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317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 2013)를 '오래 두고 읽는 책'으로 골랐다. 오래전에 구한 원서를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조만간 먼지를 털어봐야겠다. <시적 정의>는 국내에 먼저 소개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누스바움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게 해준다.

 

 

 

시사IN(13. 10. 12) 공무원이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얼마 전 지방도시에 내려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러시아문학 고전에 대한 강의를 했다. 통상 그런 연수 프로그램에는 독서의 효용이나 방법에 대한 강의가 포함되곤 하지만, 러시아문학에 대한 강의 요청은 의외였다. <죄와 벌>이나 <안나 카레니나>를 진지하게 읽는 공무원이라고 하면 좀 특이하게 생각하는 게 우리 사회의 통념 아닐까.

 

 

그런 강의의 서두에 인용했더라면 좋았을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궁리)다.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이 부제니까 더할 나위 없다. 미국의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법철학자인 저자는 ‘공적인 시’가 필요하다는 월트 휘트먼의 말에 공감하며 우리의 공적 삶에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옹호의 근거는 간명하다. 직역하면,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러한 상상력을 함양하지 않는다면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필수적인 가교를 잃게 될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카고대학의 로스쿨에서 ‘법과 문학’을 강의한 경험에 토대를 둔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주로 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을 사례로 활용한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교장선생님 그래드그라인드는 교육자이자 경제학자로서 계산만을 중요시하고 감정과 상상력 따위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문학은 인간의 복잡한 삶을 ‘도표 형식’으로 나타내려고 애쓰는 정치경제학의 적이다. ‘쓸데없는' 이야기책은 사람들은 공상에 빠뜨리고 비합리적 행동으로 내몰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경제적 합리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문학과 문학적 상상력은 무용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래드그라인드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누스바움은 이야기책이 공적 합리성 교육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이란 무엇인가. 재판관이 판결이 내리고 입법자가 법을 제정하며 행정부에서는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공간이다. 소설에서는 특이한 인물로 비치는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공리주의적 관점과 경제적 비용편익 분석이 이 공적 영역에서는 오히려 표준화돼 있다. 국책사업 대부분이 점수화된 사업타당성 조사를 통해 결정되는 게 우리의 현실 아닌가. 문학이 이런 영역에서 과연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핵심은 그래그라인드식 시각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공리주의적 계산과 경제학적 사유는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내면적 깊이, 그리고 희망, 사랑, 두려움 따위를 보지 못한다. 의미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반면에 문학, 특히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게 하고, 그들의 계획과 희망, 공포를 공유하면서 삶의 복잡한 일들을 풀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하게끔 한다. 그래그그라인드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형편없는 경제학’이라면, 소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래드그라인드식의 경제학은 ‘형편없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내가 속한 사회적 계급의 구성원만이 아닌 다른 동등한 인간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노동자들도 복잡한 사랑의 감정과 소망 그리고 풍부한 내적 세계를 가진 사려 깊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놓치는 과학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대단히 미흡하며 부적절한 과학일 수밖에 없다. 숫자와 도표로 채워진 보고서만 읽고 판단하는 대신에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읽는 공무원들을 응원한다.

 

13. 10. 09.

 

P.S.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공무원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소설을 읽어야 한다. 되도록 '저명한 작가의 문학작품'이면 더 좋겠다. 최근 뉴스기사에 따르면 문학 독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력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데이트나 입사 면접에 가기 전에 뭘 하는 게 좋을까. 체호프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의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신호에는 어떤 글을 읽는 것이 공감과 사회적 지각 능력, 감성지능을 발달시키는 데 좋은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미국 뉴욕 뉴스쿨의 심리학자들인 에마누엘레 카스타노 박사와 데이비드 키드 연구원은 18~75살의 독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각각 저명한 작가의 문학작품, 베스트셀러에 오른 대중소설, 그리고 진지한 논픽션의 일부를 읽게 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담은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지 등을 구별해내는 5개 테스트를 받도록 했다. 실험 결과 문학작품을 읽은 그룹의 점수가 다른 두 그룹에 견줘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중소설을 읽게 한 그룹은 아무것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 비슷한 점수를 기록했다. 대중소설은 주로 사람들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다루는데다 작가가 흥미로움을 더하려고 작품의 전개 과정을 특정 방향으로 통제하고 있어 독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반면에 등장인물의 삶에 대해 섬세하고 길게 탐구하는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해당 인물의 처지에 서서 생각하게 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력이 높아진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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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 북리뷰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간추렸다. 천병희 선생과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을 참고했는데, 정암학당의 플라톤전집판으로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연구서로는 양승태 교수의 <소크라테스의 앎과 잘남>(이화여대출판부, 2013)이 유익하다.

 

 

 

한겨레(13. 10. 07) 네 자신을 알라? 너의 무지를 알라!

 

고대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단연 소크라테스의 재판일 것이다. 제자 플라톤을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인 만큼 ‘바로 이 한 장면’으로 꼽아도 무리가 아니다. 아테네 시민 세 사람에 고발당해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펼친 변론을 기록한 것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어떤 죄목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는가.

말투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가 하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만 유의해 달라고 배심원단에 당부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고발에 대한 변론을 전개한다. 직접적으로 그를 법정에 서게 만든 이들이 ‘나중의 고발인들’이라면 그보다 먼저 자신을 고발한 이들은 ‘최초의 고발인들’이다. 이 최초의 고발인들은 그를 모함한 불특정 다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하늘에 있는 것들을 사색하고 지하에 있는 것들을 탐구하며 사론(邪論)을 정론(正論)으로 만든다”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아테네에서 지혜로운 자로 명성을 얻은 소크라테스이지만, 그 지혜란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앎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한 친구가 델포이의 신전에 가서 물은즉,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가 없다고 하기에,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정치가와 시인과 장인들을 찾아 나선다.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모두 지혜롭지 못했다. 단지 지혜로워 보일 뿐이었다. 그는 가장 지혜로운 자란 “지혜에 관한 한 자신이 진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깨달은 자”라는 걸 깨닫는다. 바로 소크라테스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경구는 실상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의미다. 철학이란 바로 이 무지에 대한 앎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온전히 신탁에 바쳐진 삶이다. 인간의 지혜란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게 신탁의 메시지이기에, 지혜롭다는 평판을 듣는 이라면 누구든지 찾아가서 그의 무지를 일깨워주었다. 그렇듯 신에 대한 봉사로 분주하여 소크라테스는 나라 일이나 집안일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나중의 고발인들에 따르면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그를 흉내 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바람에 죄를 덮어쓴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을 아예 믿지 않는다고까지 고발당하지만 신에 대한 봉사에서 소크라테스를 넘어설 자도 드물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인정하는 대신 다른 새로운 신들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고소는 근거가 없다.

여기까지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나름대로 전략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소크라테스도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만큼 긴 변론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사람들의 편견과 시샘 때문일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데 그런 생각이 그에게 어깃장을 놓게 만든다. 그는 배심원단을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을 향하여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여러분보다는 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한다. 심지어 아테네에는 자신의 봉사보다 더 큰 축복이 내린 적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사형에 처하는 대신에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 마땅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배심원단은 그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13. 10.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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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갓길에 우편함에서 <월간 에세이>(10월호)를 들고 왔다. 지난 여름에 '에세이'를 청탁받고 쓴 글이 이달에 실렸기 때문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대해 짧게 적은 글을 찾아서 옮겨놓는다.

 

 

 

월간 에세이(13년 10월호) 좋은 에세이, 좋은 시도

 

에세이란 말의 출처는 프랑스어 ‘엣세’다. 흔히 <수상록>으로 번역된 몽테뉴의 책 <엣세>가 내가 알기론 ‘에세이’의 기원이다. 고유명사가 장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전환됐다고 할까. ‘엣세이에’(시도하다)란 동사에 근원을 두고 있는 말이어서 내게 ‘에세이’는 뭔가를 시도한 결과물을 떠올려준다. 이 ‘시도’는 책임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내 식대로 구별하면 그게 ‘기획’과의 차이다. ‘시도’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다하지도 않는다. 주사위를 던져서 원하는 숫자가 나올 확률이라고 해도 좋겠다. 반복해서 던지면 분명 한번은 원하는 숫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개 시도는 시도 자체에서 의의를 찾는다. “좋은 시도였어!”라는 격려의 말이 보통 그런 뜻을 함축한다.


프랑스어에 기원을 두어서인지는 몰라도 에세이란 장르에서 내가 연상하는 책은 몇 권의  프랑스 책이다. 프랑스인 저자가 쓴 책들 말이다. 중학교 때 라디오방송에서 들은 몇 가지 내용이 흥미로워서 처음 구입했던 <수상록>을 제쳐놓으면 내가 읽은 에세이의 서두에 오는 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다. 짐작엔 대학 1학년 때 읽은 책이다. ‘에세이’란 말이 자주 ‘수필’이란 한국어로도 번역되지만 <시지프 신화>를 수필로 부르긴 어려울 것이다. 수필이란 말이 연상시키는 부드러움과는 전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우리말 대응어를 찾자면 이 경우 에세이는 시론(試論)에 가깝다. ‘시험 삼아 해본 주장’이라고 해야 할까.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이 시론을 철학과도 구별한다. 자신은 부조리의 감수성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지 이 책이 ‘부조리의 철학’은 아니라고 미리 일러준다. 물론 그런 철학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카뮈가 철학이란 말로 염두에 둔 것은 제대로 된 규모의 논증이 아닐까 싶다. 시론은 그러한 규모나 엄밀성에서 자유롭다.

 

사실 <시지프 신화>의 전체적인 구성이 잘 짜여 있다기보다는 적당히 구색을 맞췄다는 인상을 준다. 얼핏 체계적인 듯 보이지만 필연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체계적이기도 하다. 가령 첫 번째 파트인 ‘부조리의 추론’이 비교적 정연한 데 비하면 ‘부조리한 인간’과 ‘부조리한 창조’라는 나머지 두 파트는 엉성하다. ‘부조리한 인간’의 세 절이 각각 ‘돈후안주의’와 ‘연극’, 그리고 ‘정복’인 것은 말 그대로 부조리한 조합이다. 부조리란 테마를 부조리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하면 역설적이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 카뮈의 에세이는 시지프 신화에 대한 재해석으로 마무리된다. 카뮈는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 뭔가? 반항이다. ‘긍정’이란 이름을 가진 특이한 반항이다. 그 반항의 모델이 바로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이다. 거대한 바위를 산정까지 굴려 올리는 무용한 노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게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노동이 아니다. 카뮈의 관심을 끄는 건 정상에서 굴러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올리기 위해 터벅터벅 내려오는 시지프의 걸음이다. 잠시 동안의 휴식은 시지프에게 ‘의식의 시간’이다. 무얼 의식하는가. 자신의 노동과 그 결과 사이의 부조리이다. 이 부조리를 의식하되 긍정하고 다시금 바위에 몸을 밀착하는 것이 시지프의 반항이다.

 

그러니 시지프에게 감동적인 것은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 무용성에 대한 의식이다. 바로 그럴 때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라고 카뮈는 적었다. 나는 이 문장을 쓸 때 카뮈가 의기양양했으리라고 상상한다. 말 그대로 좋은 에세이, 좋은 시도다.

 

13.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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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번주에 나온 브룩 원렌스키 랜포드의 <에덴 추적자들>(푸른지식, 2013)이 리뷰감이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려고 했던 여러 학자, 지식인, 혁명가 등을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 광범위한 자료조사와 재기 넘치는 필체가 결합된 수준 있는 논픽션이다.

 

  

 

중앙일보(13. 09. 28) 에덴은 있다! 낙원을 향한 그들의 열망

 

이 책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이 실재한다고 믿고 찾아 나선 각양각색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책을 읽다가 에덴동산에 대한 ‘상식’은 뭔지 궁금했다. 마침 최근에 나온 크리스틴 스웬슨의 『가장 오래된 교양』이 생각나 펼쳐봤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는 에덴이 지구 어디에 있었는지는 예로부터 적잖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중 일부의 사람들은 발 벗고 찾아 나서기까지 했다. 바로 ‘에덴 추적자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GPS로 찾을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닌 이상 에덴의 위치에 대해선 정확히 알기 어렵다. 『가장 오래된 교양』의 저자는 그럼에도 “성서 본문에 있는 잘 알려진 지명들을 근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덴이 오늘의 이라크에 있었다고 믿는다.”

‘에덴 추적자들’은 그 정도 추정에는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일단 창세기의 묘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모호하다. “에덴에서 강 하나가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라며 네 강줄기의 이름으로 비손과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를 차례로 거명한다. 오늘날에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은 터키에서 시작해 이라크를 지나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문제는 오늘날엔 존재하지 않는 비손강과 기혼강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기사 이미지

 

여기서 크게 두 파가 나뉜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기혼강과 비손강도 그 근처에 있다고 믿는다. 강이 아니라 샘이나 운하가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비손강과 기혼강에 더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강 이름도 바뀌었을 것이기에 성서에 나오는 이름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본다. 창세기에 나오는 강 이름이 그저 ‘세상에서 가장 큰 네 강’을 가리킬 뿐이라는 1세기 로마시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을 좇게 되면 에덴은 반드시 중동에 있을 필요가 없다.

비손강은 갠지스강으로, 기혼강은 나일강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면, 에덴은 말 그대로 지상 어딘가에 있는 곳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심지어 에덴이 실제 장소일 수도 있고 은유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난감한 일이지만 에덴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이런 에덴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많은 흥미로운 사례 가운데 저자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보스턴대 학장이었던 윌리엄 워런을 먼저 소개한다. 1859년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충격적인 주장에 맞서고자 각오를 단단히 한다. 강연 때마다 서두에 “혹시라도 모인 사람 중에 자신을 동물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동물이 사람이 될 때까지 토론을 미루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일침을 놓던 워런도 그런 투사였다. 비교신화학을 전공했지만 진화론자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워런은 과학의 언어를 배워서 창세기의 내용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가 주장한 에덴 후보지는 북극이었다. 당시 북극은 탐험가들의 손길이 닿지 않아 아직 미지의 지역이었고 워런의 ‘에덴 북극설’은 대중의 북극 환상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1985년에 펴낸 『낙원을 찾다!』에는 북극을 중심에 놓은 고대 세계의 지도까지 수록했고 많은 독자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북극이 정복되고 북극 열병이 사그라지면서 그의 에덴 북극설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워런보다 좀더 신빙성 있는 주장을 내놓은 학자들도 물론 있었다. 『낙원을 찾다!』에 추천서를 써주기도 한 영국 옥스퍼드의 아시리아학 교수 아치볼드 세이스도 그 중 한 명이다. 어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그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에 대한 독해를 바탕으로 에덴이 ‘좋음’이란 뜻의 고대 도시 에리두 근처에 세워진 동산으로 추정했다.

플랜테이션 농장 비슷한 곳으로 농장 가운데 특별한 나무가 있었다고 하며, 세이스는 이에 근거해 성서에 나오는 지식의 나무는 소나무, 생명의 나무는 야자과식물이라고 주장했다. 기혼강과 비손강은 고대의 인공 운하였을 거라는 게 그의 견해다. 그는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있었던 재앙이며, 에덴동산 이야기도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믿었다.

에덴 찾기는 기본적으로 진화론과 과학의 도전에 맞서 신의 창조론을 방어를 위한 성격을 띤다. 1991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7%가 여전히 지구와 사람을 신께서 아주 특별하게 창조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창세기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믿음은 신앙의 지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 속에서 화해를 모색한 한 과학교사의 말은 왜 여전히 에덴이 관심사가 되고 있는지 시사해준다.

진화론을 안 믿는다는 건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는 신앙이 아이들을 망치는 게 아니라 삶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고 믿는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독자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과 함께 사색의 정원으로 인도하는 책이다. 아, 파라다이스란 말은 원래 페르시아어로 담이 둘러진 정원을 뜻한다고 한다.

 

13. 09. 28.

 

 

P.S. 에덴에 대한 가장 자세하면서도 강력한 문학적 묘사는 물론 밀턴의 <실낙원>에서 읽을 수 있다. 조신권, 이창배 교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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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끝나는 다음주 목요일부터 노원평생학습관에서 '로쟈와 만나는 고전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노원에서는 매년 한두 차례씩 강의를 맡아 많은 분들과 '구면'이 됐다('재회'가 기대된다). 일정 안내 포스터를 옮겨놓는다.

 

 

13.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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