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배제하라? 문예지 신인상 심사에서 '노티'나는 작가들은 암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기사를 읽고 '소설가의 나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서 '시인의 나이'는 고려되지 않는데, 상업적인 계산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소설가의 나이이지 시인의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관련기사는 이렇다. 

북데일리(06. 09. 13) 문예지 신인상 아줌마는 배제? 작가의 주장 파문

“문예지 신인상을 심사할 때 편집위원 혹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아줌마를 배제하라’라는 규율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단 무조건 아줌마 냄새가 나는 작품은 제외시킨다. 요즘은 신인상 공모 공고에 대놓고 ‘우리는 젊은 작가를 원한다’라고 주를 달아놓는 문예지도 있단다. 그럼 젊지 않은 작가는 아예 응모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한겨레출판. 2006)로 제1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조영아가 문예지 신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시사 주간지 한겨레21(제626호)을 통해서다. 조영아는 “수준이 고만고만한 몇 작품을 뽑아놓고 일일이 전화로 나이를 확인한 다음 연락이 없다. 그중에 나이 제일 어린 누군가가 다시 연락을 받는 행운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모를 준비할 때면 아줌마 티가 나는 작품은 일찌감치 제쳐둔다. 뛰어나게 잘 쓰지 않은 이상 뽑히기 어렵다는 지론에서다”라고 덧붙였다.

-문학상 심사에 나이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일반인들로선 의외로 받아질 대목(*하지만 얼마간은 '상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특히 수천 만원의 상금을 내건 신인상들의 경우, 잡지나 출판사에선 '본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고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이'를 한 가지 변수로 고려하는 것이다. 기사에서 이 '돈'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일단 조영아가 민감할 수 있는 문제를 거론한 것은 젊은 작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문학판의 풍토를 지적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깊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조만간 문학상 공모에 나이 제한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많고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아줌마 티가 난다는 이유로 심사 대상에서 일찌감치 제외된다는 것은 창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나라를 떠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

-올해는 유독 신춘문예, 문학상에서 나이든 늦깎이 신인들의 출현이 돋보였다. 오래 묵혀 온 문학에의 열정과, 탄탄한 습작 과정을 통해 등단한 실력 있는 신인들에게 ‘나이’란 문제조차 되지 않는 납득할 수 없는 잣대다. 따라서 만약 신인상에 그같은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신인상에 거액의 상금만 내걸지 않으면 된다. 혹은 수상작가가 상금을 거절하든가. 그것도 아니면 독자가 작가의 나이와 무관하게 책을 좀 사주든가).

-조영아 역시 나이 마흔에 등단한 아줌마 작가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른 넘어 시작한 부단한 글쓰기의 수련과정을 공개 한 바 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결혼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면서도 늘 ‘글밭’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 살림을 이끌어야 하는 주부에게 창작의 여유를 부릴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 시키고 고시원에 출퇴근하며 이를 악물고 글을 썼다.

-동화는 물론 단편, 중편 습작을 거듭했으나 등단은 쉽지 않았다. 각종 신춘문예와 각종 문학상에 도전했지만 최종심에만 오를 뿐 수상은 하지 못한 것. 그러나 창작을 향한 그의 투지는 쉽게 사그라질 만큼 약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잠든 때를 틈타 밤잠까지 줄여 가며 매일 10시간 이상 글을 쓰며 갈고 닦은 열성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다. 조영아의 이번 칼럼은 그의 이같은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번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 드러났듯이 실제로 잘 쓰는 아줌마 작가들, 혹은 나이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하며 "`우리도 한 때는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아줌마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라고 일갈했다.

-그의 이번 주장은 고시원, 공공 도서관의 좁은 칸막이에 갇혀 등단에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전국의 늦깎이 습작생들에게 띄우는 격려이자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문예지 신인상을 향한 시의적절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기사는 최근에 번역돼 나온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을 떠올리게 했는데, 지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상을 수상한 그의 소설 <짧은 뱀>(문학세계사, 2006)이 그가 76세에 쓴 처녀소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작가 부슈롱은 프랑스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다. 항공 산업에서 시작해 텍사스 주의 테제베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산업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사전 습작의 경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4년, 76세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짧은 뱀>으로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작가의 나이를 불문하는 걸 보면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도 공쿠르 상처럼 상금이 얼마되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려나 부슈롱의 '노익장'은 가령 미셸 투르니에처럼 40대에 데뷔하는 늦깎이 작가들조차도 젊어 보이게 만든다.

소개에 따르면 <짧은 뱀>은 "정교한 고증학적 지식과 잔혹한 상상력이 결합된 종교적 모험 이야기. 14세기 말 북극지대에서 펼쳐지는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작가 베르나르 뒤 부슈롱이 76세에 쓴 생애 첫 소설로, 200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다. 야만의 지옥에서 타락의 길을 걷는 북방동토(누벨툴레)의 기독교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출발한 원정대. 그들이 '짧은 뱀'이라는 선박 한 척에 의지하여 빙산과 폭설로 고립된 혹한의 섬을 찾아가는 과정이 일인칭 시점의 보고서 형식으로 기술된다." 나이로 보아 '긴 여정'을 남겨놓지 않은 작가의 데뷔작이지만, '굵은 여정'의 시발점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늦깎이 작가 박완서(1931- ) 선생의 단편문학전집이 전 6권으로 문학동네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1999년 출간된 전집을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선보이는 개정판"으로 "초판에는 빠져 있던 199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던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추가하여, 총 여섯 권으로 구성했"으며 "1971년 3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발표된 박완서의 단편소설들을 총망라했으며, 각각의 작품은 발표시기 순으로 나누어 실었다"고 한다.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경력이 올해로 서른 여섯 해이다(그간의 업적으로 몇달 전 작가는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설가로서 나이보다 중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태도, 혹은 각오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나이를 핑계삼는 문단/출판계 일각의 '계산'은 속좁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혹 그러한 계산이 요즘 한국문학의 독자들을 점점 말라붙게 한 것은 아닌가?). 문학의 신이시여, 그들의 소갈머리를 어찌해야 하옵니까?..

06. 09. 16-17.

 

 

 

 

P.S. 마흔도 멀지 않은 요즘 같아선 나도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와 폴 오스터/크누트 함순의 <굶기의 예술>을 (다시) 읽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그들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강퍅해야 하며 굶주려야 하는가를 증언해주고 있으니까(기름기 좀 들어간 작가들은 다른 종의 소설가들이다). 하긴 네가 지금 배부른 처지냐고 하면 대답이 사뭇 궁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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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9-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로 나이를 확인'하다니. 참 잔머리라고 해야할지 나름의 고심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국외자가 보기에는 그저 '꼴깝'으로만 보이네요.

로쟈 2006-09-1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일이든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면 좀 추해지지요...

니브리티 2006-09-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소설이라... 로카드님도 전에 소설 쓰신다고 조금 올리신 적이 있는데.. 이번 문예중앙 시인들의 대담코너에서 이런 말들이 오가더군요..좀 다른 의미에서 동의하는 말이긴 한데, <장르는 운명이다>

로쟈 2006-09-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는 묘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시켜 준 작가가 쿤데라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하면서 저도 언젠가는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지젝 스타일의 책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도 갖고 있어서 어느 것이 실현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뛰어넘는 게 또한 게으른 일상인지라...

다크아이즈 2006-09-27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묘사적 강박을 주입시키는 경로들(각종 신춘문예나 메이저급 문학 잡지)을 극복하는 게 우선이겠지요. 지겹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나저나 '참을 수 없는~' 말고 쿤데라의 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권만 권해주세요.

로쟈 2006-09-2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쿤데라의 모든 소설이 그런 건데요... 소위 에세이적 소설, 성찰적 소설 류라고...

다크아이즈 2006-09-28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소설을 묘사와 산문적 성찰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거군요. 저는 묘사와 서술(이야기)로 구분할 때 우리 소설은 지나치게 묘사에 올인한다는 뜻이었어요.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자와 일반독자의 차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또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양파와 문첸가 하는 제목으로 김훈에 대해 언급한 것 읽은 적 있는데(아직 카테고리 성격을 파악 못해 다시 찾아 읽으려니 못 찾겠어요.) 로쟈님 말씀으로는 김훈은 소설가보다 에세이스트로서 탁월하다, 뭐 이렇게 읽혔거든요. 그건 문체만 얘기할 때 그렇다는 것인지요? 즉, 쿤데라 소설이 묘사보다는 성찰이 우선한다는 전제를 두고 볼 때 김훈은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요? 그 미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문체만으로는 '쿤데라적 소설가'(제가 지은 말)가 되기에는 어림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김훈의 문체를 부러워하지만, 소설이나 에세이 두 편 정도만 읽어도 김훈적 문체가 너무 드러나는 바람에 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 질문의 요지는 김훈의 문체로는 쿤데라적 성찰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인가요? 왜냐면 김훈 보고는 에세이스트가 어울린다고 하고 쿤데라는 그 에세이적 성찰 때문에 뛰어난(?) 소설가라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지금 생각난 건데 김훈은 감각(감성)적 에세이스트, 쿤데라는 철학적 에세이스트, 고로 철학적 에세이스트가 더 소설가에 합당하다, 뭐 이렇게 해석해도 되나요? 아휴, 골치 아파, 제 미흡한 독해를 해독해주세요. 요즘 로쟈님 서재 훔쳐보느라 미치도록 즐거워요. 그나 저나 언제 이 보물들을 완독할 수 있을지...

로쟈 2006-09-2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을 간추리면 김훈의 에세이가 쿤데라의 에세이적 소설과 뭐가 다른가쯤 될까요? 저는 쿤데라를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그가 비평적 에세이들도 썼지만). 그는 작가, 곧 소설가이지요. 거꾸로 저는 김훈을 소설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좀 과도한 주장이지요. 하지만, 그가 아직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점에 기대에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들은 독백적이며 제겐 김훈 자신의 복화술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3인칭의 시점으로는 세계를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게 에세이스트의 운명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바흐친에 기대어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대화적이고 대화적이어야 하지요. 다른 말, 다른 의식, 다른 이데올로기의 간섭과 혼종이 소설의 규정항입니다. 얘기가 너무 거창해지는군요.^^

다크아이즈 2006-09-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수 잘 했습니다. 에세이스트와 에세이적 소설이 이렇게 다른 거군요. 혼자 씨불이느냐,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상충이 있느냐에 따라... 왜 김훈의 소설(문장)이 빛나긴 했지만 지겨웠는지 감이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