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때문에 눈에 띄는 과학서는 에롤 해리스의 <파멸의 묵시록>(산지니, 2010)이다. 과학서라고 했지만, 저자는 철학자이고 형이상학과 과학철학, 종교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남기고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파멸의 묵시록>은 그가 90세에 출간한 책으로 "방대한 연구결과를 대단히 간결하게 압축한 결정판"이라고 한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한번쯤 읽어보고픈 책이다. 원제는 '묵시록과 패러다임'이고 부제가 '과학과 일상적 사유'인데, 국역본 제목과 부제는 그걸 적당히 재분배했다. 한겨레의 간단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자세한 건 출판사의 책소개를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10. 01. 30) 인문학, 뉴턴 패러다임을 벗어라

환경과 생태계 파괴, 온난화, 핵전쟁 위협, 자원 고갈, 인구 폭발, 끝없는 분쟁과 양극화 등 인류 자체의 절멸을 걱정해야 할 파국적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인류 대다수는 이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채 파국적 상황을 가속화하고 있다. 개인과 가족, 또는 민족, 국가의 무한 이기주의로 표출되는 사유와 생존 방식의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이 위기의 근저에 뉴턴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자리잡고 있다. 원자론과 개인주의, 분리주의, 환원주의를 낳은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 근대적 가치관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의해 이미 근본적으로 무너졌는데도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자연과학 외의 영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양자역학 시대에 지구인들 대다수의 삶은 여전히 뉴턴적 17세기 자연과학 패러다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어긋남이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절연에서 비롯된 이른바 ‘두 문화’고민과도 상통하는 이 위기는, 그러나 뉴턴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는 두 문화의 절충적 통섭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여전히 뉴턴적인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철학,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하이젠베르크가 물리학에서 이룩한 패러다임 혁명으로 인도하라! 인간과 자연, 사회, 그리고 극미와 극대의 우주까지 상호의존적 내적 관계를 지닌 유기적 통합체라는 전체론(holism)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인류가 지니게 된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자연스런 전환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1. 29.

P.S. 출판사 책소개의 한 대목은 이렇다. 저자가 화이트헤드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세계관을 진단하는 측면에서 이 책은 화이트헤드의 <발상의 모험>(Adventures of Ideas)과 가장 유사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화이트헤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연구가 활발한데, 일찍이 그는 “하나의 학문이 임시방편 가설의 메들리(a medley of ad hoc hypotheses)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들려면 반드시 철학적 성찰을 수행해서 그 학문의 기초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근본전제부터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 화이트헤드는 17세기 및 20세기의 자연과학 성취를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한 후, 뉴턴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라는 저서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파멸의 묵시록>은 이런 화이트헤드의 문제의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에롤 E. 해리스는 화이트헤드를 깊이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책이 철학에 중점을 둔 책이라면, 이 책은 문명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랜만에 화이트헤드의 책을 검색해보게 되는데, <발상의 모험>은 <관념의 모험>(한길사, 1996)이란 타이틀로 한길 그레이트북스 첫 권으로 나온 바 있다. <과정과 실재>(민음사, 1999)는 현재 절판중이고, <과학과 근대세계>(서광사, 2008)는 재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개인적으론 모두 박스보관 도서라 '그림의 책'이다. <과정과 실재>는 원서도 구해놓았었지만 아직 폼도 못 잡아봤다. 절실히 읽고 싶을 때가 따로 오지 않을까 한다.  

  

과학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주에 출간된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지호, 2010)도 언급해두고 싶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언제쯤 '원더풀'한 저자의 글솜씨를 감상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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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1-29 20:23   좋아요 0 | URL
<관념의 모험>을 <발상의 모험>으로 번역한 그 '발상'이 더 신선하군요^^ 화이트헤드 책들은 원서와 번역본 모두 구비되어 있고 가까운 책장에 손 닿는 곳에 있어 적잖게 손 때를 묻혔건만 아직 정상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습니다. 그나저나 <과정과 실재>가 절판됐다니 안타깝군요. 훌륭한 번역자가 나와서 더 좋은 번역본을 내주면 좋겠지만 오영환 선생의 번역도 계속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1-30 10:1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과정과 실재> 독회 같은 것도 있었고(김용준, 김용옥 형제도 멤버였던), 그때 혼자 읽긴 힘든 책이란 '신화'도 만들어졌었죠.^^;

푸른바다 2010-01-30 17:13   좋아요 0 | URL
러셀이나 포퍼 같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근거 없는 '신화'는 아닌 듯 싶습니다^^ 러셀 자서전을 보면, 러셀이 화이트헤드와 대화하다가 사건으로서의 존재라는 아이디어를 얻어서 그의 책에 사용했는데, 화이트헤드가 유감을 표명하면서 절교로 이어졌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사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잘못 이해된 방식으로 사전에 알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러셀에게 암시를 주었던 그 생각이 훗날 <과정과 실재>에 포괄적으로 기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화이트헤드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 러셀도 이해하기 힘든 어떤 '사상적 단절'이 <과정과 실재>에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파멸의 목시록> 역자의 경력에 증산도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게 저에게는 편견의 눈으로 책을 보게 하는 군요^^

빵가게재습격 2010-01-30 00: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과학과 근대세계>를 보니 약간 유감스러워서 끄적입니다. 저도 얼마 전 서점에 갔다가 <과학과 근대세계> 개정판이 나온 걸 보고 좀 뒤적거려봤는데요. 양장본이 된 걸 제외하면 이전 판본(?)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더군요. -저는 1판 8쇄, 2005년도에 출간된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무려 만삼천원이 더 올랐더군요. 물론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차라리 양장본을 포기하고 5000~8000원 정도의 인상폭이 어땠을까(너무 야박한가요?^^)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로쟈 2010-01-30 10: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서점에서 보고 좀 심하단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중원문화사에서 재간되는 철학 책들도 가격을 보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펠릭스 2010-01-30 13:27   좋아요 0 | URL
좀 생뚝맞은 소릴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책을 사서 읽는다는 의미속에는 단순히 책을 통독한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경제원리가 적용되는 것같아요. 베스트셀러의 속성은 재미와 구입자의 경제적인 사정과 더불어 사회적 통념 등이 작용한 통계치라 생각됩니다(물론 그것이 나쁘다는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불하려는 책값 수준이 만원 전후에 머룰러 있다는 것도 고정 관념의 일환(경제적 지불 능력)이겠고, 다른 사람이 2~3만원선의 책을 선택한 것도 또한 본인 선택 사항이라 생각하지만요.

로쟈 2010-02-01 15:02   좋아요 0 | URL
그만큼 독자층이 엷다는 반증이어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시라소니 2010-01-30 15:0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파멸의 묵시록>을 번역한 이현휘입니다. 우연히 이곳에 들렀는데, "푸른바다"님의 댓글이 눈에 띠어 몇자 적고자 합니다. 제가 잠시 증산도사상연구소에 순수 학자의 신분으로 근무한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곳을 그만 두고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알라딘의 역자 프로필 대신, <파멸의 묵시록> 역자 프로필 참고). 이 문제는 저에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파멸의 묵시록>이라는 책의 주제와 증산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증산도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파멸의 묵시록>을 번역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와보니 화이트헤드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 반갑습니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동양의 다양한 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특히 중국 학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심한데, 이런 태도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을 뿐, 학문적 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화이트헤드 자신은 서양철학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리스나 화이트헤드에 주목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답니다. 앞으로 이곳의 논의가 아주 고급스런 수준에서 계속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로쟈 2010-02-01 15:04   좋아요 0 | URL
그제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없더군요.^^; 오프라인에서는 종로나 나가야 책을 구할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