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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 ㅣ 예술가의 초상 2
문영대 지음 / 안그라픽스 / 2021년 4월
평점 :
반으로 접혀진, 글자가 빼곡한 페이지를 보면 당연히 호기심이 인다.
얼른 접힌 반쪽을 펼치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면 내게 보이는 반쪼가리의 글귀들로 이리저리 내용을 맞추게 된다. 운이 좋게 맞기도 하겠지만 ,엉뚱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그런 곳, 접혀진 페이지의 한 곳에서 살고 있는건 아닐까
미술가, 작가, 무용가, 음악가, 과학자, 혹은 부모님이거나 아이들이 페이지속에 메섭게 접혀져 있었다.
결코 펼 수 없었던, 날카롭게 접혀 있던 페이지들이 조금씩 드러나는 지금, 변월룡 화가 또한 접힌 페이지 속에서 찾은 소중한 보물이다.
변월룡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월룡화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잘 모르는 북한의 화가들 포함 예술가들이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다.
제1세대 서양화가들은 대부분이 일본유학파라고 한다. 그들이 일본에 유학 시 이미 후기인상파가 유행을 했고, 그런 후기인상파의 화법을 배워 왔다고 한다. 문제는 그림의 기본이 되는 데생이나 구상에 대한 체계적 공부 없이 인상파 화법부터 배운 것. 결국 기초 없이 허공에 뜬 듯한 미술계의 문제점을 고치려 노력한 분이라고 한다. 북한의 평양미술대학의 기본과 교재, 수업커리큘럼, 교습법과 데생교재 및 기타 교재들 그리고 전시회 방법과 무대조명, 동양화학과신설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분이다. 북한 미술계의 기반을 다진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변월룡 작가가 잊힌 이유?
북에서 활동시 귀화 권유를 받았고, 그것에 대한 거절로 민족 반역자가 된 것, 남한에서 사후 전시회를 하려 했으나 북에서 민족반역자 전시에 대해 유감을 표명 결국 무산된 것.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고, 무덤에서조차 자신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고, 소련에서 소수민족으로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알면서도 결코 정체성을 버리지 않은 화가.
그가 그린 고국의 소나무와 풍경등은 절절한 그리움과 따스함이 담겨있다. 그의 동판화에는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소나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모습과 풍경들을 보는 재미도 크다.
또한 초상화를 많이 그렸기에, 그 시대의 북한쪽 예술인사와 소련쪽 인물들을 그림으로 만날 기회도 준다. 특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화가 반가웠다.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였고(톨스토이가 좋아한 화가, 그래서 부활의 삽화를 맡았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배운성, 정종여, 근원 김용준, 문학수, 정관철, 선우담, 김주경 등등 북한 화가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일화들이 그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가족 또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일본의 스파이설, 소수민족의 자치주에 대한 주장을 무마시키려, 농업생산량 증대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이 일로 엄청난 수의 희생자와 이산의 아픔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엔 많은 이들이 스탈린이 그런 짓을 할리가 없다며, 스탈린에게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 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던 본인외에 모든 가족들이 끌려갔고, 한의사였던 매형은 처형당했다. 이런 민족의 아픔, 그리고 소수민족이기에 겪어야 했던 승진이나 기타등등의 불합리함에도 그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고 이름도 바꾸지 않았으며, 작품마다 한글서명을 남겼다. 어린 시절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할아버지의 사랑, 가족들의 희생과 그 끈끈함은 그에게 뿌리였고, 고향이었고 그리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북한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미술쪽의 영역을 높이려 애썼고, 북에서 온 유학생이며 화가들을 도우려 했지만, 정치적 변화와 정세는 그의 편이 되지 못했다.
일년반의 북한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리고 성실한 삶을 살았던 고려인 화가 변월룡, 그의 그림들을 실물로 접할 날을 기대해 본다.
(아래 그림들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가 그린 북한의 인물들~ 김일성, 홍명희, 최승희~ 소나무, 가족들의 모습, 그의 묘, 북한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