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선택의 산물
주택에 지출된 재고
정치,경제,사회,법률,역사,철학 등을 포괄하는 엄청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경제학 고전의 명저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조를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선조들이 시도한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어떤 실패를 했든 간에 "나의 아들아, 괴로워하지 마라. 네가 해내지 못한 일로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57


주석

57. 인도 경전 『비슈누 푸라나Vishnu Purana』에서 인용. "나의 아들아, 괴로워하지 마라. 네가 과거에 행하지 않는 일로 누가 너를 탓하고, 네가 해내지 못한 일로 누가 너를 탓하겠느냐?" 푸라나는 힌두교 신화에 대해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모든 경전을 가리킨다. 푸라나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쓰인 성전聖典으로 여겨지며, 각 신을 찬양하는 성전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종교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지식까지 망라한 백과전서이기도 하다. 중요한 푸라나는 18종이며, 『월든』의 장수章數와 일치한다.




총 18장으로 이루어진 『월든』의 장수章數가 힌두교 경전인 푸라나의 숫자와 같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18개의 장들 가운데 대다수의 장들은 제목부터 소박하기 그지없다. 「콩밭」, 「마을」, 「호수」, 「난방」, 「겨울 동물들」, 「겨울의 호수」, 「봄」 등등이 그렇다.

그러나 몇몇 장들은 제목부터 좀 묵직하다. 「경제」,「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 「독서」, 「고독」, 「더 높은 법칙들」등등.

그런데 소로우가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오랫동안 퇴고를 거듭하면서도(9년 동안에 7번이나 고쳐 썼다.) 유독 「경제」를 맨 앞장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18개의 장들 가운데 유난히 많은 분량을「경제」에 할애한 까닭은 무엇일까?(『주석달린 월든』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이 책은 본문 내용이 415쪽이고, 「경제」가 97쪽으로 약 1/4을 차지한다. 빼곡하게 달린 주석 또한 총 1,640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경제」에 정확히 400개가 달렸다.)

이제 와서 찬찬히 생각해 보니 소로우의 깊은 뜻을 조금은 알수도 있겠다 싶다. 그는 '현실과 멀리 동떨어진 이상'만을 추구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언제나 '단단한 토대'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다만 그가 강조한 '경제', 즉 소박한 삶에 필요한 경제, 진정한 여가를 즐기는 삶을 위한 경제를 우리가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현실과 너무 맞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할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지나치게 꿈을 좇는 이상주의자'로 서둘러 결론내리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경제」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들 가운데 일부인 '옷'과 '집'과 '빵'만 하더라도 그에겐 할 말이 너무 많아 보인다.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그의 기나긴 안목과 날카로운 통찰은 당장 '집값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오늘날의 경제'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듯하다.


인류의 유아기에 한 용맹무쌍한 사람이 피신처를 찾아 바위 틈새로 기어들어갔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모든 아이는 세상을 다시 시작한다.153 아이들은 비가 내리고 추운 날에도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아이들은 소꿉장난을 하고 목마놀이를 한다. 그런 놀이를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완만하게 비탈진 바위나 동굴 입구를 보고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가장 원시적이었던 조상이 그 부분에 대해 품었던 자연스러운 열망이 우리 안에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동굴에서부터 시작해 종려나무 잎, 나무껍질과 나뭇가지, 힘들게 짜서 펼친 아마포, 풀과 짚, 판자와 널빤지, 돌과 타일로 지붕을 덮는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 마침내 우리는 야외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제 우리 삶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부분 좁은 울타리 내에서 이루어진다. 화덕에서 밭까지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우리가 자신과 천체天體 사이에 어떤 장벽도 없이 더 많은 낮과 밤을 보낼 수 있다면, 또 시인이 지붕 아래에서 시를 읊조리지 않고 성자가 지붕 아래에서 그처럼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다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새들은 동굴 안에서는 노래하지 않고, 비둘기도 비둘기장 안에서는 순결을 지키지 않는다.(67쪽)


주석

153. ······ 어린 시절과 지혜의 관련성은 소로의 「아울루스 페르시우스 플라쿠스」에서 찾을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의 삶은 무척 즉흥적이다. 그가 모든 시간을 포괄하는 영원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는 매순간 어린아이며, 지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불쑥 내던지는 원대한 생각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에 구름에서 번갯불을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 소로는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의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만큼 지혜롭지 못한 걸 항상 한탄해왔다."라고 썼다.



비록 소로우는 뚜렷한 직업조차 없는 무능한 사람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이 책의 주석에 따르면 "소로는 하버드 대학교의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교사-개인 가정교사, 측량사-정원사, 농부-페인트공, 목수, 벽돌공, 일용 노동자, 연필 제조공, 사포 제조공, 작가, 때로는 삼류시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다.") 그는 누구보다 경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았고 경제를 철학처럼 중요시한 인물이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자꾸 그를 새롭게 쳐다보게 된다.


 

경제162는 가볍게 다루어지는 경향을 띠지만, 가볍게 결정해서는 안 될 문제다.(68쪽)


주석

162. 경제economy의 어원은 그리스어 'oikonomia'로 원래 가정이나 가사의 관리를 뜻했다. 소로는 이 장에 '경제'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 '공동체가 부를 창출하는 방법 혹은 검약한 삶'까지 의도했다. 또한 그가 흔히 그랬듯이 어원적 의미에 중점을 두었다. 에머슨은 「개혁적인 사람」에서 "원대한 목표를 추구하는 경제, 따라서 소박한 취향으로 검약한 삶을 추구하고, 자유와 사랑과 헌신으로 행해지는 경제는 고결하고 고상한 일, 요컨대 신성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장의 뒤에서 소로는 생계를 위한 경제를 '철학과 같은 뜻'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지체없이 삶에서 실험해보는 것보다 삶을 사는 법을 더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렇게 해야만 수학만큼이나 그들의 정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어떤 아이가 예술과 학문에 대해 뭔가를 알기를 바란다면, 나라면 그 아이를 학자의 옆집으로 보내는 식의 케케묵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뭔가를 배우고 실습하겠지만 정작 삶을 살아가는 기술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통해 세상을 조사하는 법은 배우겠지만 육안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법은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화학이나 기계학은 배우겠지만, 자기가 먹을 빵을 어떻게 만들고 벌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할 것이다. 해왕성의 새로운 위성을 발견하는 법은 배우겠지만, 자기 눈의 티를 찾아내거나267 자기가 어떤 건달의 위성 노릇을 하는지 알아내는 법은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초 한 방울에 숨어 있는 괴물들은 눈여겨보며 조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주변에서 우글대는 괴물들에게 현혹당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모르게 된다. 예컨대 관련된 책을 읽어가며 광석을 채굴하고 녹여 잭나이프를 만든 학생과, 인스티튜트에서 야금학 강의를 들었고 아버지에게 로저스 사의 주머니칼을 물려받은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누가 손가락을 베일 가능성이 크겠는가? ······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야 항해학270을 수강했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차라리 내가 직접 배를 몰고 항구를 한 바퀴 돌았더라면 항해학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았을 것이다. 가난한 학생조차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배워야 하지만, 철학과 동의어 관계에 있는 생계를 위한 경제학은 이 나라의 대학에서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 결과 가난한 학생은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와 세271를 열심히 읽으면서 아버지를 헤어날 수 없는 빚에 몰아넣는다.(95쪽)


주석

267. 「마태복음」7장 3절의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를 빗댄 표현이다. 비슷한 구절이 「누가복음」6장 41절에도 있다.

270. 항해천문학은 1830년대 하버드 대학에서 2학년 수학 강의의 일부였다.

271.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썼다.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는 영국 경제학자로 『정치경제학과 조세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을 썼으며, 장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 1767∼1832)는 프랑스 경제학자로 『실천 정치경제학 통론 Cours Complet d'Economie Politique Pratique』을 썼다. 소로는 C.R.프린세이가 번역한 세의 『정치경제학 개론』(필라델피아,1834)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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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뿐 아니라 중고등학교와 초등학교도
아이들한테 '참된 살림'을 안 가르쳐요.
어쩔 수 없겠지만,
교과서 엮는 학자들부터 살림을 모르고,
교과서로 교과과정 나가는 교사도 살림을 모르니까요...

oren 2013-12-15 00:07   좋아요 0 | URL
학생과 교사와 교과서마저 참된 살림을 가르치지 않으니, 가정과 사회가 그나마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을텐데, 경제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겠다 싶네요.
 


『주석달린 월든』을 읽다가 소로우의 '옷'에 대한 철학을 다시금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옷'에 대한 철학을 떠올리면 우선『의상철학』이라는 명저를 쓴 토머스 칼라일이 막연히 생각난다. 사실 나는 그 책의 이름과 저자만 익히 들어봤을 뿐 정작 그 책이 '옷'에 대해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주석달린 월든』을 통해 아주 조금이나마 내 '무지의 일단'을 벗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도 품어본다. (토머스 칼라일의 책 내용이 월든의 '주석' 곳곳에 꽤 자주 나온다.) 드문드문 얘기만 들었을 뿐인 '칼라일과 의상철학'을 '주석달린 월든'에서 발견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한가지가 더 있다. 칼라일의 책 속에 몽테뉴의 책 내용이 나오고, 소로우는 칼라일의 책을 통해 알게 된 몽테뉴의 재치있는 글을『월든』에도 슬쩍 담았다는 점이다. '옷' 때문에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고, 또한 그들의 멋진 생각이나 재치있는 글들을 다시 음미해 보는 재미 또한 『주석달린 월든』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마주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옷'에 대해 소로우는 '근엄하게 혹은 심각하게' 얘기하지만, 몽테뉴는 '웃으면서 혹은 즐겁게' 얘기한다. 두 사람의 글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니 서로 너무 다른 '옷'을 입은 듯싶어 이 글을 쓰는 나조차 좀 뻘쭘하다.


 * * *


 

을 구입할 때,117 우리는 진정한 실용성보다 새것을 좋아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고려하는 경우가 더 많다. (57쪽)

주석

117. 과 관련해 소로는 토머스 칼라일의 『의상철학Sartor Resartus』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의상철학』은 에머슨의 편집으로 1836년 보스턴에 소개됐다. 소로는 은 상징적인 껍데기일 뿐 그 을 입은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소로가 1854년 1월 21일, 해리슨 그레이 오티스 블레이크에게 보낸 서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내 외투가 마침내 닳아 해졌네. ······ 그 외투를 만든 사람은 내 기분이 어땠는지 몰랐을 거네. 그 외투를 입을 때마다 내 마음이 울적했는지 하늘을 날 듯 즐거웠는지 말이야. ······

그러나 다시 외투 문제로 돌아오면, 우리는 그보다 더 치명적인 외투, 다시 말하면 거의 한평생 우리에게 맞지 않는 외투를 입고 힘겨워하네. 직업이나 신분이라는 외투를 생각해보게. 우리는 서로를 아무런 편견도 개입되지 않은 진정한 모습으로 대하는 경우가 거의 없네. 우리가 허세를 부리니 상대가 우쭐대는 모습을 묵인할 수밖에. 또 판사는 자기에게는 있지도 않은 권위를 법복으로 포장하고, 증인 역시 원래는 겸손하지 않으면서도 법정에서는 부들부들 떨면서 얌전한 모습을 보이며, 죄인도 진실을 숨기고 자책하는 모습을 띠거나 거꾸로 뻔뻔하게 죄를 부인하지 않는가. 우리가 어떤 외투를 어떻게 입고 입지 않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네. 외투를 바꿔 입혀보게. 예컨대 판사를 죄인석에 앉히고, 죄인을 판사석에 앉혀보게. 그럼, 자네가 그들을 바꿔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당신이 지금 입은 을 허수아비에게 입히고, 당신은 그 옆에 맥없이120 서 있어 보라. 허수아비보다 당신에게 먼저 인사할 사람이 있을까?  (59쪽)

주석

120. 기운 빠진 모습을 뜻하는 말장난으로 '을 걸치지 않고'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만약 입고 있는 을 홀랑 벗겨놓으면 과연 몇 사람이나 자신의 현재 지위를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이런 경우, 당신은 가장 존경받는 계급에 속한다는 문명인들을 자신 있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59쪽)



 

힘들게 할 일을 찾아낸 사람이라도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새을 마련할 필요는 없다. 다락방에서 기약 없이 먼지가 쌓이던 헌 이라도 그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영웅은 하인이 오랫동안 신었던 낡은 구두라도 기꺼이 신을 것이다-영웅에게 하인이 있다면.124 또 맨발이 구두보다 더 오래된 것이므로 영웅은 맨발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교 파티와 입법 기관에 들락대는 사람들에게는 새 외투가 있어야 한다. 외투를 바꿔 입을 때마다 사람이 달라 보일 테니까. 그러나 내 웃 과 바지, 내 모자와 구두가 하느님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다면, 내게는 그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60쪽)

주석

124. '어떤 사람도 자신의 하인에게는 보통 사람이다'라는 속담을 빗댄 표현으로, 이 속담은 프랑스의 수필가 미셸 드 몽테뉴가 「후회에 대하여」에서 "가족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한 말을 영어식으로 바꿔 표현한 것이다. 소로는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에서 "그 재치 넘치는 프랑스 작가가 남긴 '어떤 사람도 자신의 시종에게는 보통 사람이다'라는 말을 우리는 제멋대로 부인한다"라는 글을 읽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의 생각 ①)
'여기서' 『몽테뉴 수상록』에 나오는 대목을 곧바로 충분하게 '인용'할 수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자기의 개인 생활에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훌륭한 인생에서 보는 일이다.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줄리우스 드루수스가 장인(匠人)들에게 한 말은 점잖은 말이었다. 장인들이 그에게 3천 에퀴만 내면 그의 집을 전과 같이 이웃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6천 에퀴를 주겠으니, 누그든 어느 기둥이나 주춧돌을 들여다보아도 좋게 만들어 놓으라."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888∼889쪽)
 

 


 

사람이 벗어 놓은 은 안쓰럽고 기괴하기도 하다. 사람이 입은 에 비웃음을 억누르고 신성함을 더해주는 것은, 그 을 입은 사람이 쏟아내는 진지한 눈빛과 그 사람의 내면에서 흐르는 진실한 생명이다. (65쪽)




(나의 생각 ②)
여기서 또다시 재치넘치는 몽테뉴의 글을 더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옷'으로 검색되는 대목만 찾아 또다시 충분하게 '인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시도해 볼 만한 일이다.




풋내기들 436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그는 단거리 질주를 시도한다.                (베르길리우스)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 486

자연은 보편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생령 중에서, 자연이 그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모든 방법을 아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그들은 방자한 생각으로 때로는 자기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때로는 그 반대편 극단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속박당하고 잘 씌워져서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이며, 남이 내버린 물건으로밖에 자기를 싸감아 무장해 볼 거리도 없다. 반면에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이 그들을 조개껍데기·깍지·덧껍질·털·모사·가시·가죽·잔털·날개짓·거북·등껍질·양털 가죽, 돼지털 등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대로 을 입혀 주고, 그들을 발톱·이빨·뿔 등으로 무장시켜서 공격하고 방어하게 하고, 자연이 헤엄치기·달음질치기·날기·노래하기 등 그들에게 맞는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우는 것 외에는 배우지 않으면 길가기·말하기·밥먹기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미다스 왕 이야기 632

미다스 왕은 자기가 만지는 것이 모두 황금이 되게 하여 달라고 신에게 요구하였다. 그의 소원은 성취되어서 포도주가 황금이 되고, 그의 빵과 이불의 털도 황금, 그의 셔츠와 도 황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소원이 성취된 것을 누리기에 지쳤고, 감내하지 못할 보물을 선물받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축원을 풀어 달라고 기도해야만 하였다.

부유하고 동시에 궁색한 이런 새로운 불행에 놀라서
그는 재물을 멀리하며,
전에 갈망하던 것을 지금은 혐오한다.
      (오비디우스)



 

이 책으로 일반 사람들과 가질 수 있는 교제 734

내가 이 책으로 일반 사람들과 가질 수 있는 교제는 기껏해야 그들의 인쇄 기계를 빌린다는 일뿐이다. 그것이 더 신속하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책의 낱장은 아마도 장터에서 버터 한 귀퉁이가 녹아 떨어지지 않게 막아줄 것이다.

다랑어나 올리브를 마음껏 싸는 포장지가 되어 주자.                                                   (마르티알리스)

그리고 나는 자주 고등어에게 편하게 들어 있을 을 제공하련다.                                 (카툴루스)



 

동정과 처녀 951

나는 동정을 지키키보다는 한평생 갑을 입고 있는 편이 더 쉽다고 본다. 그리고 처녀를 지키는 서약은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서약보다 더 고상하다고 본다. "마귀의 힘이 신(腎)에 있다"고 성 히에로니무스는 말한다.



 

미모, 자연의 특권 1179

미모가 얼마나 강력하고 유쾌한 소질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아무리 자주 말해 보아도 부족하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짧은 시기의 폭군이라고 불렀고, 플라톤은 그것을 자연의 특권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미모보다 더 신용을 얻는 특권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교제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미모는 앞으로 나타나며, 경이로운 인상으로 지대한 권위를 가지고 우리의 판단력을 유혹하며 독점한다. 프리네가 만일 그녀 깃을 슬쩍 벌리며 미모로 재판관을 유혹하지 않았던들, 탁월한 변호사에게 걸려서 소송 사전에 패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온 세상의 주인이던 키로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가 이 미모를 끝까지 중시했다고 본다. 그리고 대 스키피오도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스 말로는 '좋다'와 '아름답다'에 같은 낱말이 쓰인다. 그리고 성경에는 자주 아름답다는 말을 '좋다'는 말로 표현한다. 나는 플라톤이 야비하다고 말했지만, 옛날 시인에게서 따온 노래에 따라 건강·미모·부유를 선(善)의 범주에 넣은 것에 찬성하고 싶다.

 Phryne. 그리스의 창녀로 오만과 탐욕의 전형. 프락시텔레스는 그녀를 모델로 하여 아프로디테(비너스)의 조각상을 만들었다.



 

궁핍 속에서 얻는 감미로운 맛 1208

자기의 팔 힘만으로 살아가는 내 하인들과 나와의 차이를 보라. 스키타이 족들과 서인도 사람들은 형체나 힘으로는 나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거지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부려 보았더니, 얼마 안 가서 그들은 그전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밥 잘 먹고 잘 입으며 지내던 내 집에서 떠나버렸다. 그 중의 하나가 그 뒤에 돌아다니며 쓰레기더미에서 조개나 주워 먹고 끼니를 때우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아무리 달래고 위협해 보아도 그는 궁핍 속에서 얻는 감미로운 맛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거지도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위풍과 탐락이 있으며, 그들에게도 직책이나 직무와 정치적 질서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버릇의 성과이다. 버릇은 우리를 자기 멋대로의 형태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현자들은 그 때문에 부리는 습관이 즉시 우리를 좋은 형태로 만들어 주기 쉽도록 가장 좋은 형태 속에 박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변화와 변종으로 만들어 간다.



 

규칙이 괴롭힌다 1212∼1213

한편에서는 병이 우리를 괴롭히고 다른 편에서는 규칙이 괴롭힌다. 아무리 해도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쾌락을 좇으며 저지를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로 힘들지 않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쉬운 것이 수상하게 보인다.

여러 사물들에 대한 나의 욕망은, 그 자체가 상당히 묘하게 조화하여 내 위장의 건강에 적응해 주었다. 소스의 신맛과 쏘는 맛은 젊었을 때에는 구미에 맞았었다. 그 후에는 내 위가 그런 것을 받지 않으니 내 입맛도 바로 변해 버렸다. 포도주는 병자에게 해롭다. 그것은 맨 먼저 내 구미에서 벗어나 억지로 권해도 싫어졌다. 내가 받아서 불쾌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 몸에 해롭다. 그리고 배가 고파서 맛있게 먹는 것은 아무것도 해로운 것이 없다. 나는 기분에 맞는 행동으로 해를 입어 본 일이 없다. 그래서 모든 의료법이 결정한 것을 아주 대폭적으로 내 쾌락 앞에 양보시켰다. 그리고 젋었을 적에는,

사랑이 붉은 자락을 날리며
내 주위를 이러저리 즐겁게 돌아다닐 때,
 
     (카툴루스)


나는 누구만큼이나 방자하게 정욕에 사로잡혀 지냈으며,

나는 싸울 때마다 상당한 영광도 거두었다.
      (호라티우스)

돌격보다도 차라리 끈덕지게 오래 끌었으며,

여섯 번까지 지탱했던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오비디우스)

내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처음 애정의 압제에 부딪혔는지 고백해 보면, 실은 불운도 있고 기적도 있었다. 그것은 정말 부딪힌 일이었다. 그때는 선택이라는 지각이 생기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너무 오랜 이야기라서 내 일이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자기가 처녀였던 시절의 생각이 안난다던 카르틸라(Cuartilla, 페트로니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여자)의 기억에 비겨 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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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몸에 맞는 옷이란, 내 삶에 맞는 길이 되리라 느껴요.
내 삶은 내가 사랑하고 아껴야 아름답겠지요.

oren 2013-12-12 10:11   좋아요 0 | URL
옷만 하더라도 내 몸에 맞추기 보다는 '남의 생각'에 맞추는 방향으로 더더욱 발전해 온 듯해요.
그런 경향들이 점점 더 심해지면서 이젠 '남의 눈'에 맞추어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으로 그 영역을 넓히는 것도 모자라, 얼굴뿐만 아니라 턱뼈에까지도 칼을 들이대는 지경에 이르렀지만요.

다크아이즈 2013-12-1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서늘하도록 좋아요.
찬찬히 읽으면서 오렌님의 내공을 되새겨 봅니다.
안에서 존경 받기 힘든 그 상황은 오렌님 메모에서 힌트 얻어 저도 단상 하나 건졌어요.
제 페이퍼에도 올렸어요. 간단 단상이에요. 감사합니다.^^*

oren 2013-12-12 11:35   좋아요 0 | URL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리저리 다듬어 내 자신의 글로 다시 포장하기는 몹시 어려워도, 이런 식으로 미리 베껴 놓은 글을 이래저래 '붙여넣기'란 너무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지요. 이것 자체도 좀 뻘쭘하고 민망한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닌데 팜므님께서 공감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네요.

프레이야 2013-12-1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개 끄덕이며 생각을 던져주는 글귀들 잘 읽었습니다. 늘 그렇듯 맛과 영양을 고루 갖춘 페이퍼 고맙습니다^^

oren 2013-12-13 10:0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 반갑습니다. 흰 눈이 내리고 날씨가 차가우니 문득 김장독이 떠오릅니다.(프레이야 님께서 '맛과 영양'을 언급해 주신 덕분이겠지요.) 차가운 땅 속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숨어 앉은 그 항아리 속엔, 잘 다져지고 버무려진 온갖 양념들을 제 몸 구석구석에 끼고 엉켜 누운 배추와 무우들이 이제 막 내년 봄과 여름을 생각하며 가만히 숨을 죽이기 시작했겠지요. 이 긴 겨울이 우리 모두 조금이라도 더 성숙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1. 드디어 네팔이다.
주석 달린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강주헌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 *


(『주석달린 월든』 31쪽)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필요가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들과 함께 걷는 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던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문명'에서 오롯이 벗어난 그곳 히말라야와는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겨졌다.

히말라야로 떠나는 준비물 가운데 '몇 권의 책'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일찍 산행을 끝내고 롯지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별 보는 일'과 '책 읽는 일' 말고는 별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 능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진 '시대의 반항아' 알버트 머메리가 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비롯해 소로우의 책도 세 권씩이나 챙겼다.(2년 전에 실크로드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걷는다 1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네 권을 들고 갔다가 깔끔하게 다 읽고 돌아온 기억도 그런 '무모한 욕심'에 보탬이 되었다. 사실 올리비에의 책은 걷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지만 나는 정작 '날아다니며' 거의 다 읽었던 듯싶다. 인천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오가는 비행시간이 제법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경 속에 잠겨 '시대의 반항아'이자 '참된 등산가'였던 머메리의 책과 '문명의 반항아'이자 '참된 철학자의 삶'을 살았던 소로우의 책을 읽는 재미는 얼마나 짜릿할까. 기대가 무척 컸었다. 실제로 네팔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를 벗어나 히말라야에 접어든 첫날 밤에는 (다음날부터 만나게 될 히말라야의 눈덮힌 산봉우리들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머메리의 책을 두세 시간쯤 읽다가 잠들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책을 펼치는 일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내 얘기를 히말라야의 여러날 밤 속으로 더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서 빨리 소로우에 대한 얘기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올해 봄에 사들였던 소로우의 책은 나와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던 목사님(네팔 카트만두에 거주)께서 '여긴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으니 다 읽은 책들은 좀 남겨두고 가라'는 부탁까지도 애써 외면한 채 고스란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나는 그때 무사히 되돌아온 그 책들을 다행히 요 몇 달 동안 거의 다 읽었다.

엊그제 마침내 제법 두툼한-그리고 주석도 제법 많이 달린-『소로우의 강』(원제는『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다 읽고 나니 이제야『주석달린 월든』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움마저 생겨났다. (이 책은 진작에 사 두고 가끔씩 드문드문 펼쳐보기만 했다. 왠지 소로우의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만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다시 펼치는『월든』이지만 빼곡하게 '주석이 달린' 이 책은 역시나 처음에 읽었던 그냥『월든』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월든』에 왜 이토록 방대한 주석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월든』에 필요한 주석을 쓰느라 오랜 시간을 바쳤던 제프리 S. 크래머는 말한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라고. 그래서 '이 책은 신화처럼 읽힌다.'라고. 나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싶다.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월든』을 한번 읽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물론 늦지 않다. 영웅을 그린 신화는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소로우 스스로 이 책 속의 한 장인 「독서」에서 그 방법을 미리 밝혀 놓았다.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처럼' 여기고 있다. 『월든』은 어느덧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격상된지 얼마쯤 지났고, 어떤 독자들에게는 신화처럼 읽혀야 하는 책으로 바뀌었다.『주석달린 월든』은 괜히 나온 책이 결코 아니었다.

이 책 속에 담긴 주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두 번씩이나 두드린 내 계산기는 정확하게 1,640개라고 두 번 말한다. 놀라운 숫자이고 이렇게 주석이 많이 달린 책은 여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내게는 더욱 놀라운 책이다.

소로우 형제와 함께 '일주일 동안'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으로 보트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콩코드의 숲속으로 되돌아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놓인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소로우가 말하는 대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아 가면서 들어야겠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이 없었더라면 새까맣게 놓치고 말았을 얘기들이 과연 얼마나 많을지 몹시 궁금하다.



(『주석달린 월든』 52쪽)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85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88
(52쪽)


주석

85. ['시간의 홈'은 'the nick of time'을 번역한 것이다-옮긴이] 이 표현은 16세기에 'in the nick'으로 처음 사용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nick'이라는 단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나 막대에 새겨진 눈금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면 그는 용케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들어간 것이며 따라서 '시간의 홈'에, 즉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것이 된다.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88.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라toe the line'는 선원들에게 갑판 점호 시간에 두 판재를 이은 자리에 발끝을 대고 서라는 지시였다. 그래야 열이 반듯하게 정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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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쓴  제프리 S. 크래머의 머리말 가운데 소로우가 쓴 편지에 실린 '등산에 대한 숙제'도 무척 흥미롭다.)

                                               머리말

"『월든』출간."  『월든』이 출간된 1854년 8월 9일, 소로가 일기에 쓴 내용의 전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이주한 후 9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쓴 후에 맺은 결실이었다.

(중략)

월든 호수로 이주한 날의 일기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7월 5일 토요일. 월든-어제 이곳에 살려고 왔다."

(중략)


소로는 일기에서 언급하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되풀이했듯이, 자서전이 전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나이겠는가?" 라고 묻고, 『월든』을 출간한 후인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월든』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서전이 아니라, 소로가 자신이 만들어간 신화적인 삶에 예술적인 완전함을 더하기 위해 자유롭게 써내려간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소로가 쓰고 있던 것은 분명히 신화였다. 『월든』을 의도된 방향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읽는 독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소로는「독서」에서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월든』을 월든 호숫가에 잠시 살았던 사람의 기록으로 생각해서 자서전으로 읽는다면, 소로가 에머슨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어머니와 누이들이 빨래를 대신 해주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쓸데없이 트집 잡는 사람들의 주장에 귀가 솔깃해질 수 있다.

소로는 「독서」에서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도와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소로는 먼 옛날의 책, 동서양의 정신적인 고전에 대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소로는 지금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책에 대해 쓴 것이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중략)

소로가 경험에서 진실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1857년 11월 16일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네에게 숙제 하나를 내겠네. 산을 오르는 게 궁극적으로 자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고 빠짐없이 적어보게. 그렇게 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자네 경험의 중요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만족할 때까지 고쳐 써보게. 인간은 앞으로도 산에 올라야 할 테니 자네가 산에 올랐던 이유를 먼저 자네 자신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게. 처음 열두 번 정도를 시도해서 정확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끈기 있게 반복해보게. 특히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에 자네가 문제의 핵심이나 정점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도전해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자네 자신에게 설명해보게. 이야기가 꼭 길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네. 산에 오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자네가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에서 무얼 보았는지 묻고 싶군. 자네도 알겠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입증되는 걸세. 산 정상에 올라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네.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오르지 않으니까. 대신 점심 같은 걸, 여하튼 집에서처럼 푸짐하게 먹네. 어쩌면 집에 돌아온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네. 산이 뭐라고 말하던가? 산이 무엇을 하던가?


『월든』을 읽는 독자에게도 똑같은 충고가 주어질 터다. 『월든』을 읽는 데는, 즉 산을 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월든』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은 시대마다, 또 개인에게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산에 오르고 월든 호수로 되돌아가며 『월든』을 다시 읽는다. 『월든』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설득력 있게 와 닿는 글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스승의 우화처럼 보편성을 띤다는 증거이며, 우화를 만드는 선각자이자 시인이었던 소로에게 보내는 찬사다.

 - 제프리 S. 크래머(주석을 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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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2) 먼댓글(3) 좋아요(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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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ne summer night
    from Value Investing 2014-08-05 18:47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제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2.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둘러싼 이야기
    from Value Investing 2015-12-12 00:14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4장 <잠언과 간주곡> 중에서 * * * 내가 이 소설을 만난 건 대략 31년 전쯤이다. 물론 그 때 내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받았던 대단한 감동은 오랜 세월 탓에 그저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처럼 그저 어슴푸레하
  3. 다시 콩코드와 월든 호숫가로 발길을 옮긴 시간들
    from Value Investing 2017-04-18 16:57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 * * 어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그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호메로스가 대표적이다. 작가의 삶이 덜 알려질수록 작품이 더욱 신비로운 색깔로 채색되는 경우도 드물지는
 
 
oren 2013-12-10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는 그 소식만 듣고, 그 이후 '간다, 온다' 소식을 듣지 못한 어느 알라디너 분께서, 그 먼 데까지 '링크'를 걸어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해주신 덕분에, '먼댓글'이 제법 '멀리까지' 내려간 점을 부디 양해해 주세요~

숲노래 2013-12-10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시골이웃이리라 하고 생각해요.
어느 책으로 돌아보더라도
호미와 연필을 손에 쥐고 즐겁게 삶을 지은
시골이웃.

이러한 시골이웃, 영웅 아닌 시골이웃이 차츰차츰 늘어날 때에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이 감돌 수 있으리라 느껴요.

oren 2013-12-10 09:50   좋아요 0 | URL
비록 콩코드에 사는 이웃 사람들 대부분은 소로우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소로우 또한 지역 잡지에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마다 이웃 주민들이 '재미없어 할까봐' 고민했던 흔적도 여러차례 드러냈지만, 그런 점들은 소로우에게 결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지요. 그는 시골 이웃 사람들로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던 '전혀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지요.
* * *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월든』중에서

oren 2013-12-10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월든을 처음 읽을 때 소로우에게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제 생각을 적어둔 게 있는데,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아직도 가끔씩 그때 떠올렸던 시골 할아버지 생각이 난답니다. 그분은 손수 호미를 들고 밭을 가꾸시기 보다는 주로 꿀벌을 키우셨지만요.

* * *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P189)

(나의 생각)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집성촌이었던 때문에 그 할아버지도 집안 어른이셨는데, 학문의 깊이로는 이웃 수십킬로 이내에서는 따라올 만한 분이 없다고 할 정도였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라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지만 사서삼경에 통달하셨고,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대한 깊이가 대단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할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우리 마을에서 2∼3km쯤 떨어진 강 건너 산 아래에 홀로 사셨다. 머리도 백발이셨고 콧수염과 턱수염도 백발이셨기 때문에 어떨 땐 산신령을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우리가 가끔씩 강을 건너 산으로 땔깜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한 겨울에 토끼나 꿩을 잡으로 다닐 때나, 농삿일을 도우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그 할아버지는 언제나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늘 '혼자 산 밑에 사시면 깜깜한 밤이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분의 삶 또한 소로우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늘 옛 성현들과 만나고 또 그 분들과 대화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 데 평생을 보냈던 것 같다.

마녀고양이 2013-12-1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를 모르겠으나,
오늘 제 어깨에 지나치가 힘이 들어가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잠시 힘을 빼봅니다. 하아.......
한때 소로우를 정말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실은 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와 맞물려 있음을 깨달으면서
소로우처럼 순수하게 그 자연 속에서 사는 목적이 아니었구나 싶더군요. 언젠가
저도 소로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여행 궁금합니다. 곧 올려주실거죠? ^^
다시 보니 먼댓글에 다 있었군요.... 와아,

oren 2013-12-10 13:47   좋아요 0 | URL
소로우는 월든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일기에서 "삶! 삶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을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썼을 정도로 '삶 자체를 모험 속에 내던진' 사람이었죠.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일 때였으므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누구나 한때 집을 떠나 홀로 살고 싶은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래저래 여러 '삶의 굴레' 속으로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더욱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지도 모르구요.

히말라야에 다녀온지 겨우 일곱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겐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네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12-1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석달린 월든, 보관함에 담았어요.
제가 이해하든 못하든 오렌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책은 관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지요.
소로우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살지도 못해요.
다만 소로우 내면의 행적과 그 삶을 존중하고 알고 싶습니다.

논술 교재로 주석 없는 월든 읽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렌님 안내를 보니 다시 읽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oren 2013-12-11 15:38   좋아요 0 | URL
『주석달린 월든』을 찬찬히 읽어 보니 한 권의 책 속에 무수히 많은 신화와 전설, 역사와 문화, 경제와 철학, 자연과 과학, 소설과 시를 비롯한 문학 등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삶'에 대한 거의 모든 부분이 빼곡히 들어차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불쑥 내던지는 원대한 생각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에 구름에서 번갯불을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소로우 님이 스스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만큼 지혜롭지 못한 걸 항상 한탄한다'면서 무려 9년 동안이나 묵히고 다듬어 쓴 글이니, 팜므님이 다시 읽어보시면 틀림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이 많으리라 믿어요.

숲노래 2013-12-14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육사 위인전을 읽으니,
이육사 님도, 이녁 형제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집안이 넉넉한 살림이었어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학문도 함께 하면서 지내셨더라고요.

oren 2013-12-14 12:15   좋아요 0 | URL
아하.. 이육사 님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시를 쓴 시인이었군요. 『소로우의 강』에서 소로우 님이 글을 잘 쓰려면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고 했던 깊은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 * *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그랜드슬램 2017-05-26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3년전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을 때
<월든>을 배낭에 넣어서 간 적이 있더랬습니다.
시간관계상 푼힐까지 가는 곳 롯지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감자튀김에 맥주를 마시고 홀로 침잠하며 소로우의 삶과 철학을 느꼈는데
여행의 행복이 배가 되었습니다.
항상 금과 같은 리뷰와 페이퍼의 글을 소중히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감사드리고 항상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oren 2017-05-28 23:28   좋아요 0 | URL
오호.. 그랜드슬램 님께서도 히말라야 가셨을 때 <월든>을 가지고 가셨었군요. 정말 놀랍네요. 제가 4년 전에 ‘랑탕계곡‘ 쪽으로 트레킹을 갔을 때 ‘안나푸르나‘ 쪽으로 트레킹 갔다 온 친구도 함께 동행했었는데, 나중에 언젠가는 저도 ABC, EBC 코스로 또다시 트레킹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언젠가 또다시 히말라야를 찾을 때, 그 때도 <월든>을 들고 갈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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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들려주는 '우정'은 자연을 쏙 빼닮았다. 담백하면서 거짓없이 해맑고 순수하다. 아침 햇살처럼 눈부시면서 이슬처럼 영롱하다. 바람처럼 부드럽고 강물처럼 꾸준히 흐르며 호수처럼 깊게 잠긴다. 마침내 대양에 이르러 대륙을 이어주는 드넓은 길을 안내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해와 달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하게 일렁이는 성난 물결과, 비바람과 함께 일어나는 드높은 파도와도 맞서 싸우며, 야자수가 자라는 섬을 찾아 기나긴 항해를 오랫동안 함께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모든 뛰어난 것들은 희귀한 만큼 어렵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우정'에도 역시 예외가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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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우리는 벗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고 나서도, 슬기롭고 다정한 말보다는 자신에게 기억나는 쌀쌀한 낯빛이나 생각 없이 한 행동을 거듭거듭 되새겨보곤 한다. 한참 지난 후에 어떤 친절을 깨달으면서, 벗이 대단히 순수하고 고결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기에 하늘의 바람처럼 주의를 끌지 못한 채 지나갈 적이 있었음을,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대하지 않고 우리가 되기 바라는 모습으로 대할 적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잊혀진 것도 아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닌 고귀한 무언의 행동이 그저 우리에게로 온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차가운 마음에 어떻게 그런 것이 오게 되었는지 생각하면서 몸을 떨게 된다. 이 빚을 갚고 싶은 마음에 진심으로 애태우지만, 너무 때 늦은 시간에 말이다.(339쪽)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좋은 벗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개개인을 이야깃거리로 삼게 되면 으레 메마르고 하찮은 사실이나 이야기하게 된다. 개개인의 인격을 들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즉시 우주가 파산한 것처럼 여겨진다. 어떤 이야기를 하든지 헐뜯기로 기울기 쉽고,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야기의 테두리는 더욱더 좁아진다. 새로운 벗과 사귀게 되면 오래된 벗은 불친절하게 대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가정주부는 말한다. 나는 평생 도자기를 새로 장만한 적은 없으나 낡은 도자기를 보면 깨트리게 된다고. 나는 차라리 숲의 나무와 버섯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조용히 혼자서 여유를 갖고 벗을 기억하게 될 때가 있다.(340쪽)

 

 

 

벗이란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누구에게나 우정은 지나고 나면 덧없는 것으로, 지난 여름철에 먼 하늘을 밝히던 번개처럼 희미하게 생각나게 마련이다. 이처럼 우정은 아름답지만 휙 지나고 마는 여름철의 구름과 같다. 하지만 가뭄이 오래 가더라도 대기 중에는 늘 수증기가 남아 있는 법이고, 봄 소나기까지 있지 않은가. 그 흔적은 정년 사라지지 않기에, 그것이 이따금 우리 주위를 감돈다. 해와 달처럼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법칙이 있어 다시 찾아올 것이 분명하기에 식물이 자라나듯 수많은 모습으로 움터온다. 그 본질을 경험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맑고 고요한 날에 반짝이는 양털구름처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각을 속이는 일 없이 마법에 의해서인 듯 조용히 몰려온다. 벗이란 뱃사람들을 교묘히 피해 태평양 넓은 바다에 떠다니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야자수 섬과 같다. 그는 적도 근처에서 부는 강풍, 산호초와 같은 많은 위험과 맞서고 나서야 항구적인 무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세찬 비바람을 뚫고, 더욱이 대서양 성난 물결까지 헤치고 나가 금욕하는 사람이 틀어박힌 바닷가에까지 이르려 하겠는가?(343쪽)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우정만큼 사람들의 입술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도 없다. 사실 사람들은 우정을 가장 간절히 바란다고 믿는다. 누구나 우정을 꿈꾸기에, 날마다 무대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올려진다. 우정은 우주의 비밀이다. 당신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온 나라를 헤매도 우정에 대해 어떤 말도 듣지 못할 터이나, 우정에 대한 생각만은 어디에서나 왁자지껄하다. 낯선 남녀든, 오래 만나온 남녀든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우정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문헌을 통틀어 내가 기억하는 이 주제를 다룬 에세이는 고작 두어 편에 불과하다.

우리가 신화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 셰익스피어, 스콧의 소설을 읽으며 즐거워하는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니, 우리 스스로가 시인이자 우화작가이고,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드라마에서 한 역을 맡아 연기한다. 우리는 언제나 벗들이 우리의 벗이자, 우리가 그 벗들의 벗이기를 꿈꾼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벗이란 우리가 벗하기로 언약한 이들과는 그저 먼 사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있는 그대로 우러나는 말 세 마디 이상을 벗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반갑네, 벗이여!" 라고 말할 채비를 갖추고서 만나나, 헤어지면서 나누는 인사라는 게 고작 "망할 놈"이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겁쟁이들은 참된 벗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 벗이여, 진정 네가 내 벗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내가 네 벗이라는 게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정에 들일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중요하지 않은 의무와 관계가 영원히 우위에 있다면, 아무리 친절한 성격이라도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우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지만 우리가 벗을 잊는 일이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벗으로 하여금 우리의 숭고한 목적에 응답하도록 만드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사실상 벗과 동행하게 된다. 우리는 상상으로 그려온 벗의 사촌을 만나러 가기 위해 정작 벗으로부터 얼마나 자주 등을 돌리게 되는가. 내가 어떤 사람의 벗이 될 만한 값어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347∼348쪽)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자신의 벗이라고 말하더라도 대개는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뜻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정이 주는 우연하면서도 자그마한 이득, 예컨대 벗이 재산이나 영향력이나 조언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그런 이득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벗과의 관계에서 이런 이득을 내다보는 사람은 실제 이득은 보지 못하거나, 이 관계 자체에 전혀 경험이 없음을 드러낸다. 그런 기여는 우정 자체의 지속적이면서 포괄적인 기여에 비하면 하찮고 비천한 것이다. 우정은 서로 화합하고, 신의를 다하고, 실제 친절을 베푸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벗끼리는 어울려 살아갈 뿐만 아니라 선율과 가락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벗이 우리를 먹이고 입히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이 점에서는 이웃들도 충분히 친절하다-우리의 영혼의 일이라 할 그런 일을 맡아 하길 바란다. 일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든, 그것만으로도 넉넉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어리석게도 어떤 사람을 또 다른 사람과 혼동하곤 한다. 아둔한 이는 인종이나 국적, 기껏 잘해야 계급이나 식별하지만 슬기로운 이는 개개인을 식별한다. 한 사람의 독특한 성격은 갖가지 특징과 행동으로 벗에게 나타나므로, 그의 성격이 벗에게 드러나 고쳐지게 된다.

인간의 교육에서 우정이 지닌 중요성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면서 가릴 줄 아는 이가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정이 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어 주고, 영웅으로 만들어 주고, 성자로도 만들어준다. 우정은 공정함으로 공정함을, 관대함으로 관대함을, 참됨으로 참됨을 대하며, 인간됨으로 인간됨을 대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갖가지 미덕 가운데 사랑이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온갖 미덕을 하나로 줄여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349∼350쪽)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만나지만, 고귀한 재능을 쓰지 않고 버려두어 녹이 슬고 있다. 아무도 우리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귀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황금을 주려 하지만, 그들은 구리만 달라 한다. 우리가 이웃 사람에게 참으로 성실하고 고귀하게 대할 수 있게 해 달라 요청하더라도, 그는 귀가 먹었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바람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거짓말쟁이이고 천하고 불성실하고 이기적인 "그런 나 그대로" 대접해주면 만족한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서로를 대접하고 대접받으면 만족한다. 진실하고 고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도, 그런 관계를 맺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른바 좋은 이웃과 친지가 있을 터이고, 이런 태도로만 서로를 대하는 좋은 일벗, 아내, 부모, 형제, 누이, 자식까지 있을 터이다. 이런 형편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에 정당함이 필요치 않고, 불량배의 짓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변변찮은 일들만 하면서도 대단히 잘되어간다고 생각하며, 이웃과 가족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정마저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불량배끼리 중시하는 체면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우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그와 맺은 관계가 참되기에 그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그로부터 최선의 것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둘 사이에는 따뜻한 진실이 있고, 사랑이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 참되다는 확신을 갖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고, 기적이 되며, 높은 뜻을 좇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사귈 때는 애정에서 굴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사귐은 세속의 삶을 넘어서서 천당의 삶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예언서에서는 배우지 못한다. 어느 신에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고프스타운의 그저 그런 하루 한가운데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속된 눈에는 우주에 먼지 한 알이 내려앉을 때, 구세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아름답고, 신선하고, 영원한 신계계를 찾아내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달리 해서는 이 세계가 다다르지 못하고, 존재하지 못하는 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말보다 기억할 만한 소중한 말이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말들이 계속해서 널리 퍼졌음은 놀라운 일이다. 사실 그런 말들은 무척 드물지만, 음악의 곡조처럼 조바꿈되면서 끊임없이 기억에 되새겨진다. 그렇지 않은 말들은 사랑을 꾸며놓은 벽토와 더불어 모조리 부서져 내린다. 우리는 감히 그런 말들을 큰소리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늘 들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350∼351쪽)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우정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그 뛰어난 미덕에 있다."지만, 우리는 벗을 전혀 칭찬할 수 없고, 칭찬받을 만하다고 여길 수도 없으며, 그가 어떤 행위를 통해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넉넉히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서도 안 된다. 다른 경우에는 훌륭하다고 칭찬받는 이런 친절이 우정과는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없기에, 벗에게는 그의 본성에 필요치 않은 선의나 상냥함과 같은 무례를 행해서는 안 된다. (353쪽)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남녀끼리는 어떤 체질상의 차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게 마련이고, 대개의 경우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게 된다. 남성이 자신과 관련된 일들로 여성의 주의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가 얼마나 쉬운가. 남녀가 대등한 문화에서는 우연히 만난 남녀끼리라도 남성 대 남성에 견주어볼 때 더 나은 어떤 값어치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청렴함과 관대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존재하므로, 나는 남자라면 누구나 남성들의 모임보다는 지적인 여성들의 모임에 더 자신 있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들고 가 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남성을 찾아가면 방해가 되는 경우가 흔한 반면에, 남녀끼리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우정은 성을 차별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남녀 사이의 우정은 동성인 두 사람 사이에서보다 드문 편일지 모른다. (354쪽)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공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사귀지 말라."고 말했다. 우정에 이로움이 있고 우정이 지속되는 까닭은, 양 당사자의 실제 성격으로 미루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수준보다 높은 수준에서 우정이 맺어지기 때문이다. 우정의 빛줄기는 만나는 사람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는 그런 곡선을 그리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바탕은 정중함이다. 벗이란 내가 고르고 고른 생각에 걸맞은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그와 더불어 무슨 일을 할 때보다는 내가 없을 때 그에게 더 고귀한 임무를 맡긴다. 그러면서 그가 더 고귀한 만남에 써야 할 시간을 내게 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떤 벗이 값싸게 오래 얼굴을 익혔을 경우에나 허물이 덮어질 그런 버릇없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여전히 다정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 이제까지 벗과 맺은 관계에서 가장 쓰라린 업신여김을 느꼈다. 당신의 벗이 당신의 나약함을 너그러이 대하는 법을 배워 결국 사랑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세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우리는 벗을 꽤나 허물없이 대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욕되게 할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럴 때는 차라리 종교적 고독과 침묵으로 물러남으로써 고결하게 사귈 마음을 갖추는 편이 낫다. 벗과의 사귐에서 침묵은 아주 향기로운 밤으로, 그 안에서 진심이 되돌아오고,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355쪽)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서로를 이해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내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벗이기를 바라서 나를 알고 싶어 하는가? 게다가 어떤 사람이 내게 각별한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말이다. 우정은 계속해서 증명을 필요로 하는 기적이다. 우정은 가장 순수한 상상력과 희귀한 믿음의 발현이다. 우정은 감동을 주는 무언의 행동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상상하는 만큼, 심지어 네가 믿는 그대로 너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나는 네게 진실을, 즉 나의 모든 부를 바칠 것이다" 라고. 그리고 벗은 말없이 자신의 본성과 삶으로 그 행동을 받아들이면서, 마찬가지의 거룩한 정중함으로 나를 대한다. 나의 벗은 나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남김없이 잘 안다. 그는 사랑의 증표를 바라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관계의 특징으로 사랑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다. 그가 찾아올 때 지나치게 그의 체면을 살펴줄 필요는 없다. 내가 오라고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는 말아다오. 하지만 내게로 올 때는 내가 당신을 기꺼이 맞이하는지 살펴다오. 찾아와 달라고 하면 그 때문에 당신이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벗이 있는 곳에는 갖가지 부와 마음을 끄는 물건이 있고,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떤 걸림돌도 있을 수 없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없게 해다오. 우리의 사귐이 우리보다 온전히 높은 곳에 있어 우리를 그리로 끌어올리게 해다오.(356쪽)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뜻이다. 우정은 언어 위에 있는 지성이다. 사람들은 벗과는 혀가 풀릴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머뭇거리지 않고 다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내가 겪은 바에 따르면, 우정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서로를 아는 데 불과한 사이라면 서로 오갈 때마다 미리 준비된 말이 있지만, 호흡이 바로 생각이자 뜻인 벗이 변변찮은 말을 어떻게 입 밖에 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이 여행을 떠나는 벗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그와 악수 나누는 일 말고 다른 어떤 외적인 표현을 알고 있는가? 그를 위해 어떤 수다를 준비해 놓았단 말인가? 어떤 아첨을 그의 주머니에 넣어줄 것인가? 그를 통해 특별히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도 가끔 깜빡 잊을 적이 있다는 듯, 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어떤 말을 그에게 할 터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손을 잡고 '안녕' 하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자주 잊어먹고 하지 못하던 인사로 충분하다. 이 점에서는 관습이 우위에 있다.

그가 가야 한다면, 오랫동안 그가 우물쭈물하며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가 가야 한다면, 빨리 보내줘라. 아직 하지 못한 어떤 마지막 말이라도 남아 있단 말인가. 아, 슬프도다. 그 마지막 말은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온 말 중의 말인데도, 아직 그 첫 낱말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심으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조차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이름이 딸린 개인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부를 수 있고, 나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 자리에서는 연인 사이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렇게 바탕이 싸늘하고 무관심한 관계에 대해 미뤄두는 까닭은 마음이 맞고 사이가 좋은 관계에 길을 터주기 위해서이다(356∼357쪽)

 

 

 

우정은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과 같다.

사랑의 폭력은 증오의 그것만큼이나 무섭다. 사랑이 계속 이어지려면 조용하고 한결같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사랑의 고통조차 사랑이 쇠퇴하면서 시작되는데, 누구나 기꺼이 연인이길 바랄지라도 실제 사랑하는 사이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쉽게 애욕에 빠지는 값싼 사랑 없이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우정을 나누기에 걸맞다는 한 증거이다. 참된 우정은 부드러우면서 슬기롭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자신들의 사랑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 어떤 다른 법칙이나 친절도 알지 못한다. 참된 우정은 미칠 만큼 엄청나지는 않더라도, 그 이후로부터 확립될 어떤 것을 나타내기에, 그것이 낡아지더라도 견딜 터이다. 이것이 더 참된 진실이고, 더 낫고 올바른 소식이다. 어느 때건 이런 일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바로 이것이 여름과 겨울이 갈리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잘 자랄 식물이다.

벗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벗끼리는 수수한 바닥에서 만난다. 즉 자연의 소박한 법칙을 따르면서 양탄자나 방석이 아니라 땅이나 바위에 앉는다. 그들은 소리치지 않고 만나고, 떠들썩한 슬픔 없이 헤어진다. 우정에는 전사戰士들이 소중히 여기는 그런 특성이 들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성문을 여는 것에 못지않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동정이나 상호 위안이 아닌, 열망과 노력의 영웅적인 공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357∼358쪽)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친절하지 않다

우정은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즉 인간의 혈기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람들의 성취, 기독교적 의무와 박애 같은 것들은 가볍게 여기는 반면, 전기처럼 공기를 깨끗하게 만든다. 고결한 천성에 도달하는 깨끗하고 참된 관계를 맺었음에도 호된 비극마저 생길지 모른다. 우정은 본디 자유롭고, 책임이 없으며, 아무 값없이 온갖 미덕을 실천하는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사귐이다. 그것은 높은 경지의 공감이 아니라, 아직도 가끔씩 지켜지는 어떤 순수하고 고결한 사귐이다. 즉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짤막하면서 거룩한 사귐으로, 그 자체를 기억하면서 인류의 비천한 권리와 의무를 업신여기길 머뭇거리지 않는다.

우정은 티 없이 거룩한 특성들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정중함과 먼 앞날에 대한 기대에 의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선하기만 하고 아름답지는 않은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다. 자연은 열매 맺히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먼저 꽃을 피우지, 열매 맺힌 뒤에 그저 꽃받침만 자라게 하지는 않는다. 벗이 어떤 새로운 신약新約의 가르침에 따라 개종해서는 자신의 이교와 미신에서 벗어날 때, 그가 자신의 신화를 잊고 기독교인처럼 친구를 대하거나 대하려 할 때, 우정은 우정이길 그치고 자선이 되고 만다. (359∼360쪽)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떤 이가 더 사랑받을 만한 값어치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그 아닌 다른 이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정은 숫자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벗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벗을 세지는 않는다. 벗은 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관계로 들어올수록-그들이 진정으로 들어온다면 말이다-그들을 한데 묶는 사랑의 질은 더욱더 귀하고 거룩해진다. 나는 둘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셋 사이에서도 개인적이면서 친밀한 관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벗을 그지없이 많이 둘 수는 없다. 인생의 갖가지 관계에 보다 알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정하는 미덕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속된 우정은 남을 물리치면서 좁아지려 하지만 고귀한 우정은 남을 물리치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흘러넘치고 흩어지는 사랑이 사회를 향기롭게 하고, 다른 나라의 아픔을 위로한다. 우정은 개개인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은 공적인 일이자 이득으로, 참된 벗은 한 가족의 가장 이상으로 나라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360∼361쪽)

 

 

 

가장 좋은 사이는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우정에서 단 한 가지 위험은 언젠가는 끝이 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정은 토박이식물인데도 무척 민감하다. 자신의 자아마저도 잘 깨닫지 못하는 그런 조그마한 비열함에도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흠집이 벗에게서 드러나는 그런 흠집을 끌어당긴다는 점을 벗에게 일러줘라. 의심하게 되면 그 의심이 사실로 드러난다는 변치 않는 법칙이 있다. 우리는 좁고 치우친 소견에서 벗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벗이여, 나는 네가 이런저런 정도면 만족할 것이다, 라고. 길이 변치 않는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너그럽고, 고르고, 슬기롭고, 귀하고, 꿋꿋한 기운이 늘 흘러넘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벗들로부터 자신의 좋은 점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은근히 불평하는 말을 듣곤 한다. 실제로 내가 그런지 아닌지는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다. 그들은 좋은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공식적으로 감사 표시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 말과 행동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빈틈없이 값어치가 매겨졌다. 어쩌면 당신의 침묵이 가장 섬세한 인정일지 모른다. 인간이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있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편이 훨씬 좋다. 우리는 참으로 숭고한 전갈을 들으면 그 순간 오로지 침묵으로 귀를 기울인다. 가장 좋은 사이는 그저 침묵을 지키는 사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게 침묵 깊은 곳에 묻혀 있는 사이이다. 서로 얼굴조차 모를 수도 있다. 사람끼리의 사귐에서 비극은 말을 오해했을 때가 아니라,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도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그런 사랑은 저주나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침묵이 벗의 침묵보다 늘 뜻이 깊다고 생각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부류의 벗인가? 얼마나 미련하고, 방정맞고, 당치 않기에 침해한 쪽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듯 그렇게 행동하는가! 자신의 벗이 언제나 같은 까닭에서 불평을 말하지는 않는가? 벗들이 이따금 내게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무엇을 듣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말한 그들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자주 실망시키곤 한다. 나는 벗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가 기대하는 사람, 즉 귀가 달린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들은 당신더러 차갑다고 불평할 것이다. 야자열매를 까뒤집으려는 오 그대들이여, 내가 다음번에 눈물을 흘리게 되면 그대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겠다. 어찌 보면 참된 관계란 말과 행동인데도, 그들은 이런저런 말과 이런저런 행동을 해주길 바란다. 이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느낌을 털어놓기 꺼려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그런 애정의 증거를 달라고 조르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361∼362쪽)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나는 내 천성에 걸맞으면서 내게 동등한 대우를 바라는 벗과 동행하길 바란다. 그러한 벗은 늘 치우침 없이 너그러울 것이다. 이보다 못한 어떤 관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살행위이고, 좋은 관계들을 타락시킨다. 나는 내 성취보다는 내 포부를 사랑하고 높이 쳐주는 사람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믿는다.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내가 어디를 보는가를 보고, 더 멀리까지 본다면 정녕 나는 당신과 동행함으로써 더욱더 나아질 것이다. (364쪽)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당신이 실제로 벗을 잘 알지 못하면,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가 생길 때 질 낮고 변변찮은 기여 말고는 벗을 도울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어떤 사람과 사회적, 영적 이유로, 무척 가깝게 지내는데, 그는 내게 어떤 실무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우정이 필요치 않은 문제에서 그가 내게 도움을 구할 경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기에 그 문제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내 능력을 쓰지 않고 나의 일손만을 쓴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서 판단력이 아주 뛰어나면서 자신의 재능이 모자랄 때는 다른 이의 재능을 쓸 줄 알며, 언제 상대를 보살피지 않고 내버려둬도 좋은지를 잘 아는 사람이 있다. 모든 품꾼이 이야기하듯, 그의 일을 해주게 되면 좀체 없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와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면 대단히 큰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무척 다정하고 높은 사귐을 갖고 난 후에, 좋은 뜻에서이기는 하나 벗이 당신을 망치처럼 사용하여 당신 머리로 못을 박아 넣는 것과 같다. 당신은 그의 좋은 벗일 뿐 아니라, 꽤나 유능한 목수여서 그를 도와 즐겁게 망치질을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이해가 모자란 것은 애정의 온갖 미덕으로도 깁기 어려운 흠이다. (366쪽)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를 벗함은 자신의 미덕을 벗함과 같다. 우정에는 이 밖에 다른 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벗이 자신의 악덕과도 사귀길 바란다. 내 벗 중에는 내가 그릇된 줄 뻔히 아는데도 옳다고 해주길 바라는 벗이 한 사람 있다. 하지만 우정이 내게서 눈을 앗아가고 낮을 어두워지게 한다면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겠다. 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지고 자유로워지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참된 우정은 참된 슬기를 가져다준다. 우정은 어두움과 어리석음에 기대지 않는다. 분별력의 결여가 우정의 요소가 될 수는 없다. 벗의 미덕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벗의 흠집 또한 그만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도 벗을 미워할 건전한 권리가 있다. 흠집은 그것과 통하는 미덕으로 기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흠집은 흠집이고, 실제보다 여러모로 두드러지게 보일지라도 흠집이기에 구실을 붙일 나위가 없다. 나는 비판을 참아내고 아첨에 우쭐하지 않으며, 재판관을 꾀어 제 편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보다 진리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367쪽)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두 여행자가 사이좋게 길을 가려면 둘 다 비슷한 정도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동행하는 길이 그리 즐겁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장님과도 유익하고 즐겁게 길을 갈 수 있다. 그가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고, 당신이 경치를 이야기할 때 자신은 장님이지만 당신은 볼 수 있음을 잊지 않고, 당신 또한 그가 시력을 잃었지만 청각은 더 뛰어날지 모른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 오랫동안 동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장님과 시력이 좋은 사람이 함께 걷다가 벼랑 끝에 이르렀다. 시력이 좋은 사람이 "조심하게나, 여기는 가파른 절벽이니 이리로는 갈 수가 없네"라고 말하자, 그 장님은 "내가 더 잘 아네"라고 말하면서 발을 내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더없이 참다운 친구 사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말할 수는 없다. 불평하느니 차라리 영원히 작별을 고하는 편이 낫다. 불평은 너무나도 근거가 확실하여 입 밖에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한쪽이 상대의 흠집을 심각하게 지적하면 그 지적이 신랄할수록 서로의 오해는 더욱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설사 온전히 우정을 맺는 데 방해가 될지라도 늘 존재하는 기질상의 차이는 영원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다. 자신의 행위 전체로 타이르고 격려해야 한다. 사랑 말고는 어떤 것도 둘을 화해시길 수 없다. 설명해야 하고 적처럼 흥정하게 되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 누가 벗에게 용서를 빌겠는가? 벗끼리의 사죄는 태양이 떠오르면 다시 사라지고 마는 이슬이나 서리와 같다. 사람은 누구나 진심으로 인정을 베풀어야 함을 알고 있다. 설명의 필요성에 대해 한 마디만 더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죄가 씻기겠는가 말이다.

참된 사랑이라면 하찮은 일로 다투지 않고, 서로 익히 아는 잘못은 쉽게 풀려 나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겉으로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결코 얕볼 수 없는 심각하고 오래가는 까닭들이 있다. 그런 까닭이 있다면 무지개가 아무리 아름답고 비가 갠다는 틀림없는 조짐이라 해도 맑은 날씨를 영원히 약속하지 못하고 잠깐에 그치고 말듯, 눈물에 쉼 없이 금박을 입히는 애정의 빛에도 다툼은 여전히 되풀이된다. 내가 잘 아는 두어 쌍이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데, 한순간의 하찮은 문제 말고는 충고가 이로운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쪽은 상대가 모르는 것을 잘 알지 모르나, 아무리 친절하게 일러주더라도 그 충고가 보람을 거두지는 못한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물리쳐야 한다. 나는 벗들을 길들이느니 차라리 하이에나를 길들이겠다. 그는 어떤 광산 장비로도 다룰 수 없는 광물질과 같다. 벌거벗은 야만인은 관솔로 떡갈나무를 넘어뜨리고, 손도끼를 바위에 문질러 바위를 닳게 한다. 그러나 나는 벗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서든, 바뀌기를 바라서든 벗의 인격에서 조그마한 한 조각이라도 떼어낼 수 없다.

연인 사이라도 온전히 맑고 믿을 만한 사람은 결국 없음을 알게 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악령이 있어 길게 보면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동양학자가 말하듯, "선인善人끼리도 우정이 끊길 수 있으나, 그들의 원칙은 변치 않고 남아 있다. 연꽃줄기도 꺽이나, 그 안에 섬유질은 이어져 있듯."(367∼369쪽)

 

 

 

벗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사랑이 있는 어리석음과 서투름이 사랑이 없는 슬기와 재간보다 낫다. 어떤 경우에는 점잖고 치우치지 않으면서 위트와 재능이 있고, 재기가 번득이는 대화도 있으며, 선한 뜻까지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도 가장 거룩한 인간적 능력은 안타깝게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랑이 없는 삶은 타지 않는 해탄骸炭이나 재와 같다. 페르시아 대리석이나 설화석고에 못지않게 순수하고, 토스카나식 빌라처럼 우아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뒤지지 않는 웅장한 성격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람을 청해놓고서 우유 섞인 포도주를 내놓지 않는다면, 기쁘게 맞아주는 고트족이나 반달족을 찾아가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벗은 나와는 다른 종족이나 가문이 아니라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이다. 그는 나의 실제 형제이다. 나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벗의 본성도 저쪽에서 나를 더듬어 찾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는 내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다. 『비슈누 푸라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결한 우정을 맺기까지 통틀어 일곱 발짝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나는 그대와 더불어 살아왔다.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은 빵을 나누고, 같은 샘의 물을 마시고, 사시사철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같은 열기와 추위를 느끼고, 같은 과일을 즐겨 먹으며 기운을 되찾아왔다. 서로 바탕이 다른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369∼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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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른 냇물을 타고 형과 둘이서 조용히 삶을 누리면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 조곤조곤 떠올렸겠지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살가운 형제나 부모,
또는 사랑스러운 님과
숲속 냇물을 천천히 흐르며
숲노래 듣는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oren 2013-12-09 10:50   좋아요 0 | URL
저도 어릴 땐 우리 동네를 빙 둘러 흐르던 '강줄기'를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꼬박 '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가득합니다.

<소로우의 강>을 읽으면서 어릴 적 그 시절들이 손에 잡힐듯이 떠올라,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이들이 어딘가엔 분명 살고 있으리라 저도 믿습니다.

페크pek0501 2013-12-0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정도 지키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무조건 사귄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우정이 지켜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위의 글은 하나하나 곱씹어 읽어야 할 듯해요. ^^

oren 2013-12-09 10:57   좋아요 0 | URL
'우정'에 대해 쓴 글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소로우 님의 '우정'에 대한 글은 정말 깊디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글이어서 정말 감동적이더라구요. 말을 너무 잘 하기로 소문난 키케로의 '우정에 대하여' 쓴 '윤기나는' 글이나, 몽테뉴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우정에 대한 멋진 글'보다 소로우의 글이 제게는 훨씬 더 가슴깊이 다가오더라구요. 앞으로도 가끔씩 '우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 때, 이 글을 다시금 읽어볼 요량으로 '기나긴 내용'이지만 아낌없이 옮겨 적어 봤어요. ㅎㅎ
 
소로우의 강 - 강에서 보낸 철학과 사색의 시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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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가장 슬기로운 보수주의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마누43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어져온 관습은 법률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즉 그때의 관습은 인간이 정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들의 관습인 것이다. 우리 뉴잉글랜드의 관습은 정한 날을 기릴 수 있다는 흠이 있다. 도덕이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어어져온 관습 말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양심이 보수주의자들의 우두머리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말한다.44 "너는 네게 맡겨진 일을 행하여라. 행함은 행함이 없는 것보다 낫다. 행함이 없이는 네 몸조차 부지하지 못할 것이다."45-"타고난 본바탕에서 맡겨진 의무는 설사 잘못함이 있더라도 버리지 말지니, 모든 일은 다 흠집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길이 연기에 싸여 있듯,"46-"전체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해서 전체를 모르는 둔한 사람을 흔들어놓아서는 안 된다."47-"오, 아르주나야, 일어나라, 싸우기를 결심하여라"48가 참으로 아끼는 친족들을 죽이기 두려워하여 싸움에 나서기 망설이는 전사에게 주는 하느님의 충고이다. 그것은 마음에 나타난 그대로의 우주를 아시아적 염원으로 간직하려는, 온 누리만큼 넓고 시간만큼 지칠 줄 모르는 장엄한 보수주의이다.

이 인도철학자들은 변치 않는 필연의 법칙들, 그리고 성향과 소질을 뜻하는 세 가지 구나49 곧 삼성三性과, 태어남과 그로 인해 얽힌 인연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그들은 무한한 인식, 곧 브라흐마와의 영원한 합일을 간절히 원한다. 그런 만큼 그 사색은 높고도 넓지만, 인도 고원 너머로까지 모험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으신 이Unnamed'의 특성이기도 한 쾌활함, 자유로움, 부드러움, 다양함, 앞날의 가능성과 같은 일들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신의 풍성한 보답은 끝없이 단조로우면서 고된 일로 얻어내야 한다. 말하자면, 앞날에 대한 기약 없는 약속이라는 짐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의 보수주의는 효과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한 프랑스인 번역가는 중국과 인도 왕조들의 예스러움과 끝없이 이어짐, 그리고 입법자들의 슬기를 높이 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확실히 그곳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영원한 법칙의 어떤 흔적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도주의와 실천을 소중히 여기고, 넓게 볼 때 급진적이다. 저 동양의 현인들은 오래도록 신들의 시대를 살고 침묵 속에서 신비의 '옴Om'50을 토해내며, 자기 안에서 나오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리 물러나고, 더 깊이 가라앉으면서 최고 실재Supreme Being의 본바탕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따라서 참으로 슬기로운데도 꽉 막혀 있어, 마침내 같은 아시아이기는 하나 먼 서쪽에서 브라흐마51에 빠지지 않고 브라흐마를 이 땅으로, 곧 인류에게로 끌어내린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으로부터 브라흐마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현대가 시작되었으니, 말하자면 하느님이 새롭게 몸을 입은 것이었다. 브라만52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인류의 형제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개혁가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왕이다.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수많은 구절들은 자연스럽게 프로테스탄트의 입술로 옮아가고, 그것들이 가장 풍부하고 실천적인 교재들을 내놓는다. 그 안에는 순수한 공상이나 슬기로운 성찰은 없으되, 상식의 기틀이 곳곳에 놓여 있다. 그 가르침은 되비추지 않고, 단지 뉘우칠 따름이다. 그 안에는 시도 없고, 아름다움의 빛으로 바라본 것도 없으며, 도덕적 진실만이 그 목적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 도덕관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신약성서에서 두드러진 점이 순수한 도덕성이라면, 최고의 힌두경전에서 두드러진 점은 순수한 지성이다. 독자들이 참으로 높고, 순수하고, 드문 생각의 자리에까지 올라 계속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은 오직 『바가바드기타』뿐이다. 워렌 헤이스팅스53는 동인도회사 이사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의 번역을 권하면서, 원전이 지닌 "개념과 추론과 표현의 숭고함은 어떤 문헌과도 견주기 어려운" 것임을 밝히고 나서, 인도 철학자들의 이 저술은 "영국 통치가 끝나고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도-한때 인도에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던 원천들이 말끔히 잊혀지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가바드기타』는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경전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책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보다는 얼마나 거룩한 주제를 다루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동양철학은 현대 서구철학이 다루는 주제들보다 훨씬 높고 중요한 주제들에 손쉽게 다가가므로, 이따금 동양철학이 이런 주제들을 대수롭지 않게 줄줄 이야기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은 없다. 동양철학만이 행동과 사색 양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니, 동양철학만이 사색을 올바로 본다. 서구철학자들은 사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헤이스팅스는 브라만이 받는 영적 훈련과 그들이 다다르는 놀라운 추상능력의 몇 가지 예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느껴지는 감각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놓는 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써야 그런 능력에 다다르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서반구에서는 지극히 신중하다는 이들조차 지금 느껴지는 대상이나 지난날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오락가락해서 그렇게 주의를 한 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파리 한 마리가 윙윙거리는 소리에도 그의 주의는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젊은 시절부터 늙을 때까지 자신보다 앞선 이들이 모아놓은 지식의 곳간에 일정한 지식을 덧붙이면서 날마다 마음 모으는 명상을 했음을 알게 된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해도 전혀 엉뚱한 짐작만은 아닐 것입니다. 몸을 단련시키는 일이 그러하듯, 그들이 꾸준히 마음을 단련시킴에 따라 저마다 바라는 힘을 얻어냈을지 모르고, 그런 집단 연구를 통해 다른 나라의 학자들에게 익숙한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 흐르고 뒤섞이는 길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진리는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에 거의 휘둘리지 않는 원천에서 비롯된다는 이점을 지녔으므로, 깊이 생각해야 하는 미묘한 내용일지라도 사실상 우리 자신의 가장 단순한 진리에 못지않게 진리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슈나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행위 속에서의 포기"를 가르쳤고, 그것이 대대로 전해지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요가가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구나, 오 아르주나여."
54 "모든 행위는 빠짐없이 슬기에 이르러서야 그 마루터기에 이른다"55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악인 중에서 가장 악독한 악인일지라도 슬기의 배에 의지하면 온갖 죄악을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다."56

"이 세상에 슬기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은 없다."57

"슬기를 쓰는 일에 비기면 행동은 아득히 먼 밑자리에 있다."58

"성자59의 슬기는 거북이가 팔다리를 끌어들이듯, 제 감각기관을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슬기가 튼튼히 섰느니라."60

"어린아이들은 학식과 요가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진 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하나에만 올바로 서더라도 양쪽 열매를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61

"사람이 무위에 이르는 것은 행동하지 않기에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단순히 행동을 내버림으로써 온전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도 한 순간이나마 행동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누구나 타고난 성품에서 일어나는 충동으로 말미암아 아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행동의 감각기관을 억누르면서도 그 마음이 감각 대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무언가에 혼이 홀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위선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모든 집착을 떠나 결과야 어떻든 마음에 두지 말고 맡겨진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가 높이 떠받들어질 것이다."62

"네가 할 일은 행함에만 있지, 조금도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하는 까닭을 결과에다 두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행하지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63

"언제나 집착을 떠나 해야 할 일을 하는 이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다."64

"행위 속에서 무위를, 무위 속에서 행위를 보는 자가 인류 가운데 슬기롭다. 그는 모든 의무의 온전한 실행자이다."65

"모든 몫이 욕망과 탐욕을 떠났으며, 모든 행위가 슬기의 불로 태워져 버린 사람을 어진 이라 부른다. 행함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만족할 줄 알며,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는다면 아무리 행함 속에 있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66

"행함이 결과에 매이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탁발승이요, 요기이다. 그는 제사 불을 피우지도 않고 행함도 없는 사람과는 다르다."67

"희생을 바친 뒤에 남은 음식이 감로이니, 그 음식을 받아먹는 자는 영원한 브라흐마에 들어가느니라."68


결국 삶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몸소 하는 일들이란 아주 하찮은 것들이다. 나는 이 메뚜기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든 일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찬란히 빛나는 것들은 내가 무엇을 했거나 하고자 작정한 일이 아니라, 내가 간직한 어느 한순간의 생각, 비전, 꿈이다. 나는 하나의 참된 비전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온갖 부, 온갖 영웅들의 온갖 행위까지도 기꺼이 치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서 연필제조업자이고, 제정신인 내가 어떡하면 신들과 교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오든 나는 그를 받아준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내 길을 따르는 것이다."69라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신약성서에 비춰보면, 이런 가르침은 실제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현실에 걸맞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 적지 않다. 브라만은 용감하게 악을 무찌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 단지 악을 끈기 있게 굶겨 죽이라고 말할 뿐이다. 카스트 관념,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시대라는 거칠고 사나운 정치가 움직임에 써야 할 그들의 힘을 굳어지게 했다. 크리슈나의 주장은 흠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르주나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럴 만한 이유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그의 판단은 "상키야샤스트라70가 깊이 생각해서 다다르는 신앙의 진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직 슬기에서만 피난처를 구하"라지만, 서구 정신에서 슬기란 무엇인가? 크리슈나가 말하는 의무는 그에 타당한 이유가 빠져 있다. 그 의무는 언제 정해지는가? 브라만의 미덕은 옳은 일을 하는 데서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하는 데서 생긴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행함"이란 무엇인가? "맡겨진 의무"란 무엇인가? 다른 이의 종교보다 훨씬 좋은 "그 사람 자신의 종교"란 무엇인가? "그 사람 자신만의 특별한 소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카스트 제도의 옹호, "싸움터에서 달아나지 않고", "전투에 참여하는" 크샤트리아, 곧 전사의 의무와 같은 "자연스러운 의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옹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행함의 결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지라도, 자신의 행함에 대해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보라. 동양은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서양은 행함으로만 가득 차 있다. 동양은 눈이 멀 때까지 해를 쳐다보고, 서양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부지런히 쫓아간다. 서양에도 카스트 제도와 같은 것들이 있으나, 동양보다는 훨씬 힘이 약하다. 그것이 이곳 서양에서의 보수주의이다. 너의 의무를 저버리지 말고, 어떤 제도도 어기지 말고, 어떤 폭력도 행하지 말고, 어떤 차용증도 찢어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곧 국가가 너의 부모이다. 그 미덕과 인격은 전적으로 자식으로서의 미덕과 인격이다. 모든 나라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갈등, 말하자면 해를 끊임없이 바라보려는 자와 해 지는 쪽으로 서둘러 가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전자의 부류는 후자더러, 너희가 해 지는 곳까지 이르더라도 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후자는, 설사 그렇더라도 우리는 하루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놓지 않았느냐고 대꾸한다. 전자에 따르면, "깨달은 성자牟尼는 모든 산 것들이 밤 시간에 쉬러 가는 때인 밤에만 걷고, 모든 산 것들이 깨어 있는 낮 시간에만 잠을 잔다."71

나는 다음과 같은 산자야72의 말을 빌려 여기에 끌어 쓴 글월 전체의 요약으로 삼겠다.


오 대왕이시여, 크리슈나와 아르주나 사이의 이 놀라운 대화를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저는 더욱더 커다란 기쁨을 느낍니다. 대왕이시여, 저 놀라운 하리 신
73의 모습을 생각할수록 기쁨과 놀람이 점점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요가의 주이신 크리슈나가 계신 곳, 훌륭한 궁술가이신 아르주나가 계신 곳, 그곳에서는 언제나 행운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고, 굳건한 다스림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74



경전을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이 좋은 책을 원한다면, 나는『마하바라타』75에 들어 있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4천 년도 더 지난 시기에-4천 년 전이든 3천 년 전이든 그 시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비야사76가 썼다고도 하고, 아무아무개가 썼다고도 하는, 찰스 월킨스77가 옮긴 『바가바드기타』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한 경건한 민족의 거룩한 전승의 한 부분으로서, 양키들이라도 존경심을 갖고 읽어볼 값어치가 있으며, 지성을 갖춘 히브리인이라면 그 안에서 히브리 경전에 못지않은 장엄하고 웅대한 도덕을 발견하고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중략)

참으로 뛰어난 영국의 학자 겸 비평가에 속하는 이조차 세계의 명사들을 추려내면서 유럽 문화가 옹졸하게 치우친 독서를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유럽 문화의 아들딸 중에서 페르시아와 인도의 시인과 철학자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전문적인 시인과 사상가들보다는 상인으로서 아마추어 학자인 이들이 그 시인과 철학자들을 더 잘 알아보았다. 영국 시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이 주제를 다룬 기억할 만한 단 한 편의 시도 찾기 어렵다. 독일이 문헌을 뒤지는 노력을 통해 철학과 시의 큰 줄거리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괴테가 어느 정도 인도철학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으나, 괴테도 인도철학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만한 재능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의 재능도 사물을 가리고 따지는 분야에 더 얼맞은 실제적인 재능이고, 명상의 영역에서는 저 현인들의 재능에 미치지 못한다.

페르시아의 힘이 줄어들고 나서야 유럽 문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도 현대 유럽의 명사 목록에서 동양인의 이름은 고작해야 호머와 히브리인 몇 사람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인류의 가장 훌륭한 명사이자 현대 사상의 아버지로 받아들여질 만하고, 아직까지도 그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게 살아 있는 저 인도의 현인들은-그들의 명상이 인류의 지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들이 화가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의 꿈에서는 철학이 희미하게나마 독특한 진실을 지니고서 동양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는데도, 서구 세계에서는 그것의 자리매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동양철학자들과 견주어 이제껏 현대 유럽은 어떤 철학자도 낳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의 셰익스피어조차 『바가바드기타』처럼 드넓게 우주를 껴안는 철학에 대보면 청년의 미숙함이자 실천만 앞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적지 않다. 자라투스트라의 갈데아 신탁78처럼 수많은 변혁기를 치르고 번역까지 거치면서 살아남은 이 장엄한 글월 중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그 시적 형식과 의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참으로 보람 있고 꾸준한 생각을 나타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학자들은 여전히 '빛은 동방으로부터Ex oriente lux'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서구 세계는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할 모든 빛을 아직까지 끌어오지 못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히브리와 같은 나라의 경전들과 거룩한 글월들을 모아 '인류의 경전'으로 펴내는 일이 이 시대에 당장 서둘러 해야 할 일인지 모른다. 신약성서는 너무 자주 사람들의 입술과 심장을 오르내리고 있어, 어떤 면에서 보면 경전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나란히 놓고 견주어보면,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멍에에서 풀려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인쇄기의 노력에 한껏 영광의 관을 씌워줄, 시간이 편집해야 할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이야말로 선교사들이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바이블, 다시 말해 책 중의 책이다.

(중략)

앞은 물론 뒤에까지 눈을 달고서 그 자체를 굽어보는 즐거운 지혜인 『비슈누사르마의 히토파데샤』80와 같은 아주 오래된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닮은 생각들을 만나면 늘 기분이 야릇해지면서 자극을 받게 된다. 이런 책들을 통해 후세가 겪는 일들도 건강하고, 홀로 설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건전함의 증거는 어느 한 책에만 따로 떼어놓을 수 없으니, 그것이 이따금 즐겁게 그 자체를 돌이켜보기 때문이다. 『히토파데샤』의 줄거리와 그 안에 든 우화들은 사막의 수많은 오아시스처럼 글월에서 글월로 뻗어나가지만, 무르죽81과 다르푸르82 사이를 지나는 낙타의 자취처럼 희미해진다. 그것은 무수히 밀려오는 현대 서적들에 대한 논평이기도 하다. 읽는 이가 징검돌에서 징검돌로 건너뛰듯 글월에서 글월로 건너뛰는 동안, 줄거리는 급히 흘러가서 잊혀지곤 한다.

이에 비해 『바가바드기타』는 시적이거나 간결한 면은 떨어질지 모르나, 줄거리가 훌륭하게 지탱되면서 발전한다. 그것은 병사나 상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킬 만큼 건전하고 숭고하다. 위대한 시는 읽는 이가 성격이 조급하든 신중하든, 그 나름에 알맞은 비율로 그 뜻을 밝혀준다. 콸콸 흐르는 시내에서 여행자들은 목을 축이고 군인들은 수통에 물을 채우듯, 위대한 시는 실천적인 이에게는 상식일 터이고, 슬기로운 이에게는 지혜일 터이다.(195쪽)


주석
43. 힌두 신화에서 마누(Manu)는 절대존재이고, 대홍수 후 다시 인류를 번성시킨 인간의 시조이자 최초의 법 편찬자이다.
44. '거룩한 자의 노래'를 뜻하는 『바가바드기타』는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의 일부를 이룬다. 두 형제 집안이 왕국을 놓고 싸움을 벌이기 직전, 그 한 집안의 셋째인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비슈누의 화신)가 깨우침을 베푸는 말씀이 주가 되어 있다.
45.『바가바드기타』3장 카르마요가 8절 참조.
46. 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48절 참조.
47. 3장 29절 참조.
48. 2장 삼캬요가 37절 참조. 삼캬는 학식이나 이론을 뜻한다.
49. 원문에는 goon: 오늘날은 구나(gunas)라고 표기한다(goon→gunas).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을 구성하는 성질을 말한다. 순수한 성질(善性), 사나운 성질(動性), 게으른 성질(暗性)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50. 영어로 aum이라고도 표기한다.ㅏ,ㅜ,ㅁ 세 음(音)이 합쳐져 우주의 틀을 이루는 체계를 총칭하고, 우주의 질대진리인 브라흐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51. 힌두교의 절대자는 브라흐마(거룩한 창조의 능력), 비슈누(유지의 신), 시바(파괴의 신)의 세 가지 인격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52. 인도의 승려 계급
53. Warren Hastings(1732∼1818): 1750년에 인도로 가서 1764∼1769년 사이의 귀국기간을 제외하고 20여 년을 인도 통치에 종사하고, 1773년 초대 벵골 총독이 되었다.
54. 4장 즈나나 카르마 산야사 요가 2절 참조. 즈나나는 지식, 카르마는 행위, 산야사는 욕망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크리슈나는 『바가바드기타』전체에 걸쳐 아르주나에게 요가(요컨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55. 4장 33절 참조.
56. 4장 36절
57. 4장 38절.
58. 4장 37절.
59. Moonee → muni: 성자(牟尼)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즐거움 속에서도 집착이 없으며, 애욕도 두려움도 화도 다 벗어버린 현인을 일컫는다.
60. 2장 58절 참조.
61. 5장 내버림의 요가 4절 참조.
62. 3장 4∼7절 참조. 여기에서 무위는 얽매임 없는 행위를 일컫는다. 모든 함의 보이지 않는 근본이지만, 아무런 집착 없이 하기에 함이 없다 한다.
63. 2장 47절 참조.
64. 3장 19절 참조.
65. 4장 18절 참조.
66. 4장 19∼20절 참조. 여기에서 어진 이(Pandeel→pandita)는 자아실현에 이른 이를 뜻한다.
67. 6장 진정한 요가 1절 참조. 요기는 요가수행자를 일컫는다.
68. 4장 31절 참조.
69. 9장 최고의 지식과 신비 29절 참조.
70. Sankhya Sastra: 상키야 학파는 자아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지식을 강조한다. 이에 비하면 『바가바드기타』에서는 믿음이 중시되어 있다.
71.『바가바드기타』2장 69절 참조.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면서 욕망에서 벗어나 참모습이 된다. 그러므로 잠잘 때 깨어 있다.
72. Sanjay: 왕의 마부로,『바가바드기타』는 그가 장님인 왕에게 전장의 모습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73. Haree: Hare Krishna로, 크리슈나 자신의 별칭이기도 하다.
74. 18장 76∼78절 참조.
75. Mahabharat: 옛 인도의 서사시, 세계에서 가장 길다.
76. Kreeshna Dwypayen Veias: Veias는 '편집자'라는 의미로, 그가 네 『베다』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77. Charles Wilkins(1749∼1836): 식자공이면서 작가로, 1785년에 처음으로 『바가바드기타』를 영역했다.
78. Chaldaean oracles: 갈데아, 즉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다고 여겨지는 단편적인 텍스트들.
79. Madeira: 포르투칼령의 한 대서양 군도.
80. Hitopadesa of Veeshnoo Sarma: 벵골에 전해진 설화집 『판차탄트라』의 이본(異本)으로서, 9세기에 지었다고 한다. 원본의 이야기 5편을 4편으로 개작하고 새로이 17가지의 설화를 추가했다. 이 책도 찰스 월킨스가 처음으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했다.
81. Mourzouk: 리비아 서남부의 오아시스 마을.
82. Darfour: 수단 서부에 있는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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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12-0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 님 덕에 철학적 사유가 깃든 책 더러 샀는데 이번에도 굿이네요.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행함이 행하지 않은 것보단 낫다는 말씀에 용기를 얻습니다.
오렌님 서재는 알라디너들 영혼의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옵니다.

oren 2013-12-07 02:13   좋아요 0 | URL
<소로우의 강>은 <월든>에 못지 않게 깊이가 있고 좋은 책인 듯해요. 팜므님께도 강추합니다.

<바가바드 기타>와 <마하바라따>는 너무나 오래된 경전인데도 그동안 이 책 저 책에서 이름만 몇 번 들어봤을 뿐, 저도 여태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알라딘 상품소개'만 기웃거리고 있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사더라도 과연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걱정되어 아직까지 선뜻 장바구니에 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