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00. 세 자매 (체호프)
86/400. 벚나무 동산 (체호프)
지극히 현실적인 극의 마무리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기적같은 문제의 해결은 없고, 관객(독자)을 위로하는 전개도 없다. 인물들은 자기 배역을 맡아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간다.
그들 중에는 뻔뻔하고 고민 없이 남을 착취하는 이들도 보이는데, 세 자매의 "순수한 여인" 나타샤야말로 현대의 '시월드, 처월드' 를 묘사할 때 나와도 어울릴 만하다. 멍청할 정도로 경제 문제에 어쩔줄 몰라하는 류보피 안드레예브나도 그저 아름답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유산을 낭비하고 정부와 프랑스로 도망가서 배신당하며 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옛 영지, 벚나무 동산을 빚에 쫓겨 팔아버리고 결국 다시 그 '놈팽이'에게 돌아가고만다. 그러면서 계속 입에 올리는 말은 "아름다운 벚나무 동산", "보석같은 내 딸". 구름 위에 둥실 떠다니는 이런 인물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가 체호프의 희곡에는 없다. 그렇다고 이런 구세대들에게 복수를 내리는 게 아니라, 출생이나 계급 개념이 아닌 "생겨먹은 대로" 살고 처신하는 사람들을 거리를 두고 지켜 보는 듯하다.
주말연속극에서 재벌2세를 구원하려는 캔디형 여주인공이 문제를 헤쳐나가는 설정은 없다. (아, 그런데 또 캔디는 알고보니 재벌의 잃어버린 아이였어...라는 게 황정음 케이스라네? 대한항공의 가족경영과 갑질 행태에 그리 분노하면서, 혈통에 집착하는 대중 정서는 티비 드라마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지) ...쨌건, 티비 드라마 (에 대한 네이버 기사를 읽는 것) 보다 몇 배는 재미있는 체호프를 읽었다 (고 자랑하며 급마무리).
안드레이: 모스크바에서 레스토랑의 드넓은 홀 안에 앉아 있으면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도 없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 그러면서도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질 않거든. 그런데 여기서는 모두가 아는 사람이고 모두가 나를 알아보지. 그런데도 낯설어... 낯설고 외로워. 페라폰트: 뭐라굽쇼? (세 자매, 제2막)
마샤: 오, 내 동생... 어떻게든 우린 자신의 삶을 살게 될 거야, 그게 어떤 삶이 될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안의 모든 일들이 너무 진부하고 뻔해 보이지. 하지만 너 자신이 사랑에 빠지면 남들은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어. 그때는 오로지 너 자신이 이 모든 일들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될거야... 내 사랑스러운 동생... 두 사람에게 고백했으니 이제 침묵할거야... 고골의 소설에 나오는 광인처럼... 이제부터 침묵...침묵 (세 자매, 제3막)
올가: 오, 사랑하는 동생들아, 우리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가는 거야! 음악이 저리도 명랑하고 즐겁게 울리는 걸 들으니, 우리가 왜 사는지, 왜 고통을 받는지 알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아... 그걸 알 수만 있다면, 알 수만 있다면! (세 자매, 제4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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