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당한 여자 '귀'신이 남성 공무원 앞에 나타나 '적법한' 해결을 청하는 이야기의 대명사 <아랑의 전설>부터 이 책은 시작한다. 억울한 여성, 살아서는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고, 죽어서야 말을 한다는데, 과연 그것이 여성이 목소리를 낸다는 뜻인가, 에는 저자 전혜진도 주저하며 말을 아낀다. 


강간을 당해도 말을 못하게 혀를 잘리고, 혹은 괴물로 변하고, 또 살해당했던 그리스 이야기의 여성처럼 아랑, 예쁜 아가씨는 밀양에서 어느 남자의 손에 살해당한다. 


작가 김영하는 그 아랑의 전설을 다시 쓴다. 과연 아랑은 윤 부사의 딸이었을까, 어느 이야기에서는 관비라고도 한다. 살해자는 통인, 혹은 관노, 그도 아니라면 아버지 윤 부사일 가능성은?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성격은 어떻게 바뀌는가. 권선징악, 이라면 '징'을 내리는 건 국가권력, 새로 부임한 담대한 부사, 남성일 텐데, 그는 아랑,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는가, 아니 애초에 아랑은 입을 열어 말을 한 마디라도 했는가. 


김영하의 소설은 아랑의 입을 막는다. 이 책은 소설 혹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아랑 전설'을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을 함께하는 워크숍 형식이다. 등장인물 혹은 배우/페르소나는 작가의 펜 끝에서 살아나와 일단 독자 앞에서 리허설을 하다가 어느새 조선 중기로 넘어가 나름의 캐릭터를 입고 아랑과 살해자, 부임자 둘의 죽음 (그러니까 연쇄살인)의 배후를 살핀다. 작가의 간섭은 계속 이어진다. 그때, 과연, 어떤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작가 김영하는 아랑 전설이 '환상적 여성주의 소설'이 될 가능성을 품었음을,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성의 한을 이야기할 수도 있음을 비추지만 그의 선택은 남성의 '힘'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에게 작화는 게임이다. 작가의 손엔 충분한 장기 말이, 카드 패가, 퍼즐 조각들이 있다. 


지방에서 벌어진 부정부패, 오랜 시간 이어진 힘들 사이의 암묵적 거래. 어느 순간, 부정한 그 여자를 향한 '욱하는 심정'으로 휘두른 칼 한 자루. 딸의 죽음 뒤에 그토록 급하게, 황망히, 직책을 내던지고 사라진 아버지 윤 부사를 더 잘 설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랑, 은 예쁜 아가씨, 라는 이름만 제목에 남기고 결국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아랑에게/에 대해 왜?를 묻다니. 나비, 혹은 북, 고목, 변신하고 날아가고 둥둥 소리를 울리는 모든 연상작용 상징들은 유용하게 작가의 도구가 된다. 작가의 세계에선 말을 하는 이는 작가 한 사람이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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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1-06-14 14:28   좋아요 1 | URL
김영하 작가의 ‘아랑‘은 귀신 이야기에 묻혀버린 두 명(이상)의 신임 부사와 정식 절차 없이 죽은 살해범(?) 등 최소 네 명의 죽음의 미스테리를 파헤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나비가 된 원혼, 순수하고 억울한 미녀라는 아랑의 틀을 깨기도 하고요.
그러니 아랑이 왜 나비가 되었는지 부터 질문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에요. 여성의 목소리, 여성 서사는 가능성을 꼽아주지만 제껴둡니다. ㅎㅎㅎ
어찌보면 아랑은 죽어도 싸다? 라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하고요. 뭐 김영하 작가의 다른 소설 들에서처럼 주인공은 작가, 라는 걸 확인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의 책과 방송을 꽤 챙겨 읽고 보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무기' 독서가 주제인 책인데도 (제목이 무려 '정신과 의사의 서재') 초반은 새롭지 않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조금 나아진다. 구체적인 책 이야기가 나오고, 그의 전문 분야 이야기 비중이 많아 지기 때문이다. 그가 추천해 주는 프로이트 입문서들은 장바구에 채워넣었다. 









저자의 '서재'는 읽기 이상을 위한 공간이다. 그는 취미로 읽기는 물론, 책을 읽고 리뷰를 써서 지면에 발표하고, 좀 더 긴 호흡의 책도 묶어서 낸다. 그러니 그에게 서재의 책읽기는 '아웃풋'을 염두에 둔 활동이다. 이 책에는 그래서 책을 읽고 정리하는 법, 그에 유용한 도구/앱을 소개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독서 연륜 (과 인맥)이 쌓여서 이제는 독한 리뷰를 쓰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에는 절반만 공감했다. 과장 광고와 현란한 표지의 책을 먼저 읽고 '당했다'면 다른 독자들에게 경고는 해줄 수 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또한 서점에서 지인의 책을 매대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실수인 양' 놓아둔다고 했는데, 그것은 저자도 알고 있다시피 서점 직원들이 싫어할 행동이고 매대의 그 자리를 계약한 다른 책(의 저자와 출판사)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이런 행동을 하고 책에 남기기 까지하는 '깡'에 놀랐다. (지난번 읽은 유홍준 작가의 '남의 나라 유적지 규칙 어기기' 처럼, 성공한 남자 작가들 몇몇은 책에 자신의 비행 기록을 남기는 데 별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책은 전체적으로 느슨하고 헐거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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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1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진짜 무식하면 용감한가 봐요. 성공한 남자들은 자기 비행마저 자랑스러운 듯. 으윽….

유부만두 2021-06-13 21:54   좋아요 0 | URL
실수(?)는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걸 왜 책에 쓸까요? 자랑하는 걸까요? 자긴 이런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왜 기본적인 자기 ‘검열’, 아니, ‘나쁜 건 안쓰기’가 어려울까요?

북극곰 2021-06-14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지인의 책을 매대 위, 눈에 잘 띄는 곳에 ‘실수인 양‘ 놓아둔다고 했는데, 그것은 저자도 알고 있다시피 서점 직원들이 싫어할 행동이고 매대의 그 자리를 계약한 다른 책(의 저자와 출판사)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 만두님 덕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어요. 지인에게 마음 쓰는 따뜻함을 어필하려고 한 걸까요? ㅎㅎ

유부만두 2021-06-23 14: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자신의 따뜻함을 어필하려는 의도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약속이나 원칙은 무시하고요.이렇게 책 속에 자신의 의도가 원칙보다 앞선다고 새겨두는 힘이랄까, 자신감에 많이 놀랐어요.

어쨌거나... 북극곰님, 오랜만입니다. ^^
 

에릭 칼을 기억한다.
큰 아이 (군필, 복학생)의 첫 그림책 작가였던 작가. 보드판 책을 무섭게 씹고 던지며 읽어도 늘 아이에겐 새롭던 책의 작가.


https://www.instagram.com/p/CP3BKrGncRF/?utm_medium=copy_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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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6-13 13: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자연스럽게 리듬을 넣게 되는 문장 그리고 판화같은 그림들.
많은 이들이 오래 동안 기억할거예요.

유부만두 2021-06-13 18:34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정겨운 그림책이 한 시절을 기억하게 만들어요.
 

syo 님 생각한 건 나 혼자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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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6-13 09: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명 더 추가요 ㅎㅎㅎ냉장이 위에 덕지덕지

유부만두 2021-06-13 18:34   좋아요 2 | URL
열반인님께서도 냉장고에 붙여놓으시나요? ^^

반유행열반인 2021-06-13 21:34   좋아요 2 | URL
아니요 syo님 냉장고 생각했어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1-06-14 08:41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제가 오독했군요.

붕붕툐툐 2021-06-1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저라도 떠올랐을 듯! 그만큼 충격적이었죠~ㅎㅎ

유부만두 2021-06-14 08:42   좋아요 1 | URL
냉장고에 포스트잇 붙인다는 게 놀라웠는데, 어쩌면 작가들의 습성일지도 모르겠어요. (막 우김)
 

http://bookple.aladin.co.kr/~r/feed/5098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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