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소식지 <출판문화>(546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데, 이달에 화제로 삼은 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물음이고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을 길잡이로 삼았다. 프롤로그('왜 읽는가?')와 1부의 1장까지 따라가본 게 됐다.     

출판문화(11년 5월호)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란 질문에 대해 ‘책읽는 세상’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다. 그게 “어떤 자전거를 타야 할까요?”란 질문과 마찬가지이며, 자전거를 탈 줄 알고 타는 걸 즐길 줄 안다면 ‘아무거나’ 골라잡아 타면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 독서력을 갖춘 다음이라면 아무 책이나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독서목록이 아니라 독서력이라고. 그렇다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은 어떤가. 이 또한 “자전거를 왜 타는가?” 혹은 “산에 왜 오르는가?”란 질문과 같은 성격의 것일까? 그래서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둘러대는 것이 우문현답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책이 있으니까? 과연 그렇게 대답할 수 있을까?   

잠시 미국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견해를 참조해보도록 한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잘 읽는 유일한 방법은 없지만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란 책을 통해서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은 이미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 2008)와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을 통해서도 ‘우리는 지혜를 갈망하기에 독서하고 사색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피력한 바 있으니 낯선 견해는 아니다.    

책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주장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블룸의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책이 지혜를 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무 책’이나 읽어서는 곤란하다. 적어도 블룸에 따르면 그렇다. 그래서 그가 권유하는 책은 소위 정전(正典)들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서구의 정전>과 <셰익스피어: 인간의 발명> 등을 펴낸 바 있는 블룸은 성서와 소크라테스에서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거쳐 헤밍웨이와 포크너에 이르는 정전 혹은 문학적 천재들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결코 만만한 지혜는 아니다.  

지혜와 함께 블룸은 독서의 이유를 자아의 확장에서 찾는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또한 그의 주장이다. 국내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영향을 받은 예일학파의 일원으로 처음 알려졌지만, 악명 높은 ‘해체비평’의 일반적인 구호와는 달리 블룸에게 ‘작가’나 ‘자아’는 해체불가능하다. 오히려 ‘작가의 죽음’이나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주장이 우리가 독서를 통해서 몰아내야 할 유령이라고 그는 말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신념과 무관하게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때문에 블룸은 독서의 원칙 가운데 하나로 “독서를 통해 자신의 이웃이나 주위 사람을 개선하려고 시도하자 말라”고 권고한다. 그가 보기에 독서의 즐거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이기적인 것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삶이 직접적으로 향상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또 개인의 상상력이 성장하는 것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증가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다. “홀로 행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공익과 연관 짓는 모든 주장에 대해 그가 불편해하는 이유다. 독서는 순전히 개별적인 독자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즐거움이 없다면 독서는 와해될 것이며 자아 또한 해체되고 말 것이라는 게 블룸의 염려다.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지혜를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경험이다. 블룸은 이 독서의 즐거움이 대학의 엄숙주의와 도덕주의 때문에 평가 절하돼왔다고 말한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즐거움의 미학이라는 깊은 의미에서 즐거운 일로 가르치는 일이 드물다.” 게다가 이 즐거움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 단순한 즐거움이 아닌 이 고차원의 즐거움이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숭고함의 경험이다. 그렇다, 블룸이 권유하는 독서는 숭고한 독서이다. 요컨대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숭고함을 경험하며, 그것은 ‘사랑에 빠진다’고 할 때의 위태로운 초월의 경험을 제외하면 “우리가 세속에서 경험하는 유일한 초월의 경험”이다. 고전들에 대한 블룸의 비평은 이 특별한 경험으로의 초대장이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은 단편소설과 시, 장편소설과 희곡 등의 작품들에 대해서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는지에 대해 가르쳐주고자 하는 책이다. 독서란 무엇인지 일종의 시범을 보여준다고 할까. 단편소설부터 시작해서 그는 시, 장편소설, 그리고 희곡에 대한 읽기를 차례로 선보인다. 그의 독서 여정에 들어서면서 내가 독자로서 품은 기대는 두 가지였다. 한편으론 작품을 읽어내는 그의 솜씨, 곧 ‘독서기술’이 궁금했고, 다른 한편으론 그 독서기술이 전수될 수 있는 여건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지 궁금했다.   

개인적으론 대학 안팎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블룸의 단편소설 감상이 두 명의 러시아 작가에 대한 읽기로 시작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단편소설이란 장르의 여정을 투르게네프에서 체호프를 거쳐 헤밍웨이에 이르는 길로 파악한다. 그래서 가장 먼저 거론하는 것이 투르게네프의 단편집 <사냥꾼의 수기>(1852)다. 발표된 지 한 세기 반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놀라우리만치 신선하며 섬뜩하리만큼 아름답다는 평이다. 스물다섯 편의 단편 가운데 특정 작품을 고르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블룸은 <베진 초원>과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 두 편이 자신의 베스트라고 말한다.   

<베진 초원>은 일반적으로도 <가수들>과 함께 <사냥꾼의 수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어떤 내용인가. 화자인 사냥꾼(투르게네프)이 7월 아침에 들꿩 사냥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어느 초원에서 노숙하게 되는데,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농부 소년들과 만난다. 일곱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소년들이 서로 주고받는 도깨비 얘기, 귀신 얘기 등을 그는 엿듣는다. 그중 파블루샤란 아이가 똑똑하고 호감이 가는 소년이다. 잠이 들었다가 동틀 무렵에 일어나니 파블루샤만 깨어나 사냥꾼을 바라본다. 화자는 집으로 향하며 초원의 아름다운 아침을 묘사한다. 그리고 말미에 슬픈 소식을 덧붙인다. <베진의 들판>이라고 옮겨진 우리말 번역에서 인용하면 이렇다. “슬픈 이야기지만 여기에 덧붙여 알려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파블루샤가 그 해에 죽은 것이다. 그는 물에 빠진 것이 아니라 말에서 떨어진 것이다. 참 훌륭한 아이였는데 아까운 일이다.”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블룸은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을 더 잘 알기 위해, 운명에 대해 상처받기 쉬운 우리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투르게네프의 솜씨와 이야기꾼으로서의 표면적인 무관심을 미학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소품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아이러니는 운명의 아이러니다. 파블루샤처럼 가장 호감이 가는 아이도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는 것이 운명이다. 이 운명은 초원의 풍경과 소년들과 사냥꾼과 마찬가지로 무구하다. 투르게네프는 아무런 도덕적 판단도 보태지 않고 베진 초원을 벗어난 어떠한 시점도 이야기에 개입시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블룸은 투르게네프가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작가라고 말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최고의 재능을 필요로 하며, 그런 재능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흡사하다는 게 블룸의 견해다.  

작품집에서 <베진 초원>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한 난쟁이 이야기다. 사냥꾼 투르게네프는 50세가량의 이 불가사의한 인물과의 짧은 만남을 들려준다. 돈강 유역의 ‘아름다운 땅’을 빼앗기고 떠도는 늙은 난쟁이 카시안은 나이팅게일을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일을 한다. ‘벼룩’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자신이 읽고 쓸 줄 알며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특별한 능력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족이 없다고 하지만 숲에서 갑자기 등장한 소녀가 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정체는 그냥 수수께끼로 남으며 투르게네프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에 대해 더 말하지 않는다. 결국 카시안은 자기만의 세계에, 농노의 러시아가 아닌 러시아판 성서적 세계에 남게 된다. 블룸의 감상은 이렇다.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을 읽으며 우리는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카시안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보상은 잠시나마 대안 현실의 세계에 들어서도록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짧은 분량이긴 하지만, 블룸은 명불허전의 솜씨로 이 단편들의 미학적 성취와 지혜를 요약해낸다. 덕분에 오래전 학부시절에 읽은 작품들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새로운 감상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건 현재 <사냥꾼의 수기>의 완역본을 우리말로는 읽어볼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의 한권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은 <끄라씨바야 메치의 까시얀>으로 번역됐다). 그마나 현재 유통 중인 몇 안 되는 번역본은 보통 원작의 1/3 가량만 수록하고 있는 발췌본이다. 미국의 노예해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돼 있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새롭게 번역․출간되고 있는 것과 달리, 훨씬 더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고 있으면서 러시아 농노해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은 우리에게 ‘부재하는’ 작품이다. 비단 투르게네프만이 아니다.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 읽어나가다 보면, 장편소설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런 빈곤한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고로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에 “책이 있으니까”라고 답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어려운 즐거움’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실감하게 된다.  

11. 05.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베진의 들판>은 <귀족의 보금자리>(신원문화사)에 수록돼 있다. 이 책에는 <사냥일기>라는 제목으로 8편의 단편이 번역돼 있다. <사냥꾼의 수기> 완역 단행본이 현재로선 없는 셈이다. 한편, "독서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이 쉽지 않은 즐거움, 곧 ‘어려운 즐거움(difficult pleasure)’ 혹은 ‘즐거운 어려움(pleasurable difficulty)’에 대한 갈망이다."란 대목에서 대구로 적은 ‘어려운 즐거움’과 ‘즐거운 어려움'을 <해럴드 블룸의 독서일기>에서는 '쉽지 않은 즐거움'과 '즐거움을 주는 난제'라고 옮겼다. 나로선 대구 관계를 살려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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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5-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냥꾼의 수기>는 예전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16번에 <부자> <첫사랑>과 함께 실려있었는데 요즘은 안 나오나요?

로쟈 2011-05-19 22:41   좋아요 0 | URL
절판된 지 이미 오래인데요.^^ 그리고 <부자>와 같이 실렸으면 완역본이 아닙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0 18:33   좋아요 0 | URL
사냥꾼의 수기에는 다섯개의 단편이 들어있네요.더 많은 편수로 되어 있나 보군요.

로쟈 2011-05-21 15:41   좋아요 0 | URL
25편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1 15:50   좋아요 0 | URL
다 읽고 싶어요.분량이 대단하군요.

미지 2011-05-20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게네프로부터도 단절된 타자의 모습"... 찡합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해석이에요...

雨香 2011-05-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왜 읽나? 나이가 들면서 계속 드는 질문입니다.
학생때는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세우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 둘 아빠에 40이 얼마 안 남고, 회사에서의 위치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서의 책 읽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가 몇 년 전부터 저를 괴롭혀온 문제입니다. 그래도 읽는다라는 자세로 임하기는 하는데 해럴드 블룸의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튼튼하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를 깨닫기 위해 책을 읽는다”로 수정해야 겠습니다.

멀기만한 주제인 고전읽기... 블룸의 책이 가이드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전읽기 목록을 블룸의 책으로 잡아보겠습니다.

로쟈 2011-05-21 15:36   좋아요 0 | URL
좋은 가이드이긴 한데, 잘 읽히는 영어/번역은 아닙니다.^^;

페크pek0501 2011-05-20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를 즐겁게 연주하려면 악기로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흥미를 잃으면 악기와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책을 즐겁게 읽으려면 책 읽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때 흥미를 잃고 인내로써 읽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되도록 재밌는 책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조건 명작만 골라 읽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지루한 명작도 많으니까요.

책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엔 다소 지루하거나 딱딱한 내용의 명작의 책도 즐겁게 읽게 되는 경지에 가게 됩니다. 명작이란 읽다보면 명작이라 할 만한 훌륭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해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책부터 읽으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가령 연애소설처럼 흥미로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국내의 대중 연애소설부터 읽다가 세계명작 연애소설로 옮겨 가다보면 다른 분야의 책에도 자연히 관심이 갈 듯합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

로쟈 2011-05-21 15:38   좋아요 0 | URL
ㅎㅎ 연애소설이라면 재미없어 하는 독자들도 있는데요. 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