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무엇을 칼럼의 소재로 삼을까는 언제나 고민거리인데, 그냥 오늘 낮에 떠오른 주제를 적었다. 물론 즉석에서 떠올린 건 아니고 여러 아이템 중의 하나로 머리속에서 궁굴리던 것이긴 하다.  

경향신문(10. 08. 10) 남성과 여성 그리고 소통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가 따로 있는가? 사회언어학자들에 따르면 그렇다. 언어에도 성차가 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의 저자 데보라 태넌에 따르면, 여성들은 남성보다 부드러운 감탄사를 사용하며 ‘귀엽다’ 같은 별다른 의미없는 형용사를 더 많이 쓴다. 그리고 자기 주장 끝에다 “그렇지 않니?”라는 질문을 자주 덧붙인다. 남성보다 주장을 다소 완곡하게 표현하며 더 정확한 문법을 구사한다. 밋밋한 표현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음역과 억양을 사용하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같은 공손한 표현을 즐겨 쓴다. 이런 것이 말하는 방식의 차이라면 더 중요한 차이는 대화의 목적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남자는 ‘독립’을 원하는 데 반해서 여자는 ‘친교’를 원한다. 저자는 이런 예를 든다.

남편 조쉬가 옛날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비즈니스 문제로 조쉬가 사는 도시에 내려올 예정이라는 말에, 조쉬는 대뜸 주말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아내 린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자신도 출장을 갔다가 주말에 돌아올 예정인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통고해도 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조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떻게 친구와 약속을 하면서 마누라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해!”

조쉬를 ‘K씨’로, 린다를 ‘부인 L씨’로만 바꾸면, 우리 자신과 주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는 일을 ‘허락’을 구하는 일로 보아 자신의 ‘독립성’에 대한 침해로 간주한다. 그는 마누라 앞에서 벌벌 떠는 못난 사내란 평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면에 아내는 가급적 모든 일은 상의해야 하며 그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란 가장 ‘친밀한’ 관계이기에 그렇다. 태넌의 주장대로, 친교가 “우리는 아주 밀접해서 똑같다”는 뜻이고 독립이 “우리는 떨어져 있는 만큼 각각 다르다”는 뜻이라면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문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각각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이 두 세계 사이에서 과연 연대와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장 흔한 대증요법은 서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의 입장이 돼볼 수 있는 기본적 상상력이 이 경우엔 요구된다. <정의론>의 철학자 존 롤스라면 ‘원초적 입장’이란 걸 대안으로 제시할 법하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각자의 편파적 입장에서 벗어나 ‘성별 없음’이란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즉 각자가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합의를 모색한다. 원리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쓴 정치철학자 하비 맨스필드는 우리가 자기 성별을 알고 있을 때의 선택과, 알고 있지 못할 때의 선택은 별개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성별 없음’이란 입장은 어떤 결정에서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는데,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 그의 반론이다. 오히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그는 본다. 성별 간의 자연적 차이를 부인할 수 없다면 언어적 차이 또한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쪽이다.

그런 경우 해법은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불편을 경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혼자서 다 결정하고 통보만 하실 수 있지요? 너무 귀여운 거 아녜요?” “어떻게 모든 걸 당신 허락을 받으라는 거요? 가슴이 떨려서 매번 그렇겐 못하오!” 아무래도 날이 너무 더운가 보다. 

10. 08. 09.  

P.S. 칼럼에서 언급한 데보라 태넌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남자를 토라지게 하는 말, 여자를 화나게 하는 말>(한언출판사, 2001)로 번역돼 있다. 처음엔 <남자의 말, 여자의 말>(한언출판사, 1999)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책이다.   

하비 맨스필드의 <남자다움에 관하여>(이후, 2010)는 알다시피 얼마전에 출간된 책이다. 데보라 태넌에 대해선 이 책에서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를 다룬 대목에서 알게 됐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에 실린 그의 인터뷰도 참고했다. 칼럼에서 언급한 내용이 역시나 부정확하게 번역돼 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남자다움에 관하여>를 다룰 기회가 생기면 지적하기로 한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0-08-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토요일에 많은 알라디너들(모두 여자였지만)과 만나서 이 주제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 읽으면서 고개 많이 끄덕였습니다.^^

로쟈 2010-08-09 23:35   좋아요 0 | URL
맨스필드의 말대로 '스테레오타입'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을 주는 듯합니다...

2010-08-10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0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꾸때리다 2010-08-1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 읽으면 연애할 수 있나요? ㅜ.ㅜ 저 차였거든요.ㅜ.ㅜ

로쟈 2010-08-10 08:06   좋아요 0 | URL
왜 차였는지는 말해줍니다.^^;

穀雨(곡우) 2010-08-1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옆지기랑 소통이 탁 막히면 화성인, 금성인 이야기로 윤을 굴리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되더군요. 전 동굴로 기어들어가고 무엇보다 여자의 상황을 지배하는 무기, 눈물이..ㅠ.ㅠ
분명 잘 못한 일이 아닌데, 어느새 나쁜넘으로 상황돌변...켁
관점과 상황을 인식하는 지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만 많아집니다. 여자는 말로 호응하고 인정받고 남자는 풀어 나열하고 앞뒤를 가리는 것에 있다는 차이가 안드로메다은하보다 멀게 느껴집니다. 고로 남자는 눈치라도 빨라야 생존하며 가정의 평화가....^^

로쟈 2010-08-10 11:2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디폴트값을 소통불가능에 두고 시작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어요. 기대를 좀 낮추는 것이죠.^^;

yamoo 2010-08-1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류의 책을 부지기수로 읽었는데요...첨엔 재밌어서 읽었는데, 좀 읽다 보니 식상하더라구요..근데, 최근에 사람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니 새롭게 보이더군요~ 인간을 공부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비슷비슷 한 책들이 주는 공통적인 사항을 추릴 수 있고, 그게 바로 알고 실천해야할 인간에 대한 공부같습니다..<남자다움에관하여>는 아직 못봤지만 비스무리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이런 류의 책들을 독파해 봐야 겠습니다~^^

헌내 2010-08-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향신문에 칼럼도 쓰시는군요 ^^

자꾸때리다 2010-08-1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여자한테 지젝, 데리다 이런 이야기하면 '일반적으로' 싫어하나요?

yamoo 2010-08-10 20:52   좋아요 0 | URL
어렵게 얘기하면 아주~ 싫어합니다...시큰둥하구요..상황에 따라서 아주~ 쉽게 얘기해야 합니다..그럼 좀 듣는 거 같습니다. 근데, 지젝 데리다..먼저 관심을 보이기 전에는 저얼대 먼저 얘기하지 않는 게 좋아보입니다 ^^

빵가게재습격 2010-08-10 22:54   좋아요 0 | URL
남자들도 싫어하지 않을까요?^^ 전에 술자리에서 정치철학 어쩌구 하며 이야기를 꺼낸적이 있는데, 친구들 반응이 이렇더군요.

'너 왜 그래', '슬럼프냐? 왜 철학책을 읽어?' '집사람이랑 싸웠니?' '살다 보면 다 그럴때 있어 자식아, 자, 술 받아!'
........
'야, 쟤 다음부터 부르지마. 술 맛 떨어져'

로 마무리 되었답니다. 친구 다 끊어집니다. 인문학. 댓가가 크죠...

Anton 2010-08-11 00:55   좋아요 0 | URL
지젝과 데리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말고 여부를 학력도 아니고 성별로 따진다는 게 어쩐지.. '여자'는 '어려운' 이야기 듣는 거 싫어하나요? 이렇게 읽히네요. 하하. 제 생각은 그냥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싫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뭐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공통 관심사가 아닌데 일방적으로 자기 지식/생각을 전달하려하는 태도는.. '여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환영받기 어렵지 않을까요..

송연 2010-08-10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서 로그인하고 글 남깁니다.
지젝, 데리다 이런거 이야기한다고 싫어하거나 차이지는 않는것같습니다...^^
진실된 사람이라 느낄때,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가 느껴질 때... 그땐 오히려 여성쪽에서 적극적일 것 같아요...^^

2010-08-11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