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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수상록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평점 :
(밑줄긋기)
제 1 권
2. 슬픔에 대하여
눈물과 통곡 22
비참한 일을 참는 것은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 전체를 뒤집어엎고, 그 행동의 자유를 잃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에, 몸이 얽매여 얼어붙듯 하며 모든 동작이 오그라져 붙었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 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얽매였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는 식이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준다. (베르길리우스)
3. 우리들의 감정은 세상 너머에까지 이른다.
저 너머 24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 않고 늘 저 너머에 있다. 공포나 욕망, 희망 등이 우리들을 늘 미래로 비약시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현실에 관한 고찰과 마음을 가리고, 장차 올 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장차 세상을 떠날 날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한다.
존재의 밖에 있게 되면 26
모든 일을 뒤적거려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도 자기가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 솔론의 말을 음미하며, "어느 자가 순리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그의 평판이 나빠지고 그의 후손이 비참하게 되어도,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동안 자기에게 좋을 대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한번 존재의 밖에 있게 되면, 현재의 것과는 아무런 연락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그가 존재하지 않게 된 이후에만 행복할 수 있을 바에야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솔론에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7. 생각이 우리들의 행동을 판단한다
우리 힘에 달린 것은 진실로 우리들의 의지뿐 39
우리는 자기 역량과 수단 밖의 일에 매달릴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결과와 집행은 결코 우리 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힘에 달린 것은 진실로 우리들의 의지뿐이니, 인간의 의무에 관한 모든 법칙은 필연적으로 이 의지에 기초를 두고 수립된다.
8. 나태에 대하여
정신의 일거리 40
빈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다면 수만 가지 쓸데없는 잡초만 무성해진다. 이 땅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이것을 개간해서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
마음의 목표 41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9. 거짓말쟁이들에 대하여
말문 43
기억력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이야기를 너무 멀리 끌고 가며 헛된 소재를 잔뜩 덧붙여 놓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들은 그 좋은 점을 질식시켜 버린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가 아닌 때에는 그들이 기억력으로 복받은 것을 저주하지 않으면 판단력에 복이 없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말문이 열린 후, 그것을 막고 이야기를 풀어 버리고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마리 준마의 힘 43
한 마리 준마의 힘은 그 말이 적당한 때에 딱 정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밖에는 더 잘 알아볼 것이 없다. 분수 있는 사람들 중에도 줄기차게 말하다가 그만 끊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야기를 끝낼 계기를 찾고 있는 동안, 그들은 마치 허약한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꼴마냥 횡설수설하며 이야기에 질질 끌려간다.
백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 43
특히 늙은이들에겐 지난날의 기억이 남아 있고 그 말을 되풀이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위험이 더 많다. 나는 한 귀족이 원래는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내가 듣기에 진력이 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에 백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들어앉아서 인식과 지식이 되어 박혀 있는 까닭으로 45
가장해서 변질시킨 말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다가, 일순간 말문이 막히지 않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실대로의 이야기가 먼저 기억 속에 들어앉아서 인식과 지식이 되어 박혀 있는 까닭으로, 그것이 공상에 떠돌아서 갑자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확고한 발판도 없고 아주 박히지도 않은 거짓말을 몰아내며 첫번에 받은 인상이 가짜로, 또는 변질시켜서 말한 부분이 기억을 잊어버리게 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거짓말쟁이 44
그들은 지각 없게도 제 올가미에 자신이 걸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왜냐하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그렇게도 여러 가지로 말해 놓은 것을 무슨 기억력으로 모두 둘러맞출 재간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에 이런 훌륭한 기술을 가졌다는 평판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것은 명성이 뭔지 모르거나 성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거짓말과 옹고집 45
거짓말만이, 그리고 그보다 좀 덜하지만 옹고집은 모든 기회에 억눌러서 나오지도 크지도 못하게 막아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그들과 함께 커 간다. 그리고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 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놀라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진실과 거짓말 45
만일 진실과 같이 거짓말에도 얼굴이 하나밖에 없다면 우리의 사정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면 거짓말쟁이가 말하는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반대는 수없는 얼굴과 무한한 벌판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과 개 45
정말 나는 엄숙하게 뻔뻔스런 거짓말을 하고 난 다음, 확실하게 닥쳐올 극도의 위험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옛날 교부(敎父-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우리는 무슨 말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사람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와 같이 있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10. 빠른 말법과 느린 말법
좁은 홈통 48
웅변이 자유롭고 유쾌하게 굴러가지 않으면 쓸모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 어떤 작품들은 애써서 지은 품이 박혀 있어 어딘가 투박하고 무뚝뚝한 맛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등불과 기름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잘 지어 보려고 애를 쓰며 자기 일에 너무 긴장하고 억눌린 마음 때문에 자연스러운 웅변을 억누르고 꺽어 빽빽하게 만들고,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
14. 선악의 취미는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달려 있다
불행이라는 것 57
사람들은 (그리스의 옛 속담에 말하되) 사물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속을 태운다고 한다. 이 전제를 모든 점에서 진실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이는 우리들의 비참한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데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불행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들어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경멸하거나 또는 좋은 일로 돌려놓기는 우리의 힘에 달렸기 때문이다.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 58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고 아무것도 우리들을 강제하지 않는다면, 병이나 궁색, 경멸 같은 것에도 좋은 맛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이고 형체를 지어 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괴로운 편으로 자기를 연결시키며, 그런 것에 쓰고 나쁜 맛을 준다는 것은 괴상하게도 어리석은 수작이다.
사상 60
모든 사상은 생명을 걸어가며 품어 보기에 족할 만큼 강하다.
피론의 돼지 62
오늘날에도 어린애들까지 수월찮은 고통을 받을까 무서워서 죽음을 택하는 예를 흔히 본다. 이 점에서 비겁한 자들까지도 도피의 방법으로 택하는 죽음 따위를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세상에 두렵지 않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한 고인은 말한다. 남자건 여자건 보다 더 행복한 시대에 살며, 여러 종파의 사람들로서 꿋꿋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 자진해서 받아들인 자, 또는 이 인생의 고난을 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살기에 지쳐서 저승으로 도피한 자, 그리고 다른 곳에 더 나은 생의 조건을 기대해서 죽음을 택한 자들의 목록을 벌여놓을 양이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수효는 너무나 많아서, 사실 죽음을 두려워한 자를 헤아리는 편이 쉬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런 예이다. 철학자 피론은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다가 대단한 위험에 빠졌는데, 그때 자기 주위의 공포에 싸인 자들에게 예로서 거기 있던 돼지 한 마리를 보여 주었다. 그 돼지는 그 폭풍우에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우리가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 이성, 그것으로 해서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며 제왕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 이성의 장점이 겨우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던가? 사물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안식과 평정을 잃는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를 피론의 돼지만도 못한 조건에 놓아 두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장 소중한 보배로 받들고 있는 지성을 가지고 우리는 대자연의 의도, 즉 각자는 자기 편익을 위해서 연장이나 방법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사물들의 이 보편적 질서와 싸우며, 우리를 파면시키는 일에 이 지성을 사용해서야 될 말인가?
죽음 63
죽음은 한순간의 이동인 만큼, 생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65
그렇지 않다면 우리 중에 도덕·용기·힘·큰 마음·결심 같은 것을 명예로 삼을 자, 그 누구일까? 고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무슨 역할을 맡을 것인가? "용덕은 위험을 탐한다."(세네카) 거친 방석 위에서 자고, 모든 무장을 갖추어 입고, 대낮의 더위를 참아 내며, 말과 당나귀 고기를 먹고, 자기 살을 째고 뼛속에서 탄알을 뽑아 내는 것을 눈으로 보며, 살의 꿰매고 태우고 하는 수술을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보통사람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똑같이 착한 행동들 중에서도 더 힘든 것이 할 만한 것이라고 현자들이 말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을 피하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경솔의 동류인
희열, 쾌락이나 담소, 유희 속에 있을 때가 아니고,
비애 속에서 견고성과 지조를 지킬 때이다. (키케로)
더 큰 희열 65
덕은 치르는 희생이 클수록 더 큰 희열을 준다. (루카누스)
전능한 원동력 65
고통이 그렇게도 참을 수 없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만족을 정신에서 얻는 습관을 갖지 않고, 우리들의 조건과 행위의 유일한 상전인 우리 심령의 힘에 기대하지 않는 탓이다. 육체는 다소간의 차이를 제하고는 한 자세밖에 갖지 않는다. 마음은 모든 종류의 형태로 변할 수 있고, 육체의 느낌이나 다른 모든 사건을 무엇이든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의 상태에 맞추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연구하고 탐색하며, 그 속에 있는 전능한 원동력을 일깨워야 한다.
마음 역시 그렇다 66∼67
우리가 도망치면 적이 더 악을 쓰며 추격해 오는 것과 같이, 고통도 우리가 그 밑에 떨고 있으면 더욱 거만해진다. 고통은 잘 버티는 자에게 더 순해질 것이다. 고통에 대항해서 마음을 긴장시켜야 한다. 물러나거나 뒤로 빼면,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는 파멸을 불러온다. 육체가 굳어질수록 짐을 지기에 더 든든하듯, 마음 역시 그렇다.
고통에 내어주는 자리만큼밖에 67
우리는 마치 보석들이 그것을 놓아 두는 자리의 빛깔에 따라 생생하거나 흐릿한 빛깔로 보이듯 고통도 변모해 가며, 우리가 그 고통에 내어주는 자리만큼밖에 우리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은 고통에 몸을 맡길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필요한 기관 71
시각은 감각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나, 가장 유쾌한 감각이다. 그러나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필요한 기관은 아이를 낳는 데 쓰이는 연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것이 너무 맛을 주기 때문에 아주 싫어하고, 그것의 값어치 때문에 그 사용을 포기했다.
가치 71
우리는 사물들의 품질이나 그 유용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차지하기에 얼마만큼의 값을 치렀나를 보고는, 마치 그것이 사물의 실체 그 어느 부분같이 생각한다. 또 사물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것을 가치라고 하지 않고, 그 사물을 위해서 우리가 갖다 주는 것을 가치라고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단한 절약가라고 본다. 돈을 치른 무게에 따라 그만큼 그 사물을 본다. 우리들의 생각은 결코 돈 쓴 값어치를 헛된 비용으로는 하지 않는다. 산 값이 금강석을 귀하게 만들고, 덕은 그 닦기의 어려움, 신앙은 그 괴로움, 약은 그 쓴맛이 그 값어치를 만든다.
부유하다는 것 71
에피쿠로스는 말하되, '부유하다는 것은 살기 쉬움이 아니라 일거리가 달라지는 일'이라고 하였다.
인색해 지는 것 71
사실 사람이 인색해지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많아서 그렇게 된다.
가장 무서운 빈곤 73
부자로서 불안하고 궁색하고 분주한 자는 그저 가난한 자보다 더 가련하게 보인다. "부유한 자가 품고 있는 가난은 가장 무서운 빈곤이다." (세네카)
돈더미 74
돈더미에 마음이 쏠리는 버릇이 생기면, 그때부터 돈은 그대의 소용이 되지 못한다. 그 가장자리도 떼어 보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다시피, 건드리면 모두가 무너져 버릴 건축물이다. 운명에 목덜미를 잡히듯 꼼짝달싹도 못할 경우에나 건드려 볼 것이다.
그런데 위험한 일은 이 욕망에 확실한 한계를 세워서(좋다고 생각하는 일에 한계를 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저축을 알맞게 그만두기는 쉽지가 않다는 일이다. 이 돈뭉치를 줄곧 키워 가며, 작은 숫자를 더 큰 숫자로 불려 나가서, 결국엔 비천하게도 자기 재산을 즐겨 볼 생각은 못하고, 모두 간직해 조금도 쓰지 않는 수작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순서 74
플라톤은 육체적 또는 인간적으로 보배로운 재물을 건강, 미모, 체력, 부유의 순서로 늘어놓는다.
여행의 재미 75
나는 저축하는 버릇을 버렸다. 큰 돈을 쓰며 하는 여행의 재미가 이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었다. 여기서 나는 세 번째의 생활로 들어갔다.(나는 느끼는 대로 말한다.) 실로 더 재미나고 절도 있는 생활로 끌려갔다. 그것은 소비가 수입과 맞아 가게 하는 방식이다. 때로는 한편이 더하고 어느 때는 다른 한편이 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이가 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획득의 욕심이 없음과 사들이는 탐욕이 없음 75
내가 돈을 모을 때는 머지않아 쓸 데가 있다는 생각으로 저축한다. 더 가져도 소용없는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사려는 것이다. "획득의 욕심이 없음은 재산이다. 사들이는 탐욕이 없음은 수입이다."(키케로) 나는 재산을 불릴 욕심이 전혀 없다. "부유의 과실은 풍부이며, 풍부의 규범은 만족이다."(키케로) 나는 당연히 인색해질 나이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인색은 늙어서 모두 잘 걸리는 병으로,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수작 중에서 가장 꼴같잖은 일이기 때문이다.
넉넉함과 가난 76
그러니 넉넉함과 가난은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영광이나 건강도 마찬가지로, 부유를 소유하는 자가 생각하는 정도로밖에는 좋은 것도 유쾌한 것도 못 된다. 각자는 자기 생각대로 잘 살기도 하고 못 살기도 한다. 어느 누가 그렇다고 믿어 주는 사람이 만족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만족한다. 이 점에서만, 신념은 그 자체에 본질과 진리를 보여준다.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 76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 76
실로 못난이의 공부하기와 주정꾼의 술끊기가 고통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생활이 방탕아에게는 고문이 되며, 연약하고 한가로운 자에게 훈련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서는 해로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약하고 비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위대하고 고매한 일들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위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것인 악덕을 그런 일에 전가시킨다. 꼿꼿한 삿대는 물 속에서 굽어 보인다. 사물을 본다는 것보다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다.
자제할 줄 아는 것 77
"경박하고 연약한 편견은, 고통 속에서나 쾌락 속에서나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의 마음은 그 때문에 약해진다. 말하자면 흔들린다. 우리는 벌에 한 번만 쏘여도 고함지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모든 일은 자제할 줄 아는 것에 귀결된다."(키케로) 여기 말해 두지만, 사람은 사는 고통이 심하고 인간은 약하다는 점을 과도하게 주장해 보아도, 철학은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논리는 "궁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면 적어도 궁하게까지 살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대꾸를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77
누구나 오래 불행하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다. 죽음도 삶도 참아낼 용기를 갖지 못하는 자를, 저항하기도 달아나기도 원치 않는 자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둔한 소와 망아지 81
둔한 소는 안장을 욕심내고, 망아지는 밭갈기를 갈망한다. (호라티우스)
18. 공포심에 대하여
공포심 85
전장에서 실컷 얻어맞은 자들이 아직 피투성이 그대로일지라도 다음날 다시 싸움터에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적에 대해서 극심한 공포를 품은 자들에겐 그저 적군을 면대시켜 보지도 못할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당하고 굴복당한다는 천박한 공포에 눌려 있는 자들은 마시지도 먹지도 잠자지도 못하며,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 간다. 그 반대로 가난한 자들, 추방된 자들, 농노들은 다른 자들과 똑같이 유쾌하게 살아간다. 공포의 충격을 참아 내지 못해서 목매달아 죽고, 빠져 죽고, 뛰어내려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포는 죽음보다도 더 참아 낼 수 없이 괴로운 일임을 알 수 있다.
19. 사람의 운은 죽은 뒤가 아니면 판단하지 못한다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 날을 기다려 보아야 아느니
죽어서 장례 지낸 뒤가 아니면
어떤 이라도 행복한 이라고 큰 소리치지 못한다. (오비디우스)
솔론의 말 86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린애들도 크로이수스 왕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키로스 대왕에게 사로잡혀 사형선고를 받자 그 집행하는 마당에서 "오! 솔론이여! 솔론이여!" 하고 소리쳤다. 이 말이 키로스에게 보고되어,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심문했다. 크로이수스가 대답하기를, "옛날 솔론이 자기에게 한 말에, 사람은 운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기 전에는 그를 행복한 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 불확실하고 변화무궁하여 아주 가벼운 동기로 어떤 형세에서 전혀 판이한 다른 형세로 변해 가기 때문이라고 하더니, 이제 자기의 불행이 이 예고에 적중되었다"는 것이다.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 87
운은 어떤 때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을 정확히 노리고,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건설해 준 것을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을 보여준다. 라베리우스(기원전 2세기의 로마의 풍자극 작가) 말처럼 "정히 나는 살아야 할 일보다 쓸모없이 하루를 더 살았다"(마크로비우스)라고 소리치게 하는 것 같다.
최종 막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상연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88
그래서 우리는 솔론의 그 훌륭한 충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로서, 운의 좋고 나쁜 것이 행이나 불행의 자리를 잡지 못하며, 위대성이나 권세라는 것은 흥미 없는 성질의 사건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그가 한층 더 멀리 내다보며, 우리 인생의 행복은 천성을 잘 타고난 정신의 안정과 만족, 그리고 조절된 심령의 결단성과 확신에 달려 있는 만큼, 최종 막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상연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 듯싶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가령 철학자의 아름다운 논법은 우리에게 체면을 꾸미는 일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 사건들은 우리 생명 자체에까지 시련을 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우리에게 늘 평정한 용모를 유지할 여유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의 죽음과 우리 사이의 역할에는 아무것도 꾸며 댈 건더기가 없다. 똑똑히 프랑스어로 해야 한다.
항아리 속에 있는 좋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종말이 좋을 것 88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판하는 경우, 나는 항상 그 끝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본다. 나 자신의 인생에 관한 주요한 관심은 이 종말이 좋을 것, 즉 묵묵히 고요하게 죽어가는 일이다.
20.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 89
키케로는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음을 대비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더욱이 연구와 명상은 우리 마음을 바깥으로 끌어 내어, 신체 이외의 일에 분망하게 하는 것이며, 또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에 닮아가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예지와 사유가 결국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 한 점에 귀결된다.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 89
세상의 모든 의견들은 (여기 여러 방법이 있다고 하여도) 쾌락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점에 일치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것을 배척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과 불안을 자기 목표로 하는 자의 말을 누가 들을 것인가?
이에 관해 철학의 여러 학파들의 의견 불일치는 말투의 불일치에 그친다. "그렇게 교묘하고 어리석은 이론은 모르는 체하자."(세네카) 사람은 어떠한 역할을 맡든 간에 항상 그 중에서 자기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들이 무어라고 말해도, 도덕으로 보아도,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정신이 빠질 정도로 즐기는 데 있다.
매한가지로 잡아 가는 이상 94
모두들 가고, 오고, 아장거리고, 춤추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소식도 없다. 이런 것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나 역시 그들에게, 또는 그들의 아내나 아이, 친구들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에 갑자기 죽음이 닥쳐 오면, 어찌 그렇게도 고민하고 고함지르며 발광하고 절망에 빠져서 허덕거리는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도 천해지고, 변하고, 심신이 전도되는 꼴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일찍부터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우둔한 무관심이 지각있는 사람의 머리에 들어앉아야 한다 해도 (나는 그런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그 대가가 너무 비싼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있는 적이라면 비겁함을 무기로 빌려 와도 좋다고 권하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상, 그대가 도망을 치건 비겁하건 점잖은 인물이건 매한가지로 잡아 가는 이상
실로 죽음은 연로한 어른이 도망쳐도 뒤따라오고
용기 없는 젊은이의 겁 많은 등도
오금도 용서치 않는다. (호라티우스)
아무리 강하게 쳐낸 강철의 갑옷이라도 막아 내지 못하며
아무리 조심스레 쇠와 구리의 갑주 밑에 숨어도
죽음은 그 숨은 머리를 찾아내고 만다. (프로페르티우스)
항상 제자리에 단단히 서서 이 적에 대항해 버티며, 그와 싸우기를 배워 볼 일이다.
죽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99
나는 이미 인생의 쓸모와 쾌락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했으며, 인생의 재미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죽음을 대하는 데도 공포를 훨씬 덜 느낀다. 이것은 내가 인생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이 두 교환을 더 쉽게 해치울 것이라고 기대하게 한다.
불행한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99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변화와 쇠퇴 속에 자연이 우리에게 이 손실과 악화에 관한 맛을 제거해 주는 모습을 보자. 한 노인에게는 그의 청춘 시절의 힘과 지나간 인생의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아! 늙은이에게 어느 만큼의 생명이 남아 있는가?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의 호위대 병사 하나가 기진맥진한 채 쇠약한 몸으로 거리에서 그만 죽으러 가겠다고 퇴직을 요구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 쇠잔한 모습을 보고, "너는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며 놀리는 조로 말했다. 갑자기 그런 상태에 떨어진다면 이 변화를 견뎌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손에 이끌리어 가벼운 경사를 부지불식 중에 한 계단 한 계단 끌려 내려가면, 자연은 우리를 이 비참한 상태로 굴려가며 거기에 길들여 준다. 그리하여 청춘이 우리에게서 죽어 갈 때는 생명의 온전한 죽음이나 노년의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지만 우리는 아무 충격도 받지 않는다. 감미롭고도 꽃 피어나는 생명에서 힘들고 괴로운 생명으로 변해 갈 때와 같이, 불행한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육신은 굽어지고 휘어져서 무거운 짐을 지탱하는 힘이 줄어든다. 우리의 마음도 역시 그렇다. 이 영혼을 이 적수의 공격에 대항해서 단련시키고 강화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 적수를 두려워하는 동안 안정을 얻기는 불가능하니, 이것은 인간 조건의 힘에 넘치는 일이지만 우리가 확고하게 이 죽음에 대할 수 있다면, 불안·고민·공포, 그리고 가장 사소한 불쾌감까지도 마음에 깃들기는 불가능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이다.
통과점 101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통과점에 관해 속을 썩이다니 어리석은 수작이지!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 102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되,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고 하였다. 아침 8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5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행이나 불행이라 하며 고찰하는 것을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 인생을 영겁에 비교해 보면, 그보다도 산·강물·별·나무, 또는 어떤 동물에 비교해 보면,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는 똑같이 가소로운 일이다.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 102
어떻든 대자연은 우리에게 강제한다.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여기서 나가라고 하며 말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올 때에 거쳐 온 길을 무슨 심정이건, 공포심도 가질 것 없이 생명에서 죽음에로 다시 거쳐 가거라. 그대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 생명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지어가는 것 102
그대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생명에서 훔쳐 온 것이다. 생명은, 생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그대의 생명이 끊임없이 하는 일은 죽음을 지어가는 것이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102∼103
그대가 인생에서 소득을 보았다면, 그대는 거기에 포만했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어째서 마음껏 먹은 손님처럼 인생을 뜨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인생을 이용할 줄 몰랐다면, 인생이 쓸데없었다면
그까짓 것 잃었다고 서러울 것 있나? 무엇 때문에 삶을 또 바라나?
삶과 죽음의 단맛과 쓴맛 106
키론은 시간과 지속의 신인 그의 부친 사투르누스에게서 영생의 조건을 듣고 그것을 거절했다. 영원한 생명을 상상해 보라. 인간에게는 내가 그에게 준 생명보다 더 참을 수 없고 괴로우니라. 그대에게 죽음이 없었다면 그대는 내가 죽음을 주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나를 저주했을 것이다. 나는 이 죽음의 효용이 편리함을 고려해서, 그대가 너무 탐하여 천방지축으로 죽음을 찾으려고 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거기다가 조금 쓴맛을 섞었다. 그대가 생명을 피하지도 말고 다시 죽음을 피하지도 말라고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절도를 그대가 지키게 하기 위해서, 나는 삶과 죽음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조절하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