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극한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실제 경험치에 더욱 가까운, 그래서 더욱 실감 나는 현실 공간을 찾아가기도 한다. 영화 『그래비티』는 무중력으로 가득한 우주의 공포를 그린다. 이 영화에 아름다움과 긴장을 동시에 가져오는 것은 우주라는 공간 자체다. 무한한 우주는 경외심을 가지고 창조의 섭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며 인간이 중력의 한계를 벗어나 부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무한 공간에 갇힌 조난자에게는 끝없는 공포를 가져온다. 산소는 희박하고, 중력이 없는 탓에 뜻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망망한 공간을 떠돌다 죽게 된다는 사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공포다.

 

우주는 수백억 년 동안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왔다.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그만큼 오랜 시간을 달려야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 우주는 작은 행성부터 수천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은하, 나아가 수천억 개의 은하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곳은 우주 한구석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행성에 불과하다.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계는 대략 130억 광년 거리에 있다. 성능 좋은 망원경으로 이 은하계를 관찰한다 해도 우리는 이미 130억 년 전의 모습을 볼 뿐이다.

 

 

 

 

 

 

 

 

 

 

 

 

 

 

 

 

 

 

 

 

 

 

 

 

 

 

 

 

 

 

 

우주의 무한한 풍경은 인간의 정신을 압도한다. 광활한 우주 앞에서 우리는 자기 몸이 보잘것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무시간적 우주에서 우리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활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인간은 공포로 인한 감정으로부터 쾌락을 느끼는 모순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버크가 정의한 ‘숭고함’이 여기에서 나온다. 숭고는 무시무시한 대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연관된 특별한 정신적 경험이다.

 

 

 

 

 

 

 

 

 

 

 

 

 

 

 

 

 

 

우주 사진은 단순한 눈으로 보는 사진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숭고한 사진이다. 그래서 우주 사진은 생동감이 느껴질 정도로 멋있어야 한다. 우주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책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진집 《별빛 방랑》(사이언스북스. 2015)은 지구 밖 미지의 공간들을 마주하면서 생기는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황인준 씨는 30여 년 동안 신비하고 놀라운 우주 쇼를 카메라에 담았다. 인간의 의식으로서만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의 우주의 풍경들을 사진으로 생생하게 형상화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사진집 속에 구름 조각 사이에 천연색으로 빛나는 별, 개기일식이 정점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혜성과 오로라까지 생경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사실 우주 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이런 사진집에 눈을 다 뜨고 보기 힘들 수 있다. 색은 깊고, 공간은 넓고, 저기 먼 밤하늘은 아득하다. 이 지평에서 우리는 무한의 어떤 끝자락을 섬광처럼 떠올린다. 그 경험은 놀라움을 지나 전율에 가깝다. 그래서 신성하다. 참된 자연의 체험은 장엄한 종교의식과 같다. 우주와 생명, 물질의 세계를 파고들다 보면 비록 신을 믿지 않더라도 뭔가 오묘한 법칙과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신비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누구처럼 온 우주의 기운을 모을 수 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과학자가 아닌 사람이 ‘우주의 기운’ 지껄이면 사이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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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1-15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정말 웃긴다.ㅋㅋㅋㅋ

cyrus 2016-11-15 16:56   좋아요 1 | URL
이거 말고 우주의 기운 관련 패러디 사진 더 찾아보면 많이 있어요. ㅎㅎㅎ

북프리쿠키 2016-11-1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시크릿>이란 책으로 그렇게 밀었던 자기계발서의 문구인데도 뜨지 못하다가 이번에 훅 ~떴네요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고ㅎ
이러려고 우리가 개그맨 됐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개그맨,개그우먼들이 유행어에도 밀리고 있으니ㅎ

중간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 눈에 띄네요. <마라의죽음>이란 그림도ㅎㅎ
책은 좀 어렵지 싶은데요ㅠ

cyrus 2016-11-15 17:56   좋아요 1 | URL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도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코빅, 개콘보다 재미있는게 JTBC 뉴스입니다. ㅎㅎㅎ

버크의 책 문장이 딱딱하고 지루할 겁니다. 사실 저도 안 읽어봤어요. 에코의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에 버크의 숭고미를 쉽게 소개한 내용이 있어요. 이것만 보셔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

yureka01 2016-11-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써주는대로 받아 읽으니 우주의 기운 이런 소리가 뭔 말인지도 몰랐을듯..ㄷㄷㄷㄷ

cyrus 2016-11-16 08:37   좋아요 1 | URL
‘우주의 기운‘이 《시크릿》 에 있는 구절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겁니다. ^^;;

yureka01 2016-11-16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갈라임까지 나옵니다. 망연자실..ㄷㄷㄷㄷ

cyrus 2016-11-16 11:06   좋아요 1 | URL
박근혜의 ‘주원‘은 최태민이겠군요...
 

 

 

 

 

 

 

 

 

 

 

 

 

 

 

 

 

 

 

 

 

 

 

그리스신화에 크레타 미노스 왕의 미궁(Labyrinthos) 이야기가 있다. 미노스의 왕비는 황소와 정을 통해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는다. 왕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을 짓고 미노타우로스를 가둔다. 괴물의 제물은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었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괴물을 처치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다. 테세우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실타래를 줬다. 테세우스는 미궁의 문설주에 실 끝을 묶고 안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풀어놓은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미궁에 빠지다’, ‘미로를 헤매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살다 보면 출구가 안 보이는 것 같은 미궁과 미로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로댕은 ‘우리는 자기를 둘러싸는 깊은 미궁 속에서 항상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미로 게임을 즐겨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미궁=미로’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미궁을 연구하고 분석한 《우주의 자궁 미궁 이야기》의 저자 이즈미 마사토는 ‘미궁=미로’ 관념을 부정한다. 미궁은 의도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다. 발명가 다이달로스가 애초에 미궁을 그렇게 제작했더라면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고도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미궁은 탈출할 수 있는 통로 또는 도달 가능한 목적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정밀한 계산으로 설계된 구조물이다. 실타래를 사용하지 않아도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다. 막힌 통로를 만나더라도 다시 지나간 통로를 되짚어 나오면 된다.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 반면 미로는 (이즈미 마사토가 정의한) 미궁과 정반대의 뜻이 된다. 미로에는 탈출구가 없다. 또한, 통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므로 복잡한 상황에 부닥칠 때 사용되는 관용어구 ‘미궁에 빠지다’는 틀린 거고, ‘미로를 헤매다’ 또는 ‘미로에 빠지다’가 정확하다. 다만, 미로를 무조건 미궁으로 통일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궁이나 미로나 이 구조물에 들어가면, 누구나 길을 잃어버려 헤매기 때문이다.

 

 

 

 

 

 

 

 

 

 

 

 

 

 

 

 

 

 

 

이즈미 마사토는 미궁이 이성의 힘을 통해 질서 정연하게 만들어진 구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무질서하고 흐트러져 있는 세계보다는 질서 정연한 세계 속에 있을 때야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의 토대가 되는 규칙과 질서였다. 그런 규칙과 질서를 부여하는 권위가 바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이 느끼는 약점이나 한계를 보완(또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추상 충동’을 느끼기 시작한다고 분석했다.

 

 

 

 

 

 

 

둥그런 구멍 따위의 작은 것들이 뭉쳐 있는 것을 보면 공포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환 공포증’을 느낀다고 말한다. 환 공포증의 원인을 연구한 학자들은 환 공포증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독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천적의 위협을 피하려는 생물의 몸에는 원 무늬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공작나비의 경우 앉아 있을 때는 보호색을 띠지만, 천적이 다가오면 날개를 펴서 눈알 모양의 무늬로 위협을 준다. 이런 무늬를 볼 때 인간의 뇌는 몸에 무의식적으로 신호를 보낸다. 위협적인 대상을 피하라는 일종의 신호인 셈이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환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정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동그라미의 무시무시한(?) 존재에 맞서려면 그 형태 한가운데에 점 하나 콕 찍으면 된다. 아니면, 동그라미 안에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려 넣으면 된다. 점을 찍거나 동그라미 안에 그림을 채워 넣는 행위는 ‘추상 충동’이다. 보링거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발생한 ‘추상 충동’이 예술 창작의 원동력으로 봤다.

 

 

 

 

 

 

미로는 인간의 ‘추상 충동’에 의해서 탄생한 ‘이성의 구조물’이다. 고대의 미로는 인간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 맞닥뜨려야 할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이렇게 인간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안은 채 힘든 통과의례를 치러야 한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날아오를 수가 없고, 막다른 통로 속에 갇혀 버린다. 힘든 과정 없이 미궁에 극적으로 탈출한 이카로스는 하늘을 나는 흥분에 도취하여 추락했다. 미노타우로스는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고, 미궁 안에서만 머무르는 괴물로 살아갔다. 이카로스와 미노타우로스는 공통으로 미궁이라는 통과의례를 넘어서지 못했다.

 

중세의 미로는 천상으로 도달하기 위한 순례의 길이다. 이 또한 종교인들이라면 절대로 피하면 안 될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인간은 미로를 제작함으로써 목적지로 향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파악하게 된다. 즉 미로는 인간에게 시련과 고난을 선사해주면서도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지혜의 힘을 북돋워 주는 안정적인 구조물이다.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 바닥에 미로가 디자인 요소로 그려졌다. 흑사병과 죽음 앞에 불안을 떨면서 살아간 중세 사람들은 바닥에 그려진 미로를 바라보면서 심신에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만 있으면 이 세상 어떠한 두려움을 잊고,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의 미로는 세속화의 바람을 맞으면서 과거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종교의 힘이 약화된 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선택이 불가피한 시련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미로는 교회 건물 밖으로 나가 왕족 및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정원 도안으로 전락했다. 특히 연인들에게 미로는 최상의 안식처였다. ‘사랑의 미로’는 탈출구가 없어도 된다. 단둘이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밖으로 나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현대의 미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미로를 만나선 안 된다. 왜냐하면 현대의 미로는 출구와 입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큐브>의 등장인물들처럼 이유를 모른 채 거대한 구조물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보자. 특히 그 구조물이 출구와 입구를 모르는 미로라면 불안감과 공포심이 극대화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은 우화」는 미로 같은 현실에 마주한 인간의 불안감을 우화 형식으로 표현한 짤막한 글이다. 나는 단 5줄에 불과한 이 글이 꿈도 희망도 없는 미로에 갇힌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아아.” 하고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만 해도 세상이 하도 넓어서 겁이 났었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멀리 벽이 보여 행복했었지.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새 나는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모퉁이엔 내가 달려 들어갈 덫이 놓여 있어.” ㅡ “넌 오직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 (프란츠 카프카 「작은 우화」, 《변신 (단편전집》 605쪽)

 

 

카프카도 종종 작품에 미로 구조를 도입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갑자기 달라진 세상과 마주친다. 미로 같은 세상의 몽환적 풍경 때문에 당혹스러워한다. 무턱대고 카프카의 미로에 들어간 독자들도 점점 자신을 에워싸는 불투명한 상황에 빠져나가지 못한다. 우리를 절실히 구원해 줄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기대하지 말라. 카프카도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힌 다이달로스와 같은 신세가 됐다. 미로를 방심하면 금물이다. 한 번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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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14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이야기지만,요즘 나뭇잎들이 허공의 미로를 단 한번의 처녀비행이자 마지막 비행을 합니다.....바람의 미궁으로 헤매는 시간입니다.^^.

cyrus 2016-11-15 07:59   좋아요 1 | URL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어제 바람이 많이 안 불었는데도 바닥에 낙엽이 많았습니다. 가을이 짧아졌다고 해도 가을다운 분위기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
 
미로 정원 -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견한 자기 발견 놀이터
울리히 코흐 지음 / 보누스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2011년에 출간된 구판 《미로 로직》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미로 로직》을 가진 독자는 《미로 정원》을 구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저는 구판을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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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 &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 미지북스 / 2016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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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론자는 “시장은 자유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우리 시대의 삶을 결정하고 있는 선언에 가까운 표현이다. 시장의 자유에 지배되는 사회를 시장경제 사회라고 부른다. 시장경제 사회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단계에 찾아온다. 경제적 측면에서, 발전된 자본주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명명되어 생산의 국제화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로 특징지어진다. 이제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세계화, IMF, WTO,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은 모두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말들이다.

 

우리 사회에 ‘시장경제’ 체제의 해석을 둘러싼 혼란이 깊어가고 있다. 재계는 될 수 있는 대로 정부의 간섭 없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 경제학자 일각에서는 적극적인 분배정책 구사 등 보다 광범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논의가 논쟁을 벗어나 이념 싸움으로 비화해 사회분열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혼란은 궁극적으로 기업의 경영환경 악화로 연결돼 경제 회생을 더욱 더디게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것이 생산 효율성 증가와 같은 산출요소(output)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을 앞세워 박정희 대통령을 한껏 추켜세우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대부분 사람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모델을 그리워한다. 향수(鄕愁)의 근저에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주춧돌과 촉진제가 됐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재벌 위주의 성장정책은 값싼 임금 노동자의 희생과 착취에 기반을 뒀다. 그리고 경제성장의 환경이 박 대통령이 추진했던 산업화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정부와 기업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버리지 못한다.

 

현 정부의 경제관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트리클 다운(trickle-down, 낙수 효과)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트리클 다운이란 ‘물방울이 뚝뚝 흐른다’는 뜻이다. 열심히 혜택을 퍼 줘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거기서 떡고물이 물방울처럼 뚝뚝 흘러 국민도 덩달아 잘살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 허접스러운 생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산선고를 맞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트리클 다운 정책은 실패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생산만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답이 되지 못한다. 재벌 세습이 관행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리 대기업이 성장해도 국민에게 떨어질 떡고물 따위 나오지 않았다. 자유경제원 소속 뉴라이트 학자들은 그저 대기업에 퍼주기만 하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한국 경제의 엄청난 재앙이다.

 

경제학사가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전통에 의한 생산과 분배 문제의 해결이 경제적 변화를 저지하는 ‘거대한 제동 장치’와 같다고 비유했다. 지금은 생산과 성장보다는 일자리의 중요성 등이 강조되는 경제정책 전환기인데 최근 정부의 경제동향을 보면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 위기를 겪고도 과거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답습해 온 것은 경제정책 인프라가 현재 제대로 작동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금 과거에 머물러있다 보니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생산성이 자꾸만 정체되고 있다.

 

하일브로너는 사회경제적 제도가 사회적 노력(경제 성장, 부의 확대 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배분되도록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한마디로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면서 시장가격을 통해 자원이 배분되게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사회는 시장경제를 논할 때 ‘배분’(또는 분배)이라는 단어를 쏙 뺀다. 국민의 불만을 단순히 재분배하는 것으로는 해소하기 어려울 수 있다. 분배의 기회에 뒤처지는 집단이 없도록 평등한 기회 제공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부를 쌓지 못하게 하면서 특권을 얻으려는 불평등은 제한돼야 한다.

 

시장은 완벽하지 않다. 시장은 완전경쟁 상태가 아니며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나타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존재이다. 같은 시장경제라도 정부의 성격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다른 것으로 진보적인 정책을 쓴다 해서 시장경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성장과 분배는 원칙적으로 같이 가야 한다. 경제 수익을 대기업과 초국적 금융자본에만 편중된다면, 경제적 권력에 주어지는 보상에 불과하다. 고대 사회의 부는 경제적 활동의 보상에 따라서 분배되지 않았다. 오로지 권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보상이었다. 우리나라 경제의 시곗바늘은 ‘경제’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고대 사회로 거꾸로 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보통 사람들이 만들거나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겪는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것을 뛰어넘고 싶은 충동은 강할 수밖에 없다. 동서양의 경제사가 이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가야 할 현실의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변화의 고통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 그리고 인내심의 발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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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14 13:17   좋아요 0 | URL
분수효과, 정말 멋진 말입니다. 분수 주변에 아무 곳에 서있기만 해도 분수에 흘러나오는 물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 빌려서 읽고 기록하면 입력된 책 데이터가 사라져요. 그리고 ‘읽고 싶은 책‘ 기록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면 다른 분들의 뉴스피드 기록이 복잡해져요. 그래서 ‘읽고 싶은 책‘, ‘읽은 책‘ 데이터는 삭제합니다.

2016-11-1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6-11-13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방울이 될 만한 낙수를
숫제 펌프로 퍼내 가진 자들의 넘치는 저수지에 보탠 구조네요.

특히나
올해 부쩍 늘어난 교통딱지떼는
경찰들을 보며 숨이 막혔어요.원인이 있었네요.
모자른 세수를 가장 큰 저항없는
방식으로 착취하고 있었구요.
그래도 순진한 국민들은 법을 어겼으니
하루일당이 날아가더라도
묵묵히 과태료를 내는 .
정말 서민들 등골 뽑는 정권입니다ㅎ

cyrus 2016-11-14 13:19   좋아요 0 | URL
고액세금 미납자, 순시리 일당처럼 자신들의 이권을 누리려고 나라 예산을 함부대로 써대는 사람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재산 싹다 몰수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

:Dora 2016-11-13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내심이 절실합니다

cyrus 2016-11-14 13:21   좋아요 1 | URL
단기간 내에 정책 효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이건 아니니까, 없던 일로 하자‘식 반응을 유도하면, 새로운 정책 입안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오쌩 2016-11-14 0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인프라 투자와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어려운 경제시기를 감내하려면 서민들이 자기 최소한 비용으로도 문화적 교육적 혜택을 누릴수 있어야 하니까요.

다만 낙수효과에 대해서는 선뜻 공감하기가 어렵습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막혀있다면 흘러가게 해야되겠죠. 그런데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경제구조가 있을까요.
서민부터 잘사는 경제가 있을까요.
어쩔수 없이 당면한 한국사회경제구조는 대기업위주로 편성되어있고 그아래 중소기업들이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소비가 활성화되고 경제심리를 부양시키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중산층 허리가 두꺼워져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정부와 수구인사들의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온갖 특혜와 재벌 챙기기는 반대해야겠죠. 불공정거래와 기형적 구조를 타파하고 갑을관계 횡포를 바로 잡아야겠지만
트리클다운이 과연 유효하지 않다는것에는 회의적일수밖에 없네요.

cyrus 2016-11-14 13:32   좋아요 0 | URL
정부의 눈에는 국민보다 기업이 먼저 보입니다. 그래서 낙수효과를 여전히 고집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낙수효과의 경제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기업들의 불만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정부는 기업들의 요구에 부합된 낙수효과의 정책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러면 중산층이 처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오쌩 2016-11-14 17:49   좋아요 1 | URL
물론입니다. 사이러스님 취지에는 100%동감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대기업처럼 많은 특혜를 누리는 경우는 드물죠.
다만 그들이 법과원칙에 구속되는 정책이라면 낙수효과도 나쁜게 아니라는...생각을 해봅니다.

2016-11-14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01-23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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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드라마보다 재미가 없다. 영화처럼 누구와 눈이 마주쳐 운명 같은 사랑을 나누는 일도 드물고 사는 일이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의 현실은 흥미롭고 복잡하고 극적이다. 뉴스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뉴스가 소설이라는 말은 아니다. 뉴스는 물론 사실의 전달이다. 하지만 단순히 있는 그대로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기자나 편집자에 의해 선택되어 가공되고 배열된다. 기자나 편집자의 시각과 선호도, 편집의 방향에 따라 뉴스의 성격이나 색깔이 달라진다. 자의적 또는 타의적으로 ‘선택되어 가공되는 것’은 프레임(Frame)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프레임은 특정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하지만,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 노릇도 한다.

 

만화가 닉 수재니스는 철학적인 관점으로 ‘고정불변으로 굳게 닫힌 창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이 마음의 창문이 열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보통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관습의 힘, 즉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우리는 지도를 볼 때 관습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서 본다. 늘 그러한 것만 보인다. 아래에는 제주도가 있고, 위에는 백두산을 넘어 만주가 보인다. 하지만 지도를 남쪽이 위로 가게, 즉 거꾸로 보면 우리의 시선 위로 넓은 바다가 보인다. 프레임 창문이 활짝 열린 사고는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사고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린 사고를 할 수 없다. 관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다. 관점은 말 그대로 사물을 보는 시선의 위치이다.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가에 따라 사물(또는 현상)의 또 다른 면이 보인다. 더 나아가 숨겨진 면도 볼 수 있다.

 

흔히 이 세상이 개인들의 특성이 너무나도 다른 개성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개성화가 강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좋고 나쁜 것에 대한 표현을 비롯한 자신의 의사 표현이 너무나도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요즘의 실태이다. 지금은 분명 다양성이 추구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구시대적인 발상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자신의 연령층이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떨쳐버리기가 매우 어렵다. 이게 오랫동안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로 형성되면, 비판과 또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기회가 상실된다.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다고 해놓고선 토론 댓글을 차단하는 정부의 수준을 보라. 고정관념을 좋아하는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는 소통과 대화를 방해하는 벽을 세우기에 급급하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고등학교는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에게 징계를 언급했다. 지진이 났을 때도 부산의 고등학교는 학생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자습을 강행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일어난 상황들, 가슴 아프지만 잊어선 안 된 ‘그날’과 닮았다. 세월호에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변화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고정관념 밖으로 나가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논쟁을 손해 보는 전쟁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고정관념에 갇힌 걸 알면서도 더 넓은 갇힘을 향해 진군한다. 그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현세대의 고정관념 또한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다. 고정관념에 길들인 다음 세대는 단조로운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주사위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 방향에서 숫자를 바라보듯, 새로운 눈, 참신한 생각, 깊이 있는 논쟁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보면 열린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닉 수재니스는 논쟁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전쟁이 아니라 역동적인 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맞부딪히고, 때론 부둥켜안을 수 있는 생각의 춤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참여 가능한 토론 무대를 마련해줘도 직접 나서서 생각의 춤을 추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끄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온라인 무대에서 마음껏 드러낸다. 그들이 표현하는 것이 생각인지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냥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한가득 담아 상대방의 생각을 공격하느라 바쁘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 불만을 품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단조롭고 폐쇄적인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다. 타인과 똑같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면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면 ‘얕은 지식의 수준’에 머무른다. 프레임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내일 또한 오늘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 것을 착각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또한 오늘 같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결국,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세상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분노와 언어폭력으로 표출한다. 고정관념과 권위주의는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켜 끝없는 추락의 길로 밀어낸다.

 

《언플래트닝 : 생각의 형태》는 지혜롭게 사는 데 필요한 좋은 프레임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창의적 사고를 형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도 아니다. 저자가 알려주는 생각의 도구들을 교육 목적으로 가르친다면, 미래의 세대들의 정신적 성장을 저해하는 ‘이중 프레임’이 겹겹이 형성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자주 강조되는 시각 및 관점의 전환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생각을 왜곡하는 원천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을 하지 못하면 언어는 가시성의 조작자가 되고 이미지는 그 독창성과 순수성을 잃게 된다. 꽉 막힌 세상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기죽지 말고 원 없이 실행해야 한다. 단조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숨 가쁘게 벌어지는 변화에 푹 젖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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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6-11-12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굳이 말해서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나(분란을 만든다는 뉘앙스)˝에요.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공격, 지적, 시비걸기 등으로 받아들이나 봐요. 그래서 자꾸 자기검열(?)하게 되죠. 말해도 될까, 내가 이상한가, 어조가 공격적인가, 말투가 사나운 건가, 태도가 불손(?)한가 등등. 그러다가 ‘말해서 뭐하나‘ 체념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게 말하지 말라는 거랑 같은 느낌 들어요. 이상하고 부당하고 잘못된 건데 아무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ㅎㅎㅎ

cyrus 2016-11-12 13:20   좋아요 1 | URL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cobomi님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서재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는 제 모습이 답답해보였거든요. ^^;;

지금행복하자 2016-11-12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으로 가만히 좀 있지 라는 툭 튀어나올때 마다 이게 내 몸에 내 입에도 붙어있구나 싶어요.. 세뇌는 무서워요~ 질기구요~

cyrus 2016-11-12 13: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래서 방어적으로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나와요.

yureka01 2016-11-12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의에 대해 가만히 있으면 능멸당하죠....역사가 그랬습니다..절대 가만있지 않았으니까요.

cyrus 2016-11-12 13: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