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게르트 레온하르트 지음, 전병근 옮김 / 틔움출판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의 악함 대부분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한다.

 

- 한나 아렌트 -

 

 

 

 

과학이 생활 곳곳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인공지능 기술은 점점 복잡하게 발전하고 대중과 멀어져간다. 어쩌면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알기를 포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인류의 과학기술 진보가 2배 승수로 체증하는 법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18개월마다 칩의 집적도가 2배씩 높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그는 비단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과학기술이 일정 기간에 2배씩 발전해왔음을 증명해 보였다. 커즈와일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래 인류가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050년에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초인공지능이 가능해져 개개 인격의 한계를 초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그 원리들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게 되면 이미 인간은 신(god)이나 다름없게 된다. 커즈와일의 전망이 가시화할 시점이 그리 멀지 않다. 기하급수적 기술 발전 법칙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에 특이점이 올 수 있다.

 

커즈와일을 비롯한 대부분 학자들은 ‘사람 같은 인공지능’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며 그것도 머지않아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인간의 진화로 인해 탄생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과 다를 게 없다. 여기까지는 수긍이 간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특이점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사람 같은 인공지능은 과연 등장할 것인가. 스스로 배우는 인공지능이 인간성으로 통칭하는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면 이것과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계속 허물어져 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를 만한 인간 고유의 특징을 간직할 수 있을까. 기계와 소통하며 사는 데 점점 길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길 없다. 미래학자 게르트 레온하르트는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것을 삼키는 기술 변화에 직면한 우리는 인간성의 우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15쪽)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틔움, 2018)은 이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인공지능에 관한 내용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기술적 요소가 중심이 되면서 인간의 본질, 즉 안드로리즘(Andronism)이 감축되거나 폐기될 처지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안드로리즘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며 저자는 창의성, 연민, 책임성, 공감 등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안드로리즘이라고 말한다. 기술 발전은 ‘조금씩 그러다 갑자기’ 등장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사실 기술의 발전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속속 현실로 나타나게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지배하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보편화하지 않았을 때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그들의 포로 아닌 포로가 되어 그것들이 없으면 갑갑하고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편해지고자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 앞에 인간 스스로가 발목을 잡힌 것이 현실이다. 우리들의 도덕성이나 인간미는 갈수록 멀어져 가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만을 추구했을 뿐 인간 고유의 가치를 도외시한 결과이다.

 

“기술은 윤리가 없다. 기술이 윤리를 가져서도 안 된다.”[1]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조합한 것을 실존적 존재인 인간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만약 ‘사람 같은 인공지능’의 인권을 인정한다면 인공지능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계에도 인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면 진정한 인간의 윤리와 존엄성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기술자들은 기능을 구현하는 데만 집중할 뿐, 기술이 일으킬 법적 · 사회적 파장 같은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는 기술 발전을 경계하고 있으나 그것을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는 저절로 우리 앞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으로 나날이 변화하는 미래에 대비하려면 우리가 가진 능력(어떤 현상에 대해 숙의하고 성찰하는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요소로써 인간성의 가치는 기술의 혜택과 불안이 동시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새롭게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원효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해골에 고인 물이 맛 좋은 음료가 수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앞으로 기술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부작용을 모두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원효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기계의 진화를 두려워하는 동안 인공지능의 성능은 더 빨리 향상되고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에 대해 정말 깊이 고뇌해야 할 때다.

 

 

 

 

[1]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54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8-05-0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악함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혜롭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짓는 인간의 죄라는 것도 있지요.

cyrus 2018-05-08 18:40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몰라서 죄를 짓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면서 죄를 짓는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

2018-05-08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8 18:41   좋아요 0 | URL
이 책에 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을 여러 번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서 북플이 생각났습니다.
 

 

 

매주 일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인문학 독서 모임이 진행된다. 스몰토크가 ‘레드스타킹’ 공식 모임 장소이기도 해서 두 가지 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은 일요일, 월요일 이틀 연속으로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 독서 모임에 합류하게 됐다. 요즘 책을 읽으면서 지식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일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는 나 자신에게 놀랄 때가 있다.

 

 

 

 

 

 

 

 

 

 

 

 

 

 

 

 

 

* 토머스 새뮤얼 쿤 《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

 

 

 

 

 

 

 

 

 

 

 

 

 

 

 

 

* 장하석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지식플러스, 2015)

* 장대익 《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김영사, 2008)

* 앨런 차머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85)

 

 

 

 

인문학 독서 모임을 위해 읽고 있는 책은 토머스 새뮤얼 쿤《과학 혁명의 구조》(까치, 2013)이다. 4월 22일 일요일에 첫 번째 모임이 있었고, 매주 세 장씩 읽어와야 한다. 지난주(4월 29일)에 있었던 두 번째 모임은 불참했다. 지난주는 너무 바빠서 《과학 혁명의 구조》 4~6장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빠졌다고 해서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포기한 건 아니다. 책을 너무 좋아해서 완독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고약한 성질이 있지만, 뚜렷한 목표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읽는다. 인문학 독서 모임 참석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독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쿤과 카를 포퍼가 양분하는 과학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내 독서 목표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계기로 인해 혁명의 형태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 구 패러다임과 신 패러다임이 투쟁하면서 구 패러다임이 폐기되고 신 패러다임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A가 주장한 어떤 이론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A 이론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 B는 A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B는 A 이론을 새로 검증하고, 끝내 그것과 다른 ‘B 이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A 이론이 구 패러다임이라면, B 이론은 신 패러다임이다. 한 시대를 대표하거나 지배했던 A 이론은 전면 부정된다.

 

《과학 혁명의 구조》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체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정말 더럽게 재미없다. 물론, 책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을 쿤의 글쓰기 탓으로 돌릴 수만 없다. 개역판인데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다. 여전히 이 책에 한 번에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더러 보인다. 쿤의 과학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처음부터 《과학 혁명의 구조》 읽기를 시도하면 지쳐서 독서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 토머스 새뮤얼 쿤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

* 남영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

 

 

 

《과학 혁명의 구조》가 쿤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이 책을 ‘쿤의 첫 번째 저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쿤의 첫 번째 저서는 1957년에 발표된 《코페르니쿠스 혁명》(지만지, 2016)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에 코페르니쿠스가 많이 언급된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킨 과학 혁명 중 하나로 봤다. 《과학 혁명의 구조》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먼저 읽으면 된다. 이 책도 학술서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에 재미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보여준 쿤의 과학철학을 미리 접할 수 있는 책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집필하기 전에 쿤은 하버드 대학 과학사 강의 준비를 위해 과학사 문헌들을 탐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과학사를 바라보는 ‘기존 관점’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기존 관점’으로 과학사를 서술한 연구가들은 진공이나 중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각 진공과 중력의 실체를 증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뉴턴의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쿤은 수천 년 동안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거 학자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쿤은 프톨레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로 이어지는 우주론과 천문학을 추적하여 ‘지식이 축적될수록 과학은 진보된다’는 관점을 반박한다. 그 반박의 입장을 담은 책이 바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수천 년 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구는 견고한 지지대에 의해 떠받혀 있다고 생각해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의하면 지구만이 천체 운동의 유일한 중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동설과 대치되는 우주론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천동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해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처음부터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사실, 그는 반동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동의했으며 이를 좀 더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해 자신만의 우주론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멈추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성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 덕분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생각이 수천 년 동안 지배해온 굳건한 세계관을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훨씬 지나서야 후세 사람들은 그를 ‘비범한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씌워진 ‘신화’를 과감히 벗긴 다음에 과학 발전의 변화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또 낙하 실험을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논박한 것으로 알려진 갈릴레오의 업적도 ‘신화’라고 주장한다. 쿤의 견해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이 《태양을 멈춘 사람들》(궁리, 2016)이다.

 

과학 이론은 ‘무에서 유’로 탄생하는 건 아니다. ‘천재’로 알려진 과학자들도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한 보수적인 세계관을 완강히 거부하지 못했다. 뉴턴은 자신의 과학적 성과가 스스로 일궈낸 창조적 결과물이 아닌 선대의 지식, 즉 ‘거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강조했다.

 

 

 

 

 

 

 

 

 

 

 

 

 

 

 

 

 

* [품절]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까치, 2006)

 

 

때로는 새로운 세계상을 향해서 지적 도약을 해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뉴턴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의 어깨를 도약판으로 사용했다.” (스티븐 호킹,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중에서)

 

 

 

뉴턴은 ‘거인들의 어깨’가 자신의 지적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의 사다리’를 이용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구 패러다임의 사다리 삼아 올라가 남들이 보지 못한 지식의 세계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서야 ‘오래된 사다리’를 과감히 버렸다. 과학이 축적되면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지식이 손실되는 과정(‘쿤의 손실’)[1]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과학자들이 쓰다 버린 사다리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그것은 비과학적이고 엉터리로 판명되었어도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요긴한 도구였다. 과학의 발전은 과거 성과를 긍정하면서 그 위에 한 층을 더 올리는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부정하는 동시에 사다리 한 층 더 올라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1] 장대익의 책에는 ‘쿤의 손실’을 ‘Khunian loss’로, 장하석의 책은 ‘Khun loss’로 표기되어 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캐모마일 2018-05-03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 혁명의 구조 읽어보고 싶은데 여전히 손을 못 대겠네요. 내용도 만만찮은데다 번역의 질도 썩 좋지 않다고 들어서요...태양을 멈춘 사람들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5-04 16:51   좋아요 2 | URL
오랜만입니다. 캐모마일님. 잘 지내고 계시죠? <태양을 멈춘 사람들>이 강연을 정리한 책이라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이 있어서 좋아요. ^^

고양이라디오 2018-05-03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과학혁명의 구조 조금 읽다가 포기했었습니다ㅎ 즐독 완독하세요ㅎ

cyrus 2018-05-04 16:52   좋아요 1 | URL
완독하려면 한 달 걸릴 듯합니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8-05-05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하시네요. 일도 하시고 책도 읽으시면서 이런 모임도 나가서 절차탁마하시니 앞으로도 큰 성장과 발전이 기대됩니다. 사실 저처럼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은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있을지언정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른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좀처럼 느껴볼 기회가 없네요. 그나마 알라딘서재가 있어 다행입니다.

cyrus 2018-05-08 12:00   좋아요 1 | URL
예전의 알라딘 서재는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두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상대방의 생각이 압축된 글을 진지하게 보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오로지 내 생각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댓글로 소통을 해도 인간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서재 활동을 하다보면 아쉬움을 많이 느껴요.

페크pek0501 2018-05-07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를 억압해서 생기는 문제에 주목했지만, 이 시대는 억압하지 않아도 되니까(다른 걸로 대체할 수도 있고) 그런 문제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문제로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니 이론도 바뀐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님이 쓰신 맨 마지막 글을 보고 생각났습니다.

cyrus 2018-05-08 12:04   좋아요 1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합니다. 교과서로 배운 지식은 오래 가지 못해요. 그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지식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지식을 접하기 위해서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건 독서예요. ^^

雨香 2018-05-09 0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을 때까지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말씀에 백퍼 공감합니다. 몇 년전에 공룡에 대한 독서를 할 때도 그랬지만(이후의 연구결과가 전혀 다른 이론을 내더군요) 요즘 고려사를 독서와 팟캐스트를 통해 공부하고 있는데, 고려에 대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더군요

두해전인가 와우북페스티벌에서 <태양을 멈춘 사람들>의 저자 남영 교수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왜 지동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론적으로 완벽해보여야(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으로 봐야하는지?) 받아들인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cyrus 2018-05-09 11:59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이정모 씨의 <250만 분의 1>를 읽고, 제가 어렸을 때 접했던 공룡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우향 님은 남영 교수가 말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셨어요.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보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싶어 했어요. 쿤은 천동설을 바라보는 코페르니쿠스의 관점을 ‘미적 가치’를 되살리려고 한 자세라고 분석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을 비판했고,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쿤의 분석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 BBC가 방송하고 이종필이 해설하다
스티븐 호킹 지음, 이종필 옮김/해설 / 동아시아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노벨상은 죽은 사람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수상 후보에서 제외된다. 다만, 생전에 수상자로 지명된 경우에는 사후에도 상을 받을 수 있다. 두 달 전에 영면한 스티븐 호킹은 노벨상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는 이론 물리학자이다. 그의 이론이 대부분 현재 기술로는 검증할 수 없다. 언젠가 이론이 입증되어도 사후 수상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는 노벨상을 탄 여느 물리학자 이상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대중으로부터도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 것은 블랙홀의 연구를 통해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를 한층 깊게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치병으로 전신이 마비된 가운데서도 과학자로서의 탐구 정신을 끊임없이 불태운 집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킹은 20대부터 루게릭병을 앓으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적 같은 생명력으로 온 힘을 다해 우주의 근원을 밝히려 노력해왔다.

 

호킹이 일반 독자를 위해 쓴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까치, 1998)를 읽어도 우주의 비밀에 대한 복잡한 생각은 쉽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이 과학서적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이지만, 또한 사놓고 가장 많이 읽지 않은 책이라는 평가처럼 가볍게 펼칠 수 있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가 남긴 말이다. 야구를 비롯한 다른 스포츠는 물론 우리 인생도 끝까지 최선을 다할 때 극적인 반전이 있는 멋진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을 이해하기 어려워도 독서를 포기하면 안 되고, 책 한 번 읽었다고 해서 잘 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발병 이후에 뛰어난 업적을 이룬 호킹처럼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도 독서도 그 끝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모든 끝은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호킹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동아시아, 2018)을 읽음으로써 다시 한번 우주에 대한 이해에 도전할 수 있다.

 

이 책은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호킹의 BBC 리스 강연을 정리한 것이다. 강연록은 전문 용어와 수식의 사용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분량은 가볍게, 내용은 알차게, 그림을 더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BBC 뉴스 과학편집자 데이비드 슈크먼이 호킹의 설명에 대한 보충 설명을 추가했고, 이종필이 밀도 있는 심화 해설을 덧붙였다. 강연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블랙홀은 털이 없을까’, ‘블랙홀은 흔히 블랙홀이 칠해져 있는 것처럼 검지 않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블랙홀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구멍’이다. 그런데 블랙홀은 이름과는 달리 검지 않다. 또, 무조건 집어삼키기만 하는 천체도 아니다. 블랙홀은 엄청난 중력으로 주변의 물질을 모두 빨아들인다. 블랙홀에 한 번 흡수되면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다. 블랙홀 주위에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불리는 경계가 있다. 사건의 지평선은 블랙홀에 들어간 물질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블랙홀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존 아치볼드 휠러“블랙홀은 털이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1975년에 호킹은 입자들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소립자들이 빛보다 더 빨리 이동하기 때문에 블랙홀은 일정한 비율로 빛과 입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블랙홀은 검다고 말할 수 없다. 입자와 복사파를 내보내는 블랙홀은 질량을 잃게 되고 더욱 작아진다. 결국, 블랙홀은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호킹은 ‘호킹 복사’라고 불리는 현상을 근거로 블랙홀이 사라지면 그 속에 들어간 물질의 정보도 사라져서 확인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킹은 자신이 주장했던 이론을 스스로 뒤집었다. 그는 블랙홀에 빠져들어 간 물질의 정보는 방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호킹은 블랙홀은 빨아들인 모든 것을 결코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며 블랙홀 안으로 들어간 정보를 바깥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방출된 물질의 정보를 통해 블랙홀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고, 미래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말을 거의 할 수 없으며 눈꺼풀과 세 손가락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었던 스티븐 호킹. 생존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보통의 루게릭병 환자는 발병 후 3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호킹은 50년이 넘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우주론과 블랙홀의 비밀을 푸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었다. 호킹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노벨상을 받지 못해도 호킹은 위대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의 연구 업적뿐만 아니라 살아생전 보여준 집념과 의지는 인류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5-03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3 19:50   좋아요 0 | URL
호킹의 이론은 검증되지 않아서 노벨상 수상 자격 조건에 맞지 않아요. 호킹 본인도 그 사실을 알더군요.. ^^;;

캐모마일 2018-05-0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라길래 비전공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겠거니 했는데, 훑어보다 그냥 제자리에 놓고 왔었어요....ㅜㅜ 스티븐킹 박사 타계 뉴스 접하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때 기억나서 그냥 뒀네요. 그나마 이 책은 방송 강연을 묶은 책이라 한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책소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5-04 16:55   좋아요 1 | URL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이 <시간의 역사>보다 읽기 쉽습니다. 분량이 아주 얇아요. <블랙홀>을 읽고 난 뒤에 <시간의 역사>,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으면 될 것 같아요. 저는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요. ^^

AgalmA 2018-05-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대해선 너무 단정하신 듯^^;
호킹 복사가 입증되면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53~54페이지 확인바랍니다/)
˝노벨물리학상은 이론이 ‘시간에 의해 검증‘되었을 때 수여됩니다.˝

생존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주긴 하지만 사후 수여한 사례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매우 중대한 발견일 경우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97%AD%EB%8C%80-%EC%84%B8-%EB%B2%88%EC%A7%B8-%EC%82%AC%ED%9B%84-%EB%85%B8%EB%B2%A8%EC%83%81-%EC%88%98%EC%83%81%EC%9E%90
그래서 호킹도 자신의 이론이 입증되면 노벨물리학상 받을 거라고 기대했지요. 과연 언제 증명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cyrus 2018-05-04 22:11   좋아요 1 | URL
호킹이 노벨상 수상 여부를 언급한 연도가 2016년이었고, 그 당시 그는 살아있었어요. 지금도 그가 살아있다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ㅎㅎㅎ 호킹이 고인이라서 수상이 불가능할 거로 생각했는데, 호킹 복사가 최대한 빨리 검증된다면 예외로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결국, 노벨 위원회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호킹 복사가 검증되면 호킹에게 노벨상을 주자는 여론이 생길 것 입니다.

올해는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네요. 스웨덴 한림원 미투 운동 여파가 있어서 올해 연기하고, 내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2명을 선정한다고 합니다.

AgalmA 2018-05-04 22:15   좋아요 0 | URL
호킹은 자기가 살아 있을 때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태였잖습니까ㅜㅜ;
미투 운동이랑 노벨상 수여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연기까지;;; 그렇담 올해는 노벨상 수상으로 갑작스레 읽고 싶고 읽어야 할 책이 한꺼번에 늘어나는 일이 없어 좋긴 한데 내년으로 밀릴 뿐이라면 그 또한 걱정이네요ㅎ;;
 

 

 

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대구는 일찌감치 여름에 접어들었습니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인데도 ‘꽃보다 페미니즘’ 2강에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강연자 나영 선생님이 레드스타킹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주셨어요.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한 권이 아닌 무려 네 권이나 주셨어요. 선생님, 열심히 읽겠습니다!

 

 

 

 

 

 

 

2강 제목은 <성폭력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다섯 가지 키워드 : 성, 노동, 동의, 권력, 폭력>입니다. 다시 생각해야 할 다섯 가지 키워드라…‥ 무슨 의미인지 감이 잘 오지 않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보도록 해요.

 

‘성폭력’이란 무엇일까요? 성(性)과 폭력. 이 두 개의 단어를 따로따로 살펴보죠. 성은 단순히 섹스(Sex)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작년에 홍준표 자한당 대표가 “젠더 폭력이 뭐임?”이라고 말한 적 있어요. 젠더(Gender)도 ‘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섹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젠더는 사회학적 성을 의미합니다. 유전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이 생물학적 성이라면, 사회학적 성은 생물학으로 타고난 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회나 문화에 의해 수행된 역할을 의미합니다. 섹슈얼리티(Sexuality)라는 단어도 있어요. 사실 섹스와 젠더에 비해 섹슈얼리티는 그 의미를 정의하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섹슈얼리티는 앞서 언급한 섹스와 젠더의 의미 모두를 포함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성폭력의 의미를 알아볼까요? 성폭력은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사회 전반의 성폭력 실태를 이해하기 어려워요. 성폭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례가 아주 많아요. 전쟁 강간(일본 위안부), 직장 내 성희롱, 데이트 강간, 친족 성폭력 등이 있어요. 나영 선생님은 “성폭력은 성욕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성폭력은 단순히 성욕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해자가 권력 또는 권력적 위계를 용인하는 사회적 · 제도적 구조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강제적 폭력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입니다. 성폭력을 성욕의 문제로만 본다면 성폭력이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권력’은 은폐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성폭력은 협의적 의미(Sexual Violence)가 아닌 포괄적인 의미, 즉 젠더 폭력(Gender Violence)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홍준표 대표가 모른다던 젠더 폭력, 이제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 또는 성 문화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용인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저임금 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을 감당하고 있으며 경제 참여에 있어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서비스업 여성 노동자들은 감정노동과 성희롱에 많이 시달립니다. KTX, 항공사 여성 승무원은 고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여성 승무원들은 고객의 지위를 돋보이려고 친절 서비스까지 제공해야 하는 노동을 요구받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권력형 성폭력’에 해당합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권력 있는 가해자가 여성 직장 동료를 ‘약자’로 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입니다. 나영 선생님은 여성 노동에 대한 저평가와 여성 노동자를 직장 동료가 아닌 ‘약자’로 보는 성희롱 가해자의 사고가 남성 중심주의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이제 우리는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찾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성폭력 문제를 논의할 때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하며 무조건 피해자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의미가 희석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동정받는 대상’으로 한정시킵니다. 처음에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 경험 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사건을 해결하려는 법적인 관점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위해 무조건 편드는 입장으로 잘못 알려졌고, 성폭력 근절 운동은 피해자의 폭로만 알리는 데 그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됩니다. 나영 선생님은 가해자에 향한 분노를 ‘말하는’ 미투 운동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미투 운동을 “(이제) 나도 말할 수 있다”가 아닌 “나도 고발한다”라는 의미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곡된 피해자 중심주의에 벗어나야 미투 운동에 참여한 가해자의 주체적인 행동이 주목받게 되고, 미투 운동은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고 노력해야 할 공적 담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레드스타킹이 야심차게 준비한 ‘꽃보다 페미니즘’ 2부작 강연이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이러한 행사를 준비해본 경험이 부족하고 매우 서툴러서 제대로 준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으샤 으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강연에 참석한 분들이 보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큰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페미니즘이 정착하기엔 여전히 척박한 대구를 위해 멀리서 오신 권김현영 선생님, 나영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아, 멀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 이미 두 분 모두 페미니즘으로 통하는 레드스타킹의 SNS 친구가 되었으니까요. 강좌를 위해 다 같이 준비한 레드스타킹 멤버들 모두 수고 많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강연에 호응을 해주시고, 강연에 참석하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레드스타킹은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 함께 공부해요. 레드스타킹은 해치지 않아요. 레드스타킹은 어렵지 않아요. 모임에 와 보면 알아요.

 

 

 

 

 

 

 

레드스타킹은 다음 주 월요일(5월 7일, 대체공휴일)에 쉬고, 그 다음 주인 5월 14일 월요일부터 새 책 읽기를 시작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5-02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3 14:26   좋아요 0 | URL
책 읽으려고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하게 되네요.. ㅎㅎㅎ
 
중세의 재발견 - 현대를 비추어 보는 사상과 문화의 거울
박승찬 지음 / 길(도서출판)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4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흔히 인문주의의 태동과 결부시켜 설명되는 게 일반적이다. 신 중심 세계관이 지배했던 중세 시대와 달리 르네상스는 중세‘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삼라만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중세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 · 로마 문명과 근대 산업혁명 사이에 존재했던 암흑의 시대였다는 혹평이 우리 뇌리에 많이 각인된 것이 현실이다.

 

중세 철학을 전공한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는 ‘중세를 재발견’하여 중세에 대한 그동안의 편견을 바로잡아준다. 중세 철학에 관한 강연 활동을 했던 경력이 말해주듯 중세 철학(신학도 포함) 원전에 기초한 충실한 설명이 책의 미덕이다. 물론 1,000년이 넘는 중세 역사를 한 권으로 소개한다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중세의 문화 및 사상, 그리고 중세의 위대한 인물, 주요 사건, 논쟁 등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암흑’에 가려졌던 중세의 윤곽을 보여준다.

 

저자는 ‘중세’가 ‘현대를 비추어 보는 사상과 문화의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자의 관점은 무엇보다 유럽사의 암흑기로 평가되는 중세가 사실은 그 어느 시기보다 찬연한 학문적 성과를 낳은 시기였다는 ‘중세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세 철학은 서양 문화의 두 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 · 로마 사상(이성)과 그리스도교 사상(신앙)의 조화이다. 중세 철학 연구는 서양의 근본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 시점에서 우리가 중세를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르네상스는 인간을 해방해 인간의 모든 욕망을 풀어헤쳐 놓았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강해졌고, 욕망으로 발현되는 감정은 실종되었다. 서양 근대는 절대적 신의 왕국을 자처했던 중세 시대를 극복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이성의 빛’에 의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지배한 세상이었다. 그런 야심 찬 이성적 문명의 기대가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크게 좌절되었고, 이성에 대한 절망의 그림자가 깊게 유럽을 드리웠다. 허무주의는 그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근대 사상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해법으로 중세 철학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배타적인 가톨릭 신학이 아니라 윤리적 통찰을 제공하는 철학이다. 이성과 신앙의 합일은 교부(敎父)와 스콜라 철학자들을 통해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어렵게 성취된 조화로운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기되고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세는 어떤 측면에선 암흑이었지만 나름대로 ‘다양성’을 보여준 시대다. ‘샤를마뉴’로 알려진 중세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는 자신의 왕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아 문예 부흥을 일으켰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린 끝에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여는 데 성공했다. 전문적인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인 대학은 이미 중세에 존재했다.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중세 대학은 대학생,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보장해주었고, 그 후로 줄곧 자유로운 사상의 온상이 되어왔다.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공부하는 자세’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신분,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다. 여기서 궁금한 점. “중세의 대학인에 ‘여성’이 있었을까. 저자가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아서 아쉽다. 아벨라르를 사랑했던 제자 엘로이즈를 제외하면 이 책에 중세 여성의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는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어도 중세 여성은 여전히 남성 중심 사관(史官)이 만들어 낸 ‘암흑’에 가려져 있다. 어쨌든 대학이 자유로운 지성의 산실이자 진리의 보고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 저자는 중세 대학이 추구했던 ‘학문에 대한 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학들에는 대학의 근본적 역할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 맥을 이어온 중세 철학이 없었다면, 오늘의 서양 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인문학적으로도 훨씬 뛰어난 업적의 시기였다. 중세를 서양 문명을 지탱한 ‘척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 중심의 근대가 갖는 맹점과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세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만 정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중세는 이상과 현실, 구(舊) 사상과 신(新) 사상이 대립하고 타협하던 시대였다.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중세만의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시대의 모습임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중세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5-02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2 17:27   좋아요 1 | URL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주변 인물 중심으로 읽어보려고 해요. **님이 언급하셨듯이 소설에 마녀로 몰린 여성이 나오고, 성 밖에 사는 하층민 공동체도 나옵니다. 중세 역사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계층과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5-02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흑기라 불렸던 중세도 최근 재조명받는 것을 보면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cyrus 2018-05-02 17:33   좋아요 1 | URL
역사는 살아있는 학문입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재해석하는 일을 멈춘다면 그 역사는 ‘죽은 학문’입니다. ^^

sprenown 2018-05-02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위징아도 중세에 대해 상당히 좋게 평가 한다더군요^^‘.중세의 가을
이라는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역사라는게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이겠조.

cyrus 2018-05-03 14:27   좋아요 1 | URL
중세를 공부할 때 하위징아의 책을 꼭 읽어야 해요. 중세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문장들이 좋아요. ^^

옥토끼샘 2018-05-03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승찬 교수입니다. 소중한 서평에 감사드리며 궁금해 하신 질문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답해 봅니다.

중세 대학의 설립기를 탐구하면서, 매우 안타까운 것은 대학을 통해서 널리 퍼져 나간 평등의 원리에서 여성들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자 수도원이 남자 수도원과 함께 열띤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던 12세기만 해도 빙엔의 힐데가르트 수녀원장이나 아벨라르두스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엘로이즈와 같은 지성적으로 뛰어난 여성들이 비교적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들어와 여러 학교들이 대학으로 체계화되면서 여성들은 오히려 이성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당시 여성 차별은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중세 대학은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교육에서 배제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파리대학에서 모두 남성이었던 학생과 교수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기사들과 같이 “지성적 십자군”에 나설 것을 서약할 때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서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여성들은 갑자기 고등 교육의 기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여성들은 도시에 살며 그들의 부모가 부유한 경우에 한해서 특정한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고등 교육의 기회는 수도원에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도원에서의 교육을 통해 사회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것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성들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신분에 맞게 결혼하기 위해 가져가야 하는 지참금보다는 적었다고 하더라도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지참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cyrus 2018-05-03 19: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교수님. 제 궁금증을 해소하는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에 중세 여성을 주제로 한 책이 많이 나오지 않은 걸로 압니다.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여인들》을 포함해
해서 열 권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번 달 독서 모임을 위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을 예정입니다. 교수님이 쓴 《중세의 재발견》을 읽고나서 중세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다른 책들도 참고해야겠습니다. ^^

옥토끼샘 2018-05-03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더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시면 제 논문 박승찬, 「‘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여성의 진정한 가치- 토마스 아퀴나스의 여성이해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가톨릭철학』7 (2005), 148-190쪽. 과 그곳에 제시된 참고문헌들을 참조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