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의 갑론을박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미국 작가 샐린저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을 다루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 완독했는데, 예전에는 읽다가 그만 둔 책이었다. 작품의 배경은 크리스마스 즈음이지만, '호밀밭'이란 제목이 10월을 연상하게 해서 고른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소개는 이렇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은 뉴욕에 있던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비틀즈의 광적인 팬으로 알려진 채프먼이 레논을 암살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와 자신을 동격화하며, 범행 뒤에도 도망가지 않고 이 책을 꺼내 읽었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거침없는 언어, 선정적 소재로 출간되자마자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샐린저 현상’이라 불릴 만큼 채프먼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화제를 모았다. 이번 시간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방황하는 10대의 눈에 비친 위선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살펴보자. 



고교 독서평설(09년 10월호) 순수를 지키려는 젊은이의 방황

샐린저 현상 불러일으킨 세계적 베스트셀러
베일에 가려진 은둔형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 )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1951)은 단지 ‘1950년대 미국 대학생들의 경전’으로만 기억되는 작품이 아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주인공 홀든 콜필드와 함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호밀밭의 파수꾼>은 작가가 40년 이상 절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거운 지지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600만 부가 팔려 나간 이 작품의 인기는 ‘샐린저 현상’, ‘샐린저 산업’이란 말까지 만들어 냈을 정도인데, ‘샐린저 현상’이란 독자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끼고 다니면서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 홀든과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고, ‘샐린저 산업’은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상업적 성공을 가리킨다. 이러한 ‘샐린저 현상’과 ‘샐린저 산업’이 작품이 출간된 지 반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요인은 무엇일까? 주인공 홀든이 현실 속 인물이었다면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일 테지만, 오늘은 예전 그대로의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하는 열일곱 살의 홀든을 만나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주인공과 닮은 샐린저의 청소년기
다들 알다시피 홀든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말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 제일 먼저 듣고 싶은 것은 내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어떻게 구차하게 보냈으며, 또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모는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따위일 것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카퍼필드식의 시시껄렁한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입에 담고 싶지 않다.” 이런 홀든의 태도는 사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기피했던 작가 샐린저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데, 몇몇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참고삼아 그의 삶을 살펴보자.  

샐린저는 1919년에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육류·치즈 수입업자로 많은 돈을 번 덕분에, 그의 가족은 뉴욕의 고급 주택가에 살며 경제 공황 시대에도 중상류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32년 샐린저는 맨해튼의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하지만 낙제를 하는 바람에 1년 만에 그만두고, 아버지는 그를 펜실베이니아의 군사 학교로 보냈다. 이후 뉴욕대를 중퇴한 그는 어시너스 칼리지와 컬럼비아대에서 처음으로 문예 창작 수업을 받았다. 

샐린저가 본격적인 창작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건 1939년,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한 창작 강좌에 등록하면서부터다. 1940년에는 처음으로 단편 「젊은이들」을 발표하면서 차츰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샐린저는 전쟁에 참가하여 4년간 군 복무를 했다.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전역한 그는 마침내 1951년, 10년 동안 준비해 온 장편 <호밀밭의 파수꾼>을 발표했다. 주인공의 거친 언어와 반항적인 내용 때문에 초기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에 페이퍼백이 나오자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은 물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약 젊은 세대의 ‘바이블’이 되었고,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도 젊은이들이 이 책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꿈꾸며 방황하는 청춘
윌리엄 포크너(1897~1962)조차도 ‘당대 최고의 작품’이라고 치켜세운 작품이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찍부터 ‘금서’로 낙인찍힌 소설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학교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 성적 또한 부진하여 낙제당하기 일쑤인 주인공 홀든의 모습이 청소년 독자들에게 전혀 모범적이지 않다는 게 일부 교사와 어른들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어떤 조사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홀든은 ‘빌어먹을’이란 욕설을 245번이나 사용한다. 더욱이 조금 덜 심한 욕설까지 포함하면 785번에 이른다고 하니, ‘청소년 권장 도서’로서는 부적합하게 여겨졌을 게 당연하다. 흡연과 음주, 매춘 장면의 묘사와 동성애, 성도착(변태) 등에 대한 언급 역시 자녀를 둔 어른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퇴학을 당한 뒤에 동생 피비를 만나려고 부모 몰래 밤늦게 집으로 찾아온 홀든에게 피비조차도 이 말을 반복하지 않는가. “아빠는 오빠를 죽이고 말 거야.” 

홀든은 피비가 아직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어린아이라 생각하고 무척 아끼지만, 퇴학당한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피비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이유야 많단다. 그 학교는 내가 다닌 학교 중에 제일 똥통 학교야. 바보들이 우글거리는 학교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오빠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야?”, “오빠는 어느 학교든 다 싫어해. 오빠가 싫어하는 것은 백만 가지는 될 거야. 그냥 싫어하고 있어.” 

한 가지라도 좋아하는 것을 말해 보라는 피비의 물음에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건, 자기가 한 말을 취소하지 않기 위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제임스 캐슬’이란 아이와 자신의 죽은 동생 ‘앨리’ 정도다. “누가 죽었다고 해서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순 없지 않니?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라는 게 홀든의 주장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가 지키려 하는 ‘순수한 세계’가 현실보다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걸 암시해 준다. 

작품의 표제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 역시 그러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장래의 꿈을 말해 보라는 피비의 닦달에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 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벼랑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벼랑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요컨대 아이들이 놀다가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 낙제생 홀든의 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에서 ‘벼랑’에 직면해 있는 인물은 그 자신이며, 파수꾼이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보호해 줘야 할 인물도 바로 홀든이다

이분법적 선택과 판단을 뛰어넘어
홀든은 여러 번 배에 총탄을 맞은 배우의 연기를 흉내 내는데, 그 연기는 ‘흉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홀든이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의 추천을 받아, 어른 행세를 하며 매춘부를 방에 들이는 장면을 보자. 홀든은 매춘부와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처음에 약속한 금액인 5달러를 지불하지만 여자는 10달러를 요구한다. 홀든이 거절하자 그녀는 엘리베이터 보이와 함께 다시 찾아와 완력으로 5달러를 더 갈취해 간다. 홀든은 욕설을 퍼붓다가 얻어맞기만 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혐오하는 동시에 두렵기도 한 현실에 홀든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복수, 단 ‘상상 속의 복수’다. 홀든은 피 흘리는 채로 권총을 들고 엘리베이터 보이를 다시 찾아가, 겁에 질려 애원하는 녀석을 무자비하게 쏘아 죽인다. “그러고는 전화로 제인(홀든의 첫사랑)을 오게 하여 내 배에 붕대를 감게 한다. 내가 계속 피를 흘리는 동안 제인은 내게 담배를 물려 주는 장면을 상상의 화면에 그려 본다.” 

물론 이것은 홀든이 많이 보았을 법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 역시 “영화란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속 현실은 ‘연기’이고 ‘가짜’다. 다시 말해 ‘속임수’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 선택이 아니라면, 홀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은 ‘자살’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자살이었다.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땅바닥에 떨어진 순간 누군가가 와서 내 시체를 덮어 준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정말 투신자살을 했을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시체를 구경꾼들이 내려다볼 것이 혐오스러워, 결국 자살을 결행하지는 못하지만. 

‘복수’와 ‘자살’, 두 가지 선택지에는 공통적으로 홀든 자신을 관찰하는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이 관찰자의 시선은 두 가지 양식을 가질 수 있다. ‘구경꾼의 시선’과 ‘파수꾼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홀든이 기대하는 건 ‘파수꾼의 시선’이다. 동생 피비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한 뒤에, 홀든은 예전 학교의 영어 교사였던 앤톨리니 선생에게 전화를 걸고 찾아간다. 앤톨리니 선생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이미지가 자연스레 연상되는 인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홀든은 앤톨리니가 자신이 만난 선생 가운데 제일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친구 제임스 캐슬을 안아 올려 준 이도 앤톨리니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말 그대로 벼랑(창문)에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구해 줄 ‘호밀밭의 파수꾼’의 모델이다. 그는 홀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 세상에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신의 환경이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라고 정확하게 진단 내린다. 홀든은 이런 상황에서 주위 환경이 자기가 바라는 것을 도저히 제공할 수 없다고 지레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성급한 판단이다. 앤톨리니 선생은 홀든의 작문 재능을 인정하면서, 일단 가고 싶은 길이 분명해지면 우선은 학교로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또한 홀든처럼 정신적 혼돈과 고민을 겪은 사람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들이 남긴 고뇌의 기록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충고도 보탠다. “장차 네가 그들에게서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네게서 배울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한 정신 분석학자의 말을 빌려서 앤톨리니 선생이 홀든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적 복수’와 ‘자살’이라는 홀든 식의 이분법적 선택을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안은 아직 홀든의 몫이 아니다. 

홀든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앤톨리니 선생이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고는 경악하여 바삐 짐을 챙겨 나선다. 그가 ‘변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물론 이것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홀든만의 섣부른 판단이다. 날이 새자 홀든 스스로도 자신의 판단이 성급한 게 아니었을까 염려한다. 앤톨리니 선생은 단지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어루만졌을 뿐, 이러한 행위에 이상한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홀든은 “설사 선생이 변태라 하더라도 내게 정말 잘해 준 것만은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는 홀든에게 중요한 깨달음인데, 현실을 ‘진짜와 가짜’, ‘순수와 부정’이라는 이분법적인 틀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
서부로 떠나기로 결심한 홀든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피비의 학교에 찾아갔다가, 계단 벽에서 외설스러운 낙서를 본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이를 지우지만, 그런 낙서는 여기저기에 널렸고 심지어는 칼로 새겨져 있기까지 하다. 100만 년을 걸려 지우러 다닌다고 해도, 온 세계의 더러운 낙서들을 다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홀든 역시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얼핏 절망으로도 보이지만,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느끼는 체념이기도 하다. 

가족을 떠나 서부로 가려는 결심 역시 홀든에게는 일시적인 기분 전환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같이 따라가겠다며 가방을 들고 쫓아 나선 피비의 말에 격분한 홀든이 그녀를 때려 줄 생각까지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화가 난 피비를 달래기 위해 홀든은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홀든 자신에게도 아주 적합한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홀든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다만 요양 병원에서 잠시 회복기를 거쳐야 했을 따름이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서 홀든은 그토록 싫어하고 조롱을 퍼붓던 학교 친구들에게까지 그리움을 표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여기에 등장시킨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없기 때문에 보고 싶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스트라드레이터와 애클리마저 그립다. 그놈의 모리스 녀석도 그렇다. 우스운 이야기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스트라드레이터는 흘든의 네 번째 학교인 ‘페니’에서 한 방을 쓰던 4학년 선배로, 모범생에 미남이지만 이중인격을 지닌 인물이다. 애클리는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며 행동거지가 더러운 옆방의 4학년 선배이고, 모리스는 홀든에게 창녀를 소개했던 엘리베이터 보이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은 바로 홀든의 이야기이고, 그가 떠들어 댄 이야기이다. 이렇게 떠벌리는 행위 자체에는 이 세계에 대한 긍정과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함축되어 있다. 독자들이 홀든의 모습에서 ‘반항적 영웅’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주인공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거나 신비화가 아닐까. 더불어 샐린저 자신의 체험이 많이 녹아들어 간 작품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오랜 침묵에 빠져 있는 작가는 홀든과 가장 닮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09. 10. 01.   

P.S. 분량상 작품의 말미에서 홀든이 회전목마를 타는 동생 피비의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대목에 대한 분석은 다루지 못했다. 나중에 분량을 더 키울 때 보충할 예정이다. 한편, 글을 쓰면서 주로 참고한 번역은 이덕형본(문예출판사, 1998)인데, 홀든의 어투는 마음에 들지만 결정적인 대목에 오역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본문에서 인용한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를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277쪽)고 잘못 옮겼다. '비겁한 죽음'을 택하는 게 성숙한 인간의 특징이라는 건 넌센스임에도 왜 이제까지 방치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판매된 걸로 돼 있는 공경희본은 이 대목을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248쪽)이라고 옮겼다. 아무래도 '이유(cause)'를 위해 죽는다는 말은 좀 어색하다.  

한편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 따르면, 국내에 출간된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 가운데 추천번역본은 한권도 없다. 아래는 그 평가내용을 간추린 한국일보의 연재기사 '번역 이것이 문제다'의 한 꼭지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에서 읽을 수 있다. 이후에 사정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 국내 독자들이 가장 많이 찾고 또 읽는 작품에 추천본이 없다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일보(04. 03. 14)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청소년기의 고뇌를 그린 성장소설로 널리 읽히는 인기작이다. 샐린저는 작품을 출간한 후 독자들을 피해 은거해 버렸는데, 작가의 괴팍한 삶을 모델로 한 할리우드 영화도 만들어져 국내 상영까지 했다. 대중성이 있어서인지 현대작품치고는 우리말 번역도 일찌감치 1963년에 나왔다.  

국내에서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본으로 확인된 것은 모두 30여 종이다. 이 중 내용이 같은 것을 빼면 검토 대상이 된 것은 17종. 그 가운데 8종은 표절본으로 기왕의 판본을 베끼거나 약간 윤문한 정도이다. 그런데 독자적 번역본 역시 작품의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질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비표절본 9종의 번역서 중에서 추천할 만한 번역서는 한 종도 없다. 추천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읽을 만한 번역은 이덕형, 윤용성, 김욱동ㆍ염경숙 공역본 등 3종이다.  

이덕형(문예출판사)과 윤용성(문학사상사)의 번역본은 가독성을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인다. 원문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문장을 자유롭게 변형하면서 자연스런 구어체 느낌을 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번역본들에서는 주인공의 내적 독백을 전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긴 문단이나 문장을 편한 대로 나누어 처리한 대목이 많았다.  

특히 원문에서 작가가 주인공의 의식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중복해 표현한 부분을 하나로 통합해 번역하였다. 문장은 매끈해졌지만 결과적으로 원문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자신의 생각을 길게 연결하면서 서술해 주인공의 어투를 전달하는 것이 번역의 정확성만큼이나 중요하다. 단지 가독성만을 높이기 위해 작품의 고유한 어조나 서술방식을 무시한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김욱동과 염경숙의 공역본(현암사)은 원작의 속어, 비어 등을 살리려고 노력한 점이 특징이다. 때로 지나친 부분도 있지만 원작의 어감을 자연스럽게 전하려고 고심한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번역본의 문제는 주인공이 구사하는 비속어가 주인공의 경어체 말투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전하는 독백투 이야기의 잠재적 청중은 어른이라기보다 동년배로 보는 게 무난하다. 따라서 어투도 경어체보다는 평어체로 처리하는 것이 무난하다.  

세 번역본 모두 다른 번역본에서 잘못 옮긴 부분을 제대로 번역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장의 ‘The Cab I had was a real old one that smelled like someone'd just tossed his cookies in it’에서 ‘just tossed his cookies’는 ‘토한다’는 뜻이다. 이 속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 옮긴 번역본들이 많다.  

그러나 세 번역본들에서도 문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오역이 많이 발견된다. 10장의 나이트클럽 장면의 번역이 대표적인 경우다. ‘호밀밭의 파수꾼’ 번역을 보면서 좋은 번역은 단순히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원작의 문체, 어조, 문맥을 전하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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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종류의 결단에 대하여
    from 게슴츠레의 공부터 2009-10-07 20:53 
     "지긋한 이 세계에 부시지는 못하더라도 균열을 낼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신중함을 내세우며 기다리다간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모두 다 잘 될거야 식의 악무한적 일상을 벗어나려는 이런 태도는 용감하기는 하나, 이는 '결단'의 층위에 놓인 거라기보다는 권태로운 세계 그 자체에 내속적인 구조적 열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주로 젊은이들에게 볼 수 있는 이 논변의 이면에는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있을지 모른다.   "
 
 
펠릭스 2009-10-0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로쟈 2009-10-02 11:43   좋아요 0 | URL
추석 잘 쇠시길.^^

펠릭스 2009-10-02 11:56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좋은 추석되시길...

바밤바 2009-10-0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와~ 소리 나오네요. 멋지십니다.^^;;

로쟈 2009-10-02 11:43   좋아요 0 | URL
손품을 좀 팔았습니다.^^;

게슴츠레 2009-10-02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채프먼의 경우를 떠올리기도 했고 또 마침 규율이 살짝 엄했던 고등학교 때라서 홀든에게 투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독서의 경험은 마냥 그런 바람에 마냥 맞장구를 쳐주지만은 않았더랬지만 결국 그렇게 읽어내는 데 성공(?)하고 책장 한 켠에 넣어 두었더랬지요. 오늘 로쟈 님의 비평을 보니 당시 풀리지 않았던 찝찝함들을 다시 헤집어 보게 되는군요.
그와 함께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딛고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저 '절망'으로서만 환원될 수는 없겠지요. 말씀하신 '절망'과 '체념'의 차이가 무엇인지 곱씹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전목마를 보며 행복해 하는 홀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기대되는군요. 항상 그렇듯이 멈춰서서 생각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9-10-02 11:51   좋아요 0 | URL
홀든은 사실 매우 도덕적인 인물이잖아요. 고지식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직 미성숙하고. 어른들의 위선을 비판하는 반항의 아이콘이 된 건 그의 일면이 부풀려진 탓이라고 봅니다.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 이전에 그런 파수꾼이 필요한 소년이었다는 게 제 해석입니다...

다이조부 2009-10-02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졸업한지 10년이 지났는데 로쟈님 덕분에

독서평설을 챙겨 보게 됬습니다.

인터넷에 뜨기 전에 본문 내용을 먼저 읽은 적은 처음이네요 ^^


로쟈 2009-10-02 11: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 연재는 11월에 끝나지만, 평설엔 다른 읽을거리도 많지요...

philocinema 2009-10-0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전집을 사놓고 마음 가는대로 한 권씩 읽고 있습니다.
아직 '호밀밭의 파수꾼'은 읽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소개글을 보고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곳에서 로쟈님의 글을 읽으며 기쁨을 느껴온 세월이
어느덧 4년이 다 되어 갑니다.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로쟈 2009-10-02 13:50   좋아요 0 | URL
아, 전집! 모양은 그게 좋을 텐데, 저는 낱권으로 사둔 책들이 많아서 따로 꿈꿀 수가 없습니다.^^; 늘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이 되시길...

yoonakim 2009-10-0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보지 않았던 소설인데...제목의 호밀밭도 파수꾼도 이상하게 제 정서와 매우 다르다는 생경함에 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1인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싶다고 해서 고민하는 즈음...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를 사놓고 바쁜 일정과 밀린 일들로 책상 위에 두고 구경만 하던 차에 아이와 함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거스르려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나의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엄마가 함꼐 읽기에 좋은 텍스트인거 같네요. 젊은 시절에 읽었어야할 것을 고1이 된 아이와 함꼐 읽게 되나 봅니다. 풍성하고 평화로운 한가위 되시길...^^

로쟈 2009-10-03 10:26   좋아요 0 | URL
좀 위태한 장면도 나오지만, 아이와 엄마를 두루 만족시켜줄 것도 같은데요.^^ 한데, 벌써 고1이군요!^^

펠릭스 2009-10-04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설은 청소년의 눈을 통해 가족, 학교, 도시속의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것도 간접적인 언급하는 것을 보면
성장소설을 넘어 작가의 시대정신도 집약된 듯합니다. 따라서 비슷한
나이 또래와의 공감력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밭'은 호밀밭, 밑밭, 담배밭, 수박밭, 뽕밭 등을
연상케 합니다. '밭'의 풍요는 은밀함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밀밭안으로
들어가 두 발을 벌리고 누워 하늘을 보며 심호흡을 하는 것은 기성 남성의
동굴 심리로 남성주의적 사회 부조리를 상징합니다.

주인공 홀든(남성)에게 순수한 소통은 피비(착한 여성)입니다.
홀든의 학교밖은 자신이 속한 도시상과 멀리 떨어진 도시에 대한 전쟁으로
자신이 붙일 만한 곳은 없읍니다. 결국 동생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
오랜 은둔의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사학교에 입학한 후, 2차대전 로르망디작전에
참전하기도 하지만 '개츠비'와 '원폭의 발명'을 긍정합니다. 이는 청소년기인
홀든이 부조리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리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심리이며
곧 자존에 대한 재인식이라 생각합니다.

로쟈 2009-10-05 11:34   좋아요 0 | URL
마지막 멘트는 일리 있는 의견이십니다. 홀든은 도덕적 결벽주의자로도 보이니까요...

펠릭스 2009-11-20 21:50   좋아요 0 | URL
'고교독서평설' 읽었습니다. 홀든이 매춘부에게 강제로 5달러를 더 지불하고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두가지로 대응했데,하나는 복수며 또는 '상상속의 복수'를 영화처럼 합니다만,마치 이부분은 '루신'의 '아퀴'가 건달들에게 맞고서 스스로 위안하는 '정신승리법(=상상속의 복수)'을 생각나게 하더군요.

다락방 2009-10-0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저는 민음사판으로 읽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궁금한게 있어서요. 저 위에 홀든이 선생을 변태라고 오해한게 자는 홀든의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요, 제가 읽은 민음사판에서는 잠든 홀든의 성기를 만져요. 그래서 놀라서 옷을 챙겨입고 나가구요. 머리를 쓰다듬은 거라면 '오해'할 수 있지만 성기를 만진거라면 그건 더이상 '오해'가 아닐 것 같은데요. 혹시 원문과 직접 비교하신 거라면 어느게 맞는건지 알 수 있을까요?

'머리를 만진 선생을 오해하는 것'과 '성기를 만진 선생은 아무리 잘해줘도 변태인 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다른데 말이죠.

로쟈 2009-10-05 11:33   좋아요 0 | URL
원문에 'head'라고 돼 있는 걸 역자가 '귀두'라고 옮겨서 아마 문제가 됐을 거예요. 이후에 다시 '머리'로 정정한 걸로 압니다. 만약에 성기를 뜻했다면 말씀대로 오해의 소지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다음날 아침 홀든은 자신의 판단이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하거든요. 역자의 오버였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