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에 나온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은 읽기 시작했다가 일더미에 떠밀리는 바람에 제쳐두었는데, 이번주 북리뷰 때문에 다시 책상맡으로 갖져왔다. 알고 보니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도 그 사이에 출간돼 있었다(잠시도 한 눈을 못 팔게 하는군!). <미학 안의 불편함>은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과 겹쳐읽으면 좋겠다. <무지한 스승>에 대한 마땅한 리뷰가 없다 싶었는데, 마침 두 권의 책을 같이 다룬 리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1. 10) '지적 평등’이 두려워 저들은 ‘독학’을 깔본다
지난해 말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그의 또다른 책 두 권이 잇따라 번역돼 나왔다. 먼저 나온 <무지한 스승>은 1987년에 출간된 초기작이며, <미학 안의 불편함>은 미학이라는 틀을 통해 정치를 새롭게 이해하려 하는 랑시에르의 최근 관심을 반영한 2004년 저작이다. 두 책 사이의 시간상 간격은 크지만, 평등·민주주의·정치라는 정통적 주제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지한 스승>은 소재의 독특함 때문에 특히 눈에 띄는 책이다. 랑시에르는 1830~1850년대 프랑스 노동자 운동의 문서고를 뒤지는 고고학적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틀을 세웠는데, 그 첫 성과물이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이었고, 그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기댄 또다른 작품이 <무지한 스승>이었다. 랑시에르가 발견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적으로 각성함으로써 노동자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운다는 전통 좌파의 가정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노동자상이었다. 낮의 노동이 끝난 밤 시간에 노동자들은 시를 쓰고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노동자가 아닌 한 명의 시인 또는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인간들, 그들이 바로 프롤레타리아들이었다. 노동자들은 ‘사유하는 인간’과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전통적인 나눔(분할)을 가로질렀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읽고 쓰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평등한 지적 능력’이었다.
<무지한 스승>은 이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문제를 파고든 작품이다.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문서고 탐사를 통해 찾아낸 독특한 인물 조제프 자코토(1770~1840)를 등장시킨다. “1818년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는 어떤 지적 모험을 했다.” 자코토는 19살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이른 나이에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장 대리를 지내기도 한 수재였다. 1815년 부르봉 왕정이 복귀하자 그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벨기에로 망명해 루뱅 대학의 강사 자리를 얻었다. 기이한 경험은 이때 이루어졌다.
불문학 강사였던 그는 네덜란드어를 몰랐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다. ‘무지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교재로 삼아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사용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스승과 학생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없는 상태에서 학생들은 스스로 프랑스어를 기초부터 학습했다. 스승은 그 자기학습의 조건이자 계기로만 존재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단어들을 조합해 프랑스어 문장을 만들었고 철자법과 문법도 스스로 익혀 완성시켰다. “더구나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초등학생 수준이 아니라 작가 수준이었다.”
이 우연한 경험을 통해 발견한 교수법을 자코토는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전통적 교육을 넘어선 새로운 교육이었다. “자코토는 다른 선생들처럼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님을 알았다.”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경우를 들어 통상의 교육을 ‘바보 만들기’ 교육이라고 말한다. 계몽주의자들의 진보적 교육조차 흔히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에 머무르고 만다. 랑시에르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놓인 불평등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스승이 학생보다 지적 능력에서 우월하다고 전제하고서, 우월한 스승이 열등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관념으로는 영원히 불평등을 벗어날 수 없다.
랑시에르는 불평등을 출발점으로, 평등을 목표로 삼는 사고방식을 전복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의 문제는 지적 능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스승과 학생 사이의 나눔·분할을 거부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식한 자가 지도하고 무지한 자는 지도를 받는다는 발상을 극복할 토대가 마련된다. 모르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칠 수 있으며, 모르는 자가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이런 지적 능력의 평등은 기존 질서의 위계와 자리를 무효로 만들 수 있다. 지배의 작동 조건인 나눔과 분할의 선이 지워지는 것이다.
<미학 안의 불편함>은 이 ‘나눔을 통한 지배 질서의 작동’ 문제를 미학의 틀로 다시 사유하는 텍스트다. 랑시에르는 미학을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이라는 고전적인 정의에 가깝게 이해한다. 이때 감성적(감각적) 인식에 깊이 연루돼 있는 것이 정치다. “미학은 우연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 정치다. 불평등의 구획 아래서 지배받거나 배제당한 자들이 그 구획을 거부하고 평등한 주체로 등장하는 것, 그것이 정치다. 그때 정치는 감성(감각)을 바꾸고, ‘감성의 분할’을 재구성하는 일이 된다.(고명섭 기자)
09. 01. 09.
P.S.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그런 '지적 평등'의 또다른 사례로 들고 싶은 것이 <행복한 인문학>(이매진, 2008)이다. 소외층을 위한 다양한 인문학 코스의 강의 체험담을 모아놓았는데, 이 경우의 '지적 평등'을 낳는 것은 강의를 맡은 교수들의 무지가 아니라 수강자들의 예기치 않은 관심과 열의이다. '행복한 인문학'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인문학이 아닐까. 오전에 나도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썼는데, 내일자 한겨레의 북리뷰는 그 두 배가 넘는 분량으로 이 책을 다루고 있다. 메인으로 다루어진 듯하다.
한겨레(09. 01. 10) 인문학교실의 노숙인 “학교 오은 것 아니라 병원 오은 것 같다”
경제적 지원이 급한 사람들한테 인문학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노원성프란시스대학, 관악인문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해 온 우기동 경희대 교수는 그런 얘기 하는 사람들에게 “그분들 인격을 모독하지 마라”고 했다. ‘그분들’은 노숙인, 교도소 수용자, 임대아파트 주민, 자활근로자들이고 나이는 20대에서 70대까지. 실천인문학·현장인문학·평화인문학·시민인문학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인문학 강좌의 나이 많은 수강자 ‘선생님’들이다.
“나은 요지 움에 들어 학교을 가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은 것 같다. 성프란시스 대학병원에 …. 잊혀지고 버려지고 외곡된 모던것들이 … 새롭게 환희로 덮쳐온다. 한번도 보지도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엄청난 파고로 밀려온다.” 인문학 강의는 까막눈을 갓 벗어난 이분에게 새 세상을 열어주었다. “나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한 또다른 분은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잠재력 속에 무한한 지식의 능력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글쓰기 연습을 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 나는 이 비밀을 찾았다. 인문학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고 공부할 수 있는 문이 열린 셈이다.” 그들 중엔 고학력자들도 있고 한때 기업체 사장으로 ‘잘나가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 집도 절도 없는 그들은 어느날부턴가 ‘웰빙’이 삶의 최고가치인 양 떠들어대기 시작한 이 사회에서 영낙없는 ‘낙오자’들이다.
» 2007년 1월, 아홉달동안 철학과 역사, 문학 등 5과목을 이수하고 최종심사를 통과한 11명의 성공회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학생들의 수료식. 한 여성 수료생이 교가를 부르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들의 자녀를 임대아파트 주민의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며 다른 학교로 배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 …건축 주택단지에서 작은 평수 아파트를 한구석에 몰아서 짓고 조경으로 담장을 치는 사회, 장애인 임대아파트가 들어오면 집값이 떨어지고 자녀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반대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사회, 일용직 근로자의 쉼터가 들어서면 우범지역이 된다고 쉼터의 건축을 반대하는 사회, 그리고 겉으로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경멸하고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앞다투어 물질적 가치와 돈을 최우선 가치로 추구하는 사회.”
그렇게도 아득바득 달려온 경제성장의 최종 목적지가 여기일까? 우 교수가 보기에 이런 사회에선 제아무리 제철 과일 먹고 등푸른 생선을 즐기고 틈나는 대로 러닝머신에 올라타 몸매를 가꿔봤자 ‘웰빙’은 ‘꽝’이다.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 능력을 잃어버린 ‘웰빙’은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이기적 탐욕 극대화와 타락의 또다른 변종일 뿐이다. 재학생 절대다수를 고시 지망생들이 차지하고, 대학마다 인문학 과목들은 정작 전공학생들에게조차 외면당해 폐강 위기에 몰리지만 취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만한 실용과목들은 강의실이 미어터질 지경이 되는 이런 사회에서 인문학의 박제화·고사는 당연지사라는 게 소설가 임철우씨의 생각이다.
인문학의 죽음과 약육강식의 가짜 웰빙사회는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역코스를 가속적으로 질주해 간다. 그럴수록 빈곤한 약자들은 타인의 시선, 소외, 가정폭력, 질병, 마약, 범죄, 굶주림 등의 강고한 포위망에 겹겹으로 에워싸이면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고 체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견 강자의 승리로 게임은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패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금융공황을 통해 이 말기적 증세가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뒤덮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1995년 미국의 작가 겸 사회평론가 얼 쇼리스가 이 죽음의 코스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쇼리스는 죄수와 마약중독자,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수업’을 통해 빈민들에게 정치적 삶을 일깨우고 ‘공적 세계’로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혁명(클레멘트 코스)을 시작했다. <희망의 인문학>이 그 교본이었다.
2005년 9월 서울 노원구에서 성프란시스대학이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한국판 쇼리스 혁명이 시작됐다. 임철우씨는 이를 “저 광포한 자본주의의 질주에 맞서는 최초의 작은 반역”이라고 했다.시민인문학 강좌는 지금 모두 30여개로 늘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도종환 <담쟁이>)
구세군브릿지센터에서 시인 도종환씨가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시작 배경을 얘기하고 낭독했을 때 박수친 수강생들 중엔 난생처음 시에 감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20대 대학생들한테서는 거의 경험해보지 못한 진지한 반응과 열기” 속에 인문학은 그렇게 그들을 자긍과 자존의 존재로 바꿨다. 존재의 소리에 목말라 하고 영혼의 물음에 민감한 ‘소외된 삶’들이야말로 인문학 혁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에서 2학기(1학기는 12주)에 걸쳐 인문학(문학)을 강의한 임철우씨는 “정작 훨씬 많은 걸 배운 쪽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했다.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박남희씨는 구제받은 것은 수강생들이 아니라 “인문학 자체”라고 고백했다. 성프란시스대와 관악인문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한 최준영씨도 “결국 인문학 강좌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인문학 그 자신인 셈이고, 노숙인을 비롯한 시민인문학 수강생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됐다”고 했다. 쇼리스가 말한 대로 “가르치는 사람 역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 맺기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들 시민교수들이 인문학 강좌에 대한 생각과 강의 체험을 고백록 형식으로 엮은 것이 <행복한 인문학>(이매진 펴냄)이다.(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