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페이퍼'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다. '로쟈의 서재'에 달려 있는 페이퍼들이면 다 '로쟈의 페이퍼' 아닌가, 란 반문이 가능하지만, 사실 타이틀은 내가 붙인 것이 아니다. 이번 2학기에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로쟈의 페이퍼'라는 '신간 소개' 코너를 연재하게 됐다. 기획안 자체가 '최근에 나온 책들'을 컨셉으로 한 것이라고 해서 원고 청탁에 넙죽 응했다. 그리고는 또 마감을 놓치고 있다(물론 다른 일들이 계속 겹치고 있긴 하다).

하룻밤 동안에 원고지 60-70매 정도는 거뜬히 채우곤 하지만 막상 10매짜리 청탁원고를 쓰는 일에는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지젝도 그런 증상을 호소한 적이 있는데, 무얼 메모하는 것과 쓰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어서 그에 따른 부담에도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그 차이는 자발적인 글쓰기이냐 아니냐의 차이로도 변주된다). 내가 내린 진단이 그렇다. 하지만 처방은?..

이 페이퍼는 그 10-11매짜리 원고를 쓰기 위한 초고이자 메모이다. 겸사겸사 작년 10월 이후로 중단된 '최근에 나온 책들'을 이어갈까 하다가 컨셉을 약간 바꾸기로 했다. 사실 내가 읽지도 않은(심지어 손에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일이 나 자신에겐 그다지 유익해보이지 않았다(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연재를 중단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거들었다).  

 

해서 비슷한 방식이더라도 조금더 유익한 방향의 책소개가 없을까 궁리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방식이다(이게 말하자면 '로쟈의 페이퍼'의 부제쯤 된다). 그 시작으로 고른 책이 어제 도서관에 갓 들어온 책을 대출해서 두 번이나 읽은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이다(구내서점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었다). 왜 두번이냐고? 책이 얇기도(가볍기도) 했고, 한편으론 어제나 그제 읽은 한 구절의 출처를 찾지 못해서 한번 더 훑어본 것이기도 했다(그래도 못 찾았다. 다른 책인 듯하다. 내가 조금 더 예민한 체질이었다면 노이로제에 걸릴 처지이다. 그 와중에 알라딘은 먹통이 되는군).   

 

 

 

 

책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재일교포 지식인 서경식 교수와 미국 시카고대학의 노마 필드 교수, 그리고 일본의 원로 비평가 카토 슈이치(가토 슈이치) 교수 3인의 공저이다. '공저'라고는 돼 있지만 실제로는 강연록이며 세 사람의 회합을 모의한 사람은 가장 연배가 젊은 서경식 교수이다.

도쿄경제대학에 재직중인 그가 지난 2003년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란 주제의 특별강연회를 마련하였고 다른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초빙되었던 것. 해서 책은 서교수의 서론('왜, 지금 '교양'인가?')을 제외하면 세 사람의 강연과 서교수가 카토 슈이치와 나눈 대담, 이 네 꼭지로 구성돼 있다. 모두가 "이 위기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문교양'이란 과연 무엇일까?"란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세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표지에는 박혀 있는데, '재일조선인의 양심'으로 소개돼 있는 서경식 교수(1951- )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이후로 이미 별다른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국내에 여러 저작이 소개돼 있다(현재는 성공회대에 연구교수로 체류중이며 한겨레의 북리뷰란에 '심야통신'을 오랫동안 연재했었다).

그리고 '수전 손택 여사 이후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소개된 노마 필드 교수(1947- )는 현재 시카고대학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장을 맡고 있다는 일본문학/문화 전문가이다(저서들로 봐서는 '수전 손택'과 나란히 거명되는 게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국내에는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비, 1995)가 소개돼 있다. 필드 교수는 '전쟁과 교양'이란 주제의 강연을 했는데, 읽다 보니까 내용중에 "이제 곧 지천명이 될 나로서도"(80쪽)란 대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2003년이면 1947년생인 그녀가 56세 때인데(그러니까 지천명이 한참 지난 뒤인데), 어떻게 '곧 지천명이 될' 수 있는지?

카토 슈이치 교수(1919- )는 그간에 '가토 슈이치'로 이름이 표기돼 왔고, 이번에 찾아보니까 여러 권의 책이 출간돼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대담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에서 인터뷰어 역을 맡은 이가 가토 슈이치이고,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소화, 1997), <일본문화의 숨은 형>(소화, 1995), <일본문학사서설1,2>(시사일본어사, 1995-6) 등도 소개돼 있다. 일본어로는 24권짜리 저작집(전집)이 나와 있다고 하니까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는 듯하다...

대략 여기까지 쓰고는 시간관계상 더는 미루지 못하고(<교양,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쓰든지 할 예정이다) 아래와 같이 초고를 작성했다(분량 때문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에 게재될 것이다). '현대의 교양'을 실마리로 한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이다(역시나 분량상 '제국'과 '폭력', '욕망'을 주제로 한 책들은 제외됐다).


‘로쟈의 페이퍼’는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주관적 눈요기이다. “요새 읽을 만한 책들이 없어.”라는 주관적 푸념을 자주 접하지만, 읽기로 작정하면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또한 객관적 현실이다. 여럿이 다닐 만한 길이 될는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몇 권의 책을 길잡이삼아 그 푸념과 현실 사이에서 나대로의 길을 내보도록 한다. 

시작은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이다. 아마도 ‘교양’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나온 책들 가운데서는 가장 ‘가벼운’ 책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위기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인문교양’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란 묵직한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는 책이다. 서경식, 노마 필드, 카도 슈이치, 3인의 공저인데 원래는 일본학생들을 청중으로 한 강연록이지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아직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 ‘야만의 시대’에 과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교양’이란 게 가능한지, 그것은 또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과 맞닥뜨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또 해야 하는 일은 책을 읽는 것이다. 일단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와 <청춘의 사신>(창비), <소년의 눈물>(돌베개),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같은 책들을 일독해볼 수 있겠다. 재일한국인으로 저자가 감당해야 했던 시대의 초상과 영혼의 편력이 펼쳐진다. 또한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삶과 성찰을 따라가 보는 것도 제쳐놓을 수 없겠다. 실제로 마지막 장 ‘현대의 교양이란 무엇인가’에서 서경식 교수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프리모 레비의 경우이다.  

 

 

 

 

 

 

 

 

 

 

이미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가 작년에 번역돼 나왔고, 레비의 주요 저작인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와 <주기율표>(돌베개)도 올해 초에 우리말로 출간되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인용된 일화를 보면, 강제수용소에서 동료 죄수가 레비에게 아무 시라도 좋으니 읽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책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는 상황에서 이탈리아인 레비가 떠올린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이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레비가 프랑스인 동료에게 애써 번역하여 들려주려던 시구는 이런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그리고 이러한 시에 용기를 얻어 그는 ‘지옥’과도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반가운 것은 그 <신곡> 또한 이제는 우리말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이탈리아아어 완역본으로 2005년에 출간된 한형곤본(서해문집)에 이어서 최근에 박상진본(민음사), 김운찬본(열린책들)이 더 출간되었다. 프리모 레비가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지옥>편이라도 이 가을에 읽어봄 직하다.  

 


 

 

 

 

 

 

강제수용소 얘기가 나온 김에 제러미 벤담의 ‘감시시설, 특히 감옥에 대한 새로운 원리에 관한 논문’ <파놉티콘>(책세상)도 읽어보도록 하자. 잘 알려진 바대로 이 논문은 원형감옥에 대한 벤담의 ‘혁신적인’ 구상을 담고 있다. 이번에 나온 건 특이하게도 프랑스어판 축약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덕분에 분량은 50여 쪽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과 함께 푸코의 <감시와 처벌>(나남)도 읽어줘야 한다면 견적은 좀 달라질 수 있겠다. 거기에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도서출판b)에서 표제가 된 장 ‘암흑지점’도 반드시 참조해야 할 글이다. 보조비치가 영어판 <파놉티콘>을 편집하고 붙인 서론이기도 하다.

 

 

 

 

벤담의 <파놉티콘>을 읽으면서 거꾸로 ‘감옥 없는 세상’을 잠시 꿈꿔봤다면,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을 읽으면서 ‘종교 없는 세상’을 같이 상상해볼 수 있겠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라는 제사(題詞)부터가 도전적인 이 책은 종교라는 오랜 터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기를 제안한다. 비록 ‘종교’라는 망상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건 ‘민족’이라는 상상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울 듯하지만.

 

사실 도킨스보다 한술 더 뜨는 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이다. 그는 유물론적 신학을 주장함으로써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아예 거꾸로 세운다. 평소에 지적 자극이 모자란다고 푸념하는 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유물론적 신학’의 원안 제공자인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어린시절>(새물결)과 <일반통행로>(새물결)도 덧붙이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이다. 특히 <일방통행로>에는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이란 문구가 붙어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고 교양이 목표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유격전을 시작할 때다.

 

07. 08.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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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8-3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고료 두둑하게 받아내서 밥 사세요..
환영할 컨셉입니다.

로쟈 2007-08-30 23:14   좋아요 0 | URL
원고료는 책값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2007-08-31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31 14:55   좋아요 0 | URL
아마 청탁이 오면 쓰실 수 있을 겁니다.^^

philocinema 2007-08-3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기율표'와 '암흑지점'은 처음 보는 책들이군요!
시간이 나서, 아니 시간을 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소개 잘 받고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로쟈 2007-08-31 18:49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참고로 <암흑지점>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닙니다.^^;

marr 2007-08-3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로운 책읽기, 자유로운 글쓰기.
정말 부럽습니다.
뭐, 당신도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 하실 수 있겠지만, 실상 특정 주제에 매에 있으면 그런 자유는 자만이 되기 쉽죠. 어쨌든 좋으시겠습니다.

로쟈 2007-08-31 18:52   좋아요 0 | URL
'자유로운' 책읽기/글쓰기는 제가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만한 형편을 만들기가 늘 어렵습니다.--;

marr 2007-08-3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연구자에겐 늘 한정된 생활이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부럽습니다. 전 조금씩 달아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2007-09-01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1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1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09-01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 필드 교수는 예전에 김윤식 선생의 '문학여행기'들 중 어느 한 권에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김윤식 선생의 단골 인용 모토인 "아득한 회색... 선연한 녹색..."의 문구를 제목으로 차용했던 책으로 기억하는데요, 이른바 '학술여행'이란 것, 언젠가는 한 번 꼭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은 부러운 일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9-01 22:3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그 책을 갖고 있는지 문득 헷갈립니다.^^;

마늘빵 2007-09-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중대 대학원 신문까지. 축하드립니다. 모든 글은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는거죠? :)
그래도 또 여기서 보는거랑, 지면으로 보는거랑 느낌이 다르긴한데.

로쟈 2007-09-01 22:34   좋아요 0 | URL
네, 대부분은 이곳에서도 읽으실 수 있을 텐데, 10매짜리 글들은 쓰긴 어렵고 생색은 안 나고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