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서른 넘게 연애는커녕 여자랑 키스도 한 번 못해본주인공 남자는 신경 정신과를 찾는다. " 선생님, 도와 주세요. 정말 너무 외로워요. 누가 좀 만져 주기만 해도 좋겠어요." 그렇게 하소연을 해 봐도, 의사에게 받은 건 약봉지 가득 든 "항우울제"(antidepressants) 뿐이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린다. " 누가 도와 달랬지 우울증 치료제를 달래? " 그리곤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뭐....서른 넘게 연애 한 번 못해 봤다는 건 누군가를 믿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도 못하고, 매사에 의심이 많은 강박신경증(?)의 일환일 수도 있겠다.외로워 죽겠다고 아무리 절규해 봐도 의사가 몸소 여친이 되어 주거나, 우렁이 각시를 만들어 줄 수 없다면 도와줄 수 있는 건 약물처방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외로움에 죽어가던 남자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여자, 그러니까 "달콤 살벌한 연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태어나서 처음으로 키스를 한다. 키스한 다음 날, 남자는 친구한테 전화를 해서 자랑을 한다. " 너도 키스할 때 혀 넣고 그러니? " 남자는 "달콤 살벌한 연인"을 사랑한다. 상대방이 사람을 네 명이나 죽인 살인자라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왜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신고해요? " 그런데....그런데....그 남자의 감정은 "사랑" 맞을까?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정말 한참 동안 그 생각을 했다. 외로움에 질식해 가던 남자 앞에 나타나, 키스해 주고, 섹스도 해 준 여자에 대한 감정적 애착, 또는 집착이 사랑일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사람이 자신을 건져 주고 인공호흡을 해준 상대방에게 느끼는 고마움 같은 게 아닐까?배 고플 때 슈퍼에 가면, 보는 것 마다, 손에 집히는 것 마다 다 산다. 외로울 때는, 외로워서 죽을 것 같을 때는, 싫지 않을 정도의 아무하고나 사랑에 빠지기 쉽다. 아니, 사랑이라 착각되는 감정에 빠지기 쉽다. 처음에는 마냥 좋다. 구원이라도 받은 듯 하다. 그러다가....그 관계가 고통스러워지면,그 관계의 허접함을 자각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에 책임 및 의무까지 하나 둘씩 생겨나면, 상대방이 싫어진다. 그것도 갑자기. 시인 신현림은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결혼했다고. 외로움의 극단에서 결혼을 선택했다고.그 글을 읽으며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땅을 칠만큼 후회한다 해도, 그래도 결혼까지 했던 사람인데 적어도 "그 당시에는 눈이 멀었다." 거나 " 그 당시에는 눈에 콩깍지가 쒸었다." 라고 말하는 게 "예의" 아닐까? 외로워서 만났다, 너무 외로워서 만났다라고 말하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얼마 전, 내게 막연한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에게서 절절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남자는 당장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현실 속에서손 내밀어 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그 남자의 호감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친절한 그 누구. 너무 못생기지도, 매력 없지도 않으면서 친절한 그 누구.토끼는 외로우면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사람은 왠만해서 죽지 않는다. 죽지 않아, 죽지 않아~ 유재석이 부르는 노래처럼. 그러니...당신이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헛갈리게 하지 말자. 당신이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비행기를 타면 섹스가 하고 싶어져요." 2년 전 우연히 만나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3살 연하 친구 P가 말했다. 여행을 떠날 때면 항상 이상하게 설레고, 일탈에 대한 욕구가 뭉개뭉개 피어난단다."누나는 어때요?" 난 솔직히 대답했다. "난 비행기 타는 게 그냥 지하철 타는 것 같아."B는 황당한 듯 말했다."출장 말구요. 여행 갈 때 말이예요.""글쎄....난 비행기를 너무 자주 타나 봐.비행기에서 여행가이드 읽으면서 어디 갈까 생각하고 그런 게 아니라, 전자계산기 두드리면서 징그러운 숫자들로 가득 찬 보고서를 쓰는 게 내 일상이야. 비행기를 타면 설레이고 그런 게 없어. 아쉽게도."말하다 보니 정말이지 귀를 틀어막고 싶었던, 몇년 전 호주 출장길이 생각났다.그 날은 서울 시내 모든 예식장이 터져나가는 "길일"이었다. 일요일 저녁 비행기는 머리를 100개가 넘을 것 같은 실핀으로 틀어 올리고커플 티를 입은 신혼부부들로 가득 찼다. 공항에 늦게 온 신혼부부들은 옆자리에 앉지 못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거나 앞뒤에 앉아 크게 떠들고, 옆자리에 앉은 신랑은 신부 실핀을 뽑아 주고, 손을 꼭 잡고 앉아 끊임 없이 재잘거리고....비행기는 거대한 돗대기 시장 같았다.그날 비행기는 3,5,3이었는데, 난 재수 없게도 최악의 자리인 5명이 앉는 좌석 가운데 앉았다.그러니까 두 신혼부부 사이에 10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그 닭살 돋고 시끄러운 상황에서 난 말 없이 전자계산기를 두드렸다.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옆자리 신혼부부의 대화는 계속 귀에 들어 왔다. 그들은 누구누구 선물을 사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일부러 귀엽게 말하려는 건지, 원래 혀가 짧은 건지 옆에 앉은 여자는 "실땅님, 실땅님"하는 최지우 같은 발음으로 친척들 이름을 하나하나 말하고 있었다. " 아버님, 어머님, 우리 아빠, 우리 엄마, 큰 고모님, 작은 고모님,누구누구......." 이러다가 음료수를 든 스튜어디스가 한 번 지나가거나, 기내 면세품 판매를 하면 다시 처음부터 "아버님, 어머님,우리 아빠, 우리 엄마...." 를 계속했다. 대여섯번 들으니까 짜증이 나서 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기요, 아까 이모님까지는 하셨거든요. 노트 한장 찢어 드릴까요? 쓰시는게 좋지 않을까요?"신혼부부들 가운데서 10시간을 앉아 있는 건 참으로 괴롭고 쓸쓸한 일이다. 그 속에서 전자계산기까지 두드리는 건 굉장한 인내심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도 몇 번 겪고 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익숙해 질수록 비행기를 타는 건 지하철을 타는 것처럼 일상이 되어간다. 설레이거나 괜시리 가슴이 뛰고 하는 현상은 자연소멸된다. 어쩌면....나도 "신혼여행"이란 걸 간다면 그 때는 설레일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법으로 합법적으로 내 남자가 된 남자 옆에 앉아 몰디브로 날아간다면 어떤 기분일까?설레이기도 하겠지만, 서울의 한 거대한 예식장에서 "쌩쇼"에 가까운 결혼식을 하고 나면 피곤해서 곯아 떨어질지도 모르겠다.어제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로연장에서 칼질을 하고 있는데,무도회처럼 커다란 융단이 깔리면서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마이크를 잡은 사회자가 말했다."신랑,신부 인사가 있겠습니다."무대에 올라선 신랑,신부는 제일 먼저 커다란 촛대에 점화를 하고,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서 그 옆에 있는 <헨젤과 그레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커다란 케이크를 자르고, 또 꽃게처럼 옆으로 걸어서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는 글라스들에 샴페인을 따랐다. 속으로 생각은 해도 말은 못하고 있는데, 옆에 앉은 대학생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뭐 하는 거야? 하나만 하지. 멍청해 보여."하하, 더 "럭셔리"한 결혼식에 가면 마술 쇼처럼 퍼포먼스를 할지도 모르겠다.결혼식장에 가면 뭔가 자극을 받거나,"아....나도 저런 드레스를 입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들어야 결혼을 한다는데, 난 계속 삐딱한 생각만 들었다. 도대체 이런 엄청난 예식장에서 결혼 비용만 얼마일까?기본으로 5~6천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내 연봉도 넘는 돈을, 그러니까 일년 동안 가끔은 증발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버는 돈 보다 훨씬 많은 돈을 하루에,아니 한두 시간에 다 써 버린다니....그리고....그런 요란한 드레스도 입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요란하고 뭐가 많이 달린 꽉 조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으려면 얼마나 배에 힘을 줘야 할까? 폐백까지 끝나고 옷을 갈아 입으면 아마 쓰러질 것 같을 거다. 내가 원하는 결혼식은 가족들과 친한 친구 몇 명만 초대한 조용하고 조촐한 결혼식이다. 얼마 전, 감우성이 호주에서 그런 조용한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나도 그런 결혼식을 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결혼식에 천문학적인 부주를 쏟아 부은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그래도 원하는 결혼식을 하려면 "본전 의식"을 버려야 한다. 내일 또 결혼식에 가야 한다.그것도 양평에. 연휴 마지막 날 양평에서 올라 오려면 오징어를 세 마리는 먹어야 서울에 도착할 것 같아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학교 다닐 때 MT 가본 이후 처음으로 청량리역에 간다. 거 참...두 번의 결혼식 나들이로 황금같은 연휴가 간다. 난 절대 연휴에 결혼 안 해야지.나도....설레이는 여행을 가고 싶다. 혼자 가도 좋고, 편안한 남자 어깨에 기대서 가면 더 좋겠다. 여행,여행, 여행이 가고 싶다. 언젠가, 불쑥, 조용히.
2년 전 여름, 소개팅을 했던 남자가 있다.그 남자는 Y대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오래 준비하다 포기하고적성에 맞지 않는(스스로 그렇게 말함) 빡센 조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스스로를 '일상에 무능한 남자'라고 했다.무슨 말이냐고 했더니,자기는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걸 좋아하고, 일상, 그러니까 운전하고 파킹하고 이동통신 적립카드에 포인트를 적립하고, 마음에 없는 말 하고,여자를 꼬시는데 철저하게 무능하다고 했다.그 남자는 후면 주차만 할 수 있고(전면 주차와 병렬 주차는 못한단다), 길 눈은 너무 어두워 아는 길만 겨우 운전하고, 지도에 약하기 때문에 네비게이터도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헉~하고 한숨이 나왔다. 서로 기분 좋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빙고!"하고 소리 치며 "저도 그래요!" 할 텐데, 길눈이 어둡고 운전을 잘 못하고 파킹은 후면 주차만 할 수 있다니 기가 막혔다.내 최대 컴플렉스가 바로 "운전"이다. 2003년에 차를 팔고 한 번도 운전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회사 차를 운전할 일이 있었는데 망설이다가 못하겠다고 했다. 3년 동안 한 번도 핸들을 잡지 않다가, 내 차도 아닌 회사차를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난 대학 1학년 때 운전면허를 땄다.(시험 운은 있어서 한 번에 합격했다.) 한 동안 장롱면허로 지내다가, 대학 4학년 때 노란 차로 연수를 받았다.그 때, 연수 선생님이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떻게 아줌마들 보다 더 못해요? 보통 학생들은 금방 하는데..." 엄마,아빠의 반협박 및 강요로 난 운전연수를 "40시간"이나 받았다. 동네 50대 아줌마들 보다 내가 더 오래 연수를 받았다. 40시간 연수를 마치고, 혼자 긴장하며 차를 몰고 나간 첫날 접촉사고를 냈다. 4차선에서 천천히 차를 몰다 앞에 비상등을 켜고 정차한 쏘나타가 한 대 있기에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살짝 핸들을 틀었는데, 내 차 사이드 미러가 정차하고 있던 쏘나타 싸이드 미러에 부딪히면서 쏘나타 싸이드 미러가 깨져 유리가 막 날렸다. 별거 아닌 사고였는데도, 유리가 막 날리니까 난 대형사고가 났는지 알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그 후 한 동안 운전을 안 하다가 2001년, "더 이상 운전을 컴플렉스로 안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카 레이싱'을 배웠다. 경험으로 볼 때, 노란 차 연수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몸 속 깊이 입력된 두려움을 떨치려면 '카 레이싱' 정도는 해야 될 것 같았다. 비싼 수업료를 내고 레이싱을 배운 덕분에 난 두려움을 떨치고 중고차를 한 대 사서 폼 나게 잘 몰고 다녔다. 하지만...파킹은 하지 못했다. 내가 원래 '공간 지각 능력'이 빵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IQ 검사를 하면 언어능력은 뛰어 났는데, 공간 지각 능력은 형편 없었다. 학교 다닐 때도 국어랑 영어는 항상 만점이었는데, 수학은 반타작을 겨우 했다. 아무리 파킹 연습을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각고의 노력 끝에..... 전면주차만 겨우 할 수 있었다.병렬주차랑 후면주차, 좁은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세우는 주차는 포기했다. 약속이 있으면 발릿 파킹해주는 카페로 정하고, 회사나 아파트 주차장에서는 경비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다. 길눈도 믿어지지 않게 어두워서, 모르는 길을 갈 때면 택시 아저씨들한테 하도 물어 봐서 집에 오면 목이 쉬곤 했다.중고차가 '돈 먹는 귀신'으로 전락하고 차를 판지 3년이 된 지금필요에 의해 차를 다시 산다면 워밍업을 한 후 운전을 하겠지만, 지금은 운전을 할 필요성도, 하고 싶은 욕구도 없다.솔직히....다시 운전하기가 무섭고 두렵다. 이런 걸 심리학 용어로 "투사"라고 하나? 난 운전 못하고 길눈 어두운 남자가 싫다.여성잡지를 보면 "남자가 섹시하게 느껴질 때?" 이런 설문이 자주 있다. 난 내가 호감을 가진 남자가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 와이셔츠를 약간 걷은 채로 능숙하게 운전할 때, 섹시함을 느낀다. 또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운전하는 남자 옆에 앉아 함께 음악을 들을 때 기분이 좋다.반면, 길눈이 어두운 남자 옆에 앉아 있을 때는 정말이지 답답하다. 나도 헛갈리는 길을 자꾸 물어 보는데, 정말 그냥 내려서 버스 타고 가고 싶다.끊임 없이 길을 물어 보다 내가 자꾸 헛갈려 하면, " 집에 가는 길인데 잘 몰라요? " 하면 당장 내려 버리고 싶다. 이런 얘길 친구들한테 하면, " 뭘 그런걸 갖고 그래? 나중에 기사 두면 되쟎아. 하하" 하는데,내게 운전은 가벼운 컴플렉스를 넘어 트라우마에 가깝다.난 지도를 못 읽는 건 기본이고, 청첩장에 있는 약도도 제대로 못 본다. 이 말을 하면 "설마?" 하며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 길치인 건 유전적 영향도 크다. 울 아빠는 정말 엄청난 길치다. 그래서 가족들끼리 어디를 갈 때는옆에 앉은 엄마가 끊임 없이 길을 알려 줘야 한다. 여러 번 가본 길이라 엄마가 말을 안하고 있으면, 당장 삼천포로 빠진다. 평생 남편 옆에서 길 안내 하느라우아하게 드라이브를 즐기기는커녕 졸려도 잘 수도 없었던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 다른 건 몰라도 길눈 어두운 남자하고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이러니....남자가 길눈이 어둡고 파킹을 못한다는남들에겐 정말이지 사소한 일이 내겐 너무도...치명적이다. 그 '일상에 무능한 남자'는 썩 괜찮은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와의 엄청난 '공통점' 때문에 다시 만나지 않았다.회사 후배 W는 소개팅남과 "무협지"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져서 지금 예쁜 연애를 하고 있다.'공통점'이란 건.... 연애를 돕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나 보다.
어제 저녁, 네덜란드 거래선 담당자 Robert와 저녁을 먹었다.Robert는 180cm가 약간 넘는 큰 키에 곱슬머리 금발, 40대 후반의 네덜란드 남자. 대학 졸업 후 쭈~욱 chemical sales를 해 온 이 바닥의 베테랑이다. 1년에 3개월 이상은 중국 출장을 다닌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가 암스테르담에 처음 갔을 때 내가 겪은 "정신적 충격"을 말했다.그 얘기를 했더니 Robert가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면서 말했다." I can understand your feeling. I fully understand you."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고 안네가 불쌍해서 막 울었다. 아....가엾은 안네! 얼마나 무서웠을까.... 많은 어린이들이 울었겠지.나처럼. 지금도 이 세상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안네의 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 그런데....내가 처음 암스테르담에 갔던 1995년. "Anne Frank House"를 방문한 나는 너무너무 놀랐다. 어렸을 때, <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아주아주 비참한 환경을 상상했었다. 전쟁 통에, 그것도 숨어 살았으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이었을까....생각했다.그런데...안네가 살았던 집은....너무 좋았다. 건물 외부도, 내부도....훌륭했다. 고풍스런 가구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다.(소리 때문에 물을 내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안네가 그 집에 살았던 시기는 1942년 6월부터 1945년 3월. 생각 보다 너무 "럭셔리"한 Anne Frank House에서 쌩뚱 맞게 이런 생각을 했다. 1942년에, 일본 식민지였던 그 암담하고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기에,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어떤 집에 살았을까?그 생각을 하니... <안네의 일기>를 읽었을 때 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마구마구 아팠다. 도대체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Robert가 말했다. 70년대 초에 중국 출장을 처음 갔는데, 너무 가난해서 놀랐다고... 특히 화장실에 갈 수가 없어서 계속 꾹꾹 참으면서 미팅 내내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를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고.... Robert가 11년 전의 내 기분을 이해한다며 말했다. Anne Frank House는 솔직히... 요즘 중국 시골에 있는 집들 보다도 좋다고... 11년 전, 학생이었을 때 느꼈던 굉장한 "쇼크"를 이젠 편하게 술안주 삼아 말하게 되었다.11년 전, 난 노가리 안주를 사치로 생각하는 학생이었고, 11년이 흐른 지금, 난 고급 한정식집이나 일식집에서바이어들이랑 저녁을 먹으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회사원이 되었다. 정말....많은 것이 변했다.너무 큰 충격이었고, 또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이젠 편하게 얘기한다. 어제 11년만에 Anne Frank House에 다녀온 소감을 얘기했다. 11년 전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견문록. 끝~
어제 상하이에서 돌아왔다. 거의 항상 그랬듯이 비행기에서 부터 가슴이...답답했다.차라리 비행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이런 생각을 했다. 출장보고서며, 다음주에 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 해야 되는데 미루고 미루다 아직 안한 일들,손대면 툭하고 터질 것만 같다는 봉숭화 연정처럼 한마디 툭뱉는 말에 스트레스로 감전될 것 같은 팀장의 얼굴,이런 저런 별로 "happy"하지 않은 일들이 잔뜩 떠올랐다. 외국에 갈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무슨 나라건 상관 없이 그냥 이런 생각을 한다.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내가 전생에 이 나라에서 태어났나 보다."하는 찌릿찌릿한 필이 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일상으로의 복귀"가 두려워서.아까 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친구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 잘 지냈어?" 난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 어, 잘 지내. 남들 보기엔..." 친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야, 그건 전혀 중요한게 아니쟎아. 회사 사람들한테 보이는 대외용이지. 넌 참...." 친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도대체 중요한건 뭘까? 상하이 시내를 걸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어떤걸까? 항상 사춘기 같다. 이리 저리 헛갈리는 생각이 많고, 쉽게 불안해 한다. " When will I accept where I am?"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그 때는 세상 어느나라에서 돌아오더라도, 우주 끝까지 날라갔다가 다시 변한 것 없는 일상으로 돌아오더라도, 편안할 수 있지 않을까?자꾸만 두리번 두리번 거리지 말고, 가지 않은 길을 뒤돌아 보며 후회하지 말고, 겉으로만 센 척하고 속으로는 주눅들어 움추리지 말고, 그저 묵묵히,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지. 온갖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쭈그리고 있기에 봄날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리고 나도...여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