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은은하게 마음을 끌었다. 큰 아이 학교 숙제인데다 고전을 풀어쓴 책이라 읽고 싶지 않았는데, 달아놓은 책 제목이 내 마음을 끌었다.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로, 사랑이 싹트고, 갈등이 시작되고, 안타까운 목숨이 사그라 들었다는 얘기다.


임란이 끝나고 황폐해진 왕가의 사택 정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던 선비 하나가 그 버려진 정원을 몰래 거닐다가 두 연인의 혼령을 만나 그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금지된 사랑은 이룰 수 없어 애닲고, 막다른 지경에서 죽음으로 연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데, 알고보니 둘은 이미 천상에서도 소문난 커플이었단다.

여러 편 궁서체로 표기되어 나오는 시들이 주인공 운영과 그 벗들, 그리고 로미오 김진사의 성정을 드려냈을 법한테, 그 아름다움이 차마 다 표현되지 못한 느낌이라 안타깝다. 그리고, 이 연인들의 소위 아름답다는 사랑이 그닥 와닿지도 않고, 월담에 동침이 스스럼 없이 진행되는 것이 조금은 당황스럽다. 이 사랑의 걸림돌이 주인 안평대군이었다가 어느새 하인 특이로 바뀌는 것도 불편하고, 그 사랑의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 무슨 이유나 정당성이 있을까. 그저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에, 스치는 옷자락에 시작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2011년 6월 

개정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0-08-23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큰아이 중학교 때 내가 남긴 리뷰다. 지금은 제대해서 복학생.

초딩 2020-08-2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애들을 북플 시킬까 고민 이에요 ㅎㅎㅎ

유부만두 2020-08-23 12:10   좋아요 1 | URL
아... 혹시 .... 오해하신 것 같아서 추가 설명 드리자면요,
큰애 중학교 때 제가 남긴 리뷰입니다;;;

복학생 큰 애는 책을 멀리하는 보통 청년이에요. ㅜ ㅜ

초딩 2020-08-23 12:19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잘 못 이해한 것을 딱 이야기 해주셨네요 ㅎㅎㅎ

파이버 2020-08-23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저도 어릴때 읽었었어요 오랜만에 다시 보니 반갑네요~ 유부만두님 감상을 읽으니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유부만두 2020-08-23 20:01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께도 추억 소환이 되었군요! ^^
 


작년에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사 읽고, 아아아아 


재미있다. 


합이 아주 잘 맞는 중국 무술을, 

아니 세계 종말 재난 영화를 (현실 말고) 본 기분이다. 


두 편이 있다. 늘 이쪽과 저쪽. 내가 선 곳은 어디인지 빨리 알아야한다. 하지만 내 편을 숨길지, 밝힐지는 상황마다 다르지. 목숨이 걸린 일이거든. 그런데 저쪽에 자꾸 마음이 간다면 어쩌지?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뚝심있게 약간은 촌스럽게 이야기한다. 믿고싶다. 


표지가 너무 널널하고 힐링 분위기라 안 읽을 뻔 했는데 다행이야. 정말. 이런 소설이 있었기에 지난 주말 광복절 그 현실 뉴스를 끄고 집안에 있을 수 있었지. 하지만 어쩐지 또다른 눈을 뜬 기분이 든다. 내가 어디 서 있는가. 


스포를 할 수가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여러분 한 번 읽어봐요. 그리고 저랑 비댓으로 책얘기 해요. 절 믿고 읽어보세요? 제발?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8-22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도 평이 좋던데, 유부만두 님도 이렇게 극찬을 하시니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유부만두 2020-08-22 12:29   좋아요 1 | URL
어깨에 힘 빼시고요, 한 호흡에 달리시면 됩니다.

주말에 읽기 좋은 블럭버스터 에스에푸 디재스터 스토리 되겠습니다.

어떠한 사전 정보 없이 책 첫장을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준비 되셨으면, 출발!

다락방 2020-08-22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의 발견으로 문목하를 꼽습니다.

유부만두 2020-08-22 13:42   좋아요 0 | URL
제겐 올해의 발견이에요!

다락방 2020-08-22 13:53   좋아요 2 | URL
누가 물어본 건 아니지만 저는 김초엽 보다 문목하! 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잠자냥 2020-08-22 14:11   좋아요 0 | URL
네 두 분 믿어보겠습니다... ㅋ
 

책 좋아하는 부모를 갖는다는 건 어떤걸까? 난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 환상이 종종 힘들 때도 만든다고 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딸 아이에게 "삐삐 롱스타킹" 책을 읽어주는데, 아이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눈꺼풀이 찢어져서 안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속상해했는데 아버지는 이 외눈박이 해적 같은 모습을 위로하기 위해서 해적 아버지를 둔 삐삐 이야기를 읽어준다. 하지만 아이는 의도와는 달리 삐삐에게 압도되어 겁을 집어먹고 만다. 할로윈 땐 옆집의 과한 호러 집 장식에 공포를 느끼는 아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슬리피 할로의 전설"을 읽어주기도 하는데 이는 아이가 더한 공포를 갖게 했다. 좀더 자란 아이는 하교길에 친구들과 동네의 귀신집으로 소문난 폐가에 들렀다 오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아이에게 "안녕, 스카우트, 오늘은 부 래들리 찾았니?" 라고 박자를 맞춰주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비밀의 화원"을 아이 침대 옆에 두면서 은근 압력을 넣기도 하고 아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다고 판단한 금박 장정의 (그것도 친척 아주머니의 선물이었던) 양장본 그림동화집을 오랫동안 다락방에 숨겨두었다. 파스타를 좋아해서 식사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조리하는 아버지는 가끔 엄마가 국수를 삶을 때 제대로 저으라고 계속 잔소리를 한다. 이에 짜증이 난 어머니는 "알았어, 빅 앤서니!" 라고 받아치는데 빅 앤서니는 동화 스트레가 노나 시리즈에 나오는 마녀의 얼뜨기 도제 이름이다. 저자가 4학년 땐 아이에게 어머니는 집 길건너 건물에 실비아 플라스가 살았었다고 얘기도 해준다. 그게 누군지 아이는 몰랐지만. 고등학생 딸아이가 첫사랑이 끝나고 침대에서 울자 그 옆에 슬쩍 "레베카"를 갖다 준다. 


포스팅을 많이 쓰곤 있지만 이 책이 그렇게 아주아주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언급한 책들 중 많은 것들을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어서 샘이 나긴 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이버 2020-08-21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부모님들이 굉장한 애서가였나봐요 모든 양육을 책과 연관 짓는게 신기하네요 아이입장에서는 좀 질릴 것 같기도 해요....

유부만두 2020-08-21 13:58   좋아요 1 | URL
그렇죠? 그래도 저 저자는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어쩜 독서에는 천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전 아이들이 책을 그닥 안 읽어서 이젠 포기했어요.

moonnight 2020-08-2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굉장한 부모님이네요 @_@;;;;;; 저런 분들이 제 부모님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실감 없지만-_- (지금의) 저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ㅎㅎ

제 조카들도 책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 것 같아요. 아기때부터 나름 노력했지만ㅎㅎ;;

사실 책보다 축구를 더 좋아한다는 게 기뻐요 홋홋^^

유부만두 2020-08-22 11:35   좋아요 0 | URL
아이와 같은 책을 읽고 얘기하는 ‘로망‘이 제겐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이미 예전에 포기했어요. 이젠 아이 숙제로, 아이 핑계로 산 동화, 청소년 도서를 제가 먼저 읽습니다. 요즘 청소년 도서는 제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거든요. 라떼엔 없던 문화죠.

조카들이 축구를 즐긴다니 멋진데요?
울리집 막내도 축구를 좋아해서 맨유 유니폼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줬더니 그걸 입고 집에서 방방 뛰고 있어요;;;;
 

영화 '토이스토리'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우리 집안에서는 장난감들이 우리가 방을 떠나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54)


난 엄마에게 삐삐 같은 여자애가 옆집으로 이사 오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었다. 엄마는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고, 삐삐가 토미와 아니카의 엄마를 (그리고 나를) 그리도 불안하게 만든 이유를 이해한다고 답했다. (69)


그해에 언니에게는 내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볼 때마다 귓가에서 '윌버'( "샬럿의 거미줄" 주인공 돼지)라고 속삭이는 고문 같은 버릇이 생겼다. (103)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에요?"는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 중 하나이다. (1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화분과 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