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몽인의 <어우야담>(돌베개, 2006)의 번역에 대한 '논쟁'이 2년전 한겨레 지면에 실린 적이 있다. 나는 절반만 따라가다가 이후의 진행과정을 챙겨놓지 못했는데, 뒤늦게 발견하게 되어 뒷북성 스크랩을 해놓는다. 이상수 기자의 마지막 정리 글로서 한겨레의 필진네트워크에서 가져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88892.html). 이런 스크랩이야 비공개로 해놓아도 되지만, 번역에 대한 시각(특히 '누가 독자인가?'란 대목)과 "인문학은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널리 읽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개해놓는다.  

 

① [서평] 야사와 괴담으로 읽는 조선시대 /이상수
② [반론] 번역과 소통의 맥락 /신익철
③ [답변] 반론던진 신익철교수에 답한다 /이상수
④ [재반론]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대한 답변 /신익철

한겨레(07. 02. 26) [필진] 옛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2006년 말 유몽인의 <어우야담>을 옮겨 펴낸 신익철 교수는 내가 쓴 글에 대해 1월 22일 다시 긴 글의 반론을 보내오셨다. 성의에 깊이 감사드린다. 주고받는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뭔가 생산적인 논의로 마무리될 수 있길 희망하며 이 글을 다시 쓴다. ‘과도한 표현’이 다시 문제가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앞으로는 ‘표현’을 삼가고 가능하면 마른 말투로 쓰려고 한다.

1. 옛글에서 무엇을 풀이할 것인가

내가 쓴 기사를 포함해 신 교수와 서로 두 차례씩 글을 주고받으면서 우선 가장 중요한 논점이 된 건 한마디로 ‘옛 글 속에 나오는 오늘날과 다른 표현이나 생각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하는 문제이다. 옛글과 현대어의 문장 구조나 어법상의 차이는 번역 작업의 기본이므로 논외로 하겠다. 옛 글 속에 나오는 말을 풀이 없이 오늘날 글에 그대로 노출시킬 때 뜻이 통하지 않거나 독자들이 어리둥절할 낱말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① 옛 사람의 이름(字와 號 등을 포함), 지명, 책 이름 등 고유명사, 관직의 이름, 건물의 이름 : 이 경우는 그것이 인명·지명·서명·관직명임을 밝혀주면 일단 독자가 책을 읽어내려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유몽웅(柳夢熊), 서강(西江), 총병(總兵), <이륜행실(二倫行實)>, 모화관(慕華館) 등이 그런 예일 것이다. 인명이나 지명에 얽힌 고사를 이용해 글을 썼다면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소개해줄 필요가 있다. (여기서 든 낱말의 예는 모두 신 교수 등이 옮긴 <어우야담>에서 뽑은 것임. 아래도 마찬가지.)

② 옛 사람들이 쓰던 기물(器物)이나 행위방식 : 이 또한 간단하게 뜻을 적어주면 독자가 글을 읽어 내려가는 데 역시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정표(旌表, 효자, 충신, 열녀에게 旌門을 지어 포상하는 일)’, ‘결채(結綵, 색실 등을 지붕이나 문에 내걸어 임금이나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장식하는 일)’ 등이 그런 예이다.

③ 오늘날과 다른 옛 사람들의 일상적 표현 : 이 대목에 대해선 학자마다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학자는 예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옛 사람들의 표현을 가능하면 그대로 살리자고 주장할 것이고, 그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가령 ‘동탑(同榻, 537쪽)’ 같은 낱말이 그런 예이다. 신 교수 등의 한글본에 실린 주석에 따르면 이 낱말은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한 동창생’이란 뜻이다. 나는 이런 낱말은 본문에서 ‘같은 스승에게 배운…’이라고 옮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개의 동탑인 아무개가…”라고 옮긴다고 해서 고전의 깊이가 더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고전을 독해(讀解)하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전문 연구 독자를 겨냥한 글이라면 이런 낱말에 대해서 충실하게 전거를 찾고 풀이글을 달 필요가 있겠지만, 일반 독자를 위한 글이라면 그냥 오늘날 통하는 말로 옮겨서 뜻이 통하면 그만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나 당시엔 일상적인 표현이라 하더라도, 오늘날 현대인들이 친숙하지 않은 술어라면 풀이가 필요할 것이다. ‘갑자순(甲子旬)’같은 예가 그럴 것이다. 

④ 오늘날과 다른 옛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식세계가 반영된 표현 : 이런 낱말들은 글쓴이의 의식세계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되레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이런 경우 어떤 맥락에서 어떤 표현을 동원하고 있는지 그대로 전달하고 풀이글로 그 내용을 충실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앞의 두 차례 글에서 문제 삼은 ‘상국(上國)’이나 ‘방언(方言)’ 등이 그런 예에 속할 것이다.

위의 네 가지 범주 가운데 ①과 ②는 번역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가령 명나라의 군사 지휘관인 ‘총병’을 ‘총사령관’이라고 옮기고 ‘결채’를 ‘환영 장식’이라고 옮기면 뜻은 거의 비슷하게 통할지 몰라도 오해의 소지를 남기거나 과잉 번역이 될 수 있다. 이런 경우 옛 글을 그대로 적고 풀이글을 붙여주는 게 바람직하다.

③과 ④의 경우는 일단 번역이 가능하다. 특히 ③의 경우는 우리말로 옮기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나는 본다. 그렇게 옮긴다고 해도 이해의 맥락에서 볼 때 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④의 경우는 옛 표현을 그대로 살리고, 그 의식세계의 맥락을 반드시 풀이글로 적어두는 게 필요하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문제가 됐던 ‘방언(方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신 교수가 지난 번 글에서 들었던 <어우야담>에 나오는 아래의 문장을 가지고 말해보자.

“(김시습은) 오 세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기에 오세(五歲)라고 자호하였는데, 방언으로 오세(傲世: 세상을 오만하게 내려본다는 뜻)와 음이 같았다.” (49면)

이 경우 번역자가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가) 김시습은 오 세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기에 오세라고 자호하였는데, 방언으로 오세와 음이 같았다.

(나) 김시습은 오 세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기에 오세라고 자호하였는데, 조선어로 오세와 음이 같았다.

(다) 김시습은 오 세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기에 오세라고 자호하였는데, 방언*으로 오세와 음이 같았다. [* ‘방언’이란 중국의 언어인 한문만이 ‘진서(眞書)’, 곧 ‘참된 글’이고 주변 국가의 말들은 ‘변방의 말’이란 뜻으로 부르는 말. 여기서는 조선어를 가리킴.]

신 교수 등의 번역서는 대체로 (가)의 방식을 취하였고, 나는 (다)의 방식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가)의 방식을 취할 경우 옛 글의 ‘표현’을 일단 그대로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현대 독자가 읽을 때 전공자가 아니라면 정확한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거나 불편할 수 있다. (나)의 방식을 취할 경우 현대 독자가 걸림 없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옛글을 쓴 이가 지니고 있던 오늘날의 세계관이나 의식과는 다른 세계관이나 의식세계를 제대로 드러내 보여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옛 사람의 의식에 전제되어 있는 세계관을 오늘날의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으로 독자가 오해할 여지가 남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 신 교수는 지난번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필자는 북한과 남한의 고전 번역의 차이점을 떠올려 본다. 북한의 고전 번역본은 대부분 대중과의 소통을 가장 우선하여 많은 고전의 어휘들을 의역하여 현대어로 풀어쓰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남한의 번역본은 주 독자층을 어떻게 상정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북한에 비해서는 고전의 어휘를 그대로 되살려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신 교수의 지적에 위의 분석틀을 적용시킨다면, 북한은 (나)의 방식을 선호하고, 남한의 연구자들은 개별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가)의 방식을 선호한다는 지적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일정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의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 교수 등의 이번 <어우야담> 번역서는 어떤 대목에서는 (가)의 방식을, 다른 대목에서는 (나)의 방식을 취하였다. ‘방언’이란 낱말만 가지고도 그 예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은 (나)의 방식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구라파란 그 지역말로 ‘커다란 서쪽’이란 뜻이다.” (214쪽)

“이마두는 이인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서 이에 <천하여지도>를 그리고, 각기 그 지역의 말로써 여러 나라에 이름을 붙였다.” (216쪽)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그은 곳은 원문 ‘방언(方言)’을 옮긴 대목이다. 이렇게 어떤 곳에서는 (가)의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는 (나)의 방식으로 옮기면서 아무런 설명이 없는 점도 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불만족스럽다. (내가 이 책에 관해 어떤 디지털 색인(索引)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이런 대목을 바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처음 받아 밤새워 읽었을 때 이미 이런 대목들이 눈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 교수는 나의 글에 대해 지난 번 반박의 글에서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중세 보편주의 문명권의 지식인에게서 근대 민족주의적 의식을 찾으려는 의도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시각이 획일시되어 중세 문명권에서 살아간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곡해하는 데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민족주의적 시각이 없어 중세 보편주의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근대 민족주의적 시각을 당대의 세계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위의 몇 문장 안 되는 글을 두고도 논의할 거리가 적지 않지만, 논의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번역’ 문제에 국한하기로 하겠다. 한 가지 여기 밝혀두고 넘어가고 싶은 건, 난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중국의 중화주의나 황실사관을 비판하고 있는 게 아니며, 되레 (신 교수의 용어를 빌리자면) ‘보편주의’의 시각에서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중국만이 황제가 있는 나라이고, 천하의 ‘가운데’에 있는 나라이며, 중국의 문자인 한자만이 참된 문자라는 시각은 편협한 특수주의라고 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세계관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는 조선시대의 지식인에게 오늘날의 의식세계를 뒤집어씌워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세계관이 지닌 문제점을 드러내는 일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는 맥락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나는 신 교수의 위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방향을 잃었다. 위의 지적은 (가) 또는 (나)의 방식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해당하는 지적이지, (다)의 방식을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지적이기 때문이다. “중세 문명권에서 살아간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곡해하는 데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우려는 말하자면 (나)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적 시각이 없어 중세 보편주의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은 (가)의 방식에 대한 우려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신 교수는 이번에 <어우야담>을 펴내면서 (가) 또는 (나)의 방식으로 번역한 뒤, 필자가 “(다)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을 하자, “번역은 모름지기 (가) 또는 (나)의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의사소통이란 이렇게 어려운 문제이다.

다시 주장을 분명하게 하자면, 나는 유몽인에게 “근대 민족주의적 의식”을 뒤집어 씌워, 그가 ‘방언’이라고 적고 있는 부분을 뜯어고치자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의 방식처럼 거기에 적절한 풀이글을 다는 게 번역자의 의무라고 지적했을 뿐이다. 나는 되레 유몽인의 글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중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한 조선조 선비들의 시각을 포함해 그들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낱말들을 충실히 본디 그대로 살려두고, 대신 그 의미의 맥락과 쓰임새를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의 방법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 누가 독자인가?

신 교수 등이 이번에 내놓은 <어우야담>이 이런 혼선을 겪은 건 ‘누가 독자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신 교수 등은 이 책을 내놓으면서 어떤 독자들이 읽을 것이라고 기대했는가. 연구자들인가, 아니면 일반 독자들인가. 대단히 송구한 발언이지만, 내가 보기에 연구자들이 읽기엔 부족한 대목이 없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고,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불친절한 대목이 없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다.

먼저 연구자의 시각에서 이 책을 뜯어보자. 지난 번 글에서 나는 <장자>와 관련한 두 대목의 오역을 지적했고, 신 교수는 두 대목의 오역을 인정한 뒤, 다른 대목에서는 옮긴이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교감했으며 주석 작업을 진행했는지 비교적 길게 설명했다. 나는 진심으로 옮긴이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한글본도 도움이 되려니와, 무엇보다 각종 <어우야담> 판본을 견주어 놓은 한문본 작업은 앞으로 <어우야담>을 연구하는 이들이 참조할 때마다 고마움을 느끼게 만들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왕에 우리가 “우리 출판문화와 학술연구의 발전”을 위해 말머리를 연 이상 이 문제 역시 냉정하게 논할 수밖에 없다. 신 교수는 지난 번 글에서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라는 이 기자의 지적에 대해서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며 “우리 나름대로 행한 수고와 양심을 보여주기 위해” 역자들의 주석 작업을 비교적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주석 작업에 대한 나의 시각은 변함이 없다. 나 또한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므로 내가 지난번 글처럼 판단한 근거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이번 번역본은 어떤 대목은 전거를 밝히고 있으면서, 다른 대목에선 전거를 밝히지 않고 그냥 넘어가고 있다. 일관성이 없으므로 연구자가 읽을 때는 혼란스럽다. 전거가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있는데 찾아보지 않았다는 건지, 오늘날 판본에 없거나 다르다는 건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이래서는 <어우야담>의 완정본이 될 수 없다. 가령 아래의 경우들이 그렇다.

① 그러므로 <서경>에 이렇게 이르고 있다. “별에는 바람을 좋아하는 것이 있으며, 비를 좋아하는 것이 있다.” (508쪽)

→ 이 구절은 내가 찾아본 결과 <서경(書經)> ‘홍범(洪範)’편에 나오는 글이다. <서경>에는 “星有好風, 星有好雨.”이라고 하여 “星有好風好雨.”라고 한 <어우야담>과 몇 글자 다르다. 또 <서경>은 백성과의 관계를 논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고, <어우야담>에서는 천문기상을 논하면서 나온 것이어서 맥락 또한 다르다.

② <좌전>에 이르길, “화살이 내 손을 뚫고 팔꿈치에 미쳤으나 내가 부러트리고 말을 몰았다.” (621쪽)

→ 이 구절 역시 찾아보니 <좌전(左傳)> ‘성공(成公) 2년’(B.C. 589년) 조에 나오는 기사이다.

오늘날 고전들은 모두 색인(索引) 작업이 나와 있고 또 대부분의 주요 고전들은 전산화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전거를 당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문제 또한 ‘매우 사소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철저한 작업을 거치지 않고서 우리는 <어우야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가령 당시 조선조 지식인들이 <서경>이나 <좌전>을 어떤 판본으로 어떻게 읽었는지가 이런 사소한 대목에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들은 어떤 곳에는 원문을 찾아 밝혀두고, 다른 곳에선 아무 설명 없이 넘어가고 있다. 그러면 연구자의 시각에서 볼 때 옮긴이들이 도대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주석 작업을 했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대목은 일반 독자의 시각에서 볼 때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이 정도에서 그치기로 하겠다. 그러나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의 시각에서도 불만스러울 수 있는 대목이 몇 가지 있다. 나 또한 독자로서 궁금한 것, 두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다. 이건 정말 질문이다.

1) ‘태사공’은 누구인가  

<어우야담>에는 적어도 세 차례 ‘태사공(太史公)’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①홍도 가족의 인생유전(#10, 41쪽) ②황여헌과 정사룡의 문장(#185, 318쪽) ③제목과 무관한 시권(#337, 541쪽) 등이 그런 예이다.  

‘태사공’이란 잘 알려진 바대로 한(漢)나라 때 중국의 역사가인 사마담(司馬談)과 사마천(司馬遷) 부자로 인해 널리 알려진 관직 이름이다. 한나라 왕실의 역사기록관인 사마담-사마천 부자는 대를 이어 <사기(史記)>를 완성했는데, “태사공은 말한다”(太史公曰)이란 형식으로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의 평가를 남겼다.

그런데 <어우야담>에 바로 그 “태사공은 말한다”(太史公曰)는 코멘트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코멘트가 등장할 때마다 매우 신선했고 가벼운 전율을 느꼈다. 모차르트가 망나니 질을 하다 아버지의 얼굴과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독자로서 매우 궁금하다. 도대체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이 태사공이란 누구인가.

태사공이 코멘트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어우야담>에 소개된 사람과 사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대목이 사마천의 말을 따온 것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유몽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것일까. 유몽인은 대사간(大司諫)의 벼슬을 지냈는데, 당시 관행으로 대사간이 스스로를 ‘태사공’이라 부를 수 있었던 걸까? 일반적으로 태사공이란 사관(史官)을 지칭하는 것이고, 사간(司諫)이란 임금에게 시정에 대해 건의하는 간관(諫官)이 아닌가.

만약 유몽인이 스스로를 ‘태사공’이라 지칭한 것이라면, 이는 유몽인이 <어우야담>을 저술할 때의 자의식과 태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유몽인이 스스로를 ‘태사공’이라 지칭한 것이라 하더라도 의문이 다 풀리지는 않는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소개한 많은 인물과 사건에 대해 스스로 자유롭게 개입하면서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럴 때 그는 스스로를 ‘태사공’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가 자칭 ‘태사공’이라고 한 게 아니라면, 그 사안과 인물에 대한 당시 사관(史官)의 평가를 유몽인이 옮기면서 “태사공은 말한다”라고 한 것일까? 그러나 사관이 기록한 사초(史草)는 당시 임금도 감히 볼 수 없었던 물건이므로 사관의 평가를 유몽인이 열람하거나 들을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대체 어찌 된 걸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나라에서 벌어졌던 이런 사태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질문이라 하더라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태사공’이란 누구인가. 신 교수 등이 이번에 상재한 책에선 의문을 풀지 못했다. 혹시 이미 이에 관한 연구가 발표된 바 있거나 신 교수 등 옮긴이들이 이에 관한 연구가 있으시다면 이번 기회를 빌려 소개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옮긴이들의 풀이가 절실하게 필요한 대목인 것은 아닐까? 만약 이 문제가 아직 학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면, 적어도 지금까지 연구로는 왜 유몽인이 ‘태사공왈’이란 표현을 등장시켰는지 해명되지 않았다는 풀이글이라도 그 말이 등장하는 대목에 달아놓았어야 하지 않을까. <어우야담>을 전공한 이들이 다른 연구자와 독자들에게 해야 할 서비스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2) 갑자순(甲子旬), 갑인순(甲寅旬), 갑신순(甲申旬), 갑오순(甲午旬) 등은 무슨 뜻인가   

역시 나의 무식함을 드러낼 수 있는 질문이지만 궁금한 걸 푸는 게 더 중요하니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번에 서평을 쓰기 위해 신 교수 등이 펴낸 한글본 <어우야담>을 읽으면서 ‘일기의 관찰과 예후’(#319, 505~512쪽)라는 글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조선(한국)이 지리적 기후적으로 중국과 다르므로 일식의 관찰이나 일기 변화 등도 중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천문 관측이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이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번역이 좀 까다로운 대목에 속한다. 옛사람들의 천문지식이나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옮긴이들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이 글에 나오는 갑자순(甲子旬), 갑인순(甲寅旬), 갑신순(甲申旬), 갑오순(甲午旬) 등은 무슨 뜻인가. 음력의 용어인 것으로 짐작은 가지만 한글본에는 풀이글이 없어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절기의 변화에 따라 일기가 달라짐을 서술한 듯한데 분명하지가 않다. 가르침을 구한다.

또 ‘일기의 관찰과 예후’라는 글의 끄트머리에는 여기 서술한 내용이 “유대정이 일찍이 눈으로 보아 징험한 것”이라고 유몽인은 기록했는데, 흥미로운 건 여기 나오는 내용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중국의 민간 속담에도 구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구름이 동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서, 남, 북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내리는 비의 양이 달라진다는 내용 따위가 그런 것들이다. 구름이 가는 방향이란 다름 아니라 바람이 부는 방향이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내리는 비의 양이 달라진다는 관찰은 경험적으로 사실일 수 있지만, 어떤 지형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령 구름이 높은 산을 넘을 때 비를 뿌리고 간다는 건 자연과학적으로도 사실이지만, 높은 산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관찰 사실은 달라질 수 있다.

결국 갑자순(甲子旬), 갑인순(甲寅旬), 갑신순(甲申旬), 갑오순(甲午旬) 등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유대정이 일찍이 눈으로 보아 징험한 것”의 내용과 진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상론할 겨를은 없지만, 중국의 속담과 유몽인의 기록을 비교해보건대, <어우야담>에 실린 유대정이란 인물의 천문 현상 관찰 내용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너무 시시콜콜하고 시답잖은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대목 또한 조선조 선비들의 의식형태를 평가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본다. 오늘날은 <삼국사기>에 실린 일식(日蝕) 관련 기록까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계산하고 검증해보는 시대다. 갑자순, 갑인순 이런 용어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밝혀놓지 않고 넘어가서는 번역을 완성했다고 할 수 없다. 일반 독자의 시각에서 볼 때에도 ‘일기의 관찰과 예후’같은 글의 번역과 해석은 한번 읽고 이해하기에 충분하지가 않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내가 보기에 이번 신 교수 등이 상재한 <어우야담>은 연구자들이 읽기엔 부족한 대목이 적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고,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수월하지 않은 대목이 적지 않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들이 독자를 대상으로 풀어주어야 할 궁금증이 충분히 해소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를 논하는 까닭은, 우리가 옛 글을 오늘날의 글로 풀어 출판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옮겨야 경제적이면서도 의미의 왜곡을 피할 수 있고, 또 어떤 대목에 진정한 풀이글이 필요한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무런 사감(私感) 없이 “우리 출판문화와 학술연구의 발전”을 위해서 이런 불편한 문제를 논하는 필자의 충정을 신 교수 등이 이해해주리라 믿을 뿐이다.

3. 인문학은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학문이다

마지막으로, 신 교수는 지난 글에서 “우리의 번역 수준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대부분의 번역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져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고전 번역을 체계적으로 점검하며 지원하는 시스템이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그 대목을 모두 따놓자면 아래와 같다.

필자는 한국한문학을 전공하기에, 중국 주석서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기자의 지적대로 중국의 주석서가 한국의 번역서에 비해 수준이 높다는 데에는 공감하며, 역자들의 <어우야담> 번역서가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 역시 충분히 인정한다. 나는 여기에는 경제 지표나 주석자들의 열성과 노고만으로 단순 대비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개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중국은 완벽한 주석서를 출간하기까지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며, 이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 학계에서는 번역서에 대해 평가가 매우 미미하다. 대부분 번역서는 일반 논문 한 편보다도 못하거나, 기껏해야 동등한 비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번역서에 대한 평가가 전무하다시피 하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에 열성과 노고를 바치려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번역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져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고전 번역을 체계적으로 점검하며 지원하는 시스템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주요 고전에 대한 교감을 수반한 수준 높은 번역을 수행하기 힘들게 하며, 우리의 번역 수준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는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나름대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천학비재한 사람으로서 위의 대목에 동의할 수 없기에 내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국가 쳐다보지 마라  

우선 나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국가가 뭘 해주길 바라며 그쪽을 자꾸 쳐다보는 데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다. 국가가 하는 일은 무엇을 하든 그건 결국 국가의 사업이다. 언제 어느 곳에 존재했던 국가가 진정한 인문 정신의 발양을 위해 투자했던가? 어떤 계몽군주의 위대한 발자취도 결국은 군주와 통치자들의 치적을 위한 사업일 뿐이다.

물론 나는 국가의 예산 가운데 좀더 많은 부분을 인문 분야로 돌리도록 하는 데에는 적극 찬성한다. 그거야 당연히 나쁠 게 없다. 그럼에도 인문학을 한다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무관하다. 국가가 돈을 주든 말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높은 평가를 해주든 말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가장 기초적인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게 좋아서 인문학을 하는 게 아닐까.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는 채. 사실 난 국가가 제대로 된 인문학 연구를 악랄하게 방해하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국가가 쓸데없이 나서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 한 사람은 직장에 사표 던지는 데 3초 이상 걸리는 걸 수치스러워 하는 어른이다. 물론 사표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대전제이겠지만. 몇 년 전에도 그는 서너 번째쯤 되는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흐린 술집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나도 단골인 그 술집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그날 아내가 귀갓길에 쌀을 사오라고 했는데 지갑을 열어보니 2만원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걸로 그는 집에 들어가는 길가에서 난초 파는 이를 만나 춘란을 한 뿌리 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난이 중요하지 쌀이 중요해?”

그렇다. 난이 중요하지 쌀은 중요하지 않다. 이건 한 가난한 인문학도의 행위예술이다.

나는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게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대학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안경알을 가는 걸로 생업을 삼다 폐병 걸려 죽었고, 인문학의 정신과 같은 맥락의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모차르트도 고흐도 살아생전엔 아무런 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가난뱅이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런 죽음도 작은 일이다.

중국의 학자들, 대부분 가난하다. 개혁개방 이전, 중국공산당의 지배체제 아래서 그들은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연구 성과는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좀 달라지긴 했지만, 연구기관과 연구원을 국가가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 공산당의 방침에는 지금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중국 대학교수의 기본급은 이천 몇 백 위안, 한국 돈으로 30만원 남짓이다. 그들이 펴낸 책은 전공자가 아니라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의 선비들처럼 꾸준히 그 길을 가고 있다. 이건 매우 강렬한 인문학의 전통이다. 우리가 자꾸 국가나 자본 쪽을 쳐다보면 이런 인문학의 전통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존중받지 아니한다

몽골이 중국을 지배했을 때, 어떤 지식인은 몽골의 원(元) 제국 조정에 들어가 녹을 먹었고 어떤 지식인은 그걸 거부했다. 허형(許衡)과 유인(劉因)은 각각 양쪽을 대표하는 경우로 이름을 남겼다. 허형이 원나라 조정의 부름을 받고 베이징으로 가던 도중에 유인을 방문했다. 유인은 허형에게 “단 한번의 부름에 응한 것은 지나치게 가벼운 처신이 아닌가”하고 슬쩍 나무랐다. 그러자 허형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오”(不如此道不行)라고 받아쳤다. 나중에 원나라 조정은 유인에게도 벼슬을 주겠다고 불렀지만 유인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유인은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존중받지 않을 것이오.”(不如此道不尊)

인문학자라고 굶어죽으란 법은 없다. 인문학 저변의 확산을 위해 대중적 저술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며, 나는 그런 쪽에 재능을 가진 이들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다. 허형이 한 말처럼 그렇게 대중화작업을 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대중화 작업은 인문학의 ‘샘’이 아니라 ‘흐름’이라고 본다. 인문학의 샘이 마르지 않게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선 유인처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존중받지 않을 것”이라고 고집하는 태도가 인문학을 하는 이들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뚝심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면, 어떤 글을 상재하든, 무엇을 중요하게 다루고 무엇을 아낌없이 버릴 것인지가 분명해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상이 신 교수께서 성의 있게 올려주신 글에 대한 나의 또 다른 몇 가지 단상들이다.

[추신] 나는 이 글 또한 중국에서 마무리했다. 지난달 24일 귀국한 뒤 30일 다시 중국으로 나와 여기저기를 돌다 쿤밍(昆明)에서 이 글을 내 블로그에 올린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신 교수 등 연구자들이 6년 광음(光陰) 피와 땀으로 옮긴 <어우야담>을 한 권 사서 서재에 모셔두길 권유한다. 한국 인문학의 진일보를 위한 발전 기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책 디자인도 그지없이 세련됐고 장정도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논한 건 좀더 나은 번역을 위해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내용을 얘기한 것이다. 독자 제현들의 혜량(惠諒)을 구한다.  

09. 08. 30. 

P.S. 국가와 인문학의 관계, 그리고 인문학 대중화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중국통답게 중국 학자들의 학문 태도를 예로 들면서 궁핍한 여건 속에서도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의 선비들처럼 꾸준히 그 길을 가고 있다. 이건 매우 강렬한 인문학의 전통이다. 우리가 자꾸 국가나 자본 쪽을 쳐다보면 이런 인문학의 전통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대목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기본급은 이천 몇 백 위안, 한국 돈으로 30만원 남짓"의 대우를 받더라도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게 인문학이고 인문학 전통이라면(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다른 특혜들이 주어진다. 적어도 자료수집에 관한 비용은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안다), 우리에게 그러한 인문학은 전통은커녕 진작에 씨가 마른 게 아닌가 싶다(적어도 나의 견문으론 그렇다). 더구나 CEO가 대통령을 하고 돈이 존중받는 나라에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존중받지 않을 것”이란 유인의 말은 존경스럽지만, 우리의 현실이 아니다(한국인은 구원은 믿으려고 할 망정 도(道)는 존중하지 않는다). 나는 '안경알 가는 철학자'를 스피노자 이후에 들어본 바가 없다. 이 또한 인문학자들의 '로망'이요 '노스텔지어'가 아닐까 한다.   

덧붙이자면, 나는 국가와 학문은 생각보다 끈끈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위기지학'(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동물이고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한 인간조건에서 해방된 '학문'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명한 중국학자 지셴린(계선림)의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대인다운 여유와 애국심이었다. 비록 문화혁명시에 혹독한 고초를 당하고 자살까지 시도했던 학자였지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그 또한 중국의 '강렬한 인문학의 전통'이 아닐까 싶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08-30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와 인문학의 관계, 그리고 인문학 대중화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해주고,,,"를
다른 말로는 'Back to Back'며, 이 반대말은 '엎친데 덥침',,,

로쟈 2009-08-31 00:30   좋아요 0 | URL
^^

펠릭스 2009-08-31 01:14   좋아요 0 | URL
인문학이 인간 존재감을 일께워 줄 것이라는 기대감속에
올바른 절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뜻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2009-08-30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3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ti 2009-08-30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글이네요. 퍼가요^^

로쟈 2009-08-31 00:28   좋아요 0 | URL
이상수 전 기자는 사실 동양철학 박사입니다...

델러웨이부인 2009-08-30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봤습니다~

로쟈 2009-08-31 00:29   좋아요 0 | URL
의외로 반응이 좋네요.^^

2009-08-31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31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ilocinema 2009-08-3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호 논박의 전과정을 지켜볼 수 있어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9-09-01 20:57   좋아요 0 | URL
옮겨놓는 건 별로 힘든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