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한지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세월 참 빠르다.

며칠전 문득 '서재 태그' 맨 밑에 달려 있는 more 버튼을 슬쩍 눌러 봤더니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그동안 글을 쓸 때마다 심심풀이로 적어 넣었던 '태그'들이 깨알같이 모조리 떠올랐던 것이다. 역시 알라딘은 가끔씩이나마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요술램프에서 피어오른 형형색색의 글씨들을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곧바로 창피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글씨들 가운데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글씨들을 클릭해 보니 온통  그 '글씨'와 관련된 (베껴쓴) 글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모조리 빠짐없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글들은 대부분 내가 그 책을 쓴 저자와 책 내용을 그냥 한번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앞으로도 두고 두고 읽어볼 요량으로 (나만 봐도 좋고, 남들이 봐도 나쁠 건 없다 싶어서) '그냥' 올려놓은 글들도 많았다. 물론 내가 그동안 베껴쓴 내용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어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결국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법인가 보다. 지금에 와서 '태그'를 일일이 찾아 없애기에는 너무 일이 벅찼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무래도 그동안 애써 엮어 놓은 태그를 지우는 일은 '스스로 죽을 꾀를 내는 일은 아닌가' 싶어서 조금 고민스러웠다. 내가 애써서 베껴쓴 글을 도대체 '태그' 하나 때문에 내가 그 글들을 모조리 지워야할 까닭이 뭔가 싶었다. 이리 저리 고민하던 끝에 정말 뜻밖에 책 한 권이 내 눈에 번쩍 띄었다.













'베껴쓰기'도 글쓰기 연습이 되는구나. 여태 글쓰기를 가르쳐 주는 책은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그럼 그동안 열심히 책 내용을 베껴쓰는 일을 알라딘의 주된 과업으로 삼아온 나는 내 나름대로는 글쓰기 연습을 한 셈이로구나......

그럼 나는 과연 예전에 비해 글쓰는 게 좀 나아졌을까. 그건 좀 자신없다. 내가 쓴 글은 예전에 쓴 거나 최근에 쓴 거나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다만 맞춤법이나 조금 덜 틀리게 쓰고 내 멋대로 지어내던 비문이나마 조금 줄어들었으면 다행이겠지. 다만 그동안 훌륭한 인물들이 애써 만든 책들을 읽으며, 거기서 발견한 인상깊은 구절들을 열심히 베껴쓴 덕분에, 그들을 조금씩 흉내내려고 어줍잖게 애쓰고 있는 모습들은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늘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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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30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마음에 밥이 되어 준 말인걸요.

oren 2013-11-30 12:35   좋아요 0 | URL
저 많은 말들을 제가 '밥'처럼 먹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니 나는 정말 '잡식성의 딜레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정말 괴상한 동물이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 *
역겨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로진은 인간이 '잡식성의 딜레마'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유칼립투스 잎을 주식으로 먹기 때문에 그것이 부족해지면 위기에 처하는 코알라와는 달리, 잡식성 동물들은 광범위한 메뉴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다. 단점은 많은 음식들이 유독하다는 것이다. 많은 종류의 물고기, 양서류, 무척추동물이 강력한 신경독을 갖고 있다. 평상시에는 무해한 고기에도 촌충 같은 기생충이 있을 수 있고, 상한 고기는 부패를 야기하는 미생물들이 청소동물들을 막고 고기를 독차지하기 위해 독을 분비하기 때문에 굉장히 치명적이다. – 스티븐 핑커

saint236 2013-11-3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해봐야겠는데요. 전 분량이 절반도 안될 것 같은데요

oren 2013-11-30 12:38   좋아요 0 | URL
태그를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따라 분량이 좌우되는 셈이니,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 싶어요.
알라딘 서재의 달인들은 아마도 '태그'가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ㅎㅎ

saint236 2013-11-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해봤는데....장난이 아니네요.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이 줄줄이 나오네요.

oren 2013-11-30 12:40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각자 얼마나 다른 '태그'들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다 싶어요.

transient-guest 2013-12-0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기'와 '쓰기'에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런 책을 소개받게 되니 참 좋네요.

oren 2013-12-02 09:26   좋아요 0 | URL
읽기와 쓰기는 누구나 다 고민하는 문제이지 싶어요. 우린 하루도 읽지 않거나 쓰지 않으면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상품넣기'로 소개해 드린 저 책은 저 또한 읽어 보지 못한 책이라, (감히 추천해 드릴 처지는 못 되고) '그냥' 소개만 해 드릴 뿐임을 헤아려 주세요~

페크pek0501 2013-12-02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심하게? 많은 태그입니다. 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군요.
베껴쓰기... 중요하다는 것 알고 있었어요.
신경숙 작가도 이십대에 오정희,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노트에 베껴 썼다고 해요.
저는 요즘 좋은 문장을 여러 번 읽는 걸로 대치하고 있어요. 마음으로 베끼는 것이죠. ^^

oren 2013-12-02 15:37   좋아요 0 | URL
pek 님의 댓글을 읽어 보니, 문득 학교 다닐 때 국어선생님께서 좋은 시를 많이 암송하게 했던 '숨은 이유'도 알 듯 하네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더욱 좋은 방법은 많이 외우는 것이겠죠. 앞으로는 딱딱한 문장들보다는 '아름다운 시'를 많이 외웠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