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오늘 저녁에 수유너머N에서 발표하는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발표문 가운데 일부를 옮겨놓는다. 혹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면 좋겠고, 나머지 부분은 발표 이후에 다시 정리해서 올려놓을 예정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 - 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되고 난 뒤 - 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오랜 평화로운 확장이 끝난 1914년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난 1990년 사이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레닌이 1914년에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해야만 한다.”(<레닌 재장전>)

지젝이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레닌 재장전>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2001년에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컨퍼런스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레닌의 복구”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그것이 영어본으로는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2007)로 묶여서 나왔습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도 영어본 <Revolution at the Gates>(2002)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습니다. 9.11을 다룬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1) 직후에 나온 것인데, 그의 다산성과 순발력에는 자주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1년엔 논문 한두 편 쓰는 게 버거운 한국 학계의 현실과는 대비됩니다. 물론 ‘괴물’과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지만요). 올해만 하더라도 알랭 바디우와의 공저 <현재의 철학(Philosophy in the Present)>이 출간됐고,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 Times)>가 이번 봄에 나올 예정입니다(슬로베니아에서 출간한 책과 공저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56번째 책입니다). 2001-2002년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지젝의 ‘레닌을 반복하기’론은 1991년 소비에트 몰락 이후 숙고되어 90년대 후반에는 이미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 걸로 보입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던가요?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273쪽)는 것입니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관용/용인된다는 것입니다(똘레랑스는 언제나 강자의 윤리/논리죠. 한때의 프랑스 같은). “네 마음대로 말하고 써라. 단 지배적인 정치적 합의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방해하지만 마라. 비판적 논제로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 달라. 지국 생태계의 파국에 대한 예상. 인권 침해.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반페미니즘. 멀리 떨어진 나라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서 점점 늘어나는 폭력. 제1세계와 제3세계, 부유한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 디지털화가 우리 일상생활에 가하는 강력한 충격...” 등등.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성문법적으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합의만 유지될 수 있다면 무얼 해도 괜찮다는 것이고, 그러한 ‘자유’에 실상은 어떤 ‘금지’가 기입돼 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죠. 지젝이 들고 있는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인도에서 맥도널드가 감자 칩을 동물성(소의 지방에서 나온)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납니다. 맥도널드는 바로 사실을 시인하고 인도에서 파는 모든 감자 칩은 식물성 기름으로만 튀긴다고 약속합니다. 신속한 조치에 만족한 힌두교도는 다시금 감자 칩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하고요... 힌두교도가 자신의 전통을 방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근대성의 논리에 기입/포섭돼 있는 것이죠. 지젝이 보기에 맥도널드의 힌두교도 ‘존중’은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생색내기’입니다. 우리가 어인아이들을 진지하게 대하진 않지만 그들의 환상을 굳이 깨뜨리지 않으려고 무해한 습관들을 ‘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외부인이 어떤 마을에 가서 그곳 관습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투르게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용은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불에 태워 죽이는 힌두교의 전통에 이르면 쉽게 ‘불관용’으로 바뀝니다. 즉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관용’은 유지되며, 이것은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모든 타자의 향락에 무관심한 ‘성자적’ 태도, 보편적 대의를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또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서사의 권리’는 “오직 동성애 흑인 여자만이 동성애 흑인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고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귀결됩니다(“니들이 게맛을 알어?”). “이런 식으로 보편화할 수 없는 특수한 경험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명백하게 보수적인 정치적 제스처”입니다(“구관이 명관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 “정치도 해본 놈이 한다” 등).  

반대로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입니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다. 자유주의적 정치적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모두 진리의 정치를 배척한다. 물론 민주주의는 소피스트들의 통치다. 오직 의견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체제 역시 진리의 닮은꼴만을 강요한다. 독단적인 ‘교시’의 기능은 통치자의 실용적 결정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 정반대입니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위험한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지젝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킵니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extremism) 혹은 과잉 근본주의(excessive radicalism)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displacement) 현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의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코뱅이 급진적 테러에 의존한 것은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동화(acting out)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의 이른바 ‘과잉’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또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의 현실적(경제적 등) 원인들을 흔들어놓는 것으로부터 후퇴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라는 것이 지젝의 반문입니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됩니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정치경제학!)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지젝은 알랭 바디우가 ‘경제주의’와 결별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을 <국가와 혁명>의 레닌보다 더 좋아하는 것도 ‘순수 정치’를 주장하는 입장의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봅니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는 것이죠.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거꾸로 1990년 공산주의의 붕괴에 이어진 정치적 민주화는 사적 소유에 대한 광적인 충동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485쪽)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 자체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지젝이 ‘진정한 마오주의자’라고 칭하는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한편, 자본주의의 혁명적인 ‘탈영토화’ 효과는 마르크스도 매혹되었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동력으로 인간 상호작용의 모든 안정된 전통적 형식을 무너뜨렸습니다(“모든 견고한 것은 녹아 허공으로 사라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주의의 궁극적 장애라고 진단했지만, 한편으론 이 내재적 장애/적대는 그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도 대단히 막강한 체제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진단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수세기 만에 국제 질서가 가장 극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 출발점에 서 있다. 이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유럽 열강들이 처음으로 패권 질서를 형성했던 시절 이후에 가장 대대적인 변동이 될 수 있다. 이 변화는 불가항력적이다. 전염성도 강하다. 그것은 우리의 일, 은행계좌, 희망 그리고 건강까지,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번질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소련의 몰락, 금융위기처럼 단발성 변동이나 혁명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눈사태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이 세계가 더 안정적이거나 이해하기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죠수아 쿠퍼 라모, <언싱커블 에이지>)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시장경제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는 중국식 발전모델”을 지칭하는 ‘베이징 컨센서스’를 주창한 컨설턴트 지식인의 주장입니다.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좌파들만 “혁명이 문 앞에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죠. 그보다 한 걸음 먼저 내달리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혁명, 혹은 혁명적 자본주의가 아닌가 합니다(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자신의 원리 자체가 끊임없는 자기 혁명인 질서를 혁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는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마누라와 자식도 바꾸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요? 지젝은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회상장면을 한 예로 듭니다.  



주인공 카이저 소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라이벌 갱들이 자기 아내와 작은 딸의 이마에 권총을 대고 협박을 합니다. 소제는 즉각 자기 아내와 딸을 쏩니다. 그리고 그는 라이벌 갱단 한 놈 한 놈을 그들의 부모, 자식, 친구들까지 모두 찾아내 죽여 버리겠다고 선포합니다. “강요된 선택의 상황에서 카이저 소제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죽임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미치거나 불가능한 선택을 한다. 이런 행동(act)은 무력한 자기 공격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체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의 좌표를 바꾸는 행동이다.”(<잃어버린 대의>, 258-9쪽) 이제 그러한 행동의 역사로서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를 잠시 훑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0.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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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24 13:01 
    어제 수유너머N에서 발표한 글을 마저 옮겨놓는다. '코뮌적' 공간에서 '레닌주의'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한,다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밤기차로 지방에 문상을 가야 했던 탓에(오늘 새벽차로 올라왔다) 뒷풀이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발표회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아래의 글은 약간 조정한 걸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
  2.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풍경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5 23:55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아포지 2010-02-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표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

비로그인 2010-02-2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젝.. 카이저 소제를 그렇게 호명했군요..

수유너머.. 후끈한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도 기대 됩니다.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기대에 부응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카스피 2010-02-2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주얼 서스펙트,반전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영화지요.근데 유주얼 서스펙트2란 영화가 나와서 기대했다가 벙 쩌버린 일인이었죠ㅡ.ㅜ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제목 사기였던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