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한 서평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8070). 피에르 바야르라는 한 프랑스 비평가의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으로 '어느 ‘탐정 비평가'의 새로운 책 읽기'란 타이틀이 붙어 있다. 최근에 읽은 서평들 가운데 가장 신선하며 흥미롭다. 가령,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관한 고민 같은 건 아주 실제적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에 대해 강의해야 할 때 맞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학생들의 독서 여부를 평가해야 할 때 봉착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어느 정도 읽은 것을 읽었다고 평가해야 하는가?). 거기에다 바야르의 '탐정 비평'도 매우 흥미롭다.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되면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독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편집광적이고 망상적인 독서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Comment parler des livres que l’on n’a pas lus?)』(Editions de Minuit, 2007)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Qui a tue Roger Ackroyd?)』(Minuit, 1998)
책읽기의 괴로움, 책은 꼭 다 읽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 집단의 착각 혹은 위선 한 가지.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 지식에 대한 자발적 선의지를 상정한다. 지식의 추구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독서는 일종의 연애이며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타 등등.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떻게 한 초등학생이 단번에 라틴어에 숙달되게 되는지, 어떤 기호(記號)들이 (사랑이나 고백하기조차 창피한 욕구로 인해) 그의 배움에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거꾸로 짝사랑이든 지적 스노비즘이든 이러한 개인적 동기부여를 얻지 못할 때 우리의 독서 경험은 흔히 생각보다 괴롭고 지루한 일이 되곤 한다. 더구나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수백수천권의 필독서를 읽을 의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의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끝까지 다 읽고 얘기해야할 의무 같은 구속에 짓눌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책이라는 것, 독서라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며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읽지 않은 책’의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자명한 노릇이고 습관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지 않고 읽은 척 떠들어야할 상황도 있는 것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제목 선정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피에르 바야르가 올해 초 펴낸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독서 행위를 둘러싼 이러한 작은 오해와 환상들을 폭로하면서 독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를 시도하는 책이다.
하지만 분명 이론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저작은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이론적 면죄부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고 그 때문에 출간 즉시 언론의 주목을 받아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동시에 (슈퍼마켓과 공항 서점에까지 깔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필요 이상의 가혹한 비난을 받아 저자를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뜨렸다. 다행히 독서와 교양에 대한 죄의식이나 부담감이 전무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이러한 선정적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독서와 비독서의 모호한 경계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안 읽은 책’의 여러 양상을 검토하고 있는데 (모르는 책, 훑어본 책, 본 적은 없고 들어만 본 책, 읽었는데 잊은 책 등)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읽은 책’(독서)과 ‘안 읽은 책’(비독서)의 구별이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읽다가 만 책은 읽은 책인가 아닌가? 책의 몇 퍼센트를 읽어야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은 무엇인가? 오래 전에 읽어 다 잊어버린 책,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책은 펼쳐본 적도 없지만 대충 들어 개요를 알고 있는 책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더구나 모든 책은 읽고나면 즉시 점진적 망각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고 심지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망각은 벌써 진행 중이게 마련인데.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푸네스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지속적 망각이 없는 완전한 기억은 실질적으로 전적인 무의미를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가 책들과 맺는 관계는 결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고 투명한 지식의 장소도 아니며 기억의 여러 파편이 섞여 있는 공간, 이 책에서 읽은 구절과 저 책에서 읽은 구절이 맥락에서 분리되어 유령처럼 배회하고 서로 결합하고 혼동되는 ‘변신-분리-합체’의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 경험은 대부분이 ‘철저한 완독’과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책’의 중간에 있고 이 중간 지대에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단계와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애초에 꼼꼼한 완독이 어려운 작품도 있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묘사 · 설명 · 고찰 · 대화를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를 한자 한자 다 읽었단 말인가?” 이렇게 독서와 비독서의 구별이 애매해진다면 거꾸로 독서 자체의 규정도 어려워지며 결국은 텍스트의 개념 역시 교란될 수밖에 없어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이 된다.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 텍스트를 창조하라
그래서 바야르는 이러한 기억/망각의 문제를 텍스트 자체의 지위에 관한 논의로 이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더라도 우리는 일부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고 기억하는 부분들, 개요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텍스트는 결코 단일한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문학 텍스트의 경우 그 근본적 다의성으로 인해 한 명의 독자가 그 다양한 의미망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는 기껏해야 한두 개의 의미망밖에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원론적으로 말해 애초에 글로 된 텍스트는 조각이나 그림과는 달리 우리가 그것에 대해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 바야르가 기대고 있는 미셸 샤를르(Michel Charles)의 해석학적 구조주의의 입장을 따를 경우 글이란 언어 기호로 되어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독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음성과 의미로 실현시키지 않을 경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 뭉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문학 작품은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완전한 세계가 아니어서 묘사하는 세계에 대해 일련의 단편적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고 이 정보들은 독자의 개입 없이는 충분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해 접하는 것은 여러 개의 문장뿐이다. 하지만 험버트가 롤리타의 눈썹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롤리타가 눈썹이 없는 소녀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문학 텍스트란 독자의 보충 없이는 불완전한 파편들의 공간일 뿐이어서 텍스트의 문면을 넘어서는 독자의 상상과 해석은 나이브한 문학소녀들이나 저지르는 주제넘은 투사 독서가 아니라 텍스트가 텍스트로 존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는 언제나 모자란) 텍스트를 보충하는 이러한 독서 작업에는 개인적 경험, 세계관, 우리가 속한 문화적 틀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보니 주관적 · 사회적 필터와 무관한 객관적 독서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읽는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당신이 읽는 『부서진 사월』과는 다른 텍스트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수의 텍스트이며 텍스트의 단일성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구축해야할 픽션이다. 더구나 책을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는 진행 방향으로 읽는 선조적 독서 말고도 다양한 다른 독서/비독서 방식이 있고 (읽다 관두기, 뒤쪽부터 보기, 훑어보기, 필요한 챕터만 찾아 읽기, 이곳저곳을 뒤지며 마구잡이로 읽기,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다짐하기 등등) 그 방식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서 경험을 결정하는 다음에야.
물론 피에르 바야르가 대중을 독서의 중압감에서 해방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 책, 독서 등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관념이 문학 이론 자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보니 완전히 폐기할 이유는 없지만 경직된 면이 없지는 않은 개념들을 더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개별 독자의 실제적 구체적 독서 경험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텍스트의 모든 굴곡에 일일이 반응하는 모범적인 모델 독자를 세운 것은 에코와 문학 구조주의의 훌륭한 업적이지만 텍스트의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고 책을 읽다가 잠깐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 독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묵직한 이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 책의 실용적 조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책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적 완독’이 아닌 책을 읽는 다양한 방식을 시험해보라고, 창조성과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고 책을 읽지는 말라는 조언 말이다(바야르는 한 대담에서 ‘끝없이 읽기만 하고 논문 집필을 결코 시작하지 못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병리학적 증상’을 언급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읽지 않을 책이 있다는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
바야르는 최근에 있었던 한 대담에서 자신의 모든 저작은 아무리 사소한 이론적 결함도 트집을 잡으면서 억지스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집증적 서술자를 내세운 픽션 작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개념의 극한을 탐구하는 훌륭한 기제로 사용되지만 『책을 읽지 않고…』의 경우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던) 이러한 역설적 서술자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출세작인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해석서인 이 책에서 바야르는 ‘지금까지 비평가들은 문학을 해석하는데 그쳐왔다.
이제는 문학을 뜯어고칠 때이다’라는 제라르 쥬네트의 모토를 따라 작품의 자기완결성을 상정하는 수동적 비평이 아니라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interventionnisme critique)’를 주창한다(이러한 개입주의는 위고, 모파상, 프루스트, 뒤라스 등 대가들이 써낸 졸작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망친 작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Minuit, 2000)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며 스토리라인과 무관해 보이는 여담으로 가득한 프루스트 책에서 여담을 실제로 제거할 경우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검토하는 『주제 이탈 - 프루스트와 여담』(Minuit, 199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미의 다의성,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구호가 문학 비평에서 유행한지도 이미 수십 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추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고 기껏해야 작품의 작은 디테일 차원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바야르는 이 유명한 추리소설을 빌어 작품의 플롯, 줄거리, 결말 자체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실 추리소설이란 원칙적으로 가장 열려 있는 서술문학 장르이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일어난 사건’(범죄와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제시되며 개별 인물 자체도 자신의 해석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은 단일한 플롯에 대한 여러 개의 버전을 내부에 갖고 있는 장르이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탐정이 다른 모든 해석의 선(線)들, 가능한 모든 스토리라인을 폐기하고 단 하나의 ‘옳은 추리’, 확고부동한 진실을 제시하는 관습 때문에 추리소설은 거꾸로 가장 닫힌 내러티브 양식이 된다. 바야르가 도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야르는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말미에 에르큘 포와로가 밝히는 살인의 진상과 범인의 이름이 과연 옳은지를 재검토한다. 분명 텍스트에는 포와로의 최종 설명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포와로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는 적지 않은 이론적 우회를 거치면서 공식적인 작품의 결말을 폐기하고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사실은 누명을 쓴 것이며 왜 그가 억울한 처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성공적으로 설명한다. (바야르가 말하는 편집증적 서술자가 실행하는 ‘망상적 독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추리소설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작품 전체의 줄거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바야르는 이 책의 서론에서 『애크로이드』 이외의 다른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로 진범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책에서는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몇 개의 진범을 새롭게 폭로한다)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에 나오는 의문사도 마찬가지로 재수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퐁텐의 우화에서 숱하게 죽어나가는 주인공들(동물들)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무엇인지, 춘희의 죽음이 진짜 자연사인지, 『제르미날』의 광산 참변의 진짜 흉수는 누구인지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는데 바야르는 실제로 다음 저작인 『햄릿 사건 수사』(아마 지금껏 나온 바야르의 책 중 가장 이론적인 저작일 것이다)에서 셰익스피어의 고전으로까지 ‘탐정 비평(critique policier)’의 영역을 넓혀 햄릿왕의 살인범이 동생 클로디어스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왜 햄릿이 그토록 복수를 미루고 망설였는지를 해명한다.
물론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바야르 자신이 애크로이드의 살인범이 셰퍼드 의사가 아니고 햄릿왕의 살인범이 클로디어스가 아니라고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광적 역설과 망상적 독서가 문학과 텍스트와 독서에 대해 가져다주는 이론적 함축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이충민│프랑스 빠리 8대학 불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08. 01. 11.
P.S. 찾아보니 바야르의 책들 가운데서는 서평에서 다뤄진 책 두 권만 영역돼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후 1년만에 두 권이 모두 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