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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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2 권


1. 우리 행동의 줏대 없음에 대하여



한 공장 351

인간의 행동을 검토하는 자들은, 그 행동을 하나의 동일한 전체 모습으로 맞추어 보려고 할 때 가장 당혹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동들은 이상하게도 대개 서로 모순되어, 도무지 그것이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짜 간판 357


우리의 행동은 여러 조각을 모아서 꾸민 것에 불과하며 '탐락을 경멸하지만 고통을 받으면 비굴해지고, 영광은 모멸하나 세평이 언짢으면 용기가 꺾여지고'(키케로), 가짜 간판을 세워 놓고 영광을 얻으려 한다. 도덕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만 추종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끔 다른 목적으로 그 가면을 빌려 오면, 도덕은 바로 이것을 벗어 내던진다.


우연의 힘 357


어느 옛 사람(세네카를 말함)은 우리는 우연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에게 미치는 우연의 힘이 크다는 것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 358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2. 술주정에 대하여



마지막 쾌락 364


노령에 이르면 몸이 불편해져서 어디건 의탁하고 싶어지며 마실 것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 내가 이런 재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마지막 쾌락인 까닭이다. 좋은 친구들의 말로 인간 천성의 열기가 처음으로 발에 오른다고 하나, 그것은 어릴 때의 일이다. 그 열기는 몸의 중허리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거기에 박혀서 내가 보기에는 육체 생활의 유일하고 진실한 쾌락을 지어 준다. 다른 쾌락은 거기에 비하면 잠자는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에는 그것이 올라가서 날아가는 김과 같이 열기는 목구멍에 도달하며, 거기서 마지막 자리를 잡는다.

플라톤은 18세 전에 술 마시는 것을 금하고 40세 전에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은 자들에게는 취하기를 즐기며, 식사 때 인간에게 쾌활을 주고 노년에게 청춘을 돌려 주며, 마치 쇠가 불에 물러지는 것처럼 심령의 정열을 무르고 부드럽게 해 주는 착한 신 디오니소소의 영향을 많이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의 《법률편》에서는 술 마시는 모임을(그 집단에 우두머리가 있어 전부를 통제하고 조절한다면) 유익하다고 본다. 술에 취함은 각자의 본성을 다루기에 좋고 확실한 시련이며, 그와 아울러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제정신을 가지고는 해 볼 생각도 못하는 춤과 음악을 즐기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술이 마음에 절도를 주고 신체에 건강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부분적으로 카르타고 인들에게서 빌려온 다음의 제한 규칙을 마음에 들어했다. 즉, 전쟁에 나갈 때는 삼갈 것, 모든 재판관들이 직무를 처리하는 때나 국무를 토의할 때는 술을 들지 말 것, 일을 보아야 할 낮 동안에는 거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또 어린애를 만들기로 작정한 밤에도 들지 말 것을 권한다.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 368


우리의 마음은 그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높게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떠나서 올라가며, 이로 재갈을 악물고 자기 육신을 빼앗아 너무 멀리 실어가며,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이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쟁에서 용감한 병사들이 공훈을 세울 때에 싸움에 열이 올라 무의식중에 가장 위험한 경지를 돌파하고 나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자신도 놀라서 그의 용기에 소름이 끼치는 격이다. 그리고 또 시인들이 자기가 지은 작품에 스스로 감탄하며, 어떤 방법으로 그만큼 아름다운 줄기를 좇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식이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속의 열기이며 광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플라톤은 침착한 인간은 시가의 문을 두드려 보아도 헛일이라고 말한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탁월한 심령에는 광기가 섞이지 않는 예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고유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초월하는 모든 비약은 그것이 아무리 칭찬할 만하여도,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이다.


5. 양심에 대하여


양심 387

우리는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매질하며

그 자체가 우리의 형리가 된다.               (주베날리스)

이것은 아이들의 입에 잘 오르는 이야기이다. 파이오니아 인 베소스는 장난으로 참새 집을 부수고 새를 죽였다는 책망을 받고, 이 작은 새들이 자기가 부친을 죽였다고 줄곧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하였다. 부친을 죽인 범죄는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아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양심의 복수 신들은 누가 죄를 받아야 할 것인가를 드러나게 시켰던 것이다.


6. 실천에 대하여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391

사색과 교양은 기꺼이 신임하는 것이지만, 그것 외에도 경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훈련시키지 않으면, 이 사색과 교양이 우리를 행동하게 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령이 실제 행동에 들어선 때에,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싸움에 서투른 상태에서 경험 없이 세파에 뜻하지 않게 습격당할까 봐, 혹독한 운명에서 은신하여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의 앞에 나가서, 진짜로 어려운 시련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떤 자들은 자진하여 춥고 배고픔에 단련받기 위해서 부귀를 버렸고, 어떤 자들은 불행과 노고에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힘든 노동과 혹독한 고생을 찾아 행동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너무 유쾌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이 해이해질까봐 두려워하며, 시각이나 생식기관 같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끊어 버렸다.


내 사색의 목표 399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사색의 목표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살펴보고 연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에 적용해 보기, 또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자신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쓸모가 많지 않은 다른 학문에서와 같이, 내가 내 배움의 깊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배운 바를 남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실수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만큼 어려운 묘사도 없으며, 그만큼 유용한 일도 없다. 이것을 밖에 내놓으려면, 그만큼 더 맵시 있게 잘 그려서 더 질서 있게 정리해야만 한다. (399쪽)

 


실제 있는 것보다 401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못하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겸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기 가치보다 못한 짓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고 겁쟁이의 짓이다. 어떠한 도덕도 거기에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진리는 결코 잘못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실제보다 더하게 자기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교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실제 있는 것보다 지나치게 잘났다고 생각하곤 분별 없이 자기 자랑에 빠지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이 악덕의 실체이다. 그것을 고치는 최상의 치료법은 자기의 말하는 버릇을 금지케 하여, 그 결과로 더욱 자기 생각하기를 중지하는 자들이 명렬하는 바를 거꾸로 행하는 데 있다. 자존심은 사상 속에 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402


자기가 가진 수많은 불완전하고 허약한 소질들과, 마지막에는 인간 조건의 허무함까지 동시에 고려해 넣는 자는, 어떠한 특수한 소질을 가지고도 자만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홀로,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신의 교훈을 성실하게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로 자기를 경멸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혼자만이 '현자'라는 별명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렇게까지 자기를 이해하는 자는 용감하게 자신을 자기 입으로 말하며 알려 줄 일이다.


7. 명예의 포상에 대하여



명예는 희귀함이라는 특권 403


도덕적인 인물이 자기에게만 고유하게 독특한 것, 아주 고상하고 관대하고 후덕한 것 외에는 이런 따위 평범한 재물을 즐겨 욕심내고 받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명예는 그 주요 본질이 희귀함이라는 특권이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이 자격을 주기를 재물보다 훨씬 더 아끼고 인색했던 것은 지당한 일이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8.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에 대하여



늙어 꼬부라져서 반은 죽어 가는 아버지 409


늙어 꼬부라져서 반은 죽어 가는 아버지가 집 안 한구석에서 재산을 혼자 누리며, 여러 아이들의 발전과 교제에 지장을 주고,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이 젊은 나이에 공공 사무에 참여하며 세상 사람들에 관한 지식을 얻을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때 아이들은 아무 희망이 없으니,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많은 훌륭한 가문의 청년들이 도둑질하는 버릇에 빠져서, 어떠한 징벌을 받아도 고치지 못하는 것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그 형이 대단히 점잖고 가문도 좋은 호탕한 귀인인데, 그분이 내게 와서 간청하기에, 언젠가 나는 그 청년에게 말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백하며 대답하기를, 자기 부친이 너무 엄격하고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이런 더러운 짓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이제는 버릇이 골수에 박혀서 그짓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했습니다.


인색은 노년뿐 아니라 모든 허약에서 나옵니다 410


여기서는 어느 날 이해력이 깊은 한 귀인이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더 소득을 보아서 쓰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존대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며, 나이가 많아서 다른 힘은 모두 없어졌으니, 이것만이 자기 집에서 그의 권위를 유지하고 남의 경멸을 면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색은 노년뿐 아니라 모든 허약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어떤 방편은 됩니다. 그러한 치료법이 필요한 병은 발생하기 전에 막아 두어야 할 일입니다. 어떤 부친이 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밖에 자식의 애정을 받을 수 없다면, 그는 참 가련한 인물입니다. 이런 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도덕과 그의 능력으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착하고 행세가 점잖아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풍부한 물질은 불탄 재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던 인물들의 유해와 유물까지도 경의와 숭배를 받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노년이 되어 아무리 노쇠하고 썩은 냄새가 나더라도, 젊었을 때 영광을 받고 지낸 인물은 그 아이들에게 존경받지 않는 일이 없으며, 그는 그들의 마음을 이치에 맞게 의무를 지키도록 지도한 것이고, 궁하거나 필요에 못 이겨서, 또는 강제와 억압으로 존경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35세 결혼설 412


나는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35세 결혼설에 찬성합니다. 플라톤은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55세 뒤에 결혼을 하려는 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소생은 먹여살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옰습니다.

탈레스는 여기에 진실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모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넘은 다음에는 이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귀찮은 행동에는 좋은 기회를 거절해야 할 일입니다.


늙은 말을 풀어 놓을 양식 413

그대가 여정의 말기에 실족하여 허덕이며
조소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거든

 

때맞춰 그대 마차의 늙은 말을 풀어 놓을 양식을 가져라.      (호라티우스)


삼밭에 세운 허수아비로밖에는 415∼416


부친과 친하게 지낼 나이가 된 아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에게 엄숙한 경멸조의 존대풍을 지키며, 그렇게 해서 자기를 두려워 하고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하고 어리석은 수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쓸데없는 광대짓이며, 자녀들에게 부친을 권태로운 인물로 느끼게 하고, 더 나쁜 일로는 웃음거리로 만들게도 합니다. 그들은 젊음과 힘을 가졌으니, 세상의 풍조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장에도 혈관에도 이미 피가 말라붙은 인간의 오만하고 횡포한 얼굴을, 진짜 삼밭에 세운 허수아비로밖에는 안 보며 경멸합니다. 나는 나를 두려워하게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노인에게는 너무 결함이 많고 기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경멸받기에 알맞기 때문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식구들의 애정과 사랑입니다. 명령과 두려움은 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이런 성질이 대단히 강하던 인물을 보았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아지자, 아무리 건전하게 지내 보려고 해도 그저 때리고 물어뜯고 욕질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야단법석을 치는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심해서 두루 살피느라고 속을 썩입니다.

어런 모든 것이 광대짓에 지나지 않으며, 가족들은 저마다 딴 수작을 합니다. 천장·다락에서부터 지하실에 이르기까지, 그의 돈주머니 속까지도 딴 자들이 가장 좋은 몫을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자기는 절약하며 검소한 식사에도 만족하고 있는 동안 집안 구석구석은 잔치판입니다. 노름판이고 돈을 물쓰듯 하고 늙은이의 헛된 분노와 조심성을 헐뜯기에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모두가 그에 대해 경계를 합니다. 어쩌다가 마음이 약한 어느 하인이 노인에게 애착심을 느끼게 되면, 그는 바로 의심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의심이란 늙은이들이 즐겨 갖는 성질입니다. 얼마나 여러 번 그는 자기 가족들을 잘 통솔한다고 하며, 정확한 복종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내게 자랑하던지요. 얼마나 그는 자기 일을 잘 살핀다고 말하던지요.

그 혼자만이 아무것도 모른다.                (테렌티우스)

나는 이 인물만큼 천성적으로, 그리고 배워 얻은 바로 지배욕을 보존하기에 알맞으며, 그러고도 어린아이와 같이 거기에 속고 있는 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이런 사정에 빠진 사람들 중에서 그를 가장 재미나는 예로 택한 것입니다.

이래야 좋을지 저래야 좋을지, 이것은 소콜라 학파가 문제삼을 만한 소재입니다. 그의 앞에서는 모두가 그에게 양보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권위 앞에서 이 헛된 수작을 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결코 저항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믿어 줍니다. 그를 두려워합니다. 실컷 그를 존경해 줍니다.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 417

여자들은 언제나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반대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며 모든 구실을 잡습니다. 한 꼬투리라도 변명할 재료가 있으면, 그녀들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헌금을 많이 내려고 남편에게서 잔뜩 훔쳐 내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참회사에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헌금의 분배를 말대로 믿어 보세요! 어떠한 행동도 남편의 양보를 얻어서 한 것이라면 충분한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에 우아미와 권위를 세우려면, 농간을 부려서건, 무례한 수작으로건 언제나 부당하게 남편들의 권한을 빼앗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서와 같이 가련한 늙은이에 대항해서 아이들 편을 드는 경우에는, 여자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고 영광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성정(性情)을 만족시킵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아이들과 결탁해서 걸핏하면 그의 지배와 지휘에 반항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사내아이가 성장해서 기운이 차면 그들을 강제로 매수해서, 요리사·회계원, 기타의 가족들을 손아귀에 넣어 버립니다.

 아내도 자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빠지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더 잔혹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습니다. 대 카토가 말하기를 "하인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적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던 그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아직 아내와 아들과 하인의 수만큼 적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노쇠한 경우에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받는 달콤한 이득입니다. 여기에 악을 쓰며 대들어 보았댔자, 특히 재판관들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야 할 때에는 대개 젊은이들과 같은 꿍꿍이속이며, 젊은이의 편을 드는 바에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싹수는 마찬가지, 마음이 착한 여자가 최고  420

나는 번성하는 집안의 남자가 많은 지참금을 짊어지고 들어올 아내를 찾아 돌아다니는 꼴은 그렇게 잘하는 일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부채 가운데 이보다 더 집안에 파멸을 가져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충실하게 이 의견을 좇은 것은 잘한 일이고, 나도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딸들은 다루기가 힘들고, 고맙게도 여겨 주지 않을 우려가 있으니, 그런 데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솔한 추측 때문에 속아서 실질적인 이익을 잃는 수가 있습니다. 지각 없는 여자는 이런 이치를 눈감아 주거나 저런 이치를 눈감아 주거나, 싹수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들은 옳지 못한 일에 이끌립니다. 그것은 마치 착한 여자들이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명예에 이끌리는 식입니다. 마음이 착하면, 신세가 부유할수록 마음이 더 너그럽고, 얼굴이 예쁠수록 더 영광스럽게 정숙한 몸가짐을 즐깁니다.


마지막에 해 준 행위 421

마침 숨이 넘어갈 무렵에 비위를 맞춰 주는 자가 요행을 얻지요! 마지막에 해 준 행위가 승리합니다.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영생 불멸의 아이들 423∼424

헤로도투스가 리비아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거기서는 여자들과 무분별하게 육체관계를 맺으며, 어린아이가 걸음마할 때가 되면, 군중 속에 데려다 놓고 첫걸음이 향하는 자를 아비로 삼는데, 잘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단순한 인연으로 그것을 또 다른 자신이라고 부르며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다른 생산물들이 있으니 그것도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우리의 정신·마음·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은 우리 육체보다도 더 고상한 부분으로 생산되는 것이며, 더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산물에 대해서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그 생산은 아이낳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거기에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른 아이들의 가치는 우리보다도 차라리 여자들의 것이며, 거기서 우리의 몫은 아주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 생산에서는 그 본래의 미와 우아성과 가치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생명있게 우리를 대표하며 알려 줍니다.

플라톤은, 이런 산물은 영생 불멸의 아이들이며, 그 부친(작가를 말함)들을 영생 불멸케 하고, 진실로 리쿠르고스나 솔론이나 미노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을 신격화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 424∼427


로마에 라비에누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용기가 장하고 권세 있는 인물로 다른 소질보다도 문장에 능하였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쟁 때에 카이사르 휘하에서 으뜸가는 장수로 있다가, 다음에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 편으로 넘어 가서 카이사르가 스페인에 진격하여 그를 격파하기까지 너무나 용감하게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위대한 라비에누스의 아들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라비에누스에게는 그의 덕성을 시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황제들의 궁신이나 총신들은 그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솔직성과 폭군 정치에 반항하는 기질을 좋게 보지 않았을 법한 일로, 그런 기분은 그의 문장이나 작품에 배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적들은 그를 관청에 고발해서 출판한 여러 작품을 불태우라는 판결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형벌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실시된 것인데, 그것은 문장과 연구 논문까지도 사형에 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잔혹한 것을 할 방법과 재료가 부족해서 우리들 정신의 고안과 명성 같은 고통을 느낄 감각이 없는 사물에까지 미치며, 시신(詩神)들의 학문과 업적에까지 물질적 고통을 적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이런 손실을 참고 지낼 수도 없고 그렇게도 소중한 작품을 잃은 뒤에 살아남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무덤에 자기를 실어가게 해서 그 속에 들어가 산 채로 파묻혀 자살과 매장을 동시에 감행했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보다 더 맹렬한 애정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시우스 세베루스는 대단한 웅변가로 이 사람의 친구인데, 그의 책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같은 판결문으로 자기도 함께 산 채로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고함질렀습니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렌티우스 코르두스도 그의 작품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칭찬했다고 고발당하여 같은 처단을 받았습니다. 저 티베리우스보다도 더 나쁜 상전을 섬겼던 저 천하고 비굴하고 부패한 원로원은 그의 문장을 화형(火刑)에 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저서와 동행하기에 만족하고, 음식을 끊고 자살했습니다.

저 선량한 루카누스는 극악무도한 네로에게 처단을 받아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바로 죽으려고 의사에게 끊게 한 팔뚝의 혈관에서 피가 대부분 흘러 나와 사지의 끝은 이미 싸늘해져 가고 찬 기운이 생명의 심장부에 접근해 오기 시작하자, 그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파르살리아 전쟁에 관한 자기 작품의 시 몇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구를 마지막으로 소리쳐 읊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아이들에게 주는 애정에 찬 정다운 작별 인사였으며, 죽어 가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주는 굳은 포옹과 고별이었고, 이 최후의 순간에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물들을 회상케 하는 타고난 경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에피쿠로스는 그의 말처럼 담석증의 극심한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갈 때에, 그가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학설의 아름다움이 그의 모든 위안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나 잘 자란 아들들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서 그가 풍부한 저작을 완성했을 때만큼 만족을 얻었겠습니까? 잘못 성장한 못난 아이도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보다도 전자의 불행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예로 들자면), 우리 종교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의 작품을 땅에 파묻거나 그에게 자식이 있는 경우에 그 아이들을 파묻든지 하라고 제안했을 때에, 그가 차라리 아이들을 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경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와 관계해서 잘난 아이를 얻는 것보다, 시신(詩神)과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잘생긴 작품을 하나 얻기를 훨씬 좋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을 생긴 그대로 내가 여기 내놓은 것은 마치 육체적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고칠 수 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얻은 작은 재산은 이미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는 것보다도 더 충분히 사물들을 알고 있으며, 내게서 자신이 담아 두지 못한 것을 가져갔으며, 아무 관계 없는 딴 사람처럼 필요할 때에는 그에게서 빌려 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작품보다 더 현명할지 모르나, 그는 나보다 더 부유합니다.

시에 열중하는 사람치고 로마에서 가장 으뜸가는 미소년을 낳기보다는 《아에네이스》를 내놓기를 원하지 않을 자 없고, 전자보다도 후자를 잃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작가들 중에서 특히 시인들은 자기 후손으로는 딸들만 남겨서, 그녀들이 다음에 조상들에게 영광을 주리라고 자랑하던 에파미논다스(이 딸들이란 그가 라케데모니아 인들에 대해서 두 번 얻은 고귀한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가 그녀들을 그리스 전국의 화사한 미녀들과 바꾸었으리라고는 믿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자기 아들과 상속자가 아무리 완벽하고 완성된 인물이라고 해도, 그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얻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공훈들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피디아스나 다른 탁월한 조각가들이 오랜 노력과 면학으로 예술적으로 완성해 놓은 탁월한 조각상이 잘 보존되어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랐을 만큼, 그가 낳아 놓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보존되기를 원했을까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가끔 부친들이 자기 딸들에게 보이는 사랑이나, 모친들이 자기 아들들에 열중하던 악덕스런 미치광이 같은 태도의 사랑으로 말하면, 그런 예는 이 다른 종류의 부자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피그말리온에 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특별한 미를 갖춘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고 나서, 자기 작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친 듯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들은 이 조상에 생명을 넣어 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상아를 만지니
그것은 단단함을 읽고 유연해지며
그의 손가락에 눌려 들어간다.                    (오비디우스)


10. 서적에 대하여

 

내가 빌려다 쓰는 것 431

나는 글을 좀 읽었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은 아주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진 지식이 어느 정도로까지 뻗은 것인가를 알려 주는 수밖에 아무런 확실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내놓는 재료에 기대하지 말고, 내가 내놓는 형태에 유의할 일이다. 내가 빌려다 쓰는 것을 가지고 내가 취급하는 문제를 빛내 볼 거리를 택할 줄 아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나는 어법이 서툴러서, 때로는 내 지각이 빈약하여 자신이 잘 말하지 못할 것을 남을 통하여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빌려 온 것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저울질한다. 수량으로 가치를 올릴 생각이었던들 몇 갑절은 내놓았을 것이다. 내가 차용해 온 곳은 모두가 옛날의 너무나 유명한 이름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판단력을 가졌다는 증거
432


사실 자기의 무식을 인정하는 일은 판단력을 가졌다는 가장 아름답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나는 본다.


옛날 책 433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딴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결코 새로운 책을 탐하지 않는다. 옛날 책이 내용적으로 더 충실하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서적에 대하여 433∼434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이솝 우화는 대부분이 여러 가지 의미와 해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그 이야기와 격이 맞는 어떠한 모습을 골라낸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유치하고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더 살아 있고 본질적이며 내면적인 의미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뚫어보지 못한다. 나 역시 그 꼴로 읽는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라면 시가(詩歌)에서는 베르길리우스·루크레티우스·카툴루스, 그리고 호라티우스가 유달리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가운데 전원시는 완벽한 시가 작품이라고 행각한다. 여기에 비교해 보면 그의 《아에네이스》의 어느 구절은, 작가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손질해야 될 점이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다. 내게는 《아에네이스》의 제5권이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또 루카누스를 좋아해서 즐겨 읽는다. 문체보다도 그의 고유한 가치와 사상과 판단의 진실함을 즐긴다. 저 선량한 테렌티우스로 말하면 그 라틴어의 애교와 우아미가 우리 심령의 움직임과 풍습의 조건들을 탄복할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어느 시각에나 우리 행동을 살펴보면, 나는 그의 시가 생각난다.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에게는 새로운 미와 아담한 풍치가 발견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살던 시대 가까이에 생존했던 사람들은 루크레티우스를 그에게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내 생각에도 이 비교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좋은 시구에 부딪히면 이 신념을 고집하기가 힘들다.

우리 시대에 희극을 써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이 방면에 재간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에 나오는 재료를 서너덧 합쳐 자기 것 하나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 문장의 매력이 너무나 우리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이야기의 맛은 잊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435∼436

나는 고대의 우수한 시인들이 뽐내거나 따지고 파고드는 일을 피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스페인이나 페트라르카식의 높은 음조의 광상적 노래뿐 아니라, 다음 세기에 오는 모든 시적 작품의 장식을 이루는, 좀더 보드랍고 조심스런 익살까지도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명한 비평가로서 이 고대 시인들에게 흠을 잡는 이가 없고, 마르티알리스의 시구의 톡 쏘는 맛보다도 카툴루수의 풍자시에 연마되고 줄곧 상냥하고 화창하게 아름다운 맛을 비길 바 없이 감탄하지 않는 자 없다. 마르티알리스가 자신에 관해서 "그는 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작품 재료는 재주가 있는 기질이 대신된 것이다 "라고 말하듯, 내가 금방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먼저 말한 작가들은 흥분하지도 분발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감명을 준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웃음을 찾아 낸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그 다음 작가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주가 부족하기에 더욱 육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들은 다리로 걸어갈 만큼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타야만 한다.


 

풋내기들 436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그는 단거리 질주를 시도한다.                (베르길리우스)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436∼438

다른 종류의 독서는, 쾌락에 좀더 내용을 섞어 주며 거기서 내 기분과 조건들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이런 데 내게 소용되는 작품들은 플루타르크와 세네카이다. 그들은 둘 다, 내가 거기에서 찾는 지식을 조각조각 풀어서 취급해 놓았기 때문에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내 비위에 맞는 특기할 장점이었다.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그런 데서 우리는 실컷 졸고 있다가 한 15분쯤 뒤에 보아도 말의 줄기를 잡을 여유가 넉넉히 있다. 옳건 그러건 자기가 승소하려는 때, 재판관 앞에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나 보려고 모두 말해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와 속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브루투스의 경우 439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브루투스를 플루타르크의 저서에서나 그 자신의 저서에서나 마찬가지로 읽어 보고 싶다.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키케로의 경우 439∼440

키케로의 경우, 나는 그가 학문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탁월한 점이 적었다고 보는 일반의 판단을 따른다. 그는 성질이 호탕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처럼 생긴 뚱뚱한 농담꾼들은 흔히 그렇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허약하고 허영된 야심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뿐더러 나는 그가 어떻게 자기 시를 세상에 발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변명해 줄 것이 없다. 시구를 잘 못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불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그의 이름의 영광과는 당치 않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판단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의 웅변은 전혀 비겨 볼 거리가 없다.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小) 키케로는 이름 하나밖에 그 부친을 닮은 점이 없었고, 아시아에서 군지휘관이었다. 어느 날 그가 베푼 연회석에 여러 손님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 카에스티우스라는 자가 유력자들의 공적 연석에 잘 끼어드는 식으로 식탁의 말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키케로는 자기 부하 하나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어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이 딴 데 있어 대답하는 말을 잊어버리는 자가 그렇듯, 그는 다음에도 두서너 번 이것을 다시 물었다. 하인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 겸, 전부터 그에게 알려 주려고 하던 터라, "이 자는 자기 웅변에 비해서 대감님 조상대에서의 웅변이 대단할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 말씀 드린 바로 그 카에스티우스입니다"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여기에 분개해서 이 가련한 카에스티우스를 잡아들이게 명령하고, 자기 앞에서 실컷 매질하게 하고 "고약하게 공손한 손님이로군" 하였다.


 

esse videatur 440

모든 점을 참고해 보고, 그의 웅변을 비길 바 없는 것으로 평가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웅변에 흠이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저 위대한 브루투스도 그의 것을 '부서지고 허리 부러진' 웅변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세기와 가까운 시대의 웅변가들도 역시 그가 문장의 끝에 붙이는 기다란 시가에 다는 운을 각별히 유의해서 집어넣는 버릇을 꼬집으며, esse videatur(그런 듯싶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지적하였다. 나로서는 장단격으로 짧게 떨어지는 음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드물기는 하지만 음절의 수를 가끔 뒤섞는 일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나로서는 늙기 전에 늙는 것보다는 늙고 나서 오래 있지 않는 편이 낫다"(키케로)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440

역사가들은 내게는 입에 맞는 떡이다. 그들은 재미나고 평이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내적 조건들의 잡다성과 진실성의 전부와 세부적인 것, 그가 총체로 가진 여러 방법의 다양성과 그를 위협하는 사건들, 즉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간 전체가 다른 어떤 데서보다도 여기서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자들은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보다도 그 목적에, 또 외부에서 닥쳐오는 것보다도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에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특히 카이사르는 441

특히 카이사르는 단지 역사학뿐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루스투스도 그런 축에 들지만 그만큼 그는 다른 자들보다 뛰어난 완벽함과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딴 작품들을 읽는 것보다 더한 존경과 숭배를 품고 이 작가를 읽는다. 어느 때는 그의 행동과 위대성의 기적을 통하여 그 사람됨 자체를 고찰하며, 때로는 그의 순수하고도 비길 바 없이 연마된 문장을 탐하여 읽는다. 그의 문장은 키케로도 말하듯, 모든 역사가들의 것보다 탁월할 뿐더러, 키케로의 것보다 더 나은 글이다. 그의 판단을 보건대, 그만한 성실성을 가지고 적을 말하면서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한 야심의 그릇된 원칙과 더러운 동기를 감추려고 거짓을 써 나가는 것밖에는 그 자신을 말함에 극히 인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 글 속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자기 고유의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위대한 업적이 수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간 것들 441

진실로 탁월한 역사가들은 알아 둘 만한 사실을 골라 낼 능력을 가지고, 두 가지 보도 중에서 더 진실한 것을 선별할 수 있으며, 군주들의 사정이나 그들의 기분에 관해서 의향을 결론 짓고 그들에게 맞는 말을 시키고 있다. 그들이 생각에 따라 우리의 신념을 조절하는 권한을 갖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두 부류의 중간 것들은(이것이 가장 보통이지만) 모든 것을 벌여 놓는다. 그들은 우리가 씹을 것을 대신 씹어 준다. 그들은 판단할 권한을 자기가 가지며, 역사를 자기 생각대로 꾸며 나간다. 왜냐하면 판단이 한편으로 기울어지는 이상, 사람들은 이야기를 그 편으로 굽혀서 돌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판단을 적어 넣는 습관 443


나는 잘못 기억하거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몇 해 전에 정독하고 써놓기까지 한 책을 내가 모르는 새로 나온 책이라고 다시 들추어 보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 전부터(내가 한 번밖에 쓰지 않으려는 것은) 책마다 끝에 다 읽은 날짜를 기록하고, 적어도 그것을 읽으며 그 작가에 관해서 내가 품은 일반적 관념과 모습을 상상해 보고, 거기서 대강 끌어낸 판단을 적어 넣는 습관을 들였다.


11. 잔인성에 대하여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446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 중에는, 마음을 도덕에 맞게 잘 조절하여 착한 상태로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결심과 사상을 모든 외적 운의 힘을 초월해서 갖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도 그것을 시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고통과 궁핍과 경멸을 싸워 이기며, 그들의 심령을 긴장시키키 위해 이런 것을 찾아 가지려고 한다. "도덕은 투쟁 속에서 크게 성장한다."(세네카)

이것은 그들과는 다른 학파인 에파미논다스가 지극히 합법적으로 운이 그의 손에 쥐어 주는 재물도 거절해 가며, 빈궁과 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항상 극도의 궁핍 생활을 지켜 가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흉악한 아내를 참아 내는 고역으로, 그보다 더 심한 시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새파랗게 날선 칼만큼 독한 시련이다.


도덕의 길 446


메텔루스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 중 홀로, 로마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모든 힘을 다해서 평민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부정당하게 통과시키려는 포악한 처사에 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법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사투르니누스가 내리는 극형을 받게 되자, 곤경에 빠져서 자기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쁜 일을 하기란 얼마나 쉽고 비열하며, 아무 위험도 없는 곳에서 착한 일을 하기란 얼마나 속된 일인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서 착한 일을 하기는 도덕 군자가 마땅히 할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메텔루스의 이 말은 내가 증명하려는 바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즉, 도덕은 쉬운 일을 동무삼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착한 마음의 성향으로 조절된 걸음을 인도하는 평탄하고 경사진 길은 진실한 도덕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은 거칠고 가시덤불진 길을 찾는다. 도덕은 그것이 싸워 나갈 거리로, 메텔루스의 경우와 같이 그 꿋꿋한 행진을 좌절시키려고 운이 즐겨 가져 오는 외부적인 시련이거나 우리 본성의 무질서한 욕망과 불완전성이 가져오는 내면적인 시련을 가지려고 한다.


인생에 상응하는 죽음 449


모든 죽음은 당사자의 인생에 상응해야만 한다. 죽을 때에 사람이 다르게 되는 수는 없다. 나는 항상 그 생애를 보고 그 죽음을 해석한다. 그리고 물러 빠진 생애에 결부된 강렬한 죽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것이 그 생애에 맞는 약한 원인에서 온 것으로 해석한다.

 

풋내기들 450

전쟁에서 풋내기들이 위험한 지경이나 아무 잘못 없는 숫자에 몸을 던지며 큰 코를 다친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전투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광의 갈망과 첫 번째 승리의 희망에
유혹되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베르길리우스)

그 때문에 특수한 행동에 관해서 판단할 때는, 그것을 정의하기 전에 여러 사정과 그것을 행한 자의 인간됨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454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그것이 모두 악덕스럽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런 논법을 잘 본다. 즉, 악덕이 가장 큰 노력을 할 때에는 이성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제압한다고 하며,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그 경험을 끌어서 말한다.

육체는 쾌락을 재촉하고
비너스가 여자의 밭에 파종하려고 할 때에    (루크레티우스)

그때에 쾌락은 우리를 너무 심하게 혼미시켜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력은 그 힘을 상실하고 완전히 탐락 속에 오그라들어 정신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이 다르게도 될 수 있으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마음이란 긴장시켜서 경계심으로 굳게 다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쾌락의 충격을 억제할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품행이 단정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증언한 바와 같이, 나는 비너스를 강압적인 여신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나는 나바르 여왕이 《일곱 밤 이야기》의 하나에서 말하듯(이 작품은 그런 제재로는 묘하게 꾸며진 것이다), 한 남자가 오래 갈망해 오던 애인과 며칠 밤을 보내는데, 모든 기회와 자유를 가지고 함께 지내며 단지 키스와 접촉만으로 만족하라는 약속의 신의를 지켰다는 것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12. 레이몽 스봉의 변호


나는 무엇을 아는가?
461


몽테뉴는 스봉의 사상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이 변호에서 사실상 스봉의 사상과는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사상을 전개시킨다. 몽테뉴의 《에세이》 중 다른 것과는 동떨어지게 긴 이 장은 그 사상이 가장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해석에 가장 난점을 많이 제기하는 논문이다. 그의 유명한 표어 '크세주(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로 요약되는 이 극단의 회의주의는 몽테뉴의 중심 사상으로 몇 세기 동안 인정되어 오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는 이것이 제3권의 심리적, 도덕적 확신으로 향하는 중간 단계로 해석되고 있다.(<역자 해설> 중에서)


대단히 드문 비판적 의의 463

이 《에세이》는 어떻게 보면 그 내용과 형식이 작품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문은 그의 철학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몽테뉴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이성의 계속적 긴장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방어책을 기대하던 철학에서 이탈하며, 천성에 몸을 맡기고 명상 속에서 해결책을 구하며, 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농민과 무식자를 본받으라고 권하는 사상으로 향하고 있다. 동시에 섹스투스의 학문에 접함으로써 그의 지적 신중성은 굳어지며,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심정과 사람은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꾸며, 그 때문에 그의 사상은 그의 시대에 대단히 드문 비판적 의이를 가지고 드러나게 된다.

다른 면에서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는 1572년의 태도보다 좀더 개인적인 태도로 향하게 된다. 즉, 지적 신중성으로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경험에 의한 관념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 자기 관념들이 상대적이라는 심정, 자아라는 직접적으로 알려진 정신적 사실을 세워야 하는 필요성,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을 무대로 내세우게 하며, 그를 자아의 묘사에 밀어넣는다. 이 경향은 1572년경에는 찾아볼 수 없으나, 1579년경에 확립된다.(<역자 해설> 중에서)

 

내가 고양이를 희롱하고 있자면 481∼482

자만심은 타고난 근본적인 병폐이다. 모든 생령들 중에서도 가장 재난당하기 쉽고 취약하며,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우주의 가장 나쁘고, 죽어 없이지며 비천한 부분에 못 박혀, 하늘의 끝없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 단계의 주거로, 여기 이 세상의 진흙과 분뇨통 속에서 세 가지 동물들(조류·포유류·어류) 중의 가장 나쁜 조건에 있는 동물들과 함께 자기를 보고 느끼고 한다. 그러고도 그는 상상력으로 달의 궤도 위에 올라서 하늘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바로 이 공상력으로 그는 자기를 하느님과 견주며, 하늘의 거룩한 조건을 자기가 차지하고 자기 자신을 따로 골라 다른 생령들과는 구별해 놓고, 자기 동료며 친구인 동물들에게는 그들의 몫을 갈라 주며, 그들에게 자기 멋대로 정한 소질과 힘을 부여한다. 그는 어떻게 자기 지성의 힘으로 동물들의 내적 움직임과 비밀을 안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동물들에게 어리석은 성질을 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짐승들과 우리 사이의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결함이 어째서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짐승이라고 보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짐승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크게 괴이한 일은 아니다.


 

손으로는 어찌 하지? 483

사랑하는 애인들끼리는 화를 내고, 서로 화해하고, 간청하고, 지적하는 모든 일을 눈으로 한다.

침묵도 소망과
생각을 나타낼 줄 안다.    (타소)

손으로는 어찌 하지? 우리는 요구하며, 약속하며, 부르며, 내보이며, 위협하며, 기원하며, 간청하며, 부인하며, 거절하며, 물어보며, 감탄하며, 헤아리며, 고백하며, 후회하며,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의심하며, 가르쳐주며, 명령하며, 교사하며, 맹세하며, 증거하며, 비난하며, 처단하며, 죄를 사하며, 욕설하며, 경멸하며, 도전하며, 분개하며, 아첨하며, 갈채하며, 축복하며, 굴욕을 보이며, 조롱하며, 화해하며, 권장하며, 고무하며, 축하하며, 즐기며, 동정하며, 슬퍼하며, 낙담시키며, 절망하며, 놀라게 하며, 소리치며, 침묵케 하며, 그리고 무엇은 못할 것인가? 혓바닥에 못지않게 잡다하고 복잡하게 무엇이든지 표현한다.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 486

자연은 보편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생령 중에서, 자연이 그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모든 방법을 아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그들은 방자한 생각으로 때로는 자기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때로는 그 반대편 극단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속박당하고 잘 씌워져서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이며, 남이 내버린 물건으로밖에 자기를 싸감아 무장해 볼 거리도 없다. 반면에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이 그들을 조개껍데기·깍지·덧껍질·털·모사·가시·가죽·잔털·날개짓·거북·등껍질·양털 가죽, 돼지털 등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대로 옷을 입혀 주고, 그들을 발톱·이빨·뿔 등으로 무장시켜서 공격하고 방어하게 하고, 자연이 헤엄치기·달음질치기·날기·노래하기 등 그들에게 맞는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우는 것 외에는 배우지 않으면 길가기·말하기·밥먹기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장소와 위치에 따라 489
 

 

락탄티우스는 짐승들에게 말뿐 아니라 웃는 능력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라가 다르므로 언어가 다른 것은, 같은 종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서, 장소와 위치에 따라 메추리의 노랫소리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때로 잡다한 조류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는 소리가 대단히 달라지며,
그 중에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목소리도 변하여
목쉰 소리로 노래하는 것도 있다.      (루크레티우스)

(나의 생각)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490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위에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는다고 현자(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루크레티우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질서와 단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본성의 모습 아래에서의 일이다.

사물들은 각각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이 정한 움직일 수 없는 차이를 지켜간다.                                                                      (루크레티우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493

디오게네스는 부모들이 자기를 노예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어버이들은 미쳤어. 나를 맡아 대접하고 먹여 살리는 자야말로 나의 노예요" 하고 말했다. 짐승을 먹이는 자들은 짐승이 그들을 섬긴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그뿐더러 짐승들에게는 더한층 품위 있는 면이 있다. 사자는 결코 다른 사자를 섬긴 일이 없고, 말이 다른 말을 섬긴 일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짐승들을 사냥하러 가듯, 호랑이와 사자들은 사람을 사냥하러 간다. 서로간에 같은 사냥을 하고 있다. 개들이 토끼에게 꼬치 고기가 잉어에게, 제비가 매미에게 , 매가 콩새와 종달새에게 하는 식이다.


 

칸디아의 염소들 494

칸디아의 염소들을 보면, 그들이 화살을 맞았을 때에 수많은 잡초들 중에서도 백선(白鮮)을 골라서 치료하며, 거북은 독사를 잡아먹으면 즉시 화박하(花薄荷)를 구해서 속을 훑어 내고, 도마뱀은 회향(茴香)으로 눈을 닦아 밝히며, 고니는 스스로 바닷물로 관장하고, 코끼리는 자기 몸과 자기 동무의 몸에서뿐 아니라 주인의 몸에서도(그 증거로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한 포로스 왕의 코끼리가 있다), 전쟁 때 적에게 얻어맞은 작은 창과 삼지창 등을 우리로서는 할 수 없을 만큼 아프지 않게 뽑아 낸다. 이런 것을 어째서 지식이며 예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인가? 동물들을 얕보기 위해서, 그들이 이런 일을 아는 것은 단지 본성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라고 핑계하는 수작은, 그들에게서 지식과 예지의 자격을 빼앗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도 확실한 여 선생님(本性을 가리킴)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보다도 더 그들에게 이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


 

복습하는 코끼리 496

아리우스는 말한다. "나는 옛날에 한 꼬끼리가 양쪽 허벅다리에 꽹과리를 달고, 또 꽃대롱에도 하나 달고, 이것을 치는 소리에 맞춰서 다른 놈들은 모두 동그랗게 춤을 추며 악기의 지휘에 따라서 어느 박자에 가서는 머리를 올리고 숙이는 것을 보았는데, 이 화음은 듣기에도 유쾌하였다." 로마의 극단에서는 코끼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끊겨서 대단히 배우기가 힘든 많은 음계와 여러 박자에 맞춰 춤추며 움직이는 것을 예사로 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공부한 것을 혼자서 외어 보며, 스승에게 꾸지람받고 매맞지 않으려고 힘써 조심해 가며 복습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심각한 연구와 자기 반성 497

그러나 플루타르크가 책임지고 말하는 까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괴상하기까지 하다. 이 까치는 로마의 어느 이발사의 이발소에서 그가 듣는 모든 것을 목소리로 흉내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팔수들이 이 이발소 앞에 멈춰서 오랫동안 나팔을 분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은 이 까치가 사뭇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우울하게 지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 그가 나팔소리에 얼이 빠져서 귀가 먹고 그의 청각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심각한 연구이고 자기 반성이었으며, 그가 그 뒤 처음 낸 목소리는 이 나팔소리를 그 반복과 자태, 음조의 변화까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공부로 그가 전에 말할 줄 알았던 것은 모두 버리고 경멸해 버렸던 것이다.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 499

우리는 평범한 일보다는 범상치 않은 일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나는 이렇게 긴 기록으로 능청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와 같이 사는 동물들에 관해서 여느 때 우리가 보는 것을 상세히 연구해 본다면,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것을 수집해 오는 것만큼 경탄할 만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진행은 모두가 동일한 본성에 의해서 굴러간다. 현재의 상태에 관해서 유능하게 판단한 자는, 확실히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502

사냥꾼들이 확언하는 바에 의하면, 여러 마리의 강아지 속에서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그 어미가 고르도록 하면 된다고 한다. 개 집에서 강아지들을 밖에 내놓으면 어미개가 맨 먼저 가져다 들여놓는 놈이 언제나 가장 나은 놈이며, 개 집을 사방으로 불로 둘러싸는 체하면, 살려내려고 가장 먼저 달려 드는 강아지가 가장 좋은 놈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짐승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예측하는 습관을 가졌거나 또는 새끼들을 판단하는 데에 우리와는 다른 더 생기있는 덕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짐승들이 출생하고, 새끼를 치고, 기르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살고, 죽고 하는 방식이 우리와 아주 닮은 이상, 우리가 짐승들보다 나은 조건을 우리에게 붙이고 짐승들에게서 그들의 원래 자질을 끊어내 버리는 것은,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정으로 말하면 503

우정으로 말하면, 그들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생기있고 견실하다. 리시마코스 왕의 개 히르카노스는 그 주인이 죽자, 그의 침대 밑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받지 않고 고집하고 있다가, 시체를 태우는 날 달려가서 그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피로스라고 부루는 사람의 개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개는 주인이 죽은 이후로 그의 침대 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실어갈 때에 함께 실려가서 마침내 그 주인을 불태우는 섶 속에 뛰어들었다.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504

욕망은 마시는 것이나 먹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 있고, 여자와의 관계와 같이 자연스럽고도 필요치 않은 것이 있고, 또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 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거의 이 마지막 종류에 속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피상적이고 인공적이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본성이 만족하기에 필요한 것은 참으로 적으며, 본성이 우리에게 욕망할 거리를 남겨 놓은 것도 참으로 적은 까닭이다. 우리가 음식상에 차려 내는 것은 우리 본성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스토아 학파는 사람은 하루에 감람나무의 열매 하나만 먹으면 살기에 족하다고 하였다. 포도주의 미묘한 맛은 본성이 명하는 바가 아니며, 사랑의 욕망에 첨가하는 점도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위대한 집정관의 딸이 필요로 할 건 없다.      (호라티우스)

행복에 관한 무지와 그릇된 사상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넣는 이런 외부적인 욕망은 너무나 수가 많아서,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들을 거의 모두 몰아 낸다.


기가 막힐 일이다 507

두 왕들 사이에
불화로 일어난 큰 투쟁이 벌어진다.
이때 전군(全軍) 의 생기 띤 전투적 열중과
군중의 진동하는 맹위가 어떠한가는 상상에 맡겨 둔다.   (베르길리우스)

나는 이 거룩한 묘사를 읽으면, 언제나 인간성의 졸렬한 허영을 읽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 공포와 경악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저 투쟁적인 동작, 저 음향과 고함소리의 폭풍우.

검광이 번쩍 하늘에 솟으니
주위 대지는 맞부딫치는 무기의 눈부신 빛으로 번쩍이고,
인간들의 굳센 걸음에 땅이 울리고,
그 난동에 충격받은 산악의 반향은 하늘의 별들에까지
그들의 소음을 치솟아 올린다.                                    (루크레티우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가장 위대하였고, 가장 승리하였고, 이 세상이 있은 이후로 가장 강력하던 황제가, 놀잇감 삼아서 아주 재미나고 극히 교묘하게 바다와 육지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50만 명의 생령과 피가 그의 운명을 좇아 사라지고, 세계의 동서 두 부분의 힘과 부가 그가 이루려는 계획을 위해 소진되게 한 일을 들어 보자.

안토니우스가 글라피라와 사랑을 했다고
풀비아는 자기도 사랑해 달라고 내게 의무를 부여한다.
풀비아와 사랑을 하라고! 마리우스가 청해 온다면
그도 사랑해 줘야 하나?
아니다. 내게 이성이 있다면! 사랑 아니면 전쟁을!
하며 그녀는 말한다
- 뭐라고 내 생명보다 내 남근이 더 중하도다 · · · · · ·
울려라! 나팔아!                                                      (아우구스투스, 마르티알리스의 인용)

이 팔도 많고 대가리도 많은 사나운 괴물은 어쨌든 인간들이다. 허약하고 참담하고 가련한 인간들이다. 그것은 다만 뒤흔들리며 열에 뜬 개미집일 뿐이다.

검은 부대는 평원을 횡단하며 행진한다.      (베르길리우스)

거꾸로 부는 바람결, 한숨, 까마귀가 날아가며 우는 소리, 우연히 지나가는 한 마리의 독수리, 말의 헛디딤, 꿈 하나, 목소리 하나, 징조 하나, 아침 안개 하나가 그 괴물을 쓰러뜨려 굴러 떨어지게 하기에 족하다. 단지 햇볕을 그의 얼굴에 쬐어 보라.

그는 바로 녹아서 기절하리라. 시인이 노래하는 꿀벌 떼처럼 그의 눈에 먼지 한 줌 불어 넣어 보라.

우리의 모든 군기(軍旗)들, 연들, 그 선두에선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까지도 패하여 흩어진다.

 

충성심으로 말하면 509-510

충성심으로 말하면, 세상에 사람만한 배신자는 없다. 우리 역사에는 개들이 죽은 주인들의 원수를 맹렬히 추격해 간 이야기가 있다. 피로스 왕은 어떤 개가 시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개가 사흘 동안이나 이러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 시체를 매장하라고 명령하고, 개는 자기가 데리고 갔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군대의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러 갔을 때에, 이 개는 자기 주인을 살해한 범인을 알아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듯 그들을 향하여 맹렬히 짖으며 대들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지적으로 살인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는 수속이 진행되어 얼마 뒤에 재판의 한 방법이 되었다. 현자 헤시오도스의 개도 나우팍토스 인 카니스토르의 아들들이 자기 주인에 가한 살인을 입증하여 똑같이 복수를 하였다.

다른 개 하나는 아테네의 어느 사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신을 모독하는 도둑 하나가 가장 귀중한 보배를 훔쳐가는 것을 보고 힘 자라는 데까지 짖었다. 그래도 집사가 잠을 깨지 않자, 이 개는 도둑을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날이 샌 다음에도 도둑을 눈에서 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러 감시하며, 그가 먹을 것을 갖다 주어도 받아 먹으려 하지 않았으나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겐 꼬리를 흔들며 주는 것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도둑이 자려고 멈추면 이 개도 같이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 개의 소식이 사원의 집사들에게까지 이르러 그 뒤를 쫓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크로미온 시에서 개를 확인하고, 그 도둑을 잡아 아테네 시로 데려와 처벌하였다.

재판관들은 이 개의 착한 봉사에 대한 감사로,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국가의 비용으로 얼마간의 밀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수도사들에게 개를 보살펴 주도록 명령하였다. 플루타르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며 자기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개, 코끼리, 호랑이 513∼514

도량(度量)의 크기로 말하면, 인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보내 온 큰 개가 한 일보다도 더 분명한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싸워 보라고 처음에는 사슴을 내놓고 다음에는 산돼지, 그리고 다음에는 곰을 내놓아도, 그는 상대를 않으며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그러나 사자 한 마리를 보았을 때에는 즉시 벌떡 일어서며, 이놈이면 한번 싸워 볼 만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일로 말하면, 어떤 코끼리 한 마리가 분에 복받쳐 자기를 부리던 사람을 죽이고는 너무 극심한 비탄에 빠져, 먹을 생각을 않고 그대로 죽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대성으로 말하면, 모든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짐승인 어느 호랑이 한 마리가 그 앞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내 주어도 해치지 않고 이틀 동안을 굶고 지내다가, 사흘째에는 자기가 갇혀 있던 우리를 부수고 나가서 다른 먹을 거리를 찾아다니기까지 하면서, 자기 손님인 새끼염소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알시온 이야기 514∼515

서로 사귀어서 이루어지는 친밀성과 합의의 권리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고양이·개·토기를 함께 살도록 길들여 볼 때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로, 특히 시칠리아의 바다로 여행하는 자들은 알시온의 생활 조건에서 인간 사고력의 한계를 넘는 일을 경험으로 배운다. 어떤 종류의 동물들의 잉태와 출생과 해산에, 자연이 그만한 영광을 부여한 일이 있던가?

과연 시인들이 말하는 바처럼, 델로스의 섬은 옛날에는 둥둥 떠다니다가 라토나의 해산을 위해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알시온이라는 새가 물결 위에 새끼를 치는 동안은 바다 전체가 정지해서 잔잔해지고 물결도 바람도 없고 비도 오지 않게 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1년 중에 낮이 가장 짧은 동지 때의 일이며, 그의 특권 덕택에 우리는 한겨울에도 이레 밤 이레 낮을 위험 없이 항해할 수 있다. 그 암컷들은 자기 짝 이 외에는 다른 수컷을 모르며, 한평생 버리지 않고 그를 거둔다. 그리고 수놈이 노쇠하여 허약해지면 그를 자기 어깨에 메고 사방으로 다니며, 죽을 때까지 섬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알시온이 새끼를 기르려고 물결 위에 지어 놓은 보금자리의 놀라운 구조를 밝혀 보거나 그 재료를 짐작해 볼 총명성을 가져 본 일이 없다. 플루타르크는 그 새의 집을 열어 보고 만져도 보았다는데, 그 재료는 여느 물고기의 뼈를 서로 맞추고 잇고 엮고 다른 것은 가로지르고 한 것으로, 곡선과 둥근 면을 조절하여 물에 잘 뜨도록 동그란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는 집을 다 지어서는 그것을 물결 위에 갖다 놓는데, 바다의 물결은 그것을 살그머니 쳐서 아직 맺어지지 않은 곳을 더 여미고, 그 구조가 아직 확실치 못해서 늘어진 곳을 다진다. 또 잘 이어져 있는 것은 물결이 쳐 조이기 때문에, 돌이나 쇠로 두드려도 여간해서는 부서지지도 풀리지도, 손상되지도 않게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더욱 감탄할 일은 그 내부의 오목한 형상과 균형이다. 과연 그 집을 지은 새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게 꼭 닫혀져 있어서, 비단 바닷물뿐 아니라 다른 어떠한 것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여며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 구조에 관해 서적에서 인용한 극히 명백하게 설명된 묘사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은 그 구조를 꾸미기에 곤란한 면을 아직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허영되기에 우리가 모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우리 능력만 못한 것으로 보고, 경멸조로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털도 뼈도 없는 토끼 515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우리의 심령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자기 사정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잡히는 모든 것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고 육체적인 소질을 벗겨 없애고, 자기가 알아 둘 가치가 있다고 보는 모든 사물들을 거기서 두께·길이·깊이·무게·빛깔·냄새·거칠음·매끈함·단단함·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소질은 전부 피상적인 비천한 재료인 양 치워 두고 정리하며, 그들을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로마와 파리, 내가 상상하는 파리를, 그것이 크기도 장소도 돌도 회도 나무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며, 그들을 영생 불멸의 정신적인 자기 조건으로 조절해 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우리 심령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팔소리나 총소리나 전투에 길들여진 말이 마구간에 누워서, 마치 지금 싸움터에 있는 것처럼 자다가 꿈틀거리고 부르르 떨고 하며, 그 마음속에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와 부대가 없는 한 군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그대는 강건한 준마들이 사지를 뻗고 잠들어 누워서도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자주 헐떡이며 마치 승리를 다투듯,
온 근육을 긴장시킴을 보리라.                                                                                            (루크레티우스)

사냥개가 꿈속에 토끼를 쫓고 있다고 상상하며, 잠 속에서 그 뒤를 쫓느라고 헐떡이며 꼬리를 뻗치고 오금을 흔들며, 그리고 달음질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때의 토끼란, 털도 뼈도 없는 토끼이다.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518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내부와 생명이 매인 부분들로 보면 돼지가 그렇다. 아주 벌거숭이로 해놓은 인간을, 그의 오점이나 타고난 굴종과 완전하지 못함을 생각해 보면,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우리가 몸을 감싸고 다니는 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들의 미로 우리를 장식하고, 그들에게서 벗겨 온 물건 밑에 우리를 가리려고, 털실·날개깃·털·명주실 등을 빌려 오는 것은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 달라고 해야 할 만한 일이다.
 



오로지 우리들만이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 519

그뿐더러 우리는 그 결함이 바로 동물들의 감정을 거스르는 단 하나의 동물이며, 오로지 우리들만이 본성에서 나오는 행동을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고려해야 할 만한 일은 이 방면의 대가(大家)들이 명령하기를, 사랑의 정열에서 치유되려면 욕심나는 대상의 육체를 자유로이 들여다볼 일이며, 애정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자는 상대편 신체의 음부를 보고는
불타오르던 흥분이 즉시 얼어붙었다.      (오비디우스)

이런 치료법은 아마도 좀 까다롭고 냉각된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로 터놓고 친교를 맺어 가다가 싫증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성이 지닌 결함의 두드러진 징조이다. 우리네 부인들이 사람들 앞에 나오려고 자신을 분칠하며 장식하고, 여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정숙한 마음보다는 기교와 조심성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 비너스들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의 올가미로 결박해 두려는 남자들에게
자기 사생활의 이면을 은닉하려고 매우 조심한다.      (루크레티우스)


무식한 사람 522

무식한 사람의 연장은 더 빳빳이 서지 못한단 말인가?    (호라티우스)


가련하고 참담한 동물 524

참으로 자연은 우리의 가련하고 허약한 처지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에게 오만함밖에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에픽테토스가 '사람은 자기 생각을 사용하는 것밖에 자기 고유의 것이란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 바람과 연기밖에 가진 것이 없다. 철학은, 신들은 건강을 본질로 갖고 질병은 지식 속에 가졌으며, 사람은 그 반대로 행복은 공상으로 갖고 불행은 본질로 가졌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재화와 보물은 한낱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가련하고 참담한 동물이 허풍을 떠는 꼴을 보라.


상상력 때문에 526


어린아이들의 부드럽고 연한 살이 우리의 살보다 찢고 째기에 더 쉬운 것은 그들이 무지한 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말(馬)의 살은 어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상상력 때문에 병에 걸리는가?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만 느끼는 병을 치료하려고 피를 뽑고 속을 훓터 내고, 약을 쓰는 자들을 본다. 우리에게 진짜로 병이 없을 때에는 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탈이 된다. 얼굴 빛깔이 이러니 무슨 염증 충혈의 징조가 되고, 계절이 더우니 무슨 열병에 걸릴 위험이 있고, 그대의 왼손에 생명의 줄이 끊겼으니, 중한 병에 걸릴 징조를 알려 주는 것이 된다. 이 지식이 염치 없이 건강에 대든다. 청춘의 이 쾌활한 정력은 늘 그대로 있을 수 없으며, 그 힘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면 안 되니까, 미리 피를 뽑아서 힘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부의 사랑 527


우리가 경험으로 보는 바 가장 천하고 둔한 자들이 사랑의 실천에는 더 견실하고 바람직하며, 마부의 사랑이 한량들의 사랑보다 더 유쾌하다는 것은, 후자에게는 마음의 동요가 육체의 힘을 혼란시키고 꺾고 피로케 한 탓이 아니면 무슨 까닭일까?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528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냉담하고 둔감한 취미를 갖는 것이 주는 편리함은 역시 그 결과로 해서 좋은 것과 유쾌한 것을 누리는 경우에도 예민하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불편함을 이끌어 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비참한 조건으로는 즐겨야 할 것보다도 피해야 할 일이 더 많고 극도의 탐락은 가벼운 고통만큼도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다. "인간은 고통보다도 쾌락의 감각이 적다." (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529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탐락을 가장 높이 평가한 어떤 학파의 철학자는 이 행복이라는 것을 다만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세워 놓았다. 엔니우스가 말하듯,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바랄 수 있는 한의 행복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불행을 갖지 않음은 많은 행복을 가짐이다. (엔니우스)

우리를 한순간 건강과 고통이 없는 상태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듯한 바로 그 근질거림과 예민한 감각, 이 힘차고 동적이며 무엇인지 모르게 찌르는 듯하고 물어뜯는 듯한 탐락도, 역시 그 목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다. 여자와의 접촉에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정욕은, 우리에게 맹렬한 욕망이 지닌 고통을 없애는 것밖에 찾지 않으며, 이 욕구를 채워 그 열병을 없애고 편안히 쉬는 것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단순함이 우리를 아무 불행도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건으로서는 대단히 생복한 상태로 지향케 하는 일이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랄 만하지도 않는 이 고통 없는 상태를 칭찬하지 않는다.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내가 병에 걸렸으면 그것을 알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이 내 살을 태우고 찢고 하면 그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진실로 고통의 의식을 뽑아 없애는 자는 동시에 탐락의 의식을 근절시킬 것이며, 마침내는 인간 자체를 파괴할 것이다. "고통이 없음은 높은 값을 지불해서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즉 심령의 둔화와 육체의 마비를 초래한다."(키케로)

 

키케로의 거짓말과 참말 530

지나간 행복의 추억은 고통을 배가한다.                                                                            (단테의 시 개작)

철학이 주는 이 충고로 추억 속에다 지나간 행복만을 담아 두고, 우리가 겪은 불쾌한 일을 지워 버리라는 것은 마치 망자의 기술이 우리의 권한 안에 있는 것 같은 말이니, 다 똑같은 수작이다. 이것은 또 우리를 한층 더 못나게 만드는 충고이다.

지난날 불행의 추억은 감미롭다.                                                                                                   (키케로)

운명과 싸울 수 있게 내 손에 무기를 쥐어 주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역경을 발밑에 유린해 버리도록 내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어야 할 철학이 어째서 물러빠지게 이 비겁하고도 꼴사나운 계책으로 나에게 숨을 구멍만 찾아 다니게 하려는 것인가? 기억력은 우리가 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 준다. 참으로 무엇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만큼 그것을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넣은 것이란 없다. 어떤 사물을 잃어버리고 축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길이 새겨서 잘 보존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우리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하고,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키케로)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원치 않는 때에도 내 추억을 간직하고, 내가 원하여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키케로)는 말이 진실이다. 이 충고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홀로 자기를 감히 현자라고 표명한 자'의 말이다.



최후의 해결책 533


전도서에는 '예지가 많으면 번민이 많다', '학문을 쌓는 자는 노역(勞役)과 고민을 쌓는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대개 철학 사상이 합치하지만, 모든 종류의 가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없는 인생에게 종말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재미있나? 복종하라. 재미 없나? 그대 가고 싶은 데로 가라."(세네카)

"고통이 쓰린가? 그래, 그것이 그대를 괴롭힌다고 하자. 그대가 알몸뚱이거든 목을 내밀라. 그러나 그대가 불카누스의 무기로 옷 입었거든 저항하라." (키케로)


오오 오만이여! 535


오오 오만이여! 너는 얼마나 우리를 방해하느냐! 소크라테스는 예지의 신이 그에게 현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샅샅이 살펴보고 뒤흔들어 보고서도, 거기서 이 거룩한 호칭의 아무런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만큼 정의롭고 절도 있고 용감하고 박식하며, 자기보다 더 말을 잘 하고 잘생기고 나라를 위해 유익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남보다 특출난 것이 없고, 자기가 현명한 자로 처신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며, 그의 신은 사람이 학문과 예지에 관해서 가진 생각을 사람이 특수하게 어리석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최선의 학설은 무지의 학설이며 최선의 예지는 순박성이라고 결론지었다.


보리 이삭 537


나는 결국 인간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힘이 그의 역량에 있는 것인가, 또는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찾아본 결과가 어떤 새로운 힘과 견고한 진리로 인간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양심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가 그 오랜 추구에서 끌어 낸 모든 소득이라는 것은 그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타고난 무지는 오랜 연구로 확인되고 증명되었다.

박학한 사람들에게는 보리 이삭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속이 비어 있는 동안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처신한다. 그러나 성숙해져서 낟알이 생기며 속이 차서 굵어지면 겸손해지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든 것을 시도하고 탐구해 본 다음, 이 학문의 더미와 사물들의 잡다한 창고 속에서 허영된 일 외에는 아무것도 단단하고 견실한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자만심을 포기하고 자신의 타고난 조건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장 현명한 인간 538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현명한 인간은 무엇을 아느냐고 누가 물어 보자,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우리가 아는 것의 최대 부분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물들의 최소 부분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모르는 것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우리는 꿈으로 사물들을 알고 있다. 실은 우리는 사물들을 모른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거의 모든 옛 사람들은 인간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의 감각은 제한되어 있고, 지성은 허약하고, 인생은 짧다고 말하였다."(키케로)


몽테뉴가 살던 시대의 고민과 고뇌 542


다른 자들이 구속받고 있는 필요성에서 자기가 면제되어 있는 것만도 장점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환상이 만들어 낸 하고많은 잘못 속에 얽혀 자기보다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있는 편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이렇게 소란스레 싸움을 거는 분열 속에 섞여드는 것보다는 확신을 갖는 일을 미뤄 두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어려운 사고방식, 난해성 546∼547

결국 이런 것은 허망한 제목을 가치 있게 보이려고 하며, 우리의 정신에 호기심으로 흥미를 돋운다. 또 우리 정신을 길러 가꿀 재료라고 내주는 것이 살점 없는 헛된 뼈다귀나 갉아먹으라고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런 어려운 사고 방식을 탐하는 것일까? 클리토마코스는 카르네아데스의 문장을 보고, 그가 무슨 의견을 가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어째서 평이한 문체를 피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까다로운 자'라는 별명을 받았던가? 난해성은 학자들이 요술쟁이처럼 그들 기술의 허황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잡술로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여기에 쉽사리 속아넘어간다.

난삽한 언어로 속물들에게 명성을 떨친다.(헤라클레이토스를 가리킴)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애매한 문구 속에
숨겨진 사상만을 애호하며 탄복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로잡힌 신세에 절망한 사람들 549

사로잡힌 신세에 절망한 사람들이 진리의 탐구에 기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연구는 그 자체가 재미나는 일이며, 너무나 재미나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들은 여러 탐락 중에서도 정신의 수련에서 오늘 탐락을 금지하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며, 너무 알고자 하는 데에도 무절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549∼550


데모크리토스는 식탁에서 꿀맛같이 단 무화과를 먹어 보고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감미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근원을 밝히려고 식탁에서 일어나 무화과를 따 온 자리의 나무 생김새가 어떤가를 보러 갔다. 그의 하녀는 이렇게 소란을 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듣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수고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무화과를 꿀그릇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탐구해 보려는 기회를 잃고 자기 호기심의 재료를 빼앗긴 것에 분개해서 "물러 가거라, 기분 나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본래 그런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끝까지 캐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잘못된 추측을 고집한 상태로 진실한 이유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에 관한 일화는, 우리가 어떤 사물의 원인을 참구하여 알아내지 못하고 절망할 때에, 그 추구해 보는 연구에 대한 정열에서 느끼는 재미의 성질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플루타르크도 이것과 같은 예를 하나 들고 있다. 어떤 자는 탐구하는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그 원인을 캐고 있는 사물이 해명되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자는 물을 마셔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의사가 그의 열병에서 오는 갈증을 치로해 주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기보다는 쓸모없는 사물이라도 배우는 편이 낫다." (세네카)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무한수 567

그대의 이성은 세상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밖에는 더 그럴듯하고 견고한 기초를 갖지 못한다.

대지·태양·달·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단일하기는커녕 반대로 무한수로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568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등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그 진리와 규칙들이 다른 우주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다른 우주들은 아마도 다른 모습과 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극히 짦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569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명인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죽음인지 누가 아는가?      (에우리피데스)

그것도 그럴듯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가 이 영원한 밤의 무한한 흐름 속의 한 섬광이며, 우리에게 영원히 계속되는 자연 조건의 극히 짧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자격을 얻을 것인가? 죽음은 이 순간의 앞과 뒤의 전부와, 이 순간 자체의 상당한 부분까지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자들은 멜리소소의 추종자들처럼 운동이라는 것은 없으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왜냐하면 이 우주가 하나밖에 없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천체의 움직임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움직임도 여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자연에는 생산도 부패도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571

······ 이 생각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더 확실하게 파악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저울대에 표어로 새겨 놓았다.


몽상과 과오의 원천 572

과거건 미래건 이 무한한 세기들은 하느님에게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선과 예지와 힘이 그의 본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지만 지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오만은 하느님의 소질을 우리의 판단으로 검사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몽상과 과오가 생기며, 자기 무게보다 동떨어진 사물들을 자기들 저울대로 달아 보려고 한다. "아주 작은 성공에 용기를 얻을 때에, 인간 심성의 오만이 저지를 일은 놀랄 정도다." (플리니우스)


대자연은 수수께끼 같은 시에 불과 583

나는 플라톤에서, 대자연은 수수께끼 같은 시에 불과하다고 말한 이 거룩한 말을 읽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치 무한히 잡다한 그릇된 빛이 서로 엇갈려 비쳐서, 우리 추측에만 맡겨 두도록 베일로 가려진 한 폭의 그림이라고도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완전한 경이 586

어째서 정신적 인상이 한 뭉치로 된 굳은 물체 속에 이렇게 길을 만들어가며, 이런 경탄할 만한 장치의 관계와 연락의 성질이 무엇인지 인간으로서는 알아본 자가 없다. "이 모든 사물들은 인간의 이성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자연(본성)의 장엄성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 플리니우스는 말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완전한 경이로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이 결합 자체가 인간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확실하다는 인상 588

확실하다는 인상은 미친 수작과 극단의 불확실함을 드러내는 확실한 징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591

 

아리스토텔레스를 잊어버리지 말자. 그는 육체를 자연스레 움직이게 하는 것을 엔텔레케이아(생명 존속)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다른 것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착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본질도 근원도 본성도 말하지 않고, 다만 그 효과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일리아드 593

만일 원자들이 우연에 의해서 여러 형상들을 지어 놓은 것이라고 하면, 어째서 그들은 집 한 채, 구두 한 켤레 만들어 놓을 수 없었던 것인가? 또 어째서 무한수의 그리스 문자를 마당에 뿌려 놓다가 《일리아드》의 원본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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