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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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통주의, 분단, 지역주의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도에서 보수주의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지키고자 하는 질서 · 가치가 분명치 않다. 반공 이념의 논리에 경도된 사회적 성향을 말하는가. 아니면 안정 추구의 논리를 그렇게 부르는가. 일단 사회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온건한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을 주류인 보수주의자라고 무리하게라도 규정키로 하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중산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재벌은 다수 국민의 원망과 불신을 받아왔다. 이들이 아니라면 서민들이 보수주의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를 단순히 반공주의로 간주해 자신들을 보수로 이해하고, 보수 야당 세력을 진보라고 비판해 온 군부 독재의 기준이 보수-진보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보수는 군부 독재에도 또 지역주의에도 근거하지 않지만, 한국의 보수는 친일 세력에 그 뿌리를 두고, 독재와 지역주의와 반공 이념에 의존했다. 비생산적인 우리나라 정치는 흑백논리의 불모다. 이분법에 찌든 보수주의자들에겐 조화와 절충이 용납되지 않는다. 양보나 타협은 곧 변절이나 패배로 치부될 뿐이다. 중도나 중용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회색분자로 매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 행태가 ‘내 편’은 무조건 따르고 ‘네 편’은 무조건 내치는 패거리 문화로 이어진다.

 

한국에 ‘자칭’ 보수주의 세력은 있어도 보수주의의 정의가 없다. 보수 철학을 근간으로 하더라도 합리적 보수라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도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고, 사회정의에 부합돼야 한다.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 로저 스크러튼의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보수주의에 대해 냉정한 성찰을 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서양의 지적 전통 위에서 보수주의의 이념적 기원과 그 전개과정을 특유의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보수주의의 복잡한 전개과정을 분석해 보여준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를 내세운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바라는 계몽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적 · 정치적 반응의 결과로 나온 것이 보수주의다. 이처럼 근대성의 부정에서 나온 것이 보수주의였고 근대성의 대변자로 자임한 것이 자유주의였다. 고전적 보수주의를 단순히 수구나 반동(反動)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해석이다. 고전적 보수주의는 점진주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옛것만을 수구하거나 새로운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점진적인 개혁에도 찬성한다. 이들이 개혁하는 목적은 나라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개혁이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1970년 이후 보수주의는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항했던 보수주의는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한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포용한 보수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주의는 냉전 시대부터 시작해서 극우만이 보수인양 이야기된다. 서구처럼 근대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를 한 번도 제대로 경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 세력과의 공정한 대화와 논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간의 대화는 이념에 치우친 이익집단의 싸움판으로 변질했다. 보수주의가 살 길은 도덕성을 회복하고, 보수 이념에 맞는 개혁을 지지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스크러튼이 내세우는 보수주의의 핵심 원칙은 ‘자유’와 ‘책임’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주위의 의견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고집스럽게 세우는 보수 세력은 자기성찰의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여된 극우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다양성의 가치와 덕목을 거스르는 극우주의자는 법을 무시하고,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자유와 도덕이 있으며, 어떻게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자는 현실 세계의 관행들이 자신의 철학과 다르다고 격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차분하게 개혁방안을 기획하고 설득을 통해 국민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다. 우리 사회의 역할에 합당한 보수주의자의 품격이 없다. 대통령의 대통령다움이 없고, 언론의 언론다움이 없고,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이 없다. 법과 도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집단적 광기가 작동되다 보니 배려도 관용도 따뜻함도 없다. 한 사회 전체가 성숙하려면 성찰과 배려가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수주의는 ‘이승만과 박정희 얼굴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다. 전자는 ‘차이’와 ‘이견’을 낯설어하고 비정상으로 여기는 문화적 유전자가 있다. 미래의 후손에게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가르치려고 한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늘 책임을 자신에게 찾는다. 또 과거의 지혜를 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보수는 희생과 책임의 상징이다. 보수는 그 사회의 책임 있는 중심 세력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더욱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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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04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론 보수주의자가 다수주의자로 보이곤 합니다. 자신들의 의견, 지지자가 더 많으니(자의적이면서, 통계도 자의적ㅎ) 옳다라고 말하는 억지주장들을 보면. 어떤 주의자라 할 때 그 합리성에는 늘 한계가 있죠.
케이시 <장소의 운명>에서 흥미로운 제시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속에서 장소를 한꺼번에 잃은 사람들에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달라졌다고. 그래서 핵무기는 모든 장소를 없앨 공공의 적. 이데올로기는 장소를 잃은 사람들에겐 잃지 않을 정신적 장소였을 겁니다. 즉 한국에서 6.25 이후 공고해진 반공주의가 단순히 어떤 세력의 공작이나 세뇌로만 뿌리를 내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죠. 그렇더라도 한국의 보수주의는 대수술이 필요합니다.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집단 이기가 아닌 공동체주의로 작동할 한국이길 기원합니다

cyrus 2017-02-04 16: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말로만 ‘보수 개혁’만 외치지 말고,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보수 개혁’을 지향하는 바른정당 소속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표심을 얻어 보려고 새누리당과 선을 긋는데, 그런 단기적인 행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샤벳 2017-02-04 21:07   좋아요 0 | URL
동감

yureka01 2017-02-04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흔히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보수는 상당히 왜곡되었죠. 지켜야할 가치로운 것이란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담보로 해야하거든요.정의.믿음.신뢰.정직.이런가치가 역사성을 가진 보수거든요.그런데 작금의 보수는 안보라는 구실로 권력에 빌붙어서 꼴통이 되었죠.

cyrus 2017-02-04 16:54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이 ‘안보’만 찾는 바람에 정작 ‘자유’와 ‘정의’, ‘신뢰’의 가치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qualia 2017-02-04 20:10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 무리들의 안보는 그들만의 안보죠. 기득권을 위한 안보, 친일/외세의존세력을 위한 안보, 사적 정권 유지를 위한 안보일 뿐입니다. 그것을 나라와 민족, 국민을 위한 안보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공정한 탄핵 심판에 전념해야 할 헌재 위원 중에 특정 종교인인 한 위원이 극우 세력 언론과의 (기획) 인터뷰에서 좌빨,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나라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개솔(bullshit)을 운운하더군요. 다는 아닙니다만, 지금 한국의 50~60대 이상 세대 중 대부분이 저런 개솔스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제발 제가 틀리길 바랍니다만.)

이 지독히도 노예스런 국민들과 그 나라, 한국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을 거듭해서 겪어도, 나라가 절단나고 다시 망해도 궁극적으로는 결코 깨닫지 못할 국민이고 민족이고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격하게 보일 텐데요. 저도 그건 압니다만, 한국/한민족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역사가 미래를 예견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인구폭발, 기후격변, 전세계적 식량부족, 자원고갈 등등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 확실시되고, 핵무기 따위 가공할 대량파괴 무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강대국 간의 충돌 위험성도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인류사에서 3차대전이나 그에 준하는 전쟁 발발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헌데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한국인들이 어떻게 각종 대규모 전쟁에 임해왔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봅니다. 2차대전 말기 패망해가는 일제한테 선전포고 하나 못한 한국/한국인들이었죠. 너무나 비굴하고 너무나 수동적인 노예들의 필연적 행동 양태였던 것입니다. 독립은 남들이 가져다준 것이었지 우리가 자력으로 쟁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이 21세기라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외세 의존 성향과 동족끼리의 대결의식은 더 강화됐고, 한반도가 남북, 전라/경상으로 사분오열됐으니 훨씬 더 악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쭝궈, 닛뽕, 러시아, 미국, 등등의 자국 이기주의, 제국주의적 성향도 현대적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강대국끼리의 적대적 공존을 위해 그들끼리 밀약하고 그들 마음대로 약소국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할 수 있는 국제정치역학적 환경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구한말에 견줘볼 때 지금이 결코 더 나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결론은 한국은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세와 대결하기는커녕 자기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극렬한 대결에 광분하는 어리석은 민족은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를 것이고 또한 반드시 멸망해 없어져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이고 인류의 당위일 것입니다.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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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역에서 지금도 10분에 한 명꼴로 매 맞는 아내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 넓은 의미의 ‘아내 폭력’ 즉 언어와 정서적 폭력(욕설, 혐오 발언, 위협 등), 성적 학대까지 포함할 경우 더 커지리라 생각된다. ‘아내 폭력’의 문제를 더 이상 남의 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결국 ‘아내 폭력’에 대한 우리의 안일한 생각이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부추기기 때문이다.

 

흔히 폭력을 쓰는 남편은 심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정 폭력 전문가들은 남편이 분노의 충동을 잘 조절하지 못해 자신의 좌절감과 스트레스를 손쉬운 가족 구성원에게로 향한다고 주장한다. 만만한 대상을 찾아 그 대상에게 자신의 상처(분노나 좌절감)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내 폭력’은 단순히 분노조절 능력 결여로 생기는 형태가 아니다. 남편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가장으로서의 권력과 통제의 힘을 드러내겠다는 무의식적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은 자신이 가정 내에서 주도권을 확실히 가지고 있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폭력 남편은 자신의 행동이 심각한 ‘범죄’로 인식하지 못한다. 폭력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일은 아내를 통제하기 위한 가부장제의 의무다.

 

폭력 남편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로서의 인권 보호에 대한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고소당한 ‘아내 폭력’ 가해자들의 입장은 이렇다. 아내를 때리지 못하게 하는 법의 개입이 가정을 파괴할 수 있고, 남편의 권리를 무시한다. ‘아내 폭력’뿐만 아니라 성폭력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왜 가해자의 입장(또는 인권)을 존중하는 이유는 뭘까? ‘아내 폭력’을 피해 정도가 심한 ‘부부싸움’으로 인식하면, 남편 폭력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 폭력’을 “아내가 맞아도 싸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가장인 남편이 가정을 다스리는 차원에서 어쩌다 폭력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남편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아내들이 있다. 그녀들의 죽음이 어쩌다 일어난 과실치사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피해 아내들은 폭력이 두려워 남편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려 한다. 자신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 짓밟힌 자존심, 자녀들 앞에서의 수치감 등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다.

 

피해 아내들이 폭력 남편과의 이혼을 망설이는 가장 주된 이유가 ‘자녀 문제’이다. 아이들로부터 아버지를 빼앗는다는 죄의식과 아이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때리는 남편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정희진은 남편에게 맞고 사는 아내 자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체면 문화’가 ‘아내 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꼽았다. 이혼하는 여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선입견이 차츰 사라지고 있으나 여전히 ‘아내 폭력’으로 이혼하는 여성에 향한 선입견은 피해 아내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혼 뒤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가정을 파탄하게 한 여성’으로 비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아내 폭력’의 실태는 가부장제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남편이 가장으로서 모든 식솔을 통제하고, 그 가장의 권위에 도전할 때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 때문에 여성 폭력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려웠다. ‘아내 폭력’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 감싸 안지 못하고, 아내로서의 자격상실 문제로 받아들이는 논리 속에 함축된 의미는 위험하다. 혈연 및 부계 중심의 가족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정의 외형의 틀이 유지되면 가정을 지키는 것이고, 그 틀을 해체하는 것이 가정파괴라고 믿는다. 가정 유지가 여성으로서의 인권이 폭력에 희생된 아픔보다 우선해도 좋다는 것을 은연중에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가정은 일상생활을 오랫동안 같이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나 힘이 미치기 어려운 그 공간이 폭력적일 때 개인이 받는 상처는 더 깊고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들고 지켜야 할 가정은 육체적 · 정신적으로 폭력적이지 않고 가족 구성원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다. 평화로운 가정을 만드는 데 기여한 아내를 상처 입히고, 그 가정마저 파탄시킨 남편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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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2-01 2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일 찌질한 놈이 자기 와이프에게 폭력 쓰는 놈입니다.그런 놈은 또 강자에겐 비굴하게 굴거든요.

cyrus 2017-02-02 10:1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아내를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도 싫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내가 자신을 타일러도 크게 언짢아합니다.

푸른희망 2017-02-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스에서 읽다가 일단 멈추고 집에서 천천히 읽었습니다. 누구도 만족할 수 없는 폭력이 왜 자꾸 반복될까요?

cyrus 2017-02-03 12:36   좋아요 0 | URL
‘가정폭력‘ 문제를 아내 탓으로 돌리는 잘못된 인식이 사라져야 합니다. 가해자와 제3자가 피해자에게만 폭력 문제의 책임을 떠넘기면 법적 처벌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가정 폭력‘이 비일비재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삶에 커다란 안락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불확실성과 위기의 새로운 원천이 되었다. 더 이상 세계가 과거와 같은 냉전 분위기 속에서 전쟁 위험이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나타난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한 개인의 잘못으로 수백 명의 목숨을 좌우하는 상황이 과거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이것을 가능케 하고 있다.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에 흔들리는 현대의 모습을 ‘위험사회(Risk Society)’로 진단했다. 벡의 주저 《위험사회》가 출간된 지 정확히 30주년이었던 작년에 우리는 위험사회의 부작용을 경험을 했다.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는 위험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그러한 위험의 정도는 점점 더 높아진다. 벡은 사회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위험 요소를 핵발전소라고 지적했다. 핵발전소의 위험은 말 그대로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런데 핵발전소보다 더 엄청난 위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최순실과 박근혜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그녀들을 보호하려는 세력(친박 세력, 박사모)의 행보를 살펴보면 하나의 근대성이 관통하고 있다. ‘박정희’라는 이름의 근대성. 박정희의 지지자들은 박정희 시대를 산업자본주의가 확립된 근대성의 정치적 결정체라고 찬양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앙하는 박정희 시대의 근대성에는 또 다른 쌍생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주의와 개발지상주의였다. 부국강병을 신조로 경제개발을 시도한 박정희 시대는 한동안 근대성의 신화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제적 산업화를 상징하던 근대성은 이미 낡았다. 강력한 개발 독재, 군사적 가부장주의, 압축 성장 등의 근대성의 산물은 우리 사회를 위협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1972년 유신 체제. 한국 현대사에서 절대로 잊어선 안 될 이 굵직굵직한 사건 사고는 무분별한 개발 정책과 대통령 독재를 정당화한 권위주의를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위험’이었다.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위험이 축소된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면서까지 왜곡된 근대성의 위험성을 축소했다.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박정희 시절의 피해자라기보다는 수혜자라고 생각한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박정희를 좋아하는 이들은 공통으로 국가 혹은 경제 발전을 위해 온갖 위험을 자초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구시대적 패권 정치와 정경유착의 관계도 우리 사회를 썩어 문드러지게 한 위험 요소이다. 이렇게 그들이 함께 빚어낸 잠재적 위험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작년에 터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기본적인 사회질서를 위태롭게 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최순실과 박근혜는 우리 사회에게 새로운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들의 존재는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해악의 근원이다. 탄핵을 반대하는 친박 세력과 박사모는 과거의 정치적 유산이 만들어낸 위험요소를 성찰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렇게 산재한 위험을 제거하지 못하면, 좌우 세력이 균형을 찾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위험사회의 피해는 아무 잘못이 없는 시민들이 감당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위험이 두려울수록 민주적 공동체를 만들 의욕과 시간은 줄어든다. 지금으로부터 1,000일 전인 세월호가 침몰했던 2014년 4월 16일, 그 날을 거슬러 올라가 5 ․ 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1961년 그 날부터 우리 사회는 위험사회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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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0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0 11:48   좋아요 0 | URL
기득권층은 자신이나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세력의 입장이 불리하면, 법을 언급하면서 잘못된 행동들이 정당하다고 합리화합니다. 정말 웃긴 일입니다. 이러니까 정작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죗값을 받지 못합니다. 세상이 자꾸 이렇게 돌아가면 평범한 사람들이 살 맛 나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7-01-10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박근혜는 죄가 없다. 정유라가 무슨 죄냐. 엄마가 다 잘못한거다. 등등의 말이 들립니다. 진정 위험한 것은 이런 사고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위의 것들이 안변하면 -그들은 변할리가 없으니까요- 국민들이라도 변해야하는데... 아직도 저런말을 하다니.. 그것도 제 주변에서 놀라울 따름입니다~~

cyrus 2017-01-10 11:50   좋아요 0 | URL
올해가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라서 벌써부터 잔치판을 벌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근혜가 탄핵되든 말든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여러 차례 험한 꼴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7-01-1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핵발전소야 관리 잘 하면 유용한 시설이지만 박근혜와 순실은 먹혀들지 않으니..

cyrus 2017-01-10 14:15   좋아요 0 | URL
박근혜와 최순실은 헌재까지 무시하더군요... 쌍ㄴ이라는 욕이 어울립니다.

작년에 곰발님 소개 덕분에 《위험사회》를 읽었습니다. 읽기가 어려웠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 책을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안미선.한국여성민우회 지음 / 그린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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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판매직 노동은 대표적인 ‘감정노동’에 속한다. 감정노동은 타인의 감정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규제하는 노동이다. 소비자에게 무조건 친절을 보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은 통제돼야 한다. 그래서 감정노동자들은 직무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다. 고객 만족 사회가 될수록 백화점 판매직 여성의 감정노동은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백화점이 직원들에게 가르치는 서비스 정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한 판매가 가능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고객이 잘못해도 고객이 옳다는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한다.

 

백화점은 자본주의의 미니어처다. 온갖 물건들을 사고파는 행위가 이뤄지는 곳이고 그 행위가 화려하게 포장된 곳이기도 하다. 백화점은 영리하다. 백화점은 노동자들조차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판매 여직원의 미소와 친절함이 곧 ‘상품’이다. 이들은 항상 친절하고 상냥한 응대와 부드러운 말투, 여성스러운 몸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온종일 한자리에 서서 고객을 기다리는 건 육체적으로 힘들 뿐 아니라 지루함과 짜증을 참기 어렵게 만든다. 제일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는 고객한테서 유발된 분노와 짜증을 억누르면서 ‘상냥하고 친절하게 웃어야’ 하는 것이다.

 

백화점 판매직은 깨끗하고 별로 힘들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그 속으로 한 발짝만 들어가서 보면 쉬는 데도 마땅치 않고 쉬어도 쉬어지지 않는 힘든 육체노동이다. 산업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사업주가 근로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과 의자 등을 배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서서 일하는 직원들은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호소한다. 8시간 이상 서서 근무하는 동안 화장실에 가는 횟수는 1, 2번에 그친다. 고객이 집중되는 시간에는 여유가 나지 않고 화장실에 가기가 눈치 보이기 때문이다.

 

백화점 여성 근로자의 근로 여건 개선 여부는 사업주의 의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권고 조치를 해도 사업주의 마음은 꿈쩍하지 않는다. 사업주가 근로 문제를 이해해주고, 태도가 변화하기를 기다릴 수만 없다. 백화점의 화려함 뒤에 가려있는 열악한 여성 근로자들의 노동 현실에 대해 연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한국여성민우회는 ‘우다다액션단’이라는 시민 모니터링 단체를 발족했다. 시민들이 직접 백화점의 열악한 실태를 파악하여 또 다른 시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유도한다.

 

백화점 내부가 활기 넘쳐 보여도 그곳은 ‘환상과 절망’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다. 쇼핑하는 우리는 점점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편리하게 쇼핑할 수 있다. 백화점 자본주의가 창출한 소비의 유혹은 고객들에게 강렬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우리가 소비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질수록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공간은 좁아진다. 직원들은 마땅히 앉을 곳도 없고 마땅히 쉴 곳도 부족하다. 백화점의 번듯한 겉모양에 감쳐진 초라한 여성 근로자들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말라버려 인간적인 면모마저 사라져버린 마네킹이다.

 

“직원들 간에 서로 위안을 주고받고, 거기서 힘을 받아서 일을 하는 것인데, 그런 위안조차 못 받으면 무슨 맛으로 일을 해요? 참 답답해요.” (백화점 잡화 매장 직원의 말, 54쪽)

 

백화점 내부의 빛이 밝을수록 마네킹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다. 문제는 우리는 그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고객이 왕’이라는 생각을 버려야만 마네킹의 그림자를 볼 수 있고, 그 일하는 마네킹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욕설이나 하대를 하거나 심하면 뺨을 때리는 고객이 있다. 근로자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들은 상대방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사람’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사람에 대한 무례를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된다. 우리가 근로자들의 고충을 알고, 그들을 존중하는 말 한마디와 인사가 뻣뻣해진 그들의 다리를 한결 가볍게 해주는 최고의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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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06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소일 하시는 분들 쉴 곳도 규정으로 법제화했으면 합니다. 화장실에서 간식 먹고 겨울에도 시멘트 바닥에서.... 휴... 어느 곳을 둘러봐도 화나고 욕 나오고...
노동자의 권익 보면 한국은 대책없는 민주주의 후진국입니다.

cyrus 2017-01-07 16:11   좋아요 0 | URL
사실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에 아쉬운 평을 하자면, 백화점 근로자들이 머무는 휴게공간이 얼마나 심각한지 볼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백화점 측이 시민들이 모니터링했을 때 사진 촬영은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글보다는 사진이 근로 실태의 심각성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을 겁니다.

:Dora 2017-01-07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화점이라말로 자본주의 최상의 감옥...예전엔 모르고 참도 잘 다녔지요. 이전 셍각만해도 지끈...

cyrus 2017-01-07 16:14   좋아요 0 | URL
연말에 코스트코를 처음으로 갔습니다. 친구가 코스트코 회원이라서 필요한 물품이 있는지 확인할 겸 그곳에 갔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넓고, 사람들이 많은 쇼핑 공간은 처음 봤습니다. 왜 사람들이 코스트코를 찾는 이유를 알겠더군요. 카트에 물품을 가득 채워 넣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행복하자 2017-01-07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견직원으로 백화점 에서 일했던 지인이 생각나네요. 이것도 하면 안돼..안돼,.안돼.. 두다리가 퉁퉁 부어도 앉으면 안되고.. 정말 힘들었다고...
노동자를 사람취급하면 큰일 날 줄 아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쉽사리 바뀌지도 않고요..

cyrus 2017-01-07 16:16   좋아요 0 | URL
근로자, 노동자들을 사람답게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정부나 기업에 있는 소위 높으신 분들은 근로자들의 편의를 위해 투자하는 걸 아까워합니다.

2017-01-07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07 16:21   좋아요 1 | URL
백화점 판매직은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만큼 수익이 박하고, 육체적 · 정신적으로 힘듭니다.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백화점 근로자들을 힘들게 만든 건 백화점 사업주이니까요. 그리고 그동안 열악한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못한 저 같은 사람들도 잘못이 있습니다.

서니데이 2017-01-0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날씨가 따뜻합니다.
cyrus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7-01-07 16:23   좋아요 1 | URL
주말 날씨가 좋을수록 집에서만 지내고 싶군요. ㅎㅎㅎ
서니데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서니데이 2017-01-09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번 먼저 인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제가 먼저 인사남깁니다.
행복한 월요일, 기분 좋은 한 주 되세요.^^

cyrus 2017-01-09 14:5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 가부장제, 젠더, 그리고 공감의 역설
김미덕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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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은 남녀 불평등의 원인을 가부장적 섹슈얼리티에서 찾는다. 가부장적 섹슈얼리티는 남성은 능동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항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나약한 모습이 여성의 성적 매력이며, 지배적으로 보이는 것이 남성의 매력이라는 점.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바로 가부장적 권력관계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말해준다. 사랑의 이름으로 낭만화하는 성적 실천이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기본 토대가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를 분석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포착되지 않던 불의와 억압의 존재를 가시화(visibility)한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했다. 초기의 페미니즘 운동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었다.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적 제도라든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을 반대하고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주류 페미니즘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렇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되면서 단순히 여성 지위 향상이란 수준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까지 ‘페미니즘’이란 이름은 서구 중심 시각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의제일 뿐이다. 흑인 · 유색인종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인종적 · 계급적 평등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백인 · 중산계층 · 서구 중심적 시각으로 동질화한 페미니즘은 서구 밖으로 발전된 다양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은 작년 페미니즘 도서 출판 열풍에 맞춰 나왔음에도 독자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 책은 오늘날 지역 · 국가 · 인종 · 사회적 경계를 넘은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소개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너무 늦게 수출한 것이다. 얼마나 늦었냐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시기가 1960년대부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부터 비서구 유색인종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등이 등장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3세계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점차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사상이다.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을 쓴 김미덕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관점의 틀은 제3세계 페미니즘이다. 

김미덕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그대로 수용한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권익이라는 다소 제한된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 보니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겪는 피억압을 강조하기 위해 성차별 문제를 폭로하고, 이를 전제로 남성에게 호소한다. 사실 작년에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페미니즘 도서 대부분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만화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악어 프로젝트》(푸른지식, 2016년)와 여성 혐오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남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맨 박스(Man Box》(한빛비즈, 2016년)가 있다. 《맨 박스》처럼 페미니즘 관점에서 남성을 비판하고, 남성의 반성을 유도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 오찬호의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다. 《악어 프로젝트》같은 경우, 실제로 프랑스에 출간 당시 논란이 많았는데 남성을 여성의 삶을 침해하고, 공격하는 포식자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악어 프로젝트》의 저자는 남자를 악어로 묘사함으로써 여성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설정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서 악어로 묘사된 어떤 남성은 그동안 살면서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 혐오와 성차별의 위험성을 이해하는 순간, 악어가죽을 벗는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남성을 악어로 묘사한 궁극적인 목표가 성별 간 대립이 아닌 이해와 화합이다.

그런데 김미덕은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한 폭로 및 공감 유도 전략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남녀 학생들에게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겪은 경험과 남녀 학생들이 솔직하게 밝힌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 등을 소개하면서 ‘남성은 가해자이고 여성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설정에서 비롯된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설정으로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면, 일부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한다. 남성들이 여성 차별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페미니즘을 수용한다고 해도 단순한 공감에 그친다면 남성은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얽힌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못하거나 실제로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를 회피한다.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대가 형성했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조금씩 열렸다고 환영하기에는 이르다. 눈에 보이는 공감이 전부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신기루만 바라보면, 인종 · 민족 · 계급 등 다양한 변수들이 얽힌 성 차별 및 성 불평등 문제를 보지 못한다. 김미덕은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 구현과 인권 문제에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공감과 역지사지(易地思之)보다는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 작업을 제안한다. 탈동일시는 자신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주는 사회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과 동일시된 감정이나 생각에서 분리되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은 젠더 문제만을 접근하는 현재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바라보고, 그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이 이 한계를 바라보지 못하면, 국제적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혼합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동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 독자들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연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동참하려면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내부에 존재하는 억압의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 글 제목은 이정서의 소설 《당신들의 감동을 위험하다》를 패러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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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6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06 08:29   좋아요 1 | URL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과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것을 혼동합니다. 페미니즘의 영향력을 떨어뜨리려고 전자의 입장을 후자의 입장으로 둔갑시켜서 왜곡합니다.

기억의집 2017-01-06 0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그렇게 페미니즘이 우리들 틈새속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게 박근혜가 정권을 쥐고 그녀를 조종한 사람이 최순실이었다는 것입니다. 박-최 게이트 사건 보면 남자들이 저 두 여자들에게 꼼짝 못할 정도로 벌벌 떨었다는 우리 모두는 알고 있잖아요. 남자도 아닌 여자에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억압당하고 벌벌 떨었는지. 전 박근혜가 국회의원들이나 공직자들 모아 놓고 수 틀리면 째려보고 입 다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해요. 그 모습 보면서 남자들의 심리가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 모두 철저히 가부장제 사회속에서 그렇게 길들여진 남자들인데 왜 박에겐 저랗게 벌벌 떨까? 박이 진정 페미니즘의 구현인가? 하는 우습잖은 생각도 들더라구요.

제가 울 아들 가만히 관찰해보면 본인이 속한 작은 사회(학교)에서 자기 또래애들한테 배우더라구요. 울 아들은 제가 페미니즘을 말해도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닫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또래 친구들의 영향이 큰 거 같아요. 우리 교육이 입시 위주가 아닌 고등학교때부터 끊임없이 어떤 사안 그게 페미니즘이든 아니면 정치적이든지간에 성찰하는 법을 배워야하는데 그런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상인이 되다보니 가부장제에 대한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것 같더라구요.

cyrus 2017-01-06 08:56   좋아요 1 | URL
여자들만 구성된 사회조직도 가부장제에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조직 내에서 위계 질서, 차별이 생깁니다. 과거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근거로 남성을 비판했지만, 이제는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도 비판해야 합니다. 박근혜가 공직자들의 비판적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그녀도 가부장제 문화에 길들였기 때문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가부장제 문화에 길들여지면 권위적인 태도를 드러냅니다. 생각보다 일상 속에 가부장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점을 짚어줘야하는 일이 페미니즘의 역할인데 청소년들은 입시 위주의 교육 때문에 페미니즘을 배우지 못합니다.

블랑코 2017-01-06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역시 공부를 해야겠어요.

cyrus 2017-01-06 08:59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그동안 페미니즘을 너무 단순하게 공부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공부하면서 시야를 넓혀야겠습니다.

마립간 2017-01-06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실이나 진리에는 인기있는 것이 있고, 인기 없는 것이 있는데, cyrus 님의 글만 읽어도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가 인기 없는 이유가 그냥 느껴지네요.

cyrus 2017-01-06 17:3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 글이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해서 책이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학술지에 실렸던 것입니다. ^^;;

2017-01-06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7-01-12 21:48   좋아요 0 | URL
170106 17:27 투명인간 님

제 댓글에 대한 댓글로 생각하여 말씀드리면 위 책이 《잘못된 길》의 인기 없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