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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27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5월임을 염두에 두고 고른 키워드가 '결혼'이었는데, 앨런 맥팔레인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나남, 2014)이 출간된 걸 계기로 관련서를 더 골라보았다. 결혼의 간략한 역사이면서 삐딱한 역사라고 할 수잔 스콰이어의 < I don't>(뿌리와이파리, 2009)부터 시작하는 걸로 잡았다.

 

 

 

책&(14년 5월호)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오월의 신부’가 되는 것은 많은 미혼 여성들이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혼생활이 달콤한 꿈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도 각자가 결혼의 손익에 대해서, 즉 결혼의 비용과 혜택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볼지도 모른다. 거슬러 올라가면 결혼의 역사 또한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굉장히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결혼의 역사를 이끌어온 동인과 쟁점은 무엇인지 몇 권의 책을 통해 짤막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가볍게 시작하기에 좋은 책은 수잔 스콰이어의 < I don’t>(뿌리와이파리, 2009)다. 제목의 ‘아뇨!(I don’t)’는 결혼서약에서 “이브, 그대는 이 남자 아담을 당신의 합법적인 남편으로 맞이하겠습니까?”라는 주례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통상 ‘예(I do!)’라고 대답함으로써 신랑과 신부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선포되지만, ‘아뇨!’라고 답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저자가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결혼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는 제목을 내건 것은 결혼의 역사를 16세기까지만 다루기 때문이다. 16세기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사랑을 중시하는 결혼관이 대세로 자리 잡은 시기다. 반면에 그 이전의 역사는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잔혹사였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창세기의 구절부터가 좀 불길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기독교적 전통에 따르면 여성은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가부장제 결혼과 정절에 대한 남성 편의적 이중 잣대, 그리고 여자를 집에 가둬놓기 등이 서양사를 관통해온 남자들의 여성 통제 전략이었다. 이러한 결혼관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트는 동지애를 가장 우선시하고 자녀출산과 정절이 그 뒤를 잇게 함으로써 결혼의 의미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고대세계에서 2000년대까지 서술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는 메릴린 옐롬의 <아내의 역사>(책과함께, 2012)에서도 16세기는 전환점으로 간주된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결혼관은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돼 17세기 청교도들이 이주하면서 미국으로 전파됐고 18세기 후반에는 중류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의 감정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지만 근대 이전에는 아내는 성적 즐거움, 자식, 양육, 요리, 가사 노동을 제공해야 했고 남편에게 신체를 학대를 받지 않으면 축복이라고 여겼다. 아내는 남편에게 봉사하고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를 때려도 좋다는 낡은 믿음은 부부가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는 결혼 형태가 확산되면서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19세기 이후로 여성의 교육과 취업 기회가 많아지고, 더불어 사회적‧정치적 참여가 빈번해지면서 남편과 아내는 좀더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예기치 않은 진전을 가져온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대공황기만 하더라도 남자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던 ‘일하는 아내’가 거꾸로 칭송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전쟁 전에는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독점했지만 전후에는 기혼자와 중년 여성이 태반을 차지했다. 경제적으로 더 이상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아내는 남편의 예속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많은 부부는 권리와 권위를 서로 공유한다. 아니 변화는 더 급속하다. 성별에 관계없는 시민결합이 결혼의 한 형태로 인정받기까지 하니까. 


지금도 결혼식장에서 통용되는 의례는 1552년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를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은 결혼과 결혼서약의 원조 국가라 할 만한데,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앨런 맥팔레인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나남, 2014)은 바로 1300년에서 1840년까지 영국의 결혼의 역사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이다. 저자는 토마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제시한 가정들을 근거로 한 결혼관을 ‘맬서스주의적 결혼체제’라고 부른다. 이러한 결혼체제의 기원과 전망까지를 포괄적으로 다룸으로써 근대의 지배적 결혼관이 어떤 가정과 계산에 의해 지탱되어 왔는지 이해하도록 해준다.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진지하게 읽어봄직하다.

 

14.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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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를 옮겨놓는다. 자유롭게 쓰는 독서 에세이인데, 이달에 고른 책은 김상준 교수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 2014)이다. 출간시에 관심도서로 올려놓았었던 책.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 2011)의 저자이기도 하다. 참고로,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의 4장 '온 나라에 굶주린 자 없도록 하라: 유교 양민론과 구민 정책'은 한국국학진흥원 기획의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유교의 힘>(글항아리, 2013)에 먼저 수록됐던 글이다. 유교에 대한 시각을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나눈다면, 저자는 강력한 긍정론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이견을 덧붙였다.

 

 

 

독서인(14년 5월호) 유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책은 제목 때문에 눈길이 가고, 또 어떤 책은 만만하다 싶은 분량 때문에 손길이 간다. 김상준의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글항아리)은 그 두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유교란 주제를 다룬 책은 적지 않기에 특별히 눈에 띌 건 아니지만 ‘정치적 무의식’은 호기심을 갖게 한다. 저자도 적고 있듯이 “미국의 문예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명한 문화비평서의 제목”이어서다. 정확하게는 ‘문학비평서’라고 해야겠다. 발자크와 기싱, 콘라드 같은 서구의 정전 작가들을 견본으로 삼아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접목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그에 견줄 만한 이론과 해석을 제시한 책이라면 지적 자극으로는 충분하다. 게다가 분량이 상대적으로 얇은 책이라서 독서의 부담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의 전작 <맹자의 땀 성왕의 피>(아카넷)를 나처럼 모셔두고만 있는 독자라면 ‘후기’이자 ‘입문’ 격이 될 수 있는 이런 속편이 나름 유용하지 않겠는가.


책을 읽기 전에 미래 해본 계산이 그랬다면, 읽은 뒤의 정산은 반타작이다. 일단 제목은 제임슨의 책에서 따왔지만 저자는 “제임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다. 그가 유교의 정치적 무의식으로 지목하는 것은 “비판성, 윤리성, 민주, 민생, 문명화, 여성화라는 기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들이 오늘날 문명 재편의 시기에 여전히 유효한 현재적 가치임을 웅변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제임슨이 시도한 것과 같은,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빠져 있어서 좀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맹자의 땀 성왕의 피>을 읽어보려는 독자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돼주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두껍다는 불평도 들었다는 전작에 비하면 훨씬 얇은 분량이고 한결 자유로운 기분으로 썼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내용까지 가볍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주의도 저자는 잊지 않는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유교에 대한 재인식과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유교를 교양이나 상식 수준에서 대강 알고 넘어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전례 없이 커졌다. 특히 사회과학적인 유교 이해가 긴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것은 그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저자는 유교의 비판성과 윤리성을 우리가 재발견하고 재평가해야 할 핵심 덕목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유교가 뭡니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주어질 법한데, 저자는 <맹자의 땀과 성왕의 피> 서두에서 미리 그에 대한 답을 마련해놓았다. 한마디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것이다. <예기>를 출전으로 하고 있는 이 말은 “인간문명, 천하의 모든 일은 공(公)의 실현을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공(公)은 요즘말로 공공성이요 정의라고 저자는 덧붙인다. 이 ‘천하위공’에 짝이 되는 것이 ‘우환(憂患)’ 의식인데, 천하위공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갖게 되는 근심, 혹은 윤리적 고통이 우환 의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맹(孔孟)의 마음이었으며, 이러한 마음가짐은 ‘인류사 보편적인 윤리정신’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유교 이해다.


얼핏 유교 예찬론으로 분류됨직한데, 자연스레 갖게 되는 의문은 저자가 유교를 너무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맹의 마음’을 하나의 제도와 종교로서의 유교와 곧바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이 유교 역시 두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고, 여기에 항의하며 맞서 싸우는 유교도 있었다. 이 둘을 날카롭게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은 저자에게도 향한다. ‘천하위공의 유교’가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도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폭압과 약탈의 구조를 합리화하는 유교’는 진정한 유교가 아니라 사이비 유교라고 배제할 게 아니라면, 유교의 두 얼굴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 못지않게 그 두 얼굴 사이의 깊은 연관성도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례를 들자면, 저자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에서 북한의 권력 ‘3대 세습’을 ‘유교적’이라고 보는 항간의 속설에 대해 비판하면서 “왕위는 세습이 아니라 선양(禪讓)에 의해 전승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맹의 유교원론(原論)”이라는 근거를 댄다. 이를 그대로 수용하면,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개창한 조선왕조는 선양이 아닌 세습 왕조였기에 유교원론에 따른 ‘유교국가’가 아니었다는 게 된다. 군주가 바로 국가였던 왕조시대에 국가를 매섭게 비판하고 엄하게 다스리는 역할을 유교가 담당했다지만, 그러한 유교정치의 주역인 사(士) 계급을 저자는 ‘국가 부르주아’라고도 부른다. 알다시피 군주와 국가 부르주아는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공생관계였다. 저자가 지적하듯 국가 부르주아로서 유자들의 한계는 국가-정치라는 틀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유교의 현재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에 앞서 이러한 한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더 우선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14. 05.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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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열린책들, 2011)를 읽고 적었다.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현재는 번역본이 한 종밖에 나와 있지 않다. 영어본도 절판된 상황이어서 구해본 건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대역본인데, 발췌본이다. 열린책들판 번역에 아쉬운 대목이 있어서 전혜린 번역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백만사, 1980)도 도서관에서 빌려 참고했다. 전혜린본은 동민문화사(1967)판이 최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14. 04. 21) 폐허 속 희망을 본 하인리히 뵐
 
전후 독일문학의 양심으로도 불린 하인리히 뵐의 초기 대표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를 읽었다. 어떤 독자에게는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친숙할지 모르겠다. 전혜린은 뵐의 작품을 유고 번역으로 남겨놓았기에 인연이 없지 않다. 법과대학에 재학중이던 전혜린이 ‘새로운 땅’ 독일로 유학을 떠난 해가 1955년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떠난 독일에서 전후문학의 기수가 쓴 ‘폐허문학’과 조우한 것이라고 할까. 
 
1952년이 시간적 배경이지만 2차 대전 패전국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고 주인공 프레드와 캐테 보그너 부부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무엇보다도 가난이 일상을 짓누르며 이웃의 편견이 고통을 배가시킨다. 가톨릭교회의 유력한 신자이자 주택위원회 회장이기도 한 집주인 프랑케 부인이 프레드가 술주정뱅이이고 캐테가 성당의 단체 행사에 적극 참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부부의 주택 신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사정은 더 나빠졌다. 
 
프레드는 성당의 전화교환수로 일하지만 박봉이어서 부업으로 과외까지 병행한다. 그는 폭력을 본능적으로 혐오하지만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 마음이 여유를 잃다 보니 사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손찌검까지 한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두 달째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아이들과 남은 캐테의 일상은 더러움과의 투쟁으로 채워진다. 장롱을 조금만 움직여도 회칠한 벽에서는 석회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지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질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구역질나는 현실 속에서 ‘신’이라는 단어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여기는 캐테야말로 진정한 신자다. 캐테는 프랑케 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장사’를 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한 집에 살지 않으므로 프레드와 캐테는 가끔씩 바깥에서 만나 밤을 보낸다. 값싼 호텔에라도 하룻밤 묵으려면 프레드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주말에 아내는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다. 가난은 그렇게 부부의 사랑까지 파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작가 뵐은 냉정한 현실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길도 제시한다. 
 
상이군인인 아버지, 바보 동생과 같이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간이식당의 소녀에게서 프레드가 감동을 받았다고 하자 캐테는 자신도 그런 감동을 준 적이 있는지 묻는다.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열린책들) 오래전 전혜린의 번역본에서는 “당신은 내 심장을 건드리질 않고 뒤집어엎어 버렸어. 나는 그때 아주 병이 나 있었어, 그 때문에.”라고 옮긴 대목이다.
 
프레드의 나이가 썩 젊지 않았던 때였음에도 캐테는 프레드의 마음을 뒤집어엎은 전력이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면서 가난에 무뎌진 프레드의 열정은 다시 회복된다. 이튿날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과 흥분을 느끼며 뒤쫓아 가는 게 그 증거다. 한데 놀랍게도 그 여자는 아내 캐테였다. “15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이 소설이 프레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뵐이 암울한 폐허 속에서 발견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14. 04. 20.
 
P.S. 인용한 대목에 대해 좀더 자세히 적으면 보그너 부부의 대화장면을 열린책들판은 이렇게 옮겼다. 

"나도 당신 마음을 감동시킨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 그리 젊지 않을 때였고." 나는 말했다.(191쪽)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대역판은 이렇게 옮긴 대목이다. 

"Did I also touch your heart?"
"You didn't touch my heart, you turned it upside down. It made me quite ill at the time. I wasn't young any more," I said.
"나도 당신을 감동시켰어요?"
"당신은 날 감동시킨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발칵 뒤집어 놓았었지. 그래서 그때 난 아주 앓았었지. 이미 젊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말했다. 

이 대목만큼은 시사영어사판 혹은 영어판이 열린책들판보다 더 적합한 번역으로 보인다. 오래전 전혜린본에서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옮긴 것과도 상응하고. 독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요는 '마음을 감동시키다'보다 더 강한 표현이어야 하고, 그 결과로 프레드가 한바탕 가슴앓이를 했다는 내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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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문화진흥원에서 펴내는 월간 책&(426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로쟈의 주제별 도서 소개' 꼭지가 '인문학 서재'로 바뀌었고, 이달의 주제로는 '한국문화 바라보기'를 골랐다. 세 권의 관련서를 간단히 소개한다(덧붙이자면, 한국식 재난대응 문화를 다룬 책도 나옴직하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인 것도 '문화'라면 말이다).

 

 

 

책&(14년 4월호) 한국인이 한국문화를 모른다?

 

한국인이 한국문화를 모른다? 물론 그렇게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는 여럿 있을 것이다. 친숙하기에 그냥 지나치거나 막연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신감이 주의를 소홀하게 만든다. 거기에다 습관적인 망각도 우리의 무지에 일조한다.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인물과사상사, 2014)를 계기로 우리가 놓치거나 간과한 우리문화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일러주는 몇 권의 책을 책장에서 빼내보았다. 


먼저, <우리도 몰랐던 우리 문화>는 ‘화장실의 역사’부터 ‘립스틱의 역사’까지 아홉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얼핏 사소해 보이는 주제들이지만 우리 근‧현대 문화사 속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일례로 화장실을 보자. 전통적인 뒷간 혹은 변소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건 1920년대였다고 한다. 일제가 조선의 화장실을 개혁 대상으로 꼽았기 때문이다. 위생을 명목으로 재래식 화장실을 개량하고 요강을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단기간에 개량될 일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역 공용변소의 분뇨와 악취 문제가 단골기사로 등장할 만큼 화장실 문제는 오랜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1950년대 말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화장실문화도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수세식 화장실은 아직 일반 대중이 넘겨다보기 어려운 호사였고 공중화장실 문화는 여전히 낙후돼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1980년대에 ‘화장실 혁명’이 일어난다. 정부의 지원과 압력 하에 전국의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개량된다.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인데, 한국의 도시화와 공업화 과정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진전이 도시 가정 내의 화장실 보급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한국 문화 교육 전문인’을 자처하는 정수현‧정경조의 <손맛으로 보는 한국인의 문화>(삼인, 2014)는 한국인의 의식주에 관련한 다양한 소재를 한국과 동서양 여러 나라의 문화와 비교하는 관점에서 기술한 책이다. “한국인의 생활상을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이야기이자, 한국과 한국인이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는데, 특히 한국 식생활에 대한 비교서술은 이러한 길잡이로서 맞춤하다. 가령 ‘김치 vs. 샐러드’나 국 vs. 수프’ 같은 대비는 우리 식생활 문화의 특징을 단번에 압축한다.


가령 국물을 영어로는 주로 ‘수프(soup)’라고 옮기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국과 수프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음식이다. 국(혹은 탕)은 그 자체가 주 메뉴이지만 수프는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제공되는 부수적 음식이다. 조선시대 이후 문헌에 나오는 음식 종류에 구이류가 123가지인데 비해 국류는 204가지나 될 정도로 한국 음식엔 국이 많다. 왜 이렇게 국을 많이 먹을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주식인 밥이 빡빡하지 않게 잘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둘째는 가난한 하층민이 국으로 배를 채움으로써 적은 밥으로도 포만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이며, 셋째는 온돌이 발달한 나라에서 온돌에서 남는 열을 이용하다 보니 국물 음식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은 문화적으로 단순한 먹을거리 이상의 의미도 함축한다. 국은 밥, 반찬과 함께 먹는 음식이기에 ‘관계론적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식전 에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식후 디저트를 각각 따로 먹는 서양음식은 ‘개체론적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물 음식의 특징은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나눠먹는다는 데 있고, 이것은 집단의 동질성을 좀더 중요시하는 문화에 상응한다. 우리 식탁에서 국물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 근대 문학‧문화 연구자인 권창규의 <상품의 시대>(민음사, 2014)는 출세, 교양, 건강, 섹스, 애국 등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서 한국 소비사회의 기원을 들여다본 책이다. 처음으로 상품이 유입돼 소비문화가 형성되던 일제 식민지 시기를 그 기원으로 본다. 저자는 주로 신문이나 잡지 기사와 광고 전단지를 자료로 활용하면서 한국인이 소비자와 교양인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일례로, 처음 만난 이성 남녀가 서로의 취미를 물어보는 것도 한국식 문화라면 그 기원은 192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부터야 취미나 취향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스포츠는 ‘취미 위생’에 속했고, 영화나 연극에 대한 취미는 ‘연예 취미’로 불렸으며, 문학에 대한 관심은 ‘문예 취미’로 일컬어졌다.


문화인 혹은 교양인이란 ‘취미가 있는 사람’과 동의어였기에 취미에 대한 질문은 수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취미는 독서입니다”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교양 있는 가정이라면 음악 감상을 권유받았기에 1930년대에 보급된 유성기나 1960년대 초의 전축은 중산층 가정의 지표였다. 1930년대 한 일본축음기의 광고 문구에는 축음기가 ‘가정 단란’과 ‘웃음꽃이 핀 가정’을 선물한다고 했다. 상품은 바뀌고 문구는 조금 달라졌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소비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만들어져왔다.

 

14.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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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5월 14일부터 6월 18일까지 마포평생학습관에서 '청춘의 고전'이란 타이틀로 강의를 진행한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읽는 작품들을 일부러 골랐고, 우리 고전으론 <춘향전>을 다룬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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