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격투기를 싫어한다.
 서로 뒤엉켜 주먹질을 하고 발로 차고 내지르는 두 신체를 보면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어리가 엉킨 것 같은 느낌을 받고 결국 혐오스로운 감정이 들어 기분이 나빠진다. 마치 거리에서 누군가의 욕설을 들으면 내게 욕을 한 것이 아닌데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격투기를 아주 싫어한다.

이슬아의 이 글은 조금 신선하다. 격투기를 좋아하는 여성이라는 캐릭터가 독특하고, 격투기에서 서사를 읽어 내고 분석을 한다. 나는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즐기지 못하면 분석하고 그 내면을 읽어낼 수 없다. 얼굴이 찢어지고 피가 나고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거북할 텐데 이를 즐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고 있는 여자. 여성에 대한 나의 편견이라기보다 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부분이 마음에 든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 언제나 패자의 얼굴이다. 시합이 끝나면 모든 선수들은 진실을 맞닥뜨린다. 이겼다는 혹은 졌다는 진실. 승자는 열광하는 관객과 마주하지만 패자는 오직 자신만을 마주한다. 어떤 야유나 격려의 음성도 선수 내면의 자책만큼 커다랄 수 없어서다. 커다란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라는 진실과 독대하는 이들을 본다."

 재미있는 사람이다.

** 링크: 어떤 선수는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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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처음 갔을 때 데스크 직원이 이렇게 묻는다.
"여아예요, 남아예요?"
나는 고양이는 사람이 아닌데 여아니 남아니 하는 표현이 좀 거슬려서 "암컷이에요", 또는 "수컷이에요" 하고 응답한다.
한 번은 약 처방을 잘한다고 해서 집 근처 동물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나에게 "아버님, 아이가 ... " 이런 식으로 말을 해서 좀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고양이와 살면서도 고양이와 사람을 의식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개를 키우는 사람은 자기 개를 개라고 부르지 않고 강아지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개와 산책하는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은 내가 '개'라고 말할 때마다 꼭 '강아지'라고 내 말을 고쳐주기도 했다. 당시에는 나는 자신의 개를 개라고 부르지 않고 강아지라고 부르는 게 웃긴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그런 면이 있는데, 집에 있는 고양이들을 한 마리 두 마리 이런 식으로 동물을 세는 '마리'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누가 나에게 집에 고양이가 몇 마리나 있어요 하고 물으면 나는 몇 녀석 됩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고양이나 개를 사람 아이처럼 여아니 남아니 이런 식으로 부르는 데 일종의 위화감을 느낀 건 말의 표현을 엄격하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아마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한 표현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슬아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 동물인 소를 "80만명"이라고 표현을 해서 오타거나 이 사람이 동물의 수를 세는 표현을 잘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한 명의 소"라는 글을 보고 이 사람은 사람과 동물을 세는 구분을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튼 이슬아의 이 글이 나에게 어떤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한 것 같다.

>> 탈석탄과 탈축산을 함께 말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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