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20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 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고른 건 '빅히스토리'다. 신시아 브라운과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책들이 번역돼 나온 게 계기인데, '지구사 시리즈'도 같은 범주로 묶었다...

 

 

 

책&(13년 7월호) 지구 역사의 퍼즐 맞추기

 

“빅히스토리를 공부하면서 왜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이런 공부를 하지 못했는지 안타까울 정도였다. 만약 그랬다면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빅히스토리에 예찬론자 빌 게이츠의 말이다. 역사학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한 빅히스토리(Big History)는 무엇이고 이 ‘거대사’는 어째서 흥미를 끄는가. 여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이야기와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빅히스토리의 세계로 잠시 떠나보려고 한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몇 권의 책을 길잡이삼아서 떠나는 여정이다. 


빅히스토리가 어떤 것인지 적당한 규모로 간명하게 소개하는 책은 신시아 브라운의 <빅히스토리>(웅진지식하우스, 2013)다. '빅뱅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학적 창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도 과학적 작업의 한 부분인 이상, 인간이 밝혀낸 이야기를 ‘과학’과 ‘역사’로 따로 구분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배운 역사학에서는 흔히 문자의 발명과 그 기록을 기준으로 역사와 선사 시대를 구분한다. 자연스레 역사의 범위가 지난 5000여 년으로 한정되는데, 따지고 보면 이는 지구 일생의 단지 100만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빅히스토리는 역사의 범위를 기록된 문서에 얽매이지 않고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와 자료를 활용해 최대한 확장한다.


그렇게 역사의 범위가 빅뱅까지 확장되면 역사를 보는 관점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지구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과 인간의 행동이 지구에 미친 영향”이 책의 숨어 있는 근본적인 주제라고 말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역사를 아주 큰 덩어리로 보고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 속에 포함하여 다루는 빅히스토리에서도 인간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은 지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생물 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의 양적인 증가’다. 수세기에 걸쳐 인간은 인구와 기대수명을 늘리기 위해 놀라운 기술력을 발휘해왔고, 2000년에 이르러서는 61억의 인구에 도달했다. 이것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500억에서 1000억의 인간 가운데 6%-12%에 해당한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인구는 16억에서 61억으로 늘어났는데, 이러한 증가는 말 그대로 ‘지구에 대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시대에 이 실험이 의미를 공기와 삼림, 토양, 물, 방사능 등의 척도를 통해 기술한다. 빅히스토리적 시각이 갖는 특징이라 할 만하다.


빅히스토리에 대한 개관에 이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고픈 독자라면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시간의 지도>(심산, 2013)를 선택할 수 있다. 먼저 소개된 <거대사>(서해문집, 2009)는 빅히스토리(거대사)를 아주 간략하고 쉽게 풀어쓴 책으로 <시간의 지도>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호주의 매콰리대학에서 처음으로 ‘빅히스토리’란 이름의 강좌를 개설해 그 용어를 널리 알린 장본인이다. 그는 역사학도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통합 이야기’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표현을 빌리면 ‘통섭의 역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현재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데, 빅히스토리야말로 학생들에게 과학과 인문학이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대단히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한다.


빅뱅 이후 최초 30만년의 이야기로 ‘시간의 지도’를 펼쳐놓지만 저자 역시 20세기 일어난 변화가 인류 역사의 모은 이전 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인간 사회는 20세기 초기부터 생물권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인간의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 살고 있다는 증거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게 빅히스토리의 공통적인 관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빅히스토리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약 40-50억 년쯤 뒤에는 태양이 죽어가기 시작할 것이고, 아주 먼 미래에는 우주가 다시금 평형상태로 접어들면서 황폐해질 것이다. 그러한 거시적 시야에서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빅히스토리는 우리를 좀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신시아 브라운, 두 저자의 책과 함께 ‘빅히스토리’란 명칭이 국내에 소개됐지만, 아직 국내 학계에서는 ‘글로벌 히스토리’, 곧 ‘지구사’란 이름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빅히스토리처럼 빅뱅까지 포함하여 다루지는 않지만, 지구를 하나의 역사단위로 하여 전 지구적 역사를 다뤄야 한다는 관점으로 출간된 '지구사연구소 총서’(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는 이미 국내 빅히스토리 분야에서 유명하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의 <거대사>와 <시간의 지도>도 이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된 것이다. 이 새로운 세계사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논문 모음집으로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역사>(혜안, 2008)와 <지구사의 도전>(서해문집, 2010)이 출간돼 있다.

 

13.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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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철학과 이남인 교수의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한길사, 2013)이 출간됐다. <현상학과 해석학>(서울대출판부, 2004), <후설의 현상학과 현대철학>(풀빛, 2006)에 뒤이은 연구서다. 후설과 메를로퐁티 읽기 리스트는 한차례씩 만들어놓은 적이 있는데, 메를로퐁티 리스트는 다소 오래 전 것이어서 관련서를 업데이트해놓는다. 현상학 관련서를 읽은 지도 꽤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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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이남인 지음 / 한길사 / 2013년 6월
27,000원 → 24,3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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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현상학과 현대 철학
이남인 지음 / 풀빛미디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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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해석학
이남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4월
22,000원 → 22,000원(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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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와 자유- 칸트의 자유에서 메를로-퐁티의 자유로
심귀연 지음 / 그린비 / 2012년 3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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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3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탈리 샤롯의 <설계된 망각>(리더스북, 2013)을 읽고 쓴 것이다. 원제는 '낙관 편향'이지만, 망각이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임희택의 <망각의 즐거움>(한빛비즈, 2013)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주간경향(13. 07. 16) 인간은 왜 무의식적 낙관주의자일까

 

‘당신은 낙관주의자입니까?’란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렇다고 답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관주의란 말이 낙관주의의 짝으로 항상 붙어 다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낙관적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비관적이라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신경과학자 탈리 샤롯의 <설계된 망각>에 따르자면, 그러한 통념은 조정될 필요가 있다. ‘낙관 편향’이란 원제가 말해주는 건 낙관적 편향이 우리의 진화적 본성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핵심 논지는 간명하다. 첫째, 우리가 대부분 낙관적이라는 것.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뇌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 편향을 갖고 있다. 부정적인 결과를 염려할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긍정적인 결과를 따지며 보내는 시간보다 적고, 패배나 가슴앓이를 걱정할 때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 편향을 갖는가? 그건 물론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들은 더 오래 살고,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재정계획도 더 잘 짜고, 더 성공한다.” 진화과정에서 낙관주의가 선택됐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우리의 생존 확률을 높여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곧 낙관 편향의 진화는 우리의 건강과 진보의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두 번째 주장이다.

뇌과학자들이 보기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가장 큰 특징은 전두엽의 발달에 있다. 기억력과 사고력 등을 관장하는 영역이다. 이 전두엽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서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미래를 내다보고, 자기를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다. 자각 능력과 전망 능력은 생존에 이익이 되지만, 문제는 그 부작용이다. 우리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가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예견은 고통과 공포의 원인이지 결코 낙관의 근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과정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정신적 시간여행은 그릇된 믿음을 동반할 때만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긍정적 편향과 함께 발달해야 했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 종의 비범한 성취는 바로 의식적 전망과 낙관의 결합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낙관 편향이 무조건 우리에게 유리한 건 아니다. 낙관주의에도 적정선이 있으며 과격한 낙관주의는 과도한 음주처럼 우리에게 오히려 유해하다. 일례로 한 설문에서 낙관주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 것으로 생각합니까?’란 질문을 던졌다. 대개는 기대수명보다 2~3년쯤 더 길게 보았다. 이들을 이른바 ‘온건한 낙관주의자’라고 한다면 한편에는 20년쯤 과대평가한 ‘과격한 낙관주의자’도 있었다. 자기 수명을 과소평가한 ‘비관주의자’는 아주 소수였다.

이들의 행동은 어떤 차이를 보여줄까? 온건한 낙관주의자들은 더 오랜 시간 일했고, 더 나이가 든 뒤에 은퇴하길 원했으며, 더 많이 저축했고, 담배도 덜 피웠다. 반면에 과격한 낙관주의자들은 적게 일하고, 덜 저축하고, 담배는 더 많이 피웠다. 우리 앞의 장애물을 적당히 과소평가하는 온건한 낙관주의가 우리의 지배적 본성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낙관 편향은 인지적 착각이다. 우리의 낙관적 믿음은 우리가 마주치는 현실에 대한 시각을 개조한다. 이런 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인 망각까지도 설계했다. 미래에 불운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스트레스와 불안 수준을 낮추고 결과적으론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어서다.

반면 비관주의자들은 더 일찍 죽었다. 1000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50년에 걸쳐 추적 연구한 결과라나.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 혹은 착각이 심지어는 돈도 더 많이 벌게 한다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생각은 알고보면 전혀 특이할 게 없다. 우리의 본성이 그러할 따름이다.

 

13.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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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 비티의 <상호의존성이란 무엇인가>(살림, 2013)란 책이 출간됐다. '스스로를 학대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마음처방'이 부제. 얼핏 상호의존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책처럼 보이지만 소개를 보니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책이다. "저자인 멜로디 비티는 상호의존성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자신을 돌보지 않아 생긴다고 설명하며, 자기 돌보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돌보기의 방법으로 일일이 반응하지 말 것, 다 내려놓을 것, 더 이상 희생은 하지 말 것, 자립적인 태도를 가질 것, 자신의 감정을 느낄 것, 제대로 분노할 것, 당당하게 의견을 밝힐 것 등 보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곧, 남보다는 자기 자신을 돌보라는 것. 맥락은 다르지만 (상호)협력의 문제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협력에 관한 책들 가운데 바로 떠오르는 책들과 같이 리스트로 묶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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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의존성이란 무엇인가- 스스로를 학대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위한 마음처방
멜로디 비티 지음, 서민아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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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협력자- 세상을 지배하는 다섯 가지 협력의 법칙
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지음, 허준석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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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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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협력의 진화- 이기적 개인의 팃포탯 전략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이경식 옮김 / 시스테마 / 2009년 4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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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만약 이번주에 휴가를 간다면 가방에 제일 먼저 챙겨넣을 책은 <아듀 데리다>(인간사랑, 2013)다. 데리다의 죽음에 부친, 그를 추모하는 철학자들의 글모음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 등의 추모사도 포함돼 있다. 편자는 코스타 두지나.

 

 

사실 데리다 자신이 '추모사' 전문이었기에, 코스타 두지나는 서문 격의 글에서 '데리다의 추모사'를 데리다적 스타일로 해명한다. <아듀 데리다>란 번역본 제목이 예고됐을 때, 나는 데리다가 쓴 <아듀>인 줄 알았는데(레비나스를 추모하는 책이다), <아듀 데리다>(2007)가 따로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복사라도 해두었을 성싶은데, 지금 원본을 따로 찾을 수 없다(하드카바 원서는 너무 비싸서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당장 읽는다면 번역본으로만 읽어야 하는데, 다행히 번역이 좋은 편이다.

 

 

뒷표지에는 지젝이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사,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에서 한 대목이 실렸는데(아무래도 국내에선 지젝이 대세 철학자인지라) 이런 대목이다(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데리다와 내가 한 배를 타고 있음을 발견한 지금, 관계를 조정하고 때늦은 연대감을 표명할 때가 된 듯하다. 데리다의 작품들과 씨름하는 많은 페이지들을 썼고, 이제 데리다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지금이 어쩌면 데리다가 차연이라고 부른 것과 내 작품의 친연성을 지적함으로써 그에 대한 기억에 경의를 표할 때인 듯하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데리다는 해체가 과격하면 할수록 어떻게 그것이 해체의 내적 조건, 즉 정의에 대한 메시아적 약속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 강조했다.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데리다적인 신념이 대상이다.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적 원칙은 이 신념만큼은 환원 불가능하며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온갖 종류의 역설을 허용할 수 있다.

데리다와의 오랜 불화를 접고 '때늦은 연대감'을 표명하고 있는 추모사. 차연(데페랑스)으로의 복귀를 호소하는 글답게 지젝은 마지막에 데리다의 차연을 이해하지/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그답게 설명한다.

 

라캉의 말처럼 욕동의 진짜 목적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것이다.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진 어느 바보에 대한 유명한 음담패설에서 여자는 그에게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말해준다. "내 다리 사이에 이 구멍이 보이지? 그것을 여기에 넣어, 이제 깊숙이 밀어넣어, 이제 빼, 밀어넣어, 빼, 밀어넣어, 빼..." 잠깜만'하고 바보가 여자에게 물었다. "결정을 해! 넣어 아니면 빼?" 바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은 바로 미결정 그 자체, 반복되는 망설임 속에서 만족을 얻는 욕동의 구조이다. 다시 말해서 바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데리다의 차연이다.

두 철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13. 07. 07. 

 

 

 

P.S. 짐작에 지난 일년 정도 기간에 구입한 데리다 관련서들이다. 베누아 페터즈의 전기 <데리다>는 결정판 전기라 할 만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평도 좋다(놀랍게도 저자는 비평가이면서 만화작가이자 소설가이다). 데리다의 독자라면 필수 소장 아이템. 읽는 건 '휴가' 때나 가능하다는 게 문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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