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5
도리스 크리스토프 지음, 양영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뒤적뒤적 그림을 보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 그림
바로 알리스이다.


(알리스에게
처음 너를 본게 삼년쯤전이었던가.
동성로의 학원서림, 어느 구석쪽
별 생각없이 집어 든 책 속에서 널 만났지.
그땐 널 그린 모딜리아니가 누구인지도 몰랐었지.
그저,
눈물 닮은 네 푸른빛에 한참 넋을 잃고 봤었지.
왜 였을까.
그때 내 슬픔, 너도 똑같다고
그때 내 마음이, 너와 똑같다고
그때 내 우울의 번지수가
그때 내 막막함의 주파수가 너와 똑같다고 느낀것은...

너의 투명함이겠지..
누구든, 어떠한 것이든, 너는 다시 보여주거든.
곱고 맑은 투명함으로 다시 보여지는 나는,
그래도 너의 위로가 보태져서 훨씬 나아보였단다.

그리고 널...미술관련 책에서 다시 만났지.
예술가치고도 너무 우울했던 모딜리아를 알게 되었지.
그리고 쟌느......만삭의 몸으로 모딜리아를 따라간 쟌느..
그리고 모딜리아니가 그려낸, 수 많은 목이 긴 여인들과, 너의 푸름.
모딜리아는 어땠을지 궁금해.
너에게서 어떤 걸 그려내고 싶었을까.
너를 통해 어떤 말들이 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몇년뒤, 넌 또 내게 어떤 친구가 되어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he Polar Express [With Cardboard Ornament] (Hardcover, 25, Anniversary) Bedtime Story Books 4
크리스 반 알스버그 지음 / Houghton Mifflin Company / 1985년 10월
평점 :
품절


해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그림 책 한권이 있습니다.
바로 북극으로 가는 기차

몇 년전에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햇지요.
중학생인 조카가 아직 6살 꼬맹이였을대 이 책을 읽어줫던 기억이 나네요.
크리스마스날 아침 , 선물을 풀어보며
산타의 방울소리를 들었다며 예쁜 미소 짓던 조카가 생각나네요.
지금은 여드름 투성이 까칠이가 됐지만요.

크리스마스..하면 산타가 기억나죠.
원래 성니콜라스 아저씨가 원조고요.
유럽에선 아직도 꼬부라진 지팡이 드시고, 뽀족한 주교?모자 쓰시고
당나귀를 몰고 나타나시더군요. 그 옆엔 사탕요정.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랑 많이 다르지요.
지금의 산타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상업용 광고로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합니다.
산타를 위해 콜라를 ~ 대접하자는? 뭐 그런 내용이지요

원래 성니콜라스가 불우한 이웃들에게 선물을 주는 데서 유래 되었던 크리스마스
성니콜라스가 돌아가신 12월15일을 프랑스수녀들이 기념하면서 계속 지켜지고 있지요.
그러나 지금의 크리스마스는 어떠한가요.

그래서인지 유럽에선 산타 반대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북극으로 가는 기차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스포라서ㅠㅠ)
중학생인 조카가 아직도 들린다고 우기고 있지요. 들리면 선물을 받아야 한답니다.



아직도 산타를 믿는 4학년짜리 조카는 올해도 어김없이 산타가 드실 거라며 용돈을 모아 무언가를 사겠죠.
작년엔 초코파이 세개....랑 요플레였는데요.
아침에 드셧다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울 형부 부스러기 흘리며 먹는다고 목 메여 힘들었다더군요.
철이 좀 든건지 올핸 친구들에게는 산타를 믿느냐는 질문에 몰라라고 대답했다네요.

요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작은 트리에 불을 켜 놓고,
아이들 쭈욱 둘러 앉혀 놓고
북극으로 가는 기차를 읽어 볼까 합니다.
제게도 올해는 산타의 방울 소리가 들릴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태준의 복덕방과 오정희의 동경


두 책 모두 주인공들이 노년의 인물이다.
이택준의 복덕방속 노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이 배경이며, 오정희의 동경 속 노인들은 현대가 배경이다. 그러나 시대는 다르다 해도 두 소설 속 노인들은 변화와 상실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채 불우한 결말을 맞는다. 정신적 육체적인 죽음과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서서히 죽음으로 다가가며 소설 속 주인공들을 통해, 자신의 삶들을 되돌아 보게 한다.
그럼 먼저 오정희의 동경 속 인물을 살펴보겠다.
동경 속에는 늙은 노부부가 주인공이다. 젊디 젊은 아들을 잃은 후, 삶의 의미조차 퇴색되어 마치 그저 허깨비처럼 살아가다가, 결국 육체적인 늙음과 함께 낡은 장식품같아진다. 죽음같은 잠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동경 속에 나오는 구절 중에
< 아이는 이 요술 상자를 통해 무엇을 들여다보았을까. 그는 아이의 눈이 되어 아이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만화경을 집어들었다.>
<뭐든지 볼 수 있대요. 그는 아이의 말을 흉내내어 중얼거리며 빠르게 만화경을 돌렸다. 돌리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유리와 거울과 색종이가 어울려 모였다 흩어지는 모양이 다양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빠른 속도로 분열하고 번식하는 병원균과도 같았다. 색종이의 선명한 색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두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늙어가는 육신으로 삶을 이어간다.
미각도 , 검은 머리도 모두 잃어갈 것만 가득하다. 남은 것 또한 그저 언제 사그라들지 모를 육신뿐이다. 그들의 정신은 어쩌면 영노를 묻은 그 봄에 이미 사망선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이었을 아들을 잃고, 그들은 그때부터 노인이 되어 살았다. 이제 육신도 늙고 진짜 노인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지만, 그래도 아직 삶에 대한 희미한 집착으로 혹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건강하고 젊던 시절이 떠오르지도 않아, 옆집 여자아이의 만화경 속 세상이 궁금해 훔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만화경은 이제 그들에게 그저 너무 빠르게 분열하는 병원균처럼 느껴질 뿐이다.
<겨우 스무 살이었어요. 스무 살에 뭘 안다고. 여드름이나 짤 나이에 세상을 뒤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그 애가 죽었어도 우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영노는 어느 봄날 바람개비처럼 달려나갔다. 채 자라지 않은 머리칼을 성난 듯 불불이 세우고, 늙은이는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을 요구하는 어떤 새로운 삶을 기다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오, 죽은 애들은 특별해요 라며 힘들게 한 음절씩 내뱉는 그와 흐느껴 우는 아내는 어쩌면 영노가 죽은 이후로 꿈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흉몽이며, 그런 흉몽을 이겨내려 아내는 맥을 만들고, 과거의 일들을 마치 아련한 꿈처럼 기억해 내려 한다. 살아있다는 단어에 어울리는 모습은 찾을 수 없는 두 노인의 모습에서 무기력함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싶고,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맥과, 옆집아이의 만화경이다. 그러나 많아지는 맥도, 훔친 만화경도 죽음에 맞설수도, 그들의 무기력함을 되돌릴 수도 없다.
영노를 묻으며 그들은 노인이 되어버렸다. 과거를 기억하며 위안을 받지만, 그리움에 과거에 매달리지만, 그럴수록 현실과는 더욱 괴리감이 느껴질 뿐이다. 과거만이 그들이 살아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물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생동감이 아닌, 하나의 붙박이장같은 두 노인의 모습은 무기력함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만화경을 훔쳤지만, 그 만화경 속의 색종이를 번식하는 병원균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들을 잃고 늙어가면서도 삶에 끈을 놓지 않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틀니없이 웅얼거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에게 아들은 특별하다. 가장 빛나던 스무살의 영노는 그래서 썩어버리는 시체일 리가 없다. 한 조각 거울이기에 다시 닦아 내면 새 것처럼 빛을 내며 햇살속에 깨어날 것이다. 그에게 희망은 없고, 무기력함만이 남아 초여름의 날씨와 죽음같은 긴 잠과 하나과 될 것이다.
이태준의 복덕방은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라를 잃고, 삶의 터전도 잃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특이한 점은 그 주인공들 모두가 노인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한 밑천 잡은 것만 기억한 채, 지금은 빈궁한 삶을 힘들어하며, 다시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용가 딸을 둔 안 초시와, 복덕방에서 공부도 하고 새로운 기회를 꿈꾸지만 녹록치 않은 박희완,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기개와 용맹함 따윈 아무 의미없이 복덕방으로 입에 풀칠하며 사는 서참의가 그 주인공들이다.
「돈만 가지면야 좀 좋은 세상인가!」
서참의는 비록 예전과는 다른 비굴한 삶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도 사는 것에 위안을 삼지만, 안초시는 과거의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적응도 힘든 지금의 이 현실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실사회에 적응 못한체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고, 돈만 벌면 다시 예전으로 모든 것이 돌아갈 거라 믿지만, 실상 그래서 오히려 더 큰 화를 당하게 된다.
<“나 서 참의일세. 알겠나? 흥……자네 참 호사(豪奢, 사치)야…… 호살세. 잘 죽었느니 자네 살았으문 이런 호살 해보겠나? 인전 안경다리 고칠 걱정두 없구…… 아무턴지…….”
하는데 박희완 영감이 들어서더니
“이 사람 취했네그려.”
하며 서 참의를 밀어냈다.
박희완 영감도 가슴이 답답하였다. 분향을 하고 무슨 소리를 한 마디 했으면 속이 후련히 트일 것 같아서 잠깐 멈칫하고 서 있어 보았으나
“으흐윽…….”
하고 울음이 먼저 터져 그만 나오고 말았다.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도 묘지까지 나갈 작정이었으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도로 술집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
안초시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은 부동산 투자의 실패에도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사회의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계속 실패로 딸에게서도 외면 받는 처지의 슬픔때문일 것이다.
<돈을 쓸 때는 일 원짜리 한 장 만져도 못 봤지만 벼락은 초시에게 떨어졌다. 서너 끼씩 굶어도 밥 먹을 정신이 나지도 않았거니와 밥을 먹으러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재물이란 친자간의 의리도 배추밑 도리듯 하는 건가.)
탄식할 뿐이었다. 밥보다는 술과 담배가 그리웠다. 물론 안경다리는 그저 못 고쳤다. 그러나 이제는 오십 전 짜리는커녕 단 십 전 짜리도 얻어 볼 길이 없었다. >
그렇게 세상은 차갑게 안 초시를 외면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의리는 늙은 서참의와 박희완 영감뿐이었다. 그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것도 서참의였다. 그리고 안초시의 죽음앞에서도 딸은 후회와 슬픔대신 자신의 명예부터 생각했다.
<“관청에 어서 알려야지?” “아스세요.”
하고 그 딸은 펄쩍 뛰었다.
“아스라니?”
“제 명예도 좀…….”
하고 그는 애원하였다.
“안될 말이지. 명옐 생각하는 사람이 애빌 저 모양으루 세상 떠나게 해?”
“…….”
안경화는 엎디어 다시 울었다.
그러다가 나가려는 서 참의의 다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


1930년대 소설임에도 이태준의 복덕방 역시 전혀 낯설지 않다.
자식들에게 푼돈을 타내며 어버이로서의 존엄성도 명예도 존중도 받지 못한 체, 쓸모없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모습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한 대가도, 거기에 대한 존경도 없이, 지금 현실의 늙고 나약한 모습만을 전부로 취급당하며 버려진다. 마치 예전엔 비싼 안경이었으나, 지금은 다리가 하나 부러져 노끈으로 묶은 취급이다.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인들 했으나,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위해 무엇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냉혹함 속에서 거기다 더욱 이기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의 삶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기다리면 올 죽음인데도 냉혹한 세상은, 가난한 자와 돈을 벌지 못하는 자에겐 그 죽음마저 어여 가라 조급히 등을 내몬다.
두 소설 속의 노인들 모습은 다른 듯 닮았다.
자식을 잃었고 삶의 의욕도 잃었고,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조차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죽음같은 잠에 빠지는 동경 속의 노인, 그리고 현실에 적응 못한체 비참한 삶 속에서 죽음마저 재촉당하는 복덕방의 노인들 모습을 보며 지금의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지금 또한 그렇다. 세상은 100년간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로 변하고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은 버겁다. 삶의 의미마저도 버겁다. 관조하며 살라 했다가, 재테크도 하라고 했다가, 또 과소비를 미덕처럼 이야기 하다가 이제는 또 버리고 홀가분하게 살아라 한다. 이렇게 정신없는 세상속에서는 초지일관하는 하나의 마음을 갖기도 버겁다. 변치 않는 무엇인가를 가지기에도 너무 소란스럽다.
이런 현대의 삶에 노인들의 삶은 사이클이 다르다.
시속 200Km의 기차를 젊은이들은 달리며 쫓아가지만, 노인들은 그 뒤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 속도를 따라가기엔 더 이상 다리도 눈도 아무것도 받쳐주지 않는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 뛰어가기에도 숨이 턱에 찬다. 이 현실은 사실 젊은이들에게도 행복은 아니다.
자식까지 잃은 노인이, 혹은 이 현실에 적응못하는 거기다 이기적인 딸까지 둔 노인이 따라가기엔 너무 힘든 속도다. 그렇게 젊은이들은 미친듯이 따라가다 어느 날 길을 잃고, 뒤에 남겨진 채 그렇게 또 늙고, 노인들이 이미 뒤쳐진 채, 누가 돌아볼까 손을 흔들 준비를 만반에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뒤를 돌아보며, 혹은 옆으로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만 있다. 못된 계집아이만이 한번쯤 심술이든 뭐든 그래도 손을 흔든다.
죽은 자식만이 무덤에서 낡고 녹슨 거울로 기다려 줄 뿐이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생기를 다 잃은 채 붙박이 장이 되어 간다. 그러다 묘비의 비석이 되겠지. 슬프지만 그러한 것도 삶이다.
이 두 편의 단편을 읽으며, 생각해 본다.
자식이란 존재에 대해서, 동경에서 두 노인은 젊은 날의 봄같던 자식을 잃었고, 복덕방에선 어린 시절 애비가 전부였을 딸이 이기적이고 차갑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상처받았을 노인이 나온다. 정말 젊은 나이에 혹은 어린 나이에 떠나간 자식은, 아이들은 특별한 걸까.
앞으로 우리는 고령화사회에서 살게 된다. 나 또한 장수라는 말이 복이 아닌 혐오와 두려움의 단어가 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해 본다. 젊음과 늙음 사이에 있는 나에겐, 노인도 젊은이들도 다 안타까운 시대다.
그 누가 부모가 고맙지 않겠는가, 그 누가 자식이 그렇지 않겠는가.
너무 빠른 속도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자들만을 위한 기차를 만들어 낸, 지금의 사회에 묻고 싶다. 그런 빠른 속도는, 죽을 정도로 달려야 하는 삶의 무게는 누굴 위해 만들어 진걸까. 아무도 원하지 않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도 못한채 달려야하는 이 기차는 누가 만든 것일까.
갈수록 노인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늙어갈 것이다.
소외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게 소외된 세상속에서 맞볼수도 .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체속에서 .
복덕방의 노인들이 그러하다.
다시 한번을 꿈꾸기도 하고, 그저 이정도면 .
그러나 결국 신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 전의 세대들에게서 주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오정희의 소설 속 노인들은 노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본질을 잃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본연의 색은 남지 않은채 바스라질 .
두 작품 다 읽고나서 씁슬했다.
나이듦에 . 너무나 정신없이 나이듦은 . 옛날이 속도로 늙어가면서 지금의 속도를 맞출 수 없이, 예전에도 지금도 노인들은 뒤쳐지고, 젊은이들은 마치 본인들이 영생의 존재인냥 젊은냥 . 불손하다.
그 속에서 힘들어하다 결국은 예전의 젊음을 꿈꾸지만 이제 더 늦어버렸고 되돌리기도 힘들다.
그리고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식이다. 자식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어느덧 나이들어 , 나이들어 . 생떼같은 허상같다.
두 작품을 읽으며 삶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지 그러나 그 몇 배의 늙음을 외롭게 서서히 조금씩 감각을 잃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 나는 받아들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큰 진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누구나 늙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애닳게 .
부질없는 욕심은 잠시 내어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조금씩 사라져가는 내 삶의 감각들에게도 감사하며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늙는 것을 바라본다.
갈수록 노인인구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늙어갈 것이다.
소외되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게 소외된 세상속에서 맞볼수도 .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체속에서 .
복덕방의 노인들이 그러하다.
다시 한번을 꿈꾸기도 하고, 그저 이정도면 .
그러나 결국 신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들이 그 전의 세대들에게서 주인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오정희의 소설 속 노인들은 노인이 되기 전부터 이미 본질을 잃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본연의 색은 남지 않은채 바스라질 .
두 작품을 읽으며 삶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지 그러나 그 몇 배의 늙음을 외롭게 서서히 조금씩 감각을 잃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 나는 받아들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큰 진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누구나 늙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애닳게 .
부질없는 욕심은 잠시 내어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조금씩 사라져가는 내 삶의 감각들에게도 감사하며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늙는 것을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이동물원을 읽으면서, 어린 해리포터를 살린 모성애의 마법이 떠올랐다
파자점술사를 통해선 대만의 역사를 조금 더 알게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태변화란 단편이다.
담뱃갑과 얼음, 소금이 내 영혼이라면? 나는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걸까. 쓸수록 낡아가고 비어가고 줄어들며 사라져가는 영혼에 조바심내다가도, 어느 순간 용기를 내어 일탈을 하다보니 상태가 변화된 영혼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기발하면서 의미있는단편. 얼음에서 물이 된 주인공은 어떤 변화된 삶을 살게 될까. 소금을 녹여 담게될까.

( 우주와 미래 그러면서 731부대에 대한 과거사까지 많은 것이 담겨 있는데도 깔끔하고 부산스럽지 않고 오히려 정적으로 느껴지는 단편집이다. 자극적이지 않은데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글귀들과 새로운 이야기들. 앞으로도 이 분 책을 찾아 읽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_알베르 카뮈

왜 그는 변명하지도 울지도 않았을까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왜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인걸까
사회가허용하는 도덕의 범주에 드는 일은 아주 쉽다
울고 변명하고 후회하고, 아니면 그런 척이라도 하면 된다
뫼르소가 그 모든 것을 거부한체 그저 태양때문이었다는 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회의 인식에 맞추어 무수히 내뱉는 위선을 버린 뫼르소가 유죄라는 부조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