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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가 된 청소부 - 산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
바바 하리 다스 지음, 류시화 옮김 / 정신세계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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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은 성자의 해이다. 그 당시 백담사에 숨어 지내던 전() 대통령 영부인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맨 끝에 아들 자()’를 쓰는 여자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사람(saint)을 의미한다. 19887, 성자가 된 청소부(약칭 청소부’)라는 책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저자는 바바 하리 다스.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자신의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짤막한 글을 써서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전달한다. 바바는 1935년부터 침묵의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나서 열두 살부터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묵언 수행을 했다. 현재 바바는 92세의 나이로 장수를 누리고 있는데, 삶의 절반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살아왔다. (70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묵언 수행의 달인 음 소거바바 선생님) 

 

성자가 된 청소부는 스스로 삶의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총 일곱 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가 바로 성자가 된 청소부. 바바는 동화 또는 우화 형식을 빌려 자신이 터득한 소중한 지혜를 전달했다. 책 마지막에는 바바가 칠판에 남긴 경구들을 가려 뽑아 정리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평범하거나 지위가 낮은 천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여러 차례 역경을 딛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어 성자의 반열에 오른다. 몇 년간 시 쓰기를 중단했던 류시화청소부를 번역함으로써 재기에 성공한다. 이 책의 출간을 기점으로 류시화는 본격적으로 명상서적 번역에 몰두한다. 청소부의 인기는 이듬해 89년에도 이어졌다. 책의 인기에 탄력받은 정신세계사는 또 한 번 성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다. 연이어 꼬마 성자(미국 수피즘 협회 엮음), 성자들의 마을(김정빈 저) 등이 출간되었다. (84년에 정신세계사는 환단고기사관을 바탕으로 쓴 환뽕 소설 을 출간했다. 이 책의 저자가 김정빈이다)

 

 

 

 

 

10% 넘는 시청률을 돌파한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약칭 응팔’)에 아주 짧게 청소부가 등장했다. 덕선(혜리 분)은 당시 인기 작가로 상한가를 치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 옆에 선우(고경표 역)청소부를 읽고 있다. 88년에 나온 청소부는 처음에 연녹색 표지였다. 98년에 2판을 찍으면서 표지 색을 흰색으로 바뀐다.

    

 

1988년 서점가에 이문열, 서정윤, 김초혜 같은 작가와 시인들의 문학 작품들이 강세를 보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정신수양 관련 서적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정신세계사 대표는 모 언론의 인터뷰에서 도시화의 흐름에 피로감을 느낀 독자들이 정신적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정신수양 서적을 펴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정신수양을 소재로 한 책들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 칼릴 지브란,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저작자의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들도 무분별하게 나왔다.

 

지난 주말 헌책방에서 연녹색 표지의 1판을 샀다. 원래 명상서적을 잘 읽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책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그런데 자꾸 응팔의 그 장면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드라마 간접광고에 낚이고 말았다) 우화 형식이라서 그런지 이야기는 별 무리 없이 술술 읽어나갔지만, 바바가 전달하려는 심오한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니까 삶의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는 주인공 삶의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허구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이라서 그런지 현실에 맞지 않은 과장된 장면이 보였다.눈먼 시인과 아내 편을 읽다가 제일 황당한 것이 장님 친뚜가 뱀의 독성분이 들어간 연기를 맞고 두 눈이 보이는 장면이다. 친뚜의 아내는 몰래 사귀는 남자와 함께 도망치려고 친뚜를 살해하는 음모에 가담한다. 친뚜의 음식을 담는 냄비에 생선 대신 독사를 넣는다. 친뚜는 냄비 안에 생선이 있는 줄 알고, 열을 가한다. 냄비에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가 친뚜의 눈을 치료했고, 그제야 친뚜는 아내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상황에서 친뚜는 한바탕 웃으면서 초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신이 자비롭다고 말한다. 자신이 장님이었을 때 신이 아내를 줬고, 아내가 떠나니 이번에는 두 눈을 줬다고 생각한다. 친뚜는 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뱀의 독성분이 있는 뜨거운 열기가 장님을 위한 특효약이 될 수 없다. 범인이 신비로운 체험을 하면서 성자로 거듭나도록 뻔한 결말을 유도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다소 아쉬운 면으로 남는다.

 

대부분 책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라든가 책을 읽고 나서 스스로 깨쳤다는 등 자기반성의 시도를 고백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좋게 보는 독자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벗어나 지나치게 내면세계로 집중하지 않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마음이 평안해진 느낌을 받았어도 고작 한순간일 뿐이다. ‘세상은 존나 힘들어,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면 편해.’ 식으로 결론을 이끄는 책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정신승리만 부단히 일으킨다. 특히 초논리의 세계를 그려내는 정신수양 서적은 치열한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심오한 동양정식을 쉽고 간편하게 풀어냈다는 이유만 믿고, 이런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는 어른이 있으면 경계하자.

 

 

 

 

우리나라에 바바 하리 디스를 맨 처음 소개한 출판사는 정신세계사가 아니다. 1984년에 샘터사침묵은 말한다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에서를 펴냈다. 바바의 칠판에 쓰인 경구들을 모아놓은 Silence Speaks - from the chalkboard of Baba Hari Dass(1977년 출간)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번역자는 안정효. 류시화 번역의 책이 워낙에 잘 팔린 탓에 샘터사의 안정효 번역본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꽤 가격이 비싼 희귀본으로 거래된다.

 

88년 초판본부터 1998(928)에 나온 2판까지 바바 하리 다스의 영문 표기가 고쳐지지 않았다. ‘Baba Hari Das’로 적혀 있다. 이 스펠링으로 검색하면 바바 하리 다스위키피디아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이름 뒤에 ‘s’ 하나 더 붙여야 한다. ‘Baba Hari Dass’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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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6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12-17 22:15   좋아요 0 | URL
쌍팔년에 제가 이 세상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자가 된 청소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에요~ 이런스타일의 책을 좋아하지 않아 저는 읽지 않았지만 책 좀 읽는다는 문학소녀들 중 안 읽은 사람이 없을거에요 ㅎ
저는 음지의 책들을 더 좋아했어서 ㅎㅎ

cyrus 2015-12-17 22:19   좋아요 0 | URL
음지의 책이라면 어떤 내용인가요? 응팔에 정봉이가 읽던 야설 제목이 `황홀한 사춘기`였습니다. 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18 00:09   좋아요 0 | URL
ㅋㅋ 로맨스소설이지요 ㅎㅎ 여러이름을 달고 나온 로맨스 소설...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12-1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런 책 정보는 정말 재미도 있고 유익하네요...

cyrus 2015-12-17 22:21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 가면 알라딘에 검색되지 않는 좋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책의 가치를 알게 될 때 기분이 뿌듯합니다.

살리미 2015-12-16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이 책을 구하셨군요 ㅎㅎ 저도 예전에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닙니다^^ 다만 제목이 너무 낯익어서 응팔에서 보고 반가웠어요. 당시엔 세상이 존나 힘들어서 이런 책들이 붐을 일으켰을까요?
왜그런지는 모르지만 (한참 겉멋들 나이라 그랬나..) 한때 이런 동양적인 정서에 많이 끌렸던 기억이 나네요.

cyrus 2015-12-17 22:23   좋아요 0 | URL
운이 좋게도 응팔에 나왔던 책을 만났습니다. 80년대 명상 서적 붐이 몇 년 전에 유행했던 힐링 서적 붐과 유사한 것 같아요.

달걀부인 2015-12-17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었고 읽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처음 사진보고 읽기 시작하면서 응팔에 나왔나, 했더니 나왔네요.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저는 사실 주변에 누가 책 가이드를 해주는 사람들이 전혀없었는데..어떻게 자꾸자꾸 비교적 깊이있는 독서를 할수 있도록 성장했을까 하는 거예요. 동력같은거랐까요? 즉, 중학교 때부터 순정만화에 일본만화들 엄청 팠고 할리퀸로맨스보면서 설레였던 여고시절 보냈고, 저런 베스트셀러도 거의 다 섭렵하면서 지내다가... 어느날부터는 베스트셀러는 안읽는 똥고집쟁이가 되었거든요.

달걀부인 2015-12-17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읽어온 책의 길 같은 게 궁금한 거죠. 누구나 처음부터 철학서를 읽지는 않았을테니까요. 어떻게 신달자에서 이문열에서 이러한 책들이 한심할 수 있는 그 반대의 책들로 넘어오게 되었나. 그 눈은 누가 혹은 어떻게 얻게되었나... 뭐 이런 궁금증? ^^ (제가 외국인지라 말을 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여기다 풀어놓고...가네용)

cyrus 2015-12-17 22:32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8, 90년대는 지금처럼 서평가라는 사람이 없었어요. 출판사 홍보가 전부였어요. 좋은 책을 알아본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대박난 책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 시절에 꼬꼬마라서 이런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본 적이 없어요. 이때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독서하던 좋은 시절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으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신도 그 책을 읽게 되거든요. 요즘은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지하철에 책 읽는 사람을 신기하게 쳐다봐요. ^^

표맥(漂麥) 2015-12-1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팔 그거 재미있나 봅니다. 직장 한담시간에 자주 나오는게...^^
이 책은 지금 깔끔히 재출간해도 여전히 인기 있을 듯한 생각을 해 봅니다... 스테디셀러 반열에 들어가는 책 맞죠? ^^

cyrus 2015-12-17 22:33   좋아요 0 | URL
지금도 판매되고 있어요. 다른 출판사들도 바바 하리 다스의 이름으로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절판되었어요. ^^

인디언밥 2015-12-1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팔년 생이셨구나.. 근데 저보다 훨씬 형같은 느낌 ㅠ

cyrus 2015-12-21 10:24   좋아요 0 | URL
이래서 제가 실제로 애늙은이 소리 듣습니다. ^^;;
 
숫타니파타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 옮김 / 이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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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저마다 위로가 되는 것들이 따로 있겠지만 경전의 좋은 구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법정 스님이 옮긴 『숫타니파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주옥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4쪽)

 

사자처럼 칭찬이나 비난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바람처럼 인연 따라 오고 가는 사람이나 물질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아, 무소처럼 오직 집중된 마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기. 이 게송은 삶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부처의 일대기 가운데 악마와의 한판 승부 장면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 멋진 무대가 만들어진다. 악마 나무치가 수행중인 부처 앞에 등장한다. 그는 수행을 완성하려고 정진하는 자를 방해해서, 쾌락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악마는 부처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척하면서 어른다.

 

"당신은 여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공덕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힘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151~152쪽)

 

악마는 좋은 말로 해서는 먹혀들지 않으니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무리들을 부른다. 대도(大道)를 걷는 부처는 홀로이지만, 소인배 악마는 늘 무리를 거느리고 다닌다. 악마의 공격 속에서 부처는 차분하게 저들의 정체를 밝혀낸다.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굶주림, 넷째 군대는 집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의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나무치여, 이것들이 바로 너의 군대이다." (153~154쪽)

 

그런데 수행중인 부처를 공격한 악마의 군대치곤 그 이름이 흥미롭다. 이것은 바로 홀로 결가부좌한 부처가 내면의 마지막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온갖 번뇌들을 말끔히 털어내 보니 바로 저런 번뇌들이었음을 은유로 밝혀낸 것이다.

 

부처가 털어낸 이들 번뇌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나타나 평온한 마음을 뒤흔드는 번뇌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저 열 가지 몹쓸 녀석들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하루를 근심에 떨며 살아간다. 그리고 저들 때문에 어떤 일을 완성하려 해도 도중에 주저앉는다. 저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울 일을 반복하고, 다시 아등바등 살아가게 된다.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을 없앤다면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버릴 때 과연 그 물건이 쓸모가 없는지 따진다. 근심의 원인인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25쪽)

 

부처가 살던 시대가 오늘과 너무 다르다는 게 주저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집착을 끊어 근심을 없애려면 사랑과 우정의 행복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부처는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기쁨과 행복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집착'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사랑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다. 물론 부처는 출가한 수행자들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초월해 보다 큰 진리를 지향하기를 바랐다. 출가자의 길과 재가 신자의 길에는 차이가 있었다. 출가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해탈이다. 해탈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번뇌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밀려들어와도 담담하게 물리친 부처처럼, 휘말리지 말고 어떤 번뇌인지 잘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리들을 생존에 얽어매는 것은 집착이다. 그 집착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버리듯이. (19쪽)

 

그러나 부처의 설법을 향해 마음을 열면 오늘의 문제에도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모든 애착과 잡념과 집착을 놓아버린다면 삶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진다.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내 안의 아집과 탐욕, 기만과 이중성을 마주할 때 나는 『숫타니파타』를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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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2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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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작은 아들은 결국 떠났다. 녀석의 말은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차 내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주십시오.” 결국 녀석의 몫을 주었다. 떠나버렸다. 먼 타국으로. 멀리서 온 객들에게 간간이 아들의 소식을 듣는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창기와 몸을 섞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단다. 타들어가는 이 마음, 큰 아들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큰 아들은 묵묵히 집안을 세우고 있다. 들에 나가 종일 일하고 돌아온다. 믿음직스런 녀석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내 마음을 모른다. 집 떠난 작은 놈을 향한 나의 간절한 마음을. 차라리 일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동생을 찾아 나서기를 내심 바랬다. 그 놈의 귀향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매일 밖으로 나갔다. 하염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년

 

기적과도 같이 아들의 귀향 소식을 들었다. 아비에게 아들의 귀향, 그것은 기적이었다. 먼발치에서 거지꼬락서니를 하고 둘째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체면 무시하고 달려갔다. 어린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놈은 말했다.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대해 주세요.” 아비 마음 모르기는 첫째나, 둘째나 매 한가지다. 하인들에게 명했다. “어서 좋은 옷을 가져다가 내 아들에게 입히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줘라. 발에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열자. 내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아들이 돌아왔단 말이다.”

 

하지만 이를 본 큰아들은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따랐지만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며 반발한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른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다. 신자들은 말할 것 없고 비신자들도 이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한량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 내용을 기초로 렘브란트는「탕자의 귀향」 이란 그림을 그렸다.

 

‘나는 탕자인가, 아님 그의 형?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면 대부분의 이들은 작은아들인 탕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던 헨리 나우웬은 달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점점 변해갔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몇 날 며칠을 꼬박 그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고 고백한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만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다.

 

그는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 등을 세밀하게 하나씩 탐색해 이 책에 옮겼다.

 

그는 먼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을, 다음엔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그 다음엔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는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 그림을 통해 결론적으로 깨닫게 된 세계는 내가 ‘탕자’라는 것, 그러면서 또 ‘큰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길을 잃은 탕자라면, 그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깊이 있게 감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에 빨려 들어갈 듯한 깊은 감상을 통해 열린 더욱 깊은 묵상은 놀라움을 줌과 동시에 감동과 큰 은혜를 선사한다.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으로 빗대는 순서를 거쳐, 끝내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우린 매일, 매시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다 쓰러진 자녀를 비웃지 않으신다. ‘귀향’의 조건으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채 잘못을 고백하는 걸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는 한없는 관용과 용서로 자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반가이 집안으로 맞아들이신다.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늙은 아버지의 그 사랑.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다. 조건을 뛰어넘는 그 사랑, 자격과 상관없이 받을 수 있는 그 사랑. 하늘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리라. 귀향길은 화해의 길이다. 사랑의 길이다.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 길. 그 길은 배움의 길이다. ‘아버지처럼 용서하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삶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선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일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여정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참을성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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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개정판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1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일주일 내내 경계해야 할 마음의 불(火)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119소방센터의 벽면 현수막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월화수목금토일, 화내지 맙시다.” 여기서 말하는 화는 물론 불(火)이다. 소방당국이 불조심 생활화를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문구가 이색적이다. 그 표어대로 불조심은 어느 하루, 어느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에서 일반에 먼저 와 닿는 화는 불보다는 우리 일상에 흔한 화(Anger)다. 일주일 내내 경계해야 할 건 불조심뿐만이 아니다. 화(火)는 내 마음에 생길 수 있는 불이다. 화를 다스려야 삶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정말 성질 죽이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누구는 성질 없어서 조용히 있나. 혈압 오르는 일들이 한두 번이어야지. 가끔은 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큰소리 지르며 성질 한 번 내보고 싶은 날이 있다.

 

요즘엔 사소한 이유로 시작한 우발적 싸움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성질과 핏대를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점 급해지고 화를 참지 못하는 현대인의 성격 탓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화를 내고 살아간다. 화를 낸다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다. 하지만 물건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 화가 풀릴까. 아니다. 화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분풀이할 대상을 찾는데, 이는 결국 화의 악순환만 더할 뿐이다. 그렇다면 화를 참아야 하는 걸까.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야 하는 걸까. 그것 또한 역시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다. 개인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고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며 분노는 폭발 직전까지 치솟지만 집단적 요구는 더 늘어간다. 왜소한 개인의 자아는 거대한 세계와 맞부딪치면서 보이지 않게 피를 흘린다. 우리는 모두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다.

 

 

 

 ♣ 마음의 씨앗을 다스리기

 

틱낫한 스님의 책 『화』가 제목만으로도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이유가 있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의 부제다. 여기서 언급되는 ‘화(Anger)’는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 나는 성’을 뜻하는 한자어 ‘화(火)’를 지칭한다. 틱낫한 스님은 화가 났을 때는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나타난다. 화가 나 있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악담을 퍼붓게 된다. 화를 내고 있는 사람 스스로 매우 고통 받고 있다는 증거다. 화가 나는 이유는 자기중심주의에서 출발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 무엇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님은 화를 표출하는 것도, 화를 참고 속으로 삭이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스님은 우리 신체와 오장육부처럼 화도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없애려 하지 말라고 한다. 마치 우는 아기라고 생각하며 화를 보듬고 달래야 한다는 거다. 화가 났을 때는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그래서 화를 다스리는 게 우리 인생에서 평생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화’는 화를 ‘마음의 씨앗’으로 본다. 우리 마음에는 기쁨 사랑 같은 긍정의 씨앗과 미움 절망 같은 부정의 씨앗이 있다. 평상시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 지는 바로 자신에게 달렸다. ‘마음의 씨앗’인 화를 인정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를 스님은 ‘마음 밭 갈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남 탓하지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다. 스님은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떠한 자극이 와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평생 전쟁과 폭력의 중심에서 온몸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체득한 결과라고 한다.

 

 

 

 ♣ 아이처럼 화를 끌어안기

 

스님은 화가 났을 때 이를 부인하지 말고, 화 난 자신을 인정하고 맞이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분노하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마음에서 울고 있는 아기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단다. 마음에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일단 모든 것을 중단하고, 우선 그 아이를 먼저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칭얼대는 화라는 아이를 잘 달래지 못할 때 그 아이는 실제 아이가 아니라 힘을 가진 어른일 경우가 많아서 언제 어느 때 치명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될지 모른다는 게 스님의 우려였을 것이다.

 

어찌됐든 스님의 지적대로 일시적으로 아이를 달랬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생각의 변화가 와야 한다. ‘생각이 즉 에너지’이기 때문에 생각이 화로 들끓고, 그 에너지가 또 다른 화를 재생산하는 것을 멈추려면 ‘분노를 가져왔던 생각의 변화’, 즉 ‘신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과도한 분노의 뒤엔 ‘절대적 신념’이 감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이래선 안 된다’, ‘이래야 한다’는 신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분노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화를 훨씬 더디게 낼 수 있다. 또한 화가 나더라도 다른 이의 허물을 덜어주고 용서해 준다면 결국 자신에게 유익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화를 분출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화 풀기는 행동에 대한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눈앞의 만족을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야만사회의 전형이다. 화를 평화롭고 긍정적으로 풀 것이냐, 아니면 비이성적으로 폭발시킬 것이냐. 그 통제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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