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며칠전부터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시 손에 들고 주로 후반부를 읽었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고 관심 때문이기도 한데, 사실 두께가 두께인 만큼 단숨에 일독하긴 어려운 책이어서 이렇듯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읽어두는 것. 단, 원서와 같이 읽기 때문에 진도가 빨리 나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젝의 독자라면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을 여러 번 숙독해봄 직하다(일독도 어렵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교정도 필요하다. 더없이 요긴한 번역본이긴 하나 으레 그렇듯이 분량이 분량인 만큼 실수와 착오도 드물지 않다. 물론 대부분은 사소한 것이나 간혹 문제가 되는 오역도 있다. 그런 걸 고쳐가면서 읽으면 된다(조금 난해할 듯싶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책의 가치는 폄하될 수 없다. 사실 지젝보다 난해한 책들도 부지기수다).    

가령, "여기서 우리가 제안해야 하는 것은 헤겔적인 '무한판단'으로서 타자성에 대한 적나라한('비승화된') 미움만을 전시하는 폭력적 직접성이 '쓸모없는' 그리고 '과잉적' 분출의 사변적 정체성을 사회에 대한 보편적 반성 과정과 함께 주장해야 한다. 아마도 이 우연일치에 관한 궁극적인 실례는 정신분석적 해석의 운명일 것이다."(590쪽)는 '제안'을 보자.  

일단 이 책에서 '정체성'이란 단어가 나오면 한번쯤 주의해야 한다. 이 'identity'란 단어가 '정체성'이란 뜻보다는 보통 '동일성'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speculative identity'라고 하면 거의 무조건 '사변적 동일성'이다('사변적 정체성'이란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동일성'이라고 하면, 보통 '무엇과 무엇의 동일성'이란 구문으로 쓴다. 이 문장도 마찬가지다. 원문은 이렇다.   

"What we should propose here is the Hegelian 'infinite judgment' assertimg the speculative identity of these 'useless' and 'excessive' outbursts of violent immediacy, which display nothing but a pure and naked ('unsublimated') hatred of the Otherness, with the global reflexivization of society; perhaps the ultimate example of this coincidence is the fate of psychoanalytic interpretation."(300쪽) 

핵심구문은 'the speculative identity of A with B'(A와 B의 사변적 동일성)이다. 다만 A에 해당하는 것이 관계사절까지 거느리고 있어서 다소 길 따름. 국역본은 이를 간과해서 "사변적 정체성을 사회에 대한 보편적 반성 과정과 함께 주장해야" 한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옮겼다. 'global reflexivization of society'도 '사회에 대한 보편적 반성 과정'이 아니라 '사회의 지구적 재귀화' 정도다('재귀화'는 울리히 벡 등의 성찰적/재귀적 근대론자들이 쓰는 용어다).    

유사한 사례를 더 들자면, "지속되는 '테러와의 전쟁' 속에 있는 대립쌍들의 이러한 '사변적인 정체성'은 우리로 하여금 일련의 중요한 정치이론적 결과들을 도출하도록 강요하는데..."(734쪽)에서도 "대립쌍들의 이러한 '사변적인 정체성'(This 'speculative identity of opposites)"은 마찬가지로 "대립쌍들의 이러한 사변적 동일성"이란 뜻이다. 여하튼 사단은 '동일성' '정체성' 등을 모두 카바하는 'identity'의 오지랖이 우리말보다 넓다는 데 있다('진리'와 '진실'을 다 카바하는 'truth'처럼).

한두 가지만 더 짚어본다. "여기서 첫번째 교훈은 지배 이데올로기('근본주의 대 자유주의')가 부과하는 선택이 실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항상 세번째 가능성을 찾아야만 한다. 두번째 교훈은 근대성 또는 반성적인 '위험사회' 이론의 주제 중 하나가 오늘날 우리 모두가 너무나 많은 선택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682쪽)  

이 대목은 번역만 가지고는 오역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원문과 대조하면 너무도 단순한 착오가 포함돼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The first lesson here here is that choice imposed by ruling ideology ('fundamentalism versus liberalism') is not a real one: we always have to look for a tertium datur. One of the topoi of the theories of second modernity or reflexive 'risk society' is that today, we are all exposed to too many choices."(348쪽) 'second modernity'(이차적 근대)가 '두번째 교훈'으로 잘못 옮겨진 것. '반성적인'이라고 옮겨진 'reflexive'도 보통은 '성찰적' 혹은 '재귀적'이라고 옮겨지는 듯하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좌표에 관한 얘기.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좌표는 - 모택동에 의해 복권된 기괴한 세번째, '법가'의 입장, 평등주의적인 혁명적 공포의 지지자와 함께 - (전통적인 관습, 권위 그리고 교육에 의존하는) 유교와 (자발적인 자기-계몽을 추구하는) 도교 사이의 대립에 의해 지배되었다(우리가 느끼기에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는 신보수주의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결정된다). 유교와 도교는 서로에게 기생하며 둘 모두 체계에 대한 모든 대안적 선택들을 가로막는다."(683쪽)  

이 부분도 번역만 가지고는 오역을 식별하기 어렵다. 원문은 이렇다. "The ideological constellation in ancient China was dominated by the opposition between Confucianism (reliance on traditionaal customs, authority, and education) and Taoism (spontaneous self-enlightenment) - with the uncanny third position of 'legalists' rehabilitated by Mao Zedong, partisans of egalitarian revolutionary terror. In our perception, today's  ideological constellation is determined by the opposition between necconserverative fundamentalist populism and liberal multiculturalism - both parasitizing on each other, both precluding any alternative to the system as such."(349쪽) 

특이한 경우인데, 역자는 하이픈의 범위를 착각하여 두번째 문장을 엉뚱하게도 "(우리가 느끼기에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지도는 신보수주의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사이의 대립으로 결정된다)"고 괄호안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both'가 가리키는 것이 '근본주의적 민중주의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유교와 도교'가 돼버렸다. '둘다'라고 했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유교와 도교는'이라고 해놓았으니 명백히 오역이다.  

첫 문장은 고대 중국의 이데올로기적 배치는 유교와 도가였고, 법가가 '제3의 입장이었는바, 이 법가는 마오쩌둥과 혁명적 테러를 주도한 평등주의 빨치산(파르티잔)들에 의해 복원되었다는 게 요지. '지지자'이라고 옮긴 '파르티잔'은 짐작에 문화혁명시 '홍위병'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오래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사소한 거지만 지젝의 번역서들에서 종종 반복되는 오역을 지적하고 마무리한다. '오역'이라고 하면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개인적으론 '오역이라고 할 만한' 사항이다. 바로 'arguably'를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이라고 옮기는 것.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슈만의 피아노 대작인 '유모레스크'는 그의 노래들로부터 목소리가 점차 사라지는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715쪽)에서 첫 부분은, "'Humoresque,' arguably Schuman's piano masterpiece"를 옮긴 것이다. 'arguably'는 '논쟁할 수 있는'이란 뜻도 되지만, 보통은 '주장할 수 있는' 쪽이다. 여기서는 "'유모레스크'가 슈만의 피아노 걸작이냐 아니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런 식이 아니라 "슈만의 피아노 걸작이라고 할 만한 '유모레스크'는", 이런 식으로 나가야 한다. 책에 종종 등장하는 'arguably'는 모두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이란 식으로 옮겨졌는데, 이야말로 'arguable'하며 나로선 불편하다(다른 책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덧붙여 말하자면, 문두 부사로 쓰이는 'incidentally'를 '우연히도'라고 옮기는 것도 나를 불편하게 한다.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덧붙여 말하자면'이 문맥에 적합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령 아부 그라이브의 이라크 포로 학대가 미국식 하위문화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하는 이런 대목.  

"군부대에서든 고등학교 교정에서든, 신고식이 과도하게 진행되어 병사들 또는 학생들이 인내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는 수준 이상으로 다치게 되거나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거나 (동료들 앞에서 맥주병을 항문에 삽입하는 것과 같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수행하게 되거나 바늘로 꿰어지는 것 같은 추문이 발생할 때 우리는 미국 신문에서 정기적인 간격으로 유사한 사진들을 보지 않는가(그리고 우연히도 부시 자신이 '해골과 뼈'라는 예일 대학의 가장 배타적인 비밀단체의 성원이었으므로, 입회하기 위하여 그가 어떤 의식을 감행해야 했는가를 알면 흥미로울 듯하다)?"(720쪽)  

여기서 'incidentally'를 '우연히도'라고 옮기는 건 뜬금없다. 이 경우에도 '말이 난 김에 말하자면' 혹은 '덧붙여 말하자면'이라고 해야 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자주 등장하여 독서를 불편하게 하기에 맘먹고 털어놓는다... 

09.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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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0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급 서적일 수록 비평이 필요하군요.
비전문가인 일반 독자의 경우 바른 것과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구별 능력이
부족합니다.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책에 대한 맹신으로)

원문-> 번역(한글,한자) -> 독자의 이해의 경우,
(심심하면 한자사전을 자주 본다는 김훈님의 말이 생각남)
한 독자가 원문에 대한 직독을 한다 하더라도, 그 또한 번역에 해당됨.

외국서적에 대한 번역이 매우 중요함을 새삼 느낍니다. 특히 고급 텍스트를
번역하시는 분들께 심심한 감사드립니다.

저 또한 로쟈님 덕분에 '비평과 번역'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어쩜 '곁다리'라는 말은 인문학의 대중적인 친근미를 더 할 수 있는
적당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비전공자 입장에서)

제 맘속에 인문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철학,문학,미술 등의 용어에 대한 공부 부족으로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구요.(사변적 동일성,,,등) 영어 단어는 알지만
문장으로 엮어지면 몰라버리는 경우와 같겠지만요

로쟈 님이 뒷 따르며 흘려버린 것을 운좋게 줍는다는 의미에 동감입니다.
한 책을 놓고, 독자의 의견과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매번 느낍니다.
비평이나 오류에 대한 수정은 독자에게 좋은 정보라 생각합니다.

조선 말, 일제, 6.25 등, 역사의 질곡을 거치면서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많은 것같습니다. 어차피 인간 사회가 파란만장 하지만요.
분야별 더 좋은 번역서들이 많이 출판되도록 민.관으로부터 지원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9-08-04 13:29   좋아요 0 | URL
네, 지원도 필요하고, 더 중요하게는 독자층이 늘어나야겠습니다...

펠릭스 2009-08-05 07:23   좋아요 0 | URL
어제 저녁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서재5(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를 읽고서야 '~들어주랴'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비평은 원한의 지평을 넘어서야 한다.'외 몇 문장이 마음에 닿았습니다. 특히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읽기(~서재,391~405쪽)를 읽을 때는, 음~ 해체된 백제의 미륵사지서탑(국보11호)을 재건할때 느낄 만한 떨림과 호기심을 갖게 했습니다.(수사반장처럼)

저는 '책세상'의 '릴케 전집'를 가지고 있는데, 꺼내 '비가'를 찾아 읽으려 했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제목이 다른지?)

자연과학에서 원문 번역과 인문학에서 번역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제(자연) 분야에 번역서들을 가끔 볼 때마다 쉽지 않겠다는 생각하곤 했는데. 풍부한 언어적 상상력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또한, 번역서 책값이 대체적으로 비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해가
되더군요.(제2의 창작)

로쟈 2009-08-05 21:40   좋아요 0 | URL
책세상판도 <두이노의 비가 외>라고 돼 있을 듯한데요...

푸른바다 2009-08-0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말하는 '신보수파의 근본주의적 민중주의'가 무엇인지 번역으론 와 닫지 않는군요^^ 이 경우는 우리나라에서의 어법을 볼 때 '민중주의' 보다는 포퓰리즘이 더 적절한 번역인 것 같습니다. '근본주의'라 함은 조지 부시의 기독교 근본주의를 말하는 것인가요? 암튼 네오콘과 미국 민주당간의 대립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제 이해가 맞는 지 모르겠네요. MB 정권도 어찌보면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나라 민주당은 사실 미국 민주당보다도 리버럴하지 않지만...

저도 시차적 관심은 보유하고 있지만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로쟈 님과 더불어 조금씩 읽어가야 겠군요^^

로쟈 2009-08-04 22:50   좋아요 0 | URL
두어 장을 꼼꼼하게 읽으면 나머지 장들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입장은 '상식'과는 좀 다릅니다.'민중주의'란 번역어는 번역본을 그냥 따른 것이구요...

seerblest 2009-08-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guably는 로쟈님 지적대로 오역이 맞습니다. 보통은 문장 전체를 수식하면서 "틀림없이"란 뜻으로 쓰이는 부사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이 아니라 (오히려) "논쟁의 여지(필요) 없이"가 더 정확한 본래의 뜻이죠. 따라서, "슈만의 걸작으로 뽑기에 손색없는 유모레스크" (혹은, 누구라도 슈만의 걸작이라고 손꼽을(주장할) 유모레스크)가 정확한 번역이겠죠. 부사로서의 arguably는 누구라도 기꺼이 그렇게 주장하듯이의 어감을 뜻하니까요.

로쟈 2009-08-04 22:49   좋아요 0 | URL
잘 정리해주셨네요. 짐작엔 형용사 arguable에 너무 의지한 탓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