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아트앤스터디의 강좌 중에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라는 게 있다(http://blog.naver.com/artnstudy?Redirect=Log&logNo=110081840384). 문화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택광 교수의 강좌인데, 교재로 예고된 책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가 이번주에 출간됐다.   

 

두 가지가 키워드인데, 먼저 '가이드'에 대한 설명. 책소개를 참조하면 이렇다.  

‘가이드guide’라는 꼬리표가 붙은 다소 생뚱맞은 이 책은 ‘이론의 종언’에 맞서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본격적인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담긴 저작이다. 지난 십 년 한국사회를 배회한 각종 패배주의와 냉소주의 중에서도 ‘이론 무기력증’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지성주의’와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먹고사니즘’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고 곧 전면화되었다. 저자는 이런 태도에 종지부를 찍고,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정신분석 이론이 결합한 이론 공부와 이론적 글쓰기가 생산성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저자는 푸코와 들뢰즈 이후 등장한 지젝과 랑시에르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이론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에 발을 디디고 있으며 그들이 과거의 이론과 오늘의 정치 지형 속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분석함으로써, 2000년대 후반 이후 다시 범람하기 시작한 유럽 발 이론의 백가쟁명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거시적 안목’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철학자 김영민과의 대화하던 중에 나왔다는 '인문좌파'라는 말(그러니까 김영민과 이택광이 '인문좌파'의 견본이다).   

“한국사회에서 ‘교환가치’를 갖는 고전적 인문학, 군주를 보필하고 관료를 양성하는 ‘동양적 인문학’의 유령이 느껴지는 이 인문학과 구분해서 나는 인문좌파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문좌파는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다.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개념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필연성에 붙잡혀 있는 우발성을 풀어놓는다는 말이다. 재현체계를 벗어나는 힘을 드러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일이다. 사유가 실천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규범을 거스르는 탈영토화를 의미한다. 이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백의 동요이다.”(11~12쪽)

몇 개의 규정이 중첩돼 있는데,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사유의 주체가 제3의 포지션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인문좌파'란 말은 그 자체로 명명효과를 갖는다. 지시대상이 없어도 의미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유니콘처럼. 아무려나 여러 곳에서 '인문학 가이드' 노릇을 하는 처지에서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책이 출간돼 반갑다(개인적으론 한 술자리에서 저자와 함께한 적이 있는데, '이론적 만담'의 최고 수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과 직접 통화해보겠다고 하여 일행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문좌파'란 말이 영어에도 있는지(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 동네의 용어로 하자면 아마도 '라캉주의 좌파' 정도가 저자의 이론적 입장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와 라캉(프로이트)이 그의 문화비평의 주된 이론적 바탕이니까.  

참고로, '라캉주의 좌파'와 그냥 '라캉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는 맹정현의 <리비돌로지>(문학과지성사, 2010) 같은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라캉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강조한 지젝(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을 전혀 경유하지 않은 라캉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현대철학자는 들뢰즈/가타리와 푸코 정도이고, 알튀세르와 지젝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란 말도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10.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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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의 인문학 위기와 강남좌파 한비야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2010-04-06 17:15 
    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넘사벽’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고 있습니다. 넌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있냐면서 비아냥거림을 받아야 하는 시대죠.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면서 조금이라도 취업에 유리하고자 아등바등해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과 집값과 펀드, 자기 자녀가 무슨 대학 들어갔는지 열나게 이야기한 뒤 TV와 연예인 연애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중년층들까지, 사회는 속되게 변해갔습니다.
  2. 인문좌파와 비가시적인 정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2 23:23 
    아침신문을 밤중에야 읽었다. 최근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한겨레21('노 땡큐!'란)과 교수신문의 연재(격주로 '세계사상지도'를 다룬다)를 새로 시작하는 등 문화비평가로서 '시즌2' 활동에 나선 이택광 교수의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사실 낮에 한겨레21에서 드라마 <추노>에 대한 칼럼도 읽었기에 이런 정도의 활동 빈도라면 '기록'해두어야
 
 
구보 2010-04-06 12:47   좋아요 0 | URL
<이론적 만담의 최고 수준>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넘치기 마련인 출판사 카피가 아니라서 더 궁금하네요.

로쟈 2010-04-07 01:09   좋아요 0 | URL
술자리 만담과 책은 또 다를 수 있는데, 여하튼 재미는 있을 거 같아요...

시몬느 2010-04-06 20:0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어제 다지원에서 인사드린 인디고 서원의 박용준입니다.
어제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어제 하루종일 이사를 하고, 강의를 갔더니, 강의 중간에 졸음이 와서...죄송했습니다. ^^

강의 내용뿐 아니라 '이론 투쟁'에 관한 선생님의 언급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의미를 둘러싼 투쟁.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선생님의 건승을 빕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닿아 뵐 수 있기를... :)

로쟈 2010-04-07 01: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책은 뜻밖의 좋은 선물이었어요.^^

비로그인 2010-04-06 20:34   좋아요 0 | URL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 그냥 '철학자'나 '지식인'의 기본덕목 아닐까요? 좀더 뚜렷한 상이나 규정이 있어야 저처럼 개념이나 실천이 짬뽕인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저는 "The Left"부터 좀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4-07 01:10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지시대상이 모호하다고 적었는데, 사실 저자도 그냥 수사라고 했어요...

phrensy 2010-04-07 03:19   좋아요 0 | URL
좋은 소개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4 23:36   좋아요 0 | URL
^^

bplat 2010-04-14 17:52   좋아요 0 | URL
이거 추천하시는 거 맞죠? 로쟈님이 추천하시는 책이라면 믿고 질러봐야겠네요ㅎㅎ 그렇지 않아도 이제 한물간 취급을 받는 루카치를 다시 읽어보자는 문단 제목에 확 꽂혔었는데.. 이 책이 절 제대로 입문시켜 주면 좋겠네요. 물론 그전에 베이스가 어느 정도 있어야겠지만..

로쟈 2010-04-14 23:36   좋아요 0 | URL
가이드삼아 읽으셔면 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