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수정 공지다. 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베스트셀러 세계문학 읽기'(http://gajangjari.net/?p=4540) 일정이 한 주 순연되면서 4주 강의로 조정됐다(홈페이지에서도 수정 공지가 다시 나갈 예정이다. 강의는 9월 23일부터 10월 14일까지 4주간 진행되며 구체적 일정은 아래와 같다(순서도 약간 바뀌었다).

 

1강 9월 23일_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3강 9월 30일_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3강 10월 07일_ 파울로 코엘료 <불륜>

 

 

4강 10월 14일_ 요나스 요나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14.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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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31호에 실은 '키워드로 읽는 인문학 서재' 꼭지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키워드는 '공유지식'으로 골랐다. 좀 딱딱한 주제이긴 하지만 오늘날 지식의 성격과 그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측면이다. 각기 다른 관점에서 지식 공유와 공유지식의 문제를 다룬 책 두 권을 골랐다. 참고로 <지식의 공유>의 공편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재 문제를 다룬 연구로 200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여성 경제학자이다.

 

 

책&(14년 9월호) 지식을 바꾸는 공유지식

 

지식에 대한 가장 흔한 이미지는 습득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지식은 배우고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습득한 지식을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눠서 함께 가진다. 지식을 전달하고 전수하며 공유한다. 지식이 자원이라면 그것은 가장 대표적인‘ 공유자원’이기도 하다. 이달에는 두 권의 책을 길잡이로 삼아서 이 공유자원으로서 지식이 어떤 문제들을 품고 있으며, 지식 공유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먼저 엘리너 오스트롬과 샬럿 헤스가 엮은 <지식의 공유>(타임북스, 2010)는 ‘공유자원으로서의 학술연구’에 대한 학술회의 발표문을 모은 것으로 지식 공유에 관한 다양한 쟁점들을 망라하고 있다. 편자들은 지식을 공유자원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공유자원으로서 정보와 지식을 연구하려는 시도 자체가 아직 유아 단계에 놓여 있다고 할 정도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1995년경에 ‘정보 공유자원’ 운동이 시작됐다고 하니까 채 20년이 되지 않는다. 갑작스런 시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짐작대로 정보의 디지털화이다.


공유자원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이 공유하는 자원을 가리킨다. 공유자원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모델을 제시한 이는 생물학자 개릿 하딘인데, 그의 연구(1968)는 흔히 ‘공유지의 비극’이란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마을의 초지를 공유하는 농부들이 자기 이익만을 챙기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소떼들을 초지에 풀어놓는다고 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초지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결과적으로는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여 공멸을 자초하고 마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이다. 즉 공유자원은 자유롭게 이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회에서 “파멸은 모든 인간이 달려가는 최종 목적지다.”


하지만 하딘의 주장이 큰 영향을 미치긴 했어도 그의 주장과는 달리 공동체가 자율적인 이용 규칙과 바람직한 분쟁 해결 장치 등을 마련한다면 공유자원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지속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도 많다. 게다가 지식은 초지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자원이다. 토지나 수자원에 대한 ‘오픈 액세스(Open Access)’, 곧 제한 없는 접근은 과잉소비와 고갈을 초래할 수 있지만 지식과 정보는 통상 비경쟁적이다. 정보 생태계에 대한 오픈 액세스는 저작권과 양립가능하다. 오히려 정보에 대한 오픈 액세스는 부정적 결과를 유발하는 대신에 보편적인 공유재를 제공한다.“ 인터넷이 인간에게 공유정신을 형성시키고 함양시켜줌에 따라 공유자원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물론 디지털 정보기술의 세계가 장밋빛 가능성만 제시하는 건 아니다.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방대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한편으론 지적재삭권법, 특허의 남발, 과잉가격 책정, 정보 삭제 등의 정보에 대한 접근 차단도 가속화되고 있다. 확실한 재산권이 보장되지 않아도 문제지만, 공공영역의 지식에 대한 개인의 지배권이 지나치게 커지는 현상도 우려의 대상이다. 따라서 지식 공유자원의 중요성이 점점 더 증대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형태의 지식 창조에 기여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인정하고 지지해줄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다.


공유지 혹은 공유자원이 어째서 중요한가. 왜냐하면 그것이 민주주의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공간의 공유, 지식의 공유는 민주주의 사회발전의 기본 토대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지식 공유자원을 보호하는 특별 영역으로서 도서관은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데 든든한 성채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는 당연히 도서관 사서들의 몫이 컸다. 하지만 바야흐로 전면적인 디지털 정보화 시대에는 지식 공유자원의 보호와 관리가 도서관 사서들의 몫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정보 사용자와 제공자가 이 공유자원의 관리자이자 보호자로 나서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식의 공유>가 ‘공유자원으로서의 지식’이라는 문제 지형의 전체적인 그림을 갖게끔 해준다면, 한국계 미국인 정치학자 마이클 최의 <사람들은 어떻게 광장에 모이는 것일까?>(후마니타스, 2014)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공유 지식의 문제를 다룬다.‘ 게임으로 본 조정 문제와 공유지식’이 부제. 저자는 ‘공유 지식’을 좀 더 제한적인 의미로 쓰는데, 그에 따르면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고,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음을 알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안다는 데 대해 모든 사람이 아는 등과 같이 연쇄가 이루어진 경우”가 공유 지식이다. 즉 공유 지식이란 다른 사람이 안다는 데 대한 앎으로서 일종의 ‘메타지식’이다.


이 메타지식으로서 공유 지식은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선택하는 의사소통 방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저자가 들고 있는 한 가지 예시로 이메일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메일 수신자 외에 참조와 숨은 참조를 덧붙일 수 있는데, 참조일 경우 각각의 수신자는 주소창에서 함께 받는 이들의 이름과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숨은 참조일 경우에는 알 수가 없다. 동일한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숨은 참조는 이 메시지가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된다는 공유 지식이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차이를 낳는가. 저자는 공유 지식을 각 개인이 서로의 행동을 조정하는 ‘조정 문제’와 연관시킨다. 예를 들어, 반정부 시위에 나선다고 해보자. 개인이 시위대의 수가 충분해서 경찰이 구속하거나 억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만 시위에 참여하려는 경향을 갖는다면, 그러한 참여 결정을 내리는데 참여 권유의 메시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다른 사람도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는 데 대한 인지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곧 참여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인지에 대한 인지, 다른 사람의 인지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인지에 대한 인지” 등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유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공유 지식을 창출하는 사회적 과정들이 마련된다. 공식 행사나 집회 같은 ‘공공 의례’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저자는 이것을 “공유 지식을 산출하는 사회적 실천”이라고 이해한다.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이나 공공 의례뿐 아니라 광고 역시 공유 지식을 전제하며 이용한다. 시청률이 높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광고 단가가 더 높은 것은 단지 더 많은 시청자들에게 광고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다른 시청자들도 내가 아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소비자는 자기가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을 구입한다고 하지만, 그 물건을 다른 소비자도 사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온 책들이 더 많이 팔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공유 지식의 효과다.


짐작할 수 있지만, 공유 지식이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느 호텔 객실에 들어갔다가 벌거벗은 여성 투숙객을 본 호텔의 남자 직원이 깜짝 놀라서 (남성에게 쓰는 존칭을 사용해)“ 실례합니다, 고객님”이라고 외쳤다면, 그의 위장은 의도적으로 공유지식을 회피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유 지식은 비밀의 반대말이다. 저자는 공유 지식이라는 개념이 문화 현상 전반에 걸쳐서 얼마나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으며 이 현상들을 어떻게 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공유 지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14.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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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 칼럼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과학분야의 화제작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 2014)를 읽고 적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인지라 궁금한 대목들만 우선 읽었다. 올해의 과학서의 하나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독서인(14년 9월) 우리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왔는가’란 부제로 흥미를 끄는 책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라는 평판에 걸맞게 깊이 있는 교양과학서들을 저술해온 저자에 대한 신뢰가 한편에 있고, 본문만 12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을 폭력이란 단일 주제에 할애한 저작의 무게감이 흥미의 또 다른 배경이다.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간명하게 핵심 요지를 간추려주고 있는 서문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책 한권을 읽은 효과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무엇이 핵심 요지인가. 핑커는 인류 역사의 기나긴 세월 동안 “폭력이 감소해왔고, 어쩌면 현재 우리는 종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편다. 그 자신이 예견하고, 또 실제로 독자들 대부분의 반응이 그렇듯이 못 믿을 얘기다. 폭력은 인류 역사의 모든 갈피마다 만연했던 듯 보이고, 세계대전의 그림자에서 겨우 벗어난 듯 보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 없는 평화’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설사 전쟁과 같은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손 치더라도 대량살상무기의 발달로 인하여 사소한 충돌조차도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게다가 핵전쟁의 공포로부터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폭력의 경향적 감소’는 선뜻 와 닿지 않는 주장이다.


하지만 핑커의 주장이 분명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것이 입증될 수만 있다면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장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폭력의 역사적 궤적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뿐만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폭력의 추이 앞에 플러스 부호가 붙느냐 마이너스 부호가 붙느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직결된다. 만약 폭력의 추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인간의 파괴적 본성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구제책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돼먹은 존재라는 인식만 확인하면 된다. 한술 더 떠서 플러스 부호가 붙는다면, 상황은 설상가상이다. 폭력적 본성이 갈수록 격화하는 만큼 강제적인 억지력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역사가 파국적 결말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가 된다. 반면에 마이너스 부호가 붙는다면, 그래서 폭력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역사가 전개돼왔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폭력이 사라진 더 나은 미래를 예견해볼 수 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은 다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전망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과연 적절한 근거로 뒷받침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핑커가 제시하는 건 과학자답게 아름다운 문학적 공상이나 멋진 철학적 통찰이 아니라 ‘숫자’다.


많은 데이터에서 입수한 숫자들과 이를 표현한 그래프를 통해서 핑커가 발견한 사실은 온갖 차원에서 진행된 ‘폭력 감소 현상’이고 이것이 뚜렷한 경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책의 많은 분량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는데, 가장 궁금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답변부터 확인해보자. 그건 20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 ‘최악의 세기’였다는 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과했던 20세기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핑커는 그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두 가지 이유에서 심지어 ‘망상’에 가깝다고 말한다. 첫째는 분명 20세기에 폭력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엄청났지만 20세기의 인구 자체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현재와 가까운 시대일수록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빚어지는 ‘역사적 근시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지난 세기들에 벌어진 전쟁들보다 최근 세기들에 벌어진 전쟁을 더 많이 기억하고 이에 대해서 가중치를 부여한다.

 


20세기 인구 폭발을 고려하고 역사적 근시안으로 인한 편향을 바로잡는다면 ‘인간이 서로에게 행한 나쁜 짓 중 최악의 21가지’ 목록 순위는 우리의 예상과는 좀 다르게 나타난다. 단순하게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하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은 5500만 명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이다. 뒤이어 마오쩌둥 시대 중국정부가 야기한 대기근이 폭력적인 참사로 기록되는데, 이로 인해 4000만 명이 아사한 걸로 추정된다. 그밖에 스탈린의 대숙청이나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내전, 중국 내전 등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이 ‘최악의 21가지’ 목록에 포함된다. 하지만 인구비를 고려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지금은 70억을 웃돌고 있지만 1950년의 세계 인구가 25억 명이었고, 이것은 1800년의 약2.5배, 1600년의 4.5배, 1300년의 7배, 기원후 1년의 15배에 해당한다. 역사적 사건들의 피해를 동등하게 비교하려면 이러한 인구비에 따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즉 1600년의 전쟁과 20세기 중반의 전쟁을 비교하려면 1600년의 사망자 수에 4.5를 곱해야 한다는 것이 핑커의 환산법이다.


이러한 조정을 거치게 되면 20세기의 잔악행위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만이 ‘상위 10건’에 들어간다. 뜻밖에도 역사상 최악의 참사는 8세기 당나라에서 8년 동안 벌어졌던 안녹산의 난과 그로 인한 내전이다. 당시 중국의 총 인구의 3분의 2가 희생됐고, 그것은 당시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20세기 중반의 인구로 조정하면 무려 4억 2900만이 희생된 사건이다. 주동자인 안녹산과 그의 부장 사사명의 이름을 따서 ‘안사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중국 전역이 초토화되고 번영을 구가하던 당나라 왕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도 결정적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안녹산의 난에 뒤이어서는 13세기 몽골의 정복이 조정된 수치로 2억 7800만의 사망자를 낳아 최악의 사건 2위를 차지하며,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중동의 노예무역이 7-19세기에 1억 3200만 명을 희생시켜 3위에 랭크된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구와 역사적 근시안을 조정할 경우 20세기가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는 주장은 지지되기 어렵다는 점. 그럼에도 우리가 폭력의 감소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 착시와 함께 더 높아진 도덕적 기준 때문이기도 하다. 폭력과 싸워오면서 폭력의 범위 또한 확장해온 것이 문명의 역사이고 도덕의 역사가 아니던가. 거꾸로 그렇게 높아진 기준은 다시 폭력을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듯싶고, 이것은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여전히 ‘가장 폭력적인 시대’로 느끼게끔 한다. 핑커의 주장대로 “우리가 오늘날 이런 평화를 누리는 까닭은 옛 세대들이 당대의 폭력에 진저리치면서 그것을 줄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핑커는 남은 폭력을 더 줄이기 위해서 폭력의 역사적 감소에 대한 깨우침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칫 폭력에 대한 관용을 가져올 수 있는 그런 깨우침보다는 모든 폭력에 대한 끝없는 진저리침이 아닐까 싶다.

 

14.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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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6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사월의책, 2014)을 읽고 적었다. 가토 슈이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일본 문화의 시간과 공간> 등의 저작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시사IN(14. 08. 30) 책 읽지 않는 법 알려주는 '독서법'

 

독서의 방법 혹은 기술에 관한 책을 종종 읽는 편이다. 독서에 관한 독서가 되는 셈인데, 혹 별다른 게 있을까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독서법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적당한 대답을 마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토 슈이치의 독서만능>(사월의책)에 눈길이 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원제는 ‘독서술’이니까 독서 고수인 저자가 말 그대로 독서의 기술을 전수하고자 한 책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임을 확인하게 해줄 만큼 책들이 소개된 건 아니지만 가토 슈이치는 <일본문학사 서설>과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대담집 <번역과 일본 근대> 등의 저서를 통해 우리와는 구면인 저자다. 거기에 덧붙여 1962년 첫 출간 이후 저자의 최대 베스트셀러로서 30년이 지난 1992년에 이와나미판으로 재출간되기까지 한, 일본의 대표 독서술이라고 하니까 독서의 동기로는 충분하다. 어떤 ‘노하우’를 일러주는가.


일단 책에 대한 두 가지 핵심 질문에 대한 정리부터. ‘어떤 책을 읽어야 좋을까’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저자는 어떤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할 것인가에 대해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듯이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란 문제에도 일반론이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프러포즈에 온갖 수단과 방법이 있는 것처럼 어떻게 읽을 것인가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방법을 제시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온 저자가 독서술에 대해 몇 마디 거들게 된 근거다.


느리게 읽는 ‘정독술’과 빨리 읽는 ‘속독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독서법이다. 책에 따라 느리게 읽기와 빨리 읽기를 적절하게 선택하거나 병행해야 한다는 조언까지는 새로울 게 없다. 저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건 ‘책을 읽지 않는 독서술’과 ‘외국어 책을 읽는 독해술’을 말하는 대목에서다. ‘책을 읽지 않는 법’이 ‘책을 읽는 법’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사실 너무 많은 책이 있는 반면에 읽을 시간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100권 가운데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머지 99권의 책을 읽지 않아야 가능하다. 목적에 맞는 특정한 책을 고른 다음에는 나머지 책을 깨끗이 무시하는 게 ‘책을 읽지 않는 법’의 핵심이다.


물론 안 읽는다고 해서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서평이나 초록이 책의 내용을 대강 알아보려고 할 때 도움이 된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서평문화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는 ‘지적 스노비즘’도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적 스노비즘은 “어차피 나는 바보니까”라는 ‘어차피 바보이즘’의 반대다. 미국에서 위세를 떨쳤던 매카시즘도 ‘어차피 바보이즘’을 정치적으로 동원한 결과라는 저자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는 스노비즘이 아니라 바보이즘이다. 게다가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하다 보면 정말로 읽어볼 기회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외국어 책을 어떻게 읽을까’라는 문제를 다루는 시각도 흥미롭다. 외국어를 한두 개 정도 꽤 잘 하면서도 외국어 책을 읽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독자들을 위한 조언이다. 원칙은 간명하다. 필요한 책을 읽으라는 것과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는 것이다. 가령 핵무기 금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핵무기에 반대하는 러셀의 에세이를 빅토리아 시대 영국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게 더 흥미로운 건 자신에게 더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어려운 책을 대하는 저자의 자세도 배워둘 만하다. 그에 따르면 어려운 책 가운데 문장 자체에 문제가 있다거나 저자가 횡설수설하는 책은 ‘읽을 필요가 없는 책’으로 일단 제쳐놓아야 한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책은 언어와 경험의 부족에서 비롯되므로 단어의 개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과 경험의 축적이 필요하다. 이 또한 절실한 필요가 뒷받침된다면 넘기 어려운 장애물은 아니다. 독서 고수의 명쾌한 단언은 이렇다. “요컨대 나에게 어려운 책은 불량한 책이거나 불필요한 책이거나 둘 중 하나다.”

 

14. 0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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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8월에 한달을 쉰 푸른역사아카데미 문학강의로 9월과 10월에 '로쟈와 함께 읽는 남미문학'을 진행한다(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185). 남미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노벨상 수상자이며, 생전에 라이벌로 불렸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두 작가의 작품을 세 편씩 골라 읽을 예정이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9월 15일_ 마르케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2강 9월 22일_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3강 9월 29일_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4강 10월 06일_ 요사, <새엄마 찬양>

 

 

5강 10월 13일_ 요사,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6강 10월 20일_요사, <염소의 축제>

 

 

 

14.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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