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독서인'에 실은 독서카페 칼럼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과학분야의 화제작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 2014)를 읽고 적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인지라 궁금한 대목들만 우선 읽었다. 올해의 과학서의 하나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독서인(14년 9월) 우리는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왔는가’란 부제로 흥미를 끄는 책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라는 평판에 걸맞게 깊이 있는 교양과학서들을 저술해온 저자에 대한 신뢰가 한편에 있고, 본문만 12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을 폭력이란 단일 주제에 할애한 저작의 무게감이 흥미의 또 다른 배경이다.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간명하게 핵심 요지를 간추려주고 있는 서문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책 한권을 읽은 효과는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무엇이 핵심 요지인가. 핑커는 인류 역사의 기나긴 세월 동안 “폭력이 감소해왔고, 어쩌면 현재 우리는 종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편다. 그 자신이 예견하고, 또 실제로 독자들 대부분의 반응이 그렇듯이 못 믿을 얘기다. 폭력은 인류 역사의 모든 갈피마다 만연했던 듯 보이고, 세계대전의 그림자에서 겨우 벗어난 듯 보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 없는 평화’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설사 전쟁과 같은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손 치더라도 대량살상무기의 발달로 인하여 사소한 충돌조차도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게다가 핵전쟁의 공포로부터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폭력의 경향적 감소’는 선뜻 와 닿지 않는 주장이다.


하지만 핑커의 주장이 분명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것이 입증될 수만 있다면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장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낙관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폭력의 역사적 궤적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뿐만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즉 폭력의 추이 앞에 플러스 부호가 붙느냐 마이너스 부호가 붙느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직결된다. 만약 폭력의 추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인간의 파괴적 본성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구제책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돼먹은 존재라는 인식만 확인하면 된다. 한술 더 떠서 플러스 부호가 붙는다면, 상황은 설상가상이다. 폭력적 본성이 갈수록 격화하는 만큼 강제적인 억지력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역사가 파국적 결말에 이르는 건 시간문제가 된다. 반면에 마이너스 부호가 붙는다면, 그래서 폭력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인류의 역사가 전개돼왔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폭력이 사라진 더 나은 미래를 예견해볼 수 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은 다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전망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과연 적절한 근거로 뒷받침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핑커가 제시하는 건 과학자답게 아름다운 문학적 공상이나 멋진 철학적 통찰이 아니라 ‘숫자’다.


많은 데이터에서 입수한 숫자들과 이를 표현한 그래프를 통해서 핑커가 발견한 사실은 온갖 차원에서 진행된 ‘폭력 감소 현상’이고 이것이 뚜렷한 경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책의 많은 분량이 이러한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는데, 가장 궁금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답변부터 확인해보자. 그건 20세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 ‘최악의 세기’였다는 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과했던 20세기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다. 하지만 핑커는 그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두 가지 이유에서 심지어 ‘망상’에 가깝다고 말한다. 첫째는 분명 20세기에 폭력으로 인한 희생자 수가 엄청났지만 20세기의 인구 자체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현재와 가까운 시대일수록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빚어지는 ‘역사적 근시안’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지난 세기들에 벌어진 전쟁들보다 최근 세기들에 벌어진 전쟁을 더 많이 기억하고 이에 대해서 가중치를 부여한다.

 


20세기 인구 폭발을 고려하고 역사적 근시안으로 인한 편향을 바로잡는다면 ‘인간이 서로에게 행한 나쁜 짓 중 최악의 21가지’ 목록 순위는 우리의 예상과는 좀 다르게 나타난다. 단순하게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하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은 5500만 명이 희생된 제2차 세계대전이다. 뒤이어 마오쩌둥 시대 중국정부가 야기한 대기근이 폭력적인 참사로 기록되는데, 이로 인해 4000만 명이 아사한 걸로 추정된다. 그밖에 스탈린의 대숙청이나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내전, 중국 내전 등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이 ‘최악의 21가지’ 목록에 포함된다. 하지만 인구비를 고려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지금은 70억을 웃돌고 있지만 1950년의 세계 인구가 25억 명이었고, 이것은 1800년의 약2.5배, 1600년의 4.5배, 1300년의 7배, 기원후 1년의 15배에 해당한다. 역사적 사건들의 피해를 동등하게 비교하려면 이러한 인구비에 따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즉 1600년의 전쟁과 20세기 중반의 전쟁을 비교하려면 1600년의 사망자 수에 4.5를 곱해야 한다는 것이 핑커의 환산법이다.


이러한 조정을 거치게 되면 20세기의 잔악행위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만이 ‘상위 10건’에 들어간다. 뜻밖에도 역사상 최악의 참사는 8세기 당나라에서 8년 동안 벌어졌던 안녹산의 난과 그로 인한 내전이다. 당시 중국의 총 인구의 3분의 2가 희생됐고, 그것은 당시 세계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20세기 중반의 인구로 조정하면 무려 4억 2900만이 희생된 사건이다. 주동자인 안녹산과 그의 부장 사사명의 이름을 따서 ‘안사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반란으로 인하여 중국 전역이 초토화되고 번영을 구가하던 당나라 왕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도 결정적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안녹산의 난에 뒤이어서는 13세기 몽골의 정복이 조정된 수치로 2억 7800만의 사망자를 낳아 최악의 사건 2위를 차지하며,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중동의 노예무역이 7-19세기에 1억 3200만 명을 희생시켜 3위에 랭크된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구와 역사적 근시안을 조정할 경우 20세기가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는 주장은 지지되기 어렵다는 점. 그럼에도 우리가 폭력의 감소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 착시와 함께 더 높아진 도덕적 기준 때문이기도 하다. 폭력과 싸워오면서 폭력의 범위 또한 확장해온 것이 문명의 역사이고 도덕의 역사가 아니던가. 거꾸로 그렇게 높아진 기준은 다시 폭력을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듯싶고, 이것은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여전히 ‘가장 폭력적인 시대’로 느끼게끔 한다. 핑커의 주장대로 “우리가 오늘날 이런 평화를 누리는 까닭은 옛 세대들이 당대의 폭력에 진저리치면서 그것을 줄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핑커는 남은 폭력을 더 줄이기 위해서 폭력의 역사적 감소에 대한 깨우침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칫 폭력에 대한 관용을 가져올 수 있는 그런 깨우침보다는 모든 폭력에 대한 끝없는 진저리침이 아닐까 싶다.

 

14. 09.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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