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조회수를 보고 예상한 바이지만, 오늘로써 이서재에 10만명이 다녀갔다. 돌이켜보니 지난 2003년 11월 21일에 '나의 서재'에 최초로 페이퍼를 올린 듯하다. 그러니까 2년 9개월 가량이 지났고, 그간에 '즐찾'은 오늘 현재 777명이 되었다. 특별한 감회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숫자들이 잠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쨌거나 이런 흔적들을 남기게 되었다니 그간의 처신이 깔끔했다고는 볼 수 없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래전에 써두고 재작년에 인용해두었던 시를 한번 더 호출한다. 그리고 그때 적어두었던 몇 마디까지. 시는 '중세의 가을'이란 제목. 그리고 사이사이 이미지는 모두 아브라멘코라는 러시아 화가의 그림들이다. 

oil abstract landscape painting In Mexico

나는 흔한 일들의 구세주, 아주 흔한 일들에 파묻혀
나는 이 흔해 빠진 일들을 밥 먹듯이 구원하리라!

acrylic cityscape painting Landscape with Sun

나는 천성이 좀 게으른 편이어서(나보다 게으른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로맨스도 귀찮아 하고 여행도 즐기지 않는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돈이 없다는 것이지만(나는 ‘돈 없는’ 오블로모프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그런 거지?”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여행을 안 좋아하시나봐요?” “제가 좀 게을러서요.” 대신에,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들’로서의 일상이다. 일상을 좋아한다는 말은 “숨쉬는 걸 좋아해”란 말처럼 어폐가 있으므로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숨쉬는 건 중요해.”
 
oil winter landscape painting Little Cypress

흔한 일들로서의 일상이란 건 물론 숨쉬는 걸 포함해서 밥 먹는 것, 걸어다니는 것, 뛰어다니는 것, 신문보는 것, 책보는 것(이게 나의 변변찮은 직업이다), TV뉴스를 보는 것, 잠자는 것, 꿈에서 군대에 또 가거나 수학시험을 보거나 간혹 날아다니는 것 등등이다. 아이가 하루하루 분유를 먹으면서 자라나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한 일상들로 채워지며 쑥쑥 성장해 왔으며, 앞으로는 그와 같은 속도로 쪼그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흔한 일들’이란 우리의 DNA에 새겨진 일들이다(내가 생물학을 좋아하는 이유인바, 생물학은 내가 철이 들어서야 ‘발견한’ 학문이다). 나는 이 ‘흔해 빠진 일들’을 간과하는 어떠한 슬로건이나 이론도 신뢰하지 않는다. ‘흔한 아픔’에 대한 시.
 
acrylic figurative art painting Loo 1

정육점에 팔려간 날 그녀의 엉덩이는
흉악한 세월처럼 울었다 울음이 지워진 자리에
환한 햇빛이 찾아와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마른침을 뱉으며 구두끈을 다시 묶었다

흔한 아픔이 있다
정육점에는 정육점 창고에는
이골이 난 갈비들이 쇠갈고리에 매달려
지난 생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오, 죽음이 무거운 게 아니리!)

정육점에 팔려간 날 그녀의 푸짐한 엉덩이는
예언자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오죽 울렸으나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다
정육점은 고기값을 흥정할 따름이다

정육점에 팔려가고 또 팔려간다
정육점은 돈을 벌고 도로를 닦고 공장을 짓고 대학을 세우고 노래를 부른다
정육점은 공화국을 바꾸고 정육점은 21세기를 준비한다
정육점에 팔려간 모든 엉덩이를 생각하며 나는 우는 시늉을 했다
곧 마른침을 뱉으며 다시 구두끈을 묶었다

acrylic abstract art painting Metaphysical Room

'정육점에서'란 시인데, "흉악한 세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혹은 내가 그나마 일상적으로 하는 일은 ‘우는 시늉’을 하며 ‘구두끈’을 다시 묶는 일 정도이다. “정육점에 팔려간 모든 엉덩이”는 나를 슬프게 하고 애닯게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마른 침’을 뱉는 것 정도이다. 나는 게으르며 더불어 좀스럽다. 그래서 부끄럽다. 나는 일진이 나쁜 것인가? 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어쩌면 근사한 일이 생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7-7-7이면 나쁜 일진도 아니잖은가?..
 
oil still life painting Flowers and a Seashell
 
여하튼 나로선 이 흔해빠진 일들에 대한 연민을 주체할 수 없다. 턱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걷잡을 수 없다. 구제 불능이다!..
 
06. 0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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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8-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염치없이 옹달샘에 와서 물만 먹고 갑니다.^^

마노아 2006-08-3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수서재군요. 네번째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인상적이네요. 님의 시도 좋습니다. 특히 첫번째 시와 그 설명이요. ^^

2006-08-31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06-08-31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엔 '바토스'가 있어요.(나는 '바토스'를 파토스와 (낭만적) 아이러니의 결합으로 보는데요.) 그래서 좋았는데, 왜 시 쓰기를 그만 두셨나요? 하긴 나도 진작에 그랬어야 했는데.... ;;;--

로쟈 2006-08-3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iYi님/ 감사합니다...(물은 셀프입니다.^^)
마노아님/ '장수'서재가 되나요? 이제 세살배기인데.^^
**님/ 제가 넒은 세상에 일조하고 있군요.^^
푸른괭이님/ 마흔이 넘으면 다시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이네파벨 2006-08-3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시와 그림과 글....
숙연해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06-08-3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일레스 2006-08-3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만 히트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로쟈님 스스로에겐 '자조'이자 '자족'일지 모르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글을 부탁드립니다.

philocinema 2006-08-3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님의 글이 제 삶에 많은 보탬이 되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감상할 수 있기를...

로쟈 2006-08-3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감사합니다. 제가 지옥에 가진 않겠네요.^^
risper3님/ 군대에 계시다면 좀더 '선정적인' 사이트들을 둘러보심이(물론 저도 간혹 포르노를 보여드리긴 하지만)...

hikrad 2006-09-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만 히트가 '흔한 일'은 아니지요^^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6-09-0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흔한 '일상'의 축적이 흔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