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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2046>을 보기 위한 마음의 자세로,
코아 아트홀에서 <화양연화>를 봤다.

<화양연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코아 아트홀에서는 지금 <2046>개봉을 기념하기 위한 event로
매일 저녁 8시 50분 <화양연화>를 상영하고 있다.

<화양연화>의 아스라한 미련을 아직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
<화영연화>를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보고 싶은 사람들,
지금 사랑에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코아 아트홀에서 <화양연화>를 보는 97분을 권한다.

오늘 <화양연화>를 보며 느낀 점.

장만옥은 너무도 아름답다.
실루엣이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고혹적이다.눈이 부시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장만옥 처럼 늙고 싶다고...

장만옥은 참 아름답게 늙어간다.
장만옥의 그토록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에서,
그 절제된 몸짓과 미세한 감정 하나 놓치지 않는 장만옥의 표정과 손짓에서, 어떻게 그 옛날 <폴리스 스토리>에 나왔던 장만옥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오늘....장만옥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장만옥 처럼 늙고 싶다. 그렇게 아름답게....

아름다운 색감의 다양한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을 보면서
왕가위는 늙은 장이모 처럼 겉멋을 부리지는 않지만,
색감에 있어서도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생각을 했다.

코미디계의 혜성, 2004년 아시아 코미디계를 석권한 장이모의 <연인>을 보면서, 늙어가는 장이모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렇게 웃기면서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고 싶을까...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스타일에 집착해 영화를 망치고 마는 장이모,
<친구>의 후속작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는,
<똥개>도 모잘라서 <우리형>까지 만든 곽경택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며 자신의 스타일에 안주하는 재능있는 감독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장만옥 처럼 너무도 아름답게 늙어가는 배우는?
닮고 싶다. 진정으로.
그렇게 늙고 싶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늙는게 두렵지 않다.

오늘 <화양연화>를 보면서 또 하나 느낀 점!
사랑하는 사람이랑 호텔방에 틀여박혀,
아님 어촌 마을의 소박한 시골집이나,
아님 변두리의 작은 집에 틀여 박혀
같이 소설을 썼으면 좋겠다.
<화영연화>의 두 사람 처럼....

소설이 아니라도 좋으니 만화책이라도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둘이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둘만의 공간에...

요즘 베스트셀러 신간 도서의 하나.
<너, 외롭구나>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봐 준다면?

Say Yes.

어느 한 사람이랑 공간을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잡담을 나누고, 뒹굴뒹굴하고 싶다.

밤에 쓴 글이라 너무 솔직한가?
아침이 되면 삭제할 수도...

<화양연화>를 다시 본 수선이의 센티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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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준 2004-11-1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한 사람이랑 공간을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잡담을 나누고, 뒹굴뒹굴하고 싶다."



異床同夢

항상 내 머리속에 멤돌던 생각.....

반갑군요


kleinsusun 2004-11-1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준님도 좋은 사람과 공간을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잡담을 나누고,뒹굴뒹굴하며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일요일 오후 pc방에 와 있는 수선.
 

금요일에 나는 건강 검진을 받았다.

회사 마다 다른데,
1년에 한번 하는데도 있고
2년에 한번 하는데도 있다.

직원들은 의무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말 그대로 "일반 건강 검진"은 몇십만원 짜리 정밀 검진과
"대단히" 다른 형식적인 검진이다.

먼저 간단한 건강 상태 설문지를 작성하고,
1번에서 8번까지 순서대로 지시에 따라 이동하면서 검진을 한다.
아주 형식적으로 대충대충한다.

먼저 키와 몸무게를 재고 혈압을 잰다.
혈압을 재는 간호사는 표정 없이 말한다.
"정상입니다."

그 다음은 시력,청력을 측정한다.
이것도 아주 대충대충한다.
간호사는 또 무표정하게 말한다.
"정상입니다."

그 다음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 검사를 하고,
피를 뽑고,
치과 검진을 하고(입만 벌리면 30초 안에 끝난다.)
마지막으로 의사랑 상담을 한다.

이 의사들은 정말 환상의 직업이다.
"네, 앉으세요. 어디 특별히 아픈데 있으세요?"
"아니요."
"네, 그럼 가셔도 됩니다."

이런 의사들을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른다.
이런 의사들을 볼 때 마다 생각한다.
지방대 의대라도 갈껄...

그런데...
이런 형식적인 일반 건강 검진에서도
벼락 같은 결과가 날아들 때가 있다.

혈액 검사 결과 상태가 안좋게 나왔을 때,
병원에서는 OO병이 의심된다며 재검을 받으러 오라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재검 결과가 나오기 까지 며칠 동안
밤잠을 못자며 불안에 떤다.
재검 결과가 나왔을 때,
"별 이상 없네요." 하면 기분 좋게 사무실에 들어와 한잔 쏜다.

그런데 아닐 경우에는?

몇년 전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회사의 K부장이 암일지 모른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부장은 재검 결과가 나오기 까지,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이켜 보고 눈물을 흘리며 반성을 했다.
아내한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다는 걸 떠올리며,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려는 욕심으로 무섭게만 대했다는 후회로,
회사일에 바빠 부모님한테 전화 한번 제대로 한적 없다는 후회로...

재검 결과 오진이었고,
그 부장은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부장은 그 며칠 동안의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이 이메일로 돌고 돌아서 유명해졌었다.
그 부장은 앞으로 매일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해피엔딩이다.
오진으로 마음 고생은 며칠 했지만,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경우다.

하지만...
오진이 아닐 경우에는?

내가 사원 2년차였을 때,
신입이었던 후배 하나가 있었다.

후배긴 하지만 나이는 나보다 한두살 많았다.
술,담배도 안하고,
교회도 누구 보다도 열심히 다니고,
경리팀에서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을 하는 천사표였다.

송년회 할 때,
그 친구가 "풍선"을 불렀던게 생각난다.

내가 회사를 옮기고 나서 1년 후 쯤인가...
그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술,담배도 안하고 심지어 커피 조차 안 마시던 친구였는데...
그렇게 건강한 20대가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지?

그 친구도, 회사 동료들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 검진 결과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씩 웃으면서,
" 오진이겠지. 귀찮겠지만 병원 한번 더 갔다와."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말 암이었다.
그 착한 친구는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수술을 했다.

얼마 후, 그 친구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쉬면 복직도 할 수 있을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들었다.
다른 회사에 있던 나는 가끔 그 친구의 소식을 들으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복직했다는 말도 어렴풋이 들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났다.

몇년이 지난 오늘,
입사동기 친구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금요일에 건강검진을 받은 얘기를 했다.
치과 검진 때, 의사가 나한테 사랑니가 나고 있다고 해서 그 말을 하려고...

건강검진 얘기가 나오자,
그 천사표 친구가 생각났다.

" K는 잘 있니?"
친구는 놀란 눈으로 쳐다 보며 말했다.
" 몰랐어? 작년에 그 친구 장례식에 다녀왔어."
" 뭐? 그 천사표가 죽었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복직했다고 그랬었쟎아."
" 복직했었는데....재발했어. 복직하고 얼마 안 있다가 죽었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술,담배도 안하던 범생이었다. 그 친구는...

그 친구가 송년회에서 "풍선"을 신나게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 선한 눈망울이....
그 친구가 편안한 곳에 있길 바란다.

그 친구 얘길 듣고 마음이 편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 한문시간에 이런 말을 배운 것 같다.
( 한문으로는 모르겠다. 뭐라고 쓰는지...)
가장 큰 효도는 부모님이 주신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거라고...

부모 보다 먼저 죽는 것 보다,
아픈 모습을 보여서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보다
더 큰 불효가 있을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아빠, 엄마.
피곤한 모습 보이지 않고,
지친 모습, 짜증난 모습으로 염려 끼치지 않고,
한번이라도 더 웃고,
한번이라도 더 애교도 부리고,
엄마가 걱정 안하게 일찍 일어나서 아침도 꼭 먹고 나가고 그래야겠다.

10월의 마지막 주, 수선이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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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10-25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받는 건강검진 정말 정해진 틀에서 기차게 빨리 이루어지는 검진이죠. 저도 아주 건강하다고 진단하고 정확히 두달후 병원에서 수술 받았죠. 제발 그런 검사보다는 진정한 건강검진이 이루어지길 바라죠. 동료분 얘기 넘 슬프네요! 정말 풍선이 되어버린 그 분의 일들이 남은 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여유를 준 것 같네요!

marine 2004-12-16 10: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검진하는 의사들을 좀 아는데요, 다 임시직으로 있는 사람들이니까 별로 부러워 할 게 못 됩니다 의대 공부 6년해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병원 들어가서 의사 행세도 못하고 거기 앉아서 형식적인 상담 하는 거, 참 우울하죠 직장 못 구해서 방황하는 인생들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봄츄자의 미니 홈피에 아주아주 오랜만에 들어갔다가
"Fairy Moon"이라는 그림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데....
쭈끄리고 앉아서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마치 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구?
니가 그림 속 여자 처럼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냐구?

물론 내가 살이 좀 많긴 하지....ㅋㅋ

그림 속의 여자는,
날개를 달고도 어데로 갈지를 몰라,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체념에 가까운 표정에는
바라보기는 하지만 달은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녀는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달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조금 있다 달이 살을 불리면서 반달이 되면
여자는 날아야만 한다.
달에 의탁할 공간이 없어진다.

그런데.....
날개 또한 튼튼하지가 않다.
마치 잠자리의 날개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헛갈리고,
날개는 튼튼하지도 않고,
일단 미친 척 하고 날아가다가 날개가 꺽이지는 않을까 걱정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에게 의탁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꼭 나 같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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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

오늘 Buyer도 오고,
그럼 상담 끝나고 나서 땡기지도 않는 갈비도 먹어야 하고,
기분도 아닌데 오버하면서 농담 따먹기도 해야 하고,
배도 고프지 않고 해서.....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성대리의 유일의 딴짓.
인터넷 서점에서 책 구경하기.
(다른 대리들은 다 주식 보고, 부동산 보는데 자~알 한다.쩝)
구경만 하면 되는데, 또 세권이나 사버렸다.

점심시간.
사무실도 조용하고 해서 오랜만에 bugs를 방문.
앨범 고르기도 귀찮아서,<테마앨범>을 클릭.
그 중 젤 위에 있는 <어느 늦은 밤>을 아무 생각 없이 클릭.

<어느 늦은 밤>이라는 laden님이 선곡한 14곡의 list 中 세번째 곡 제목을 보고 난 기절할 뻔 했다.
( 오후 미팅을 위해 쉬면서 충전을 하려고 사무실에 남아 있었는데, 이 노래 듣고 지금 억수로 멜랑콜리 해졌다.어쩌나...)

3번째 곡의 제목은....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
어떻게 이런 제목을 생각했지?
정말 정곡을 건드린다.
할 때는 너무 아픈데,
헤어질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은데,
지나가고 나면 그냥 마음의 사치였을 뿐.
그냥 지나간 기억일 뿐.
인생의 모든 것이 지나가듯이....

제목만 근사하고 후진 노래들이 많아서 기대반 혹시나 반으로 듣기를 클릭. 오.....기절하겠다.

김윤아.누구지?

지금 김윤아가 절규하고 있다.

" 그날 이후 나는 죽었소.
눈물 대신 말을 그는 토하고
피도 살도 영혼도 내겐 남지 않았소.
죽지 않은 것은 나의 허물 뿐.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에
가진 모든것을 다 소모해 버리고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
남지 않았지
남지 않았지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 아닌것을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 아닌것을."

김윤아, 정말 누구지?
어떤 band의 vocal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 전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것 같다.
정말 노래하다가 피 토할 것 같다.
술이라도 한잔 사주고 싶다.

사랑....
지나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것이 사랑 뿐이랴....

인생은 지나간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쁨도,
고통도,
쾌락도,
슬픔도,
분노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다 지나간다.
아무리 붙들고 있으려 안간힘을 써도...

누가 말했더라?
인생은 파도와 같다고...
힘차게 솟구쳤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겼다가...
그렇게 싸이클을 타면서 인생은 지나간다.

그러니 기쁜 일이 있다고 너무 오버하지 말고
힘든 일이 있다고 세상이 다 끝난 것 처럼 난리 치지 말자.

지금 아주 힘든 일을 겪고 있다면,
기쁨이 오기 전의, 상승 직전의 싸이클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 앞의 현실에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면서
에너지를 몽땅 소모하지 말자.

내 주위에 아주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밤에 푹 자지 못할 만큼 고통을 겪고 있다.
엄청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기다리라고....
지금의 고통은 기쁨이 오기전의 전주곡이라고....

빨리 그 사람에게 달콤한 기쁨의 전주곡이 울렸으면 좋겠다.
그 사람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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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4-12-2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윤아는 자우림의 리드보컬이죠? 아마도...(아, 기억력이 감퇴되는 듯... 자신이 없는...)
 

<태평로 사랑 이야기>
이런 상투적인 제목의 홍보용 CD가 있었다.
이문세의 노래가 한참 유행할 때였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 중학교 때였는지 아님 고등학교 때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 CD가 라디오 드라마 같았고,
성우의 목소리는 아주 인위적이었으며,
대사들은 아주 상투적이고 닭살스러웠다는 기억만이 남는다.

삼성플라자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그 CD는
<태평로 사랑 이야기>라는 타이틀로,
한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 커플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라디오 드라마처럼 만들고 그 중간중간에 그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들을 끼어 넣었다.

그걸로 어떻게 홍보를 하냐구?
그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장소가 모두 삼성플라자 안에 있는 식당들, 서점, 음반가게 등이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길에
매일 매일 1년 넘게 보아온 노숙자 아저씨를 보면서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 이런 허접한 또는 너무도 현실적인 "제목"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에 대한 짧은 글을 써보리라 생각했다.

태평로란 어떤 곳인가?
삼성본관, 삼성생명 빌딩, 신한은행 본관이 있는
소위 엘리트 회사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울역과 시청역은 한 정거장 차이지만,
이 두 역의 분위기는 굉장히 다르다.
서울역에는 노숙자가 셀 수 없이 많지만,
태평로 지하도에는 노숙자가 몇 되지 않는다.

내가 매일 보는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침 마다 태평로 지하도에서 신문지도 깔지 않고 자고 있다.
서울역의 다른 노숙자들은 두꺼운 라면박스를 몇 겹으로 깔고,
적어도 신문지는 깔고 나름대로 침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갖추고 잔다.
요즘엔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태평로 아저씨는 그냥 맨 바닥에 쪼그려 누워 있다.
그 아저씨는 1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까만 파카에 까만 바지.
쪄 죽을 것 같은 여름에도, 얼어 죽을 것 같은 겨울에도 똑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파카 속에는 난닝구 하나 없이 맨 살이 보인다.

8월의 가장 더웠던 날,
버스 정류장까지의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숨이 턱턱 막히던 날,
그 아저씨는 파카를 입고 왕뚜껑을 먹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아무런 표정 없이 열심히 왕뚜껑을 먹고 있는데,
그 아저씨를 바라 보는 내가 더 더운 것 같았다.

퇴근할 때도 맨날 그 아저씨를 본다.
그 아저씨는 그냥 천천히 걷고 있다.
머리는 나만큼이나 길고,
검은 머리 반 새치(흰 머리?) 반인 아저씨의 머리는
산발 그 자체이다.

그 아저씨는 하루 종일 뭘 할까?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해 봤는데,
지금은 매일 지나가는 버스를 보는 것처럼
그 아저씨는 내게 익숙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아저씨의 하루 일과가 다시금 궁금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퇴근할 때 까지 하루 종일 뭘 할까?
그 아저씨는 구걸도 하지 않는다.
다른 노숙자들처럼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시비도 걸지 않는다.

그 아저씨는 무슨 돈으로 왕뚜껑을 먹고
매일 매일의 시간을 견딜 만큼의 식량을 얻을까?
그 아저씨는 덥지 않을까?
그 아저씨는 언제부터 노숙자가 되었을까?
그 아저씨는 가족이 없을까? 등등.

태평로 노숙자는
번듯한 양복을 입은 허울 좋은 회사원들 속에
오늘도 까만 파카를 입고 태평로를 느릿느릿 걷고 있다.

2004년 9월 추석을 앞둔
<태평로 노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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