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가 쓴『노년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인은 카토라는 인물이다. 키케로가 그 책을 쓴 나이가 대략 62세 무렵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굳이 카토를 대타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키케로가 쓴 책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장로이신 마르쿠스 카토의 입을 빌리기로 했고. 장소는 카토의 저택이오. 그가 노년을 그토록 편안하게 보내는 것을 보고,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가 감탄하자 카토가 그 두 사람에게 대답한다는 설정이라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152쪽 

 




그런데 키케로는 왜 하필 수많은 노인들 가운데 굳이 카토를 자신의 작품속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을까? 분명 카토의 노년이 그 어떤 사람에 못지 않게 부러움을 살 만했고 또 숱한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임엔 의심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밖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키케로가 카토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킨 이유가 그런 표면적인 이유 말고도 최소한 두 가지 정도는 더 고려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로마인들은 선조의 업적과 영광에 기대지 않은, 소위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을 '신인(新人)'이라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문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 더 엄밀하게는 처음으로 집정관이 된 사람을 'novus homo'라고 불렀는데, 마르쿠스 카토, 일명 대(大) 카토와 키케로가 바로 자신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이 된 경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소(小) 카토 때문이다. 대(大) 카토(기원전 234∼149)와 키케로(기원전 106∼43)는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키케로는 카토의 증손자인 소(小) 카토(기원전 95~46)와는 동시대를 살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깊은 유대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로마 공화정을 끝까지 수호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더 절박한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물론 키케로가 그런 최후를 미리 알고 자신의 작품을 썼다는 얘기는 아니다. 키케로의 정치적 입장이 목숨을 함께 할 정도로 소(小) 카토와 같았다는 얘기다. 결국 키케로는 자신의 정치적 동지이자 전우였던 사람의 증조부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던 셈이다.)


카토의 입상, 19세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소(小) 카토가 주도한 원로원의 결정, 즉 갈리아에 머물던 카이사르에게 내려진 '군대 해산 후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 복귀 명령'은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카이사르의 '명언' 하나로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다. '루비콘 강'을 건너 시시각각으로 로마로 진군해 들어오던 카이사르를 막기 위해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 카토와 키케로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디라키움의 항구를 지키는 임무를 함께 맡았다. 그 전투에서 패배한 원로원파 군대는 퇴각을 거듭했고 소 카토는 결국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끝에 우티카에서 자결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지 3년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키케로는 내전 종식 후 정계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어 은퇴후 집필에 전념하는데, 『노년에 관하여』도 키케로의 다른 여러 작픔들과 함께 그 때 쓰여졌으며, 카이사르가 암살되던 때와 시기적으로 거의 겹친다. 그 작품의 집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 속에서도 '카토'가 등장한다.


 


그것은 B.C. 44년 5월 11일자로 되어 있는 키케로의 편지이다. 그 속에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암살은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경거망동이며 독재관이 살해되어도 그 뜻을 잇는 자(안토니우스)가 있지 않느냐고 분노한 뒤, 전쟁이 머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정세 속에서 노년이 점점 자신을 화를 잘 내는 노인으로 만드니 '당신에게 헌상한 《대 카토》를 더 자주 읽어야겠다.'고 쓰고 있다.

 

 - 『아우렐리우수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488쪽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공백 상태'에서 본래 카이사르파였던 안토니우스가 다시 득세하고, 카토가 죽은 뒤 원로원의 중심으로 떠오른 키케로는 '카이사르 독재를 타도한 구국적 행동을 일으킨 암살자들을 무죄로 해야 한다'며 안토니우스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키케로 자신은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를 '참주정은 살아있다. 단지 참주가 죽었을 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안토니우스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를 장식한 두 사람의 격돌은 결국 생명을 건 싸움으로 커졌다.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에게 독한 탄핵 연설을 퍼부었고, 안토니우스도 키케로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결렬'을 가져오게 한 악당으로 몰아세웠다. 이미 키케로가 주도한 '카탈리나 탄핵' 등으로 뿌리깊은 증오가 쌓여 있었던 두 사람의 대결은 결국 옥타비아누스와 손잡고 삼두정치를 출범시킨 안토니우스의 승리로 끝나고, 자신에게 추방형이 내려진 사실을 알고 피신길에 올랐던 키케로는 결국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에게 피살되고 만다.

키케로의 《필리포스 왕 탄핵연설을 모방하여》는 B.C. 4세기 중반에 아테네 최대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에게 행한 공격을 염두에 두고 붙여진 것이다. 그 연설에서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규탄하는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여, 나는 그대에게 청한다. 이번에야말로 국가의 일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대의 동료들 일이 아니고 그대의 시조들 일을 생각하라. 나에 관해서는 그대의 생각대로 하라. 그러나 국가와는 손을 잡아라. 물론 그것은 그대가 정할 일이다. 나는 나를 위해 말하겠다. 나는 젊어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나는 늙어서도 공화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 만일 나의 죽음으로 국민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고 로마 민중의 고뇌가 오랜 세월 애써 온 것을 결국 낳게 될 수만 있다면, 약 20년 전, 바로 이 신전에서 나는 '집정관의 자리에 오른 자에게 죽음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지금 나는 노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진실하게 말해야 한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에게 죽음은 바람직하기도 한 것이다. 결국 나는 도달하고 달성했다. 나는 단지 두 가지만을 소망한다. 하나는 내가 죽을 때에 로마 국민을 자유롭게 할 것. 그리고 국민 각자는 공화국에 대한 각자의 공적에 따라서 영광이 있기를. 이것이 제2의 소망이다.

 - 『아우렐리우수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419쪽 


키케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보고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한다.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아우구스투스라고 일컫고 로마의 단독 지배자가 되는데, 플루타르코스의 〈키케로 전〉은 다음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노경으로 접어든 아우구스투스는 손자가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 다가가자 손자는 놀라서 재빠르게 이 키케로의 책을 품에 숨겼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책을 빼앗아 걸으면서 다 읽고 나서 손자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는 박력 있게 말을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애국자였다.'

 

 - 『아우렐리우수 명상록/키케로 인생론』, 425쪽 


 

 

카토 얘기를 하려다가 키케로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 다음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린 〈마르쿠스 카토 전〉의 일부다. 물론 대(大) 카토의 이야기이고, 그의 '생활인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내용만 따왔다.(플루타르코스가 쓴『영웅전』원전은 무려 50인의 그리스·로마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방대한 책이다. 그 속에는 이 짧은 페이퍼에 등장하는 인물도 여럿 들어 있다. 대 카토, 소 카토, 키케로,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그들이다. 천병희 선생님이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그리스 영웅 다섯 사람과 로마 영웅 다섯 사람만 실려 있는데, 로마인 가운데 대 카토,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는 포함된 반면 소 카토와 키케로는 제외되어 아쉽다. 천병희 선생님께서 노령 때문에 번역하시는 일이 몹시 힘드시더라도 좀 더 수고하셔서 나머지 40인의 영웅들 얘기를 마저 번역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옛 로마를 대표하는 입지전적인 인물

최초의 라틴어 산문 작가인 카토(기원전 234∼149)는 사치에 물들기 전 옛 로마를 대표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검소한 생활, 꾸준한 체력 단련, 불굴의 정신력, 엄격한 도덕심,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힘입어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재정관, 조영관, 집정관을 거쳐 기원전 184년에는 감찰관으로 선출되었다. 감찰관직을 어찌나 잘 수행하였던지 '감찰관 카토(Cato Censorius)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카르타고가 제1차 포에니 전쟁 뒤에 급속히 국력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원로원 연설을 항상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말로 끝냈다고 한다.

카토는 키케로의 에세이 『노년에 관하여』에 주 화자로 등장하여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경험담을 들려주듯 젊은이들에게 인생과 노년에 관한 아름다운 비밀을 들려준다. (359쪽)

  

땅은 사되 물을 뿌리거나 비로 쓸기 위해서는 아니다.

카토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100드라크메 이상의 값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으며, 재정관이나 집정관의 임기 중에도 자신의 노예들과 똑같은 포도주를 마셨으며, 저녁 식사를 곁들일 반찬은 장터에서 구하되 30아스 이상은 초과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군무에 이바지할 체력을 강화하고자 국가를 위해 그랬다고 했다. 또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수놓은 바뷜론의 양탄자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지체 없이 내다 팔았으며, 그의 오두막 중 회반죽을 칠한 것은 한 채도 없으며, 노예 한 명을 위해 1,500드라크메를 지불한 적이 없는데, 그가 원하는 것은 섬세하고 잘 생긴 젊은이가 아니라 마부나 소 치는 목자 같은 건장한 일꾼들이며, 이들이 너무 늙어 쓸모가 없어지면 이들을 먹이느니 내다 파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체로 그는 남아도는 것은 어떤 것도 싸지 않으며, 불필요한 것은 설사 그 비용이 1아스밖에 들지 않는다 해도 비싸다고 여겼으며, 땅은 사되 씨를 뿌리고 가축 떼를 먹이기 위해서이지 물을 뿌리거나 비로 쓸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했다.  (367∼368쪽)




고결한 정신에서 유래한 것인지 옹졸한 마음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

어떤 이들은 카토가 인색해서 그러한 행위들을 한다고 여겼지만, 또 다른 이들은 카토가 그렇게 옹색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은 남들의 사치를 바루고 절제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그러한 행위들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하인들을 짐 싣는 짐승들처럼 혹사하다가 늙으면 내쫓거나 내다 파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유용성 외에는 어떤 관계도 인정하지 않는 냉혹한 성격의 특징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인정이 정의보다 범위가 더 넓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법과 정의는 그 본성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만, 선의와 자비는 마치 수량이 풍부한 샘물처럼 상냥한 마음에서 흘러넘쳐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상냥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들이 노쇠해도 보살펴 줄 것이고, 자신의 개들이 강아지 때뿐만 아니라 늙어 돌볼 필요가 있을 때도 보살펴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아테나이인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지을 때 유난히 힘들게 일하는 노새들을 눈에 띄는 족족 모두 풀어주어 아무 제약 없이 마음 놓고 풀을 뜯게 했다. 그런데 그중 한 마리가 자진해 작업장으로 내려가 마치 고무하고 격려하듯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달구지를 끌던 노새들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길라잡이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테나이인들은 그 노새를 죽을 때까지 공금으로 부양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또 올륌피아 경기에서 세 차례 우승한 키몬의 말들은 그의 무덤 옆에 묻혔다. 개들도 길러준 주인과 가까워지고 친밀한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아테나이인들이 도시를 포기했을 때 크산팁포스가 자신의 삼단노선을 따라 살라미스로 헤엄치던 애견이 죽자 지금도 '개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곶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생명 있는 것들을 신발이나 세간처럼 다루고, 다치거나 봉사하느라 피폐해졌다고 하여 팽개쳐서는 안 되며, 다른 이유가 없다면 같은 인간들에게 상냥해지는 실습을 하기 위해서라도 생명 있는 것들을 온유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나 같으면 나를 위해 일한 소가 늙었다고 팔지는 않을 것이며, 파는 사람에게 쓸모없듯 사는 사람에게도 쓸모없을 집승을 늙었다는 이유로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늘 살던 장소와 익숙한 생활 방식에서, 말하자면 고향에서 떼어놓는 짓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토는 그런 처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집정관으로서 히스파니아의 전쟁터에서 타고 다니던 군마조차도 나라에 그 운송비를 부담시키지 않으려고 그곳에 버리고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고결한 정신에서 유래한 것인지 옹졸한 마음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368∼369쪽)




* 카토가 뒤늦게 장가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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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네를 위해 좋은 사윗감을 찾아냈네.

그 자신은 건강과 체력에 관한 한 체질이 강철 같아서 오랫동안 노년의 공격에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노인이 되어서도 자주 여자를 가까이 하다가 결혼할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결국 재혼을 했다. 아내와 사별한 뒤 카토는 아들을 스키피오의 누이인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과 결혼시키고, 자신은 홀아비로 지내며 매춘부를 몰래 불러들여 동침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갓 시집온 며느리가 함께 생활하는 작은 집에서 그런 일이 발각되지 않을 리 없었다. 한 번은 매춘부가 너무나 뻔뻔스럽게 아들의 침실 옆을 성큼성큼 지나가자, 뭐라고 말은 하지 않지만 아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는 것을 아버지가 보게 되었다. 카토는 자신의 처신을 아들과 며느리가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토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함께 광장으로 내려가다 전에는 그의 서기였으나 지금은 그를 수행하는 살로니우스를 큰 소리로 부르며 딸내미를 위해 신랑감을 구했는지 물었다. 살로니우스가 그와 먼저 상의하지 않고는 그럴 의사가 없다고 대답하자, 카토는 "내가 자네를 위해 좋은 사윗감을 찾아냈네. 나이 많은 것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말일세. 다른 점에서는 조금도 나무랄 데가 없지만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일세."라고 말했다. 살로니우스는 그 자리에서 이 일을 그에게 맡기며 그가 마음에 둔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카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딸에게는 카토의 호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자 카토는 두말없이 다름 아닌 자신이 그 소녀에게 장가들고 싶다고 했다. 물론 처음에 살론니우스는 카토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카토는 재혼할 나이도 훨씬 지난 데다 집정관을 지내고 개선식을 올린 집안과 사돈이 되기에는 자신의 지체가 너무 낮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카토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리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들은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혼인 계약을 맺었다.

결혼식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카토의 아들은 몇몇 친구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가 혹시 자신의 처신이 못마땅하고 불쾌해서 억지로 계모를 집 안에 들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카토가 "얘야, 그럴 리가 있느냐! 내게 너는 전혀 나무랄 데 없는 효자다. 나는 나에게는 너 같은 아들을 더 많이 남기고, 나라에는 너 같은 시민을 더 많이 남기고 싶을 따름이다."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398∼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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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토가 여든 살에 얻은 차남의 손자인 소(小) 카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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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Uticensis, 기원전 95년 ~ 기원전 46년)은 소 카토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대 카토의 증손자이기 때문이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대적하여 로마 공화정을 수호한 것으로 유명하고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부패가 만연한 로마의 정치 상황에서 완고하고 올곧은, 청렴결백함의 상징적 인물로 유명했다.

초기의 생애


아버지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어머니는 리비아 드루사 였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외삼촌인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집에서 자랐는데 드루수스는 카토가 4살때 암살 당했다. 어린 시절부터 완고하고 강직함으로 유명하였다고 하며 술라는 어린 아이인 카토와 대화하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유산을 상속 받은 다음에 그는 삼촌의 집을 떠나 스토아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증조할아버지 대 카토처럼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춥고 비오는 날에도 최소한의 옷만 걸쳤고 꼭 필요할 때만 음식을 먹었고 시장에서 값싼 포도주만 먹었다고 하는데 충분한 유산이 있었음에도 철학적인 실천때문에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다.


기원전 72년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일개 병사로 참전했고 기원전 67년 군사호민관으로 마케도니아에서 복무했는데 그곳에서도 언제나 솔선수범하고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복무했다.

강직한 정치가


기원전 65년 로마로 돌아와
재무관이 되었고 이 때도 강직함으로 유명했는데 전임자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특히 술라 독재관 시기 악명높았던 부하를 공금횡령으로 고발하여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원로원에 진출한 카토는 한번도 회의에 빠지지 않는 성실함과 꼼꼼한 의정활동을 했고 원래는 술라의 부하들의 모임이었던 "원로원파" 를 공화정을 수호하는 정치집단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63년 이듬해의 호민관으로 당선된 그는 집정관 키케로를 도와 카틸리나 모반 사건을 해결하는 데 열중했는데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공격한 연애편지 사건의 일화는 유명하다. 카틸리나 사건이후 카토는 점점 그 세력을 키워가는 제1차 삼두정치의 주도 인물들에 대한 반대에 앞장섰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토지개혁 시도를 반대했고, 특히 카이사르가 5년임기의 갈리아 총독으로 떠나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한편 원로원파인
키케로를 실각시키는데 카토가 방해물이 되자 삼두정치파는 기원전 58년 카토를 키프로스의 총독으로 보냈다. 2년후 로마로 돌아온 카토는 계속해서 삼두정치에 반대했고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죽고 삼두정치가 위기에 처하자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와 떼어놓는 데 전념했다. 기원전 51년 카토는 집정관직에 도전했으나 청렴한 선거운동으로 당선에 실패했다.

내전과 카토의 죽음


기원전 49년 카토는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에게 완전히 쏠리도록 지원했고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원로원에서 발의하는 데 성공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의 적으로 규정되었고
루비콘 강을 넘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카이사르의 기세에 눌려 "원로원파"는 로마를 버리고 달아났고 카토는 시칠리아 방어를 맡았으나 결국 디라키움으로 도망가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기원전 48년 디라키움 공방전과 이어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토는 키케로와 함께 디라키움의 항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하자 카토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패잔병을 이끌고 아프리카에 도착해 우티카에서 세력을 규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죽고 나머지 원로원파 군대는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맞섰다. 카토는 탑수스 전투에서 우티카의 항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탑수스의 패배를 알고나서 카토는 자신의 모든 가족과 요인들을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4월 12일 카토는 오랜 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지 않고 자살을 결정했다. 그는 연회를 주최한 뒤,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스스로 배를 갈라 죽었다.

이후에 미친 영향


카토는 그 강직함과 청렴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특히 로마 공화정의 이상을 구현하는 상징처럼 전설화 되었다. 키케로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카토〉를 썼고 이에 답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안티-카토〉를 썼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제정으로 넘어간 로마시대에도 베르길리우스루카누스같은 작가들은 카토를 영웅시하고 미화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도 그의 《신곡》에서 카토를 묘사하는데 여기서 카토는 연옥의 섬을 지키는 수호자로 묘사된다. 그 밖에 계몽주의 시대의 공화정 혁명시기에 카토는 다시한번 공화정의 우상으로 역사의 각광을 받게 된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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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토의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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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의 아들 교육법

카토는 좋은 아버지였고, 상냥한 남편이었으며, 유능한 살림꾼이었다. 그는 이재(理財)에 관한 일을 결코 사소하거나 무시해도 좋은 일로 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 관련된 카토의 처신에 관해 마땅히 몇 가지 적절한 예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토는 재산보다는 집안을 보고 아내를 골랐는데, 그것은 부유한 여자들이나 집안이 좋은 여자들이나 다 같이 위엄과 자긍심이 있지만, 가문이 좋은 여자들은 원래 수치스러운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모든 일에서 남편의 뜻을 더 잘 따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나 자식을 때리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것을 폭행하는 자이며,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 위대한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보다 더 칭찬받을 만하며, 옛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괴팍한 아내와 아둔한 아들들을 늘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카토는 급한 공무가 있을 때 말고는 아내가 아기를 목욕시키고 기저귀를 채울 때,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카토의 아내는 아이에게 몸소 젖을 먹였고, 가끔은 노예들의 아이들에게도 젖을 먹였는데, 그것은 그 아이들이 자기 아들에게 우애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카토는 교사로서 많은 소년들을 가르치던 킬로라는 유식한 노예가 있는데도 손수 아들을 맡아 읽기를 가르쳤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기 아들이 이해력이 느리다고 해서 노예에게 꾸중을 듣거나 귀가 잡아당겨지기를 원치 않았고, 교육처럼 중요한 일을 노예에게 신세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토는 아들에게 읽기와 법률과 체육을 몸소 가르쳤고, 창던지기, 무장하고 싸우는 법, 말타기뿐 아니라 권투, 더위와 추위를 참고 견디는 법, 티베리스 강의 소용돌이와 급류를 헤엄쳐 건너는 법까지 가르쳤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큰 글자로 손수 로마의 역사서를 썼는데, 아들에게 집에서 선조들의 역사에 친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카토는 또 자기는 아들이 있는 앞에서는 베스타 여신의 여사제들이라고 불리는 신성한 처녀들 앞에서처럼 상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아들과는 목욕도 같이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인들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옷 벗는 것을 창피하게 여겨 장인도 사위와 함께 목욕하기를 피했으니 말이다.  (391∼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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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테뉴 수상록』에서 찾아낸 '카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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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252쪽)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

여자들은 언제나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반대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며 모든 구실을 잡습니다. 한 꼬투리라도 변명할 재료가 있으면, 그녀들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헌금을 많이 내려고 남편에게서 잔뜩 훔쳐 내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참회사에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헌금의 분배를 말대로 믿어 보세요! 어떠한 행동도 남편의 양보를 얻어서 한 것이라면 충분한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에 우아미와 권위를 세우려면, 농간을 부려서건, 무례한 수작으로건 언제나 부당하게 남편들의 권한을 빼앗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서와 같이 가련한 늙은이에 대항해서 아이들 편을 드는 경우에는, 여자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고 영광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성정(性情)을 만족시킵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아이들과 결탁해서 걸핏하면 그의 지배와 지휘에 반항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사내아이가 성장해서 기운이 차면 그들을 강제로 매수해서, 요리사·회계원, 기타의 가족들을 손아귀에 넣어 버립니다.

 아내도 자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빠지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더 잔혹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습니다. 대 카토가 말하기를 "하인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적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던 그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아직 아내와 아들과 하인의 수만큼 적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노쇠한 경우에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받는 달콤한 이득입니다. 여기에 악을 쓰며 대들어 보았댔자, 특히 재판관들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야 할 때에는 대개 젊은이들과 같은 꿍꿍이속이며, 젊은이의 편을 드는 바에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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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키케로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1-15 17:35 
    내 생각으로는 행운과 불운은 두 가지 최고의 권력이다. 인간의 예지가 운의 역할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소리이다. - 몽테뉴 * *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웅변가였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가『대비열전』에서 그의 짝으로 그리스 최고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를 붙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키케로는 데모스테네스와는 달리 뛰어난 웅변술뿐 아니라 수많은 저작을 남겨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가 쓴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
  2.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브루투스 가문의 인물들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7-07-01 19:25 
    "브루투스, 너 마저?" 이 짧은 대사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것도 드물다. 이 말은 삼척동자도 웬만큼 안다. 왜?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금세 '상황 파악'이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다가도 "아무개, 너 마저?" 라고 외칠 만한 상황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맞닥뜨렸던가. 나도 언젠가부터 저 짧은 대사를 듣고 알게 되었다. 그게 언제였는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내가 품었던 생각은 이랬다. '브루투스는 '참 나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