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작자 미상, 최낙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1001-10]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

(※ 국내 번역본 표기는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생애’)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힌다. 그는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 도둑질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죗값을 치러야 했다. 가석방된 첫날 밤 장발장은 어느 신부의 집에 묵는다. 밤중에 그 집에서 은그릇을 훔쳐 달아난다. 형사 자베르에게 잡혀 교회에 끌려왔을 때 신부는 “내가 은촛대까지 주었는데 왜 은그릇만 가지고 갔느냐?”고 반문했다. 장발장은 신부의 말에 감동해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빵 하나를 훔친 죄로 결국 19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장발장의 세상에 대한 분노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굶주림은 사람의 인격을 비참하게 망가뜨린다. 훔친 행위는 부도덕이지만, 굶주림 때문에 도둑질한 것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자구책으로 볼 수 있다. 벽초 홍명희가 처음으로 《레 미제라블》을 소개하면서 제목을 ‘너, 참 불쌍타’로 지었다. 장발장은 빵을 훔친 절도범이지만, 프랑스 혁명 직후의 혼란기에 사회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비참한 인물이다.

 

 

 

 

 

사실 장발장이 나오기 아주 오래 전에 굶주림을 못 이겨 부도덕한 행동을 일삼은 또 한 사람이 있다. 1554년 스페인에 발간된 작자 미상의 피카레스크 소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Lazarillo de Tormes)》의 주인공 라사로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는 라사로의 실명. 라사로는 애칭) 피카레스크 소설은 16~17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기법으로 불량배나 건달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대 사회상을 예리하게 비판한다. 라사로는 하층 계급 집안에 태어난 소년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 손버릇이 나빠 도둑질을 하기 시작한다. 라자로의 부모는 빈곤한 형편 탓에 아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었고, 소년은 장님의 보호 하에 생활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장님은 사기꾼이었다. 사람을 속이면서 돈을 구걸하고, 모은 돈으로 마련한 기름진 음식과 감미로운 포도주를 자기 혼자만 즐긴다. 지독한 구두쇠라서 라사로에게 자신이 먹는 음식의 반도 되지 않은 양을 준다. 그래서 장님이 먹고 마시는 것들을 맛보려고 속임수를 꾸민다.

 

 

 

 

 

 

두 눈이 보이지 않은 장님의 약점을 이용, 포도주가 담긴 항아리에 빨대를 대고 마신다. 하지만 장님은 라사로의 수법을 알아챘는지 손으로 항아리를 감싸 안아 자신의 품속으로 밀착시킨 채 포도주를 마신다. 라사로는 항아리 밑바닥에 빨대가 관통할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을 뚫어놓는다. 그는 구멍에 새어 나오는 포도주를 마시지만, 속임수는 금방 탄로 나고 만다. 단단히 화가 난 장님은 라사로의 얼굴 정면에 항아리를 힘껏 던질 정도로 가혹하게 혼을 낸다.

 

 

 

 

 

라사로는 더 이상 인성이 최악인 장님과 함께 살 수 없어서 혼자서 살아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을 괴롭힌 장님에게 통쾌한 복수를 날리는 심정으로 골탕 먹이고 달아난다. 그 이후로 라사로는 신부, 수도사, 면죄부를 판매하는 포교사, 화가 등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라사로가 장님을 버리고 떠난 후에 만난 신부는 장님보다 사악한 인물이었다. 기독교의 일곱 가지 죄악 중 하나가 탐식이다. 그런데 이 신부란 놈은 본인 입으로 탐식이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매일 점심과 저녁에 고기만 먹는다. 심지어 장님처럼 라사로에게 고기 한 점도 주지 않는다. 라사로가 네 번째로 만난 수도사는 수도원 일에 관심 없고, 그저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한다. 면죄부 포교사는 면죄부 판매의 악습을 버리지 못한 구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신의 뜻’으로 포장했고, 면죄부를 사들인 사람들은 포교사의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라사로는 비열하고, 부도덕한 수단을 동원하면서 살아가는 나쁜 놈들을 관찰하면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기독교 성직자들은 종교적 윤리를 지키지 않는 위선적인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가 금서 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는 오로지 선한 방법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영웅의 눈부신 활약을 그리지 않는다. 라사로는 보잘것없는 주인공이다. 게다가 장발장처럼 생존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현실을 마주보고 인식하는 계기와 과정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장발장은 신부의 자비심으로 선악에 눈을 뜨면서 점차 순화되지만, 라사로는 자신보다 더 나쁜 놈들을 만나면서 이기주의가 만연한 현실의 냉정한 이면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 그러면서 궁핍한 상황을 타개하는 자신만의 생존력을 터득한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를 읽은 독자들은 주인공이 장님을 속이고, 골탕 먹이는 행동을 비난하지 못한다. 라사로는 굶주림의 고통이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독자들은 안다. 배고픔은 우리의 몸이 생존을 위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라사로보다 ‘더 나쁜 놈’인 장님이 주인공의 복수에 당하는 장면은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특히 ‘가장 나쁜 놈’인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은 추락한 종교의 권위를 희화화한다. 라사로는 종교의 힘에 벗어나 현세를 중시하는 민중들의 정신이 반영된 ‘나쁜 놈’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6-09-26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반데니소비치,수용소의 하루에도 아침과 점심 각10분, 저녁5분,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이다~란 글이 있어요
굶주림은 인간을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천형의 하나임을 공감합니다.

cyrus 2016-09-27 12:25   좋아요 0 | URL
`배고픔`을 주제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솔제니친의 노잼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yureka01 2016-09-26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더더 나쁜 놈들이 가식적인 놈들이죠..앞에서는 좋은 말 늘어 놓다가 뒤로는 온통 굳은 일저지르는 이중성이거든요..

cyrus 2016-09-27 12:26   좋아요 1 | URL
서울 한폭판에 있는 국회 닭장 속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나쁘죠.

아무 2016-09-26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명희 선생이 제목을 그렇게 지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ㅎㅎ
왜 최고의 명장면인지는 그림만 봐도 알 것 같습니다..^^

cyrus 2016-09-27 12:29   좋아요 0 | URL
십 년 전에 스펀지에서 레 미제라블 번역명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한 방송을 봤어요. ^^

transient-guest 2016-09-27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사로..`가 한국어 번역본이 있네요. 전 98-99년엔가 3학기 분량의 유럽지성사를 들으면서 읽었어요. 마지막에 장님거지한테 한 방 먹이는 장면의 묘사가 압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ㅎ

cyrus 2016-09-27 12:30   좋아요 1 | URL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알고 계시는군요. 이런 순간이 제일 기쁩니다. ㅎㅎㅎ
 

 

 

 

 

 

 

 

 

 

 

 

 

 

 

 

 

 

 

 

 

 

 

 

 

 

 

 

 

 

 

 

 

* <율랄리> 

 

나는 홀로 살았다.

비탄의 세상에서.

그래서 내 영혼이 마치 괴어 있는 물 같았다,

마침내 곱고 상냥한 율랄리가

나의 수줍은 신부가 될 때까지―

마침내 금발의 어린 율랄리가

나의 미소하는 신부가 될 때까지―

 

아, 덜―훨씬 덜 밝았다.

밤하늘의 별들도,

그 해밝은 소녀의 두 눈보다는!

증기가 자주색 진주색

달빛―색조를 만들 수 있다지만,

정숙한 율랄리의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곱슬머리에 비하랴―

밝은 눈 지닌 율랄리의 아주 얌전하고 꾸밈없는

곱슬머리에 비하랴―

 

이제는 의심도―이제는 고통도

다시는 아니 찾아온다,

그녀의 영혼이 내 한숨을 한숨으로 지우며,

하루 종일토록

밝게 강렬하게 빛나기에,

하늘에 있는 아스타르테,

그녀 향해 한결같이 소중한 율랄리가

보모의 눈을 쳐들기에―

그녀 향해 한결같이 어린 율랄리가

보랏빛 눈을 쳐들기에―

 

 

I dwelt alone

In a world of moan,

And my soul was a stagnant tide,

Till the fair and gentle Eulalie

became my blushing bride —

Till the yellow-haired young Eulalie

became my smiling bride.

 

Ah, less — less bright

The stars of the night

Than the eyes of the radiant girl!

And never a flake

That the vapour can make

With the moon-tints of purple and pearl,

Can vie with the modest Eulalie’s

most unregarded curl —

Can compare with the bright-eyed Eulalie’s

most humble and careless curl.

 

Now Doubt — now Pain

Come never again,

For her soul gives me sigh for sigh,

And all day long

Shines, bright and strong,

Astarté within the sky,

While ever to her dear Eulalie

upturns her matron eye —

While ever to her young Eulalie

upturns her violet eye.

 

 

(<율랄리> 김천봉 번역. 《에드거 앨런 포》 70~73쪽)

 

 

 

 

* <울랄룸> 중에서 

 

우리들이 가는 길의 끝에는

액체와도 같이

성운(星雲)의 미광(微光)이 보얗게 태어나고

그 속에서 초승달이

기적처럼 신비하게

두 개의 뿔을 달고 떠오른다.

아스타르테의 다이아몬드 초승달이

또렷이

두 개의 뿔을 달고서.

 

At the end of our path a liquescent

And nebulous lustre was born,

Out of which a miraculous crescent

Arose with a duplicate horn —

Astarte’s bediamonded crescent

Distinct with its duplicate horn.

 

 

(<울랄룸> 중에서, 정규웅 번역. 《애너벨 리》 58~59쪽)

 

 

 

 

 

 

 

 

 

 

 

 

 

 

 

 

 

 

 

 

 

 

 

 

 

 

 

 

 

 

 

 

 

 

 

 

 

 

 

 

 

 

 

 

 

 

 

 

 

 

 

 

 

 

 

 

 

포의 고딕 단편소설 <리지아(Ligeia)>에도 아스타르테와 비슷한 여신의 이름이 언급된다. 이 소설도 죽은 버지니아를 잊지 못하는 포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리지아는 매우 똑똑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자다. 하지만 그녀도 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린다. 화자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이유를 고대 여신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And, indeed, if ever she, the wan and the misty-winged Ashtophet of idolatrous Egypt, presided, as they tell, over marriages ill-omened, then most surely she presided over mine. (원문)

 

사람들이 말하듯, 우상을 숭배하던 이집트인들의 풍요의 여신이자 흐릿한 날개를 가진 창백한 여신 아스다롯이 진정 불길한 결혼 생활을 관장했다면, 그 여신은 분명 내 결혼 생활도 관장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2》 56쪽. 출판 전문 번역기업 ‘바른번역’)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만일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정신, 즉 우상숭배의 나라인 이집트의 여신인 애시토펫, 가냘픈 날개에 창백한 얼굴을 한 그녀가 불길한 결혼을 주재하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의 결혼을 주재한 이도 그 여신이었음에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26쪽. 전승희 번역)

 

만일 로맨스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런 정령이 있다고 하면, 그러니까 만약 우상숭배를 좋아하는 이집트에서 저 파리하고 안개 같은 날개를 가진 아슈토페트 여신이 존재하여 사람들의 말처럼 불길한 결혼을 주재한다 하면, 분명히 나의 결혼도 그 여신이 주재하였으리라. (《포 단편집》 136쪽. 김정민 번역)

 

게다가 로맨스라는 이름의 정령이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소문대로 저 우상 숭배국 이집트의 안개 날개를 매단 말라깽이 아슈토펫이 불운의 결혼을 관장한다면, 내 결혼을 주무른 것도 분명 그 신의 짓이리라. (《더 레이븐》 201쪽. 조영학 번역)

 

 

사람들은 불길한 결혼에는 '로맨스'라는 이름의 영(靈)이 깃든다고들 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집트에서는 불길한 결혼에 안개처럼 창백한 날개의 '아스토펫'이 깃든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맞는다면, 우리의 결혼에도 분명히 그런 영이 깃들었을 것입니다. (《붉은 죽음의 가면》 188쪽. 김정아 역. '생각의나무' 구판)

 

 

 

‘Ashtophet’은 포가 아스타르테를 모티프로 만든 여신이다. 코너스톤 판에는 ‘아스다롯(Ashtoreth)’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에서는 아스타르테를 아스다롯으로 부른다. <리지아>를 번역한 역자들은 ‘Ashtophet’에 대한 각주를 이슈타르와 동일한 여신이라고 설명했는데, 독자의 오해를 부른다. 아스타르테의 여러 가지 이름 중에 ‘Ashtophet’이 없기 때문이다.

 

 

 


댓글(11) 먼댓글(1)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cyrus님께
    from a garland for his head 2016-09-24 09:51 
    어제밤, cyrus님이 올리신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를 보고 쓰는 글입니다. 이 글은 cyrus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글을 쓰시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글에 대한 애정, 자료 조사에서 오는 수고로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cyrus님의 글을 보고 좀 많이 놀랐습니다. cyrus님의 글과 제 글들의 내용과 구조에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페이퍼는 cyrus님의 ‘아프로디테님이 보고계셔’와 제 글인 ‘에드거
 
 
syo 2016-09-23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작살나는 운율은 포의 특징입니까, 아니면 저 시절 영미시라면 기본적으로 다 갖추고 있는 형식입니까?

cyrus 2016-09-23 18:45   좋아요 0 | URL
둘 다입니다. ㅎㅎㅎ 특히 포의 시가 음악적인 운율로 유명해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원문도 소개했습니다. 사실 포의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운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syo님. 혹시 제 글을 북플로 보신다면 제일 위에 있는 두 편의 시 제목이 보입니까? 제 북플 화면에는 시 제목이 뜨지 않습니다... ㅡ.ㅡ;;

syo 2016-09-23 19:22   좋아요 0 | URL
안뜨네요. 이런 현상 몇 번 본 것 같아요. 그냥 편집상의 실수시려니 했는데.......헐북플

cyrus 2016-09-23 19:27   좋아요 0 | URL
확인하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필이면 오늘 오류를 확인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서재지기님에게 알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금요일에 오류를 발견하면 짜증납니다..

syo 2016-09-23 19:41   좋아요 0 | URL
북플이 또 한걸음 앞으로 나가겠군요.

yureka01 2016-09-2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드가 알랜 포. 아고 상당히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작가였더군요. 영문학스켄들 이라는 책에 나오더라구요.

cyrus 2016-09-24 11:03   좋아요 0 | URL
포가 버지니아 이외에 다른 여자들을 좋아했는데, 끝내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cyrus 2016-09-24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슈타트테에 대한 설명 그리고 프시케에 대한 해석은 에이바님의 글을 일차적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앞으로도 알라딘 서재 글을 참고할 때, 참고한 내용을 상세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에이바님께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2016-09-24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24 20:35   좋아요 1 | URL
네, 아직 지울 생각은 없습니다. 일단 제3자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어제 글을 작성한 이유는 포의 시 <율랄리>와 <울랄룸>에 나오는 아스타르테와 <리지아>의 아스토펫의 연관성을 설명하고 싶어서 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바님의 글은 제 글에 영감을 준 것이고,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에이바님의 글 링크 주소를 올렸습니다. 에이바님의 두 편의 글을 수정하고 증보하기 위해서 작성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로지 <리지아>의 아슈토펫에 초점을 맞추면서 쓰려고 했는데, 제가 아스타르테와 프시케에 대한 내용을 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에이바님의 글 내용과 형식이 유사해졌습니다.

yamoo 2016-09-24 19:06   좋아요 0 | URL
유사성 만으로 사과를 강제 받는 것은 정말 어의 없는 일입니다. 비슷한 책을 참조할 수도 있는 일이구요. 저는 사이러스 님의 페이퍼가 전혀 문제가 없는 글로 보입니다. 사과는 잘못한 것이 있을 때에라야 하는 것인데, 뭐가 잘못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라 셀레스티나 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8] 라 셀레스티나

 

 

 

 

예나 지금이나 결혼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은 중매다. 중매(仲媒)쟁이가 지나치면 사람을 사고파는 중매(仲買)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옛날부터 미혼남녀가 자유롭게 사귀지 못하던 시절에 양측을 맺어주던 사람들을 뚜쟁이라고 불렀다. 사전적으로는 부유층이나 특수층을 상대로 하는 직업적인 여자 중매쟁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업계에서는 주로 신고를 하지 않고 몰래 다니며 명함을 뿌리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중매쟁이들을 일컫는다. 오늘날에는 뚜쟁이를 매춘 알선 브로커의 의미에 가깝게 쓰인다.

 

셀레스티나(Celestina)는 세계문학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 뚜쟁이다. 그녀의 이름은 ‘뚜쟁이’를 뜻하는 스페인어 고유명사가 되었다. 처음부터 셀레스티나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1499년에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희극>이라는 희극 작품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귀족 명문가 아들 칼리스토가 멜리베아라는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의 저자명은 알려지지 않았고, 당시에 저작권의 개념이 없었던 터라 아류작들이 생겨났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페르난도 데 로하스도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희극>과 유사한 아류작을 썼는데, 이 작품이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호평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로하스는 제1막으로 된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희극> 원고를 발견하여 본인이 직접 15막을 더 만들어 소설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아류작의 인기에 힘입어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희극>은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이 아닌 뚜쟁이 노파 셀레스티나가 더 많이 주목받았다. 로하스의 소설 제목은 《라 셀레스티나》로 널리 알려졌다.

 

칼리스토는 화려한 귀족 출신이지만, 연애가 서툴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여자를 정복하는 것. 하지만 그는 입만 살아있는 ‘연못남(연애 못하는 남자)’이다. 결국 하인 셈프로니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욕망에 눈이 먼 주인의 본심을 알아차린 셈프로니오는 교활한 계획을 꾸민다. 셈프로니오는 칼리스토에게 늙은 뚜쟁이 셀레스티나를 소개한다. 뚜쟁이는 칼리스토와 멜리베아의 사랑을 성사시켜 물질적 보상을 얻으려고 한다. 칼리스토의 또 다른 하인 파르메노는 뚜쟁이와 동료 하인의 간계를 눈치챈다. 그는 주인이 정신 차리길 바라는 마음에 셀레스티나의 사악함을 알렸지만, 칼리스토는 파르메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셀레스티나는 매춘부 엘리시아와 아레우사를 셈프로니오와 파르메노와 연결해 자기편으로 만든다.

 

셀레스티나는 악명 높은 뚜쟁이로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악행에 떳떳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현세의 쾌락을 즐기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판 쾌락주의자다. 세속적 욕망과 관능적 쾌락을 인생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셀레스티나의 쾌락주의자는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과 다르다. ‘향락주의자’로 불리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지향점은 관능적 쾌락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이 없는 상태였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역설을 말한다. 혀와 입의 쾌락을 향한 극단적 추구는 구토와 설사라는 고통으로, 성애에 대한 탐닉은 성적 장애와 음욕의 노예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쾌락을 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고통이라는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로 돌아서서 마음의 평정인 아타락시아(ataraxia, 부동심)를 진정한 쾌락이라고 갈파했다.

 

셀레스티나는 삶의 종착지인 ‘죽음’에 거의 가까워진 인물이다. 셀레스티나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나온 모든 인물도 죽음 앞에 사라지는 존재다. 쾌락을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향락주의자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섹스를 즐기면서 ‘생의 불안’을 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물질적 욕망에 향한 셀레스티나의 집착은 끔찍한 파멸을 이르게 한다. 욕망(desire)은 욕구(need)와 달리 무한하다.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물을 부어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의 노예다. 살아있는 한 유한성의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쾌락은 ‘채움’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9-11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2 16:23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주말 잘 보냈습니다. ^^

yureka01 2016-09-1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화심리학에 관점에서 보자면,
진화의 비밀은 욕망에서 비롯된 무차별적 계획은 아닐까 싶어요.
괘락의 감각기관이 사라진다면,과연 우리가 존재하기는 할까 라는 질문이 생기네요..

잘봤습니다^^..

cyrus 2016-09-12 16:23   좋아요 0 | URL
욕망이 아예 없었으면 사는 일이 재미 없었을 것 같아요. ^^;;

초딩 2016-09-1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잘 보내세요~~~
 
황금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매직하우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1001-6] 황금 당나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의 《Metamorphoses》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라틴 어 소설이다. 원제목을 따르면 '변형담'으로 부르지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구분하기 위해서 '황금 당나귀(Asinus aureus)'라고 부른다. 주인공 루키우스가 마법에 걸려 당나귀로 변한 뒤 겪는 모험을 기본 줄거리로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루키우스는 마법에 호기심을 가진 인물이다. 여행 중에 히파타라는 도시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에서 만난 부유한 구두쇠의 아내 팜필레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이야기가 다 그렇듯 주인공의 지나친 호기심이 시련을 자초하는 원인이 된다. 루키우스는 팜필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팜필레의 하녀 포티스에게 접근한다. 루키우스와 포티스는 육체적인 관계로 친밀한 사이가 된다. 포티스는 루키우스를 위해 팜필레가 마법으로 변신하는 장면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루키우스는 팜필레처럼 부엉이로 변신을 시도해보지만, 포티스의 실수로 당나귀로 변신한다. 당나귀 루키우스는 장미를 뜯어 먹으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당나귀 루키우스가 장미를 먹으려고 하면,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한다. 루키우스는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으면서 교활하고 포악한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목격한다. 우여곡절 끝에 루키우스는 수도사가 건네준 장미를 먹고 인간의 모습을 되찾는다. 그 후로 루키우스는 종교에 귀의하면서 참된 인간으로 거듭난다.

 

당나귀는 어리석음과 교만을 보여주는 우화에 많이 등장한다. 이솝 우화에 소금을 싣고 가면서 꾀부리는 당나귀 이야기가 유명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잠깐 언급되었던 '뷔리당의 당나귀'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우화다. 루키우스는 당나귀로 변하기 전에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육체적 쾌락을 선호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포티스만 믿다가 당나귀로 변신하는 불행을 겪는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이 방탕한 삶을 살던 루키우스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루키우스의 시련은 죄를 지은 육신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과정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현실적 고통을 넘어서 초월적 평화에 이르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이를 실천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그 길을 안내해줄 신과 진리를 찾는다. 플라톤은 자기 영혼이 지니고 있는 신적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신과 재결합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으로 봤다. 《황금 당나귀》의 결말은 플라톤의 청교도적 삶을 교훈으로 강조한다. 욕망과 쾌락을 절제하는 금욕적 삶과 함께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영혼이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황금 당나귀》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쿠피도와 프시케'다. 프시케는 어원상 ‘영혼’이라는 뜻과 불안전성을 의미하는 ‘나비’라는 뜻, 두 가지가 있다. 인간세계의 아름다운 여성 프시케는 신들의 금기를 어기고 자신과 사랑에 빠진 쿠피도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부주의한 호기심의 유혹에 빠져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온갖 시련 끝에 극적으로 쿠피도의 입맞춤을 받으며 다시 살아난다. 프시케는 시련을 통한 영혼의 정화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다. 쿠피도와 프시케 이야기는 루키우스의 모험담이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암시하는 결정적인 내용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금 당나귀》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인간들을 관찰하는 당나귀 루키우스의 일인칭 묘사가 길어서 지루하게 느껴졌다. 신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는 수도사의 등장으로 너무 쉽게 루키우스가 인간이 되는 장면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도 어른이 되다가 다시 아이로 변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코난의 변신을 생각하면 주인공이 원래 모습으로 되찾은 《황금 당나귀》의 결말이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코난아, 도대체 너는 언제 남도일로 돌아갈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제된 손」(La Main d'écorché)은 모파상이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모파상은 청년 시절 노르망디 지역의 어촌 도시 에트르타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절벽의 바닷가로 유명한 지역이다. 모파상은 에트르타의 해안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은 해안을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다. 모파상이 구한 사람은 영국 시인 찰스 스윈번이었다. 시인은 생명의 은인인 모파상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모파상은 그곳에서 기괴한 물건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미라 형태가 되어 말라비틀어진 사람의 잘린 손이었다. 모파상은 이때 당시의 기억을 소재로 삼아 「박제된 손」을 썼다.

 

「손」(La Main)은 「박제된 손」의 줄거리와 유사한 단편소설이지만, 발표 연도가 다르다. 「박제된 손」은 1875년에, 「손」은 1883년에 발표되었다. 프랑스어 원제와 발표 연도가 명시되지 않으면, 두 작품이 서로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19세기 중반 센 강에 즐기는 뱃놀이가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유행으로 번졌다. 모파상도 센 강에 보트를 띄워 여자들과 어울리면서 놀았다. 모파상은 물이 있는 강이나 바다를 좋아했다. 바다를 엄청 싫어했던 러브크래프트와 상반된 모습이다. 모파상은 물을 소재로 뛰어난 단편소설을 썼는데, 그 작품이 바로 「물 위에서」(Sur l'eau, 1876년)다.

 

8, 90년대에 외국의 무서운 이야기들을 출처 없이 짜깁기했거나 ‘외국 유명 작가의 공포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들이 많았다. 이런 책들에 가장 많이 소개된 소설이 모파상의 「물 위에서」였다. 초딩 때 「물 위에서」와 비슷한 이야기를 ‘서양 괴담 모음집’ 같은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야기의 출처가 모파상의 소설이라는 사실을 어른이 돼서야 알았다. 「물 위에서」의 배경은 센 강이다. 모파상은 달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센 강을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장소로 연출했다. 흔히 센 강을 낭만적인 파리를 상징하는 명소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낭만과 아주 거리가 먼 평범한 강이었다. 모파상이 센 강에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을 시기에 센 강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자살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강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익사체를 보는 것이 파리지앵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18세기에도 센 강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았고, 익사체를 건지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1]

 

 

「오를라」는 예전에 언급했으니까 패스.

 

※ Colla[book]ration #11 모파상 X 러브크래프트

http://blog.aladin.co.kr/haesung/8636891

 

 

 

 

 

 

 

 

 

 

 

 

 

 

 

 

 

 

 

 

 

 

 

 

 

 

 

 

 

 

 

 

 

 

 

 

 

 

 

 

 

 

 

 

 

 

 

 

 

 

 

 

 

 

 

 

 

 

 

 

 

 

 

 

 

 

 

 

 

 

 

 

 

 

 

 

 

 

 

 

 

 

 

 

 

 

 

 

 

 

 

 

 

※ [주1] 루이 세바스티엥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리스 2016-08-0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기소설?벨아미의 그 모파상이 맞나요?ㅋㅋㅋ

cyrus 2016-08-08 07:36   좋아요 0 | URL
네. 키미리키님이 생각하시는 그 모파상이 맞습니다. ㅎㅎㅎ

2016-08-0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8-08 07:5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사드의 《사랑의 죄악》, 에르베 바쟁의 《손아귀에 든 독사》, 디드로의 《수녀》 그리고 모빠상 괴기소설이 장원출판사 하드커버판으로 나온 적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장원출판사 책뿐입니다. ^^

transient-guest 2016-08-10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가 계속 이어지고 있네요.ㅎ

cyrus 2016-08-10 07:54   좋아요 0 | URL
모파상의 단편소설이 장편소설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