이것을 수치스럽게 묘사하며, 그것은 신을 경멸하고 동시에 인간을 두려워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악덕의 흉칙스럽고 비굴하고 난잡스러움을 이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 대하여 비굴하고 신에 대해서 용감하다는 것보다 더 비굴한 일을 달리 상상해 볼 수 있는가? 우리들의 상호 양해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말을 그릇하는 자는 공공 사회를 배반하는 것이다. 말은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의지와 사상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유일한 연장이다. 그것은 우리들 심령의 통역이다. 말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없으며, 알아보지도 못한다. 말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를 부수며 우리 사회의 모든 연락을 무너뜨린다.

(나의 생각)

'신뢰의 가치'를 역설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책 『트러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19.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20. 우리는 순수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맛보지 못한다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 743

우리가 갖는 쾌락이나 재물들은 고통과 불편이 얼마간 섞여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쾌락의 샘 복판에 쓴 것이 솟아나와
꽃처럼 피어나는 연인들을 괴롭힌다.                                                                                   (루크레티우스)

우리의 탐락은 극도에 도달하면 어느 점에서 신음과 오열의 풍이 있다. 이 탐락이 고민 속에 사라진다고 말하지 못할 일인가? 진실로 우리가 그 모습을 절정 상태에 꾸며 볼 때에, 우리는 그것을 오뇌·유연·허약·실신·병태 등 병적이며 고통스런 소질의 접두사로 매흙질한다. 그들이 혈연성과 동질성으로 되었다는 두드러진 증거이다.

심각한 기쁨은 쾌활성보다 더 엄격함을 지닌다. 극도로 충만한 만족감에는 유쾌미보다도 한층 안정감이 있다. "절제 없는 행복감은 그 자체를 파괴한다." 안일은 우리들을 찢어발긴다.

그리스의 한 시구 첫머리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다. "신들은 우리에게 주는 모든 일들을 판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어떠한 좋은 일도 순수하고 완벽하게 주지 않으며, 그것을 우리는 대가를 치르고 산다는 말이다. 노고와 쾌락은 기본 성질상 대단히 다르지만, 그렇지만 무엇인지 모르는 자연스런 결합으로 서로 협력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신이 고통과 쾌락을 뭉쳐서 뒤섞어 놓으려고 했다가 그것을 잘 해낼 수 없자, 이들을 꼬랑지끼리 붙들어매어 놓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보상 없는 불행은 없다 744

대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혼돈을 드러내 보인다. 화가들은 울 때에 사용하는 얼굴 움직임과 주름살이 웃을 때에도 역시 쓰인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 표현이 완수되기 전에 화가가 그려가는 모습을 살펴보라. 어느 쪽으로 그려 가는 것인지 의심이 생긴다. 그리고 웃음의 절정에는 울음이 섞인다.


"보상 없는 불행은 없다."(세네카) 인간이 소원대로의 편익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상상해 보면(신체의 모든 부분이 늘 생식 행동(生殖行動)의 쾌감이 극치에 이르렀을 때의 것과 같은 쾌감으로 잡혀 있을 경우를 들어 보면), 나는 그가 쾌감의 무게 밑에 쓰러져서, 그렇게도 순수하고 견실하고 보편적인 탐락을 전혀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 경지에 있으면 그는 마치 발을 단단히 디딜 수 없어 빠져 들어갈까 두려워하는 것같이 조급해져서 달아난다.


표본적 처벌 745

"모든 표본적 처벌은 개인들에 대하여 비공정성을 지니되, 그것은 공공의 이익으로 보상된다"고 타키투스는 말한다.


25. 병자를 흉내내지 말 것에 대하여


상상력의 작용 758


플리니우스는 어떤 자가 전에는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자다가 시각장애인이 된 꿈을 꾸고 나서 다음 날 바로 시각장애인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내가 다른 데서도 말했지만, 상상력은 그런 작용을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플리니우스도 같은 의견인 것 같다. 그러나 의사들이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했으면 발견했을 일이지만, 그에게서 시각을 앗아 가고 있던 증상을 신체는 그 내부에 느끼고 있었으며, 이 증상이 꿈을 꾸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이치에 맞다.



우리의 병폐 759

"우리의 병폐는 우리 밖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우리들 속에 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병들어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병을 고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일찍부터 자신을 보살피지 않으면 언제 가서 그 많은 상처와 병폐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문에 우리는 철학이라는 대단히 감미로운 약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약들은 치료되고 난 뒤에 밖에는 유쾌한 맛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 약은 쓸 데에도 유쾌하며, 동시에 병을 고쳐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네카가 편지글에서 한 말이다.


27. 비겁은 잔인의 어머니



비겁은 잔인의 어머니 760

나는 '비겁은 잔인의 어머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리고 저 악의에 찬 비인간적인 마음씨의 악랄함과 가혹함은 대개 여성적인 유약한 성격에 수반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중에도 가장 잔인한 자들이 변변찮은 이유로 쉽사리 우는 것을 보았다.


가장 비겁한 부류들, 겁 많은 똥개들 761


승냥이나 곰 같은 짐승들 중에도
가장 비겁한 부류들이 죽어 가는 사람을
집요하게 습격한다.      (오비디우스)

마치 겁 많은 똥개들이 들판에서는 공격할 엄두도 못 내던 야수들의 껍질을 집에 가지고 와서는 찢고 물어 뜯는 식이다.


돌덩이에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761


적의 숨길을 끊기보다는 패배시키는 것에, 그를 죽이기보다는 굴복시키는 데에 더 큰 용맹과 멸시가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뿐더러 복수의 욕망은 이것으로 더 만족한다. 복수는 자기 실력을 뼈저리도록 느끼게 하는 것밖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짐승이나 돌덩이에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보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데서라면 763


한 문장을 공격하려고 그 작가가 죽기를 기다리는 자는 약한 자이며 싸움꾼이라는 것밖에 무엇을 뜻하는가? 누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떤 자가 당신을 나쁘게 말하더라고 하자 그는,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하게 하오. 내가 없는 데서라면 아무리 내게 매질해도 좋소"라고 말했다.


28. 모든 일에는 저마다 때가 있다
 



한 발은 무덤 속에 있는데도 772

젊은이는 자기 준비를 해야 하고, 늙은이는 그것을 누려야 한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천성에서 그들이 주목하는 가장 큰 결함은, 우리의 욕망이 끊임없이 다시 젊어지는 일이다. 우리는 늘 살기를 다시 시작한다. 우리의 공부와 욕망은 때로는 늙음을 느껴야 할 일이다. 우리는 한 발은 무덤 속에 있는데도 욕망과 추구는 출생만 하고 있다.

그대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무덤 생각은 않고,
대리석을 깎으며 가옥을 건축한다.      (호라티우스)

내 계획은 가장 긴 것이라 해도 일 년의 폭을 넘지 않는다. 나는 이제부터는 마지막을 장식할 생각밖에 않는다. 나는 내게서 모든 새로운 희망과 계획을 벗어던진다. 나는 이제 두고 떠나려는 모든 장소에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날마나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 간다.

"오래 전부터 나는 잃지도 따지도 않는다. 내게는 갈 길보다 더 많은 비용이 남아 있다."(세네카)


30. 한 기형아에 대하여



전에 본 일이 없는 것 783

"그가 빈번히 보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를 그가 알지 못할 때라도 그를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그가 전에 본 일이 없는 것이 일어나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키케로)


31. 분노에 대하여


격정이 지배하는 것 785


우리의 맥이 극도로 뛰며 흥분을 느끼는 동안은 일을 중지할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아 냉철해질 때에는 사물들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때에는 격정이 지배하고 격정이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격정을 통해서 보면, 마치 안개를 통하여 보는 물체와 같이 잘못들이 우리에게 더 크게 보이는 것이다. 배고픈 자는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징계를 사용하고자 하는 자는 벌 주고 싶은 생각에 굶주리고 목이 말라서는 안 된다.


키케로와 브루투스 786

나는 옛 사람들의 문장에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쓰는 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체하고 말하는 자보다 더 강한 감명을 주는 것에 주목한다. 키케로가 자유애(自由愛)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어 보라. 브루투스가 같은 제목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보라. 그 문장에서, 이 후자는 생명을 내걸고 자유를 살 인물이라는 것이 울려 온다.


키케로와 세네카 786


웅변의 시조인 키케로에게 죽음의 경멸을 말하게 해 놓고, 세네카에게 같은 문제를 다루게 해 보라. 전자는 기운 없이 끌어간다. 그리고 자기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그대에게 결단내리게 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그대에게 조금도 용기를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후자는 그대에게 활기를 주고 불을 지른다. 나는 작가들, 특히 도덕과 의무를 취급하는 작가들은 그가 어느 종류의 인물인가를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고는 그 작품을 읽지 않는다.


분노라는 격정, 격정이 갑자기 꾸며낸 궤변 788


분노는 그 자체에 쾌락을 느끼며, 아부하는 격정이다. 얼마나 여러 번 우리는 그릇된 원칙 아래 혼동되어서, 누가 와서 우리들 앞에 정당한 변호와 변명을 제시하면, 우리는 진리나 실속 없는 일에 대해서 분개하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옛날의 한 경이로운 예를 기억하고 있다.

피소는 탁월한 도덕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부하 병사 하나가 꼴을 베러 갔다가 혼자 돌아왔고 같이 갔던 동료를 어디에 두고 왔는지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 자가 그를 죽인 것이 명백하다고 생각하고 당장에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래서 그를 사형대에 올려놓았을 때에 마침 길을 잃었던 동료가 돌아왔다. 군대 전체는 이것을 큰 경사로 여기고, 두 병사는 한참 서로 껴안고 어루만지면서 반가워했다. 그 다음 거기 와 있던 피소에게도 이 일은 대단히 기쁘리라고 기대하고, 사형 집행인이 이 두 병사를 그의 앞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사정은 거꾸로였다. 피소는 수치와 울분으로 아직도 속에서 치밀어오르던 화가 배로 터지며, 그의 격정이 갑자기 꾸며 댄 궤변으로, 홧김에 이 셋에게 죄를 씌우며 모두 형장으로 보내게 하였다. 첫번 병사는 그가 선고를 받았으니 유죄이고, 길을 잃었던 둘째 병사는 그의 동료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으니 그렇고, 사형 집행인은 그가 받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까닭에 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든 것 789


분노를 조절하려면 잔혹하게 자기를 억제해야만 한다. 나로서는 격정치고, 그것을 덮어가며 버티어 나가는 데 이렇게 힘든 것을 알지 못한다.


가장된 건전함 밑에 은폐된 때에 789∼790


사람들은 분노를 숨기다가 그것이 몸에 배어들게 한다. 그것은 마치 데모스테네스가 주막집에서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디오게네스가 "속으로 물러나 들어갈수록 더욱 그대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한 식이다. 나는 점잖은 외모를 보이느라고 속으로만 고민하는 것보다는 차리라 격에 맞지 않게 하인의 뺨을 한 대 치는 편이 낫다고 충고한다. 그리고 고생하며 울화통을 덮어두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밖으로 터뜨려 내보낼 것이다. 격정은 새어 나가서 밖으로 표현되면 힘이 약해진다. 격정의 화살을 안으로 향하게 해서 우리를 해치게 하는 것보다는 밖으로 작용시키는 편이 낫다. "모두 드러내 보이는 악덕은 비교적 가볍다. 그것은 가장(假裝)된 건전함 밑에 은폐된 때에 가장 나쁘다."(세네타)


허공에 대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 790

허공에 대고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 꾸지람이 자기가 불평으로 생각하는 자에게 도달하도록 잘 보아서 해야 한다. 어떤 자는 꾸지람 받을 자가 앞에 나오기도 전에 고함지르며, 그가 가 버린 뒤에도 한 세기를 두고 계속해서 소리지른다.


누가 어떻게 밀건 791


불행한 일로 사람이 낭떠러지에 서게 되면, 누가 어떻게 밀건 늘 바닥까지 떨어지게 마련이다. 추락은 그 자체가 돌진과 격앙과 촉진력을 제공한다.


분노라고 하는 무기 792


다른 무기를 가지고는 우리가 그 무기를 움직이지만, 분노라고 하는 무기는 반대로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의 손이 무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손을 조종한다. 이 분노라는 무기가 우리를 잡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이 무기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32. 세네카와 플루타르크의 변호



얼마나 바보같은 우둔성인가? 796∼797


가능한 일과 가능하지 않은 일은, 내가 다른 데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지각으로 믿을 수 있거나 믿을 수 없는 것에 따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들이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는 것이라고, 남이 하는 것을 여간해서 믿지 않으려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며 사람들 대부분이 거기에 잘 빠진다. 각자에게는 자연이 주장하는 형태가 자기에게 있는 것같이 보이며, 이 형태를 시금석으로 모든 다른 형태들을 여기에 관련시켜 본다. 자기 태도에 맞추지 않은 자세는 꾸며 낸 것이고 인공적인 것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 우둔성인가!

나로서는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아주 위에 있다고 보는데, 특히 옛 사람들이 그렇다. 내 걸음으로 그들을 뒤따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래도 나는 그들을 눈으로 뒤따르며 그들을 그렇게 높이 올려놓는 원동력을 판단해 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어느 점에서 그 힘의 씨앗이 내게도 있음을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 어느 심정이 극도로 비천한 것을 알아 보고, 거기에 놀라지도 않으며 그것을 믿는다. 나는 이런 인물들이 자기를 높이 올리려고 사용하는 법을 잘 고찰해 보며, 그들의 위대성에 감탄하고, 내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보는 이런 비상(飛翔)을 내 속에 품어 보며, 비록 내 힘이 도달하지 못할망정 적어도 내 판단력은 기꺼이 노력한다.


33. 스푸리나의 이야기

몸뚱이가 말썽을 부리며 800

크세노크라테스는 여기에 더 가혹한 방법을 썼다. 제자들이 그의 절조를 시험해 보려고, 저 유명한 예쁜 창녀 라이스를 벌거벗겨 그녀의 미모와 아양떠는 매력의 무기를 발휘하도록 그가 자는 침대 속에 밀어 넣었더니, 그는 자기 사상과 규칙에도 불구하고 몸뚱이가 말썽을 부리며 거역하기 시작하자, 이 반역에 귀를 기울인 부분들을 불로 태워 버렸다.


34.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하는 방법에 대하여



장수된 자의 최고의 역할 809

이 가련한 자들은 그가 얼마나 탁월하게 시간을 아껴 쓸 줄 아는 자인가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때맞추어 기회를 잡아 번개같이 집행하는 것이 장수된 자의 최고의 역할이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으며, 이 재간이 사람의 일로 믿어지지않는 전대미문의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35. 세 현숙한 부인에 대하여


때늦은 표시로다! 817

화목한 결혼의 기준과 진실한 증거는 그 교합이 얼마나 지속되며, 이 교합이 꾸준히 조용하고 성실하고 유쾌했던가에 달려 있다. 우리 시대에는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선량한 봉사와 맹렬한 애정을 남편이 죽은 뒤에 표시하려고 보류해 두고 있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그 선의의 증거를 보여주려고 한다. 때늦은 표시로다! 여자들은 도리어 이것으로 남편들을 죽어서밖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생전엔 다툼으로 가득하고, 사후엔 사랑과 예절로 가득하다. 부친들이 그들 자녀에 대한 애정을 감추고 있듯, 그녀들은 점잖은 존경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즐겨 남편에 대한 애정을 감춘다. 이런 신비는 내 비위에 맞지 않는다. 그녀들이 아무리 머리털을 쥐어뜯고 자기 몸을 할퀴고 해 보아도 소용 없다. 나는 바로 침모(針母)나 서기의 귀에 대고, "그이들은 어떻게 되었지? 그이들은 어떻게 살았지?" 하고 물어 본다.


가장 애통이 적은 자가 가장 소란스레 비탄한다 817


나는 늘 "가장 애통이 적은 자가 가장 소란스레 비탄한다"(타키투스)라는 좋은 말이 생각난다. 그녀들의 찌푸린 상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흉하고, 죽은 자들에게는 소용없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웃어 준다면 죽은 뒤에 웃는 것을 기꺼이 면제해 줄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코에 대고 침뱉던 자가, 이제 죽어 갈 때에 와서 발을 문질러 본다면, 울화가 터져서라도 다시 살아날 일이 아닌가? 남편의 죽음을 울어 주는 데 무슨 명예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웃어 준 여자들만의 차지가 된다. 살아서 울어 준 여자들은 죽어서는 속으로나 겉으로나 웃어 댈 일이다.

그러므로 그 축축한 눈과 가엾은 목소리를 보지 말고, 저 요란스러운 베일 밑의 저 거동, 저 안색, 저 오동통한 볼을 보라. 그녀는 이런 것으로나 프랑스어로 말한다. 그 다음에 건강이 더 좋아지지 않는 예는 드물다. 이 소질만은 속이지 못한다. 이런 격식을 차리는 자태는 앞이나 꾸밀까, 자기 뒤는 그다지 가다듬어 주지 못한다. 그것은 밖에서 빌려 온 것이고, 자기 속을 내어 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릴 적에, 지금도 살아 있지만, 한 점잖고 대단히 예쁜 귀부인이 왕공의 과부 신분으로는 우리의 관습이 허용하는 이상의 몸치장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책망하자 그녀는 "그건 내가 새로운 친교를 맺지 못한 까닭이오. 그리고 나는 재가할 뜻이 없소" 하고 말하였다.

사례 1. 이탈리아에서 젊은 플리니우스의 집 옆에 살던 한 이웃(p818∼819)
사례 2. 파에투스 케킨나의 아내 아리아 (p 819∼821)
사례 3. 폼페이아 파울리나. 세네카의 부인 (p821∼823)


36.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처음이자 마지막 시인 825∼828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호메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 인물을 감탄스럽고 거의 인간 조건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섞어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는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우며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크리시포스와 크란토르보다도 더 능란하게
더 완전하게 말한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다른 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무궁무진한 샘처럼
피에리아(詩神들의 고향)의 물에
시인들은 입술을 축이러 온다.                                                                                    (오비디우스)

또 다른 자는 말하기를-                            

헬리콘(보이오티아 접경의 산, 중턱에 시신(詩神)들의 제전이 있었다) 시신들의 길동무들을 더하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호메로스만이
별무리의 높이에 오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를-

그의 풍부한 원천에서 후세의 시인들은 그들 시가에 물을 길었고
단 한 사람의 재보로 부유해져서
감히 수많은 작은 하류로
물을 끌어대는 큰 강이다.                                                                                           (마닐리우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는, 호메로스는 군사 훈련에 대단히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라케데모니아 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나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마호메드라는 이름을 두 번째 가진 터키 황제가 교황 피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는 트로이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나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 인들에 대해서 헥토르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어째서 이탈리아 인들이 내게 대항해서 단결하는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825∼828쪽)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대성 828∼829

또 하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계획을 시작한 나이, 그가 그렇게도 영광스런 계획을 완수하는 데 쓴 방법이라는 것이 대단치 않다는 것, 그가 그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경험 많은 장수들 사이에 권위를 세워서 그들을 따라오게 한 일, 그 모험적이며 거의 철없다고 할 만한 하고많은 그의 업적을 운이 품어 주고 밀어 준, 예사로움을 넘어선 하늘의 은총 등을 고려해 보면,

그의 무한한 욕구에 장애되는 모든 것을 부수어 가며
파괴의 한가운데에서 혈로를 여는 기쁨을 맛보며      (루카누스)

이 위대성은 33세의 나이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땅 전체를 승리자로서 거쳐 갔고, 반생 동안에 인간의 천성이 성취할 수 있는 궁극에 도달했으며, 그래서 인간을 초월한 무엇인지를 상상해 보지 않고는, 정상적인 생명의 폭을 가지고는 용덕으로, 그리고 운으로 그의 정당한 지속 기한과 성장을 상상해 볼 수 없을 정도로 된 일, 그의 군사들 속에서 여러 왕실들이 가지를 쳐 나가게 하고, 죽은 뒤에도 군대의 부대장들인 네 명의 상속자에게 세계를 분할하여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이 방대한 영토를 유지하며 오래도록 계속 된 일, 정의·절제·관후성·약속을 지키는 신의, 자기 가족들에 대한 사랑, 피정복자에 대한 인간성 등 하고많은 탁월한 덕성들을 가지고 있던 일.

아울러 그의 부지런함·예측·참을성·훈련·책략·호방·결단성 그리고 한니발의 권위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사람들 중의 제일인자였던 행운 등의 하고많은 군사적 덕성, 기적이라고까지 보고 싶은 인물의 희미한 미모와 성품, 그렇게도 불그레하니 화색이 도는 젊은 얼굴 밑의 그 자태와 그 존경할 만한 몸가짐.

그의 학문과 능력의 탁월성, 그 순수하고 명쾌하고 오점과 시기심으로 더럽혀진 일이 없는 오랜 영광의 지속과 위대성,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오래도록 그의 메달을 몸에 지닌 자에게는 행운이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경건한 신념으로 되었던 사실, 다른 역사가들이 어느 왕이나 왕공들의 공훈을 두고 쓴 것보다도 더 많이, 왕들과 왕공들 자신이 그의 공훈에 관해서 기술하였고, 다른 역사를 경멸하는 마호메트 교도들이 지금까지도 다만 그의 역사에는 특권을 주어 이것을 용인하고 숭앙하는 사실들을 고찰해 본 자이면, 그는 이 모든 것을 뭉쳐 생각해서 단 하나 내 선택에 의문을 품게 할 수 있었던 카이사르보다도 내가 역시 그를 택한 것이 옳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공훈에는 그 자신의 힘이 더 많았고, 알렉산드로스의 공훈에는 운의 힘이 더 많았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여러 면에서 대등하였고, 카이사르가 어느 점에는 아마도 더 위대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여러 군데에서 황폐시켜 나간 두 불덩이거나 또는 두 급류였다.

소리내며 타는 마른 숲과 월계수 숲 속에
맹렬한 기세를 떨치며 번지는 화염과도 같고
신속히 고산 준령에서 떨어져 내려
물거품 던지는 급류가 소란스레 대해로 달려가며
모든 것을 파괴하여 그 통로를 터 나가듯.      (베르길리우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야심엔 더 많은 절제가 있었다 하여도, 그것은 자기 나라의 궤멸과 세계의 전반적인 악화에 그의 낮고 추한 목적을 두었던 만큼, 너무 심한 불행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모든 점을 종합해 저울질해 보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편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다.


37. 자손들이 조상을 닮음에 대하여


철 맞추어 생명을 내놓지 않는 자에게 834

세월이 그들과 오래 교제하는 자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는 여러 선물들 중에도 내가 수락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이 골라 주었더라면 좋았을 성싶다. 그들은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흉측하게 생각하던 것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이것은 노년기에 일어나는 모든 재앙들 중에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고, 이렇게 먼 길을 가다가는 결국 어떤 불쾌한 일에 걸리고 말 것이라고 혼자 여러 번 생각했다. 나는 이미 떠날 시간이 되었다고, 외과의들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끊어 낼 때의 규칙을 따라서 이 인생을 생짜로 그 알맹이에서 잘라 내야 하는 것이고, 철 맞추어 생명을 내놓지 않는 자에게 대자연은 아주 호된 높은 이자를 물리는 습관이 있다고 어지간히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함쳐 볼 일 836∼837


극단적인 재앙을 당한 자에게 점잖게 차린 자세를 요구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다. 행동만 떳떳이 해 나간다면 언짢은 얼굴을 해도 좋다. 신체가 비탄함으로써 괴로움이 좀 멀어진다면 그렇게 할 일이다. 몸을 흔드는 것이 기분에 좋다면, 멋대로 곤두박질이건 수선이건 떨어 볼 일이다. 만일 소리를 힘껏 맹렬하게 밖으로 내질러서(여자들이 해산할 때에는 그것이 도움이 된다고 어떤 의사들이 말하듯), 아픔이 어느 정도 풀어지는 듯하다면, 또는 그것으로 아픈 생각이 헛갈린다면, 악을 써서 고함쳐 볼 일이다. 이 소리에게 나오라고 명령은 하지 말자. 그러나 나오는 것은 허가하자. 에피쿠로스는 현자에게 아플 때에 소리지르는 것을 허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역사(力士)들도 역시 그들 적수를 강타할 때에 철장갑을 내휘두르며 소리지른다. 심오한 발성으로 전신이 단단해지고 타격이 더 맹렬히 내리쳐지기 때문이다."(키케로) 우리는 이런 쓸데없는 규칙으로 애쓰지 않아도 고통만으로 할 일이 많다.

 

기적의 모든 난해성보다 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괴상한 일 839

우리가 여느 때 보고 있는 사물들 중에도 기적의 모든 난해성보다 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괴상한 일들이 많다고 본다.


도대체 이 정액 한 방울이라는 것이 무슨 괴물이기에 거기서 우리가 생겨나며, 거기에 우리 조상들의 육체적 형태뿐 아니라, 그 사상과 경향의 흔적까지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 물방울은 어디다 이 무한한 수의 형태를 깃들이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이 물방울들은 종잡을 수 없게 혼란된 추이로, 증손자가 증조부를 닮고 조카가 삼촌을 닮는 이런 유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 내가 이 담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친에게서 받은 것이라 믿을 만하다. ······
 
어디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 결함의 성향은 부화되고 있었던 것일까? 부친이 이 병에 걸리기까지에는 아직도 시일이 멀던 시절에 그가 나를 이뤄 낸 그 실체의 변변찮은 한 조각이, 어떻게 이렇게도 굉장한 사태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한 어머니에게서 나온 그 많은 형제들과 자매들 중에 지금까지 나 혼자만 40년이 지난 뒤에 내가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정도로 어떻게 그토록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인가? 누가 내게 이 추이에 대해 설명해 준다면, 나는 그만큼 다른 기적들도 그가 바라는 대로 믿어 줄 것이다.



건강 841

건강이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며, 사실 그것을 추구하여 시간뿐 아니라 땀과 수고와 재산과 생명까지도 사용할 만한 단 하나의 것이다. 더욱이 건강 없이는 생명은 우리들에게 괴롭고 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탐락도 예지도 지식도 도덕도 건강 없이는 흐려지고 사라진다.


의약을 몰라서 844

누가 라케데모니아 인에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자, "의약을 몰라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죽어 가면서 의사들이 자기를 죽였다고 끊임없이 소리질렀다. 못난 역사(力士)가 의사가 되었다. "잘해라" 하며 디오게네스가 그에게 말했다. "너 참 잘했다. 전에 너를 쓰러뜨리던 자들을 이번에는 네가 쓰러뜨릴 것이다."


그들의 기술을 원망한다 859


나는 그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술을 원망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타서 이득을 올린다고 크게 책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일 대부분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업보다 값어치가 못하거나 더 대접받는 많은 직업들이 사람들을 기만하는 일밖에 다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나의 생각)

증권회사 영업사원들이 하는 일이 떠오른다. '그들의 기술'이 고객들의 어리석음을 틈타서 이득을 올리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나는 살아가는 데 쓸모없는 보배에는 결코 영수증을 떼어 주지 않습니다. 862∼863

나는 살아서보다 죽은 뒤에 내가 더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심정은 우습습니다. 그러나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좋게 보이려는 생각보다는 장래에 명성을 연장시킬 걱정이 더 컸으니까요.

내가, 세상이 칭찬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질 수 있는 사람들의 축에 든다 하여도, 나는 그것을 당겨서 치러 주기를 요구하고, 다음의 의무는 말소해 주겠습니다. 그 칭찬은 길게 끄는 것보다는 속이 차고, 지속하기보다는 더 충만하게 서둘러서 내 주위에 뭉쳐 쌓아 줄 일입니다. 그리고 내 지각이 사라지고 동시에 그 달콤한 음성이 내 귀에 울려 오지 않을 때에는 이 칭찬도 과감하게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과의 교섭을 포기하려는 이 시간에, 새로 나를 추천해서 그들 앞에 내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심정일 것입니다. 나는 살아가는 데 쓸모없는 보배에는 결코 영수증을 떼어 주지 않습니다. 내가 어떠한 자이건, 나는 종잇장으로 된 일보다는 다른 일로 받고 싶습니다. 내 기술과 기교는 나 자신을 더 가치 있게 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내 공부는 행할 줄 알기 위한 것이지, 글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인생을 만드는 데 온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내 직분이고 내 사업입니다. 나는 다른 일꾼은 되어도 책 만드는 일꾼은 아닙니다. 나는 현재의 본질적인 편익에 소용되기 위해서 능력을 바란 것이지, 내 후계자들에게 저축과 예비 재산을 쌓아 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장점을 가진 자는 그것을 자기 행동 습관에, 여느 때의 말과 행동에, 사랑하거나 싸우는 행동에, 놀음에, 잠자리에, 식탁에, 자기 일처리에, 자기 집 세간살이에 드러낼 것입니다. 내가 보는 바 추레한 잠방이를 만들어 입고 좋은 책을 지어 내는 자들은, 내 말을 믿었더라면 먼저 잠방이를 만들어 입었을 것입니다. 스파르타 인에게 훌륭한 군인보다 훌륭한 수사학자가 되고 싶은가를 물어 보십시오. 나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내게 밥을 차려 주는 자가 없다면 차라리 익숙한 요리사가 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부인, 글 쓰는 데는 유능한 인간이고, 다른 데서는 쓸모없는 바보 인간이라는 따위의 칭찬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요. 나는 내 능력을 사용할 자리를 그렇게 못나게 골라잡았다기보다는 차라리 여기저기서 바보로 통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런 어리석은 수작으로 어떤 새로운 명예를 얻으려고 기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을! 865


나는 건강과 같은 그 견실하고 살 붙고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쾌락을 공상적이고 정신적인, 바람과 같은 쾌락과 바꾸려고 할 정도로 내 마음이 부풀어올랐거나 바람이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영광은 에이몽의 네 아들들의 영광이라고 해도, 그 때문에 담석증을 세 번이나 심하게 겪어야 한다면, 내 기분과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비싸게 사들이는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건강을!


털 두 개와 씨앗 두 낱알이 똑같아 본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 865


나는 나와 반대되는 사상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 판단력이 남의 것들과 합치되지 않는 것을 본다고 겁을 내거나, 그리고 사람들의 방향과 파당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사람들과의 교제에 서로 통하지 않고 지낼 생각은 가져본 일이 없다. 그 반대로 다양성이라는 것은 자연이 좇고 있는 가장 전반적인 방식이며, 정신은 더 부드럽고 더 많은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물질로 되어 있다. 이 다양성은 육체보다 정신에 더 많기 때문에 나는 우리 기분과 의도가 합치하는 것을 보는 일이 더 드물다고 본다. 그래서 세상에 두 의견이 똑같아 본 일이 결코 없었던 것은 털 두 개와 씨앗 두 낱알이 똑같아 본 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견의 가장 보편적인 소질, 그것은 다양성이다.

 

(제2권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이거, 저기서 따왔군! 595

나는 철학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한다. 철학은 너무나 여러 가지 형태를 가졌고, 말해 놓은 것도 너무 많아서, 우리의 몽상이나 잠꼬대 따위도 모두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의 망상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그 속에 없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다.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을 정도로 졸렬하고 어리석은 말은 찾아볼 수 없다."(키케로) 그래서 나는 "아무렇게나 나오는" 생각을 더 자유롭게 사람 앞에 내놓는다. 이런 것은 어디서 본뜬 것이 아니고 내게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옛 사람들의 심정과 닿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렇다고 누가 "이거, 저기서 따왔군!" 하고 말해서는 안 될 일
이다.


공정치 못한 불균형 599


영혼의 힘과 효과들은 여기서, 다른 데서가 아니라 이 곳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혼의 완벽성 전부가 헛되고 무용한 일이 된다. 영혼의 영생불멸은 현상태를 위해서 보상되고 인정되어야 하며, 오로지 인간 생명을 위해서 영혼은 책임져야 한다. 영혼에게서 수단과 힘을 박탈해 놓고, 그것이 사로잡히고 갇혀서 허약하고 병약해 있는 동안, 또 이 세상에서 강제받고 억압되어 있는 동안, 이 영혼을 무장 해제시켜 두고, 아마도 한두 시간밖에 못되는 시간, 기껏해야 한 세기밖에 못 되고, 무한에 비하면 한 순간밖에 안 되는 너무나 짦은 시간에 구애되어, 저 무한하고 영원한 지속 위의 판결과 처단을 내리고, 이 간극의 순간을 가지고 그의 온 존재를 결정적으로 조정하고 처리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날 것이다. 이렇게도 짧은 인생을 살았다는 결과로, 영원의 보상을 치르거나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공정치 못한 불균형이 될 것이다.


미친 생각 602


사실 반드시 멸할 자를 영원자에게 결합시키고
둘 사이에 공통의 마음과 상호 반영이 있다고 상상함은 미친 생각이다.
당연히 멸할 자를 영원의 불멸자에게 협동하여
폭풍우의 사나운 위세를 감동하도록 결합시키는 시도보다
서로간에 더 반발적이고 이질적이고 더 충돌할 일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루크레티우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같이 죽음에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영혼은 나이의 무게 밑에 합해 쓰러진다.     (루크레티우스)


영혼의 영생불멸에 대한 반대사상 602-603


키케로가 최초로 소개한 영혼의 영생불멸에 대한 반대 사상은, 적어도 서적에 밝혀진 바로는 툴루스 왕의 시대에 페레키데스 시루스에 의해서 시작된다고 하는데(어떤 사람은 탈레스의 착상이라고 하고, 어느 사람은 다른 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의문을 남겨 두고 취급된 인간 지식의 일부이다. 확고한 독단론자들은 이 점에 관해서는 아카데미아(플라톤 학파)의 그늘에 의지해서 숨어 있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증명하기보다 차라리 약속하고 있는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사물로', 흔들리는 신념을 가지고 다루는 옛 사람들 대부분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키케로를 가리킴)는 가장 난삽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뜻의 구름 속에 숨어서, 이 문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판단에 관해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토론거리를 남겨 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 견해가 두 가지로 그럴듯하게 보였다. 하나는 영혼의 영생불멸 없이는 세상 사람들이 놀라울 만큼 신용하며 존중하고 있는 영광에 관한 공허한 희망을 세워 볼 기초가 없어지는 것이며, 또 하나는 플라톤이 말하듯 인간 정의의 불확실하고 침침한 시야에서 악덕이 죄를 벗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언제까지나 하늘의 정의가 추구하는 목표로 남아서, 즉 죄인들이 죽은 뒤까지 그들의 책임이 추궁된다는 생각이 대단히 유익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욕망하는 자의 몽상 604


정신의 영생불멸에 관한 정당하고 명백한 확신에 가장 완고한 자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힘으로 이것을 증명하기에 얼마나 모자라고 무력한 처지에 있는가를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것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욕망하는 자의 몽상이다"(케케로)라고 옛 사람은 말했다. 인간이 이 사실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발견하는 진리는 운명과 우연의 덕택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를 손에 잡았을 때에도 이를 파악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고, 그의 이성은 이것을 이용할 힘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성과 능력으로 생산된 사물들은 진실하건 거짓이건 모두 불확실성과 힐난을 면치 못할 것들이다.


논쟁과 불화를 의미하는 것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604

하느님이 인간 사회라는 작품을 혼란시키는 수단으로 쓰신 저 방언들과 언어의 잡다성은 인간 지식의 헛된 구조를 수반하며, 그것을 혼란시키는 사상 사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논쟁과 불화를 의미하는 것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이 인간 지식의 구조를 뒤섞어 놓으시는 것은 유익힌 일이다. 만일 우리가 지식의 한 낱말이라도 갖게 된다면 누가 우리를 제어할 것인가? "우리에게 유익한 사물의 지식을 감추는 암흑은 겸양을 위한 훈련이며, 오만에 대한 제어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성자의 말씀은 대단히 내 마음에 든다. 우리의 맹목성과 우둔성은 어느 정도의 오만하고 분수 넘치는 수작이라고 우리를 밀어 내지 않을 것인가?


솔직하게 고백하자 604∼605

내 문제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영원한 복지의 향락을 이루는 영생불멸이라는 과실을 오로지 하느님의 두터운 덕에서 받는 것인 이상, 우리가 오로지 하느님께, 그리고 그의 은혜와 그렇게도 고귀한 신앙적 진리의 혜택에 매여 지내게 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만이, 그리고 신앙만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자. 왜냐하면 이것은 본성의 , 그리고 우리 이성의 가르침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특권 없이 인간의 존재와 그의 힘을 안으로 밖으로 다시 시험해 보는 자, 또 아첨하지 않고 인간을 똑바로 쳐다보는 자는 거기에서 죽음과 흙냄새밖에 다른 것을 느끼게 하는 아무런 효율도 소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오는 식 607

인간 오성이 모든 사물들을 궁극까지 탐구하여 지배하려고 하다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인생의 오랜 생애의 힘들고 어려움에 지쳐서 지내다가 마침내 다시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오는 식이다.


이런 연장들 617


우리가 오성에 무엇을 받아들였건 우리는 거기에 그릇된 일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또 잘 모순되고, 그르치는 바로 이 연장들을 가지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연장들은 아주 가벼운 사정 때문에 잘 기울고 틀어지기 쉬운 만큼, 그것이 온당치 않게 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의 이해력과 판단력 및 심령의 소질들은 대개 신체의 움직임과 변화에 따라 영향받는 것이며, 이런 변화가 계속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보다 건강할 때에 정신이 더 개운하고, 기억력이 빠르며 사고력이 더 새로운 것이 아닌가? 기쁘고 유쾌할 때에는 슬프고 우울할 때보다 더 우리 심령에 나타나는 사물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카툴루스나 사포의 시가 인색하고 빽빽한 늙은이에게나 기운차고 정열에 찬 청년에게나 마찬가지로 즐겁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가?


기분파 619


내가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허영과 양심은 감히 말할 용기도 안 난다. 내가 디딘 발은 너무 불안정하고 자리잡히지 못하여, 걸핏하면 쓰러질 듯 금세 근뎅거리고, 내 시각은 너무 혼란해서 배고플 때에는 배부를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

내 몸이 건강하고 청명한 날씨가 웃음을 띠어 주면, 나는 정말 사귈 만한 친구이다. 발가락에 티눈이 박히면 나는 기분 나쁘고 불쾌하고 사귀지 못할 인간이 된다. 말이 똑같은 보조로 걸어가도 어느 때는 거칠게, 어느 때는 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똑같은 길이 이 시간에는 더 가깝게, 다른 때에는 더 멀게 보이며, 똑같은 형태가 이때는 더 낫게, 저때는 더 못하게 느껴진다. 이제 무슨 일이라도 하려다가 금세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진다. 이 시간에는 내게 유쾌한 것이 어느 때에는 내게 괴로워질 것이다.

내 속에는 조심스럽지 못한 이 우발적인 충동이 수없이 일어난다. 떄로는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며, 때로는 화를 잘 낸다. 이 시간에는 고민이 내 속에 우세하다가도, 저 시간에는 쾌활성이 우세하다.


형편없는 뭉치 620


내가 책을 들여다보면 어떤 문장에서는 탁월한 우아미를 발견하며 마음조차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그런데 다른 때에 다시 그것을 읽어 보면 아무리 뒤적거리고 다시 돌아와 보아도, 아무리 접어 보고 만져 보아도, 그것은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형편없는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쓴 글에서도 처음 내 생각의 모습은 늘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더 나았던 첫번 생각을 놓치고는 일부 이것을 고쳐 쓰며 새 뜻을 넣어 주려고 애를 쓴다.


왔다리 갔다리 620

나는 왔다갔다하기밖에는 하지 않는다. 내 판단력은 늘 진척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허공에 떠서 헤매며-

광막한 대해에 광풍에 쉽쓸린 조각배와 같다.      (카툴루스)

나는 여러 번(내가 즐겨 하는 일이지만) 재미로 내 견해와 반대되는 의견을 주장해 보고 나면, 정신을 이편으로 전념하여 돌아서다가 너무 거기에 집착해서, 내가 첫 번째 의견을 가졌던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며 그 견해를 버리게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내가 기울어지는 곳으로 거기 끌려간다. 그리고 내 무게에 실려 간다.


거의 같은 말을 할 것 620


누구나 다 나처럼 자기를 살펴본다면, 자기에 관해서 거의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설교가들은 말하거나 느끼는 감각에서 자기들의 신앙심이 더 열렬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지각이 더 냉철하고 침착할 때 하는 것보다도 화가 치밀어오를 때에 우리 의견을 옹호하려고 더 열중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마음에 감명을 주고 한층 맹렬하게 찬성하며, 그 사상을 품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가 단순히 어떤 소송 사건을 변호사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의심스러운 듯 자신 없이 응대한다. 그는 이 편을 들건, 저편을 들건 무관하다고 그대는 느낀다. 그대가 돈을 듬뿍 쥐어 주어서 그가 바싹 대들며 사건에 분개하게 해 놓았는가? 그가 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가? 그가 이 사건에 의지를 열중시켰는가? 그의 이성과 지식은 동시에 거기에 열중한다. 여기 명백하고 의심 없는 진실이 그의 오성 앞에 나타난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며 그것을 진짜로 믿고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주색에 빠진 흥분 없이는 621


욕심은 데미스토클레스를 흥분시켰고, 데모스테네스를 흥분시켰다. 그리고 철학자들을 부추겨서 애쓰고 철야하며 편력하게 하였다. 이 욕심들이 우리를 명예와 학문과 건강 등, 유익한 목표로 인도한다. 그리고 저 번민과 불안을 참아 내는 비굴성은 고행과 후회의 심정을 양심 속에 가꾸어 주고 하느님이 내리는 재앙과 국가가 징계하는 형벌을 우리가 당하는 징벌로 느끼게 하는 데에 소용된다. 동정심은 후덕한 마음에 박차(拍車)가 되고 우리 자신을 보존하고 지배하려는 조심성은 공포심에서 깨어난다. 사람들은 대망을 가졌던 까닭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행동을 행하였던가? 그리고 오만은 얼마나 큰 일을 하였던가? 어떠한 탁월하고 장쾌한 덕성도 결국 주색에 빠진 흥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의 생각)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오는 '오만과 허영의 긍정적 역할'을 떠올리게 한다.


예언자와 점쟁이 622

광분이 죽음의 심상 때문에 우리의 이성을 뿌리 뽑으면, 우리는 예언자와 점쟁이가 된다. 이보다 더 내가 철학을 믿게 할 일은 없다. 거룩한 진리가 철학 정신에 부어넣은 저 순결한 열성이 철학에게 그 제언과는 반대로, 우리 심령의 평온 상태, 안정 상태, 철학이 심령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건전한 상태가 심령의 최선의 상태가 아님을 고백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잠 깨어 있는 때가 잠든 때보다 더 잠들어 있다. 우리의 예지는 광증보다 더 예지롭지 못하다. 우리의 꿈은 사색보다 더 가치가 있다.


옛 사람들의 문장 624


옛 사람들의 문장은(그 중에 충만하고 견실한 좋은 문장들 말이지만) 거의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를 유혹하고 감동시키며, 내가 읽고 있는 작가가 가장 견고하게 보인다. 그들이 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더라도, 내게는 그 나름대로 다 옳게 보인다. 재능있는 두뇌들이 무엇이든지 진실하게 보이고 싶은 것은 힘 안들이고 그렇게 보여 주며, 나같이 단순한 머리를 속이려고 아무리 해괴망측한 일이라도 그럴듯하게 분장해서 보여 주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증명이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 나온다 625


이리하여 세월의 회전은 사물들의 운명을 변경시킨다.
전에 진귀하게 간주되던 것은 영광을 상실하고
마침내 다른 사물이 그것을 계승하여 경멸의 암흑에서 기어나온다.
매일 평가는 높아지며, 이 발견의 찬사가 꽃처럼 만발하며
그것은 인간들에게 경이로운 신용을 누린다.      (루크레티우스)


미다스 왕 이야기 632


미다스 왕은 자기가 만지는 것이 모두 황금이 되게 하여 달라고 신에게 요구하였다. 그의 소원은 성취되어서 포도주가 황금이 되고, 그의 빵과 이불의 털도 황금, 그의 셔츠와 옷도 황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소원이 성취된 것을 누리기에 지쳤고, 감내하지 못할 보물을 선물받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축원을 풀어 달라고 기도해야만 하였다.

부유하고 동시에 궁색한 이런 새로운 불행에 놀라서
그는 재물을 멀리하며,
전에 갈망하던 것을 지금은 혐오한다.      (오비디우스)

(나의 생가)

'부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다만 우아미와 연령과 미모를 고려할 일 640

아르케실라오스는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는 어느 방면에서 하건, 어느 장소에서 하건 상관 없는 문제라고 하였다. "여자의 육체를 탐하는 것은 본성이 요구하면 혈통과 문벌과 지위는 고려할 것이 못 되며, 다만 우아미와 연령과 미모를 고려할 일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한다."(키케로)


사람을 심고 있소 642

한 철학자가 그짓을 하다가 들켰다. 그게 무슨 짓이냐고 사람들이 물어 보자, "나는 사람을 심고 있소" 하고 담담하게 대답하며, 그짓을 하다가 들키고도 그가 마늘을 심고 있는 것을 남이 본 것처럼 얼굴빛도 붉히지 않았다.


길 한복판에서 배가 고프니까 642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보는 데서 수음을 하며, 구경꾼들을 향해서 배도 이처럼 문질러서 부르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누가 그에게 하필이면 한길에서 식사하느냐고, 왜 더 편리한 장소를 찾아가지 않고 큰길 복판에서 식사하느냐고 물어보자, "길 한복판에서 배가 고프니까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는 미인을 장식하는 꽃 652∼653


나로서는 호라티우스와 카툴루스의 시구를, 한 예쁘고 젊은 인물의 입으로 그 풍부한 음성을 가지고 노래하는 것을 침착하게 듣고만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이 충분히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논이 목소리는 미인을 장식하는 꽃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 프랑스 인이면 모두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자기가 지은 시를 낭독해 보이고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는데, 그 시는 종이에 쓴 것을 음조로 들은 것과는 같지 않으며, 내 눈으로 읽어 보면 귀로 들은 바와는 반대로 판단했으리라고 내게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발음은 그 재간에 맡겨진 작품에 가치와 풍류를 즐긴다는 신용을 얻고 있다. 이 점에서, 필로크세노스가 누가 자기 작품을 나쁜 어조로 읽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소유인 기왓장을 발로 짓밟아 부수며, "네가 내 것을 망치고 있으니, 나도 네 것을 부순다"고 하였다고 해서 그를, 화를 잘 내는 자로 볼 것도 아니다.


먼 곳의 일처럼 느끼짐 656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실제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면으로 추악하고 못난 여자들이
가장 큰 영광으로 숭배받고 총애받는 것을 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우리가 싫어하는 자는 더 못나 보인다. 괴로운 처지에 고민하는 자에게는 대낮의 빛도 흐리고 컴컴한 것같이 보인다. 우리의 감각은 심령의 정열 때문에 변질될 뿐 아니라 완전히 마비되는 수가 많다.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을 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대가 똑똑히 보는 사물에 관해서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에 따라서 마치 시간적으로 먼 일인 듯, 또는
먼 곳의 일처럼 느껴짐을 그대는 관찰할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656

우리 인생을 꿈에 견주어 본 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옳게 본 것이리라. 우리가 꿈을 꿀 때의 심령은 잠이 깨어 있을 때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살며 행동하며 모든 소질들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좀 무르고 흐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차이가 분명히 밤과 환한 대낮 사이 만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밤에서 그늘까지의 차이는 있다. 저 편에서는 심령은 잠자고 있다. 이 편에서는 다소간 졸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암흑이다. 킴메리아 인의 암흑이다.

우리는 잠자며 잠 깨어 있고, 잠 깨어서 잠자고 있다. 나는 잠을 자면서 똑똑히 보지 못한다. 그러나 잠이 깨어 있을 때에도 언제나 흐리지 않게 충분히 또렷하게 보이는 적이 없다. 하기는 잠이 깊이 들 때에는 꿈을 잠재우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이 깨어 있음은 결코 깨끗이 꿈을 씻어 흩을 만큼 깨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꿈은 깬 자들의 꿈이며, 꿈보다 더 나쁜 꿈이다.

우리의 이성과 심령은 잠자는 동안에 나오는 공상과 개념을 받아들이며, 심령이 낮의 행동에 대해서 인정하는 바와 같은 권위를 꿈속의 행동에도 주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의 꿈꾸는 일이며, 깨어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잠이 아닌가' 하고 의문에 붙이지 않는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 664∼665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 다시 말하면 출생한 일이 결코 없었고, 영원히 끝이 없을 것이며, 시간이 그것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는 일이 없는 것이다. 시간이란 움직이는 사물이며, 항상 그림자같이 나타나고, 그 재료는 항상 흐르며 유동하고, 안정해서 머무른다든지 항구적인 것이 없고, 그것에 '전에', '뒤에', '있었던 것', '있을 것'이라는 말이 해당되는 것들은, 그것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닌 것을 단번에 보여 준다. 왜냐하면 아직 존재로 있지 않은 것, 또는 이미 존재로 있기를 멈춘 것을 존재한다고 말함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고, 아주 확실한 거짓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그것으로 시간의 이해를 세우며 유지하는 것같이 보이는 '현재'·'순간'·'지금' 같은 말로 말하면, 이성은 그것을 발견하며, 당장에 그것을 부숴 버린다.

이성은 즉석에 그것을 쳐서 미래와 과거로 갈라 버린다. 마치 필연적으로 둘로 갈라 놓고 보려는 식이다. 자연을 측량하는 시간에서와 같이, 측량당하는 자연에게도 일은 마찬가지로 되어 간다. 자신에게도 머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지속되는 것도 없고, 그 반대로 거기서 모든 사물들이 출생되었거나, 출생하고 있거나,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니 단 하나 존재하는 신을 가지고, 그가 전에 있었다든가 장차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지속할 수 없거나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의 변화·통과·변천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신 혼자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어느 시간의 척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겪을 수 없고 움직임이 없으며, 시간으로 측량되지 않고, 어떤 쇠퇴도 당할 수 없는 영원성에 따라서 존재한다.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뒤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더 새롭다는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것도 없고, 단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유일한 '지금'을 가지고 영속을 채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는 있었다'라거나, '그는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이, 그 신 하나밖에는 진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지어야만 할 일이다.

"만일 인간이 인간성을 초월하지 못한다면, 오, 인간이란 얼마나 비굴하고 더러운 사물인가!" (세네카)


부조리하다 666

* 신 없이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참 좋은 말이고 유익한 욕망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조리하다. 왜냐하면 손바닥보다 더 큰 것을 쥐려고 하고, 팔에 넘치는 것을 안으려 하며, 우리의 다리 길이보다 더 길게 발을 떼어 놓자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과 인간성을 초월한다는 것도 안 될 말이다. 그는 그의 눈으로밖에는 보지 못하고, 그의 파악으로밖에는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타인의 죽음 판단하기


지난날을 찬양하며 현재를 비난하지 않는 자를 본 일이 있는가?
667


우리가 사물들을 두고 가는 것이 서러울 정도로 사물들 또한 우리를 잃는 것이 서러우리라고 생각한다. 늙어서 자기의 곤궁과 설움을 세상과 인간들의 인심 탓으로 돌리고, 지난날을 찬양하며 현재를 비난하지 않는 자를 본 일이 있는가?


짧은 죽음 671


카이사르는 누가 그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죽는 것이 가장 좋겠느냐고 묻자, '예측되지 않은 가장 짧은 죽음'이라고 대답했다. 카이사르까지 이렇게 말한 터에,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비굴할 것은 없다.

짧은 죽음은 인생의 최고 요행이라고 플리니우스는 말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할 마음이 안 난다. 죽음을 흥정하기가 두렵고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죽을 결심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없다. 고문을 당할 때에, 인생의 종말로 달음질치며 형의 집행을 서둘러서 재촉하는 자들이 보이지만, 그들은 결단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죽음을 생각할 시간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죽는 것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의 괴로움이 정말 싫다는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린 것은 무관하다.   (키케로)


혁혁한 일 671


내 생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생애 중에, 사형 선고를 받고 30일 동안 이 생각을 되새기며, 그 동안 아무런 흥분도, 기분이 변하는 일도 없이 긴장하거나 정도가 심해지지 않고, 오히려 가라앉고 누그러진 행위와 언동으로 이 사건을 음미해 간 태도보다 더 혁혁한 일은 없다.


15. 우리의 욕망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커진다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675


어떠한 이치라도 그 반대의 이치가 없는 것은 없다고 철학자들 중의 가장 현명한 학파(피론 학파)는 말한다. 나는 방금 옛 사람(세네카)이 인생을 경멸하며 "언젠가는 없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밖에는 어떠한 보배도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 못한다", "한 사물을 잃어버렸다는 비통과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은 똑같다"(세네카)고 한 이 묘한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 말은 그것을 잃을 근심이 있으면 생을 즐긴다는 것이 진실한 재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어떤 보배가 내 것으로 확실히 되어 있지 않고 빼앗길 우려가 있는 경우, 그것에 더 한층 애착을 가지고 악착스레 틀어쥐며 매달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이 찬 기운이 있을 때에 더 잘 일어나듯, 우리의 의지는 반대에 부딪칠 때에 더 날카로워지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느낀다.

당연한 일로, 안일에서 오는 포만보다 더 우리 취미에 역하는 것은 없고, 희귀하고 얻기 어려운 일보다 더 우리 취미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에서 쾌락은 그것을 놓쳐 버릴 위험 때문에 더 증대한다."(세네카)

갈라여, 싫다고 해라.
쾌락에 고통이 없으면 사람은 포만을 느낀다.                                           (마르티알리스)

리쿠르고스는, 사랑을 생기있게 보존하려고 라케데모니아의 부부들이 숨어서밖에 자지 못하게 하였고, 부부가 함께 자다가 들키면 다른 사람들과 자는 것만큼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날 날짜 정하기의 어려움, 들킬 위험, 다음 날의 수치,

남모를 나의 생각, 나의 침묵
내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                                                             (호라티우스)

이것이 소스에 쏘는 맛을 준다. 사랑이라는 수작의 얌전하고도 부끄러움 많은 방식에서 얼마나 얄궂게 음탕한 장난이 나오는 것인가! 탐락은 고통으로 자극받기를 원한다. 탐락은 찌르르 쑤시는 때에 더 달콤하다. 창녀 플로라는 폼페이우스와 동침할 때는 반드시 그에게 자신이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정욕의 대상을 강력히 포옹하여 신체에 고통을 주며,
이빨은 흔히 입술에 자국을 남긴다.
그 대상이 무엇이건 이 대상 자체를 상해하려는
비밀스런 행동에서 사나움의 싹이 솟아난다.                                           (루크레티우스)

모든 일은 이렇게 돌아간다. 고통이 사물들에게 가치를 준다.

저 위대한 카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내가 자기 것인 동안은 싫어하더니,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다음에는 그 여자를 욕심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676

나는 내 종마장에서 늙은 말 한 필을 쫓아냈다. 이놈은 암컷 냄새만으로는 붙여 볼 도리가 없었다. 제 암컷들과는 일이 쉬우니까 바로 물려 버렸다. 그러나 다른 집 암컷들은 어느 것이 목장 부근을 지나기만 해도 귀찮게 이힝힝거리며 흥분하는 꼴이었다.

우리의 욕망은 내 손에 있는 것은 경멸하며 넘겨 버린다. 그리고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차지하려고 애쓴다.

그는 수중에 있는 것은 경멸하고
잡히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                                                                  (호라티우스)

우리에게 무엇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을 욕심 내게 하는 일이다.

그대가 애인을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는 머지않아 내 관심을 잃으리라.                                                   (오비디우스)

그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맡겨 둔다는 것은 경멸을 일으키게 하는 일이다. 결핍과 풍부는 똑같이 폐단이 되고 만다.

그대는 남은 재산에 골치를 앓고
나는 가난으로 골을 싸맨다.                                                                 (테렌티우스)


힘 안 들이고 쉽게 넘어오는 것도 실은 거북하다 677


욕심과 향락은 똑같은 고통 위에 사람을 둔다. 애인이 냉혹하게 굴면 괴롭다. 그러나 힘 안 들이고 쉽게 넘어오는 것도 실은 거북하다. 불만과 분노는 자기가 욕심내는 사물을 높이 평가하는 데서 나오는 만큼, 그것이 연정을 자극해서 열이 오르게 하며, 그 반대로 포만은 염증을 일으킨다. 이것은 무디고 둔하며, 지치고 잠든 열정이다.

여자가 애인을 오래 지배하려면
그를 경멸할 일이다!                                                                           (오비디우스)

업신여기거나 모욕하라, 애인들이여,
어제 거역하던 자가 오늘은 항복하리라.                                               (프로페르티우스)


가리는 꾀 677

포파에아가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꾀를 쓴 것은 애인들에게 더 비싸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자는 각기 내보이고 싶고, 남자는 각기 보고 싶어하는데, 왜 이 미인들은 발꿈치 뒤까지 가리는 것인가? 우리의 욕망과 그녀들의 욕망이 주로 거기 있는데, 어째서 여자들은 그 부분들을 겹겹이 가리고 있는 것인가? 우리네 여자들이 그 옆구리를 무장하는 저 성과 요새는 우리의 욕심을 도발하며, 우리를 물리침으로써 더 끌어 보려는 것밖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녀는 수양버들 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앞서 쳐다보아 주기를 바랐다.                                             (베르길리우스)

때로 그녀는 내 정열에 대해 옷으로 장벽을 쌓았다.                              (프로페르티우스)


처녀들의 부끄러움 타는 기술 678


처녀들의 부끄러움 타는 기술은 어디에 필요한가? 시치미를 떼고 냉정한 체하는 맵시, 엄격한 용모, 그리고 가르치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수작, 그것이 모두 우리 욕심대로 이런 장애를 극복하고 책망하고 유린하고 싶은 생각을 더 나게 하는 것밖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상냥한 애교와 어린애다운 정숙함을 미쳐서 놀아나게 하며, 이 존대하고 거만한 엄숙함을 우리 정열에 굴복시키는 일은 쾌락일 뿐만 아니라 허영심을 만족시킨다. "엄격함과 겸손과 정숙함과 절조를 정복함은 영광이 된다. 그리고 부인들에게 이런 수작을 쓰지 말라고 권하는 자는 여자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속이는 자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들의 마음은 공포로 떨리고, 우리의 말소리만 들어도 깨끗한 귀를 더럽혀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데, 다만 힘에 못 이겨서 우리가 귀찮게 구는 수작에 넘어간다고 믿어야 한다.


이탈리아에 가 보라 678

미모는 아무리 그 힘이 크다 해도 이런 방법의 중개가 없이는 맛들일 거리가 안 된다. 이탈리아에 가 보라. 거기에는 돈에 팔린 미인, 더욱이 매우 날씬한 미녀가 많은데, 그녀들이 자기를 예쁘게 보이려고 얼마나 색다른 방법과 기술들을 찾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나 사실 무슨 짓을 해도 공중 앞에 팔려 내놓은 몸이니, 그녀들은 언제나 약하고 기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성이 지닌 두 가지 같은 효과 중에, 우리는 적어도 더 많은 장애와 모험이 있는 편을 더 훌륭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식이다.


4백 년 이상 679


우리는 한번 결혼하면 그것을 풀어 볼 모든 방법을 없애고 있으니, 그 결속을 확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구속이 단단한 만큼, 의지와 애정의 결속은 더 풀어지고 느즈러져 있다. 반대로 로마에서 결혼이 그렇게 오랫동안 명예롭고 안정되게 한 것은, 아무 때건 원하면 서로 헤어질 수 있는 자유에 있었다. 그들은 아내를 빼앗길지도 모르니, 그만큼 더 아내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아무 때나 이혼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그들은 사백 년 이상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고 보냈다.


허용된 일은 매력이 없다.
금지된 일은 욕심을 도발한다.         (오비디우스)

이 문제에는 "징벌은 악덕을 깨뜨리기보다도 조장한다. 이런 것은 착한 일을 하려는 의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것은 이성과 훈련의 성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나쁜 짓을 하면서 들키지 않을 마음의 의지만 가꾼다"고 한 옛 사람의 견해를 여기에 결부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근절되었다고 믿은 악은
더 멀리 확대되고 있다.       (루틸리우스)


16. 영예에 대하여



웬일인지 모르지만 683

웬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신 속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믿는 것을 믿지 않고, 우리가 질책
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한다.


세평보다 더 운에 매인 일이 어디 있는가? 686

세평보다 더 운에 매인 일이 어디 있는가? "진실로 운은 모든 사물들에 지배력을 갖는다. 실제보다도 그의 변덕에 따라서 어떤 자는 올려 주고 어떤 자는 끌어내린다."(살루스투스) 행동이 세상에 알려지고 남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다.

자기 변덕대로 우리들에게 영광을 붙여 주는 것은 운이 하는 것이다. 나는 영광이 진실한 가치에 앞서 나가며, 흔히 상당한 거리로 가치를 초과하는 것을 보았다. 영광이 그림자를 닮았다고 맨 먼저 생각해 본 자는, 자기 생각보다 더한 일을 하였다. 이런 것은 두드러지게 헛된 일들이다.

영광은 어느 때는 본체보다도 훨씬 앞서 나간다. 그리고 어느 때는 본체보다 길이로 많이 넘친다.

(나의 생각)

나도 참 많이 보아왔다. '순전히 운에 달린' 영광과 세평들을......


착한 사람 687

자기가 착한 사람임을 사람들이 알아 주고, 그것을 알고 나서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인 까닭에 착한 사람이며, 자기 도덕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조건으로 착한 일을 하려고 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가 아니다.

수치스런 실패를 겪지 않은 용덕은
이름을 더럽힘 없는 명예로 빛난다.
그리고 속인들의 인기 따라 도끼를 들었다놓았다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


속인과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 688

한 아르팡의 토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 전체에서 사람 열두엇만 뽑아 내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경향과 행동의 판단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인데, 우리는 그것을 무지와 부정과 무절제의 원천인 속인과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에 맡긴다. 한 현자의 인생을 광인들의 판단에 매이게 하다니, 그것이 될 말인가?

"군중의 의지보다 더 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티투스 리비우스)


곧은 길 689


곧은 길은 그것이 곧기에, 또 내가 좇는 것이 아니라 해도 결국 따져 보면 그것이 일반적으로는 가장 좋고 유익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좇을 것이다. "신의 뜻은 명예로운 사물이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셨다."(퀸틸라아누스)

저 어리석은 로마가 무슨 일을 제창한다 해도
그대는 저 도량형기의 부정확한 지침은
찬성하거나 책망하지 말 일이다.
그대의 외부에서 그대 자신을 찾지 마라.      (페르시우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 691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일을 어떻게 말해 주는가 하는 것보다는 우리 말을 해 주는 것에 관심이 가며, 우리 이름이 어떻게 돌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만 하면 된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과 존속이 남의 손에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이름 694


사람들은 그렇게 작은 일을 가지고는 역사를 만들지 않는다. 한 제국이나 한 왕국을 정복하는 데에 대장이 되어 보았어야 한다. 카이사르 같이 늘 상대편보다 약한 군대를 가지고 52회의 지정된 전투에 승리를 거두었어야 한다. 1만 명의 선량한 동료들과 수많은 장수들이 그에게로 종군하다 용감하게 죽어 갔다. 그들의 이름은 그들의 처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밖에는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허황되고 공상적인 생명을 3년 동안 살기 위해서 694


우리가 눈으로 보는 훌륭하게 싸우는 사람들까지도, 전쟁터에서 쓰러진지 석 달이나 3년이 지나면, 마치 그들이 세상에 있은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떠한 인물들과 사적(事)들이 서적의 기억 속에 남는가를 정당하게 고찰해 보는 자이면, 누구든지 우리 시대에 행동이나 인물로서 어떤 권한이라도 주장할 수 있는 자가 대단히 적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우리는 용덕을 가진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그들 청춘에 정당히 얻은 명예와 영광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고민하며, 그들의 명성이 없어진 뒤까지도 당자들이 생존해 있는 것을 보아 왔는가? 그리고 이 허황되고 공상적인 생명을 3년 동안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하고 본질적인 인생을 잃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 일인가? 현자들은 이렇게 중대한 기도를 위해서는 더한층 훌륭하고 정당한 목표를 세운다.

"선행에 대한 보상은 그것을 수행한 사실이다."(세네카) "어떤 봉사의 과실은 그 봉사 자체이다."(키케로) 아마도 어떤 화가나 다른 장인이나, 또는 수사학자나 문법학자라도 명성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용서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도덕의 행동은 그 자체가 너무 고상해서 그 자체의 가치밖에는 다른 대가를 바랄 수 없다. 특히 인간의 허영된 판단 속에서 그것을 찾을 일이 아니다.


저 위대한 목매달아 죽일 놈 695

그렇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행할 의무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그릇된 생각이 대중에게 필요하다면, 만일 국민들이 그 때문에 도덕에 잠 깬다면, 만일 세상 사람들이 트라야누스의 추억을 축복하고 네로의 추억을 증오하는 것을 왕공(王公)들이 보고 감격한다면, 만일 옛날에 그렇게도 가공하고 두려움 받던 더 위대한 목매달아 죽일 놈의 이름이, 어떤 학생에게라도 그 일을 배우다가 그렇게도 모욕당하고 저주받는 것을 보고 왕공들이 깊은 인상을 받는 것이라면, 평판은 과감하게 키워 갈 일이며, 사람들은 될 수 잇는 한 이 평판을 가꾸어 갈 일이다.


명예와 양심 697


모든 명예로운 인간들은 자기 양심에 실수하기보다는 차라리 명예를 잃는 편을 택한다.


17. 교만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을 애증하는 분수 없는 심정 697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남을 업신여기며 잘난 체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품는 지나친 호평의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애증하는 분수 없는 심정이며, 우리를 실제 있는 것과는 다르게 보여 주는 것이 마치 사랑의 정열 때문에 마음속의 인물이 미와 단아한 품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며, 연모하는 자들은 혼란되고 변질된 판단력을 가지고 사랑하는 대상을 실제와는 달리 더 완벽한 것으로 보게 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나는 사람이 이 면에서 실수할까 염려해서, 자기를 잘못 판단하거나 사실보다 못난 것으로 생각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판단력은 모든 방면에 자기 권한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며, 이 문제에서도 다른 경우와 같이 진실이 보여 주는 대로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카이사르의 경우라면 그는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관 698

우리는 우리의 기관을 똑바로는 감히 부르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모든 종류의 방탕한 행동에 사용하기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압박받고 있는 것을 느끼는 일 699

교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일과 남을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에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내게 불쾌하고 동시에 부당하고 더욱이 폐스러운 것이라고 내가 압박받고 있는 것을 느끼는 일이다.


가장 그릇된 사상을 가꾸는 주요 원인 700


대체로 옛 사람들이 품던 인간 전체에 대한 사상들 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품으며 애착을 느끼는 것은, 우리를 가장 경멸하고 천시하고 무시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교만과 허영심을 공격하며, 철학 자체의 허약성과 무지와 미해결을 성심으로 인정할 때보다 더 잘 할 수는 없는 일로 보인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그릇된 사상을 가꾸는 주요 원인은 사람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과도한 기쁨 때문에 죽었던 시인 이야기 701-702


나는 무척이나 시가를 좋아한다. 남의 작품은 어지간히 알아본다. 그러나 사실 내가 시가를 써 보려면 어린아이 장난이 되어 버려, 스스로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다른 데서는 아무 데서라도 어리석은 수작을 할 수 있지만 시가에서는 못한다.

 

신들도 인간도

작품을 붙이는 기둥도

시인들의 평범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

 

우리 출판사 사옥 앞에 이 격언이 붙어 있어서, 그 많은 사이비 시인들이 작품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ㄹ까!

 

진실로 졸렬한 시인보다 더 자신을 가진 자는 없다.    (마르티알리스)

어째서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가? 선대(先代) 디오니시우스는 자기 재주 중에도 시짓는 것을 가장 자랑삼았다. 올림픽 경기 때에 그는 화려하기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한 수레들을 가지고 제왕답게 금박을 하고 수를 놓은 천막에 깃발을 날리며, 시인들과 음악가들을 시켜서 자기 시를 제출케 하였다. 그의 시가 낭독될 때에 처음에는 그 운율이 우아하고 탁월한 데서 민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 작품의 변변찬은 내용을 감식하게 되자, 그들은 처음에는 경멸하다가 점점 그 판단이 명확해지자, 금세 화를 내며 달려나가 그 깃발을 모두 쓰러뜨리고 찢어 내팽개쳤다. 수레도 역시 경기에서 아무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부하들을 실어왔던 배는 시칠리아로 귀환하지 못하고 폭풍우에 밀려서 타렌토의 해안에 가서 부서졌다. 민중들은 이것이 확실히 신들이 그들과 같이 이 못된 시에 분개한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난파에서 겨우 살아난 뱃사람까지도 이 민중들의 의견에 가담하였다.

 

그의 죽음을 예언한 신탁도 역시 어느 면에서 백성들에게 찬동하는 것 같았다. 그 신탁에는 디오니시우스가 자기보다 우수한 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 그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실려 있었다. 이것을 그는 자기보다 우세하던 카르타고 인들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이 예언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여러 번 승리할 기회를 저버리며 조절해 갔다. 그러나 그는 잘못 해석했다. 왜냐하면 신은 그가 아테네에서 자기보다 우수한 비극 시인들에 경쟁해서 《레네이아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상연시키고, 매수행위(買受行爲)와 부정으로 승리를 거두는 때를 그 시기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리 뒤에 그는 갑자기 죽었다. 얼마간은 그가 이때 느낀 과도한 기쁨 때문이었다.

 

 


평범한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701


나는 나를 평범한 부류에 속한다고 보는 그 사실 하나만을 빼놓고, 자신을 평범한 뷰류에 속한다고 본다. 가장 속되고 천한 결함을 가진 죄는 있어도 그런 것을 떳떳이 자백하지 않았거나, 변명해 본 죄는 없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다시 읽을 때에는 703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

나는 다시 읽을 때에는 얼굴을 붉힌다.
왜냐하면 많은 문장이 작가인 내가 판단하기에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 703
 


나는 늘 마음속에 한 상념과 뒤섞인 어떤 영상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와 같이 내가 써 내놓는 것보다 더 나은 형태를 보여 주는데, 나는 그것을 파악해서 전개시켜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상념 자체도 중간쯤밖에 못 된다. 내가 이것으로 추론해 보면 지난 시대의 풍부하고 위대한 심령들이 내놓은 작품들은 내 상상력과 소원의 극한을 훨씬 넘는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나를 만족시켜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나를 놀라 넘어지게 하며 감탄으로 넋을 잃게 한다. 나는 그들의 미를 판단하며 그 미를 눈으로 본다. 전부를 이해하는 것이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가 그런 것을 써 보려고 갈망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정도까지는 이해한다.



내 언어 705

내 언어는 유창하고 매끈한 맛이 없다. 오히려 거칠고 오만하며 멋대로 노는 방종한 경향이 있다. 내 판단으로는 아닐지라도 내 경향으로는 이대로가 내 취미에 맞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너우 이런 식으로 흘러서 기교와 허식을 피하려고 애쓰다가 도리어 다른 면으로 거기에 빠지는 것을 느낀다.

간결하려고 노력하다가
난삽함에 빠진다.      (호라티우스)


미모는 대단한 장점 706

미모는 사람들과의 교제에 추천되는 대단한 장점이며, 사람들 사이에 화합을 이루어 주는 제일의 방편이다. 사람이 아무리 거칠고 퉁명스럽다 해도 그 아름다움에 감명받지 않는 자는 없다. 육체는 우리 인생에 큰 몫을 차지한다. 그 역할은 크다. 그 때문에 신체의 구조와 기질을 존중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우리의 이 두 가지 주요 부분을 떼어서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다. 반대로 이 둘을 짝지어 맞춰 놓아야 한다.


반쪽의 존재밖에 709


청춘의 힘과 정기는 점점 없어지고
나이와 함께 우리는 늙어 간다.      (루크레티우스)

이제부터 내가 되어 갈 것은 반쪽의 존재밖에 없으며,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라지며, 내 자신에서 빠져나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하나하나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      (호라티우스)


이것이 단 하나 내가 노력하는 일 711


나는 우리가 자주 당하듯이 일이 여의치 않게 되어 가는 귀찮은 사건들을 감내할 만큼 마음이 강하지 못하고, 늘 긴장해서 일에 질서를 세우고 정돈하며 처리해 갈 수 없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내 일을 운에 맡기며, 모든 일이 아주 잘못되어 가는 것이라고 작정해 놓는다. 그리고 이 최악의 사태를 순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견디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단 하나 내가 노력하는 일이며, 나의 모든 사색을 그리로 돌리는 목표이다.


진흙구덩이에 박히더라도 712


길 가는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낭떠러지와 미끄러져 떨어지는 길을 피한다. 그보다는 진흙구덩이에 박히더라도 더 아래로 갈래야 갈 수 없는 단단한 길로 들어서서, 그 곳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런 만큼 나는 불행을 둘러맞추다가 생기는 불확실성 때문에 나를 단련시키지 않으며, 단번에 나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아주 순수한 불행을 당하는 편이 낫다.

(나의 생각)

'가치투자자의 기본 자세'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속는 서방보다 더 손해보기 마련 712

질투꾼은 속는 서방보다 더 손해보기 마련이다. 소송을 하기보다는 숫제 포도원을 빼앗기는 편이 흔히 불행이 덜하다. 가장 얕은 길이 가장 단단한다. 그것이 견실성이다. 거기서는 자신밖에 아무도 없다. 진실성은 여기에 기초를 두며, 전적으로 자기에게 의존한다.


출세하려면 운이 와서 내 손목을 끌고 갔어야 할 일이다 713

야심으로 말하면 교만과 이웃 간이랄까, 그보다는 딸 뻘이긴 하지만, 출세하려면이 와서 내 손목을 끌고 갔어야 할 일이다. 불확실한 희망 때문에 수고하며 인생 행로의 첫머리에 남의 신용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을 겪어 내는 일 따위는 나 같으면 못해 냈을 일이다.

(나의 생각)

'나의 처지'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안전투자 713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잡히는 일에 집착한다. 그리고 항구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한 노는 물을 치고, 한 노는 기슭을 긁으라.      (프로페르티우스)

그뿐더라 사람은 먼저 자기 운을 걸지 않고는 이런 영달을 얻는 일은 드물다. 내 의견으로는 사람은 자기가 출생해서 성장한 운을 유지하면 족할 것을, 그 운을 더 키우려고 불확실한 일을 하다가 손에 잡은 운마저 놓치는 일은 미친 수작이라고 본다. 운을 못 타서 살아 갈 발판을 닦아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세워 보지도 못하는 자라면, 어차피 궁핍에 몰려서 운을 터 보아야 하는 이상, 가진 것을 우연의 모험에 던져 보아도 용서될 만한 일이다.

불행 속에 있을 때는 험한 길을 취해야 한다.      (세네카)

(나의 생각)

안전투자, 가치투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 718

기억은 제가 오고 싶은 시간에 오지, 내가 바라는 시간에는 오지 않는다.


자기 추천 726

내가 하는 자기 추천은 비천하고 평범한 것이다. 도대체 누가 자기에게 지각이 없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었던가?


자기의 사상 727


나는 정당하고 건전한 사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자기의 사상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세상 사람들과 나 727∼728


세상 사람들은 늘 서로 상대편을 쳐다본다. 나는 내 눈을 내 속으로 돌리며, 시선을 거기에 처박고, 그 속을 부지런히 둘러본다. 모두들 자기 앞만 쳐다본다.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본다. 나는 나밖에 일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고찰하며 검토하며, 나를 맛본다. 다른 자들은 그들이 잘 생각해 본다면, 늘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은 늘 앞으로 간다.

아무도 자기 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페르시우스)

나는 내 속에서 굴러다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2 권


1. 우리 행동의 줏대 없음에 대하여



한 공장 351

인간의 행동을 검토하는 자들은, 그 행동을 하나의 동일한 전체 모습으로 맞추어 보려고 할 때 가장 당혹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동들은 이상하게도 대개 서로 모순되어, 도무지 그것이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짜 간판 357


우리의 행동은 여러 조각을 모아서 꾸민 것에 불과하며 '탐락을 경멸하지만 고통을 받으면 비굴해지고, 영광은 모멸하나 세평이 언짢으면 용기가 꺾여지고'(키케로), 가짜 간판을 세워 놓고 영광을 얻으려 한다. 도덕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만 추종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끔 다른 목적으로 그 가면을 빌려 오면, 도덕은 바로 이것을 벗어 내던진다.


우연의 힘 357


어느 옛 사람(세네카를 말함)은 우리는 우연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에게 미치는 우연의 힘이 크다는 것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 358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2. 술주정에 대하여



마지막 쾌락 364


노령에 이르면 몸이 불편해져서 어디건 의탁하고 싶어지며 마실 것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 내가 이런 재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마지막 쾌락인 까닭이다. 좋은 친구들의 말로 인간 천성의 열기가 처음으로 발에 오른다고 하나, 그것은 어릴 때의 일이다. 그 열기는 몸의 중허리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거기에 박혀서 내가 보기에는 육체 생활의 유일하고 진실한 쾌락을 지어 준다. 다른 쾌락은 거기에 비하면 잠자는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에는 그것이 올라가서 날아가는 김과 같이 열기는 목구멍에 도달하며, 거기서 마지막 자리를 잡는다.

플라톤은 18세 전에 술 마시는 것을 금하고 40세 전에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은 자들에게는 취하기를 즐기며, 식사 때 인간에게 쾌활을 주고 노년에게 청춘을 돌려 주며, 마치 쇠가 불에 물러지는 것처럼 심령의 정열을 무르고 부드럽게 해 주는 착한 신 디오니소소의 영향을 많이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의 《법률편》에서는 술 마시는 모임을(그 집단에 우두머리가 있어 전부를 통제하고 조절한다면) 유익하다고 본다. 술에 취함은 각자의 본성을 다루기에 좋고 확실한 시련이며, 그와 아울러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제정신을 가지고는 해 볼 생각도 못하는 춤과 음악을 즐기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술이 마음에 절도를 주고 신체에 건강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부분적으로 카르타고 인들에게서 빌려온 다음의 제한 규칙을 마음에 들어했다. 즉, 전쟁에 나갈 때는 삼갈 것, 모든 재판관들이 직무를 처리하는 때나 국무를 토의할 때는 술을 들지 말 것, 일을 보아야 할 낮 동안에는 거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또 어린애를 만들기로 작정한 밤에도 들지 말 것을 권한다.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 368


우리의 마음은 그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높게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떠나서 올라가며, 이로 재갈을 악물고 자기 육신을 빼앗아 너무 멀리 실어가며,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이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쟁에서 용감한 병사들이 공훈을 세울 때에 싸움에 열이 올라 무의식중에 가장 위험한 경지를 돌파하고 나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자신도 놀라서 그의 용기에 소름이 끼치는 격이다. 그리고 또 시인들이 자기가 지은 작품에 스스로 감탄하며, 어떤 방법으로 그만큼 아름다운 줄기를 좇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식이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속의 열기이며 광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플라톤은 침착한 인간은 시가의 문을 두드려 보아도 헛일이라고 말한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탁월한 심령에는 광기가 섞이지 않는 예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고유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초월하는 모든 비약은 그것이 아무리 칭찬할 만하여도,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이다.


5. 양심에 대하여


양심 387

우리는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매질하며

그 자체가 우리의 형리가 된다.               (주베날리스)

이것은 아이들의 입에 잘 오르는 이야기이다. 파이오니아 인 베소스는 장난으로 참새 집을 부수고 새를 죽였다는 책망을 받고, 이 작은 새들이 자기가 부친을 죽였다고 줄곧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하였다. 부친을 죽인 범죄는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아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양심의 복수 신들은 누가 죄를 받아야 할 것인가를 드러나게 시켰던 것이다.


6. 실천에 대하여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391

사색과 교양은 기꺼이 신임하는 것이지만, 그것 외에도 경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훈련시키지 않으면, 이 사색과 교양이 우리를 행동하게 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령이 실제 행동에 들어선 때에,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싸움에 서투른 상태에서 경험 없이 세파에 뜻하지 않게 습격당할까 봐, 혹독한 운명에서 은신하여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의 앞에 나가서, 진짜로 어려운 시련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떤 자들은 자진하여 춥고 배고픔에 단련받기 위해서 부귀를 버렸고, 어떤 자들은 불행과 노고에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힘든 노동과 혹독한 고생을 찾아 행동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너무 유쾌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이 해이해질까봐 두려워하며, 시각이나 생식기관 같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끊어 버렸다.


내 사색의 목표 399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사색의 목표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살펴보고 연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에 적용해 보기, 또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자신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쓸모가 많지 않은 다른 학문에서와 같이, 내가 내 배움의 깊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배운 바를 남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실수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만큼 어려운 묘사도 없으며, 그만큼 유용한 일도 없다. 이것을 밖에 내놓으려면, 그만큼 더 맵시 있게 잘 그려서 더 질서 있게 정리해야만 한다. (399쪽)

 


실제 있는 것보다 401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못하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겸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기 가치보다 못한 짓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고 겁쟁이의 짓이다. 어떠한 도덕도 거기에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진리는 결코 잘못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실제보다 더하게 자기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교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실제 있는 것보다 지나치게 잘났다고 생각하곤 분별 없이 자기 자랑에 빠지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이 악덕의 실체이다. 그것을 고치는 최상의 치료법은 자기의 말하는 버릇을 금지케 하여, 그 결과로 더욱 자기 생각하기를 중지하는 자들이 명렬하는 바를 거꾸로 행하는 데 있다. 자존심은 사상 속에 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402


자기가 가진 수많은 불완전하고 허약한 소질들과, 마지막에는 인간 조건의 허무함까지 동시에 고려해 넣는 자는, 어떠한 특수한 소질을 가지고도 자만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홀로,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신의 교훈을 성실하게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로 자기를 경멸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혼자만이 '현자'라는 별명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렇게까지 자기를 이해하는 자는 용감하게 자신을 자기 입으로 말하며 알려 줄 일이다.


7. 명예의 포상에 대하여



명예는 희귀함이라는 특권 403


도덕적인 인물이 자기에게만 고유하게 독특한 것, 아주 고상하고 관대하고 후덕한 것 외에는 이런 따위 평범한 재물을 즐겨 욕심내고 받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명예는 그 주요 본질이 희귀함이라는 특권이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이 자격을 주기를 재물보다 훨씬 더 아끼고 인색했던 것은 지당한 일이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8.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에 대하여



늙어 꼬부라져서 반은 죽어 가는 아버지 409


늙어 꼬부라져서 반은 죽어 가는 아버지가 집 안 한구석에서 재산을 혼자 누리며, 여러 아이들의 발전과 교제에 지장을 주고,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이 젊은 나이에 공공 사무에 참여하며 세상 사람들에 관한 지식을 얻을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때 아이들은 아무 희망이 없으니,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많은 훌륭한 가문의 청년들이 도둑질하는 버릇에 빠져서, 어떠한 징벌을 받아도 고치지 못하는 것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그 형이 대단히 점잖고 가문도 좋은 호탕한 귀인인데, 그분이 내게 와서 간청하기에, 언젠가 나는 그 청년에게 말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백하며 대답하기를, 자기 부친이 너무 엄격하고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이런 더러운 짓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이제는 버릇이 골수에 박혀서 그짓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했습니다.


인색은 노년뿐 아니라 모든 허약에서 나옵니다 410


여기서는 어느 날 이해력이 깊은 한 귀인이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더 소득을 보아서 쓰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존대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며, 나이가 많아서 다른 힘은 모두 없어졌으니, 이것만이 자기 집에서 그의 권위를 유지하고 남의 경멸을 면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색은 노년뿐 아니라 모든 허약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어떤 방편은 됩니다. 그러한 치료법이 필요한 병은 발생하기 전에 막아 두어야 할 일입니다. 어떤 부친이 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밖에 자식의 애정을 받을 수 없다면, 그는 참 가련한 인물입니다. 이런 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도덕과 그의 능력으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착하고 행세가 점잖아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풍부한 물질은 불탄 재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던 인물들의 유해와 유물까지도 경의와 숭배를 받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노년이 되어 아무리 노쇠하고 썩은 냄새가 나더라도, 젊었을 때 영광을 받고 지낸 인물은 그 아이들에게 존경받지 않는 일이 없으며, 그는 그들의 마음을 이치에 맞게 의무를 지키도록 지도한 것이고, 궁하거나 필요에 못 이겨서, 또는 강제와 억압으로 존경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35세 결혼설 412


나는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35세 결혼설에 찬성합니다. 플라톤은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55세 뒤에 결혼을 하려는 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소생은 먹여살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옰습니다.

탈레스는 여기에 진실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모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넘은 다음에는 이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귀찮은 행동에는 좋은 기회를 거절해야 할 일입니다.


늙은 말을 풀어 놓을 양식 413

그대가 여정의 말기에 실족하여 허덕이며
조소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거든

 

때맞춰 그대 마차의 늙은 말을 풀어 놓을 양식을 가져라.      (호라티우스)


삼밭에 세운 허수아비로밖에는 415∼416


부친과 친하게 지낼 나이가 된 아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에게 엄숙한 경멸조의 존대풍을 지키며, 그렇게 해서 자기를 두려워 하고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하고 어리석은 수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쓸데없는 광대짓이며, 자녀들에게 부친을 권태로운 인물로 느끼게 하고, 더 나쁜 일로는 웃음거리로 만들게도 합니다. 그들은 젊음과 힘을 가졌으니, 세상의 풍조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장에도 혈관에도 이미 피가 말라붙은 인간의 오만하고 횡포한 얼굴을, 진짜 삼밭에 세운 허수아비로밖에는 안 보며 경멸합니다. 나는 나를 두려워하게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노인에게는 너무 결함이 많고 기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경멸받기에 알맞기 때문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식구들의 애정과 사랑입니다. 명령과 두려움은 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이런 성질이 대단히 강하던 인물을 보았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아지자, 아무리 건전하게 지내 보려고 해도 그저 때리고 물어뜯고 욕질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야단법석을 치는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심해서 두루 살피느라고 속을 썩입니다.

어런 모든 것이 광대짓에 지나지 않으며, 가족들은 저마다 딴 수작을 합니다. 천장·다락에서부터 지하실에 이르기까지, 그의 돈주머니 속까지도 딴 자들이 가장 좋은 몫을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자기는 절약하며 검소한 식사에도 만족하고 있는 동안 집안 구석구석은 잔치판입니다. 노름판이고 돈을 물쓰듯 하고 늙은이의 헛된 분노와 조심성을 헐뜯기에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모두가 그에 대해 경계를 합니다. 어쩌다가 마음이 약한 어느 하인이 노인에게 애착심을 느끼게 되면, 그는 바로 의심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의심이란 늙은이들이 즐겨 갖는 성질입니다. 얼마나 여러 번 그는 자기 가족들을 잘 통솔한다고 하며, 정확한 복종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내게 자랑하던지요. 얼마나 그는 자기 일을 잘 살핀다고 말하던지요.

그 혼자만이 아무것도 모른다.                (테렌티우스)

나는 이 인물만큼 천성적으로, 그리고 배워 얻은 바로 지배욕을 보존하기에 알맞으며, 그러고도 어린아이와 같이 거기에 속고 있는 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이런 사정에 빠진 사람들 중에서 그를 가장 재미나는 예로 택한 것입니다.

이래야 좋을지 저래야 좋을지, 이것은 소콜라 학파가 문제삼을 만한 소재입니다. 그의 앞에서는 모두가 그에게 양보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권위 앞에서 이 헛된 수작을 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결코 저항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믿어 줍니다. 그를 두려워합니다. 실컷 그를 존경해 줍니다.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 417

여자들은 언제나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반대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며 모든 구실을 잡습니다. 한 꼬투리라도 변명할 재료가 있으면, 그녀들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헌금을 많이 내려고 남편에게서 잔뜩 훔쳐 내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참회사에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헌금의 분배를 말대로 믿어 보세요! 어떠한 행동도 남편의 양보를 얻어서 한 것이라면 충분한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에 우아미와 권위를 세우려면, 농간을 부려서건, 무례한 수작으로건 언제나 부당하게 남편들의 권한을 빼앗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서와 같이 가련한 늙은이에 대항해서 아이들 편을 드는 경우에는, 여자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고 영광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성정(性情)을 만족시킵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아이들과 결탁해서 걸핏하면 그의 지배와 지휘에 반항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사내아이가 성장해서 기운이 차면 그들을 강제로 매수해서, 요리사·회계원, 기타의 가족들을 손아귀에 넣어 버립니다.

 아내도 자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빠지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더 잔혹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습니다. 대 카토가 말하기를 "하인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적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던 그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아직 아내와 아들과 하인의 수만큼 적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노쇠한 경우에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받는 달콤한 이득입니다. 여기에 악을 쓰며 대들어 보았댔자, 특히 재판관들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야 할 때에는 대개 젊은이들과 같은 꿍꿍이속이며, 젊은이의 편을 드는 바에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싹수는 마찬가지, 마음이 착한 여자가 최고  420

나는 번성하는 집안의 남자가 많은 지참금을 짊어지고 들어올 아내를 찾아 돌아다니는 꼴은 그렇게 잘하는 일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부채 가운데 이보다 더 집안에 파멸을 가져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충실하게 이 의견을 좇은 것은 잘한 일이고, 나도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딸들은 다루기가 힘들고, 고맙게도 여겨 주지 않을 우려가 있으니, 그런 데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솔한 추측 때문에 속아서 실질적인 이익을 잃는 수가 있습니다. 지각 없는 여자는 이런 이치를 눈감아 주거나 저런 이치를 눈감아 주거나, 싹수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들은 옳지 못한 일에 이끌립니다. 그것은 마치 착한 여자들이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명예에 이끌리는 식입니다. 마음이 착하면, 신세가 부유할수록 마음이 더 너그럽고, 얼굴이 예쁠수록 더 영광스럽게 정숙한 몸가짐을 즐깁니다.


마지막에 해 준 행위 421

마침 숨이 넘어갈 무렵에 비위를 맞춰 주는 자가 요행을 얻지요! 마지막에 해 준 행위가 승리합니다.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영생 불멸의 아이들 423∼424

헤로도투스가 리비아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거기서는 여자들과 무분별하게 육체관계를 맺으며, 어린아이가 걸음마할 때가 되면, 군중 속에 데려다 놓고 첫걸음이 향하는 자를 아비로 삼는데, 잘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단순한 인연으로 그것을 또 다른 자신이라고 부르며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다른 생산물들이 있으니 그것도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우리의 정신·마음·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은 우리 육체보다도 더 고상한 부분으로 생산되는 것이며, 더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산물에 대해서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그 생산은 아이낳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거기에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른 아이들의 가치는 우리보다도 차라리 여자들의 것이며, 거기서 우리의 몫은 아주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 생산에서는 그 본래의 미와 우아성과 가치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생명있게 우리를 대표하며 알려 줍니다.

플라톤은, 이런 산물은 영생 불멸의 아이들이며, 그 부친(작가를 말함)들을 영생 불멸케 하고, 진실로 리쿠르고스나 솔론이나 미노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을 신격화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 424∼427


로마에 라비에누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용기가 장하고 권세 있는 인물로 다른 소질보다도 문장에 능하였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쟁 때에 카이사르 휘하에서 으뜸가는 장수로 있다가, 다음에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 편으로 넘어 가서 카이사르가 스페인에 진격하여 그를 격파하기까지 너무나 용감하게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위대한 라비에누스의 아들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라비에누스에게는 그의 덕성을 시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황제들의 궁신이나 총신들은 그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솔직성과 폭군 정치에 반항하는 기질을 좋게 보지 않았을 법한 일로, 그런 기분은 그의 문장이나 작품에 배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적들은 그를 관청에 고발해서 출판한 여러 작품을 불태우라는 판결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형벌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실시된 것인데, 그것은 문장과 연구 논문까지도 사형에 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잔혹한 것을 할 방법과 재료가 부족해서 우리들 정신의 고안과 명성 같은 고통을 느낄 감각이 없는 사물에까지 미치며, 시신(詩神)들의 학문과 업적에까지 물질적 고통을 적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이런 손실을 참고 지낼 수도 없고 그렇게도 소중한 작품을 잃은 뒤에 살아남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무덤에 자기를 실어가게 해서 그 속에 들어가 산 채로 파묻혀 자살과 매장을 동시에 감행했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보다 더 맹렬한 애정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시우스 세베루스는 대단한 웅변가로 이 사람의 친구인데, 그의 책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같은 판결문으로 자기도 함께 산 채로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고함질렀습니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렌티우스 코르두스도 그의 작품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칭찬했다고 고발당하여 같은 처단을 받았습니다. 저 티베리우스보다도 더 나쁜 상전을 섬겼던 저 천하고 비굴하고 부패한 원로원은 그의 문장을 화형(火刑)에 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저서와 동행하기에 만족하고, 음식을 끊고 자살했습니다.

저 선량한 루카누스는 극악무도한 네로에게 처단을 받아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바로 죽으려고 의사에게 끊게 한 팔뚝의 혈관에서 피가 대부분 흘러 나와 사지의 끝은 이미 싸늘해져 가고 찬 기운이 생명의 심장부에 접근해 오기 시작하자, 그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파르살리아 전쟁에 관한 자기 작품의 시 몇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구를 마지막으로 소리쳐 읊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아이들에게 주는 애정에 찬 정다운 작별 인사였으며, 죽어 가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주는 굳은 포옹과 고별이었고, 이 최후의 순간에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물들을 회상케 하는 타고난 경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에피쿠로스는 그의 말처럼 담석증의 극심한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갈 때에, 그가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학설의 아름다움이 그의 모든 위안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나 잘 자란 아들들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서 그가 풍부한 저작을 완성했을 때만큼 만족을 얻었겠습니까? 잘못 성장한 못난 아이도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보다도 전자의 불행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예로 들자면), 우리 종교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의 작품을 땅에 파묻거나 그에게 자식이 있는 경우에 그 아이들을 파묻든지 하라고 제안했을 때에, 그가 차라리 아이들을 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경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와 관계해서 잘난 아이를 얻는 것보다, 시신(詩神)과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잘생긴 작품을 하나 얻기를 훨씬 좋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을 생긴 그대로 내가 여기 내놓은 것은 마치 육체적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고칠 수 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얻은 작은 재산은 이미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는 것보다도 더 충분히 사물들을 알고 있으며, 내게서 자신이 담아 두지 못한 것을 가져갔으며, 아무 관계 없는 딴 사람처럼 필요할 때에는 그에게서 빌려 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작품보다 더 현명할지 모르나, 그는 나보다 더 부유합니다.

시에 열중하는 사람치고 로마에서 가장 으뜸가는 미소년을 낳기보다는 《아에네이스》를 내놓기를 원하지 않을 자 없고, 전자보다도 후자를 잃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작가들 중에서 특히 시인들은 자기 후손으로는 딸들만 남겨서, 그녀들이 다음에 조상들에게 영광을 주리라고 자랑하던 에파미논다스(이 딸들이란 그가 라케데모니아 인들에 대해서 두 번 얻은 고귀한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가 그녀들을 그리스 전국의 화사한 미녀들과 바꾸었으리라고는 믿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자기 아들과 상속자가 아무리 완벽하고 완성된 인물이라고 해도, 그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얻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공훈들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피디아스나 다른 탁월한 조각가들이 오랜 노력과 면학으로 예술적으로 완성해 놓은 탁월한 조각상이 잘 보존되어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랐을 만큼, 그가 낳아 놓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보존되기를 원했을까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가끔 부친들이 자기 딸들에게 보이는 사랑이나, 모친들이 자기 아들들에 열중하던 악덕스런 미치광이 같은 태도의 사랑으로 말하면, 그런 예는 이 다른 종류의 부자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피그말리온에 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특별한 미를 갖춘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고 나서, 자기 작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친 듯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들은 이 조상에 생명을 넣어 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상아를 만지니
그것은 단단함을 읽고 유연해지며
그의 손가락에 눌려 들어간다.                    (오비디우스)


10. 서적에 대하여

 

내가 빌려다 쓰는 것 431

나는 글을 좀 읽었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은 아주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진 지식이 어느 정도로까지 뻗은 것인가를 알려 주는 수밖에 아무런 확실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내놓는 재료에 기대하지 말고, 내가 내놓는 형태에 유의할 일이다. 내가 빌려다 쓰는 것을 가지고 내가 취급하는 문제를 빛내 볼 거리를 택할 줄 아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나는 어법이 서툴러서, 때로는 내 지각이 빈약하여 자신이 잘 말하지 못할 것을 남을 통하여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빌려 온 것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저울질한다. 수량으로 가치를 올릴 생각이었던들 몇 갑절은 내놓았을 것이다. 내가 차용해 온 곳은 모두가 옛날의 너무나 유명한 이름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판단력을 가졌다는 증거
432


사실 자기의 무식을 인정하는 일은 판단력을 가졌다는 가장 아름답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나는 본다.


옛날 책 433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딴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결코 새로운 책을 탐하지 않는다. 옛날 책이 내용적으로 더 충실하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서적에 대하여 433∼434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이솝 우화는 대부분이 여러 가지 의미와 해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그 이야기와 격이 맞는 어떠한 모습을 골라낸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유치하고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더 살아 있고 본질적이며 내면적인 의미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뚫어보지 못한다. 나 역시 그 꼴로 읽는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라면 시가(詩歌)에서는 베르길리우스·루크레티우스·카툴루스, 그리고 호라티우스가 유달리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가운데 전원시는 완벽한 시가 작품이라고 행각한다. 여기에 비교해 보면 그의 《아에네이스》의 어느 구절은, 작가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손질해야 될 점이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다. 내게는 《아에네이스》의 제5권이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또 루카누스를 좋아해서 즐겨 읽는다. 문체보다도 그의 고유한 가치와 사상과 판단의 진실함을 즐긴다. 저 선량한 테렌티우스로 말하면 그 라틴어의 애교와 우아미가 우리 심령의 움직임과 풍습의 조건들을 탄복할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어느 시각에나 우리 행동을 살펴보면, 나는 그의 시가 생각난다.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에게는 새로운 미와 아담한 풍치가 발견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살던 시대 가까이에 생존했던 사람들은 루크레티우스를 그에게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내 생각에도 이 비교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좋은 시구에 부딪히면 이 신념을 고집하기가 힘들다.

우리 시대에 희극을 써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이 방면에 재간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에 나오는 재료를 서너덧 합쳐 자기 것 하나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 문장의 매력이 너무나 우리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이야기의 맛은 잊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435∼436

나는 고대의 우수한 시인들이 뽐내거나 따지고 파고드는 일을 피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스페인이나 페트라르카식의 높은 음조의 광상적 노래뿐 아니라, 다음 세기에 오는 모든 시적 작품의 장식을 이루는, 좀더 보드랍고 조심스런 익살까지도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명한 비평가로서 이 고대 시인들에게 흠을 잡는 이가 없고, 마르티알리스의 시구의 톡 쏘는 맛보다도 카툴루수의 풍자시에 연마되고 줄곧 상냥하고 화창하게 아름다운 맛을 비길 바 없이 감탄하지 않는 자 없다. 마르티알리스가 자신에 관해서 "그는 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작품 재료는 재주가 있는 기질이 대신된 것이다 "라고 말하듯, 내가 금방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먼저 말한 작가들은 흥분하지도 분발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감명을 준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웃음을 찾아 낸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그 다음 작가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주가 부족하기에 더욱 육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들은 다리로 걸어갈 만큼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타야만 한다.


 

풋내기들 436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그는 단거리 질주를 시도한다.                (베르길리우스)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436∼438

다른 종류의 독서는, 쾌락에 좀더 내용을 섞어 주며 거기서 내 기분과 조건들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이런 데 내게 소용되는 작품들은 플루타르크와 세네카이다. 그들은 둘 다, 내가 거기에서 찾는 지식을 조각조각 풀어서 취급해 놓았기 때문에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내 비위에 맞는 특기할 장점이었다.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그런 데서 우리는 실컷 졸고 있다가 한 15분쯤 뒤에 보아도 말의 줄기를 잡을 여유가 넉넉히 있다. 옳건 그러건 자기가 승소하려는 때, 재판관 앞에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나 보려고 모두 말해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와 속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브루투스의 경우 439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브루투스를 플루타르크의 저서에서나 그 자신의 저서에서나 마찬가지로 읽어 보고 싶다.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키케로의 경우 439∼440

키케로의 경우, 나는 그가 학문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탁월한 점이 적었다고 보는 일반의 판단을 따른다. 그는 성질이 호탕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처럼 생긴 뚱뚱한 농담꾼들은 흔히 그렇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허약하고 허영된 야심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뿐더러 나는 그가 어떻게 자기 시를 세상에 발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변명해 줄 것이 없다. 시구를 잘 못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불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그의 이름의 영광과는 당치 않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판단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의 웅변은 전혀 비겨 볼 거리가 없다.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小) 키케로는 이름 하나밖에 그 부친을 닮은 점이 없었고, 아시아에서 군지휘관이었다. 어느 날 그가 베푼 연회석에 여러 손님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 카에스티우스라는 자가 유력자들의 공적 연석에 잘 끼어드는 식으로 식탁의 말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키케로는 자기 부하 하나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어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이 딴 데 있어 대답하는 말을 잊어버리는 자가 그렇듯, 그는 다음에도 두서너 번 이것을 다시 물었다. 하인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 겸, 전부터 그에게 알려 주려고 하던 터라, "이 자는 자기 웅변에 비해서 대감님 조상대에서의 웅변이 대단할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 말씀 드린 바로 그 카에스티우스입니다"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여기에 분개해서 이 가련한 카에스티우스를 잡아들이게 명령하고, 자기 앞에서 실컷 매질하게 하고 "고약하게 공손한 손님이로군" 하였다.


 

esse videatur 440

모든 점을 참고해 보고, 그의 웅변을 비길 바 없는 것으로 평가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웅변에 흠이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저 위대한 브루투스도 그의 것을 '부서지고 허리 부러진' 웅변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세기와 가까운 시대의 웅변가들도 역시 그가 문장의 끝에 붙이는 기다란 시가에 다는 운을 각별히 유의해서 집어넣는 버릇을 꼬집으며, esse videatur(그런 듯싶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지적하였다. 나로서는 장단격으로 짧게 떨어지는 음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드물기는 하지만 음절의 수를 가끔 뒤섞는 일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나로서는 늙기 전에 늙는 것보다는 늙고 나서 오래 있지 않는 편이 낫다"(키케로)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440

역사가들은 내게는 입에 맞는 떡이다. 그들은 재미나고 평이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내적 조건들의 잡다성과 진실성의 전부와 세부적인 것, 그가 총체로 가진 여러 방법의 다양성과 그를 위협하는 사건들, 즉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간 전체가 다른 어떤 데서보다도 여기서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자들은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보다도 그 목적에, 또 외부에서 닥쳐오는 것보다도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에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특히 카이사르는 441

특히 카이사르는 단지 역사학뿐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루스투스도 그런 축에 들지만 그만큼 그는 다른 자들보다 뛰어난 완벽함과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딴 작품들을 읽는 것보다 더한 존경과 숭배를 품고 이 작가를 읽는다. 어느 때는 그의 행동과 위대성의 기적을 통하여 그 사람됨 자체를 고찰하며, 때로는 그의 순수하고도 비길 바 없이 연마된 문장을 탐하여 읽는다. 그의 문장은 키케로도 말하듯, 모든 역사가들의 것보다 탁월할 뿐더러, 키케로의 것보다 더 나은 글이다. 그의 판단을 보건대, 그만한 성실성을 가지고 적을 말하면서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한 야심의 그릇된 원칙과 더러운 동기를 감추려고 거짓을 써 나가는 것밖에는 그 자신을 말함에 극히 인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 글 속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자기 고유의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위대한 업적이 수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간 것들 441

진실로 탁월한 역사가들은 알아 둘 만한 사실을 골라 낼 능력을 가지고, 두 가지 보도 중에서 더 진실한 것을 선별할 수 있으며, 군주들의 사정이나 그들의 기분에 관해서 의향을 결론 짓고 그들에게 맞는 말을 시키고 있다. 그들이 생각에 따라 우리의 신념을 조절하는 권한을 갖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두 부류의 중간 것들은(이것이 가장 보통이지만) 모든 것을 벌여 놓는다. 그들은 우리가 씹을 것을 대신 씹어 준다. 그들은 판단할 권한을 자기가 가지며, 역사를 자기 생각대로 꾸며 나간다. 왜냐하면 판단이 한편으로 기울어지는 이상, 사람들은 이야기를 그 편으로 굽혀서 돌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판단을 적어 넣는 습관 443


나는 잘못 기억하거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몇 해 전에 정독하고 써놓기까지 한 책을 내가 모르는 새로 나온 책이라고 다시 들추어 보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 전부터(내가 한 번밖에 쓰지 않으려는 것은) 책마다 끝에 다 읽은 날짜를 기록하고, 적어도 그것을 읽으며 그 작가에 관해서 내가 품은 일반적 관념과 모습을 상상해 보고, 거기서 대강 끌어낸 판단을 적어 넣는 습관을 들였다.


11. 잔인성에 대하여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446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 중에는, 마음을 도덕에 맞게 잘 조절하여 착한 상태로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결심과 사상을 모든 외적 운의 힘을 초월해서 갖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도 그것을 시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고통과 궁핍과 경멸을 싸워 이기며, 그들의 심령을 긴장시키키 위해 이런 것을 찾아 가지려고 한다. "도덕은 투쟁 속에서 크게 성장한다."(세네카)

이것은 그들과는 다른 학파인 에파미논다스가 지극히 합법적으로 운이 그의 손에 쥐어 주는 재물도 거절해 가며, 빈궁과 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항상 극도의 궁핍 생활을 지켜 가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흉악한 아내를 참아 내는 고역으로, 그보다 더 심한 시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새파랗게 날선 칼만큼 독한 시련이다.


도덕의 길 446


메텔루스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 중 홀로, 로마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모든 힘을 다해서 평민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부정당하게 통과시키려는 포악한 처사에 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법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사투르니누스가 내리는 극형을 받게 되자, 곤경에 빠져서 자기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쁜 일을 하기란 얼마나 쉽고 비열하며, 아무 위험도 없는 곳에서 착한 일을 하기란 얼마나 속된 일인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서 착한 일을 하기는 도덕 군자가 마땅히 할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메텔루스의 이 말은 내가 증명하려는 바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즉, 도덕은 쉬운 일을 동무삼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착한 마음의 성향으로 조절된 걸음을 인도하는 평탄하고 경사진 길은 진실한 도덕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은 거칠고 가시덤불진 길을 찾는다. 도덕은 그것이 싸워 나갈 거리로, 메텔루스의 경우와 같이 그 꿋꿋한 행진을 좌절시키려고 운이 즐겨 가져 오는 외부적인 시련이거나 우리 본성의 무질서한 욕망과 불완전성이 가져오는 내면적인 시련을 가지려고 한다.


인생에 상응하는 죽음 449


모든 죽음은 당사자의 인생에 상응해야만 한다. 죽을 때에 사람이 다르게 되는 수는 없다. 나는 항상 그 생애를 보고 그 죽음을 해석한다. 그리고 물러 빠진 생애에 결부된 강렬한 죽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것이 그 생애에 맞는 약한 원인에서 온 것으로 해석한다.

 

풋내기들 450

전쟁에서 풋내기들이 위험한 지경이나 아무 잘못 없는 숫자에 몸을 던지며 큰 코를 다친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전투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광의 갈망과 첫 번째 승리의 희망에
유혹되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베르길리우스)

그 때문에 특수한 행동에 관해서 판단할 때는, 그것을 정의하기 전에 여러 사정과 그것을 행한 자의 인간됨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454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그것이 모두 악덕스럽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런 논법을 잘 본다. 즉, 악덕이 가장 큰 노력을 할 때에는 이성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제압한다고 하며,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그 경험을 끌어서 말한다.

육체는 쾌락을 재촉하고
비너스가 여자의 밭에 파종하려고 할 때에    (루크레티우스)

그때에 쾌락은 우리를 너무 심하게 혼미시켜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력은 그 힘을 상실하고 완전히 탐락 속에 오그라들어 정신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이 다르게도 될 수 있으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마음이란 긴장시켜서 경계심으로 굳게 다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쾌락의 충격을 억제할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품행이 단정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증언한 바와 같이, 나는 비너스를 강압적인 여신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나는 나바르 여왕이 《일곱 밤 이야기》의 하나에서 말하듯(이 작품은 그런 제재로는 묘하게 꾸며진 것이다), 한 남자가 오래 갈망해 오던 애인과 며칠 밤을 보내는데, 모든 기회와 자유를 가지고 함께 지내며 단지 키스와 접촉만으로 만족하라는 약속의 신의를 지켰다는 것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12. 레이몽 스봉의 변호


나는 무엇을 아는가?
461


몽테뉴는 스봉의 사상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이 변호에서 사실상 스봉의 사상과는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사상을 전개시킨다. 몽테뉴의 《에세이》 중 다른 것과는 동떨어지게 긴 이 장은 그 사상이 가장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해석에 가장 난점을 많이 제기하는 논문이다. 그의 유명한 표어 '크세주(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로 요약되는 이 극단의 회의주의는 몽테뉴의 중심 사상으로 몇 세기 동안 인정되어 오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는 이것이 제3권의 심리적, 도덕적 확신으로 향하는 중간 단계로 해석되고 있다.(<역자 해설> 중에서)


대단히 드문 비판적 의의 463

이 《에세이》는 어떻게 보면 그 내용과 형식이 작품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문은 그의 철학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몽테뉴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이성의 계속적 긴장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방어책을 기대하던 철학에서 이탈하며, 천성에 몸을 맡기고 명상 속에서 해결책을 구하며, 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농민과 무식자를 본받으라고 권하는 사상으로 향하고 있다. 동시에 섹스투스의 학문에 접함으로써 그의 지적 신중성은 굳어지며,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심정과 사람은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꾸며, 그 때문에 그의 사상은 그의 시대에 대단히 드문 비판적 의이를 가지고 드러나게 된다.

다른 면에서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는 1572년의 태도보다 좀더 개인적인 태도로 향하게 된다. 즉, 지적 신중성으로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경험에 의한 관념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 자기 관념들이 상대적이라는 심정, 자아라는 직접적으로 알려진 정신적 사실을 세워야 하는 필요성,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을 무대로 내세우게 하며, 그를 자아의 묘사에 밀어넣는다. 이 경향은 1572년경에는 찾아볼 수 없으나, 1579년경에 확립된다.(<역자 해설> 중에서)

 

내가 고양이를 희롱하고 있자면 481∼482

자만심은 타고난 근본적인 병폐이다. 모든 생령들 중에서도 가장 재난당하기 쉽고 취약하며,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우주의 가장 나쁘고, 죽어 없이지며 비천한 부분에 못 박혀, 하늘의 끝없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 단계의 주거로, 여기 이 세상의 진흙과 분뇨통 속에서 세 가지 동물들(조류·포유류·어류) 중의 가장 나쁜 조건에 있는 동물들과 함께 자기를 보고 느끼고 한다. 그러고도 그는 상상력으로 달의 궤도 위에 올라서 하늘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바로 이 공상력으로 그는 자기를 하느님과 견주며, 하늘의 거룩한 조건을 자기가 차지하고 자기 자신을 따로 골라 다른 생령들과는 구별해 놓고, 자기 동료며 친구인 동물들에게는 그들의 몫을 갈라 주며, 그들에게 자기 멋대로 정한 소질과 힘을 부여한다. 그는 어떻게 자기 지성의 힘으로 동물들의 내적 움직임과 비밀을 안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동물들에게 어리석은 성질을 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짐승들과 우리 사이의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결함이 어째서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짐승이라고 보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짐승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크게 괴이한 일은 아니다.


 

손으로는 어찌 하지? 483

사랑하는 애인들끼리는 화를 내고, 서로 화해하고, 간청하고, 지적하는 모든 일을 눈으로 한다.

침묵도 소망과
생각을 나타낼 줄 안다.    (타소)

손으로는 어찌 하지? 우리는 요구하며, 약속하며, 부르며, 내보이며, 위협하며, 기원하며, 간청하며, 부인하며, 거절하며, 물어보며, 감탄하며, 헤아리며, 고백하며, 후회하며,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의심하며, 가르쳐주며, 명령하며, 교사하며, 맹세하며, 증거하며, 비난하며, 처단하며, 죄를 사하며, 욕설하며, 경멸하며, 도전하며, 분개하며, 아첨하며, 갈채하며, 축복하며, 굴욕을 보이며, 조롱하며, 화해하며, 권장하며, 고무하며, 축하하며, 즐기며, 동정하며, 슬퍼하며, 낙담시키며, 절망하며, 놀라게 하며, 소리치며, 침묵케 하며, 그리고 무엇은 못할 것인가? 혓바닥에 못지않게 잡다하고 복잡하게 무엇이든지 표현한다.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 486

자연은 보편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생령 중에서, 자연이 그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모든 방법을 아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그들은 방자한 생각으로 때로는 자기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때로는 그 반대편 극단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속박당하고 잘 씌워져서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이며, 남이 내버린 물건으로밖에 자기를 싸감아 무장해 볼 거리도 없다. 반면에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이 그들을 조개껍데기·깍지·덧껍질·털·모사·가시·가죽·잔털·날개짓·거북·등껍질·양털 가죽, 돼지털 등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대로 옷을 입혀 주고, 그들을 발톱·이빨·뿔 등으로 무장시켜서 공격하고 방어하게 하고, 자연이 헤엄치기·달음질치기·날기·노래하기 등 그들에게 맞는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우는 것 외에는 배우지 않으면 길가기·말하기·밥먹기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장소와 위치에 따라 489
 

 

락탄티우스는 짐승들에게 말뿐 아니라 웃는 능력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라가 다르므로 언어가 다른 것은, 같은 종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서, 장소와 위치에 따라 메추리의 노랫소리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때로 잡다한 조류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는 소리가 대단히 달라지며,
그 중에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목소리도 변하여
목쉰 소리로 노래하는 것도 있다.      (루크레티우스)

(나의 생각)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490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위에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는다고 현자(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루크레티우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질서와 단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본성의 모습 아래에서의 일이다.

사물들은 각각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이 정한 움직일 수 없는 차이를 지켜간다.                                                                      (루크레티우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493

디오게네스는 부모들이 자기를 노예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어버이들은 미쳤어. 나를 맡아 대접하고 먹여 살리는 자야말로 나의 노예요" 하고 말했다. 짐승을 먹이는 자들은 짐승이 그들을 섬긴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그뿐더러 짐승들에게는 더한층 품위 있는 면이 있다. 사자는 결코 다른 사자를 섬긴 일이 없고, 말이 다른 말을 섬긴 일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짐승들을 사냥하러 가듯, 호랑이와 사자들은 사람을 사냥하러 간다. 서로간에 같은 사냥을 하고 있다. 개들이 토끼에게 꼬치 고기가 잉어에게, 제비가 매미에게 , 매가 콩새와 종달새에게 하는 식이다.


 

칸디아의 염소들 494

칸디아의 염소들을 보면, 그들이 화살을 맞았을 때에 수많은 잡초들 중에서도 백선(白鮮)을 골라서 치료하며, 거북은 독사를 잡아먹으면 즉시 화박하(花薄荷)를 구해서 속을 훑어 내고, 도마뱀은 회향(茴香)으로 눈을 닦아 밝히며, 고니는 스스로 바닷물로 관장하고, 코끼리는 자기 몸과 자기 동무의 몸에서뿐 아니라 주인의 몸에서도(그 증거로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한 포로스 왕의 코끼리가 있다), 전쟁 때 적에게 얻어맞은 작은 창과 삼지창 등을 우리로서는 할 수 없을 만큼 아프지 않게 뽑아 낸다. 이런 것을 어째서 지식이며 예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인가? 동물들을 얕보기 위해서, 그들이 이런 일을 아는 것은 단지 본성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라고 핑계하는 수작은, 그들에게서 지식과 예지의 자격을 빼앗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도 확실한 여 선생님(本性을 가리킴)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보다도 더 그들에게 이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


 

복습하는 코끼리 496

아리우스는 말한다. "나는 옛날에 한 꼬끼리가 양쪽 허벅다리에 꽹과리를 달고, 또 꽃대롱에도 하나 달고, 이것을 치는 소리에 맞춰서 다른 놈들은 모두 동그랗게 춤을 추며 악기의 지휘에 따라서 어느 박자에 가서는 머리를 올리고 숙이는 것을 보았는데, 이 화음은 듣기에도 유쾌하였다." 로마의 극단에서는 코끼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끊겨서 대단히 배우기가 힘든 많은 음계와 여러 박자에 맞춰 춤추며 움직이는 것을 예사로 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공부한 것을 혼자서 외어 보며, 스승에게 꾸지람받고 매맞지 않으려고 힘써 조심해 가며 복습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심각한 연구와 자기 반성 497

그러나 플루타르크가 책임지고 말하는 까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괴상하기까지 하다. 이 까치는 로마의 어느 이발사의 이발소에서 그가 듣는 모든 것을 목소리로 흉내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팔수들이 이 이발소 앞에 멈춰서 오랫동안 나팔을 분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은 이 까치가 사뭇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우울하게 지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 그가 나팔소리에 얼이 빠져서 귀가 먹고 그의 청각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심각한 연구이고 자기 반성이었으며, 그가 그 뒤 처음 낸 목소리는 이 나팔소리를 그 반복과 자태, 음조의 변화까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공부로 그가 전에 말할 줄 알았던 것은 모두 버리고 경멸해 버렸던 것이다.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 499

우리는 평범한 일보다는 범상치 않은 일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나는 이렇게 긴 기록으로 능청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와 같이 사는 동물들에 관해서 여느 때 우리가 보는 것을 상세히 연구해 본다면,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것을 수집해 오는 것만큼 경탄할 만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진행은 모두가 동일한 본성에 의해서 굴러간다. 현재의 상태에 관해서 유능하게 판단한 자는, 확실히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502

사냥꾼들이 확언하는 바에 의하면, 여러 마리의 강아지 속에서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그 어미가 고르도록 하면 된다고 한다. 개 집에서 강아지들을 밖에 내놓으면 어미개가 맨 먼저 가져다 들여놓는 놈이 언제나 가장 나은 놈이며, 개 집을 사방으로 불로 둘러싸는 체하면, 살려내려고 가장 먼저 달려 드는 강아지가 가장 좋은 놈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짐승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예측하는 습관을 가졌거나 또는 새끼들을 판단하는 데에 우리와는 다른 더 생기있는 덕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짐승들이 출생하고, 새끼를 치고, 기르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살고, 죽고 하는 방식이 우리와 아주 닮은 이상, 우리가 짐승들보다 나은 조건을 우리에게 붙이고 짐승들에게서 그들의 원래 자질을 끊어내 버리는 것은,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정으로 말하면 503

우정으로 말하면, 그들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생기있고 견실하다. 리시마코스 왕의 개 히르카노스는 그 주인이 죽자, 그의 침대 밑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받지 않고 고집하고 있다가, 시체를 태우는 날 달려가서 그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피로스라고 부루는 사람의 개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개는 주인이 죽은 이후로 그의 침대 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실어갈 때에 함께 실려가서 마침내 그 주인을 불태우는 섶 속에 뛰어들었다.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504

욕망은 마시는 것이나 먹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 있고, 여자와의 관계와 같이 자연스럽고도 필요치 않은 것이 있고, 또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 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거의 이 마지막 종류에 속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피상적이고 인공적이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본성이 만족하기에 필요한 것은 참으로 적으며, 본성이 우리에게 욕망할 거리를 남겨 놓은 것도 참으로 적은 까닭이다. 우리가 음식상에 차려 내는 것은 우리 본성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스토아 학파는 사람은 하루에 감람나무의 열매 하나만 먹으면 살기에 족하다고 하였다. 포도주의 미묘한 맛은 본성이 명하는 바가 아니며, 사랑의 욕망에 첨가하는 점도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위대한 집정관의 딸이 필요로 할 건 없다.      (호라티우스)

행복에 관한 무지와 그릇된 사상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넣는 이런 외부적인 욕망은 너무나 수가 많아서,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들을 거의 모두 몰아 낸다.


기가 막힐 일이다 507

두 왕들 사이에
불화로 일어난 큰 투쟁이 벌어진다.
이때 전군(全軍) 의 생기 띤 전투적 열중과
군중의 진동하는 맹위가 어떠한가는 상상에 맡겨 둔다.   (베르길리우스)

나는 이 거룩한 묘사를 읽으면, 언제나 인간성의 졸렬한 허영을 읽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 공포와 경악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저 투쟁적인 동작, 저 음향과 고함소리의 폭풍우.

검광이 번쩍 하늘에 솟으니
주위 대지는 맞부딫치는 무기의 눈부신 빛으로 번쩍이고,
인간들의 굳센 걸음에 땅이 울리고,
그 난동에 충격받은 산악의 반향은 하늘의 별들에까지
그들의 소음을 치솟아 올린다.                                    (루크레티우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가장 위대하였고, 가장 승리하였고, 이 세상이 있은 이후로 가장 강력하던 황제가, 놀잇감 삼아서 아주 재미나고 극히 교묘하게 바다와 육지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50만 명의 생령과 피가 그의 운명을 좇아 사라지고, 세계의 동서 두 부분의 힘과 부가 그가 이루려는 계획을 위해 소진되게 한 일을 들어 보자.

안토니우스가 글라피라와 사랑을 했다고
풀비아는 자기도 사랑해 달라고 내게 의무를 부여한다.
풀비아와 사랑을 하라고! 마리우스가 청해 온다면
그도 사랑해 줘야 하나?
아니다. 내게 이성이 있다면! 사랑 아니면 전쟁을!
하며 그녀는 말한다
- 뭐라고 내 생명보다 내 남근이 더 중하도다 · · · · · ·
울려라! 나팔아!                                                      (아우구스투스, 마르티알리스의 인용)

이 팔도 많고 대가리도 많은 사나운 괴물은 어쨌든 인간들이다. 허약하고 참담하고 가련한 인간들이다. 그것은 다만 뒤흔들리며 열에 뜬 개미집일 뿐이다.

검은 부대는 평원을 횡단하며 행진한다.      (베르길리우스)

거꾸로 부는 바람결, 한숨, 까마귀가 날아가며 우는 소리, 우연히 지나가는 한 마리의 독수리, 말의 헛디딤, 꿈 하나, 목소리 하나, 징조 하나, 아침 안개 하나가 그 괴물을 쓰러뜨려 굴러 떨어지게 하기에 족하다. 단지 햇볕을 그의 얼굴에 쬐어 보라.

그는 바로 녹아서 기절하리라. 시인이 노래하는 꿀벌 떼처럼 그의 눈에 먼지 한 줌 불어 넣어 보라.

우리의 모든 군기(軍旗)들, 연들, 그 선두에선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까지도 패하여 흩어진다.

 

충성심으로 말하면 509-510

충성심으로 말하면, 세상에 사람만한 배신자는 없다. 우리 역사에는 개들이 죽은 주인들의 원수를 맹렬히 추격해 간 이야기가 있다. 피로스 왕은 어떤 개가 시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개가 사흘 동안이나 이러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 시체를 매장하라고 명령하고, 개는 자기가 데리고 갔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군대의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러 갔을 때에, 이 개는 자기 주인을 살해한 범인을 알아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듯 그들을 향하여 맹렬히 짖으며 대들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지적으로 살인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는 수속이 진행되어 얼마 뒤에 재판의 한 방법이 되었다. 현자 헤시오도스의 개도 나우팍토스 인 카니스토르의 아들들이 자기 주인에 가한 살인을 입증하여 똑같이 복수를 하였다.

다른 개 하나는 아테네의 어느 사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신을 모독하는 도둑 하나가 가장 귀중한 보배를 훔쳐가는 것을 보고 힘 자라는 데까지 짖었다. 그래도 집사가 잠을 깨지 않자, 이 개는 도둑을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날이 샌 다음에도 도둑을 눈에서 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러 감시하며, 그가 먹을 것을 갖다 주어도 받아 먹으려 하지 않았으나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겐 꼬리를 흔들며 주는 것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도둑이 자려고 멈추면 이 개도 같이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 개의 소식이 사원의 집사들에게까지 이르러 그 뒤를 쫓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크로미온 시에서 개를 확인하고, 그 도둑을 잡아 아테네 시로 데려와 처벌하였다.

재판관들은 이 개의 착한 봉사에 대한 감사로,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국가의 비용으로 얼마간의 밀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수도사들에게 개를 보살펴 주도록 명령하였다. 플루타르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며 자기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개, 코끼리, 호랑이 513∼514

도량(度量)의 크기로 말하면, 인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보내 온 큰 개가 한 일보다도 더 분명한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싸워 보라고 처음에는 사슴을 내놓고 다음에는 산돼지, 그리고 다음에는 곰을 내놓아도, 그는 상대를 않으며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그러나 사자 한 마리를 보았을 때에는 즉시 벌떡 일어서며, 이놈이면 한번 싸워 볼 만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일로 말하면, 어떤 코끼리 한 마리가 분에 복받쳐 자기를 부리던 사람을 죽이고는 너무 극심한 비탄에 빠져, 먹을 생각을 않고 그대로 죽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대성으로 말하면, 모든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짐승인 어느 호랑이 한 마리가 그 앞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내 주어도 해치지 않고 이틀 동안을 굶고 지내다가, 사흘째에는 자기가 갇혀 있던 우리를 부수고 나가서 다른 먹을 거리를 찾아다니기까지 하면서, 자기 손님인 새끼염소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알시온 이야기 514∼515

서로 사귀어서 이루어지는 친밀성과 합의의 권리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고양이·개·토기를 함께 살도록 길들여 볼 때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로, 특히 시칠리아의 바다로 여행하는 자들은 알시온의 생활 조건에서 인간 사고력의 한계를 넘는 일을 경험으로 배운다. 어떤 종류의 동물들의 잉태와 출생과 해산에, 자연이 그만한 영광을 부여한 일이 있던가?

과연 시인들이 말하는 바처럼, 델로스의 섬은 옛날에는 둥둥 떠다니다가 라토나의 해산을 위해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알시온이라는 새가 물결 위에 새끼를 치는 동안은 바다 전체가 정지해서 잔잔해지고 물결도 바람도 없고 비도 오지 않게 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1년 중에 낮이 가장 짧은 동지 때의 일이며, 그의 특권 덕택에 우리는 한겨울에도 이레 밤 이레 낮을 위험 없이 항해할 수 있다. 그 암컷들은 자기 짝 이 외에는 다른 수컷을 모르며, 한평생 버리지 않고 그를 거둔다. 그리고 수놈이 노쇠하여 허약해지면 그를 자기 어깨에 메고 사방으로 다니며, 죽을 때까지 섬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알시온이 새끼를 기르려고 물결 위에 지어 놓은 보금자리의 놀라운 구조를 밝혀 보거나 그 재료를 짐작해 볼 총명성을 가져 본 일이 없다. 플루타르크는 그 새의 집을 열어 보고 만져도 보았다는데, 그 재료는 여느 물고기의 뼈를 서로 맞추고 잇고 엮고 다른 것은 가로지르고 한 것으로, 곡선과 둥근 면을 조절하여 물에 잘 뜨도록 동그란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는 집을 다 지어서는 그것을 물결 위에 갖다 놓는데, 바다의 물결은 그것을 살그머니 쳐서 아직 맺어지지 않은 곳을 더 여미고, 그 구조가 아직 확실치 못해서 늘어진 곳을 다진다. 또 잘 이어져 있는 것은 물결이 쳐 조이기 때문에, 돌이나 쇠로 두드려도 여간해서는 부서지지도 풀리지도, 손상되지도 않게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더욱 감탄할 일은 그 내부의 오목한 형상과 균형이다. 과연 그 집을 지은 새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게 꼭 닫혀져 있어서, 비단 바닷물뿐 아니라 다른 어떠한 것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여며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 구조에 관해 서적에서 인용한 극히 명백하게 설명된 묘사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은 그 구조를 꾸미기에 곤란한 면을 아직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허영되기에 우리가 모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우리 능력만 못한 것으로 보고, 경멸조로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털도 뼈도 없는 토끼 515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우리의 심령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자기 사정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잡히는 모든 것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고 육체적인 소질을 벗겨 없애고, 자기가 알아 둘 가치가 있다고 보는 모든 사물들을 거기서 두께·길이·깊이·무게·빛깔·냄새·거칠음·매끈함·단단함·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소질은 전부 피상적인 비천한 재료인 양 치워 두고 정리하며, 그들을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로마와 파리, 내가 상상하는 파리를, 그것이 크기도 장소도 돌도 회도 나무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며, 그들을 영생 불멸의 정신적인 자기 조건으로 조절해 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우리 심령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팔소리나 총소리나 전투에 길들여진 말이 마구간에 누워서, 마치 지금 싸움터에 있는 것처럼 자다가 꿈틀거리고 부르르 떨고 하며, 그 마음속에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와 부대가 없는 한 군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그대는 강건한 준마들이 사지를 뻗고 잠들어 누워서도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자주 헐떡이며 마치 승리를 다투듯,
온 근육을 긴장시킴을 보리라.                                                                                            (루크레티우스)

사냥개가 꿈속에 토끼를 쫓고 있다고 상상하며, 잠 속에서 그 뒤를 쫓느라고 헐떡이며 꼬리를 뻗치고 오금을 흔들며, 그리고 달음질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때의 토끼란, 털도 뼈도 없는 토끼이다.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518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내부와 생명이 매인 부분들로 보면 돼지가 그렇다. 아주 벌거숭이로 해놓은 인간을, 그의 오점이나 타고난 굴종과 완전하지 못함을 생각해 보면,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우리가 몸을 감싸고 다니는 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들의 미로 우리를 장식하고, 그들에게서 벗겨 온 물건 밑에 우리를 가리려고, 털실·날개깃·털·명주실 등을 빌려 오는 것은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 달라고 해야 할 만한 일이다.
 



오로지 우리들만이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 519

그뿐더러 우리는 그 결함이 바로 동물들의 감정을 거스르는 단 하나의 동물이며, 오로지 우리들만이 본성에서 나오는 행동을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고려해야 할 만한 일은 이 방면의 대가(大家)들이 명령하기를, 사랑의 정열에서 치유되려면 욕심나는 대상의 육체를 자유로이 들여다볼 일이며, 애정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자는 상대편 신체의 음부를 보고는
불타오르던 흥분이 즉시 얼어붙었다.      (오비디우스)

이런 치료법은 아마도 좀 까다롭고 냉각된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로 터놓고 친교를 맺어 가다가 싫증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성이 지닌 결함의 두드러진 징조이다. 우리네 부인들이 사람들 앞에 나오려고 자신을 분칠하며 장식하고, 여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정숙한 마음보다는 기교와 조심성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 비너스들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의 올가미로 결박해 두려는 남자들에게
자기 사생활의 이면을 은닉하려고 매우 조심한다.      (루크레티우스)


무식한 사람 522

무식한 사람의 연장은 더 빳빳이 서지 못한단 말인가?    (호라티우스)


가련하고 참담한 동물 524

참으로 자연은 우리의 가련하고 허약한 처지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에게 오만함밖에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에픽테토스가 '사람은 자기 생각을 사용하는 것밖에 자기 고유의 것이란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 바람과 연기밖에 가진 것이 없다. 철학은, 신들은 건강을 본질로 갖고 질병은 지식 속에 가졌으며, 사람은 그 반대로 행복은 공상으로 갖고 불행은 본질로 가졌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재화와 보물은 한낱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가련하고 참담한 동물이 허풍을 떠는 꼴을 보라.


상상력 때문에 526


어린아이들의 부드럽고 연한 살이 우리의 살보다 찢고 째기에 더 쉬운 것은 그들이 무지한 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말(馬)의 살은 어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상상력 때문에 병에 걸리는가?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만 느끼는 병을 치료하려고 피를 뽑고 속을 훓터 내고, 약을 쓰는 자들을 본다. 우리에게 진짜로 병이 없을 때에는 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탈이 된다. 얼굴 빛깔이 이러니 무슨 염증 충혈의 징조가 되고, 계절이 더우니 무슨 열병에 걸릴 위험이 있고, 그대의 왼손에 생명의 줄이 끊겼으니, 중한 병에 걸릴 징조를 알려 주는 것이 된다. 이 지식이 염치 없이 건강에 대든다. 청춘의 이 쾌활한 정력은 늘 그대로 있을 수 없으며, 그 힘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면 안 되니까, 미리 피를 뽑아서 힘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부의 사랑 527


우리가 경험으로 보는 바 가장 천하고 둔한 자들이 사랑의 실천에는 더 견실하고 바람직하며, 마부의 사랑이 한량들의 사랑보다 더 유쾌하다는 것은, 후자에게는 마음의 동요가 육체의 힘을 혼란시키고 꺾고 피로케 한 탓이 아니면 무슨 까닭일까?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528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냉담하고 둔감한 취미를 갖는 것이 주는 편리함은 역시 그 결과로 해서 좋은 것과 유쾌한 것을 누리는 경우에도 예민하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불편함을 이끌어 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비참한 조건으로는 즐겨야 할 것보다도 피해야 할 일이 더 많고 극도의 탐락은 가벼운 고통만큼도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다. "인간은 고통보다도 쾌락의 감각이 적다." (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529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탐락을 가장 높이 평가한 어떤 학파의 철학자는 이 행복이라는 것을 다만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세워 놓았다. 엔니우스가 말하듯,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바랄 수 있는 한의 행복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불행을 갖지 않음은 많은 행복을 가짐이다. (엔니우스)

우리를 한순간 건강과 고통이 없는 상태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듯한 바로 그 근질거림과 예민한 감각, 이 힘차고 동적이며 무엇인지 모르게 찌르는 듯하고 물어뜯는 듯한 탐락도, 역시 그 목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다. 여자와의 접촉에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정욕은, 우리에게 맹렬한 욕망이 지닌 고통을 없애는 것밖에 찾지 않으며, 이 욕구를 채워 그 열병을 없애고 편안히 쉬는 것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단순함이 우리를 아무 불행도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건으로서는 대단히 생복한 상태로 지향케 하는 일이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랄 만하지도 않는 이 고통 없는 상태를 칭찬하지 않는다.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내가 병에 걸렸으면 그것을 알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이 내 살을 태우고 찢고 하면 그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진실로 고통의 의식을 뽑아 없애는 자는 동시에 탐락의 의식을 근절시킬 것이며, 마침내는 인간 자체를 파괴할 것이다. "고통이 없음은 높은 값을 지불해서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즉 심령의 둔화와 육체의 마비를 초래한다."(키케로)

 

키케로의 거짓말과 참말 530

지나간 행복의 추억은 고통을 배가한다.                                                                            (단테의 시 개작)

철학이 주는 이 충고로 추억 속에다 지나간 행복만을 담아 두고, 우리가 겪은 불쾌한 일을 지워 버리라는 것은 마치 망자의 기술이 우리의 권한 안에 있는 것 같은 말이니, 다 똑같은 수작이다. 이것은 또 우리를 한층 더 못나게 만드는 충고이다.

지난날 불행의 추억은 감미롭다.                                                                                                   (키케로)

운명과 싸울 수 있게 내 손에 무기를 쥐어 주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역경을 발밑에 유린해 버리도록 내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어야 할 철학이 어째서 물러빠지게 이 비겁하고도 꼴사나운 계책으로 나에게 숨을 구멍만 찾아 다니게 하려는 것인가? 기억력은 우리가 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 준다. 참으로 무엇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만큼 그것을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넣은 것이란 없다. 어떤 사물을 잃어버리고 축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길이 새겨서 잘 보존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우리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하고,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키케로)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원치 않는 때에도 내 추억을 간직하고, 내가 원하여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키케로)는 말이 진실이다. 이 충고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홀로 자기를 감히 현자라고 표명한 자'의 말이다.



최후의 해결책 533


전도서에는 '예지가 많으면 번민이 많다', '학문을 쌓는 자는 노역(勞役)과 고민을 쌓는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대개 철학 사상이 합치하지만, 모든 종류의 가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없는 인생에게 종말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재미있나? 복종하라. 재미 없나? 그대 가고 싶은 데로 가라."(세네카)

"고통이 쓰린가? 그래, 그것이 그대를 괴롭힌다고 하자. 그대가 알몸뚱이거든 목을 내밀라. 그러나 그대가 불카누스의 무기로 옷 입었거든 저항하라." (키케로)


오오 오만이여! 535


오오 오만이여! 너는 얼마나 우리를 방해하느냐! 소크라테스는 예지의 신이 그에게 현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샅샅이 살펴보고 뒤흔들어 보고서도, 거기서 이 거룩한 호칭의 아무런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만큼 정의롭고 절도 있고 용감하고 박식하며, 자기보다 더 말을 잘 하고 잘생기고 나라를 위해 유익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남보다 특출난 것이 없고, 자기가 현명한 자로 처신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며, 그의 신은 사람이 학문과 예지에 관해서 가진 생각을 사람이 특수하게 어리석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최선의 학설은 무지의 학설이며 최선의 예지는 순박성이라고 결론지었다.


보리 이삭 537


나는 결국 인간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힘이 그의 역량에 있는 것인가, 또는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찾아본 결과가 어떤 새로운 힘과 견고한 진리로 인간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양심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가 그 오랜 추구에서 끌어 낸 모든 소득이라는 것은 그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타고난 무지는 오랜 연구로 확인되고 증명되었다.

박학한 사람들에게는 보리 이삭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속이 비어 있는 동안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처신한다. 그러나 성숙해져서 낟알이 생기며 속이 차서 굵어지면 겸손해지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든 것을 시도하고 탐구해 본 다음, 이 학문의 더미와 사물들의 잡다한 창고 속에서 허영된 일 외에는 아무것도 단단하고 견실한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자만심을 포기하고 자신의 타고난 조건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장 현명한 인간 538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현명한 인간은 무엇을 아느냐고 누가 물어 보자,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우리가 아는 것의 최대 부분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물들의 최소 부분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모르는 것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우리는 꿈으로 사물들을 알고 있다. 실은 우리는 사물들을 모른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거의 모든 옛 사람들은 인간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의 감각은 제한되어 있고, 지성은 허약하고, 인생은 짧다고 말하였다."(키케로)


몽테뉴가 살던 시대의 고민과 고뇌 542


다른 자들이 구속받고 있는 필요성에서 자기가 면제되어 있는 것만도 장점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환상이 만들어 낸 하고많은 잘못 속에 얽혀 자기보다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있는 편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이렇게 소란스레 싸움을 거는 분열 속에 섞여드는 것보다는 확신을 갖는 일을 미뤄 두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어려운 사고방식, 난해성 546∼547

결국 이런 것은 허망한 제목을 가치 있게 보이려고 하며, 우리의 정신에 호기심으로 흥미를 돋운다. 또 우리 정신을 길러 가꿀 재료라고 내주는 것이 살점 없는 헛된 뼈다귀나 갉아먹으라고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런 어려운 사고 방식을 탐하는 것일까? 클리토마코스는 카르네아데스의 문장을 보고, 그가 무슨 의견을 가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어째서 평이한 문체를 피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까다로운 자'라는 별명을 받았던가? 난해성은 학자들이 요술쟁이처럼 그들 기술의 허황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잡술로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여기에 쉽사리 속아넘어간다.

난삽한 언어로 속물들에게 명성을 떨친다.(헤라클레이토스를 가리킴)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애매한 문구 속에
숨겨진 사상만을 애호하며 탄복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로잡힌 신세에 절망한 사람들 549

사로잡힌 신세에 절망한 사람들이 진리의 탐구에 기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연구는 그 자체가 재미나는 일이며, 너무나 재미나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들은 여러 탐락 중에서도 정신의 수련에서 오늘 탐락을 금지하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며, 너무 알고자 하는 데에도 무절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549∼550


데모크리토스는 식탁에서 꿀맛같이 단 무화과를 먹어 보고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감미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근원을 밝히려고 식탁에서 일어나 무화과를 따 온 자리의 나무 생김새가 어떤가를 보러 갔다. 그의 하녀는 이렇게 소란을 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듣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수고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무화과를 꿀그릇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탐구해 보려는 기회를 잃고 자기 호기심의 재료를 빼앗긴 것에 분개해서 "물러 가거라, 기분 나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본래 그런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끝까지 캐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잘못된 추측을 고집한 상태로 진실한 이유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에 관한 일화는, 우리가 어떤 사물의 원인을 참구하여 알아내지 못하고 절망할 때에, 그 추구해 보는 연구에 대한 정열에서 느끼는 재미의 성질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플루타르크도 이것과 같은 예를 하나 들고 있다. 어떤 자는 탐구하는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그 원인을 캐고 있는 사물이 해명되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자는 물을 마셔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의사가 그의 열병에서 오는 갈증을 치로해 주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기보다는 쓸모없는 사물이라도 배우는 편이 낫다." (세네카)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무한수 567

그대의 이성은 세상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밖에는 더 그럴듯하고 견고한 기초를 갖지 못한다.

대지·태양·달·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단일하기는커녕 반대로 무한수로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568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등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그 진리와 규칙들이 다른 우주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다른 우주들은 아마도 다른 모습과 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극히 짦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569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명인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죽음인지 누가 아는가?      (에우리피데스)

그것도 그럴듯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가 이 영원한 밤의 무한한 흐름 속의 한 섬광이며, 우리에게 영원히 계속되는 자연 조건의 극히 짧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자격을 얻을 것인가? 죽음은 이 순간의 앞과 뒤의 전부와, 이 순간 자체의 상당한 부분까지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자들은 멜리소소의 추종자들처럼 운동이라는 것은 없으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왜냐하면 이 우주가 하나밖에 없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천체의 움직임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움직임도 여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자연에는 생산도 부패도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571

······ 이 생각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더 확실하게 파악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저울대에 표어로 새겨 놓았다.


몽상과 과오의 원천 572

과거건 미래건 이 무한한 세기들은 하느님에게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선과 예지와 힘이 그의 본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지만 지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오만은 하느님의 소질을 우리의 판단으로 검사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몽상과 과오가 생기며, 자기 무게보다 동떨어진 사물들을 자기들 저울대로 달아 보려고 한다. "아주 작은 성공에 용기를 얻을 때에, 인간 심성의 오만이 저지를 일은 놀랄 정도다." (플리니우스)


대자연은 수수께끼 같은 시에 불과 583

나는 플라톤에서, 대자연은 수수께끼 같은 시에 불과하다고 말한 이 거룩한 말을 읽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치 무한히 잡다한 그릇된 빛이 서로 엇갈려 비쳐서, 우리 추측에만 맡겨 두도록 베일로 가려진 한 폭의 그림이라고도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완전한 경이 586

어째서 정신적 인상이 한 뭉치로 된 굳은 물체 속에 이렇게 길을 만들어가며, 이런 경탄할 만한 장치의 관계와 연락의 성질이 무엇인지 인간으로서는 알아본 자가 없다. "이 모든 사물들은 인간의 이성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자연(본성)의 장엄성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 플리니우스는 말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완전한 경이로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이 결합 자체가 인간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확실하다는 인상 588

확실하다는 인상은 미친 수작과 극단의 불확실함을 드러내는 확실한 징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591

 

아리스토텔레스를 잊어버리지 말자. 그는 육체를 자연스레 움직이게 하는 것을 엔텔레케이아(생명 존속)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다른 것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착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본질도 근원도 본성도 말하지 않고, 다만 그 효과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일리아드 593

만일 원자들이 우연에 의해서 여러 형상들을 지어 놓은 것이라고 하면, 어째서 그들은 집 한 채, 구두 한 켤레 만들어 놓을 수 없었던 것인가? 또 어째서 무한수의 그리스 문자를 마당에 뿌려 놓다가 《일리아드》의 원본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