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고를 보내고 잠시 볼일을 본 후에 이발을 하고 왔더니 편집본이 올라와 있다. 오늘 천안함 사고에 대한 대국민 담화도 발표되었기에 '묵은 숙제'로 안고 있던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조사발표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30%에 속하는지라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고 역사의 죄인들이 심판 받으리라 믿고 있지만, 당장은 '매카시즘'에라도 의지하고 싶어진다. 공격 타겟이 여럿이어서 궁여지책으로 반어적인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경향신문(10. 05. 25) [문화와 세상]때론 매카시를 옹호하고 싶다 

“정부 내부에 공산주의자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수폭 제조가 늦어진 것도 그 사람 때문입니다.” 1950년대 ‘빨갱이 사냥’의 주동자이던 매카시는 당시 육군장관 로버트 스티븐스마저 빨갱이로 몰아붙인 데 이어서 맨해튼계획의 최고 책임자이자 ‘원폭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조차도 소련의 간첩으로 내놓고 공격했다. 가히 매카시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1954년 4월22일 열린 텔레비전 심문회에서 육군을 맹렬하게 공격하던 매카시는 육군장관의 변호사 조셉 웰치의 반론에 직면한다. 매카시의 근거 없는 공격을 날카롭게 지적하고서 웰치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당신한테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란 게 없습니까? 진정 인간의 마음이란 게 없다 이겁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긴 말 할 필요가 없겠군요.” 다음날 신문은 웰치의 승리를 대서특필했고, 그해 겨울 미 의회는 매카시에 대한 문책 결의안을 채택했다. 불의에 대한 양심의 드라마틱한 승리였을까?

JP 모건과 록펠러라는 두 독점자본이 인맥을 동원하여 세계사를 어떻게 농단해왔는지 폭로하는 <제1권력>의 저자 히로세 다카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날의 심문은 이미 효용가치가 사라진 매카시를 추방하기 위해 계획된 ‘연극’이었다는 것이다. ‘제1권력’에게 매카시는 충실한 하수인이자 사냥개였지만 문제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그가 싸움을 건 육군장관이 모건·록펠러연합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매카시에겐 빨갱이 사냥 자체가 목적이었지만, 모건과 록펠러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빨갱이 사냥은 소위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자신의 회사들이 거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 즉 파시즘은 단지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절대로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매카시는 이 점을 간과했다. 



하지만 때로는 매카시를 옹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천안함 사건으로 불거진 남북대치 상황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합조단의 조사결과 발표를 성인남녀 700명을 상대로 한 전화여론조사 결과대로 70% 신뢰한다면, 한·미 군사작전 중에 우리 측 초계함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말 그대로 우리의 해상경계 태세가 초토화된 것이잖은가. 북한이 우리의 해군력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정도의 전력을 갖고 있다면, 군사전문가들의 지적대로 북한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는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더불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4대강 공사가 아니라 대대적인 군사력 보강과 대응전략의 재구축이어야 한다.  

물론 대국민 담화를 통해서 이명박 대통령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의 기강을 재확립하고 군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북 제재조치들만큼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화문에는 담겨 있지 않았다. 참담한 ‘패배’에 대한 지휘책임을 묻겠다는 얘기도 빠졌다. 한반도 정세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아 매카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과연 북한의 작전이 우리 내부의 동조자 없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정부와 군 핵심에 공산주의자가 잠입해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적 잠수정의 잠입과 도주 경로도 파악 못하는 상황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때마침 간첩도 체포됐다고 한다. 화상채팅을 통해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보여주는 대가로 남자 대학생에겐 “한국에서 제일 큰 대학에선 뭘 배워요? 학교 사진도 보내주세요”라고 요구했다는 30대 여간첩이다. 정작 거물급은 따로 있는 것 아닌가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10. 05. 24.  

P.S. 애초에 천안함 사태를 다루기 위한 글감으로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과 함께 염두에 둔 건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산책자, 2009)였다. "근대 민주주의 정체에서도 전체주의 국가만큼 '피지배자의 불안과 공포'를 권력의 '구성적 순간(=계기)'으로 삼는다."(254쪽)란 구절이 들어있는 5장 '유동하는 공포'는 '공포 정치학'의 여러 사례와 그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바우만의 요점은 '안전 패닉'을 조장함으로써 '복지국가'에서 '개인 안전 국가'로 국가 패러다임이 자연스레 이동해갔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와 개인 안전 국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자신감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라 전체의 공동재산으로 부여했다. 반면 개인 안전 국가는 자신감과 신뢰의 두 숙적, 공포와 불확실성을 자본으로 한다. 그리고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기득권을 가지는데 여기서 기득권이란 개인 안전 국가의 기반을 확충하고, 플랜테이션 농장지대로 바꿀 처녀지를 식민화하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이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잘라먹는다.(...) 개인 안전 국가의 등장은 근대 민주주의의 황혼이 다가옴을 예고한다.(250-1쪽) 

이번 선거의 결과와 함께 우리는 자칫 '민주주의의 황혼'으로 걷잡을 수없이 진입해 들어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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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4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4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5-24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한·미 군사작전 중에 우리 측 초계함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말 그대로 우리의 해상경계 태세가 초토화된 것이잖은가... 정부와 군 핵심에 공산주의자가 잠입해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적 잠수정의 잠입과 도주 경로도 파악 못하는 상황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답답한 와중이지만
칼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로쟈 2010-05-24 22:00   좋아요 0 | URL
원고를 보내면서 저는 '답답한 게 다 가시진 않네요'라고 적었습니다.--;

알케 2010-05-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우울한 전망이 현실화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큽니다. 80년대를 몸으로 겪은 40대의 자리에서 그리고 열한살난 아들 하나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 아이에게 그런 시절을 살게해야 하는가하는 두려움도 함께. 일단 당면한 최선의 투쟁 방법은 투표인데 그마저 난망이니...단 3년만에 역사를 20년전으로 되돌려 버리는 저들의 재주는 참.

로쟈 2010-05-24 21:58   좋아요 0 | URL
최악의 경우엔 그렇게 망하더라는 사례담 정도는 남길 수 있겠죠. 박명림 교수의 지적인데, "우리는 단지 정부를 민주화했을 뿐인데도 사회의 민주화 혹은 공동체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착각했어요." 그 대가를 두고두고 치를 것 같습니다...

Mephistopheles 2010-05-2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분위기는 다시 쓰는 민주주의가 선거 후의 화두가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5-24 23:48   좋아요 0 | URL
그러자면 최소한 '기회'는 만들어야 할텐데요...

빵가게재습격 2010-05-2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뉴스보면 혈압 올라 죽을 것 같아요... 어째든 다 우리가 저지른 것 아닌가(설사 내가 그렇게 투표하지 않았더라도),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간에 받아들이고 이죽거리고 딴지걸고 바꿔가면서 살아가야지... 하고 다짐하면서도 뉴스만 나오면 밥상 엎을 지경입니다. 저 미친놈들!은 북한정권이 사라지면 자동적으로 한반도가 '대한민국'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아나봐요. 미약하긴 하지만 미국부터 중국까지 움직이는 걸 보면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이 놈들은 지금의 밥그릇만 지킬 수 있다면 집이고 땅이고 뭐든지 파괴해달라며 강대국들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 같아요. 속터져서...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어휴~~~

로쟈 2010-05-24 23:47   좋아요 0 | URL
혈압 올리는 것도 작전 같아요. 단순하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거든요.--;

2010-05-24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4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5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5-25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정치하면 또 한권 생각나는 책이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이죠. 대중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한 정치꾼들과 장사치들의 농간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란는건데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건지..-.-

로쟈 2010-05-25 10:03   좋아요 0 | URL
저도 대학신입생 필독서로 추천한 책입니다. 모르면 당하는 것지만, 알면서도 당한다면 문제죠...

펠릭스 2010-05-2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그들은 그럴수밖에 없나를 생각하곤 합니다.

로쟈 2010-05-25 23:50   좋아요 0 | URL
거짓말이 일상화돼 있어서 본인들은 별 긴장이 없을 듯해요...

비로그인 2010-05-2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숨어있고 책임은 서로 떠넘기고... 괜한 불신과 불안과 긴장만 증폭시키며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데 악용되고 있는 이번 일로 시민들만 괴롭고 지쳐갑니다. 혹시 지혜를 얻어볼까 해서 칸트 <영구평화론>을 뒤적이는데 답이 잘 안 보이네요...

로쟈 2010-05-25 23:50   좋아요 0 | URL
누가 가해자인지 그들은 알고 있겠죠...

비로그인 2010-05-26 00:25   좋아요 0 | URL
정부, 군 관계자를 모아놓고 언제 청문회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