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은은하게 마음을 끌었다. 큰 아이 학교 숙제인데다 고전을 풀어쓴 책이라 읽고 싶지 않았는데, 달아놓은 책 제목이 내 마음을 끌었다. 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로, 사랑이 싹트고, 갈등이 시작되고, 안타까운 목숨이 사그라 들었다는 얘기다.
임란이 끝나고 황폐해진 왕가의 사택 정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던 선비 하나가 그 버려진 정원을 몰래 거닐다가 두 연인의 혼령을 만나 그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금지된 사랑은 이룰 수 없어 애닲고, 막다른 지경에서 죽음으로 연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데, 알고보니 둘은 이미 천상에서도 소문난 커플이었단다.여러 편 궁서체로 표기되어 나오는 시들이 주인공 운영과 그 벗들, 그리고 로미오 김진사의 성정을 드려냈을 법한테, 그 아름다움이 차마 다 표현되지 못한 느낌이라 안타깝다. 그리고, 이 연인들의 소위 아름답다는 사랑이 그닥 와닿지도 않고, 월담에 동침이 스스럼 없이 진행되는 것이 조금은 당황스럽다. 이 사랑의 걸림돌이 주인 안평대군이었다가 어느새 하인 특이로 바뀌는 것도 불편하고, 그 사랑의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 무슨 이유나 정당성이 있을까. 그저 잘못 떨어진 먹물 한 방울에, 스치는 옷자락에 시작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2011년 6월
개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